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5화
진효섭은 넓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수영복들을 빤히 내려다봤다. 꽃무늬라든가 형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놓인 수영복들이 하나같이 손바닥만 한 삼각이나 장골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사각이라는 게 문제였다. 입으면 필히 부담스러운 모양이 될 터였다.
“……이런 것밖에 없습니까?”
“다른 것도 있죠.”
싱글싱글 즐겁게 웃던 안단테가 방금 열었던 붙박이장의 옆문을 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말도 안 되는 모양의 수영복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게 취향이면 이쪽도 상관없어요.”
“아뇨…….”
선정적인 수영복에서 시선을 뗀 진효섭이 탁자 위에 있는 수영복들을 다시 살폈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평범해 보였다.
정말 다들 이런 걸 입고 수영장에 가는 걸까. 그것도 야외 수영장을. 진효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저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하다니.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떤 걸로……?”
뒤늦게 든 생각에 진효섭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플랫이 익히 알던 평범한 수영복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안단테 역시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오는 수영복이었다.
“…….”
진효섭이 안단테의 수영복을 빤히 바라봤다.
“왜요?”
안단테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저도 그런 수영복으로 주십시오.”
“에이, 이것보다 저게 훨씬 비싸요.”
“비싼 거 안 입어도 됩니다.”
“너무해. 진효섭 씨가 입어 줬으면 하고 산 건데.”
“……평범한 걸로 주십시오.”
“아쉬워라.”
안단테는 살짝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것과 비슷한 하얀 사각 수영복을 건넸다. 조금 짧기는 했지만 딱 달라붙지는 않아 진효섭은 군말 없이 받아 들었다. 뒤에서 아쉽다는 듯한 체르니의 한숨이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잠시 후, 쉬고 싶다는 길드원들을 숙소에 두고 체르니, 플랫, 안단테, 진효섭. 총 네 명이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위에서 봤을 때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아, 수영장은 또 오랜만이네.”
처음에는 바다가 지겨우니 뭐니 했던 플랫이지만 막상 물 앞에 서자 기분 좋은지 씩 웃곤 몸을 가볍게 풀었다. 양팔을 위로 쭉 뻗자 등 근육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주위에서는 그를 흘끔거렸다. 그저 물에 들어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 것뿐인데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진효섭이 있는 곳에도 시선이 자주 날아왔다. 나른하게 하품하고 있는 체르니가 왼쪽, 햇빛을 보며 날씨가 좋다고 빙그레 웃는 안단테가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사무실에서 봤을 때도 확실히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짐승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위험한 분위기를 가진 플랫. 예민하고 섬세해 보이는 외견과 독특한 머리 색으로 TV에 나오는 가수 같아 보이는 체르니. 환한 햇빛 밑에서 보니 잿빛 같기도 한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그에 걸맞은 부드러운 외모의 안단테. 각자 매력이 뚜렷한 이들이었다.
플랫은 사람이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물이 지겹다는 말만큼이나 수영이 수준급이었다. 진효섭이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 체르니가 옆에서 말을 붙였다.
“효섭 형, 우리도 같이 들어갈래요?”
“아니요. 저는 수영을 못해서…….”
“그럼 가르쳐 줄게요. 같이 들어가요.”
진효섭이 수영하고 있는 플랫을 다시 한번 흘끔 바라봤다.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닙니다. 들어가십시오.”
“에이-”
“그래, 체르니 너 혼자 들어가.”
안단테가 빙그레 웃으며 체르니의 등을 떠밀었다.
“우리는 저기서 구경이나 할 테니까.”
체르니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툭 내밀고는 안단테와 진효섭을 번갈아 봤다. 처음부터 물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는 걸 보여 주듯 두 사람은 하얀 민소매를 위에 걸치고 있었다.
“수영장에 왔으면 수영을 해야죠. 왜 쳐다보기만 해요? 단장님 관음증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
“…….”
“너무 인상 구기지 마. 이 땡볕에 수영하면 살 아플 것 같아서 그러니까.”
“하. 그걸 아는 사람이었어요? 평범한 척하네.”
“나 말고 진효섭 씨.”
안단테는 불평을 늘어놓는 체르니를 두고 진효섭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선베드로 향하자 체르니가 잠깐 고민하듯 물과 진효섭을 바라봤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체르니는 체념한 건지 깔끔히 포기하고 물로 다가갔다. 구불거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체르니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렸다. 풍덩- 그는 수영을 하는 플랫 위로 입수했다. 플랫이 ‘캑’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고, 이윽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했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광경을 진효섭이 멍하니 구경하고 있자, 안단테가 가볍게 그의 팔을 툭 쳤다.
