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94화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모두 준비해 뒀으니, 불편한 것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신해창 에스퍼.”
“별말씀을.”
신해창은 대화하면서도 계속 휴대폰을 흘끔거렸다. 영상석으로 송출되는 영상을 보고 있는 듯했다.
“저…… 노아피 길드는 무사히 가고 있습니까?”
“…….”
어쩐 일인지 신해창은 대답이 없었다. 그에 진효섭은 심장이 흙바닥에 굴러떨어진 기분이 됐다. 아직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뒤늦게 신해창이 입을 열었다. 덤덤한 표정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였다.
“무사합니다.”
“……그렇습니까.”
“직접 확인시켜 드리고 싶지만 아마 보시기에 그리 좋은 장면은 아닐 듯싶습니다. 던전 안이라는 게 원래 소름 끼치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 SS급 던전은 특히 보기에 안 좋습니다.”
“아닙니다. 무사한 걸 안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예. 특별한 문제가 있으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바로 가 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유진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신해창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시선은 휴대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던전 안은 전투가 한창이었다. 피가 난무했고, 주위는 아비규환이었다. S급 던전을 여럿 가 본 신해창조차 본 적 없는 지옥. 한 번도 던전 안을 보지 못한 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자극적인 영상이었다. 심지어 같은 길드 가이드였으니 진효섭이라면 잠도 자지 못할 게 분명했다.
신해창은 화면 속 바닥에 굴러다니는 체르니의 머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옆에는 또 다른 노아피 길드원의 사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플랫부터 코다, 쌍둥이까지 심장이 뚫린 채로 죄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온 구멍에서 피를 흘린 채 숨을 멈춘 채였다.
그 처참한 광경에 신해창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미쳤군.”
SS급 던전은 미친 곳이었다.
보통 던전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위험하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위험한 괴물들이 나타난다. 괴물은 모두 독창적인 모양새인데 형체가 없을 때도 있고, 짐승의 모습, 혹은 상상 속의 괴물처럼 생겼을 때도 있다.
그러나 SS급 던전은 차원이 달랐다. 괴물이 더 크다거나 더 무섭다는 수준이 아니다. SS급 던전에는 인간이 살았다. 정확히는 인간 형상의 괴물들이 살았다. 심지어 그놈들은 에스퍼들과 같은 외양이었다. 즉, 싸워야 하는 괴물들이 노아피 길드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아피가 대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상으로 보기에는 그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놈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굴러다니는 체르니의 머리가 진짜 체르니인지 괴물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동료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지 않나. 그러나 노아피 길드가 아직 전멸하지는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신해창은 유일하게 가면을 벗지 않은 사람을 주시했다.
‘아마도 안단테겠군.’
수많은 괴물 중 안단테의 얼굴만이 유일하게 없었다. 괴물이 아직 안단테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였다.
안단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괴물들을 죽여 나갔다. 인간 형상에다 제 길드원의 얼굴을 한 괴물. 심지어 그 능력까지도 비슷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수준의 괴물들을 안단테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죽여 나갔다. 그들이 진짜 제 길드원인지 괴물인지 확인은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가차 없었다.
어느새 서 있는 인간보다 밑에 쌓인 시체가 더 많아졌다. 감탄보다 오한이 먼저 들었다.
신해창은 이미 안단테의 정체를 눈치챘다. 대놓고 팬이니 뭐니 하며 힌트를 줬는데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물론 완벽하게 믿지는 않았다. 거짓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하지만 이제는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에스퍼 중 몇몇도 그의 정체를 눈치챘을지 모른다. 저 정도로 유명한 남자라면 얼굴을 감추고 살았다고 해도 알아보는 이가 한둘 정도는 있을 테니까.
안단테가 진효섭을 신해창에게 부탁한 것도 그를 염려한 결과였으리라. 자신을 알아봤다면 그 길드에 관심을 가질 테고, 그다음은 가이드일 수밖에 없으니까.
“……정말 대단하군.”
아직 능력을 다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모든 에스퍼가 인정하던 존재. SS급 던전이라는 무덤에서부터 기어 나온 그. 에스퍼들의 정점에 선 존재에게 신해창은 새삼스레 경외감이 들었다.
* * *
늦은 밤. 사방이 완벽한 방음으로 된 방에서 유진은 손에 잡히는 걸 전부 던졌다. 유리가 껴 있었던 건지 쨍그랑 소리를 내며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손이 스쳐 피가 배어나 유진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악! 짜증 나게!”
