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26화
“…….”
진효섭은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봤다. 길드원 대부분은 아침잠이 많아서 오전에는 사무실에 들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침은 주로 길드장인 안단테와 함께 있는 편이었는데…… 그는 현재 일주일간 부재중이니 지금 시간에는 그 누구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깐이나마 저걸 살펴봐도 되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문서를 뒤적거렸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서일 텐데, 왜 이렇게 도둑이 된 기분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찾았다.”
손에는 바랜 듯한 종이가 들렸다. 제일 첫 장부터 체르니, 플랫, 코다, 쌍둥이 순으로 그들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꼼꼼하게 읽어 봤지만 키와 몸무게, 혈액형, C급 에스퍼, 정신계, 물리계 등 특별한 것 없는 정보들뿐이었다. 그가 원하는 이상한 점이나 특이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긴. 비밀이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놔둘 리 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진효섭은 제 행동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점심이나 먹어야겠다.”
그는 한숨을 쉬며 펼쳐 둔 문서를 다시 정리했다. 아침에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남은 시간을 죽일 심산이었다.
그렇게 문서를 제자리에 두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진효섭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문서들을 놓쳤다. 노아피 길드원들의 문서와 다른 잡다한 문서들이 뒤섞여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중 일부는 팔랑팔랑 날아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의 구두코를 건드렸다.
“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문서를 보고 있었던 것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곧바로 의아함이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검은 가죽구두가 무척이나 낯선 탓이다. 노아피의 우중충한 사무실 바닥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가죽이었다. 그 위로 보이는 반듯한 정장 바지는 구김조차 없었다.
이렇게 완벽한 차림을 갖추는 사람이 길드원 중에 있었던가. 진효섭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자로 잰 듯 반듯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하게 왁스로 넘긴 머리와 꼿꼿한 자세, 먼지 한 톨도 용서하지 않을 것 같은 새까만 정장까지. 노아피 길드 에스퍼들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남자였다.
자신과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 어디선가 본 것도 같았다.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에 잠긴 사이, 남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사무실 안을 훑었다. 느리게 지나치는 시선 끝에는 진효섭이 닿았다.
진효섭은 뒤늦게 자신이 지금 사무실에 있는 유일한 길드원이라는 사실을 돌이켰다. 그리고, 저 남자는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이었다.
“누구…… 아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만약 들어온 사람이 판매상이었다면, 정수기를 세 대나 팔아 치웠을 어수룩함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진효섭을 비웃지 않고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다른 분이 계실 줄 모르고 노크를 깜빡했습니다.”
진효섭이 당황해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과하면서도 조금도 비굴해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 모습에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것도 잠시.
“……아!”
진효섭은 기억해 냈다. 정중하면서도 절대 굽힘이 없고, 상대의 우위를 차지하는 듯한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남자를. 그는 길드 모임에 갔을 때 봤던 남자였다. 단상에 올라 모든 선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S급 에스퍼. 국가보안국의 길드장, 신해창.
진효섭이 아는 척을 하자, 신해창은 품에서 작은 명함을 꺼내 건넸다.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진효섭은 제 손에 들린 검은 명함을 멍하니 바라봤다. 타인에게 명함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었다.
“국가안보국 길드장, 신해창입니다.”
“아, 예……. 저는 노아피 길드 소속 가이드, 진효섭입니다.”
“예. 저번에 뵈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절 보셨습니까?”
신해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노아피 길드장 옆에 계셨지 않습니까.”
“아……. 그때 보셨구나.”
그가 안단테를 흘끔 바라봤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러나 옆에 존재감 없이 서 있던 자신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다.
“실례지만, 오늘 다른 길드원분들은 없습니까?”
“예. 아마 오후나 돼서 다들 출근할 것 같은데…… 혹시,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노아피 길드장을 찾아왔습니다.”
진효섭은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길드장님은 언제 오실지 모르겠습니다. 일주일간 사무실에 들르지 않으셔서…….”
“그렇습니까.”
