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늘도 〈웬즈데이〉 영업을 무사히 마쳤다.
마감하고서 준비실에 모여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기선이 모두에게 다음 주 오프 희망 날짜를 물어 왔다.
진형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저는 23일에 쉴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선호가 불쑥 말을 꺼냈다.
“고맙다.”
“하하하!”
갑작스러운 말에 왈칵 웃음이 터졌다. 심지어 선호는 감사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까지 지어 올렸다. 진형이 “뭐가 고마운 건데요, 형.”라고 대꾸하며 다시 한번 실실 웃었다.
“24일 혹은 25일에 쉴게요. 이런 소리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다고.”
“아니, 뭐…… 저야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사장님이 허락하시겠어요?”
“물론 안 되겠지. 그럴 거면 그만두라고 하지 않겠냐.”
선호가 지겸의 등을 힐끗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진형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고서 웃음 섞인 대꾸를 중얼거렸다.
“그렇죠.”
“근데 마음이 좀 그렇긴 하다. 어떡하냐? 둘이 처음 만난 기념일이기도 하고, 또 사귀고서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저도 얼마 전에 그 걱정 그대로 우리 형한테 말했거든요? 그 형이 뭐라고 대답했을 거 같아요?”
또 시작이냐고 말하는 것처럼 선호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염장질의 조짐이 보여서.”
“에이. 그래도 여기선 동생을 위해 물어봐 줘야죠, 형.”
능청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염장질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선호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그래. 윤민 씨가 뭐라고 하디?”
“저희끼리는 진형 씨가 쉬는 날을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는 거 있죠. 하아…… 진짜 예쁘지 않아요? 우리 형 말하는 거 들을 때마다 감탄하기 바쁘다니까. 사람이 어쩜 이렇게까지 예쁘게 말할 수가 있어.”
“아아, 이 자식이. 입만 열면 애인 자랑이야, 아주! 좋냐? 좋아?”
“그럼요. 우리 형 자랑하는 게 제 낙이잖아요.”
진형이 능청스럽게 웃어 보이며 슬쩍 곁눈질했다. 지겸이 코트를 꺼내 들고서 당장에라도 준비실을 박차고 나갈 듯했다. 그걸 보며 다급히 말을 걸었다. 오늘 사장님에게 꼭 꺼내야 하는 용건이 있다.
“사장님!”
“왜.”
무심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남자에게 진형이 싱글 웃으며 질문했다.
“요즘 저희 형이랑 사장님 애인분이랑 가끔 연락 주고받는 거 알고 계셨어요?”
“…….”
침묵은 곧 긍정인 듯했다. 확 굳어 버리는 사장님의 얼굴을 보며 진형이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잠자코 있던 선호가 놀란 듯 눈을 뜨며 진형의 어깨를 툭 쳐 왔다.
“은수 씨랑 윤민 씨가? 언제부터!”
“이제 한 2주 됐나? 저희 회식했을 때,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모양이에요. 사장님 애인분께서 먼저 늦었지만 동거 축하드린다고 인사해 주셔서, 우리 형도 건강은 좀 어떠시냐고 안부 묻다가 그대로 의기투합한 거 같던데요.”
“윤민 씨는 은수 씨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겠다.”
“좀 그런 거 같아요. 누가 자기한테 먼저 말 거는 일이 정말 드문데 사장님 애인분이 스스럼없이 인사해 줘서 놀랐다고도 하고.”
가만히 있던 지겸이 못마땅하다는 어조로 끼어들었다.
“넌 괜찮냐고.”
진형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곧장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듯한 어투에 선호가 옆에서 혀를 내둘렀다. 질색하는 얼굴을 무시하며 오늘의 용건을 위한 밑밥을 깔기로 했다.
“그런데 사장님, 혹시 애인분이랑 저희 형이랑 주고받는 문자 보신 적 있으세요?”
“없는데.”
“전 있거든요. 좀 보다 보니까, 사장님을 위해서 이 정도 대화라면 뭐…… 당분간은 잠자코 두고 봐도 괜찮겠다 싶던데요.”
“나를 위해서?”
“네. 내용 대다수가 그런 거거든요. 사장님 애인분이 동거에 대해서 묻고, 거기에 저희 형이 답을 하고.”
선호가 옆쪽에서 “오!”라며 감탄한 소리를 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짓하는 지겸에게 진형이 경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장님 애인분은 동거하면서 불편한 점이나 마음에 걸리는 점을 좀 들어 보고 싶으셨던 거 같던데…… 콩깍지 엄청 두꺼운 저희 형이 동거의 단점이랍시고 무슨 소리를 했을지 대충 예상이 가지 않으세요?”
선호가 먼저 폭소했고 지겸이 뒤따르듯 픽 웃었다. 옆에서 조용히 듣던 기선과 원길도 감이 온다는 듯 키득거렸다.
