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42화
“단테야.”
두 눈은 묘한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질투심이 아닌, 그저 쓸모없는 자존심이었다. C급 에스퍼라고 버려뒀던 것이 오랜만에 보니 맛있어 보이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마침 그 C급에게 본디지 파트너가 있다고 하니 심술이라도 난 듯했다.
아직도 안단테가 자신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옛날에도 그를 포함한 모든 에스퍼가 본인에게 빠져 있다고 오해하는 게 웃겼었는데.
그래도 안단테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라면 가이딩을 뺏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뒤에 찾아올 부작용이 X같긴 하지만…… 이번 한 번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왜 그래?”
“아까 하려던 거…….”
“아아, 그래.”
역시. 안단테가 속으로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너도 들키면 곤란할 거 아냐.”
“아니야. 난 상관없어.”
“그렇다면야.”
안단테가 어깨를 으쓱하며 진효섭을 바라봤다.
“진효섭 씨. 미안한데, 안쪽 화장실 써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좀 바빠서.”
그러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쉿’ 하며 검지를 입술 앞에 댔다. 잘하면 체르니 꼴이 날 것 같지만, 애초에 평판을 신경 쓰는 편도 아니니 이상한 소문이 나도 큰 상관은 없었다. 에스퍼나 가이드가 뒤에서 얼마나 더럽게 지내는지 다들 알기도 할 테고.
안단테는 진효섭이 사라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저 빨리 해치우고 끝내 버리고 싶었다. 개 같은 가이딩 따위 하지 않아도 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으로 적당히 원하는 걸 얻고자 얼굴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상은 이어지지 못했다. 진효섭이 어느새 그들 가까이 다가온 탓이다.
“여기서 이러시다가는 소문이 이상하게 날 겁니다.”
진효섭은 법의 심판이라도 지키는 단호한 판사인 양 굴었다. 반면 표정은 불안하고 심각하기 짝이 없어 조금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난 상관없는데.”
안단테가 유진을 흘끔 보자, 조금 굳은 표정이었으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나는 건 싫지만 진효섭에게 지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나 진효섭은 굴하지 않았다.
“코다 에스퍼가 불렀습니다.”
“코다가 불러요?”
“예. 급한, 일이라고요.”
훤히 보이는 거짓말에 안단테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딱딱한 입꼬리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진효섭은 다르게 해석했는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 진짜입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진효섭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유진을 붙들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유진, 다음에 연락할게.”
“……갈 거라고?”
“그래야지. 급한 일이라잖아.”
유진의 눈이 세모꼴이 됐다. 순수했던 표정이 표독스러워지자 조금은 볼만해졌다. 저 표정으로 그를 대했으면 조금은 관심을 끌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취향이었다.
“……예의 없어.”
안단테에게 하는 건지 진효섭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유진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마 진효섭에게 하는 말이리라. 진효섭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뭐 해요, 진효섭 씨. 가야죠. 코다가 부른다면서요?”
순간 진효섭의 얼굴이 난감한 빛을 띠며 굳었다. 일단 지르고는 봤는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이 부산스러웠다.
“저, 그게 사, 사실…….”
“사실?”
“코다 에스퍼가 부른다는 거……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거야 이미 알던 사실이었는데. 하지만 안단테는 속마음을 숨기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거짓말? 그런 거짓말을 왜 해요?”
“……죄송합니다.”
“이상하다. 혹시 내가 진효섭 씨한테 뭐 잘못했어요?”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진효섭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본인의 행동에 이유를 붙이기 어려워 보였다.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이 얼굴에 곧이곧대로 드러났다. 정말 읽기 쉬운 남자였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기분이 어떤지, 얼굴은 무뚝뚝한데 감정이 잘 드러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가끔 이해 안 되는 부분에서 어려웠고, 또 비밀스러웠다. 예를 들면, 저번에 유진 얘기를 꺼냈을 때와 지금처럼 말이다. 누가 봐도 분명히 질투하는 것 같았는데, 질투인가 물어보면 꼭 그건 아닌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안단테는 진효섭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뭐 때문일까. 저번부터 유진과 이어지면 이런 표정을 한단 말이지.
“혹시, 가이드의 자존심 같은 건가요?”
“예?”
