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85화
콰직, 거칠게 열어젖힌 상자 안에는 평범해 보이는 영상석이 있었다. 여느 던전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물건. 그러나 그 안에서는 한 영상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미리 저장된 것이 아닌, 현재 생방송 중인 세계적인 TV 뉴스 프로그램이 시간과 함께 송출되고 있었다. 거짓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이다.
신해창의 표정은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눈이 좋은 에스퍼들이 벌써 손안에 든 영상석을 확인했다. 문제는 하나같이 탐욕 어린 시선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그가 원했던 SS급 던전의 봉쇄는 물 건너갔다. 신해창은 앞으로 있을 절규 어린 비명이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또 10년 전 지옥이 반복된다.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속보입니다. 10년 전에 나왔던 SS급 던전이 이번에 한국 해안 앞에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무려 나흘밖에 남지 않아 그 지역을 비롯해 주변 주민들이 대피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삑. 채널을 돌려 봤지만, TV는 돌림노래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에 다급하게 ‘SSS’가 소집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에스퍼들은 한자리에 모여 던전을 봉쇄하자 이야기했는데요. 그러던 때, 이름 모를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여기, 자료 화면입니다.]
TV에서는 이어지는 내용은 가관이었다.
[―마침 내가 그쪽들이 좋아하는 어마어마한 정보를 들고 왔거든.]
강당에서는 누구도 영상을 찍지 않았다. 분명 녹음도 없었다. 이러한 정보를 매스컴에 누설할 에스퍼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그때의 상황을 정확히 녹음한 듯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사자가 녹음해서 보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신해창은 금방이라도 TV를 부숴 버릴 듯 빤히 뉴스를 바라봤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때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마지막 발언까지도.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우리 뒷세계 일원이 제일 먼저 SS급 던전에 들어가는 것. ……(이하 중략)…… 자, 그럼 고귀하신 각국 대표 에스퍼님들은 열띤 토론을 다시 해 보시고 결정들 해. 기대하고 있을게.]
화면이 전환되더니 아나운서와 모임 장소였던 강당을 배경으로 둔 기자가 나타났다.
[문제의 녹음 파일인데요. 먼저 언급한 영상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나운서가 기자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만약 저 영상석이 진짜라면 엄청난 일이 될 겁니다. SS급 던전의 내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건, 결국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대책을 마련해 SS급 던전을 공략할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지금으로서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략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아나운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미 한국은 던전 봉쇄를 선언했고, 그에 많은 나라가 찬성을 했는데요.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래 중대한 사항은 한 번의 찬반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아직 확정 단계가 아니기에 얼마든지 뒤집힐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각국의 길드가 SS급 던전에 들어가는 데 찬성한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했다.
[“물론입니다. SS급 던전의 정보를 얻을 기회입니다. 심지어 어둠의 길드가 제일 위험한 역할을 해 준다고 하니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자신을 어둠의 길드 길드장이라고 밝힌 인물이 스스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한 저의가 수상하다고 하는데요.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그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건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SS급 던전에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불투명합니다.”]
[그 말씀은, 무엇을 꾸미고 있든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뜻일까요?]
[“그렇습니다. SS급 던전은 과거,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리던 오웬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미궁입니다. 어둠의 길드에서 얼마나 많은 인물을 투입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확률은 1%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 아나운서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 일은 우리에게 호재가 될까요?]
[“예. SS급 던전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세계적으로 범죄율을 높이던 골칫거리 ‘어둠의 길드’를 처리할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아하. 그렇다면 모든 나라가 찬성할 수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만약 1%도 안 되는 확률로 그들이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때는 ‘어둠의 길드’가 정당한 길드권을 부여받고 밖으로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도 명실상부 뒷세계에서 나온 첫 번째 길드가 되겠죠. 그들이 바라는 게 그 부분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현재 그들에게 이득이 될 만한 건 그것밖에 없-”]
뚝. 신해창은 그대로 TV를 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이딩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이 솟아났다.
