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20화
“일부러…… 말입니까?”
“저희 길드원들이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목줄 정도는 걸어 놔야죠. 본디지 파트너를 안 만든다고 하면, 막 나갈 수도 있는 놈들이거든요.”
자신의 길드원이지만 아랫도리로는 믿음이 안 간다며 안단테가 혀를 찼다.
“근데, 그걸 이제 알았어요? 난 플랫을 가이딩할 때 알아챈 줄 알았는데.”
“……몰랐습니다.”
정말 모르고 있었다. 본디지 파트너를 자처해서 지켜 주고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급하게 가이딩하려던 플랫은 유독 안단테의 눈치를 봤었다. 당시에는 안단테가 길드장이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진실을 알게 되니 그 행동이 모두 다르게 와닿았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진효섭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 기분 나빠요? 원하던 파트너가 있었다면 제 실수인데.”
“아, 아닙니다!”
진효섭이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그……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접촉 이상은 싫다고 말했지만, 기실 안단테가 이렇게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본디지 파트너를 안 만든 그의 탓으로 돌렸을 수도 있고. 그런데 뒤에서 이렇게 생각해 줬다는 걸 알게 되니 진효섭은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계속 고마운 일만 생겨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안 해도 돼요. 길드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도움이 되거든요.”
“하지만…….”
진효섭이 머뭇대며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길드장님은 제게 가이딩을 안 받지 않습니까.”
도움받은 것을 갚고 싶은데, 안단테는 그럴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거절이 냉정할 만큼 단호했다. 하지만 가슴팍에 자리한 상처는 조금 옅어진 게 확실했다.
혹시 다른 가이드에게는 가이딩을 받는 걸까. 진효섭은 안단테가 매번 이렇게 자신을 도와주는 걸 미루어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있는데도 다른 가이드를 찾는 거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던 걸까. 안단테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럴 리가요. S급 가이드가 마음에 안 들면 누가 마음에 차겠어요.”
“그럼 어째서 가이딩을 받지 않으십니까? 혹시 각인 상대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안단테가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냥 별로 안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진효섭이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자 안단테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얘기했다.
“가이딩 받는 거 안 좋아한다고요. 꼭 가이드한테 의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가 내 몸 안을 헤집는 감각이 뭣 같기도 하고요.”
“…….”
진효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기에는 가이딩이라는 것이 좋고 싫고를 따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음식을 먹는 게 싫다고 해서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안단테는 가이딩을 그저 편식과 같은 수준으로 말했다.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에스퍼인 본인일 텐데도.
“저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기도 하고요.”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안단테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나요. 필요하면 약 먹으면 되죠. 왜, 요즘 약 잘 나오잖아요.”
“저번에도 약을 드셨습니까?”
“네.”
그래서 몸의 상처가 조금 옅어졌던 거구나.
진효섭은 안단테가 딱히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약을 먹었다는 것도 들었고, 상처가 조금이나마 옅어진 것도 직접 봤다. 그런데도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에스퍼는 가이딩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약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길드들이 좋은 등급의 가이드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안단테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싫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렇게 쉽게 할 말이 아니란 뜻이다. 가이딩이 싫다는 건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얘기였으니까.
술렁이는 마음에 진효섭이 표정을 풀지 못하자 안단테가 피식 웃었다. 심각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왜요? 내가 걱정돼요?”
“……예. 가이딩은 생명과 직결된 얘기지 않습니까.”
“진효섭 씨가 걱정해 주니까 좋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죽기 싫으면 그 직전에는 하겠죠.”
진효섭의 진지한 대답에도 안단테는 여전히 실실 웃어댔다. 마치 남 얘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였다.
“음, 하지만…….”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더니 진득한 시선이 진효섭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탄탄한 어깨부터 팔뚝, 허리선을 거치더니 얼굴로 올라왔다. 잠깐 사이에 마주한 눈은 평소와 결이 달라져 있었다. 그 시선에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내 아래에 깔려 준다고 하면 또 모르겠네.”
“…….”
“진효섭 씨 워낙 섹시하게 생겨서 다른 거에 집중하느라 가이딩을 받고 있다고 인식 못 할 것 같거든요. 아, 물론 요구하는 건 아니에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하.”
