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4화
안단테는 평소처럼 다정하고 장난스럽지 않았다. 좁은 차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효섭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입에 올렸다.
“죄, 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진 없고요.”
안단테가 진효섭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진효섭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평소와 같이 돌아온 것이다.
“오늘 기다리느라 수고 많았어요. 야근수당 쳐 줄 테니까 얼른 들어가요.”
“……예. 조심히 가십시오.”
진효섭은 머뭇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쫓겨난 듯한 기분이었다.
내리자마자 차가 쌩하니 떠났다. 왜인지 씁쓸한 마음에 진효섭은 차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있다 제 손목을 들여다봤다. 시큰거린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붉은 손자국이 강하게 남았다.
그에게 가이딩해 주려고 마음먹었을 때 닿았던 안단테의 손. 접촉하는 순간, 강렬히 거부하는 시선 탓에 가이딩하지는 못했지만 엄청나게 요동치는 힘을 느꼈다. 폭주 직전의 위험한 에스퍼에게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아무리 던전을 다녀왔다 한들 그 정도의 독은 하루아침에 쌓일 수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진효섭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안단테는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과 얘기를 하고, 밥을 먹고, 길드원과 하루를 지냈다. 그런 그가 폭주 직전의 에스퍼라는 건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고, 가능하지도 않을 일이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진효섭은 머리카락을 헤집다 말고 끝을 문질렀다. 부정하는 생각과 달리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 * *
“우리 여행이나 갈까?”
A급 던전을 다녀온 이후, 안단테는 사무실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5일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타난 그가 한 말이었다.
“이번에 던전에서 꽤 괜찮은 물건들을 얻었거든. 당분간은 쉬어도 될 것 같은데, 진효섭 씨 환영회 겸 여행을 가면 어떨까 싶어서.”
안단테가 웃으며 진효섭을 바라봤다.
“진효섭 씨는 어때요?”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진효섭 씨가 좋아야죠. 진효섭 씨 환영회인데.”
자신의 환영회. 진효섭은 그 말이 어색해서 짧은 뒷머리를 문질렀다.
“전 좋아요! 효섭 형, 우리 여행 가요!”
체르니가 환하게 웃으며 효섭의 팔을 잡아당겼다. 스킨십에 거침이 없었다.
“……예.”
“와!”
체르니는 양손을 올리며 기뻐했다. 안단테 역시 잘 생각했다며 빙그레 웃었다.
“너희도 다 갈 거지?”
안단테가 남은 길드원들을 쳐다봤다. 각자 심드렁한 얼굴이었으나 특별히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네. 그럼 다 같이 모인 김에 오늘 출발할까?”
“예? 하지만 준비가…….”
“필요한 준비는 벌써 다 해 놨어요.”
몸만 가도 충분하다며 안단테는 진효섭을 이끌었다. 진효섭은 그대로 이끌려 밖으로 나섰다. 갑작스러운 여행의 시작이었다.
* * *
도착한 곳은 아주 한적해 보이는 바다 앞이었다. 순간이동 포탈을 타고 온지라 경남권까지 오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00년 전 S급 던전에서 발견한 ‘순간이동 포탈’은 먼 거리도 단번에 오갈 수 있도록 공간을 잇는 신문물 게이트였다. 물론 그것을 접할 수 있는 건 부유한 층뿐이었기에, 진효섭은 다소 신기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화려한 느낌은 없지만 고즈넉한 리조트가 보였다.
“체크인도 마쳐 놨으니까 바로 들어가죠.”
안단테가 리조트의 제일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탁 트인 거실과 창 너머 펼쳐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광경에 진효섭은 감탄을 내뱉었다. 반면, 다른 길드원들은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왜 하필 바다예요?”
체르니의 투덜거림에 플랫이 동조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지겨워 죽겠네.”
모두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안단테만 유일하게 바다가 마음에 드는지 창밖을 구경했다. 진효섭은 객실로 들어서며 옆에 있는 코다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다들 바다를 싫어하십니까?”
코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에 길드 사무소가 바다 옆에 있었습니다.”
“의외네요.”
코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 이유를 묻는 듯했다.
“그냥…… 바다 앞보다는 도심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랫이야 건강하게 탄 피부와 자유로운 느낌이라 바닷가와 어울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얗고 마른 코다는 바다보다는 도심과 어울렸다. 화려한 외모의 체르니와 안단테도 마찬가지였다. 바다보다는 밤의 도시가 어울렸다. 그 외 세 사람 역시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지만, 바다에서 뛰어노는 걸 떠올리기 어려웠다.
