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97화
그들은 아무리 수도원에서 빼돌린 가이드라지만 S급인 진효섭을 대우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갑작스레 생긴 SS급 던전. 길드의 대다수 에스퍼가 참여했고, 진효섭은 그 안에서 나올 그들의 가이딩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옥의 시발점이었다. 들어갔던 길드원은 거의 다 죽었고, 나온 에스퍼는 단 두 명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S급 가이드는 진효섭, 혼자였다. 그 뒤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다 죽어 버렸으니까.
진효섭은 퍼석한 제 뺨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손바닥은 냉병 걸린 사람처럼 차가운데 반면, 뺨은 뜨거웠다.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의미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오랫동안 긴장해서 그런 듯했다.
노아피가 돌아오면 가이딩을 해 줘야 하니, 푹 쉬어 몸을 잘 관리해야 했으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압박을 느낄수록 잠은 더 멀리 달아나 버렸다. 눈두덩을 비비며 진효섭이 한숨을 쉬었다.
“저기, 진효섭 가이드. 방금 했던 말-”
유진이 무어라 말을 더 붙이려고 했을 때였다. 보고 있던 TV 화면이 일그러졌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전파에 문제라도 생긴 듯 깜빡였다.
“응? 뭐야. 전파에 문제라도 생겼나?”
의아했던 것도 잠시, 화면이 다른 영상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3일 전에 봤던 노아피 길드원이었다. 진효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렸다.
“마, 말도 안 돼.”
절대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장면이 영상이 되어 TV 속에 떠올랐다. 체르니, 플랫, 코다, 신디, 쌍둥이까지 모두가 죽어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게 뭐야……?”
유진이 헛구역질을 하며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끔찍한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있기 싫다는 마음이 발로한 행동이었다.
“잠깐-!”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게 있어 진효섭이 그를 막으려 들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다른 채널을 틀어도 보이는 화면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곳이든 하나같이 똑같은 영상만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진효섭은 멍하니 화면 속 노아피 길드원을 바라봤다. 정말 그들이었다. 어째서인지 지금 영상석으로 찍고 있을 게 분명한 장면이 생방송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전부 죽었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히고 사고가 정지했다. 진효섭은 숨도 쉬지 못하고 뚫어져라 그들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미동이 있지 않을까. 단순히 기절하듯 쓰러진 게 아닐까. 그렇게 빌며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죽어 있는 게 맞았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려던 때, 누군가가 화면 중심에 나타났다. 가면을 써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진효섭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안단테다. 그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주위로 몇몇이 몸에 묻은 괴이한 것들을 털어 내며 다가왔다.
[“아오, 씨. 기분 더러워 죽는 줄 알았네.”
“이제 다 끝난 거 맞죠?”
“아마도.”
“근데 왜 이것들이 안 사라지지? 이제 보스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없어질 거야.”]
안단테가 보란 듯이 발밑에 있는 체르니 얼굴을 으깨 버렸다. 그러자 길드원들의 모습을 하고 쓰러져 있던 괴물이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 단장님. 남의 얼굴을 그렇게…….”
“진짜 네 얼굴도 아니잖아?”]
체르니가 그래도 너무하다며 투덜댔다. 영상 속 그들은 정말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진효섭은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았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드디어 숨은 방이네.”
“긴장 붙들어 매. 또 여기서 자빠지고 뒤로 물러나면 두 번은 없으니까.”]
노아피 에스퍼들은 언제나 그랬듯 유들유들한 말투였지만,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안단테를 제외하면 모두 반쯤 깨부숴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불편했는지, 아니면 이제 본격적이라는 건지 그중 체르니가 귀찮다는 듯 대충 가면을 벗어 버렸다.
동시에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후드 역시 젖혀지며 붉은 머리카락이 허리께에서 흔들렸다. 손끝부터 뺨의 반절이 전부 검은 문양으로 가득했다. 뾰족한 귀와 금안이 합쳐지니 스산한 게, 누가 봐도 C급이라고는 볼 수 없는 위압감이 흘렀다. 그만 제약을 걸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나타날 것 같은데요?”]
