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꿀 발린 S급 가이드-36화 (36/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36화

“어머, 어서 오세요.”

데스크에 있던 여인 한 명이 밝은 얼굴로 뛰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체르니 에스퍼.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잘 지냈어요. 그보다 예약되어 있죠?”

“물론이에요.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물답게 매끄럽게 웃으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앉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얀 소파가 놓인 응접실이었다. 그녀는 이윽고 초록색 유리병에 든 물을 각각 앞에 내려 두며 책자 몇 종을 건네주었다.

“천천히 보고 계세요. 디자이너 선생님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체르니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를 손에 들었다. 팔랑팔랑, 책자를 넘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꽤나 즐거워 보였다. 그 안에서 어색한 건 진효섭뿐이었다.

“효섭 형, 이것들 좀 봐요. 형 스타일은 어떤 거예요?”

진효섭은 체르니가 내민 책자를 가만 내려다봤다. 뭔가 했더니, 온통 옷으로 가득했다. 그것도 평범한 옷이 아니었다.

“이건…… 단복입니까?”

“정답.”

체르니가 환하게 웃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우리 단장님이 진효섭 씨한테 옷 한 벌 사 주라고 말했거든요. 앞으로 모임에 많이 불려 갈 수도 있을 텐데, 있으면 좋을 거라고.”

아, 그런 거였구나. 진효섭이 떨떠름하게 다시 책자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저번 모임에 갔을 때, 하나같이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책자에 있는 옷들과 유사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그때 노아피 길드는 맞춰 입는 단복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 걸 왜 기억하는…… 아니, 그게 아니라. 흠흠, 앞으로 우리도 맞춰야죠. 그것보다 얼른 골라 봐요. 어떤 스타일이 좋아요?”

체르니가 얼른 골라 보라며 진효섭에게 재차 책자를 내밀었다. 펼쳐진 책장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옷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달라붙는 게 좋더라. 몸 윤곽이 드러나서 섹…… 이 아니라, 달라붙으면 기동성이 좋거든요. 편하고.”

“그렇습니까.”

진효섭은 어색하게 책자를 뒤적거렸다. 옷을 고르는 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디자인을 보는 눈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 옷은 편하고 세탁하기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럼 내가 마음대로 골라도 된다는 거예요?”

“예.”

덤덤한 대답에 체르니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체르니는 평소보다 훨씬 더 기분 좋게 흥얼대며 책자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딱 봐도 감각적으로 옷을 잘 입는 체르니였으니, 진효섭은 자신이 고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와, 정조대도 파네. 죽인다.”

“…….”

물론, 위험한 물건을 중얼거릴 때마다 체르니에게 선택을 맡긴 게 잘못된 건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말이다.

“어머, 체르니 왔네?”

멀리서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안단테 얼굴 볼 줄 알았는데, 아쉽다.”

“뭐예요. 나보다 단장이 더 낫다는 거예요? 취향 독특하네.”

그가 입을 가리며 독특하게 웃었다.

“후후후, 너도 좋지만 안단테는 영감이 떠오르는 얼굴이잖아. 금욕적인 얼굴에 저열한 말투랑 관능적인 분위기까지. 완벽한 피조물이지 않니?”

“완벽하긴. 우리 단장만큼 불완전한 인간은 또 없을 건데. 디자이너가 보는 눈이 영 별로네요.”

체르니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책자를 내려놨다.

“그보다, 우리 가이드한테 어울리는 것 좀 보여 줘요. 책자에 있는 건 영 마음에 안 들어.”

“가이드? 어머, 옆에 있는 분이 너희 길드 소속 가이드야?”

디자이너가 진효섭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눈에서는 레이저가 쏟아질 것 같았다.

“어머머. 내 그럴 줄 알았어. 너희 길드는 얼굴 보고 뽑는 거지?”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확신했다면서 디자이너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너무 잘생겼다.”

“……감사합니다.”

진효섭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살면서 처음 듣는 외모 칭찬이었다. 보통은 에스퍼인 줄 알았다거나 가이드치고는 너무 건장해서 별로라는 듯이 말하고는 했었으니까. 쑥스러워하며 뺨을 긁자 디자이너는 감명받은 얼굴로 진효섭의 주위를 빙그르르 돌았다.

“어쩜, 성격까지 완벽해.”

“예?”

“첫인상은 차갑고 무뚝뚝해 보였는데, 입을 여니까 완전 다른 느낌이네. 순박하고 착해 보이잖아. 꼭 순한 도베르만 같아.”

체르니는 말리기는커녕 실실 웃으며 공감했다.

“그쵸? 완전 우리 단장이랑 정반대예요.”

