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28화
“저, 는……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왜, 사람이 함께하다 보면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다시는 안 보고 싶기도 하잖아요?”
안단테는 진지했던 게 거짓말인 양 다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때 내가 자꾸 질척대면 이런 방법을 써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뿐이에요.”
“……왜 그럴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그럼 진효섭 씨는 왜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길드장님이 저에게 집착하실 분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실 안단테는 진효섭이 S급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어떻게든 잡고 싶어 하거나, 길드에서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자유로운 성격이 드러난 것이다. 진효섭은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제가 지금 당장 길드를 나간다고 해도 길드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실 것 같습니다.”
세상에 가이드는 많고, 노아피에는 굳이 S급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네요.”
안단테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괴며 진효섭을 바라봤다.
“근데 오해하지는 말아요. 진효섭 씨가 싫거나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S급 가이드가 우리한테 너무 과분해서 그런 것뿐이니까.”
“과분합니까?”
“그럼요. 고작 C급 길드에 S급 가이드라니.”
말도 안 된다며 안단테는 넌지시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진효섭은 그의 말에 동감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하지만 전 길드장님께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진효섭이 키스로 가이딩을 했을 때 안단테의 눈 색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상처 역시 당시에 입은 것만 사라졌고, 원래 있던 상처는 조금 옅어진 데 그쳤다. 즉, 그를 완벽하게 가이딩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밑도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힘에 진효섭은 그의 몸 상태가 어땠는지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다. 어쩌면 완벽을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미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단테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엄청나게 도움 됐어요.”
“하지만…… 눈 색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몸에 상처도 여전했습니다.”
“눈 색이 바뀌지 않은 건 흥분해서라고 말했잖아요. 그리고 원래 제 몸에 있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거예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니…….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안단테는 미묘한 표정으로 진효섭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봤다.
“듣고 싶으면 베갯머리송사 정도는 돼야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베갯머…… 예?”
“무슨 뜻인지 몰라요?”
“처음 듣습니다.”
아쉽다는 듯 안단테가 작게 혀를 찼다.
“우리 진효섭 씨가 사극과는 취향이 멀었나 보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사극 드라마를 봐 봐요. 첩들이 왕에게 자주 하는 거 있어요.”
진효섭은 도무지 짐작되는 게 없어 순진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아무리 한국인이라지만 외국에서 오래 산 탓에 그는 어려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사극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말이라니. 진효섭으로서는 안단테가 괜히 가르쳐 주기 싫어서 말을 어렵게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그는 숨기는 게 있다. 더 물을지 말지 고민하느라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자니 안단테가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애들이 이제야 오나 보네요.”
진효섭 또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길드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 갑자기 무슨 놈의 긴급 소집이에요. 별일도 없어 보이는구먼.”
“귀찮아…….”
제일 먼저 플랫이 배를 벅벅 긁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성가신 기색이 가득했다. 그 뒤로 피곤한 얼굴의 체르니가 들어왔다. 코다와 쌍둥이는 말없이 뒤를 잇따랐다. 하나같이 안단테처럼 집에서 방금 나온 듯한 차림이었다.
진효섭은 어쩐지 그들의 등장에 마음이 편해졌다. 신해창과 있을 때는 무겁게만 느껴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평소와 같이 느긋해졌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에요? 흐암.”
하품을 쩌억 한 플랫이 안단테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정확히 신해창이 앉았던 자리였다. 같은 자리였지만 반듯했던 신해창과 달리 플랫은 소파에 몸이 닿자마자 늘어졌다.
“엄청난 일이 있었지.”
“엄청난 일? 왜요. 또 게이트가 열렸어요?”
“아니. 그것보다 더 엄청난 일.”
플랫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게이트가 열린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도는 듯했다.
“뭔데요?”
“방금 우리 길드에 신해창이 다녀갔어.”
“신해창? 국가안보국의 길드장 신해창이요?”
“그래.”
“오…….”
어느새 늘어진 몸을 반쯤 일으킨 플랫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고, 쌍둥이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라워하는 게 아니라 흥미로워하는 반응이었다. 마치 신해창이 노아피 길드를 다녀갈 걸 예상했다는 듯이.
“뭔가를 알아챘나 봐.”
“냄새를 맡았나 봐.”