더 던질 게 없나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짜증 나. 다 짜증 난다고!”
이놈도, 저놈도, 이 상황도, 모두 다 짜증이 났다. 어디다 화풀이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길드 에스퍼는 모두 바빴는데, 특히 그중 유일하게 제 더러운 성격을 받아 줄 수 있는 신해창이 제일 바빴다.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에서 짜증 나게 군다면, 아무리 다 받아 주는 신해창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느 정도 잡은 목줄에 힘을 풀어 줄 필요는 있었다. 신해창이 유진만 한 가이드가 없다는 걸 알고 성격을 받아 주는 것처럼, 유진 역시 신해창만 한 에스퍼가 한국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신해창보다 대단한 놈이 하나 나타나 버렸으니 후자는 이제 아니지만.
유진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설마, 안단테가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을 줄이야. 이건 제 판단 오류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진은 안단테에게 먼저 눈이 갔다. 부드러워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날카로운 눈빛이 매력적이었다. 이놈은 S급이 분명하다고 확신했고, 그를 가지고 싶었다.
예상대로 그는 S급이었다. 그리고 수월히 본디지 파트너가 되었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술술 풀리는 듯했지만 안단테가 C급으로 등급이 하향되며 문제가 생겼다. 결국 유진은 아쉽지만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만약 S급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지금 그의 옆에 있는 가이드는 진효섭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텐데.
“……다 조작했던 거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설마 S급이 C급 행세를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고, 그게 가능할 지도 몰랐는데.
진실을 알게 되니 어긋난 퍼즐이 맞춰졌다. 폭주 직전일 정도로 늘 아슬아슬했던 몸 상태도. 가이딩이 언제나 모자란 것도. C급임에도 자꾸 끌리는 것도. 신해창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진실을 알고 나니 이해되었다.
‘그냥 안단테 옆에 붙어 있을 걸 그랬나. 하지만…….’
성격상 진실을 몰랐더라면 몇 번을 다시 돌아가더라도 신해창을 선택할 게 뻔했다. 매력이나 사랑보다는 능력과 권력이 최고라고 생각하니까.
차라리 안단테와 언쟁을 벌이지 말고 좀 더 친한 관계를 유지할 걸 그랬다. 계속 가이딩을 도와주면서 관계를 유지했다면, 그도 자신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후회되었다. 아무리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잘되지 않았다.
기실 조금 전, 유진은 제 광신도 중 하나인 에스퍼에게 연락했었다. SS급 던전에 들어간 안단테가 어쩌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혹시 죽어 나자빠지진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걱정과 그가 죽을 만큼 힘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정말 엄청납니다! 이놈이 왜 뒷세계를 먹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인물이 이제껏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SS급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적어도 살아 나올 수는 있을 겁니다!’
그는 안단테가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해서 말했다. 감탄에 감탄이 이어졌다. 능력으로 뒤지지 않는다는 그 국가안보국 S급 에스퍼가 안단테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굴었다.
‘신해창보다 더 굉장해?’
넌지시 던진 유진의 질문에 길드원은 잠깐 주춤했다. 잠깐의 침묵 속에 난감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예? 아, 그게…….’
어중간한 대답에 유진은 숨은 진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후회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신해창도 나쁘지 않다. 대우에 불만족을 느낀 적도 없고, 신해창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많은 가이드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 시선에 도취되어 사는 건 즐거웠다.
하지만 신해창은 성격 자체가 너무 철저하고 정적이었다. 길드원이든 본디지 파트너든 사무적으로 대하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남자. 자극적이고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는 유진이다 보니 그 부분이 항상 아쉬웠다.
그에 반해서 안단테는 같이 있으면 긴장감이 느껴졌다. 묘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매력이 있었다. 자신의 것으로 함락해 가는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C급이라는 흠이 너무나도 커서 가지기는 싫은데 남 주기는 아까운 그런 놈이었다.
C급이라도 옆에 두고 싶었는데, 하물며 S급이라니. 상황은 전혀 달라졌다. 안단테는 누구에게도 주기 싫은 에스퍼가 됐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졌을 것이다.
오른쪽에는 신해창. 왼쪽에는 안단테. 문득 예전 양성소에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을 양쪽에 끼고 있을 때면 모두가 부러워했다. 모든 시선의 중심이 자신을 향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다시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었다.
“뺏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