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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발린 S급 가이드-27화 (27/203)

꿀 발린 S급 가이드 27화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고 뛰어왔는데, 늦어 버려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진효섭은 어색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한 말은 모든 게 과했지만, 적어도 마지막 말만큼은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차림이 그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단테가 빙그레 웃으며 진효섭의 머리를 가볍게 도닥였다. 신해창은 그런 그들을 표정 없이 바라보다가 손목시계를 다시 흘끔거렸다.

“슬슬 얘기를 하고 싶은데.”

“말해.”

짧은 답이 마치 할 말만 하고 빨리 꺼지라는 축객령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안단테가 정말 미친 게 아니냐고 혀를 내둘렀을 텐데 정작 신해창은 덤덤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주일 전, 네가 다녀간 해변에서 비정상적인 게이트가 생성됐다지.”

“그랬었나?”

안단테는 심드렁한 낯빛으로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댔다. 조금도 집중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타난 지 30분 만에 사라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던전에 들어갔나?”

피식 웃은 안단테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갑자기 생긴 던전에 어떤 위험이 있을 줄 알고 들어가? 고작 C급 에스퍼 나부랭이가 짊어질 리스크는 아니지.”

“하지만 너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즐기는 편이지. 그러니 저번에도 A급 던전에 들어가라는 도발에 응했던 거고.”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내가 A급에 들어간 이유는 입구에서 청소만 하는 전제였기 때문이야. 어차피 한 번은 들어가야 하는 던전, C급에서 C급들과 있는 것보다는 능력 있는 A급들과 A급 던전에 같이 들어가는 게 덜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거든.”

신해창은 매끄럽게 대답하는 안단테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 입구에만 있었다고?”

“당연하지. 네 주위 A급한테 물어봐. 내가 얼마나 열심히 디버프를 해 줬는지.”

“같이 들어간 네 길드원은 어딨었지.”

“모르지. 걔는 워낙 조용히 움직이는 타입이라.”

“길드원과 함께 들어갔는데 따로 행동하는 이유는?”

“우리 길드원은 나랑 같이 싸우는 거에 익숙하지 않아. 다들 개인플레이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던전을 들어가는 게 어렵다며 안단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청렴함을 주장하듯 한 치의 멈칫거림도 없는 완벽한 대꾸였다. 그러나 신해창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네가 들어갔던 A급 던전. 가장 안쪽 중앙에 있어야 할 핵이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누가 빼내 간 것 같다고 하더군.”

안단테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들어가서 빼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래.”

“하.”

정말 어이가 없다며 안단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야 원. 누가 들으면 내가 S급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그날 같이 들어갔던 에스퍼들한테 물어보라니까.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네가 길드원을 시켜 핵을 빼내 오라고 했을 수도 있지.”

“고작 C급이 그런 일을 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하하, 지나가던 개가 비웃겠네.”

“…….”

“왜, 걔도 나도 죄다 S급 같아? 우리 길드원 등급표라도 줄까?”

안단테가 다리를 꼬며 빈정거리듯 웃어댔다. 얄밉기 그지없는 태도에 다른 S급이었다면 주먹을 날려도 여러 번 날렸을 텐데, 신해창은 별말 없이 넘겼다.

“됐다.”

“이제 의심이 풀렸어?”

“아니.”

신해창은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한 손끝이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작은 손짓만으로 옷은 방금 다리미질을 한 것처럼 빳빳해졌다.

“더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듯하니 돌아가겠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해 두지. 안단테. 꼬리가 길면 밟힐 거다.”

“난 꼬리 없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네가 뭔가를 꾸미는 것 같아 의심스러우니까.”

“이유는?”

“감.”

안단테가 작게 웃었다. 아까처럼 상대를 놀리듯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의심하는 상대를 두고도 기분 나빠 하기보다는 즐거워했다.

“음, 감이라고 하니 할 말은 없다만…… 친구끼리 의심하니까 섭섭하긴 하네.”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는지 모르겠군. 적어도 너는 날 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너무하네. 난 네가 유일한 친구였어. 우리는 많은 걸 같이한 사이잖아. 같은 구멍도 드나들고.”

