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56화
그들은 모르겠지만, 진효섭에게 노아피 길드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었다.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손수 선택한 제 길드. 처음으로 가져 본 소속감.
보통 가이드나 에스퍼는 여러 길드를 전전하기도 하고 한 길드에 정착하기도 한다는데, 진효섭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길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길드는 이렇겠지. 에스퍼는 저렇겠지. 가이드는 사랑을 받겠지.
그런 상상만을 거듭하던 어느 날, 그를 도와줬던 남자가 말했다.
‘길드원들은 던전 안에서 서로의 등을 맡기게 돼. 서로의 목숨을 등에 짊어지는 거지. 그래서 길드원끼리의 신뢰는 가족보다도 강하다고들 말해.’
당시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진효섭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니까 너 역시 새로운 길드에 들어간다면 그렇게 해 줘. 외부적인 여러 요인에서 그들을 보듬어 주는 거야. 그럼 그들은 네가 신뢰하는 그 이상으로 너를 신뢰하겠지. 너는 분명 그곳에서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따스한 아이니까.’
과거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말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말은 하나같이 가슴속에 새겨져 반드시 이뤄야 하는 삶의 지표가 됐다.
“저는 노아피 길드의 사람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섭지도 않습니다.”
끝맺어진 진효섭의 말에 그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대로라면 안단테나 체르니가 그게 뭐냐면서 웃음을 짓고, 플랫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을 텐데 말이다. 딱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일 이야기라 생각했던 터라, 진효섭은 조용한 그들이 조금 불편했다. 하나같이 표정을 읽을 수 없어서 더 그랬다.
이윽고 유일하게 유의미한 반응을 한 건 플랫이었다. 가이딩을 위해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진효섭, 너 꽤…….”
그는 말을 이으려다 말고 뒤를 홱 돌아봤다. 아까 전의 풀어진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여기로 뭔가 오는데?”
“어. S급.”
체르니와 플랫이 드물게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플랫은 자연스레 진효섭을 지키듯이 몸을 틀어 그와 문 사이를 팔로 막았다. 진효섭만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그 안에서 긴장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안단테였다.
“내가 부른 놈이니까.”
안단테가 플랫의 팔을 가볍게 툭 치곤 진효섭을 품 안으로 당겼다. 플랫의 보호는 필요 없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플랫은 미묘한 표정으로 안단테를 바라봤다. 고작 손짓 두어 번으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뀌었다. 끊어진 가이딩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플랫의 기류가 이상했다. 그 사이에서 진효섭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이상한 기류는 도착한 손님으로 인해 금방 사라졌다.
“안단테.”
굳은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연 S급은 신해창이었다. 그의 뒤로는 어제 뒷세계에서 마주쳤던 같은 길드의 에스퍼와 유진 가이드가 있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안단테를 바라봤다. 시선이 제각각 달랐지만, 하나같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신해창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들어와 안단테 앞에 섰다. 전과 같은 정중함은 없었다. 분위기가 꽤 살벌했다. 자연스레 함께 온 에스퍼도 살기를 뿜어냈고, 금방이라도 전투가 일어날 것같이 공기가 날카로워졌다.
“들었다. 네가 현상금 수배범 얼굴을 봤다고?”
“응. 복면을 찢었거든.”
“대체 어떻게?”
쨍강, 신해창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쇠가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런 위험한 물건을 쓰는 S급 에스퍼다. C급에 디버프 능력밖에 없는 네가 무슨 힘으로 교전을 했다는 거지.”
“그러게. 원래라면 내 쪽이 바로 나가떨어져야 했는데, 어쩐지 그놈이 빌빌거리더라고. 너희 길드원이 힘을 다 빼 둔 거 아냐?”
안단테의 시선이 신해창 뒤에 서 있는 에스퍼에게 향했다. 그러자 에스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부정부터 했다.
“아닙니다. 그놈 발이 워낙 빨라서 전 교전도 못 하고 뒤를 쫓는 것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는데.”
“그럼 다른 놈에게 처맞기라도 했겠지. 100억씩이나 걸어 놨는데, 그놈을 찾는 게 어디 너희뿐이겠어?”
픽 웃은 안단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면 뭐, 오랫동안 가이딩을 못 받아서 몸 상태가 안 좋다든가.”
“그럼 네가 운 좋게 비실비실할 때 마주쳤다 이건가?”
“어. 그런 것 같은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안 될 건 뭐 있어.”
안단테가 턱을 괴며 뻣뻣하게 서 있는 신해창을 바라봤다. 입꼬리가 그를 비웃듯 삐뚜름했다.