“‘식사 준비를 보통 진형 씨가 다 해서, 그게 너무 미안할 때가 있어요.’ 고작 이런 대답이나 하는 거죠. 그럼 사장님 애인분은 ‘저는 지금도 지겸 씨가 다 하는 편이긴 한데요.’라고 한술 더 뜨시고. 동거 얘기가 갑자기 애인 자랑으로 흐르는 거 보면서 엄청 웃었다니까요. 본인들은 자랑한다는 자각 없이 쓰는 거 같아서 더 웃기고요.”
말하면서도 그들이 대화했던 내용이 떠올라 실실 웃게 됐다.
처음에는 사장님 애인분과 자기 애인이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게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표정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정도다. 그랬는데,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지겸 씨’와 ‘진형 씨’의 훌륭함과 다정함이 수놓인 메시지 창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잠시 생각하던 지겸이 말문을 뗐다.
“다음 회식 때도 고윤민 데려와.”
무시무시한 사장님한테 먼저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이 정도면 최고의 감사 인사다. 진형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본격적인 용건을 말할 때였다.
“사장님, 그거 말고 저 오프 때 형이랑 한잔하러 오고 싶거든요. 23일에 4인석 테이블 하나 제 앞으로 예약 빼 주시면 안 될까요? 기왕이면 복층으로.”
진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호가 신음했다.
“야, 너…….”
진형을 쳐다보는 선호의 시선이 마치 ‘미친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송년회 예약이 꾸준히 들어오는 이 연말에 둘이서 4인석에 앉겠다는 것, 심지어 오랜 단골이 아니면 좀처럼 허락받기 어려운 복층 테이블을 빼 달라는 것까지.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절대 하기 어려운 부탁이다.
기선과 원길마저도 진형과 지겸을 번갈아 보며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사장님은 생각보다 고민 없이 곧장 승낙했다.
“그러든가.”
싸늘한 눈초리 한 번은 각오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일이 풀렸다. 진형은 넙죽 허리 숙였다.
“감사합니다!”
지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고서 준비실을 벗어났다. 선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야, 남진형. 오늘도 다시 한번 느끼지만 지겸이 형이 너를 진짜 예뻐하네.”
선호의 말에 긍정하듯 원길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가장 오래된 직원인 기선도 복합적인 기분을 맛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은수 씨를 ‘사장님 애인분’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게 이렇게까지 효과가 있을 일이야?”
진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형도 이제부터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됐다, 인마! 난 이미 늦었지. 그리고 내가 그렇게 굴면 은수 씨는 또 얼마나 어색해하겠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거고.”
투덜대는 선호를 보며 진형이 능글능글 웃어 보였다.
“형, 23일에 잘 부탁드려요. 서비스 좀 기대해도 되려나.”
“예, 예. 알아서 잘 챙겨 드릴게. 대신, 이 형의 다리와 허리를 위해서라도 한 번에 시켜 주겠지? 복층까지 왔다 갔다, 너도 그 고충 알잖아.”
“당연하죠, 형. 걱정하지 마세요.”
대화가 얼추 정리됐다. 이제야 캐비닛을 열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평소라면 마감 직후 몰려드는 피로감에 몸이 축 처졌겠지만 오늘만큼은 몇 번이고 실실 미소가 지어졌다.
형한테는 일단 비밀로 해 둬야지.
입이 좀 근질근질하겠지만 당일에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도 참기로 했다.
옷을 다 갈아입고서 진형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형, 나 끝났어요. 뭐 사 갈 건 없고요? ……아, 괜찮아요. 안 피곤해. 형은 눈 좀 어때요? ……잘했네. 나 갈 때까지 얌전히 누워 있어요. 괜히 현관 앞에 있지 말고요.”
잠시 휴대폰에서 귀를 떼고 직원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마친 진형이 훌쩍 등을 돌렸다.
“눈약은 자주 넣었어요? 걱정이야, 정말. ……참, 안과 예약이 언제라고 했죠? ……그래요? 그날 나도 같이 갈까?”
성큼성큼 준비실을 벗어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마감하자마자 바로 전화통을 붙드는 모습을 약 1년간 지켜봤다.
“그래도 봄여름 때까지는 좋을 때다, 하고 넘겼던 거 같거든? 근데 가을에 동거까지 해치우고 이제 겨울 왔는데도 저 자식은 달라지는 게 없어. 첫사랑 파워가 무섭다지만 엔진이 꺼지지를 않는다고!”
기가 차 하는 선호의 말에 기선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계속 그렇게 넘겨야 하지 않겠냐. 서러우면 너도 누구 만나든가.”
원길이 슬쩍 말을 얹었다.
“차라리 이게 낫죠.”
선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차라리 낫다고?”
