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92화
반대파의 대다수는 10년 전 피해가 어마어마했던 나라들이었고, 찬성파의 대다수는 10년 전 던전에 들어갔던 에스퍼가 살아 나오지 않았던 나라들이었다.
‘그렇다면 의견이 5:5로 좁혀 들지 않는 지금, 결정권은 한국이 가져가겠습니다.’
찬성파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처음부터 한국은 SS급 던전을 봉쇄하길 권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탓이다. 결과는 봉쇄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신해창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저희는 어둠의 길드가 제안한 대로 게이트를 열어 그들을 투입하는 데 찬성합니다.’
웅성거림이 커졌으나 신해창은 꿋꿋이 의사를 전달했다.
‘고로, 세 시에 게이트가 열리는 즉시 어둠의 길드를 투입할 예정입니다.’
영상석을 통해 안쪽을 확인하게 된다면 훗날 SS급 던전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진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일부에서는 어둠의 길드가 혹시라도 SS급 던전을 클리어하게 되면 큰일이 될 거라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가볍게 묵살됐다. SS급 던전을 그렇게 쉽게 클리어할 리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SSS’는 일제히 한국 해안으로 모였다. 어둠의 길드는 아직 얼굴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긴장감이 감돌았다.
게이트가 열리기 한 시간 전. ‘SSS’가 가지고 있는 영상석은 여전히 빛을 잃은 채였다.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짜증스럽게 다리를 떨어 댔다. 하나둘 어둠의 길드가 꼬리를 말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세 시를 향해 뛰어갔다.
기기기긱-
끼기기기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드디어 입을 벌렸다. 카메라가 일제히 게이트를 확대했다. 세상의 이목이 그곳에 모였다. 바다가 크게 출렁이고, 하늘이 갈라졌다. 길게 찢어진 점선은 점차 선이 되었다.
이윽고, 선 안에서 사람 손과 닮은 검붉은 아지랑이가 넘실거렸다. 기괴한 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주파수가 맞지 않을 때 나는 지지직거림과 함께 게이트가 눈을 떴다.
엄청난 대규모였다. 적어도 50명은 투입돼야 할 것 같은 게이트의 크기에 자리에 있는 모든 S급 에스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여러 S급 던전을 경험했기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다는 것을. 그들의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넋을 잃었다. 그 엄청난 압도감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화면 너머의 전 세계 사람이 숨을 죽였다. 세상이 가장 조용한 순간이라고 감히 표현할 정도였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일곱 명의 에스퍼가 둑에 나타났다.
“이야, 드디어 입을 열었네.”
검은 정복 차림에 빈틈없는 가면. 카메라가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처음으로 어둠의 길드가 수면 위에 올라온 순간이었다.
“기다리다가 눈 빠지는 줄 알았잖아.”
동시에 ‘SSS’ 측이 지닌 영상석이 빛을 냈다. 지지직거리기만 하던 검은색 화면이 곧 열린 게이트를 송출했다.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가면을 쓴 남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 신해창을 향해 몸을 돌리고 물었다.
“들어가도 되지?”
“그래.”
“하하. 다행히도 다들 영 겁쟁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가면 속에 숨은 안단테가 빙그레 웃으며 주위를 훑어봤다.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람들 위에 선 것도. 모든 주목을 받는 것도. 전부 다.
그 익숙한 것들 안에서 안단테는 새로운 하나에 시선을 줬다. 굳이 따라오겠다고 박박 우긴 진효섭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귀여웠다. 오늘 아침까지도 손을 잡고 가이딩을 꼼꼼히 해 줬던 터라, 물고 빨고 싶은 걸 참느라 힘이 들 정도였다.
“후…….”
안단테는 느리게 숨을 뱉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은 오랜 숙제를 해결하는 날이다. 이것만을 바라보고 달려왔기에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모든 숙제를 해결한 이후를 떠올리게 됐다. 그 안에 진효섭이 있어서일까. 어쩐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좋아. 들어가 볼까?”
안단테는 잡생각을 끊어 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발을 떼 입을 쩍 벌린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 뒤를 길드원 여섯 명이 따랐다.
