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38화
고마운 마음에 진효섭이 감사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안단테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진효섭 씨한테 가이딩을 바랄 일은 없을 거니까 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예?”
“걱정 말라고요. 위험하게 만들 생각 없으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진효섭의 머리를 헤집었다. 다정한 표정만큼이나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앞으로 가이딩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순간 진효섭의 머릿속에 유진의 청초한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거…… 유진 가이드 얘기입니까?”
“음?”
안단테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여기서 갑자기 유진 이름이 왜 나와요? 아니, 그보다 진효섭 씨가 걔를 어떻게 알고 있어요?”
“오늘 신해창 에스퍼와 함께 뵈었습니다.”
“아, 옷 맞추러 가서요?”
진효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단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지 뚱하게 ‘좋지 않은 우연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뭔 얘기를 들었길래 갑자기 유진 가이드 얘기가 나왔을까.”
“유진 가이드께서…… 어제 길드장님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몸이, 안 좋으시다고도요.”
드디어 진효섭은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뱉어냈다. 처음에 운을 뗐던 것도 다 이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랬어요? 걔도 참, 더럽게 티를 내고 다니네요. 그것도 본디지 파트너 옆에서.”
안단테가 피식 웃었다. 날카로운 내용과 달리 재밌다는 투였다.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어제, 만나셨습니까?”
“네. 어쩌다 보니.”
유진 가이드가 했던 말이 진짜였구나. 사실임을 확인하고 나니 괜스레 기분이 더 이상했다. 요정 같은 외모에 사근사근하던 유진이 자꾸 떠올랐다. 어느 에스퍼라도 그런 가이드를 마다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같은 가이드인 그가 봐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웠으니까.
진효섭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분께…… 가이딩을 받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
안단테가 차 문에 손을 대며 진효섭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의 표정이 개구쟁이 같아졌다.
“아까부터 진효섭 씨 좀 이상하네요. 왜 유진 가이드랑 내 사이를 신경 써요?”
“…….”
“설마하니,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 그 말에 진효섭이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질투요? 제가 말입니까?”
조금도 생각 못 했다는 반응에 오히려 물어본 안단테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아니면 말고요.”
안단테는 ‘잘못짚었나’ 하고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착각했음에도 조금의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뭐 때문에 자꾸 물어보는 건진 모르겠는데, 전 누구한테서도 가이딩 받지 않아요. 가이딩 시 위험한 건 진효섭 씨뿐만 아니라 다른 가이드도 마찬가지거든요.”
“왜 위험한 겁니까?”
“그걸 꽤 늦게 묻네요.”
안단테가 피식 웃었다.
“그쪽도 가이딩할 때 느꼈겠지만, 저는 역가이딩이 가능하거든요.”
“역가이딩……?”
“왜, 그때 진효섭 씨도 느꼈을 텐데. 가이드가 원하지 않는데도 가이딩을 끌어냈잖아요. 그걸 역가이딩이라 불러요.”
“아, 예. 기억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사실 그것도 생각해 봤던 거라 진효섭은 놀란 기색 없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보통 에스퍼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역가이딩이라는 걸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좋겠죠. 그런데 그 조절이 생각보다 힘들거든요. 특히 몸 상태가 안 좋을수록,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더 심해요. 솔직히 말하면 그날, 진효섭 씨 좀 위험했어요.”
안단테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처음 가이딩했을 때, 내 상태가 많이 안 좋았거든요. 몸도 그렇고, 던전에 들어갔다 나온 뒤라 흥분한 상태기도 했고.”
“…….”
“그래도 했었던 이유는 그 자리에 다른 길드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날 말려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랬, 습니까.”
“네, 그랬어요. 그래서 두 번째 가이딩할 때도 코다를 불렀던 거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진효섭이 조심스럽게 그를 마주했다.
“하지만 그때는 역가이딩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죠. 그래서 내가 그날 얼마나 나 자신을 칭찬했는지 몰라요. 진심으로 그쪽을 눕혀 놓고 영혼까지 빨아먹고 싶었거든.”
그 말이 어쩐지 다르게 들려왔다. 진효섭이 굳어서 눈만 깜빡이자 안단테가 ‘그러니까……’ 하며 말을 늘였다.
