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05화
어느새 안단테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그를 생각하자마자 입안이 달아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진효섭은 멀어질수록 더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얼마나 참았는지. 그와 연락하게 되면 일이고 뭐고 달려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달콤해 가지고는.”
안단테의 중얼거림에 체르니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 새끼 저거 뭐라는 거지, 하는 속마음이 대놓고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안단테는 그런 체르니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 그럼 간다.”
어차피 곧이다. 남은 일이라고 해 봤자 앞으로 일주일 내로 끝이 날 터. 진효섭과의 만남도 조금만 있으면 눈앞으로 다가오겠지. 비록 지금은 잠깐 떨어져 있게 되었지만,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두 번 다시 이렇게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음, 만나면 일주일은 자기 집에서 살아야겠다.’
단 하루도 진효섭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의 베개에 머리를 묻는 거다. 몸에는 그의 향이 밴 이불을 두른 뒤 품에 한가득 들어오는 진효섭을 안고 있다면…… 그러면, 이제껏 겪어 봤던 어떠한 휴일보다도 즐거울 게 분명하다.
안단테는 그날을 기대하며 흥얼흥얼 즐겁게 밖으로 나섰다.
‘선물이라도 챙겨 볼까.’
잘 기다리고 있을 진효섭에게 줄 상이라고 생각하니 흥미 없는 물건을 둘러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마음이 이상하게 들떴다.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 * *
[오늘은 휴무일이에요.]
진효섭은 오전에 온 유진의 문자에 시무룩해졌다. 쉬라는 문자가 이렇게나 우울할 수가 없었다. 국가안보국에서 나름 배려한다고 준 휴일일 텐데.
“하아…….”
한숨을 푹 쉰 진효섭은 달력을 확인했다. 국가안보국에 온 지 벌써 3주째였다. 하지만 노아피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분명 유진은 미국에서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는데, 왜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는 걸까.
이럴 때 짧은 문자 한 통이라도 보내 주면 좋으련만. 그럴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쁜 건지 걱정이 드문드문 치켜들었다. 물론 그 안에는 약간의 불안도 껴 있었다.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으려니 부정적인 생각만 자꾸 들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안단테와 관련되면 진효섭의 마음은 줏대라는 게 없어졌다. 슬펐다가도 좋았고, 행복했다가도 슬펐고,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기대감에 부풀었다가도 불안했다. 괜찮았다가, 힘들었다가, 아팠다가. 왜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날뛰는지도 모른 채 그저 손끝만 매만졌다.
한없이 정적인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진효섭은 결국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동안 최대한 멀리하려고 했지만, 오늘처럼 잡생각이 많은 날에는 차라리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좀 더 나을 것 같았다.
[오웬]
주춤대는 손이 적어 낸 것은 항상 그러했듯, 같았다.
검색을 이어 가자 근 일주일 동안은 보지 못해 새로운 게시글이 많았다. 하지만 눌러 보면 다 비슷했다. 오웬에 대한 이야기는 SS급 던전으로 시작해서 언제나 아노와의 뜨거운 사랑으로 끝을 맺었다. 아노의 찬사는 덤이었다.
진효섭은 시무룩해하면서도 계속해 게시글들을 눌렀다. 상처 입을 걸 알면서도 궁금증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대로 최대한 딱딱해 보이는 게시글을 클릭했다. 하지만 오웬의 이름이 걸린 게시글의 주된 내용은 아노 가이드에 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아노의 사진까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하얀 피부에 따스한 색의 체모, 아스라이 질 것만 같은 신비로운 외모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사람이 실존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안단테와 느낌이 비슷해서 그런지 나란히 선 모습을 상상하는 게 쉬웠다. 그리고, 상상 속 그들은 매우 잘 어울렸다.
[오웬이 두 가지 능력으로 SS급이 됐던 것처럼, 아노 역시 두 가지 능력인 것을 보면 두 사람은 타고난 운명으로 보인다. 한 사람의 부재로 그것이 깨어진 것은 그들을 보는 입장으로도 마음이 찢어진다.
혼자 남은 오웬과 먼저 고인이 된 아노 두 사람에게 조의를 표한다.]
