꿀 발린 S급 가이드 116화
‘가, 가이드! 가이드 어딨어!’
텅 빈 길드 사무실에 피투성이의 에스퍼 하나가 뛰쳐 들어왔다. 등에는 얼굴 절반이 문드러진 남자가 업혀 있었다. 다급한 상황임이 느껴지는 모습에 진효섭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스퍼는 진효섭을 보자마자 안도하며 다급히 말했다.
‘네가 BETEL의 가이드야? 당장 가이딩을 해. 급한 상황이야.’
‘네, 네……?’
‘급한 상황이라고!’
진효섭이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이딩하라는 사람은 분명 등에 업고 온 남자일 것이다.
하지만 심각한 상처를 입은 남자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처음 보는 상황에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그가 심각한 상태라는 건 알지만, 얼굴 절반이 무너진 사람을 두고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으나 진효섭은 꾹 참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처 입은 남자의 손을 잡았다. 피가 손에 묻고, 비릿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옆에서 그를 보던 에스퍼는 거친 욕설을 중얼거리며 멱살을 잡아챘다.
‘X발 새끼야, 지금 장난해?’
작은 몸이 남자의 손에 거칠게 흔들렸다.
‘에스퍼를 죽이려고 작정했냐고! 당장 옷 벗어.’
‘예, 예?’
‘이, 병신 같은 게…….’
에스퍼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효섭은 접촉 이상의 가이딩은 해 본 적 없었기에 몸을 떠는 것 말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에스퍼는 진효섭의 어린 외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죽어 가는 남자만이 그의 눈에 가득 찬 듯했다.
‘빨리하라고! 입으로라도 집어넣던가!’
‘으, 흐으…….’
죽은 것처럼 힘없이 누워 있는 남자의 벨트를 푸는 손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갑작스레 닥친 상황이 무서워 손이 벌벌 떨렸다.
수도원에서 나왔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분명 진효섭을 데리고 온 에스퍼는 별일 없을 거라고 했다. 그저 접촉으로 에스퍼들에게 힘을 넣어 주면 되는 일이라고.
그 말마따나 진효섭은 길드에서 2주 동안 접촉 가이딩만 했다. 생각과는 달랐지만 에스퍼들은 나쁘지 않아 행복하진 않더라도 괜찮다 생각되었다. 하지만 3주째, 길드 내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그러다 한 달이 되는 날, 그들은 단체로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면 이제껏 그랬듯 가이딩을 해 주면 된다는 말을 남기고 모두 떠났다. 길드 가이드들은 던전 앞에서 대기하기 위해 떠나고, 사무실에는 그렇게 진효섭 혼자만이 남았다.
그러다 보니 결단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흐으, 으……. 모, 못 하겠, 겠어요. 저, 저는…….’
생리적인 두려움이 치솟았다. 피가 묻어서 얼굴이 무너져 내린 남자는 심장이 뛰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서 더 무서웠다. 이게 맞는 건지도 몰라 자꾸만 버벅댔다. 힘이 제대로 흘러가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 멍청한 동양인 새끼가 진짜……!’
에스퍼는 진효섭이 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뒤통수를 짓눌러 목구멍을 열 생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전에 일이 터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누운 남자의 중심으로 바닥이 갈라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사무실이 흔들렸다.
‘형……! 안 돼!’
‘아악!’
창문들이 깨지고,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몸을 스치는 파편들에 진효섭은 머리를 감싼 채 덜덜 떨었다.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꼭 감은 눈을 뜨자 분명 사무실이었던 공간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 안에서 얼굴 절반이 무너진 남자가 진효섭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를 토한 그의 입이 움찔거렸다.
‘너 때문이야.’
그는 제 죽음이 진효섭 탓이라고 말했다.
아니란 말조차 못 하고 멍해 있는 사이, 강제로 어깨가 붙들려 몸이 돌아갔다. 남자를 등에 업고 왔던, 진효섭을 그토록 다그쳤던 에스퍼가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끓는 듯한 가래 섞인 목소리가 뭉개져서 귀를 때렸다.
‘네가 형을 죽였어.’
그의 눈에서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휙 뻗어진 손이 진효섭의 목을 잡아챘다.
