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45화
* * *
한편, 문자를 보낸 안단테는 말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시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으나 안단테는 불안함도, 아쉬움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덤덤하기만 했다.
옆에 있던 플랫이 그런 안단테를 보며 짜증스럽게 투덜댔다.
“왜요. 진효섭이 그만두기라도 한대요?”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로운 말투였다. 그는 어디서 입은 건지 모를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입술을 뒤틀었다. 평소였다면 알아서 치료했을 상처를 가만히 놔두고 있는 게, 예정과 달리 진효섭에게 가이딩을 받지 못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러게 왜 진실을 말했대. 원래는 끝까지 숨길 생각 아니었어요? 들어올 가이드를 골수까지 빼먹고 이용할 생각이었잖아요.”
“그건 나도 동감이에요. 효섭 형은 안 그래도 겁 많아 보이던데.”
체르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플랫은 동조에 힘입어 한껏 눈을 치켜떴다.
“단장이 가이딩 안 받겠다고 하는 것까지는 이해해요.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이번 일 말아먹을 생각은 아니죠?”
“그럴 리가.”
안단테는 휴대폰을 매만졌다.
“얼마나 기다렸던 건데 그럴 생각이겠어. 난 단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야.”
“뭘요?”
“그런 게 있어.”
“……뭐라고요?”
플랫이 씩씩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짜증이 폭발할 것같이 일렁거렸는데, 정작 안단테는 평온하게 휴대폰만을 바라봤다.
“플랫. 뒷세계에 갔다 와서 예민한 건 알겠는데, 진정해.”
“내가 진정이 되겠-!”
“진정하라고.”
안단테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위 공기가 무거워졌다. 중력이 더 강해진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플랫은 저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무거운 공간 안에서 안단테만이 가벼워 보였다.
“너, 원래부터 S급 가이드를 원했었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상의 컨디션으로 갈 걸 예상하고 벌인 일이었나?”
“……아니요.”
“그럼. 진효섭이 없으면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던가?”
플랫이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것도 아니요.”
“그럼 뭐가 문제야. 진효섭이 있든 없든 상관없잖아.”
진공상태처럼 주위가 조여들었다. 웃음기를 뺀 안단테는 평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얼마를 원하든 굴러 줄 C급이나 B급은 뒷세계에 널려 있어.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고간 부푼 개X끼처럼 부산스럽게 지랄이야.”
플랫에게 찌르르한 살기가 닿았다. 모든 공기가 날을 세우고 그를 적으로 돌리는 듯했다.
“여기서 제일 간절한 놈은 네가 아니야. 계속 내 판단에 왈가왈부할 거면 이대로 밖으로 나가. 데려갈 생각 없으니까.”
그저 겁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그대로 내칠 생각이 가득한 단호함에 플랫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전…… 그냥 걱정돼서 그렇죠. 빙빙 둘러 갈 필요가 어디 있다고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고요.”
“복잡할 게 뭐가 있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가이딩을 할 수 있는 가이드지, 진효섭이 아니잖아.”
안단테가 고개를 기울이며 플랫을 차갑게 바라봤다.
“아니면 뭐야. 그사이 진효섭에게 정이라도 붙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의외네. 가이드는 가이드일 뿐이라고 하더니.”
“아니-”
“그렇게 진효섭이 좋으면 내 본디지 파트너 자리라도 넘겨줄까?”
“그게 아니라요! 아, 진짜. 왜 갑자기 무고한 사람을 몰아가고 그래요?”
플랫이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요. 대체 예민한 게 어느 쪽인지 모르겠네.”
그러곤 작게 툴툴대자 안단테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예민했나?”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아니, 내가 예민할 이유가…… 아, 그러고 보니 곧 가을이네.”
“가을인 게 뭔 상관이에요?”
“나는 좀 상관이 있어서.”
안단테에게 가을은 예민해질 이유가 생기는 시기였다.
“뭐, 됐어. 아무튼 나도 진효섭을 쉽사리 내보낼 생각은 없어.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거라면 됐어요. 결과 만사 오케이지.”
상황이 얼추 소강되자 안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휴대폰을 바라봤다. 그는 휴대폰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답이 없는 진효섭에게 다시 한번 문자를 넣었다. 휴대폰 화면 위, 안단테가 찍어낸 문장이 반짝였다.
[무섭다면 그만둬도 괜찮아요.]
플랫에게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덤덤한 문자가 전송되자 잠잠했던 진효섭에게서 금방 답장이 왔다.