“가이드들은 자기 길드 에스퍼가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 받고 다니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던데. 자신만으로 부족하다는 의미라고.”
진효섭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순박한 눈매가 밝아졌다. 답을 찾은 듯했다.
“예. 그거 같습니다. 왠지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진효섭 씨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안단테가 피식 웃으며 진효섭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생각 말아요. 내가 유진을 만나는 건, 그쪽이 뭔가 모자란 게 아니니까. 유진이랑은 7년 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그래요. 신해창이랑 같은 악연이죠.”
“신해창 에스퍼와 말입니까?”
“네. 유진이랑 신해창, 제 양성소 동기거든요. 진효섭 씨도 알죠? 가이드나 에스퍼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양성소에서 능력을 증폭 또는 안정시킨다는 거.”
“아, 예. 알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는 미성년자도 능력이 있으면 길드에 들어갈 수 있는 반면에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미성년자는 능력의 여부와 별개로 안전을 위해 양성소를 수료해야만 한다. 특별한 중학교나 고등학교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했다.
“그때부터 친하셨습니까?”
“친했다면 친했죠. 내가 유진의 본디지 파트너였으니까.”
진효섭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홀의 문 쪽에 얼굴을 비춘 코다를 보느라 안단테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만나도 신경 쓰지 마요. 그쪽이 부족해서 걔랑 만나는 거 아니니까.”
안단테는 안심하라고 한 말일 뿐이었는데, 진효섭에게는 어쩐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차가운 어조로 느껴졌다.
“가죠.”
“……예.”
진효섭은 그를 뒤따라가며 아릿한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건 무슨 느낌일까.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내내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속이 메스꺼웠다. 뭔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불쾌했다. 그것은 안단테와 유진이 키스하기 직전까지 상향 곡선을 그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떻게 봐도 연인 같던 그들의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직도 너를 신경 쓰고 있다면, 넌 어떻게 하려고?’
안단테는 유진과 신해창을 양성소 동기라고 했다. 심지어 유진은 본디지 파트너였다고. 그런데, 지금 유진의 본디지 파트너는 신해창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길드장님은 유진 가이드를 좋아하고 있구나.’
안단테는 유진을 좋아했지만, 유진은 신해창을 선택했다. 그러나 안단테가 유진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면, 얼추 상황이 이어진다. 게다가 오늘 본 바로 유진 또한 마음이 없진 않은 듯했다. 저번에 만났다는 것도 그렇고, 두 사람은 지금도 묘한 관계에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가슴속 불쾌함이 더 커졌다. 이 기분이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건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음?”
사무실 문 앞에 도착한 안단테가 발걸음을 멈췄다. 생각에 빠진 채 그 뒤를 따라가던 터라 진효섭은 자연스레 안단테 등에 이마를 쿵 박았다.
진효섭은 떨떠름하게 이마를 잡으며 안단테를 올려다봤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어깨 너머로 앞을 확인하자 피투성이인 남자 한 명이 보였다. 팔 한쪽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놀라서 몸을 굳히자 코다가 진정하라는 듯 가볍게 손을 잡아 왔다. 따듯한 손이 닿자 우습게도 진정됐다.
“이야, 신디잖아. 잘 다녀왔어?”
안단테가 웃는 낯으로 벽에 기대고 있는 신디에게 다가갔다.
“힘들었나 봐. 거지꼴이네.”
“…….”
신디는 말없이 무언가를 툭 던졌다. 안단테의 발치로 반짝이는 돌이 굴러왔다. 어두운 청록빛을 내뿜는 돌이었다.
“찾았…… 어…….”
“그래. 그렇네.”
안단테는 가공되지 않은 거친 모양의 돌을 집어 올려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를 보는 코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것이 뭔지는 몰라도,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쌍둥이는?”
“아직…… 주변… 정리…….”
“그래. 수고했어.”
“응…….”
신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울한 어조와 함께 표정에서 피로감이 묻어났다. 그는 안단테 뒤에 선 진효섭에게 시선을 줬다.
“가이딩이… 필요한데…….”
“아, 예. 알겠습니다.”
진효섭이 조금 당황하며 신디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지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금방이라도 가이딩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급박한 느낌이 들어 진효섭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마주 잡았다. 힘을 흘려보내자 신디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