저속한 표현에 신해창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나 반듯하던 얼굴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안단테의 이런 면이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이었다.

“그 저질스러운 언변은 언제 고칠 생각이지?”

“난 뒤뜰에 있던 개구멍 말한 거였는데?”

“……개새끼가 따로 없군.”

신해창은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안단테. 언젠가 네가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기를 간절히 바라지.”

“응원 고마워.”

능글맞은 대답에 신해창은 더는 말 섞고 싶지 않다는 기색으로 안단테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 볼일 없다는 듯 문을 향해 몇 발짝 옮겼을까, ‘아’ 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는 진효섭이 담겼다.

“진효섭 가이드. 차 잘 마셨습니다.”

진효섭은 자신을 향한 정중한 인사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신해창이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혹여나 저놈을 고소하고 싶으면 제 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변호사를 선임해 드리겠습니다.”

“…….”

“그럼 이만.”

다음에 뵙겠다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신해창은사무실을 나섰다. 그에 안단테가 작게 혀를 찼다.

“역시 나랑은 안 맞다니까.”

진효섭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누가 봐도 신해창이 평범하고 안단테가 특이한 거였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안 맞다는 데 극히 동조하는 바였다.

불현듯 안단테가 진효섭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물기를 머금은 채 진효섭을 바라봤다. 약간 부루퉁한 것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진효섭 씨, 진짜 날 고소할 생각은 아니죠?”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구겨진 옷차림 때문인지 안단테가 어리게 보였다. 그에게 잠깐 시선을 뺏겼던 진효섭이 뒤늦게 대답했다.

“……고소 안 합니다.”

“대답이 좀 늦는데. 잠깐 고민한 거 아니에요?”

안단테가 너무하다며 입술을 삐쭉였다. 어려 보이는 외관 탓인지는 몰라도, 진효섭은 오늘따라 안단테가 체르니처럼 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정말?”

“예.”

단호한 확답에 안단테가 눈을 휘며 ‘하하’하고 웃었다. 장난기가 다분했다. 분명 키스를 하고 일주일 만에 만나는 건데, 어제 만났다가 헤어진 것 같은 친근함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안단테에 진효섭은 어색한 건 자신뿐인가 싶었다.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예쁘게 휘어지는 안단테의 입술에 시선을 보냈다. 우습게도 그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안단테와 키스 가이딩을 끝낸 당일, 그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열이 올라 괴로웠었다. 하지만 안단테의 얼굴과 묘한 향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게 더 괴로웠다. 그 여파가 얼마나 크던지, 체르니가 다음 날 사무실 문을 닫을 거라 말해 주지 않았다면, 진효섭은 무단결근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일주일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지금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었다. 다들 한다는 키스 가이딩. 고작 그 정도로 말이다.

그 역시 똑같은 것을 느꼈을까. 아니면 제 몸이 이상해서 생긴 현상일 뿐이었을까.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자신의 몸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아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효섭은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안단테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장난이고, 그냥 해도 돼요.”

생각이 복잡했던 터라 곧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뭘 말입니까?”

“고소요.”

안단테가 빙그레 웃으며 재차 말했다.

“내가 짜증 나게 하면 그냥 고소해 버려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좋겠다며 안단테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나른하게 풀려 있는 게, 잠에서 덜 깬 사람 같았다.

“사실 저번 가이딩 때 내가 알아차린 게 하나 있거든요. 어쩐지 나중에 내가 그쪽한테 귀찮게 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무슨…….”

“하지만 나는 에스퍼라 고소당해도 교도소까지 가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신해창에게 부탁한다면 내가 그쪽 주위를 얼쩡거리지 못하게는 할 수 있겠죠.”

“잠깐.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진효섭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안단테는 미묘하게 웃으며 눈썹을 가리는 진효섭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시선은 입술을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어쩐지 그 시선이 뜨거웠다. 마주하고 있으려니 허벅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신고하라고요. 내가 그쪽을 스토킹했다든가. 성희롱을 당했다든가. 그 어떤 이유를 대도 상관없으니까.”

장난스러운 말투였다면,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안단테는 사뭇 진지했다. 진효섭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무슨 생각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판단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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