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꿀 발린 S급 가이드-52화 (52/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52화

진효섭은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만약. 만약 그가 도와 달라고 말했다면…… 자신은 흔쾌히 그를 도와줬을까. 아니면 끌려가듯 어쩔 수 없다며 허락했을까.

어느 쪽이든 허락한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 진효섭은 평소의 자신 같지 않다고 느꼈다. 분명 상대가 조금이라도 깊은 관계를 원한다 싶으면 기겁을 했던 것이 바로 자신이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자기야.”

그때,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영화가 재미없어요?”

어느새 안단테도 영화를 뒷전으로 한 채 진효섭에게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는 진효섭을 계속 보고 있었던 듯했다.

“아, 아닙니다.”

진효섭은 작게 답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왕 영화관까지 왔는데,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그는 다시금 화면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집중하기도 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진효섭은 안단테를 바라봤다. 안단테는 빙그레 웃으며 말없이 화면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다시 화면을 바라봤으나 온 신경이 깍지를 낀 손에 쏠렸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안단테가 엄지로 은근하게 손바닥을 문질렀다. 고작 그 작은 행동에 진효섭은 몸을 움찔거렸다. 플라토닉을 입에 올린 사람치고는 참 야살스러운 행동이었다.

당황해 흘끔거리자 안단테는 아무런 사심이 없는 사람처럼 청순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접촉을 신경 쓰는 것은 그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집중은 또다시 무산되어 버렸고, 어느새 영화가 끝이 났다. 내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안단테는 찌뿌둥한지 몸을 가볍게 움직이며 진효섭을 이끌었다.

“우리 이제 뭐 할까요?”

영화는 끝이 났는데,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또 뭐를 합니까?”

“우리는 지금 첫 데이트 중이잖아요. 정석대로 밥도 먹고, 영화도 봤으니까 이제 진효섭 씨가 하고 싶은 걸 해야죠.”

빙그레 웃은 그가 진효섭에게 맞추듯 물었다.

“좋아하는 거, 뭐 있어요?”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거……. 계속해서 되뇌어 봤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면 휴일에 하는 거라든가. 그게 곧 취미잖아요.”

“휴일 말입니까? 휴일…….”

진효섭은 자신이 휴일에 하는 것들을 떠올려 봤다.

“어…… 장을 봐서 집에 음식을 만들어 둡니다. 청소도 좀 하고, 운동도 하는 편입니다.”

“운동?”

“예. 가벼운 맨몸 운동을 좀…….”

“와. 그래서 몸이 좋구나.”

진효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기는. 내가 다 봤는데.”

안단테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안경을 만들어 진효섭을 훑었다. 손동작 때문인지, 어쩐지 집중해 보는 느낌이 들어 더 부끄러워졌다. 진효섭이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목덜미를 벌겋게 물들이자 동그란 손가락 안으로 그를 쳐다보던 안단테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자기야.”

“예, 예?”

“그럼 이대로 자기 집에나 갈까요? 자기는 휴일에 집에 있는 편 같으니, 그게 편할 것 같은데.”

그가 짐작한 게 맞았다. 진효섭은 최근 처음 가져 본 자신만의 편안한 공간이라는 데 폭 빠져 있었다. 그러나 안단테가 들어온다면, 그 순간부터 집은 절대 편하지 못할 장소가 될 게 분명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단둘이라니. 생각만 해도 긴장되었다.

“기왕 같이하는 거, 진효섭 씨가 편한 걸로 해야지.”

“하지만 집에서는 할 게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특별한 걸 사 두지 않아서…….”

“정 할 거 없으면, 맨몸 운동을 해도 되고.”

안단테가 은근하게 진효섭의 손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똑같이 맨몸 운동을 말했어도, 그 안에 숨겨진 의미는 천차만별이었다. 진효섭은 수줍음에 눈을 내리깔며 안단테의 손을 꽉 잡았다. 제 손바닥을 긁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하는 것보단 둘이서 맨몸 운동하는 게 재밌을 거야. 그렇죠?”

어떻게 들어도 건전하지 않은 말이었다. 진효섭은 혹시라도 사람들이 들었을까 주위를 둘러보며 그를 말렸다.

“바, 밖에서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그럼 안에서는 해도 돼요?”

“……안 됩니다.”

단호한 대답에 안단테가 작게 웃었다.

“근데, 그런 말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내가 말한 뜻을 알아들었나 보네요? 예전에는 장난쳐도 못 알아듣더니.”

“그때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오. 지금은 그런 말 할 것 같고?”

