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7화
“괜찮습니까.”
“……예. 고맙습니다, 코다 에스퍼.”
코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진효섭 옆에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앉았다. 놀란 진효섭을 안도시키고자 취한 행동 같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츰차츰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분위기는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사실 진효섭으로선 도저히 그들이 같은 길드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작은 일로 서로에게 칼을 겨누다니. 그들이 나쁘다고는 말 못 하지만, 성격이 맞지 않다는 건 명백했다.
생각해 보면 노아피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너무 강했다. 부딪히기 딱 좋은 사람들만 모아둔 느낌. 이런 상태라면 사달이 나도 몇 번은 났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같은 길드에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진효섭은 살벌한 공기에 입도 열지 못하고 가만히 발끝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아까 오갔던 얘기 중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주위의 눈치를 보던 진효섭이 조심스레 코다에게 말을 걸었다.
“저…… 코다 에스퍼, 궁금한 게 있습니다.”
코다는 말해 보라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효섭은 기회를 얻었음에도 오랫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 순위를 정하는 게 어려웠다. 결국 얻고자 하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는데도.
“길드장님께서 절 위협하는 놈이 있으면 말하라던 것…… 진짜입니까?”
체르니가 말했던 본디지 파트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연관되어 나오는 안단테의 이름. 그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그러나 진효섭은 애써 가장 궁금한 것을 숨기고 에둘러 물었다.
코다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라고요?”
코다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채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진효섭 가이드의 본디지 파트너가 길드장님이기 때문입니다.”
아, 역시 그랬구나. 진효섭은 체르니가 단장님이 잘해 주냐고 물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치 자신에게 본디지 파트너가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본디지 파트너는 안단테라고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확실히 듣고 나니 새삼스러웠다. 그는 어째서 이런 거짓말을 해 둔 걸까. 자신은 분명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
‘……날 지키기 위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자신의 본디지 파트너임을 자칭하며 코다와 쌍둥이에게 부탁해 놓은 내용을 보면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진효섭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안단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가이딩을 거부했다. 그래서 진효섭은 안단테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에스퍼가 가이딩을 거부하는 건, 가이드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밖에 없다고 대다수가 말했으므로.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싫어하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챙겨 줄 수는 없으니까.
“원래…… 길드장님은 길드원에게 이렇게 잘해 주십니까?”
“아니요. 본디지 파트너라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진짜 본디지 파트너가 아닌데. 진효섭이 어색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그 표정에 오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를 가만히 보던 코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윽고 무언가 알아차린 건지 탄성을 내뱉었다.
“아, 혹시.”
그러나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분명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는데, 목을 몇 번 매만지더니 다물었다. 아무래도 평소에 말을 많이 하지 않아 목이 아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는지라 코다가 침묵을 유지하자 진효섭은 답답해졌다.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어떻게 다시 물어 볼까 고민하는 사이, 저녁 식사를 사러 나갔던 안단테와 플랫이 체르니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저희 왔어요.”
안단테는 빈손이었는데, 플랫은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다섯 개나 들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들어온 안단테는 방 안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가늘어진 눈매가 체르니와 쌍둥이, 그리고 코다를 이어 진효섭까지 차례로 훑어 내렸다.
“뭐야. 너희 싸웠어?”
놀라울 정도의 눈썰미였다. 아니, 이건 눈썰미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진효섭이 놀라워하자 안단테가 작게 혀를 찼다. 동시에 성큼성큼 주방까지 걸어 들어간 플랫이 박스 다섯 개를 내려 두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희는 이런 곳까지 와서 싸워야겠냐? 아주 그냥 공기에 살기가 가득하네.”
“흥. 길드에서 제일 많이 문제 일으키는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거든?”
체르니가 플랫의 뒤통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들에게 다툼은 항상 있는 일인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심지어 좀 전까지 싸웠던 체르니와 쌍둥이가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분위기는 서늘해지지 않았다. 마치 그런 적조차 없었다는 것처럼.
“우리 진효섭 씨 놀라게 왜들 싸우고 그래.”
안단테는 진효섭의 손을 잡아 식탁으로 이끌었다.
“맛있는 거 많이 사 왔는데, 구경해 봐요.”
