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78화
국가안보국은 따로 길드 에스퍼를 경비로 두지 않았다. 즉 건물의 경비원은 말이 경비원이지, 그저 안내만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한국에 내로라하는 S급이 존재하는 곳이다.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는 이상, 국가안보국에 쳐들어올 미친놈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 미친 에스퍼가 생겼다. 경비원은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됩니다……!”
안단테는 옷자락을 잡아끄는 경비원을 가볍게 따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띵. 경쾌한 음과 함께 순식간에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깔끔하고 너른 사무실 풍경이 보였다. 노아피와는 다른 사무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뭐야. 아무도 없네.”
안타깝게도, 지금 길드에 있는 에스퍼는 없었다. 그럼에도 안단테는 발걸음을 물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길을 아는 양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끝에는 하얗고 가녀린 남자가 있었다.
“안녕, 유진.”
“……안단테?”
유진은 입을 쩍 벌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밥 먹듯 하던 표정 관리조차 못 했다.
“너, 너 어떻게 여길…… 아니, 여기는 왜 온 거야?”
“신해창을 만나러 왔는데.”
안단테가 텅 빈 주위를 가볍게 훑어봤다.
“아무도 없네. 다들 바쁜가 봐?”
“그거야…….”
유진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경비원이 헐레벌떡 튀어나왔다.
“헉, 헉……. 유, 유진 가이드님.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작게 한숨을 쉰 유진이 어느새 갈무리한 표정으로 경비원에게 친절히 말했다.
“괜찮아요. 저랑 아는 사이니까. 그냥 내려가 봐요.”
“예? 아, 그렇습니까……?”
“네.”
경비원은 떨떠름하게 유진과 안단테를 번갈아 봤다. 그러다 유진이 재차 내려가 보라고 말하고서야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자리에 단둘만 남자 안단테가 장난스레 웃었다.
“저렇게 내보내도 괜찮겠어? 내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에스퍼가 그러기로 마음먹었으면 일반 사람이나 다름없는 D급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 그건 그렇네.”
안단테가 피식 웃곤 이어 말했다.
“그래도 도움은 청해야 하지 않을까? 타 길드 에스퍼랑 둘이 있으면 위험할 텐데.”
“뭐가 위험한데?”
능글맞은 그의 태도에 유진이 차갑게 안단테를 쏘아봤다. 저번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듯 시선이 다소 표독스러웠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뭔가를 하면, 국가안보국 에스퍼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 신해창이 1분 만에 날아올걸.”
“그래?”
“당연하지. 걔는 나를 지켜 줄 의무가 있으니까. 하루에 몇 번이고 CCTV를 확인할걸. 특히 오늘처럼 에스퍼가 없는 날에는 더욱이.”
“오.”
안단테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네. 너를 위험하게 만들면 신해창이 나타난다는 거잖아.”
“……뭐? 잠깐. 안단테, 너 설마- 으앗!”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챈 유진이 표정을 굳힌 순간, 안단테가 돌연 그를 둘러멨다. 경악한 유진이 발버둥을 쳤지만, 안단테는 조금도 미동치 않았다.
“자, CCTV에서 어디가 제일 잘 보일까. 저기? 아니면 저기?”
“너, 너 이 미친! 놔! 놓으란 말이야!”
“아, 아니다. 저기가 좋겠네.”
“이 미친 새끼야! 놓으라고!”
안단테는 반항하는 유진을 무시하며 CCTV로 보이는 곳 앞에 갔다. 그러고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유진을 내려놨다.
“윽…….”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등이 책상에 거칠게 부딪혔다. 성의 없는 손길에 유진은 입술을 물며 안단테를 째려봤다. 눈가에선 독기가 풀풀 풍겼다.
잔뜩 열받은 그가 손을 휘둘렀으나 안단테는 그런 유진의 두 팔을 한 손으로 잡아 눌렀다. 아이를 제압하듯 간단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유진이 숨을 거세게 헐떡였다.
“너……!”
“괜히 반항하지 마. 나 가이드가 반항하면 괜히 더 흥분하는 타입이거든.”
“이, 변태 같은…….”
“그건 인정해.”
안단테가 매끄럽게 웃으며 유진의 옷을 그대로 잡아 뜯었다. 유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너, 너, 설마, 진짜…….”
“아, 걱정하지 마. 너한테 안 서니까. 조금만 유혹해도 넘어오는 상대로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는 없잖아. 이건 그냥 보여 주기용이야. 이렇게 해야 신해창이 나타나지.”
직접 확인해 봐도 된다며 안단테가 아래를 가리키자 유진은 안도하는 대신 사납게 이를 갈았다.
“안단테!”
“조금만 참아. 1분이면 날아온다며. 이제 10초 남았다.”
