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35화
* * *
물방울이 뺨을 타고 뚝 떨어졌다. 몸을 아주 작게 말아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사각형의 욕조는 진효섭에게 아주 만족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코다가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서였다.
“위험…….”
그와의 가이딩이 위험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진효섭은 답답함에 머리를 더 수그렸다. 물이 턱에 닿아 찰랑거렸다.
‘돈을 받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라도 만들어 줘야겠네.’
정당한 이유. 위험한 가이딩. 조합해 보면 거액의 돈이 정당한 이유가 될 만큼 안단테와의 가이딩은 위험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가 주려던 9억은 진짜 위험수당이었던 걸까.
만약 오늘 서로의 향을 맡고 체질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진효섭은 예정대로 가이딩을 하다가 그 위험에 대해서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안단테가 오늘 부른 것도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정작 일은 이렇게 됐지만.
진효섭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물로 씻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물에 씻겨 내려갔다.
‘사실 예상되는 게 몇 가지 떠오르지만…….’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 봤자, 모두 추측에 불과했다. 결국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물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단테는 정말 어려운 사람이다. 그에 대해서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진효섭은 다시 안단테라는 인간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나를 알게 되면 또 의문이 하나 생긴다. 그렇게 물어볼 건 산더미같이 쌓여간다. 왜 S급 가이드인 자신이 완벽하게 가이딩을 할 수 없는 건지. 상처는 왜 사라지지 않는 건지. 어째서 가이딩이 위험한 건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비밀이 많은 걸까. 자신이 할 말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안단테를 보면 수상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믿거나 가까이해서 좋을 것 없어 보이는 남자. 그런데도 이상하게 별로 싫지 않았다. 향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안단테는 그에게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입이 저열하지만, 강압적이지는 않다. 권위적이지도 않으며, 제게 욕심을 드러내는 법도 없었다. 게다가 사람 자체가 참 독특…… 아니, 이상했다.
안단테는 그를 두고 알 수 없다는 둥 수도사라는 둥 별말을 다 했다. 하지만 진효섭은 그 말을 그대로 안단테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얼굴은 고급스럽게 생겨서 말은 천박하고, 가벼운 태도로 일관하지만 정작 깊은 관계는 사절하고, C급인데도 S급 가이드의 가이딩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위급 에스퍼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열등감 따위도 없다.
비슷한 체질에 전혀 다른 향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남자. 자신과 비슷한 듯 다른 안단테에게 진효섭은 묘한 동질감과 함께 궁금증을 느꼈다.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진효섭은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안단테를 떠올리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향 때문인지, 아니면 제 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서 이상했다. 그만 떠올리면 계속 이 모양이었다.
얼굴을 붉힌 채 진효섭은 한숨을 쉬었다. 물에 비친 얼굴은 자신이 봐도 멍청했다. 마치 처음 마주하는 감정에 낯설어하는 어수룩한 사내 같았다.
* * *
한편, 진효섭이 나선 사무실에는 안단테 혼자 남아 소파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혀 뚜렷한 목젖부터 목선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졌다.
딸깍.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리고, 코다가 들어왔다.
“진효섭 씨는 잘 들어갔어?”
“예.”
“수고했어.”
코다는 오늘따라 멍한 안단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드물게 먼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가이딩을 하면 주로 기분이 안 좋지 않습니까.”
“응. 그랬지. 근데 진효섭 씨는 좀 괜찮아. 아니다. 좀이 아니라 많이 괜찮아. 그래서 큰일이야. 나는 괜찮은데 그쪽은 괜찮지 않을 것 같거든. 알다시피 나랑 가이딩하면 가이드들은 좀 위험하잖아?”
안단테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올해까지는 붙들어 놔야 하는데,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 아닐까 몰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오늘 단장님과의 가이딩이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안단테가 고개를 바로 했다.
“말했어?”
“예.”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코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단테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흠. 용감한 건지, 안전불감증인 건지.”
“저번에 직접 부딪혀 봐서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눈치가 빠른 놈이었으면 여기 있지 않았겠지. 이미 도망쳤을 거야.”
안단테는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마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아. 제 목숨이 간당간당한지 모르니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있는 거지.”
“…….”