“매번 하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제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상대가 놀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하하. 못 알아차리는 진효섭 씨도 재밌었는데. 아쉬워라.”

진효섭은 멀끔한 표정의 안단테를 바라봤다. 조금도 아쉽지 않은 표정. 그가 하는 말에는 알맹이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호감을 담은 말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해 아쉽다는 기색이지만, 정작 속내는 달랐다. 가까이하고 싶다는 듯이 굴면서 다가오진 않고, 깊어지고 싶다는 듯이 굴면서 손을 내밀면 거절한다.

지금 역시 말로는 맨몸 운동을 하자며 제안하지만, 실제로 그러자고 하면 안단테는 갖은 이유를 들어서라도 거절할 것이다. 결국 가볍게 구는 건 겉모습뿐이다.

어째서일까. 솔직히 진효섭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얼 숨기고 싶어 저렇게 가벼워 보이는 말을 하는 건지. 아니, 어쩌면 그가 하는 말에 크나큰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즐거운 유희일 수도 있고, 습관일 수도 있다.

그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결국 진효섭이었다.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 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집중하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탓이다.

“음, 그럼 뭘 하는 게 좋을까.”

가만히 손을 잡고 걷던 안단테가 다음 일정에 대해서 고민하며 진효섭을 흘끔 바라봤다.

“내가 아는 데이트의 끝은 보통 집 아니면 호텔인데. 내가 그쪽이랑 호텔을 갈 수는 없고.”

속으로 해도 되는 생각을 굳이 들으라는 듯 입 밖으로 꺼내며 고민하던 안단테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좋은 생각이 하나 났어요.”

새로운 놀잇거리를 발견한 듯 그가 눈을 빛냈다.

“나랑 예전에 일하던 사무실 가 볼래요?”

진효섭은 전에 길드원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예전 사무실이라면, 바다 앞에 있다던 곳 말입니까?”

“네. 가 보면 꽤 재밌을 거예요.”

안단테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진효섭의 손을 이끌었다.

조금은 궁금했던 터라 진효섭은 거절하지 않았다. 노아피 길드의 과거 사무실. 과연 어떤 곳일까. 지금 있는 곳과 크게 다르려나. 그가 없던 시절에 안단테가 있었던 장소라고 하니 묘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 호기심은 사무실 근처로 가지도 않아 폭삭 내려앉았다. 진효섭은 침묵한 채 안단테를 따라갔다. 사실 따라가는 게 아니라 끌려가는 수준이었다. 발걸음은 점차 느려졌고, 이게 맞나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진효섭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길드장님.”

“자기.”

“예?”

“자기라고 불러야죠. 길드장님이 뭐야.”

언제 자기라고 부른다 결론 났더라.

“힘들면 형이라고 불러도 되고.”

“…….”

진효섭은 고작 형 소리가 어려워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렵게 한마디를 뱉었다.

“……형.”

“응, 자기.”

안단테가 어두운 주위도 환하게 비출 만큼 화사하게 웃으며 진효섭을 돌아봤다.

“왜 불러요?”

“여기가 확실합니까?”

“당연하죠. 내가 전에 있던 사무실도 기억 못 하는 멍청한 놈으로 보여요? 자기도 참.”

“하지만…….”

진효섭은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사무실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 사람이 많이 다니는 평범한 거리에 있었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 낡고 허름한 간판이 가득한 거리에 들어섰다. 끊긴 인적. 무단 투기한 쓰레기들이 흩어져 있는 바닥. 수명이 다한 듯 깜빡이는 네온사인. 빈민촌, 혹은 슬럼가와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허름하고 어두침침한 거리였다.

도저히 사무실이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으나 안단테는 평온하게 진효섭의 손을 이끌었다.

“걱정 마요. 여기 맞으니까.”

그러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확실히 익숙해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진효섭은 어쩐지 불안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안단테는 짓다 만 건지 허물다 만 건지 모를 건물들을 지나, 개미굴처럼 복잡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외부로 빼 설치한 실외기들 탓에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이제 다 도착했어요.”

단단한 손끝이 골목 끝,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곳에 있는 회색 계단을 가리켰다. 진효섭은 멍하니 그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4층 건물에는 T에만 불이 들어오지 않아 MOTEL이 아닌, MOEL이라고 읽히는 붉은색 네온사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지 보이는 거라곤 외부 계단뿐인 건물에는 층마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딱 3층만 빼고.

“아, 추억이 샘솟네요.”

안단테는 어쩐지 즐거운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자물쇠가 걸리지 않은 3층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3층의 회색 문을 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