“이, 개 같은……!”
“5, 4, 3, 2-”
1을 말하기 전에 기척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빙고.”
신해창은 언제나 그랬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흐트러진 유진과 매끄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안단테. 누가 봐도 급박한 상황이었다. 신해창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안단테. 타 길드에 쳐들어와서 가이드를 겁탈하려고 드는 건 범죄다.”
“겁탈이라니. 전혀 그럴 마음 없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건 협박이었어. 널 빨리 불러내기 위한 협박.”
“그것도 역시 범죄다.”
“하하, 그런가? 그래도 이건 너나 나나 똑같으니까 서로 없던 일로 하자.”
안단테가 뒤늦게 유진 위에서 내려왔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싸늘함을 담은 채 신해창을 쏘아보고 있었다.
“너도 우리 가이드를 협박했잖아.”
“그런 적 없다.”
“없기는.”
피식 웃은 안단테가 신해창에게 다가갔다. 흐트러진 유진은 뒷전이었다.
“해창아. 너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난 생각보다 널 좋게 보고 있어.”
똑똑하고. 능력 좋고. 양성소에서는 꽤 좋은 친구였다. 아마 앞으로 있을 제 일도 도와줄 고마운 친구. 안단테는 되도록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걸 탐내면 곤란하지.”
신해창은 안단테가 말하는 ‘내 것’이라는 게 진효섭이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다.
“진효섭 가이드가 왜 네 것이지? 길드는 탈퇴하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아. 우리 가이드는 내가 꽉 잡고 있을 거라 영원히 탈퇴하지 않을 거거든.”
어쩐지 묘한 느낌을 품은 말이었다. 영원이라니. 세상에 한 길드에 영원히 몸을 담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니까 눈독 들이지 말아 줘. 자꾸 우리 가이드에게 다가오면 나도 똑같이 너희 가이드를 괴롭혀 줄 예정이니까.”
“이상하군.”
“뭐가 이상해?”
“넌 네 본디지 파트너였던 유진을 내게 뺏기고도 신경조차 쓰지 않던 놈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고작 다가간 정도로 직접 경고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어떤 의미일까. 신해창은 침착하게 안단테를 살폈다.
진효섭이 중요한 비밀을 알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저 음흉한 안단테가 진효섭 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줬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진효섭 가이드는 다른 가이드와 좀 다른가 보지?”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안단테. 그가 그렇게나 아끼는 가이드라. 어쩐지 진효섭 역시 평범한 인물일 리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신해창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자 안단테가 작게 혀를 찼다.
“이런, 내가 네 호기심을 자극해 버린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내가 진효섭을 다르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연인이기 때문일 뿐이야.”
“……연인이라고?”
신해창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단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래. 우리 지금 엄청나게 달콤한 사이니까 자꾸 남의 남자한테 찝쩍거리지 말고, 넌 뒤에 있는 유진에게나 신경 써. 소중한 너희 가이드잖아?”
안단테가 신해창에게 바투 다가섰다.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두 사람이 스치듯 서자 한편의 그림과도 같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시선을 나눴다.
이윽고 안단테는 휑한 주위를 훑으며 느긋하게 웃었다.
“기왕이면 나한테도 관심 꺼 주면 더 좋고. 너는 다른 일로도 지금 바쁘잖아.”
“……뭘 알고 말하는 건가?”
“글쎄? 길드에 에스퍼 하나 두지 않는 걸 보니까 많이 바쁜가 싶어서 걱정해 주는 거야.”
안단테는 신해창의 어깨를 꽉 쥐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나 가 볼게.”
뭔가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모호한 태도에 신해창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단테는 인상을 찌푸린 S급 에스퍼를 앞에 두고도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약 올리듯 끌끌 웃는 웃음소리가 경박하기 짝이 없었다.
에스퍼는 하나같이 등급에 따라 그 힘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약육강식은 에스퍼들에게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높은 등급의 손짓 하나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느끼니까.
그러나 안단테에게서는 그런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본인이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있다는 듯 매사에 평온하기만 했다.
“아, 맞다. 100억은 다 준비됐어? 역시 너희라도 100억을 준비하는 건 힘들 거라 생각해서 기다려 줬는데 영 늦네.”
“…….”
“해창아,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돈 계산은 철저히 해야지. 최대한 빨리 준비 좀 해 줘.”
말을 마친 안단테는 가볍게 신해창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유유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신해창의 얼굴에는 더 깊은 의심이 서렸다. 역시나 안단테는 평범하지 않다.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안단테를 쫓는다면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이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터. 저이가 원흉일 것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달한 걸 보고서야 신해창은 뒤늦게 유진에게 다가갔다.
“괜찮나?”
철썩, 대답은 손찌검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