“앉아서 구경해요. 여기 있으면 나중에 살 벗겨져요.”
확실히 오늘은 햇볕이 강했다. 이대로 한 시간만 있어도 살이 붉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진효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파라솔 밑의 선베드에 앉았다. 잠깐 사이에 탄 건지 벌써 어깨가 뜨끈했다.
“길드장님은 괜찮습니까?”
“내가 왜요?”
“피부가 약해 보이십니다.”
진효섭이 그의 하얀 어깨를 바라봤다. 자신은 플랫만큼 까무잡잡하진 않지만, 그래도 피부색이 짙은 편에 속했다. 햇볕을 조금 맞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단테는 투명할 정도로 유난히 피부가 하얗고 얇은 느낌이라 쉽게 살갗이 벗겨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안단테는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즐겁게 웃었다.
“하하, 괜찮아요. 제 피부는 햇볕으로는 타지 않으니까.”
“에스퍼는 원래 그렇습니까?”
“음, 모든 에스퍼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그래요. 몸이 튼튼하거든요.”
안단테가 가볍게 제 팔을 가리켰다. 확실히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였지만 근육은 탄탄했다.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하얀 팔뚝 안으로 슬쩍 보이는 몸통을 흘끗거렸다. 저번에 봤던 상처가 떠올라서 신경 쓰였다. 문득 그것 때문에 물에 들어가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봐요?”
“예?”
“제 속살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봐서요. 난 또 내 젖꼭지라도 훔쳐보나 했네.”
안단테가 턱을 괴며 장난스레 웃자 진효섭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장난이에요, 장난.”
정말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은 안단테가 진효섭의 팔을 잡아당겼다. 진효섭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엉거주춤 선베드에 앉았다.
“반응이 재밌어서 자꾸 놀리게 되네요.”
“진짜 그…… 저, 젖꼭지 본 거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안단테는 정말 장난이었다며 언제 챙긴 건지 모를 음료수를 내밀었다.
“사실 난 젖꼭지 본 것도 괜찮지만요. 원하면 얼마든지 보여 줄게요.”
“…….”
“근데 진효섭 씨는 수영 못해서 안 하는 거예요? 아니면 물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예요?”
“그냥, 물도 안 좋아하고 수영도 못하는 겁니다.”
“흠, 그래요?”
안단테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목욕탕도 싫어한다고 했으니 이해하는 듯했다.
“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줄 알았네.”
순간 진효섭의 몸이 움찔했다.
“……무슨 뜻입니까?”
“그냥요. 유독 몸을 보이는 걸 꺼리니까 숨기고 있는 상처라도 있나 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낸 말이었겠지만, 진효섭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몸을 보이길 꺼린다는 걸 어떻게 안 걸까. 한 번도 그런 티를 낸 적은 없었는데. 진효섭은 애써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없습니다. 그런 거.”
“그래요?”
안단테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더니 진효섭이 입은 민소매의 목 부분을 손끝으로 살짝 늘렸다. 동시에 손끝이 목의 붉은 자국을 은근하게 건드렸다.
“그럼 이쪽 자국 때문인가?”
“아……!”
진효섭은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 채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플랫에게 목덜미를 깨물려 시퍼런 자국이 남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 역시 이것 때문이구나? 부끄러워하는 것도 귀엽네요.”
안단테가 빙그레 웃으면서 진효섭을 짓궂게 놀렸다. 진효섭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저 빨리 주제를 바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그러는 길드장님은 왜 물에 안 들어가십니까?”
“저도 뭐, 비슷한 이유라고 해 둘게요.”
역시 그 상처 때문이겠지. 확실히 남 앞에서 드러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상처였다. 모두가 흘끔거리며 쳐다볼 테니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상처를 곱씹고 있자니 진효섭은 자연스레 안단테의 몸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아 보였다. 아무리 나흘가량을 쉬다 왔다고 해도 가이딩을 받지 않은 이상 몸 상태가 회복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요즘은 독을 중화해 주는 약도 많으니, 그걸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은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들었다. 해봤자 임시방편일 뿐.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을 받았나? 대체 어째서?’
가이드를 길드 소속으로 영입해 놓고 굳이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진효섭은 정말 그가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았는지 궁금했으나 결국 묻지 못했다. 안단테는 가이딩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괜히 가이딩 얘기를 꺼냈다가 또다시 차가운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진효섭 씨, 선 넘지 마세요.’
그때를 생각하니 아직도 조금 살갗이 따가운 듯한 착각이 들었다. 냉랭한 눈동자와 딱딱한 말투, 꾹 닫은 입술.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서늘해지며 덩달아 기분이 다소 저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