쌍둥이를 포함한 모든 길드원이 두 눈을 반짝이며 안단테를 바라봤다. 그들은 눈빛으로 신해창이 찾아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안단테는 길드원을 차례대로 훑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너희들은 오전부터 사무실을 지켜야 할 거야. 가이드를 혼자 둘 수 없게 됐거든.”
“효섭 형이요?”
잠자코 있던 체르니가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길드원 역시 진효섭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오전에는 효섭 형 혼자뿐이었네요. 그럼 단둘이었다는 건데…….”
체르니의 미간에 금이 갔다. 멀리에 서 있던 코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묘한 분위기에 플랫이 짜증을 내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뭐야.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요.”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안단테에게 집중했다. 체르니는 진효섭 옆에 찰싹 달라붙었고, 쌍둥이는 플랫이 앉은 소파 끝 등받이에 각각 걸터앉았다. 중요한 얘기가 이어질 것을 예상한 행동이었다.
“빨리 말해 봐요. 오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 모든 주위를 이끌고서야 안단테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놈이 진효섭 씨가 우린 차를 마시고 있었어.”
“그리고요?”
“그것뿐인데?”
“예?”
“……?”
“…….”
플랫과 코다가 눈을 깜빡였다. 플랫은 황당해했고, 코다는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드물게도 낮은 한숨을 쉬었다. 황당함과 어이없음 속에서 안단테는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놈이 우리 가이드가 우린 차를 마셔 봤잖아. 아직 나도 못 마셔 봤는데.”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진효섭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신해창이 자신과 만났다는 것 자체에 커다란 문제라도 있는 건가 했더니.
급기야 모든 길드원이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안단테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불공평해. 난 길드장인데, 다른 에스퍼보다 못해진 거 같다고.”
한없이 진지한 말에 진효섭은 나지막하게 권할 수밖에 없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정말요? 그럼 너무 좋죠.”
안단테가 빙그레 웃으며 좋아했다. 진효섭이 자리에서 일어나 녹차를 우리러 가자 길드원들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끔 우리 단장을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나도.”
체르니의 대답에 이어 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의견이 일치하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플랫의 뒤에서 흥미롭게 사태를 바라보던 쌍둥이도 한숨을 쉬었다.
“뭐야. 김샜네.”
“맞아. 김샜어.”
쌍둥이는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가 제자리로 갔다. 그러곤 딱 달라붙어서 항상 보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아, 맞다. 플랫, 돈 확인했어?”
“아, 맞다. 체르니, 돈 확인했어?”
그것도 잠시, 쌍둥이가 동시에 묻자 플랫과 체르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확인해 보라는 듯 쌍둥이가 휴대폰을 가리키자, 두 사람은 각각 휴대폰을 켜 들여다봤다. 곧 그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리디안과 도리안의 이름으로 보낸 1억이 계좌에 찍혀 있었다.
“뭐야, 이게?”
“아! 알겠다. 그거 아냐? 우리 내기했었던 거.”
체르니가 기억나지 않냐며 안단테가 던전에서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이름 모를 에스퍼와 내기했던 얘기를 꺼냈다.
“아, 그 새끼들? 결국 받아냈네? 10억을 가지고 있어 보이진 않던데.”
“그거야 뭐……. 여러 가지로. 그치?”
“응. 여러 가지로……. 그치.”
쌍둥이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음흉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내기?”
처음 듣는 얘기인 터라 안단테가 고개를 갸웃하자 체르니가 설명을 더했다. 어째서인지 길드 옆에 붙어 깝죽거리다 도합 20억이 떼먹혔다는 이야기를 비교적 간단하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뭐야, 그런 재밌는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도 가르쳐 줬어야지.”
대충 파악한 안단테는 자신이라면 20억을 더 붙였을 거라며 작게 투덜댔다. 그들은 일이 억도 아니고, 몇십 억을 너무 쉽게 입에 올렸다.
진효섭은 현실감이 없어서 뭐라 반응도 하지 않고 가만 듣기만 했다. 사실 그저 장난이라고 치부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친구와 길을 가다가 같은 이름인 건물을 보면, 자신이 하나 사 뒀던 건물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 내가 내기의 중심이었으니까, 수수료로 50퍼센트씩 받는 게 도리 아닐까?”
그때, 안단테가 작게 손뼉을 치더니 쌍둥이를 향해 오른쪽 손바닥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