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77화
“진효섭 씨.”
“……예.”
“처음에 분명 ‘접촉 가이딩 이상은 하지 않겠다’라고 했죠. 그 생각, 지금도 마찬가지인 거 맞아요?”
“예? 다, 당연합니다.”
진효섭이 화들짝 놀라며 거듭 대답했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전 여전히 접촉 가이딩까지만 할 예정입니다.”
“정말?”
“……왜 그렇게 물으십니까?”
왜 저렇게 되묻는 걸까. 설마 자신이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마음속에서 불안이 피어났다.
“별로. 그쪽 마음이 달라졌나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길드 소속 가이드 중에는 애인이 있어도 가이딩과는 또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아까 쌍둥이한테 제안받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길래 혹시 기대라도 하나 싶어서.”
“그,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됐고요.”
안단테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진효섭은 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지 못했다.
문득 언젠가, 자신이 체르니의 제약을 풀려고 했을 때가 떠올랐다. 접촉 가이딩을 하려던 제게 타인과의 키스를 제안했었다. 그때는 그저 가이딩일 뿐이니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논리라면 몸 역시 마찬가지다.
길드 소속 가이드 중에는 애인이 있어도 가이딩은 또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던가. 그건 가이드뿐만 아니라, 에스퍼도 다를 바 없다. 특히 안단테는 아무리 봐도 가이딩은 어디까지나 가이딩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진효섭은 혹시라도 그가 조건을 없애 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할까 봐 무서웠다. 어차피 가이딩이니 깊게 생각하지 말고, 점막 가이딩 정도는 해 줘요. 언젠가 그리 말하지 않을까. 오늘은 그러지 않았지만,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표정이 절로 어두워졌다. 연인임에도 이런 걱정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제는 그렇게나 들떴던 감정이 오늘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중간 없이 흔들리는 마음에 면역력이 없어 그런지 더욱 힘들었다. 이 불안은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표정이 자꾸만 가라앉을 때였다. 띠링. 다행히도 좋은 타이밍에 휴대폰 알림음이 생각을 끊어 줬다.
진효섭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근처에 있는 가방을 끌어왔다. 안을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내 들자, 전혀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신해창입니다. 저번 만남 때 연락처를 드리지 않은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연락드렸습니다.]
덜컥 손끝이 굳었다.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안단테의 눈치를 봤다. 그가 보지 않고 있으면 몰래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효섭의 반대편을 보고 있던 안단테는 어느새 정확히 그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진효섭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안단테의 주위만 온도가 1도 낮아진 것 같다면 착각일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재빨리 가방에 휴대폰을 집어넣자 안단테가 빤히 바라봤다.
“신해창이랑 번호도 교환할 만큼 친해졌는지는 몰랐네요.”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저번에 만났다는 건 뭐예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한참 고민을 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제, 신해창 에스퍼가 절 찾아왔었습니다.”
“왜요?”
“아무래도 노아피 길드를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게 도움을 청하면서 정보를 공유해 준다면, 저는 현상금범으로 몰리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안단테의 눈이 가늘어지자 진효섭이 지레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 물론 저는 진실을 말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래요?”
진효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듯 투명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신해창이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텐데.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생각을 숙고해 달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까 문자가 그 문자라든가.”
몸이 움찔 떨렸다. 안단테는 마치 그와 신해창이 했던 얘기를 들은 것처럼 말했다.
“그건……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정말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노아피 길드를 배신할 일은 없습니다.”
진효섭이 확고한 눈으로 안단테를 마주 봤다. 기뻐해야 할 일이 분명할 텐데, 안단테의 표정은 모호했다. 잠자코 있던 그가 뒤늦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역시 내 자기.”
그제야 진효섭 역시 안도했다. 그의 반응이 워낙 이상해서 혹시 자신이 벌써 신해창에게 일러바쳤다고 착각할까 봐 걱정했는데.
“예. 정말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처음부터 걱정 안 했어요. 진짜 신해창 쪽에 붙었다면 지금 이렇게 대화도 못 나누고 있었을 거잖아요.”
진효섭의 성격을 너무 정확하게 파악한 말이었다.
“그래도 신해창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해요. 또 만나자고 하거나,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나한테 연락하고.”
“예. 알겠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안단테의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진효섭은 그에 안도하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어깨에 멨다.