[그럼 가이딩은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안단테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는 다시 한 자씩 정성스레 쳐서 문자를 보냈다.
[유진에게 도움을 청해 봐야죠.]
이어질 반응이 기대됐지만, 그 이상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안단테는 만족했다. 무응답이 곧 그가 원하는 답이었으므로.
플랫에게 말했던 대로, 안단테는 진효섭을 놓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진효섭은 굴러들어 온 복덩이였고, 필요한 인재였으니까. 다만, 최근 들어 유진과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길래 그 속마음을 확실하게 알고자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추측이 진짜라면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 진효섭을 원활하게 길드에 묶어 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추측이 빗나가도 상관없다. 진효섭은 무른 구석이 있는 가이드였고, 안단테는 그런 가이드 정도는 얼마든지 손안에 넣고 주무를 자신이 있었다.
“실패는 한 번이면 족하지.”
안단테가 차갑게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일이었다. 그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이용하고, 뭐든지 할 생각이다. 지금 그에게 SS급 던전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 * *
오늘따라 출근하는 다리가 무거웠다. 아스팔트의 열기가 발목을 붙든 것 같았다. 처음 출근했던 한여름에도 괜찮았는데, 가을이 다가오는 지금에서야 왜 이러는 건지.
‘품에 있는 사직서 때문일까.’
진효섭은 더없이 무거운 종이를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이동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항상 지나가는 통유리로 된 카페가 보였다. 이제 사무실까지는 500m만이 남았다.
그런데, 유난히 빛나는 인물들이 카페 안에 있었다. 심지어 그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겼다 얼굴을 빼꼼 내밀어 다시 그들을 확인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나른해 보이는 안단테와 그 맞은편에 앉은 유진 가이드가 보였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다부진 체격에 다정한 얼굴을 한 안단테, 가녀리고 어여쁜 유진. 지나가던 사람들도 유리창을 흘끔거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개중에는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도 있었고, ‘잘 어울린다’라며 수군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래, 확실히 잘 어울렸다. 부정할 수 없는 그 사실에 진효섭은 또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차피 오늘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면 볼일 없을 사람들인데, 자신이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 말이다.
진효섭은 애써 시선을 떼고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카페를 지나치지 않기 위해 평소와 다른 길을 택한 터라, 사무실에는 출근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뛰어와서인지 숨이 조금 가빴다. 진효섭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익숙하게 가방을 내려놨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듯했다. 길드원들을 만나면 퇴사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하던 차였기에 다행이었다.
진효섭은 어제의 흔적으로 어질러진 탁자를 가볍게 치웠다. 몇 달 만에 익숙해진 일이었다.
어느 정도 치우고 나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덩달아 마음도 조금 안정됐다. 진효섭은 한숨과 함께 녹차를 우려 탁자에 놨다. 바스락, 얇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사직서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말하자. 길드장님이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면, 바로 말하는 거야. 노아피 길드에서 탈퇴하겠다고.’
그만두리라 다시 한번 다짐하는 순간, 완벽한 타이밍처럼 문이 열렸다.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역시 안단테가 맞았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진효섭 씨 출근했네요?”
“실례해요.”
유진이 안단테 뒤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저번에 뵀었죠? 진효섭 가이드.”
“아, 예……. 안녕하십니까. 유진 가이드.”
“기억해 줬네.”
그는 안단테의 팔을 꼭 안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반갑다며 웃는 그 얼굴이 얄미워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제 감정인데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다른 길드 사무실에 들어오는 게 예의가 아닌 거 아는데……. 내가 보고 싶다고 우겼어요. 단테가 있는 곳이라 한 번 와 보고 싶었거든요. 이해해 줄 거죠?”
“예에…….”
진효섭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들이 저번보다 훨씬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사이 무슨 이야기가 오간 걸까.
‘[유진에게 도움을 청해 봐야죠.]’
설마 벌써 도움을 청한 건가? 하지만 그는 아직 사직서도 내지 않고, 답도 듣지 않았다.
“고마워요, 진효섭 가이드.”
유진이 예쁘게 웃으며 안단테의 팔을 잡아끌었다.
“단테야, 네 자리는 어디야? 궁금해.”
“그래? 넌 궁금한 게 많네.”
묘하게 가시가 박힌 말이었지만, 표정이 부드러워서인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안단테가 유진을 이끌어 제 자리로 다가갔다. 그가 항상 앉던, 컴퓨터 모니터가 놓인 자리였다. 진효섭은 어쩐지 쉽게 다가갈 수 없던 그 자리를 유진은 제자리인 양 편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