“네. 생각해 보세요. 저 형도 지겸이 형이랑 비슷해서 좀 다혈질이잖아요.”
“뭐, 그렇지.”
기선이 동의하자 원길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애인이랑 싸웠다면서 죽네 사네 해 봐요. 일하다가 사고 칠까 봐, 옆에서 지켜볼 때 아주 조마조마할 거 같은데요.”
기선과 선호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원길이 말하는 상황은 자기들도 몹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가뜩이나 지겸이 형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데 저 형까지? 게다가 얼마 전에도 아찔한 상황이 있었잖아요.”
기선과 선호도 진형이 손님 멱살을 쥐어틀 뻔했다는 것을 이미 전해 들었다. 문제의 남자가 진형의 성미를 제대로 건드리는 말을 했음에도, 그럭저럭 잘 넘어가서 천만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저희가 원활하게 일하기 위해서라도 언제까지고 둘의 행복과 알콩달콩함을 바라야 하는 거라고요.”
원길이 깔끔하게 결론 내렸다. 자기 말이 옳지 않냐는 눈빛을 바라보며, 기선과 선호도 씁쓰레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민은 정말로 환한 원색이 잘 어울린다.
진형은 매우 흡족한 시선으로 애인을 바라봤다. 며칠 전에 쨍한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었을 때도 굉장히 귀여웠는데, 오늘 개나리색 후드 티를 입은 모습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체구는 물론이고 손발까지 작으니 마치 병아리 같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게 됐다.
작다란 그의 키가 언젠가는 참으로 탐탁지 않았는데, 이젠 그런 생각을 했던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날 때가 있을 정도다.
품에 푹 파묻혀 오는 작은 신체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른다. 언제 어느 때고 손쉽게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생각보다 큰 이득이었다. 주체하지 못하고 과격하게 군 날이면, 그를 훌쩍 안아 들고 욕실이든 침실이든 이동할 수 있었다. 기력을 전부 소진한 채 자기 팔 안에서 눈만 깜빡거리는 얼굴에 입술 도장을 여러 번 찍어 대면, 그가 행복하다는 듯 설핏 웃어 주어 무척이나 가슴 뿌듯했다.
진형이 애인의 사랑스러움을 만끽하는 동안, 윤민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빤히 올려다봤다.
얼굴이 미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압도적인 박력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진형을 통해 알게 됐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애인의 얼굴이 코앞에 있으면 저도 모르게 숨을 한번 꾹 눌러 참게 됐다.
아직까지도 가을에 보았던 진형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와 청바지, 블랙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우스갯소리는 바로 진형 같은 사람 때문에 생겨난 게 분명하다고 골백번은 넘게 생각한 거 같다.
오늘의 진형은 두툼한 카키색 야상을 걸쳤다. 청남방과 블랙 진, 새하얀 하이 톱 스니커즈. 거기에 독특한 머리 색까지. 심지어 훤칠하고 팔다리까지 길쭉하니, 지금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진형은 대단히 태가 났다.
오늘도 평소 하던 대로 입버릇처럼 멋있다는 말을 생각날 때마다 해 댔다. 진형은 언제나 콩깍지가 두꺼운 탓이라고 웃지만 그것만큼은 아무리 그의 말이라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남들도 다 자기처럼 생각할 거라고. 진형 씨처럼 예쁘고 멋있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근사한 애인을 보며, 러브호텔에서 들었던 감격적인 말이 떠올랐다. 먼 미래가 진심으로 욕심났다.
서른을 넘긴 진형 씨도 꼭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형, 어떻게 할까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진형 덕분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윤민은 그와 시선을 맞추고 조심스레 물었다.
“뭐를요?”
진형이 눈을 찡긋거리며 능청스럽게 속삭였다.
“손을 잡을까, 허리에 팔을 두를까. 아니면 형이 내 팔에 팔짱을 낄래요?”
“…….”
진형의 말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곧장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입이 바로 열리지 않았다.
지금 이 무렵에는 어딜 가도 인파로 들썩거렸다. 시가지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것보다 서로의 얼굴이나 마음껏 쳐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걸 택한 둘은 해가 떨어지고서야 집을 나섰다.
귀에 익은 캐럴이 흘렀고 다양한 전구로 장식된 트리들도 곳곳에 보였다. 벌써 크리스마스가 내일모레다. 새해가 완전히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게 물씬 느껴졌다.
거리를 구경하고 저녁까지 적당히 해결하자 진형이 오늘 한잔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그의 제의에 좋다고 대답하며, 머릿속으로 냉장고에 안주로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는지 고민했다.
당연히 집에서 마시겠거니 생각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진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꽤 낯익은 가게 앞에 설 수 있었다. 오늘 같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깜짝 놀라 고개를 올리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저녁 7시, 〈웬즈데이〉 정문 앞이다.
