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14화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뭔데요? 다 말해 줄게요!’
‘혹시, 그저께 형을 가이딩한 게…… 서연 가이드입니까?’
‘그저께요? 아아, 네. 그랬어요.’
‘……접촉 가이딩이었습니까?’
‘네.’
전날, 안단테가 했던 설명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접촉 가이딩을 받았다 설명했고, 서연 또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진효섭이 느낀 안단테의 몸 상태는 접촉 가이딩으로 급한 불만 끈 게 아니었다. 그의 품은 분명 진득하게 관계를 맺은 다음 날처럼 편안했다.
또한 서연이 거짓말을 하고 있냐면, 그도 아니다. 그녀는 던전에 다녀온 안단테를 접촉으로 가이딩했으면서 거친지 거칠지 않은지만 물었으니까. 역가이딩에 대해서 모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
‘또 다른 가이드가 있는 거야. 서연 가이드가 가이딩을 했을 당시, 역가이딩을 느끼지 않을 만큼 가이딩이 충만했던 거지…….’
진효섭에게 소개해야 할 서연과는 접촉 가이딩만 했겠지만, 다른 가이드와는 접촉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이드는 한두 명이 아닐 수도 있다.
‘형은 가벼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고 유진에게 단언했건만. 아무래도 안단테를 모르는 건 유진이 아니라 자신이었나 보다. 그를 향한 믿음이 와장창 부서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달콤한 얼굴로 진실을 쏙 빼둔 채 설명을 이어 간 안단테는 타인을 속이는 데 너무 능했다. 이제 그의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어졌다.
‘효섭아.’
환히 웃는 안단테를 붙들고 서럽게 외치고 싶었다.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았습니까? 그와 끝까지 가신 겁니까? 이제는 제가 아니라도 괜찮은 겁니까?’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질투와 절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렇게 되면 제가 있을 자리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더는 있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가이딩도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다면, 다른 사람과도 가능하다면, 어떻게 곁에 있습니까. 유일한 장점도 사라진 제가, 이제 곁에 있으면 노아피에 걸림돌만 된다는데…… 어떻게…… 어떻게 옆에 있을 수 있습니까.’
SS급 던전이 끝나도 다를 게 없을 거라는 믿음은 부질없었고, 유일하니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간신히 부여잡은 희망은 끊어졌다.
기다렸던 만큼 아팠다. 기대했던 만큼 힘들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안은 고민이 너무나도 컸다. 상처받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숨이 가빴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안 그러고 싶었는데, 안단테가 미워졌다. 마음 한 자락 허락하지 않는 그가 너무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고 다그쳐 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 심지어 그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다. 진효섭에게 올 수 없었으니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았고, 접촉으로는 안 되니 점막 가이딩을 행했으리라.
그제야 진효섭은 알아차렸다. 좋아하니까 곁에 있겠다는 마음과 그가 돌아봐 줄 수도 있으니 기다리겠다는 다짐은 안일한 생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필요로 곁에 두는 사람과 사랑해서 곁에 있는 사람. 그 감정의 간극은 그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괴로울 것이다.
앞길이 낭떠러지라는 게 뻔히 보이는데, 더 이상 걸어갈 수는 없었다. 녹슨 동아줄에 의지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겁쟁이였다.
혼자만의 사랑이 된 첫사랑. 이 이상 더 아프고, 더 괴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게 남아서 그의 발목을 붙든 채 빚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 질척거림에 안단테가 질려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면…… 지금보다 더 괴로울 게 분명하다. 그러니, 지금이었다. 지금이 가장 깔끔하게 끝맺을 수 있는 순간이다. 지금이라면 나중에 떠올리더라도 첫사랑이 나쁘지 않았다고 자위할 수 있을 것이다.
“후…….”
진효섭은 결심을 끝낸 후 빠르게 몸을 씻고 밖으로 나섰다. 추위가 다 가시지 않았는지, 밖으로 나오니 몸이 좀 떨렸다. 머리를 털어 내고 어젯밤 스스로 벗어 던진 옷을 꿰입는 그는 꼼꼼하고도 빨랐다.
옷을 다 입은 진효섭은 곧장 방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본인의 흔적을 모두 없애고 싶은 듯 찬찬히 정리해 나갔다. 이불은 어젯밤의 일이 무색하게 새것으로 교체해 둬서 끝을 맞춰 펼쳐 두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여벌은 가방에 넣기에 문제가 없었다.