결국엔 알려질 내용이라지만, 원치 않은 보도다. 모든 것을 결정하고 상의 끝에 내보내도 모를 정보를 이렇게나 세세하게 매스컴에 넘기는 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음성 속 놈은 이런 상황을 바랐을 것이다. 이로써 그놈 제안을 승낙하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손가락질받을 만한 이유가 생겼으니까.
정확히 어떤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무마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영 달갑지 않았다. 신해창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앞만 응시했다. 그때 뒤에서 길드원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단장님. 이제 어떻게 하실 요량입니까?”
“찾아가야지.”
“찾아가요?”
신해창은 길드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드물게 던전에나 갈 때 챙기는 검은 가죽 장갑을 들었다.
“당분간 어수선할 테니 불순물이 길드 내부를 휘젓지 않도록 조심해.”
그러고 향한 곳은 순간 이동 포털이었다. 그는 곧장 그것을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신해창이 발을 디딘 곳은 어두운 밤바다. 뒷세계였다. 활기를 잃고 모든 것이 죽어 가는 세계. 빨갛고 퍼런 네온사인들을 지나쳐 멈춰 선 곳은 T가 빠진 모텔 앞이었다.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건물의 3층까지 향했다. 튼튼해 보이는 자물쇠가 문을 묶고 있었지만, 신해창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콰직. 녹슨 자물쇠가 두부처럼 부서졌으나 신해창은 안에 있는 사람만을 바라봤다.
“안단테.”
“왔네.”
안단테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밤바다 위 달빛을 감상하고 있었는지 창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신해창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푸른 달빛이 얼굴을 비췄다. 그 달빛의 온도 탓일까, 딱딱히 굳은 얼굴은 한없이 차가웠다. 손에 쥔 검은 가죽 장갑이 안단테를 찾아온 이유를 알려 주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느긋하게 시선을 다시 밖으로 돌렸다.
“너라면 올 줄 알았어.”
“찾아오라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닌가?”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신해창은 눈치챘다. 영상석이 보여 줬던 생중계 뉴스에 숨은 내용을 말이다.
‘아마 대부분이 영상석이 진짜임을 보여 주기 위해 무작위로 선택한 뉴스라고만 생각하겠지.’
하지만 영상의 생중계 뉴스에서 미미하게 들려오던 바닷가 소리나 영상이 돌아갈 때 얼핏 보이던 밤바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MOEL의 간판은 뒷세계를 끈덕지게 파고들었던 신해창은 알고 있는 장소였다.
거기다 기계음의 얄미운 말투까지 합해지자 도저히 연관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단테. 신해창은 안단테가 영상을 통해 자신을 이 장소로 부른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추측은 정답이었다.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군.”
사무실 안의 물건들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바랜 종이는 안단테를 찌를 듯 빳빳해졌고, 무거운 가구들은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처럼 허공을 빙글빙글 세차게 돌았다.
능력을 끌어 올림과 동시에 신해창은 단번에 주위를 파악했다. 뒤에 둘, 양쪽에 각각 둘, 그리고 앞에는 안단테. 노아피 길드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꽈득, 신해창은 손안의 장갑을 더 강하게 그러쥐었다. 다만 당황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그 역시 전투를 예상했으므로.
“감히.”
신해창의 주변으로 위험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금방이라도 전투가 일어날 것같이 분위기가 날카로웠으나 안단테는 여전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혼자 급발진이야. 혹시 발정기야?”
“무슨 개소리지.”
“아니, 뭐. 욕구불만인가 하고.”
안단테가 작게 혀를 차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누가 봐도 전투를 원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군.”
“그런 소리 자주 들어.”
“…….”
신해창은 표정을 구긴 채 잠자코 안단테를 보다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적진에 홀로 있는 셈이라 긴장까지 놓진 않았지만, 기실 그들에게서도 전투를 원하는 기세는 없었다.
주위에 있는 길드원은 얼핏 보면 신해창을 둘러싼 것 같았지만, 하나같이 각자 할 일로 바빠 보였다. 그저 그 자리가 제자리였을 뿐이라는 듯 나른한 모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