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발린 S급 가이드 6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사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샀더니, 생활비가 예정보다 더 적어졌습니다.”
“음, 역시 그랬네요.”
예상했던 건지 안단테는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알았어요. 그럼, 월급 가불해 줄게요.”
진효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진효섭 씨가 이대로 도망칠 것도 아닐 텐데.”
안단테가 눈웃음을 띠곤 진효섭의 입가에 묻은 김 가루를 떼어 줬다.
“우리 길드에서 오랫동안 일해 줄 거잖아요. 그렇죠?”
오랫동안 일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기에 진효섭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첫 월급부터 가불을 받게 돼서…….”
“이럴 때는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응. 착해요.”
살짝 접혔던 눈매가 더 반달로 휘었다. 순순한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안단테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 맞다. 진효섭 씨, 내일 길드 모임이 있는데 같이 갈래요?”
“길드 모임…… 말입니까?”
“네. 최근 정부에서 한국에 있는 모든 길드에 집합 명령을 내렸거든요.”
진효섭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왜 갑자기 정부가 집합 명령을 내린 겁니까?”
“제 예상에는 아마 던전 때문인 것 같아요. 인터넷을 통제해 놔서 퍼지지는 않았는데, 며칠 전 한국에 동시다발적으로 크고 작은 게이트가 열렸거든요.”
그 크기가 꽤 크고 많아서 사전에 분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한쪽으로 몰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안단테가 이어 말했다.
“아마, 길드를 모아서 적절하게 분배를 할 생각이겠죠.”
“그렇습니까.”
진효섭은 큰 고민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함께하겠습니다.”
“오, 다행이네요. 진효섭 씨가 같이 가 준다면 모임도 조금 즐거워질 것 같아요. 사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는 거거든요. 요즘 모임에 나가면 길드장들이 얼마나 닦달해 대는지, 이것도 스트레스라니까.”
“닦달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던전이요. 2년 동안 던전에 한 번도 참여한 적 없거든요. 그래서인지 갈 때마다 귀찮게 굴더라고요.”
던전을 들어가지 않으면 그런 불편한 일이 있구나. 진효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번에는 던전에 가실 생각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진효섭 씨는 저희 길드를 떠날 건가요?”
“예?”
진효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단테가 그리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진효섭 씨는 우리 길드에 들어온 이유가 위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던전을 들어가지 않는다고요.”
“그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던 것도 잠시, 진효섭은 차분히 기다려 주는 안단테의 모습에 겨우 말을 맺었다.
“물론 그런 생각도 있었지만, 던전을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길드를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요?”
“네.”
어쨌든 길드 소속 에스퍼들은 던전에 들어가야 돈을 벌고, 그래야 길드 존속이 원만하다. 자신이 길드 소속으로 있을 생각이면, 어찌 됐든 노아피 길드가 최선이다.
그러고 보니 노아피는 2년 동안 던전도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길드를 존속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머리를 치켜들었지만, 금세 가라앉았다. 고급스러운 차를 타고 다닐 정도의 재력이었다. 해결사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겠지.
“하하. 그렇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그 말씀은, 던전을 들어가실 예정이라는 뜻입니까?”
“아뇨. 웬만하면 안 들어갈 거예요. 실컷 욕 좀 듣다가 돌아오죠, 뭐.”
“예에…….”
“그보다, 점심 마저 먹어요. 저는 볼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내일 오후 두 시에 집 앞으로 데리러 갈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안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십시오.”
안단테는 아까보다 훨씬 더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진효섭은 기분 좋아질 만한 대화가 어디 있었나 의아해하며 다시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 * *
진효섭은 거울로 옷차림을 확인했다. 단정한 흰 셔츠에 짙은 색 긴바지. 이 정도면 모임이 어떤 분위기라도 무난하게 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진효섭은 자신의 뺨을 가볍게 때리며 밖으로 나섰다.
빌라에서 나가자 익숙한 차가 보였다. 그 앞에는 유난히 다리가 긴 모델 같은 남자가 무표정으로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효섭은 가까이 다가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안단테는 연예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원래도 화려한 외모라고 생각했었지만, 정장을 차려입고 있으니 그 외모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아까까진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제 모습이 영 후줄근하게 느껴졌다. 진효섭은 괜스레 조금 구겨진 흰 셔츠 끝을 손으로 펴며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안단테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왔어요?”
