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07화
“……되게 직설적이네.”
“제가 좀 그렇습니다.”
비뚜름하니 고개를 기울인 안단테가 미소와는 달리 서늘한 말을 뱉었다.
“솔직히, 말을 질질 끄는 것도 별로고 원하는 게 뻔한데 튕기는 것도 좀 별로라서. 원하는 걸 말 안 하면 그냥 일어날까 생각 중인데, 그쪽은 어떻게 생각해요?”
“…….”
여자의 표정이 조금 굳었으나 이내 유들유들하게 펴졌다. 흘기는 눈꼬리가 치켜 있었지만 표독스러움이 감돌지는 않았다. 여전히 안단테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의미다.
“설득하러 온 줄 알았는데 너무하네요. 그래도 뭐…… 나도 원하는 것만 말하면 편하죠.”
가이드는 턱을 치켜들고 조건을 제시했다.
“날 LEOM 길드의 가이드로 받아 줘요.”
“그건 곤란한데.”
“왜요? 어렵지 않은 거잖아요.”
간단한 조건이긴 했다. 하지만 안단테는 그 조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분에 차고 넘치는 가이드가 있어서 곤란하네요.”
“아……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지금의 노아피에 가이드가 있다는 정보. 가이드들 사이에 아름아름 퍼져 있는 소문이었다. 물론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반반으로 나뉘었고,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여자는 소문을 믿지 않는 파였지만, 사실이라고 해도 별문제 없었다.
“그래도 난 상관없어요. 길드면 가이드 두셋 정도는 데리고 있잖아요.”
“음, 하지만 나는 길드 정원을 여덟 명으로 선 그어 둔 터라. 노아피니까, 이해하죠?”
조금도 이해되지 않을 이상한 이유에 가이드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이 정도로 포기할 거였으면 쌍둥이가 다른 것들을 조건으로 제안할 때 이미 넘어갔을 것이다.
“정 그러면, 딱 두 달만 가이드로 받아 주는 건 어때요? 그 뒤에는 나가라고 하면 바로 나갈게요.”
“두 달?”
안단테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히 올라갔다. 제안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노아피에 있으려고 할 줄 알았더니.
“네. 딱 두 달이요. 게다가 나, 한국인이라서 특별히 거주지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요.”
“흐음…….”
고민에 빠진 척하며 안단테는 눈앞의 가이드를 빤히 쳐다봤다.
잔뜩 기대감에 찬 표정. 두 달 만에 노아피에 속할 수 있다 확신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어느 쪽이든 단 두 달이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다. 두 달이든 1년이든, 어차피 그녀가 노아피의 가이드로 자리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즉 귀찮은 건 두 달 이상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었다.
‘효섭이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그게 가장 거슬렸다. 또 다른 가이드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분명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책임의 화살을 본인에게 돌릴 것이다. 제 능력이 부족해서 새로운 가이드를 들인 걸까 고민할 게 뻔했다.
고민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도 깨물고 싶을 만큼 귀엽겠지만…… 역시 눈물은 이불 위에서가 나을 듯했다. 이제 해야 할 일도 끝났으니 안단테는 온종일 진효섭과 진득한 연애나 하고 싶었다. SS급 던전이 나타나기 전까지 했던 그런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실험은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는 실험하기에 괜찮은 인재였다. 아직 두 사람이 더 있기는 하지만, 웬만하면 세 명 모두에게 실험하고 싶었던지라 이런 조건이라면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2년도 아니고 두 달. 만약 노아피의 가이드가 되리라는 헛된 희망을 안고 들어오는 거라면, 두 달도 되지 않아서 스스로 포기할 터. 딱 원하는 것만 뽑아 먹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정말 두 달이면 됩니까?”
“네! 두 달!”
가이드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내심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것 같았다. 노아피에서는 짜증 날 일만 생길 텐데, 뭐가 저리 기쁜지.
‘아무튼 멍청한 게 문제라니까.’
다소 냉소적인 속마음과는 달리 안단테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럼 이렇게 거래하도록 하죠. 두 달의 인연이지만 잘 부탁합니다, 서연 씨.”
“네!”
서연이라 불린 가이드는 냅다 계약서에 사인했다. 원하는 걸 얻어서인지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실험은 언제부터 할 거예요?”
“그거야, 원하는 대로.”
“그럼 지금부터 해요.”
말을 마치자마자 서연은 곧바로 안단테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가이딩 증폭기를 잡고 뾰족한 부분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날카로운 날이 살을 가르고 피가 흘러나왔다. 증폭기 안에 피가 차자 미미한 빛이 일었다.
‘파란색?’