놀란 가슴을 먹는 거로 풀어 보자며, 안단테가 고기부터 해산물까지 하나하나 진효섭에게 보여 줬다. 음식보다는 박스의 대부분이 술이라는 게 더 놀라웠지만, 진효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것저것 구경했다.
많은 음식이 식탁에 깔리고, 높은 도수의 술들이 곁들여졌다. 안단테가 돌아온 것만으로 차가웠던 분위기는 대번 바뀌었다.
비로소 확실히 드러났다. 개성 강한 에스퍼들이 같은 길드에서 지낼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안단테가 중간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단테는 확실하게 그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길드원이 아무리 서로 으르렁거려도, 안단테의 말만큼은 확실하게 들었다. 말을 듣는 이유가 복종인지 존경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 * *
모두가 술독에 빠진 밤. 진효섭은 길드원들의 코골이가 시작되고서야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안 하고 곧장 밑층으로 향했다. 체르니가 말했던 온천이 있는 층이었다.
“여기인가?”
조심스럽게 기웃거려 보자 안에서 유황 냄새가 풍겼다. 찾는 곳이 맞는 듯했다. 진효섭은 환한 표정으로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탈의실과 이어진 안쪽에서 김이 폴폴 나왔다. 온천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도심에는 목욕탕이나 온천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런 곳은 정말 드물었다. 진효섭은 곧바로 옷을 훌러덩 벗고 목욕탕 안으로 향했다.
새벽 두 시. 당연하게도 사람은 없었다. 진효섭은 잽싸게 샤워를 하고 예쁜 색깔의 물이 담긴 가장 커다란 탕에 조심스레 발을 넣었다. 물은 너무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였다. 따끈한 물이 온몸을 감싸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절로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물로 가볍게 세수한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다. 굳었던 근육이 모두 풀리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는 물을 좋아했다. 특히 따뜻한 물을 좋아했기에 목욕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작은 원룸을 구하면서도 욕조가 딸린 집을 구할 정도였다. 물론 수도세를 걱정해서 자주 물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좋다.”
술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기다리기를 잘했다. 온천까지 와서 물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진효섭은 나른하게 풀리는 몸을 만끽하며 천장을 쳐다봤다. 주위는 검은 돌로 둘러싸였고, 커다란 나무가 줄지어 솟아 있었다. 피톤치드 향이 온몸을 감싸는 게, 숲속에 있는 듯했다.
그는 그대로 멍하니 시간을 죽였다. 너무 오랫동안 밖에 있으면 누가 눈치챌 수 있으니 적당히 하다 나가야 했는데, 물이 너무 기분 좋았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잠도 솔솔 왔다.
그렇게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온천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쏟아지던 잠이 확 달아났다.
탈의실에서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체르니는 목욕탕이 로열층 전용이라 말했다. 재차 안단테에게 확인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들은 바 지금 로열층에 들어와 있는 팀은 노아피 길드 외에 한 팀밖에 없었다. 술에 취한 노아피 길드원이 목욕탕에 들를 일은 없을 테니, 아마 로열층의 다른 팀일 것이다.
‘하필.’
하필 그 한 팀이 새벽 두 시에 목욕탕에 들를 줄이야. 운이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진효섭은 혹시 몸을 피할 곳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훤히 트인 목욕탕 내부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그사이, 그들은 목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진효섭은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몸을 돌리고 물속 깊이 들어갔다.
“아하하, 미친놈. 그러게 내가 조심 좀 하랬잖아.”
“그게 내 맘대로 되냐.”
“음? 사람이 있었네.”
그중 한 명이 진효섭을 발견했다. 그들 역시 새벽 두 시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뭐 어때. 가볍게 목욕탕만 들어갔다가 나가자고 했잖아.”
그들은 진효섭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물속으로 들어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탕이었다.
“어으, 좋다.”
“아저씨냐?”
“나이를 좀 먹긴 했어. 요즘 들어서 던전에 들어갔다 온 다음 날은 아무리 가이딩을 받아도 피곤하더라고. 이렇게 몸을 좀 지져 줘야 한다니까.”
“야, 그건 네가 가이드랑 너무 많이 해서 그렇고.”
“아, 그런가?”
남자가 호탕하게 웃는 소리에 진효섭은 몸을 더 긴장시켰다. 방금 대화로 그들이 에스퍼라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타 길드 에스퍼와 함께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