그 옆에서 플랫이 손에 든 검을 들어 올리자마자 텅 빈 허공이 갈라졌다. 이윽고, 허공에 붙은 붙박이장처럼 문이 양옆으로 스르륵 열리자 안에서부터 노란 백열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큰 상처는 없었지만, 온몸이 피에 절어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갈까요?”
“그러든가.”
“오케이.”]
플랫이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지이익- 끌리는 검 끝이 바닥에 짙은 금을 남겼다. 그 뒤를 하나둘 길드원이 따랐다. 총 일곱 명. 낙오된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뒤따라가려던 안단테가 갑자기 영상석으로 다시 돌아왔다. 무미건조한 가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걸 잊을 뻔했네. 미안. 안을 보여 준다는 게 약속이었는데, 그치?”]
안단테는 장난스럽게 영상석을 들어 올렸다. 마치 1인 방송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효섭은 어쩐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가면 안에서 안단테가 웃음을 짓고 있을 것 같다 생각했다. 아마 아주 즐거운 웃음일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을 테니까.
흔들리는 영상 속에는 앞서 나가는 길드원과 양쪽에 이어진 어둑한 백열등이 보였다. 노란빛을 두고 그들은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걸어갔다.
화면을 보며 진효섭은 그 어떤 말도 쉽사리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 알고 있다면 더 두려워해야 한다. 한 번 실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제 능력으로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뜻하므로.
그런데도 그들은 기꺼워하고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놔두고 왔기에?
진효섭은 그들에게서 조금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옆에 있던 유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유진은 아까 봤던 것들이 다소 충격적이었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어 말했다.
“노아피는 예전에 SS급 던전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길드라고 했었죠? 그럼 뒷세계로 가기 전에는 엄청 유명한 길드였다는 건데……. 왜 다 모르는 얼굴이지?”
“언론에 알리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우리 길드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좀 그래요. 국가안보국은 웬만한 유명 에스퍼는 다 꿰고 있으니까.”
“……이상한 겁니까?”
“이상하다기보다 신기해서요. 모를 리가 없는데…….”
그들이 유명하지 않은 길드였을 가능성은 없었다. SS급 던전에 들어갔던 길드 중 유명하지 않은 길드는 없었으니까.
“대체 어떤 길드였을까요? 진효섭 가이드는 알아요?”
“아뇨. 저도 모릅니다.”
유진은 진효섭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한숨을 쉬었다.
“아, 해창이는 뭔가 아는 눈치였는데……. 워낙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했단 말이죠. 궁금한데.”
“신해창 에스퍼가 알고 있습니까?”
“그렇겠죠. 걔는 안단테랑 직접 협상했으니까. 정체 정도는 밝혀야 믿고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진효섭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유진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잠깐. 신해창이 믿고 보낸다고? 정체만 듣고?”
얼굴을 죄다 숨기고 제 나라에 있는 S급 던전만 다니던 길드. 설마, 하고 입술을 뗐던 유진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지.”
“뭔가 알고 계십니까?”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에요. 그쪽일 리가 없지.”
유진은 연신 그럴 리가 없다고 중얼거렸지만 표정은 펴지질 않았다.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복잡한 것 같았다.
진효섭은 그가 추측한 게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더 물을 틈이 없었다. 어느새 영상 속 그들이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가이드는 다시금 말없이 화면에 집중했다.
[“자, 열게요. 준비하시고-”
“쏘세요!”]
체르니의 목소리가 장난스레 뒤이어 들렸다. 그와 동시에 플랫은 묵직해 보이는 문을 사정없이 벌렸다. 팔에 핏줄이 솟아나고, 문은 기기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곧 문 두 개가 그들을 환영하듯 활짝 열렸다. 팟, 팟, 팟, 문에서부터 안쪽까지 불이 차례대로 켜졌다. 어둑했던 주변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고급스러운 내부였으나 노아피의 시선은 주위가 아닌 정면을 향했다. 낮고 뜨거운 숨이 바닥을 훑고 노아피를 휘어 감았다.
[“오랜만이네.”
“……비켜.”]
그때까지 얌전하던 코다가 앞으로 나섰다. 찰그랑찰그랑, 코다의 손목에 걸려 있던 쇠사슬 소리가 시끄럽게 제 존재를 주변에 알렸다. 평소의 차분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벼려진 눈으로 앞을 쏘아보는 그는 무섭도록 흥분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