크게 웃어대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금방이라도 덮칠 것처럼 쳐다보더니 단 몇 초 만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진심인지, 그냥 놀리고 싶어 하는 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진효섭은 그 어떤 대답도 못 하고 물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물속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낸 탓일까. 아니면 안단테의 저질스러운 말 때문일까. 머리가 조금 몽롱한 것도 같았다.
* * *
끔뻑, 눈을 감았다 떴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몸이 적당히 흔들리는 게 아늑했다.
“일어났어요?”
진효섭은 멍하니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내려다봤다. 어째서 자신이 안단테의 등에 업혀 있는 걸까.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얘기하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안단테가 작게 혀를 차며 진효섭의 몸을 가볍게 추어올렸다.
“그렇게 쓰러져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내 말에 충격받은 줄 알았잖아요.”
“아…….”
그때 쓰러진 거였나. 확실히 그 뒤가 떠오르지 않기는 했다.
“미련하긴. 오랫동안 물에 있어서 어지러우면 일어나야지, 왜 계속 앉아 있어요?”
“그, 죄송…… 합니다. 이제 괜찮으니 내려 주십시오.”
진효섭이 몸을 바로 세우자 안단테는 별말 없이 그를 내려 줬다.
“어지럽진 않고요?”
“예. 지금은 괜찮습니다.”
쓰러져 있는 동안 해변을 계속 돌았는지 살갗이 조금 차가웠다.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팔을 슬쩍 쓸어내렸다.
“추워요?”
“아뇨, 딱 좋습니다.”
“밖이 시원해서 좀 업고 걸었어요. 에어컨보다는 그냥 바람이 열 빼는 데 더 좋지 않을까 해서요.”
“감사합니다.”
그에게는 왜 이렇게 감사할 일만 생기는지 정말 모르겠다. 진효섭은 앞으로 좀 더 정신을 다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저, 그런데…… 옷은 길드장님이 갈아입혀 주신 겁니까?”
“그렇죠. 저밖에 없잖아요.”
“……그렇습니까.”
진효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맨몸을 그대로 보였다는 부끄러움 대신 불안과 후회가 얼굴에 감돌았다. 사실 아무리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라고 해도 같은 남자니까 맨몸 좀 보였다고 해서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봤겠지?’
불안한 마음에 진효섭이 입술을 짓씹었다. 쓰러질 때까지 탕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이유. 생명 줄인 양 수건을 꽉 쥐고 상체를 가리려던 노력이 무색하게 모두 보여 버렸다.
“저, 혹시…… 봤, 습니까?”
당연히 봤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단테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봤죠. 내가 옷을 갈아입혀 줬는데.”
“…….”
“맨몸이 자극적이던데요. 하마터면 덮칠 뻔했잖아요.”
“……그게 다입니까?”
“그럼 뭐가 더 필요한가요?”
“…….”
진효섭은 입술만 달싹였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안단테는 그런 진효섭에게 다가가 셔츠를 벗어 어깨에 걸쳐 줬다.
“아직 열이 올라 있을 거예요. 더 깊게 생각하지 마요. 원래 사람들은 각자 숨기는 게 하나쯤 있는 거고, 나는 타인의 비밀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요.”
목적어가 생략된 말이었다. 그러나 진효섭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진효섭이 숨기고자 하던 것을 안단테는 봤다. 그러나 보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안단테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불안해하던 진효섭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다행이다.’
고마웠다. 궁금할 게 많을 텐데도 캐묻지 않고 수치스러운 자국을 모른 척해 줘서.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유독 감사 인사를 많이 하네. 별로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아닙니다. 잘해 준 것…… 너무 많습니다.”
“그래요?”
안단테가 피식 웃으며 진효섭의 어깨에 덮어 준 셔츠의 팔 부분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로 가까워졌다. 숨소리가 섞일 만큼 가까워진 거리. 아무도 없어 고즈넉한 해안가. 어쩐지 긴장돼 진효섭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안단테가 바투 붙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럼,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물론입니다.”
진효섭은 지금, 그가 접촉 가이딩 이상을 바라는 것만 아니라면 웬만한 건 모두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별건 아닌데…….”
안단테가 순순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진효섭을 내려다보며 뭐라 말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끼이이이이-
별안간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별 하나 없는 허공에서 블랙홀 같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눈처럼 타원형으로 입을 벌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진효섭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벌린 채 손을 떨었다. 아무리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가이드라고 해도 저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던전의 게이트. 그것도 무척이나 위험해 보이는 게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