진효섭의 말을 들은 체르니가 눈을 반달로 휘며 다가왔다.
“어떤 의미예요?”
“별 의미 없습니다. 그저 느낌이 고급스럽다는 뜻이었습니다.”
“칭찬이죠?”
“예.”
체르니가 눈매를 더 휘며 배시시 웃었다.
“우리 가이드는 칭찬도 자주 해 주네. 효섭 형은 바다 좋아해요?”
“예. 좋아합니다.”
진효섭이 유리로 된 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봤다. 어째서 바다가 질린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탁 트인 하늘과 바다가 상쾌함을 가져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웠다.
“바다를 자주 본 적 없었나 봐요?”
“예. 제가 있던 곳은 산골이었습니다. 조금 부럽습니다.”
“에이,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바다가 생각처럼 좋지 않거든요. 습하고, 짠 내 나고, 전자 기계도 자주 고장 나고, 시끄럽고, 또…….”
단점을 하나씩 꼽던 체르니가 조금 짜증스럽게 바다 쪽을 흘끔 바라봤다.
“짜증 나는 게 자주 나타나서요.”
“짜증…… 나는 것 말입니까?”
해파리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걸까. 바다 앞에서 살아 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효섭 형. 바로 아래층에 온천 있는데, 같이 가서 목욕할래요?”
“……목욕 말입니까?”
체르니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권에는 잘 없잖아요. 게다가 여기 온천은 꼭대기 층만 쓰는 로열 전용이라서 사람도 없을 거예요. 가서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면 좋을 것 같은데…….”
촉촉하게 젖은 황금색 눈이 간절하게 진효섭을 올려다봤다. 평소였다면 그 눈빛에 넘어가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진효섭은 당황하며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왜요? 내가 불편해서?”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부끄러워요? 설마 내가 나쁜 짓 할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죠? 제가 형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요. 응?”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진효섭이 양손을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이건 체르니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가 원래 목욕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럽니다.”
“그래도 온천인데…….”
“죄송합니다.”
평소답지 않게 단호한 태도였다. 체르니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소파에 늘어진 플랫이 그를 비웃었다.
“야. 내가 가이드였어도 너랑은 안 가. 머리에 총 맞았냐?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체르니는 지지 않고 곧장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네. 나도 네가 가이드였으면 같이 가자고 안 해.”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말지?”
“네가 먼저 시작했거든?”
두 사람 사이에 가벼운 스파크가 튀었다. 친한 건지 친하지 않은 건지 모를 관계였다. 그 안에서 진효섭은 난감한 표정으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옆에 있던 코다가 그런 진효섭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손끝이 해집니다.”
뒤늦게 손톱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만지작거리면서 긁어댄 터라 거스러미가 일어난 게 보였다.
코다가 진효섭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려가는가 싶더니 서랍을 뒤져 손톱깎이를 꺼냈다. 진효섭은 졸지에 소파에 앉아 그에게 손을 맡기게 됐다. 얇고 기다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손톱의 거스러미를 잘라 줬다.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 광경을 가만 바라보던 플랫이 턱을 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코다가 사람을 저렇게나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드문데.”
체르니 역시 동조했다.
“그렇지. 처음에 플랫 널 봤을 때는 1년 내내 말도 안 걸었잖아.”
“저 새끼랑 나랑 안 맞아서 그래.”
“아냐. 그냥 네가 사람들이랑 안 맞아서 그래.”
“이 새끼가?”
또다시 이어질 것 같은 다툼을 안단테가 타이밍 좋게 끊었다.
“목욕 말고 수영은 어때? 여기 야외 수영장이 가장 유명하거든.”
그의 손끝이 유리창 밑을 가리켰다. 바다에 시선이 뺏겨 미처 몰랐는데 아래에는 엄청난 규모의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수영장은 진효섭이 생각하던 단순 직사각형에 레일로 구분된 곳이 아니었다. 중간중간에 있는 멋들어진 조각상과 깔끔하게 자리 잡은 선베드들, 독특한 모양의 놀이기구까지. 그로서는 처음 보는 수영장이었다.
“진효섭 씨, 갈 거죠?”
안단테의 물음에 진효섭은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 보고 싶습니다.”
“좋네요. 그럼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죠.”
수영복 역시 미리 준비했던 건지, 안단테는 붙박이장을 열어 걸려 있는 것들을 죄다 꺼냈다. 낮은 테이블 위에 형광의 수영복이 줄줄이 놓였다.
“다 새것이니까 골라 봐요. 진효섭 씨를 위해서 내가 특별히 구한 거예요.”
안단테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위해서 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얼마든지 입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