“저 오늘은 그럼, 가이딩도 끝났으니 먼저 가 봐도 되겠습니까?”
“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진효섭은 어제 코피가 났는데 오늘 두 명을 동시에 가이딩해서 몸 상태가 걱정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 없어서 우물거렸다.
“어제에 이어서 계속 가이딩했던지라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해야 할 것도 있어서요.”
최근 들어 가이딩이 끝나면 항상 먼저 보내 주던 안단테였기에, 이번 역시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안단테는 조금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피곤한데 뭣 하러 오자마자 저놈들 가이딩을 해 주고 그래요.”
“예……?”
하지만 그게 가이드의 일인데. 진효섭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봤다. 역시 출근하자마자 퇴근한다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걸까. 저번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라고 하더니, 오늘은 달라서 혼란스러웠다.
“저…… 혹시 다른 일이 있는 거라면 제시간에 퇴근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어제랑 오늘 이어서 가이딩했으니까 피곤할 법하네요. 얼른 가서 쉬어요.”
“예. 감사합니다.”
안단테의 허락에 진효섭이 내심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갈 준비를 하고 나가는 데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진효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안단테의 표정이 금방 차가워졌다.
“마음에 안 드네.”
리디안이 휴대폰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왜요. 진효섭 가이드가 뭔가 발설했을 것 같아요?”
“아니.”
“근데 왜 마음에 안 들어요.”
“진효섭 말고 신해창.”
안단테가 차가운 시선으로 진효섭이 나간 자리를 빤히 바라봤다. 기분 안 좋다는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짜증 나게 내 가이드를 헤집고 다니잖아. 예전 같으면 다시는 못 나대게 반쯤 죽여 놨을 텐데.”
“엑, 진정해요. 그러다가 일이 어긋나면 어쩌려고요.”
신해창 같은 거물을 건드리고도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큰일을 앞두고 할 고민은 아니었다. 그 점을 안단테 역시 생각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게이트 파인더는 어때?”
“먹통이 되는 간격이 점차 줄어들고 있어요.”
리디안은 휴대폰을 안단테 쪽으로 돌렸다. 얼핏 게임을 하는 것 같던 쌍둥이였지만, 사실 화면에 뜬 것은 게임과는 달랐다. 배열된 모스부호. 마치 무언가의 정보 같았다.
“어젯밤에 간헐적인 먹통이 또 한 시간 지속됐어요. 우리가 핵을 다 모으기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던 일인데, 이제 3일에 한 번은 일어나요.”
“그래?”
“핵을 다 모은 그 시점으로 간격이 좁혀드는 걸 보면, 단장님 말대로 이게 시기를 가르쳐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게이트 파인더. 게이트가 열리는 시기나 장소를 측정하는 기기였다. 핵을 하나하나 모을 때마다 먹통이 되는 게 이상해서 주시해 봤더니 역시 정답이었다.
“그럼 조만간이겠네.”
“그렇겠죠. 이제 3일에 한 번에서 하루에 한 번. 그리고 시간 단위로 들어가면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긴 한데…… 뭐, 시기도 적절하고 나쁘지 않네.”
안단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다른 놈들한테도 이 내용 전달하고. 혹시 갑작스러운 변화 있으면 바로 연락해.”
“네. 그럴게요. 근데 단장님, 어디 가게요?”
“일이 시작되면 바쁠 테니까 미리 경고라도 하러 가 보려고.”
“경고?”
이해하지 못한 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안단테는 더 대답을 잇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국가안보국]
허허벌판에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건물은 한국에서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S급 길드의 소유였다. 국가안보국이라는 이름답게 나라에서 인정하는 길드이자 대표하는 곳.
특히 나라의 윗분들과 마주하는 길드다 보니 그 어떤 곳보다도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타 길드 역시 국가안보국에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에 건물에는 언제나 평화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런 평화가 지금, 드물게 깨졌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뭐 하기는. 신해창 보러 왔다니까.”
경비를 보던 사람이 당황하며 안단테를 말렸다. 하지만 고작 D급으로, 경비 일을 하는 사람이 안단테를 말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여기가 대체 어딘지나 알고 이러는 겁니까?”
“국가안보국을 모르는 에스퍼도 있어? 하하.”
경비원의 얼굴에 경악이 감돌았다. 알면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는 에스퍼가 그로선 이해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