“후후후!”

두 사람은 진효섭을 두고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옷감의 색부터 시작해서 디자인을 상의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틈은 없었다. 진효섭은 그저 처음 와 보는 장소를 신기하게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길드장님이 예약해 주신 건가?’

체르니가 한 말에 따르면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예약만 하고 함께 오지 않은 걸까. 아직도 몸이 별로 좋지 않나? 생각해 보면 그는 간헐적으로 잠적하곤 했다. 그 타이밍을 조합해 보니, 힘을 쓴 이후 아니면 가이딩 후였다.

‘그렇다면 역시 이유는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열병이 올라 나오질 못하는 것이다. 성감이 강하게 치솟아서 괴로울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진효섭은 괜스레 민망해졌다. 이번에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으므로. 혹시 그가 자신을 생각하며 홀로 위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얼굴이 붉어졌다. 우습게도 불쾌감이 아닌 부끄러움이 먼저 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효섭은 자연스레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그러곤 저도 모르게 아는 척을 했다. 들어왔던 남자 역시 진효섭을 보고 ‘아’ 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진효섭 가이드.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입니다, 신해창 에스퍼.”

진효섭은 인사를 나누면서도 신해창과 자신이 이렇게 아는 척을 할 만한 사이인가 내심 고민했다. 그러나 신해창은 진효섭의 아는 척이 불편하지 않았는지 여자의 안내를 마다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옷을 맞추러 오셨나 봅니다.”

“아, 예. 어쩌다 보니…….”

신해창이 옆에 있는 체르니를 흘끔거렸다. 체르니는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뭐야. 되게 친한 척하네. 효섭 형, 신해창이랑은 저번에 한 번 만나 본 게 다인 사이 아니에요?”

적대감마저 느껴지는 말투에 진효섭이 조금 당황해서 체르니와 신해창을 번갈아 봤다. 안단테와도 그랬지만 썩 친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해창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체르니였던가. 불미스러운 일로 모임에 출입 금지를 당한 C급 에스퍼.”

“고작 가이딩 받은 것 정도로 불미스럽기는. 다들 너무 고고한 척하는 거지. 어차피 다들 뒤에서 하는 짓이잖아요?”

체르니가 건들대며 웃곤 이어 말했다.

“그리고, 가이드가 자기 파트너 물건이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으면 거기서 그럴 마음이 들었겠어요. 안 그래요?”

“글쎄. 그건 모르지만, 네 행동이 너를 죽일 뻔하긴 했지.”

“안 죽고 살았으면 됐죠, 뭐.”

신해창은 미간을 찌푸리곤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지난 일에 더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니, 어쩌면 타 길드의 에스퍼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신해창 뒤에서 누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해창아, 누구야?”

하얗고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요정 같은 사람. 성별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가느다랬는데, 목소리가 조금 낮은 게 남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여기는 노아피 길드 소속 가이드 진효섭 씨. 그리고 진효섭 씨, 여기는 우리 국가안보국 소속 가이드 유진입니다.”

“아.”

진효섭은 같은 가이드라는 소개를 듣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쩐지,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신해창과 함께 온 데다가 지켜 주고 싶은 여린 느낌이 딱 이상적인 가이드 같았다. 한편, 유진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노아피 소속 가이드?”

검은 눈동자에 묘한 빛이 서렸다.

“노아피에 가이드가 있었어?”

“그래.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래?”

유진은 어쩐지 미묘한 표정으로 진효섭을 빤히 바라봤다. 생채기 하나 없는 투명한 얼굴이 살짝 부루퉁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뭐, C급이려나…….”

“예?”

“아, 아니에요.”

빙그레 웃은 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진효섭 가이드. 다시 소개할게요. 저는 국가안보국 소속 S급 가이드, 유진이에요.”

“진효섭입니다.”

진효섭이 짧게 이름을 밝히며 유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잡는 것도 황송하게 느껴져서 진효섭은 조심스레 손을 뗐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외모에 S급 가이드라니. 신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곱씹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쪽도 옷을 맞추러 왔나 봐요.”

“예. 길드장님이 예약해 주셨습니다.”

“단테가요?”

“예? 아, 예.”

어쩐지 안단테와 친분이 있어 보이는 말투였다. 신해창 에스퍼와 안단테가 아는 사이인 거야, 같은 에스퍼에 길드장이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이드와 아는 사이라는 건 의외였다.

“같이 안 왔나 보네요.”

여기저기를 훑어 안단테가 없다는 걸 확인한 유진의 표정에 실망이 조금 묻어났다.

“하긴…… 어제,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긴 했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