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12화
던전에는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하늘과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지 않고, 빛도 없고, 바람도 없다. 그런 곳에서 자연현상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C급일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나 대단한데…….”
“그야 디버프 계열이니까요. 디버프 계열의 에스퍼는 C급 이상을 받을 수 없거든요.”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은 혼자 싸우질 못하기 때문에.
“그래도 단장님 정도의 디버프 계열 에스퍼는 대우받아요. 광범위 디버프 능력은 A급 길드에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좋거든요. 물론 단장님 성격상 누구 밑에 있지는 못할 테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체르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그런 여러 디버프가 있어서 괴물을 해치울 수는 없어도 시간 끌거나 도망치는 건 누구보다 잘할 거예요. 거의 던전 안 바퀴벌레 수준이라고요.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럼…… 플랫 에스퍼와 상성이 맞지 않다는 건 어째서입니까? 디버프면 누구와도 잘 맞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플랫은 좀 독특해요. 우리 길드원 모두가 개인플레이 성향이 강하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옆에서 도와주려고 하면 오히려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편이죠.”
그중에서도 플랫은 그게 더 심한 케이스였다.
“플랫은 기동력이 좋은 편인데, 괴물에게 직접 다가가서 일대일로 쓱싹하는 능력이거든요. 그런데 단장님의 능력은 그 괴물들 위에 하늘을 만들잖아요. 자연스럽게 주위가 밝아지니 플랫도 괴물들처럼 디버프 효과를 함께 받아 버려요.”
“아…….”
“단장님은 플랫 같은 타입보다는 원거리 계열의 에스퍼랑 어울려요.”
“그럼 왜 길드장님은 플랫을 골랐습니까?”
“음, 제 생각에는 기동력 때문인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체르니는 진효섭을 흘끔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허리에 매달렸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플랫을 괴롭히고 싶었나 보죠.”
진효섭은 체르니가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체르니는 자연스레 진효섭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편히 뒹굴뒹굴하는 모습에서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튼 걱정하는 건 사치예요, 사치.”
코다 역시 동의한다는 듯 진효섭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효섭은 비로소 몸에서 힘을 뺐다.
‘그래. 괜찮겠지. 어차피 던전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막을 테고, 그들 역시 제 생명은 소중할 테니 위험한 행동은 할 리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자연스레 걱정이 덜어졌다.
저녁 7시. 퇴근 시간을 훨씬 넘었지만 진효섭은 집에 가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안단테와 플랫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그는 오늘 하루, 사무실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진효섭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책을 꺼냈다. 언젠가 코다가 읽던 책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구매했는데, 별로 맞지 않는 취미였는 듯 몇 자 읽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눈꺼풀이 감겼다.
어떻게든 읽어 보려고 눈을 홉떴지만, 그는 결국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뜨니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고, 길드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자 길드원이 덮어 준 것이라 추정되는 모포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
얼마나 잔 거지. 진효섭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이 어디에 있는지 어두워 보이질 않았다.
불을 켜려고 더듬더듬 어둠을 향해 나아갔을 때였다. 달칵, 사무실의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밖에서 들어오는 약간의 불빛과 함께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길드장님?”
“뭐야, 진효섭 씨 집에 안 갔어요?”
“길드장님과 플랫 에스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단테가 작게 혀를 찼다.
“집에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요. 여기서 기다리는 게 힘들었을 텐데.”
“아닙니다. 방금까지 졸았기도 하고…….”
진효섭은 꼬박꼬박 열심히 대답하며 안단테를 살폈다. 불빛이 옅은 데다 뒤에서 들어오는 탓에 잘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평소와 똑같았다. 아무래도 문제없이 잘 다녀온 듯해 약간 안도가 됐다.
“그런데 플랫 에스퍼는 어디 계십니까?”
“밑에 널브러져 있어요.”
“예?”
“잠시만요.”