“됐어. 이제 두 번 다시 가이딩할 생각 없으니까.”
침묵하던 코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면…… 다른 가이드보다 뛰어난 건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뜻이야?”
“단장님이 강제로 역가이딩을 해도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당시에 그렇게 피곤한 기색을 했을 리가 없잖아.”
“…….”
“진효섭도 내 가이딩을 감당할 수는 없어.”
단호히 말한 안단테가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처음부터 기대는 없었다. 그렇기에 실망도 없다. 어차피 이 세상에 제 독을 말끔하게 없앨 가이드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안단테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또 자리를 비우게 될 거야. 알다시피 내가 가이딩만 받으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잖아. 알아서 자중해야지.”
안단테는 감정을 갈무리하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뒷일은 너한테 맡길게.”
사무실을 나가는 그에게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가이딩을 조금이라도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 * *
“형.”
체르니는 진효섭이 출근하자마자 그의 무릎에 턱을 괴곤 눈을 반짝거리며 뚫어지게 올려다봤다. 그의 머리 뒤로 붉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오늘 나랑 밖에 나가요.”
“지금은 근무시간입니다.”
“근무는 다 끝났잖아요. 플랫이랑 코다 가이딩으로 끝 아니에요?”
“일은 끝나도, 아직 근무시간입니다.”
한결같은 거절이었다. 체르니도 진효섭이 성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본래라면 입술을 삐죽이며 물러날 터였다. 그러나 오늘 체르니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요. 오늘 나가는 건 근무의 일환이거든요.”
“새로운 일이라도 들어왔습니까?”
“네!”
저번 유치원에서의 일 이후로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니 해결사 길드에 들어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했던 일이라곤 유치원에서 사진 찍기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진효섭은 두말하지 않고 체르니를 따랐다. 어차피 사무실에 있어 봤자 그가 하는 일은 가이딩뿐이다. 심지어 오늘 치는 이미 끝냈다. 대략 여덟 시간 정도인 근무시간 중 가이딩을 하는 시간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요즘 들어 플랫과 체르니, 코다를 돌아가면서 가이딩한 탓인지 속이 텅텅 비어 지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없는 거랑 찌뿌둥한 것은 또 달랐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고 활동적인 일을 하면 활력이 살아날 것 같았다.
진효섭은 가볍게 어깨를 주무르며 가방을 멨다. 방금 가이딩을 다 끝내서 그런지 힘이 쭉 빠졌다.
‘그러고 보니…….’
매일같이 세 명에게 가이딩한 지 일주일째. 그들의 몸은 나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이 되면 저녁보다 더 엉망이 되어 나타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런 건지. 그들이 퇴근한 이후, 뒤를 밟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형, 얼른 가요, 얼른.”
의아함에 빠져 있자니 체르니가 즐거운 얼굴로 그를 이끌었다.
“……예.”
진효섭은 찝찝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체르니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길드장님처럼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면…… C급이 아니라든가.’
등급표에는 분명히 C급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자꾸만 C급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당연한 의심이었다. 아무리 봐도 강해 보이는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단. S급과의 친분. A급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태도. 이제 와 의심을 하는 게 한참 늦었다 싶을 정도였다.
만약 추측이 진짜라면 그들은 어째서, 왜 등급을 숨기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숨길 수 있었던 걸까. 뭘 원하는 걸까.
그때, 깊은 생각에 잠긴 진효섭의 팔을 체르니가 두어 번 잡아당겼다.
“형, 도착했어요.”
몇 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도착했나 싶어 진효섭이 뒤늦게 주위를 둘러봤다. 체르니가 가리킨 곳은 노아피 길드 사무실 옆에 있는 5층 건물이었다. 독특하면서도 트렌디한 외관에 지나가면서 매번 감탄했던지라 익히 알던 건물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의뢰가 들어왔습니까?”
이 정도라면 돈을 꽤 받겠구나 싶어 진효섭은 멍하니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체르니는 실실 웃으며 어중간하게 대답했다.
“음, 의뢰는 아니고요.”
“그럼 뭡니까?”
“들어가 보면 알 거예요.”
체르니는 진효섭의 등을 떠밀었다. 자동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가 먼저 그들을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