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84화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입니다. 고작 10년. 우리는 그날 많은 S급 에스퍼를 잃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SS급 던전의 이득을 바라고 또다시 S급 에스퍼들을 투입한다면, 지금보다 S급 에스퍼들은 절반으로 줄어들 겁니다. 그럼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S급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이후 생겨날 S급 던전이나 A급에 들어가기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던전을 클리어해 생긴 이득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늘어난 지금, 그것은 엄청난 피해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지금 우리는 SS급 던전에서 완벽하게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아니. 그 누구도 확신을 가질 리 없다. 만약 10년 전처럼 70년이나 후에 SS급 던전이 열렸다면, 할 수 있다는 패기 넘치는 에스퍼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은 이들은 모두 던전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강당에 모인 에스퍼 대부분은 10년 전, SS급 던전 참여를 위한 상위급 쟁탈에서 밀려난 이들이다. 자신보다 대단하다 판단됐던 이가 돌아오지 못한 던전. 그들이 간다 한들 그리 다를 바 없으리라.
물론 그때는 능력이 발현하기 전이었던 재능 넘치는 에스퍼도 이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선뜻 SS급 던전에 발을 디딜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 나왔던 에스퍼들이 폭주해서 각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영상 정보는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 SS급 던전에 들어가면 99.9% 확률로 전멸입니다. 고로 한국은 SS급 던전 입구를 그대로 봉쇄하길 권합니다. 그렇다면 주변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신해창이 진중한 시선으로 좌중을 훑었다.
“또한, 우리 한국은 만약 이 안건이 기각되고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SS급 던전에 참여하지도, 관여하지도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10년 전, SS급 던전에서 많은 에스퍼가 죽고 피해를 본 이후 선언되었던 내용이다. 다음에는 절대 SS급 던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런 나라는 꽤 있었기에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SS급 던전 탈환에 실패해서 오는 피해들은 던전에 참여할 나라에서 부수적인 피해금을 한국에 지급하셔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에스퍼들이 하나같이 침묵했다. 이로써 실패했을 시 피해금이 더욱더 늘어나게 됐다.
“그럼, 급박한 안건이니만큼 바로 찬반을 묻겠습니다. 화면에서 선택해 주시길 바랍니다.”
신해창은 깔끔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찬성은 지금 화면을 눌러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각의 자리에서 푸른색 불이 하나하나 켜졌다. 복잡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던 것과 달리 신해창과 똑같은 생각을 한 에스퍼는 많았다.
3분도 채 되지 않아서 푸른 불이 절반 이상을 채웠다. 몇몇은 여전히 고민하는 듯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이미 나온 것과 같았다.
세계에서 유명한 1위부터 5위 길드가 소속된 강대국이 죄다 던전을 봉쇄하는 데 찬성했다. 나머지 중소 국가 정도야 어차피 저들끼리 SS급에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 사실상 100% 던전을 봉인한다는 결과였다.
“다수결로 찬성이 많은 것, 확인했습니다. 안건이 안건이니만큼 앞으로 던전이 생겨나기 전까지 총 세 번의 찬반이 있을 예정이며, 반대인 나라는 회의에 불참하셔도 좋습니다. 또한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한국에서는 던전을 봉쇄할 준비를 도맡아 하겠습니다.”
신해창은 머릿속으로 봉인할 계획을 세우며 말을 끝마쳤다. 아니, 끝마치려고 했다.
―아아.
갑작스레 강당 스피커에서 삐- 하는 기계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마이크 테스트. 아아. 마이크 테스트. 거기, 잘 들리나요? 세계 각국의 에스퍼님들.
기계음과 합해진 장난스러운 어투는 기괴했다.
―이야. 이렇게 대단한 에스퍼님들 사이에서 마이크를 잡게 될 줄은 몰랐네. 그래도 이해해 줘. 내가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태라서.
신해창은 빠르게 주위를 돌아봤다. 국가안보국 길드의 에스퍼들이 하나같이 신해창을 보고 있었다. 가볍게 손짓하자 그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소리는 여전히 느릿하고 평온하게 이어졌다.
―이 자리를 빌려 처음으로 인사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네. 그래도 뒷세계를 먹고 길드장이 됐는데, 자랑질도 못 하니까 아쉽더라고.
고작해야 치기 어린 에스퍼의 장난이라 생각해 넘겨듣던 이 중 일부가 눈을 크게 떴다. 뒷세계. 즉, 어둠의 길드 길드장은 갑자기 나타나 뒷세계를 휘어잡았다는 소문으로 몇 년 전만 해도 에스퍼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인물이었던 탓이다.