안단테는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순간 비릿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게 무슨 냄새인지 파악하기도 전, 딸칵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진효섭은 눈이 부셔서 눈가를 찌푸렸다. 익숙해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분명 나갈 때 입고 있던 전투복은 회색이었는데 지금은 검붉은색이었다. 드러난 목이나 팔 같은 데는 멀끔했지만, 옷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어 기이했다.
“기, 길드장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안단테는 놀란 진효섭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진효섭은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몸은 아무렇지도 않고, 옷만 저런 건가 했으나 바로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나 피투성이인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을까.
“가, 가이딩을 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많이 다치신 듯합니다.”
어쨌든 C급이 A급 던전에 들어간 것이다. 심지어 체르니의 말에 의하면 안단테는 혼자서 괴물을 처치할 수 없는 디버프 계열의 에스퍼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진효섭은 마음이 급해져서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안단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안 다쳤거든요. 이렇게 남아 있어 준 김에, 이쪽이나 가이딩해 주면 좋겠는데.”
그러곤 원래 있던 자리로 다가가 발끝으로 가볍게 무언가를 툭툭 쳤다. 진효섭은 자연스레 시선을 내렸다. 그 아래에는 사람이 있었다. 목덜미를 덮는 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보이는 금색 링 피어싱. 플랫이었다.
“플랫 에스퍼!”
진효섭은 놀라서 후다닥 그에게 다가갔다. 플랫은 안단테와 달리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피에 절었고, 괴물과 싸운 건지 날카로운 것에 찢긴 듯한 상처가 몸 곳곳에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괘, 괜찮은 겁니까?”
“원래는 다음 날에 말끔하게 씻고 보게 하려고 했는데,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이 정도면 하루 늦게 가이딩 받는다고 안 죽어요.”
다소 차가운 말에 진효섭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사이 축 늘어져 있던 플랫이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진효섭은 지금 말다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잽싸게 플랫을 부축했다.
“플랫 에스퍼, 괜찮습니까? 지금 바로 가이딩하겠습니다.”
“아, 진효섭 씨. 잠깐-”
안단테가 뭐라 말하기 전에 진효섭은 플랫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곧바로 뻗어났다. 힘이 흘러 들어가자마자 몽롱했던 플랫의 눈이 짐승처럼 번쩍였다.
순식간에 플랫이 진효섭을 잡아 들었다. 몸이 순식간에 들렸고, 부북 소리와 함께 셔츠 목덜미 부근이 사정없이 찢겼다. 플랫은 그대로 진효섭의 상체에 몸을 밀어붙였다. 날카로운 이빨이 오른쪽 목덜미를 짓씹었다.
“윽…….”
따끔한 느낌에 진효섭이 몸을 살짝 움츠렸으나 플랫은 물러나기는커녕 더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틈 하나 없이 꽉 맞물렸다.
“자, 잠깐…….”
말려 봤으나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새 진효섭은 바닥에 누워 있었고, 플랫은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짐승 같은 눈이 번들거리는 게, 전에 봤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먹잇감을 사로잡은 맹수처럼 플랫이 진효섭을 내려다봤다. 피 냄새에 홀려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먹힌다. 플랫이 얼굴을 내린 순간, 든 생각이었다. 진효섭의 표정 위로 두려움이 스쳤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자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 이상 무언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뜨니 아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지만, 번들거리던 눈빛은 사라진 플랫이 보였다.
“정신 좀 차렸어?”
“……X발, 덕분에요.”
플랫이 날카롭게 말하며 견갑골에 박힌 단검을 뽑아 들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무리 그래도 단원 등에 칼을 꽂는 건 좀 심하지 않아요? 거의 죽기 직전인 사람한테.”
“하하, 너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정신 차리고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끝까지 갈 생각 없었다고요.”
“그건 모르는 거고.”
안단테가 피식 웃으며 진효섭을 바라봤다.
“이제 가이딩해 줘요. 별일 없을 거예요.”
마치 진효섭이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플랫은 사나웠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