‘이 살인자 새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바닥과 사무실의 천장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에스퍼와 진효섭을 집어삼켰다.
“헉!”
눈이 번쩍 뜨였다.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쾌적한 열차 이용을 위해 적극 협조 바라며, 자세한 사항은 역사 안내 게시판 포스터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흘러나오는 방송에 진효섭이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직도 그가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서슬이 퍼런 눈과 섬뜩한 얼굴에 진효섭은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디트리…….”
아직도 쿵쿵 뛰는 심장은 진효섭이 아직도 그에게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그가 나오는 꿈은 미국을 떠난 이후로 한 번도 꾼 적이 없었는데…….’
잊으려는 노력이 빛을 발한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던 듯했다.
진효섭이 제 심장 위를 꾹 눌렀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었음에도 디트리는 여전히 진효섭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어쩌면 이 상처가 남아 있는 한, 절대로 그를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숨과 함께 창문 밖을 향해 고갤 돌리니 너른 들판이 보였다. 출발할 때와는 달리 건물 하나 없이 밭투성이인 것을 미루어 다 온 것 같았다. 나름 한나절이나 걸렸는데, 눈을 뜨자마자 도착해 있어서 그런지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마 불편한 몸 상태로 깊게 잠들어 악몽까지 불러들였던 것 같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고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열차 안에 음악 소리가 가득 차자 진효섭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금 마음이 바빠져 이어지는 안내 방송을 뒤로하고, 진효섭은 가방을 메고 열차에서 내렸다. 발걸음이 바빴으나 이상하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새벽에 시골에 도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도착했다…….”
진효섭은 기차역의 자그마한 표지판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허름했다. 다소 멍한 표정을 지은 진효섭이 주위를 둘러봤다. 휑한 것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같았다. 물론 그래서 고른 거였지만.
“얼른 움직여야지.”
마음이 허전해서인지 괜스레 추운 듯해 진효섭은 가방을 추켜올리곤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꽤 늦은 탓에 제대로 된 장소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몸을 쉴 만한 곳이 필요했다. 휴대폰이라도 있었으면 어디든 찾아 들어갈 수 있으련만. 집에 놓고 온 휴대폰이 새삼 아쉬웠다.
‘그렇다고 이 밤에 휴대폰을 개통할 수도 없고…….’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런 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바빴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는지 떠나야지만 이 괴로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던 까닭이다.
대책이 없었기에 진효섭은 계속해서 걸었다. 어딘지도 모른 채 정처 없이 걷는 것에 가까웠지만, 이러다 보면 하루 이틀 정도는 몸을 쉴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생각보다 만만찮았다.
“곡성 옆이라서 그런가…….”
보통 게이트는 생겼던 곳에 또다시 생기는 특성이 있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곡성이었다.
실제로 최근에도 세 개의 게이트가 곡성에서 나타났으며, 크고 작은 게이트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벌판이 됐고, 그 주위 역시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았다. 게이트는 일반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주거지를 옮긴 것이다.
‘그래도 여긴 게이트가 열렸던 적도 없고, 위험이 비교적 적은 곳이라 들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진효섭은 아무리 걸어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아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걷다 말고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포기 선언을 했다. 그러곤 지붕만 있으면 됐다 싶어서, 지나쳐 왔던 쓰러져 가는 허름한 정자로 돌아갔다. 먼지투성이였지만 가져온 손수건으로 닦고 나니 아침까지 몸을 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아…….”
깊은숨을 쉰 진효섭이 가방을 베개 삼아 정자에 누웠다. 두 다리를 뻗기 어려워 몸을 작게 만 모습이 거지가 혀를 찼을 만큼 불쌍해 보였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자리가 불편해서인지 열차에서 너무 깊은 잠을 자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효섭은 몸을 옆으로 굴려 뻥 뚫린 틈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봤다. 주위가 새까매서일까, 아니면 달이 어두워서일까. 별이 유난히 밝았다.
‘진효섭 씨는…… 귀엽네요.’
지금 순간마저도 안단테가 떠올랐다. 어딜 가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이름에 진효섭은 체념했다.
애초에 하루 이틀로 잊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다. 분명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은 힘들겠지만, 곁에 있는 것보단 이게 나으리라 판단했으니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