쭉 정리를 이어 간 진효섭은 마지막으로 제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은 방을 살폈다. 만족스러울 만큼 깨끗해진 집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미련도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았다.
진효섭은 바닥에 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멨다. 띠릭- 도어록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눈알이 타는 듯한 작열감으로 아렸다. 어제는 한순간도 메마르지 않았던 눈이 오늘은 건조하기만 했다.
“하아…….”
평화로운 거리가 마음을 조금 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길지 않았던 만큼, 그를 잊는 것도 빠를 테니까.
진효섭은 겉옷을 더 꽉 여미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그래서, LEOM 길드로 이름을 바꾸지 않겠다고?”
“응. 그러려고.”
미국 대표 길드의 단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처음에는 꽤 긍정적인 것 같았는데. 분명 네 길드원들도 웬만하면 LEOM 길드의 재건과 함께 길드명을 바꾼다고 하지 않았나?”
“응. 그랬는데…… 어제 마음을 바꿨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남은 생을 보내고 싶어졌거든.”
“무슨 그런 노인네 같은 소리를……. 아니, 근데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랭킹 싸움도? 던전도?”
“어. 그냥 C급 길드 노아피로서 살아갈 거야. 고양이나 찾아 주고, 유치원에서 딸랑이나 흔들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딸랑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정확하게 이해했네.”
“흠……. 그건 좀 아쉬운 선택인걸. 오웬이라는 인재가 앞으로 세상에 많은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안단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10년 사이에 거짓말이 늘었네? 내가 없으면 너희가 가져가는 게 줄어들 테니 슬픈 거면서, 아쉬운 척은.”
“그럴 리가. SS급 에스퍼는 귀해.”
“귀하기는. 시한폭탄처럼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무서운 괴물일 뿐이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 역시…… 아, 지금은 좀 다르겠네.”
진효섭이 떠올라 안단테는 싱글벙글 웃었다. 누가 봐도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인지라, 미국 길드의 단장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뭔가, 많이 부드러워졌는걸.”
“아, 역시? 이게 다 연애를 해서 그런가 봐.”
안단테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하니까 다시 보고 싶어졌네.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LEOM의 재건 건은 없던 일로 해 줘. 그리고 너도 그렇게 삭막하게 살지 말고 연애라도 해. 수염도 좀 깎고. 쯧쯧.”
“…….”
표정이 구겨진 에스퍼를 두고 안단테는 두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차를 계산해 보니 지금 시간이면 한국은 점심쯤이었다.
‘일어났으려나?’
온 문자를 확인해 봤지만, 알림은 0개였다. 안단테는 자신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분명 본 흔적은 있는데, 답장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아직 자나?”
하긴. 어젯밤에 좀 무리하긴 했다. 얼마나 달라붙어서 조르던지. 카스트라토가 오더라도 벌떡 세울 만큼 야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데, 그렇게 섹시해서 어쩌라는 건지.
안단테는 기분 좋은 얼굴로 흥얼대며 거리로 향했다.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진효섭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잔뜩 사 새로운 사무실의 정원에서 다 같이 바비큐 파티를 할 생각이었다. 상그리아를 만들어서 불멍이라도 때리면 평화로우리라. LEOM의 재건이든 뭐든 다 때려치울 만큼 그 행복이 더 컸다.
‘음, 뭐로 사 갈까.’
킬바사로 유명한 가게로 찾아갈까. 밤이 늦어 이미 어지간한 가게는 닫았을 테니 동선만 계산해 뒀다 날이 밝는 대로 사 가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단테의 느긋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후 네 시, 다섯 시, 여섯 시…… 한국 시각으로는 저녁이 되어 가고, 미국은 이른 아침이 밝아 오는데도 진효섭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분명 잠에서 깨고도 남을 시간인데.
“어디 아픈가?”
걱정스러움에 안단테는 진효섭에게 다시 연락을 넣었다.
[자기야. 왜 연락이 없어요? 혹시 어디 안 좋아요?]
하지만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곧장 전화를 걸어 봤지만 돌아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여자의 안내 멘트뿐이었다.
“뭐야. 진짜 아픈 건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연락을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안단테는 곧바로 플랫에게 연락을 넣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플랫이 전화를 받았다.
-뭐예요.
“지금 당장 내 집에 가서 효섭이 상태 확인해 봐. 연락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