“너는 로또 걸리는 새끼한테, 이건 말도 안 된다면서 돈 다시 내놓으라고 할 거야?”
“…….”
“아, 혹시 내가 돈을 받는 게 배 아파서 그래? 고작해야 2억쯤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99억이나 주게 돼서?”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하곤 다리를 꼬는 모습이 갑질하는 손님 같기도 했다. 안단테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국가안보국 길드장이 치사하게 왜 이러실까. 돈도 많이 버시는데 밑바닥 C급 길드한테도 좀 나눠 주고 그래. 사람이 너무 독점하면 미움받는 법이야. 이 세상엔 아직 잘사는 놈들보다 못사는 놈들이 더 많잖아?”
“말은 잘하는군.”
“다른 것도 잘해. 그치, 유진 가이드?”
갑작스레 돌아온 화살에 유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시에 옆에 있던 에스퍼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이 미친 새끼가 돌았나……!”
“나서지 마.”
그런 에스퍼를 신해창이 막아섰다. 남자는 차마 신해창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씩씩댔다. 꽉 말아 쥔 주먹은 신해창만 없었으면 바로 안단테의 뺨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단테는 느긋하게 낄낄 웃었다.
“아, 무서워라. 같이 온 놈이 유진 가이드 광신도였나 보네.”
오히려 옆에 있는 진효섭만 긴장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안단테는 유독 신해창 옆에만 있으면 악당 같아 보였다.
“길게 말할 필요 없이 본론만 말하지. 안단테, 난 거래를 제안하러 왔다.”
신해창이 백지수표를 안단테 앞에 내려두며 온기 하나 없는 어투로 딱딱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놈이 현상금 수배범이라는 추측을 두고 쫓고 있었다. 네가 그놈 얼굴을 봤다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놓칠 수는 없지.”
“그래서?”
“네가 본 그놈이 현상금 수배범이라는 증거를 함께 가져와. 그렇다면 직접 잡아 오지 않아도, 현상금을 그대로 내주지.”
그놈이 뒷세계의 일원이며, 한국에 들어와 던전의 핵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의미였다. 안단테는 속뜻을 바로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아하. 이거 참, 어려운 일을 쉽게도 말하네.”
“그 정도는 돼야 우리도 널 믿는다. 아무나 끼워 맞출 수도 있는 얼굴을 증거도 없이 99억씩이나 요구하는 쪽이 이상한 거지.”
신해창의 요구는 진효섭이 듣기에도 아주 타당했다. 같은 길드도 아닌 안단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을 테니까.
진효섭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는 신해창이 찾고 있는 인물이 노아피 길드이며, 그날 쫓기고 있던 게 플랫이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안단테는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을 테니, 아무나 적당히 끼워 맞춰야 한다. 증거를 들고 오는 것이 당연히 불가능한 상황. 제안은 거절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절하면 안 그래도 안단테를 의심하는 신해창이 심증을 굳히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제안을 받아들이자니 행보를 주목받을까 봐 무섭고. 둘 중 무엇을 택하기가 어려웠다.
반면, 안단테는 진효섭의 그런 걱정 따위 모르는 사람처럼 느긋했다.
“좀 어이가 없네. 난 우연찮게 그놈 얼굴을 봤고, 그걸 말해 주는 대가로 현상금 떼 달라고 한 것뿐인데. 그놈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몫은 네 할 일 아닌가?”
허튼소리를 들은 양 신해창은 대꾸하지 않았다. 안단테는 물러남이 없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뭐, 그래도 친구 좋다는 게 어디야. 서로 돕고 살아야지. 좋아. 내가 도와줄게.”
“증거를 가져올 생각인가?”
신해창은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기세로 안단테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번 증거를 빌미로 노아피의 행보를 파악해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안단테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가져오고 자시고, 이미 찾아 뒀어.”
“……뭐라고?”
주머니에서 작은 칩이 나왔다. 안에 든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안단테의 자신감 있는 표정이 증거의 확실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에 신해창이 드물게 당황했다.
“진짜 증거가 있다고?”
“응. 자, 여기. 어떤 놈들인지 이름이랑 신상 정보, 증거까지 확보해 뒀으니까 확인해. 그리고 돈은 알아서 넘기고.”
“…….”
얼결에 칩을 받아 든 신해창은 가만히 침묵했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것도 같았다. 칩에 있는 내용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기에 그 어떤 말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당연한 의문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챌 수 있었지? 고작 스물네 시간이다. 잠깐 스치듯 얼굴을 본 정도로 뒷세계 인물을 이렇게까지 알아본 건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