안단테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제껏 A급이나 B급들은 크리스털에 광채만 돌았는데, S급은 역시 뭔가가 달랐다. 좋은 징조였다.
파란색이 도는 가이딩 증폭기를 안단테는 가이드의 손과 함께 마주 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서연은 묘하게 들뜬 표정을 지었다. 깜빡이는 속눈썹에 뿌연 피부, 그리고 번들거리는 핑크빛 입술이 튀었다. 훑는 듯한 안단테의 눈빛에 서연은 기대 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난, 키스 가이딩으로 실험해도 좋은데.”
사실 그 이상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안단테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굳이 거절할 필요 없는 제안이었다. 기왕 실험하는 거라면, 역가이딩 충동을 최대한 느끼지 않을 방향으로 하면 좋을 터.
하지만 썩 끌리지 않았다. 손이 가질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영 심드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안단테는 우습게도 이 상황에서 진효섭을 떠올려 버렸다. 차라리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효섭이었으면 어땠을까. 그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 조건반사처럼 입안에 침이 고였다. 당장에라도 뺨을 쥐고 키스를 퍼붓는 상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것 참…….’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평생을 바라 왔던 물건이 지금 눈앞에 있다. 난잡한 짓이라도 해서 실험을 이어 가야 할 상황에서 진효섭을 떠올리다니. 안단테는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안단테에게 있어 진효섭의 가치는 오로지 가이딩에 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끌리는 것도, 모두 상성이 맞는 가이드여서. 그렇기에 그를 향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깨달았다. 그런 생각에 큰 구멍이 생겼다는 걸. 왜 대체재가 생긴 지금도 그는 진효섭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확실하지 않아서?’
실험을 이어 갔지만 가이딩은 여전히 부족했고, 가이딩 증폭기를 얻었다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도움 될지 확신이 없다. 그렇기에 여전히 진효섭의 체온을 그리게 되는 건가.
‘……아니야.’
어째서인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렬히 들었다. 이용하려고 들였을 뿐인 가이드가 생각보다 더 달콤해서인가. 그 단맛에 제대로 중독된 것 같았다.
안단테는 머릿속에 가득 찬 진효섭을 곱씹어 생각하며 눈을 깜빡이는 가이드의 뺨을 쓸었다. 엉망인 몸 상태로 가이드를 앞에 두고도 가이딩의 충동이 들지 않았다.
‘내가 생각보다 진효섭을 더 마음에 들어 하나 본데.’
이쯤 되니 마음이 생각보다 더 기울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물론 부정할 마음도 딱히 없지만.
다행히 진효섭과는 이미 이어진 인연이다. 속마음이 어떠했든 그들은 사이가 좋았고, 연인으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분명 자신은 진효섭 앞에서 사랑에 빠진 완벽한 연인일 터. 뒤늦게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어디에도 없다. 진효섭이 먼저 밀어내지 않는 이상은.
‘효섭이가 날 밀어내? 그럴 일이야 절대 없겠지.’
진효섭이 안단테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건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이딩 증폭기에 대해서는 숨길까.’
안쓰럽게 생각한다면, 가이드의 본능이 치고 올라올 것이다. 안 그래도 안단테의 정체 때문에 당황스러울 텐데, 여린 모습을 보이면 좋으리라. 그는 연민에 약해 보였으니까.
자신을 걱정해서 발을 동동 굴릴 진효섭을 떠올리니, 안단테는 안쓰러우면서 동시에 뿌듯해졌다. 치유해 주기 위해 다급히 손을 맞잡아 올 그를 생각하니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저기, 오웬?”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을 좀 하느라.”
안단테는 그녀의 뺨에서 손을 뗀 채 빙그레 웃었다.
“우리 그냥 접촉 가이딩으로 하죠. 내가 립스틱 알레르기가 있어서.”
가이드의 표정이 조금 굳었지만 안단테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진효섭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는 다른 것이 발 들일 틈이 없었다.
‘빨리 보고 싶네.’
그저 진효섭이 생각보다 더 그리워졌을 뿐이다.
* * *
“끝났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진효섭은 슬슬 무거워지는 것 같은 어깨를 느끼며 시계를 바라봤다. 3일이라는 카운트다운이 생기니 습관처럼 시계를 보게 됐다. 빠르다고 생각했던 3일은 기다림의 마음 때문인지 느리게 흘러갔다.
‘그래도 이제 하루 남았어.’
내일이면 노아피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때, 밖으로 나갈 줄 알았던 에스퍼가 진효섭을 불렀다.
“진효섭 가이드. 이거 드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진효섭은 조금 떨떠름하게 에스퍼가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밀크 초콜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