반면, 신해창은 조금도 난감해하지 않고 손목에 있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그 모습조차 우아해 보여서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 딱 23분만 기다려 보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아, 예. 그럼 저기 소파에 잠깐 앉아 계십시오.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상대가 S급 에스퍼라 긴장됐지만, 생각보다 정중하고 예의가 발라서인지 무섭지는 않았다. 진효섭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둥지둥하며 움직였다. 사무실에 구비되어 있는 녹차라도 꺼내 주려고 하는데,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들 탓에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리부터 먼저 하자는 생각에 진효섭이 자리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있는 종이들을 주우려고 했을 때였다. 손이 종이를 잡기도 전,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 더미가 제멋대로 펄럭이며 공중에 떠올랐다.
진효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멍한 눈이 공중에 떠오른 종이를 향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하나둘 진효섭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촤라락- 수십 개의 종이가 한순간에 가지런히 모였다.
“탁자에 두면 되겠습니까?”
“예? 예에…….”
종이는 신해창의 눈짓에 따라 탁자 위에 놓였다. 흩어진 적이 없었다는 듯 반듯한 모양새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진효섭은 멍하니 녹차를 꺼내 뜨거운 물을 받았다. 손짓 하나 없이 물체를 움직이는 걸 보니 염력계 에스퍼인 듯했다. 세상에 몇 안 된다는 놀라운 능력이었지만, 진효섭은 놀라기보다 침울해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하필 염력계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주위에 있을 줄이야. 별로 달갑지 않은 우연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해창은 싸구려 녹차가 담긴 컵을 두말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진효섭은 엉거주춤 서서 어디에 있을지 고민하다 결국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
“…….”
그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보며 녹차를 홀짝였다. 주위 풍경과 남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명화에다가 싸구려 CG를 입힌 듯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진효섭은 식사하려던 것도 잊고 멀뚱히 앉아 탁자만을 바라봤다. 바닥을 기는 C급 길드의 길드장과 한국을 대표하는 S급 길드의 길드장. 이렇게 찾아올 정도라면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가깝다는 의미인데, 그들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같이 있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예?”
그때, 잠자코 있던 신해창이 문득 고개를 들어 진효섭을 빤히 바라봤다.
“등급이 어떻게 됩니까?”
너무 급작스러운 물음에 진효섭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였다. 신해창은 마시던 녹차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불편하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었습니다.”
답을 들으나 마나 상관없다는 투였다.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질문은 아닌 듯했다.
이럴 때 요령이 좋은 사람들은 유들유들하게 굴며 적당히 대답을 피했으리라. 그러나 진효섭은 그렇지 못했다. 만약 사실대로 S급 가이드라 말한다면 저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에 가슴속에서 미약한 불안이 피어났다.
진효섭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자, 신해창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전…….”
마침내 진효섭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벌컥, 문이 다시 열리고 흐트러진 차림을 한 안단테가 나타났다. 놀란 진효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길드장님?”
“하아……. 좋은 아침.”
아침이라고 부르기에는 꽤 애매한 시각이었는데도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들어왔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옷차림은 편안하다 못해 구겨져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단정한 차림을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했다.
“해창아, 올 거면 미리 연락을 해야지.”
“미리 연락했을 텐데.”
“문 앞에 도착해서 연락한 것도 미리 연락한 축에 속하던가?”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안단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진효섭 옆에 자리 잡았다. 그는 신해창을 무시한 채 진효섭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진효섭 씨, 많이 무서웠죠? 어디 해코지당한 곳은 없어요?”
상대를 앞에 두고 하는 질문이라기에는 다소 무례했다. 신해창의 눈치를 보며 진효섭이 작게 고개를 젓자 안단테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아, 다행이네요. 저놈이 사무실에 도착했다고 연락 와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
“아무튼 섬세함이 없는 놈이라니까요. 길드에 가이드가 혼자 있으면 그냥 꺼질 생각을 해야지, 왜 같이 있을까? 내 참. 우리 진효섭 씨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이 가질 않네요.”
안단테는 정말 걱정했다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진효섭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