신해창과 국가안보국 에스퍼들은 분주해졌다. 영상석에서는 보고 있기만 해도 오금이 떨리는 게이트를 지나가는 영상이 흐릿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준비했던 대로 그 영상을 녹화하기 위해 인터넷과 연결했다.
지난 3일간 국가안보국이 영상석으로 많은 실험을 한 결과, 인터넷에 연결하는 것만이 영상석의 영상을 저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잠시 후, 성공적으로 연결됐는지 화면에 영상석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용 회선에 생방송으로 송출됐다. 미리 그 회선을 연결해 둔 S급들은 품에서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중에 진효섭은 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진효섭은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기도하듯 겹친 손은 간절했다. 평소에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게이트는 너무나도 위험해 보였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여느 일반인들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위험해 보이는 저 검붉은 게이트에서 부디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면서.
그때, 뒤에서 여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진효섭 가이드?”
“……유진 가이드?”
진효섭은 마주 잡았던 두 손을 풀고 유진을 돌아봤다. 보통 가이드는 자신의 에스퍼나 길드가 던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게이트 근처에 오지 않기에, 유진이 이곳에 있는 게 의외였다.
“아, 정말. 왜 이렇게 구석에 있어요.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절 찾으셨습니까? 어째서…….”
“자세한 얘기는 우리 길드로 가서 해요. 나도 해창이가 부탁해서 온 것뿐이라.”
신해창 에스퍼가 찾았다고? 진효섭은 이유를 알 수 없어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그런 진효섭을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첫인상과는 달리 예민해 보였다.
“빨리 가죠. 오랫동안 찾았더니 다리가 아파요.”
“아, 예.”
유진은 진효섭이 따라오는 걸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다행히 걸음이 그리 빠르지 않았기에 따라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하염없이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는 신해창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나으리란 생각에 진효섭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유진을 뒤따라 걸었다. 어쩌면, 노아피가 잘 있는지 물어볼 수 있겠지.
내심 기대하며 말없이 걷고 있자니 유진이 진효섭을 흘끔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요. 진효섭 가이드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노아피의 정체라든가, 안단테의 등급이라든가, 여러 가지요.”
유진 또한 노아피의 정체를 알게 된 것 같은 물음이었다. 하긴, 신해창이 알고 있으니 유진 역시 알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본디지 파트너니까. 진효섭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우뚝, 유진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의 입꼬리는 비틀려 있었는데,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자신이 뭘 잘못 말한 걸까. 진효섭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저, 원래 알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저도 있다 보니 알게 된 거라…….”
“어쨌든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안 그런 척 순진한 얼굴을 해서는 수완가네.”
“예?”
“아니에요.”
유진은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큰 동작으로 휙 몸을 돌렸다. 그는 어느새 도착한 국가안보국 길드로 들어갔다.
벌써 세 번째 국가안보국 길드였다. 처음에는 입구부터 압도되었지만 이젠 조금 익숙해졌다. 진효섭은 건물을 올려다보다 뒤늦게 헐레벌떡 유진을 뒤따라갔다.
유진이 향한 곳은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진효섭은 처음 와 보는 국가안보국의 꼭대기 층에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많이 바쁜 건지 복도는 사람 하나 없이 휑했다.
“이쪽으로 와요.”
달칵. 유진은 복도 끄트머리에 있던 방으로 진효섭을 안내했다. 안은 노아피 길드의 사무실보다 컸다. 하얀색과 은색 위주로 꾸며진 내부는 깔끔했는데,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진효섭 가이드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할 거예요.”
“예? 여기서 말입니까?”
“자세한 건 해창이가 오면 물어봐요. 아까 말했듯이 난 잘 몰라요.”
“……알겠습니다.”
진효섭은 유진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여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색한 사무실에서 서로를 마주 본 채 소파에 앉았다.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던 유진은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 진효섭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신해창 에스퍼를 기다리는 거겠지 싶어 진효섭은 별말 없이 손끝만 매만졌다.
유진은 그런 진효섭을 보다가 리모컨을 들어 옆에 있는 커다란 벽걸이 TV를 켰다. 따로 채널 번호를 지정하지 않았는데 TV는 곧바로 게이트 영상을 방송했다.
생방송인 듯했는데, 화면 안에서는 여러 사람이 게이트 영상을 두고 이것저것 얘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진효섭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