“예. 안녕하십니까.”
“타요. 코다는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대요.”
복장을 걱정하는 건 그 혼자였는지, 안단테는 옷차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안단테는 오늘따라 유난히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고, 진효섭은 조수석에 올라탄 채 멍하니 밖만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에 크고 작은 건물이 없는 허허벌판에 도착했다.
“내리죠.”
그를 따라 진효섭이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저 허허벌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리고 보니 넓은 부지 위에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한 빌딩이 세워져 있었다.
“와…….”
진효섭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엄청난 빌딩 중간에는 큼지막한 로고와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국가안보국]
“국가…… 안보국?”
안단테는 발레파킹 담당인 듯한 안내원에게 차 키를 넘기며 진효섭에게 다가왔다.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길드 모임은 대부분 국가안보국에서 해요. 한국에서 제일 큰 길드거든요.”
국가안보국. 한국의 단 하나뿐인 S급 길드. 진효섭은 어쩐지 긴장돼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안단테가 그의 어깨를 감싸 가까이 잡아당겼다.
“뭘 그렇게 긴장해요. 그냥 더럽게 큰 회사 구경 왔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지 않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정작 C급 에스퍼인 안단테는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심드렁해 보일 정도였다. 커다란 회사의 위압감은 진효섭만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S급과 C급이 서로 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진효섭은 S급 가이드면서 긴장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까 봐 애써 허리를 곧게 펴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갈까요?”
“예.”
두 사람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딱 맞춰서 왔는지 길드 소속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여럿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 지나갈 때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안에서 진효섭도 아는 얼굴이 한 명 보였다.
“오, 저기 코다 있네요.”
안단테 역시 그를 봤는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코다는 평소보다 훨씬 더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큰 키 탓인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모습이 여느 모델과도 같았다.
가까이 온 코다가 작게 고개를 숙이더니 말없이 진효섭의 옆에 섰다.
“안쪽에 들어가서 간식거리나 먹고 있을까요? 국가안보국은 이런 모임에 꼭 뷔페를 부르더라고요. 아무튼 쓸데없이 보이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니까.”
“예. 좋습니다.”
세 사람은 천천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의 시선이 닿아 왔다. 그러나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누구인지 확인하는 시선은 상대가 유명하지 않다는 걸 알고 바로 거둬졌기 때문이다.
“오, 이번에는 다 양식 과자들이네요. 디저트 좋아해요?”
“예. 좋아합니다.”
“다행이네.”
안단테는 제일 화려한 접시 하나를 들어 음식을 담아 진효섭에게 건넸다. 무척이나 아기자기하고 예쁜 모양의 디저트였다. 먹기 전부터 버터 향이 물씬 났고, 한입에 넣었더니 적당히 달면서 담백한 맛이 감돌았다. 처음 맛보는 고급스러운 달콤함이었다.
“아…….”
“맛있어요?”
“예. 엄청 맛있습니다.”
진효섭은 상기된 얼굴로 또 다른 디저트를 집어 먹었다. 하나하나 먹을 때마다 볼록 튀어나오는 뺨은 상기되어 있었고, 감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입에 터질 듯이 디저트를 넣고 한 입마다 기뻐하는 모습에 안단테와 코다는 저도 모르게 진효섭을 빤히 쳐다봤다.
이윽고 코다가 제 앞에 있던 디저트를 집어 진효섭 앞으로 내밀었다.
“……어? 저 주시는 겁니까?”
끄덕끄덕.
“감사합니다.”
진효섭은 디저트를 먹느라 조금 풀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코다는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쩐지 코다의 단정한 표정도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안단테가 그 둘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디저트 많이 좋아하나 봐요?”
진효섭은 손에 든 디저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런 거면 그런 거지, 그런 것 같은 건 뭐예요.”
안단테도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진효섭이 들고 있는 디저트를 집어 먹었다. 주위에 사람도 다가오지 않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따라오기 전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평온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