―그래서 이렇게 인사하게 되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하하!
삐- 소리와 함께 기계음이 기괴하게 웃어 댔다. 귀를 찢을 듯한 소음에 일부 청력이 좋은 에스퍼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편, 신해창은 이를 벅벅 갈았다.
‘감히 이런 신성한 자리에서 이딴 짓을 벌이다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지금 쓰는 말은 한국말이었다. 진짜 뒷세계의 길드장인지는 몰라도 지금 사태는 한국의 위상을 끌어내림과 동시에 여러 문제를 일으킬 게 분명했다.
신해창은 찢어 죽여도 할 말 없을 놈을 향해 조용히 분노를 불태웠다. 당장에라도 강당 스피커와 마이크를 연결한 위치를 파악하고 저놈을 끌어내서 치기 어린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했다.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다짐한 신해창은 휴대폰으로 주위 국가안보국 에스퍼들에게 여러 지시를 내렸다.
그사이, 노이즈가 줄어들고 다시금 기괴한 음성이 이어졌다.
―아차, 한국 에스퍼 놈들이 날 찾으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네.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주요 내용이나 말하고 사라질게. 마침 내가 그쪽들이 좋아하는 어마어마한 정보를 들고 왔거든.
스피커 속 인물은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느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 내가 뒷세계에서 꽤 재밌는 영상석을 발견했어. 처음에는 평범한 영상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영상을 저장하지만 않고, 다른 영상석과 연결해서 바깥에 송출할 수 있지 뭐야.
에스퍼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놀람과 흥분이 뒤섞인 얼굴들이었다.
이제껏 던전 안을 파악하는 방법은 ‘영상석으로 안을 찍는 것’ 또는 ‘겪은 정보를 구두로 설명하는 것’뿐이었다. 던전 안은 전파 자체가 통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SS급 던전에서는 그 어떤 이도 영상석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살아 나온 이들은 영상석을 챙길 정신이 없었고, 품 안에 가지고 있던 것은 전투의 치열함을 알려 주듯 박살이 나 빛을 잃은 채였다.
극악한 난도와 미지로 남은 던전 안으로 인해 두려움과 어려움만 더 커졌다.
하지만, 찍는 즉시 밖으로 송출되는 영상석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들어가 그 안을 찍을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간 에스퍼들의 얼굴에 탐욕이 깃들었다.
스피커에서는 삐- 소리와 함께 끊길 듯 아슬아슬한 웃음소리가 간헐적으로 주위를 울렸다.
―대충 알아들은 것 같은데…… 일단 거짓이 아니라는 건 오늘 한국 에스퍼들이 영상석을 받아 보고 판단할 거야.
타이밍 좋게 국가안보국 에스퍼 하나가 신해창에게 무언가를 소곤거렸다. 아주 절묘하게 막 택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마치 지금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영상석은 총 두 개. 하나는 찍고, 하나는 찍은 걸 밖으로 송출하는 건데, 송출용만 보냈어. 앞으로 너희의 결정에 따라 나는 한 가지를 더 보낼지 말지를 결정하게 되겠지.
기계음임에도 묘하게 들뜬 감정이 드러났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우리 뒷세계 일원이 제일 먼저 SS급 던전에 들어가는 것.
“저, 미친 새끼가.”
신해창이 결국 참지 못하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앞에 있었다면 그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내팽개쳤을 것이다.
―너희는 지금 복 받은 거야. 우리가 직접 영상석도 마련해 주고, 안의 상황이 어떠한지 목숨 걸고 확인해 주겠다잖아. 그럼 각자 들어갈지 말지 대책도 마련할 수 있을 테고, 만약 잘못되더라도 너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데다가 다음 대책까지 마련할 수 있겠네?
당장에라도 잡아들이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기계음은 여전히 태연했고, 국가안보국 에스퍼들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얼마 안 가 잡힐 거라는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었다.
―하하. 못 받아먹는 등신 새끼는 없을 거라 믿어. 자, 그럼 고귀하신 각국 대표 에스퍼님들은 열띤 토론을 다시 해 보시고 결정들 해. 기대하고 있을게.
스피커로 나오던 기계음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10분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분위기는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신해창은 굳은 표정으로 손을 꽉 쥐었다.
“다, 단장님.”
옆으로 다가온 국가안보국 에스퍼가 무언가를 건넸다. 아까 보고받았던 퀵 배송으로 도착한 택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