“진효섭 씨는 나와의 가이딩을 조금 더 무서워할 필요가 있어요.”
안단테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진지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려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진효섭 씨는 끝없이 가이딩을 끌어내진 가이드의 말로가 어떤지 알아요?”
모른다. 알 리가 없다. 누구도 제힘을 텅텅 비워내고도 더 가이딩을 하지 않았으니까. 안단테는 침묵하는 진효섭의 명치를 검지로 짚었다.
“여기가 뻥 뚫리게 돼요.”
“……비유입니까?”
“글쎄요. 진짜라고 하면 진효섭 씨가 조금은 무서워할까요?”
그가 짚은 명치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가슴 정중앙이 뚫리면 당연히 죽게 되겠지. 그러나 진효섭은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저는 가이딩을 한계선이 넘을 때까지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그건 그쪽 생각이고.”
안단테가 손을 내렸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억지로 끌어내면 죽어요. 경험담이니까 믿어도 좋을 겁니다.”
그 말이 의미한 바를 이해한 진효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드장님, 그 말은-”
“밤이 늦었네요. 얼른 들어가서 푹 쉬어요.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가 땀을 좀 빼고, 사극영화라도 한 편 보고 잠들면 좋을 거예요.”
안단테는 먼지라도 털어 주는 양 진효섭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행동에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안단테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길드장님.”
“왜요?”
하지만 차가운 시선을 받으니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사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붙잡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잡았다.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 그가 외로워 보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랬다.
진효섭이 아무 말 않고 그의 소매를 꽉 잡았다. 답답한 행동에도 안단테는 재촉이나 닦달을 하지 않았다. 진효섭은 기나긴 시간을 흘려보내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가이딩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안 괜찮으실 겁니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뱉은 말이 고작 안 괜찮을 거란 한마디였다. 바보 같았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주변이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안단테는 진효섭의 의도를 생각보다 좋게 파악해 줬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가이드 한 명 죽이는 것보다야 내가 안 괜찮은 게 낫지 않을까요?”
뭐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진효섭의 말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심장이 점차 느려졌다. 처음에는 안단테가 눈에 보이기만 해도 쿵쿵 뛰던 심장이 이제는 죽은 것처럼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고장이 제대로 난 듯했다.
* * *
5일. 주문 제작한 옷이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분명 주문할 때는 넉넉잡아 한 달 정도는 걸릴 거라 했는데. 왜 이렇게 일찍 도착한 걸까.
“…….”
진효섭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옷을 들었다. 그가 봤던 카테고리에 있던 옷들과는 꽤 다른 디자인이었다. 이런 스타일로 얘기했었나 그때를 다시 생각해 봤지만 기억나는 거라곤 신해창과 함께 있었던 가이드의 얼굴뿐이었다.
“이게, 제 옷이 확실합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것 같네요.”
옷을 함께 들여다본 안단테가 악당처럼 낄낄 웃었다.
“일단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체르니한테 한번 물어봐요.”
진효섭이 기름칠이 덜 된 로봇처럼 삐거덕거리며 체르니를 바라봤다. 체르니는 환한 표정으로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형 거 맞아요. 우리 그때 이런 디자인을 해 달라고 했잖아요.”
정말 내 것이었구나.
진효섭은 다시금 옷을 들여다봤다. 사실 별로 독특하지 않은 쫄티였다. 색도 검은색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어떻게 해도 몸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작다는 게 문제였다. 아기 옷 같은 쫄티를 손에 들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아무래도 그날 치수를 잘못 잰 것 같습니다.”
“입어 보면 또 달라요. 그거 신축성이 좋거든요.”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작을 수가 있나. 입을 수는 있더라도 벗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정도로 짧으면 배꼽이 다 드러나지 않을까.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천이 모자라서 잘못 만든 실패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실제로 만들기 전에 작게 만들어 본 실험작이라든가.
그럼에도 안단테는 옷을 재차 권했다.
“일단 한번 입어 봐요, 진효섭 씨.”
진효섭은 옷과 함께 들어 있던 전표를 본 터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진효섭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그들 앞에 섰다.
“……다 입었습니다.”
혼자 화장실에서 옷을 입겠다고 고군분투를 한 터라 앞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억지로 집어넣느라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처음 입어 보는 옷이 어색한지 손은 자꾸만 밑단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