진효섭은 결국 게시글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휴대폰을 껐다.
“하아…….”
아노의 찬사는 매번 진효섭과의 차이를 뚜렷하게 만들었다. 이래서 이제껏 미뤄 왔던 거였는데, 다시금 확신하게 되니 기분이 바닥을 쳤다. 역시 휴대폰을 보는 건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낮잠이라도 자야 하나…….”
등을 소파에 파묻듯이 기대고 있을 때였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진효섭 가이드, 들어가도 될까요.”
“아, 예. 물론입니다.”
진효섭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가짐을 바로 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는 신해창의 것이었다.
“쉬고 계셨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할 일이 없어서 무료했던 터라…….”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제가 지금 바로 가이딩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예?”
진효섭으로서는 의외의 말이었기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해창은 유진의 본디지 파트너다. 즉, 굳이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을 필요는 없을 텐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떨떠름한 진효섭의 표정에 신해창이 이유를 설명했다.
“유진이 이번에 잦은 가이딩으로 심한 몸살감기를 앓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SS급 던전을 오가는 터라 가이딩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접촉 가이딩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 예.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가능한 정도까지만 해 주십시오.”
상황을 이해한 진효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손을 주십시오.”
신해창이 덤덤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신해창 에스퍼와는 처음이네.’
많이 만났는데 이렇게 가이딩을 앞두고 앉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어색하고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진효섭은 맞잡은 손으로 힘을 흘러 넣었다. 신해창은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진효섭의 손등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는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고, 진효섭은 가이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A급만 이어서 만난 터라 오랜만에 S급을 가이딩하고 보니 확실히 그 차이가 느껴졌다. 안단테만큼은 아니지만 노아피의 에스퍼들을 가이딩해 줄 때 느꼈던 기운과 비슷했다.
‘생각보다 몸이 안 좋네.’
SS급 던전의 여파로 국가안보국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몸 상태를 보아하니 사실인 듯했다.
진효섭은 평소보다 더 힘을 끌어 올려 불어 넣었다. 그러자 신해창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미약한 변화였지만 항상 무표정이었던 그였기에 그 작은 차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불편하진 않습니다. 다만…… 생각보다 훨씬 차가워서 놀랐을 뿐입니다.”
“아……. 예. 제힘은 다른 가이드랑 다르게 유독 차갑다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진효섭은 난감해하며 마주 잡지 않은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차가운 가이딩. 자주 듣던 이야기였다. 그의 힘은 어째서인지 상쾌함보다 에일 듯한 서늘함에 가깝다고 했다.
“기분 나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왜 기분 나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그거야…….”
과거에 자주 들었던지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진효섭이 우물우물 말을 잇지 못하자 신해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이드의 힘이 차갑게 느껴진다는 건, 그만큼 힘의 순도가 높다는 뜻입니다.”
“……예?”
“에스퍼가 능력의 파괴력으로서 등급이 책정된다면, 가이드는 가이딩을 할 수 있는 힘의 양과 질로 나눕니다. 차갑다는 건, 그만큼 진효섭 가이드의 능력이 좋고 순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니 자랑스럽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신해창은 심장께로 흘러들어 오는 진효섭의 힘을 찬찬히 느끼며 이어 말했다.
“또한 아무리 차갑다고 해도 결국 에스퍼의 몸에 가득 찬 독을 밀어 주는 행위입니다. 민트 중독자들에게 민트를 들이붓는다고 해서 눈살을 찌푸릴 일 따위는 없을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미, 민트 중독자요?”
“비유가 그렇다는 겁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듯 신해창은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훨씬 편해 보였다.
“그보다, 유진에게 노아피가 미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정보는 전해 들으셨습니까.”
“아, 예. 조만간 한국에 들어온다고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신해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이후로 다시 종적을 감췄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일 겁니다. 제 예상으로는 3일 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3일이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 날에 진효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를 때는 그렇게나 불안했던 마음이 3일 후라고 기간이 정해지니 한결 편안해졌다.
신해창은 한층 밝아진 진효섭을 빤히 보며 물었다.
“기대되십니까.”
“기대라기보다는…… 기쁩니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렸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신해창은 잠깐 침묵하다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리, 기대하실 상황이 아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