가게로 들어가는 사람 몇몇이 이쪽을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주목받는 것은 언제든 매우 불편하기에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윤민은 조금 전 진형에게 들은 질문을 곱씹으며 천천히 되물었다.
“어, 그거 셋 중 하나는 꼭 해야 하는 거예요?”
“네.”
“그러면…… 손?”
“에이, 좀 약하지 않아요?”
어떤 부분에서 약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의 생각이 잡히는 듯했다. 진형은 이미 이쪽에게 듣고 싶은 대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당연히 그걸 해 주고자 마음먹었다.
“진형 씨는 어떤 걸 하고 싶어요?”
“해 줄 거예요?”
진형의 웃음이 짙어졌다. 역시 그랬나 보다. 그렇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는 눈빛이다. 윤민은 고민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진형 씨가 원하는 걸 할게요.”
“그럼 내 허리에 팔 둘러 볼래요?”
윤민이 주춤주춤 옆으로 이동해서 팔을 뻗었다. 진형이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뻗어 오는 통에 상대적으로 이런 스킨십을 먼저 해 볼 기회가 그다지 없었다. 심지어 집이 아닌 바깥에서 하려니 제법 창피했다.
“이, 이렇게 하면 될까요?”
허리를 안는다기보다 마치 부여잡는 듯한 자세가 됐지만 진형은 웃으며 반색해 주었다. 어깨 위로 기다란 팔이 자연스럽게 둘렸다.
“너무 좋은데? 이걸 시작으로 앞으로 집에서도 좀 해 줘요.”
어쩐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윤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력할게요.”
나란히 걸으며 가게 안으로 입장했다. 사람 많은 훈훈한 실내로 들어서자 얼어붙었던 뺨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정문에서 늘 대기하는 기선이 둘을 보자마자 살짝 웃어 보였다.
“왔어?”
“네, 형. 고생 많으십니다.”
“고, 고생 많으십니다.”
들은 말을 얼떨결에 따라서 말하게 됐다. 진형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고 기선은 “아닙니다. 잘 오셨어요.”라고 윤민이 민망하지 않게끔 말을 받아 주었다.
홀을 바삐 누비던 선호가 둘을 확인하고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왔냐? 저녁 먹고 들어온 거야?”
“네, 형. 바빠요? ……아, 바쁘겠네요.”
안을 휙 돌아본 것만으로도 선호와 원길이 얼마나 뛰어다녔을지 예상이 갔다. 거의 만석을 자랑하는 상황이니 오픈 때부터 정신없었을 듯했다.
진형의 허리를 꼭 붙잡은 윤민을 보며 생글생글 웃던 선호가 인사를 건넸다.
“윤민 씨, 어서 와요. 생각해 보니까 윤민 씨를 가게에서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아무리 진형이랑 집에서 오붓해도 가끔 들러요. 원래 혼자서 잘 왔잖아.”
윤민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 진형이 말을 가로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형? 나 일할 때 이 형 혼자 앉아 있어 봐요. 그날 일이 되겠냐고.”
“네 애인 안 훔쳐 가. 아무도!”
“그걸 어떻게 장담해.”
선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휘휘 손을 저었다.
“됐어, 됐어! 가서 앉기나 해.”
윤민은 둘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가장 먼저 진형과 추억을 만들었던 2인석 테이블을 확인했지만 이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니, 거기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그냥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형, 이쪽으로 와요.”
어깨에 둘린 팔이 이끄는 대로 일단 걸었다. 어느 사이엔가 복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윤민이 눈을 크게 뜨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 올라가도 돼요? 복층에 자리 잡는 거 굉장히 어렵지 않아요?”
“형도 아는구나?”
“네. 손님들이 말하는 거 들은 적 있어요.”
“괜찮아요. 사장님이랑 이미 얘기 끝난 거라. 형 덕분에.”
“제 덕분에요?”
“일단 앉은 다음에 말해 줄게요.”
복층에는 다섯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한 곳에 있는 예약석 표시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석일 줄 알았는데 난간 바로 옆쪽, 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이다. 멀찍이 떨어진 바에 서 있는 사장님을 보니 감사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복층 테이블의 장점은 바로 의자가 2인용 소파라는 거였다. 딱 달라붙어 있기에 최적이다. 진형은 가방과 겉옷을 모조리 정리해서 맞은편 소파에 올려놓고 윤민을 난간이 가까운 자리에 앉혔다.
또다시 어깨에 자연스레 팔이 걸쳐졌다. 윤민은 잠시 갈등했지만 느릿느릿 진형의 허리로 팔을 뻗었다. 기분 좋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얼굴을 보니 역시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이고…….”
메뉴판을 들고 온 선호가 탄식했다. 바싹 붙어 앉아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감고 있는 커플을 바라보는 시선에 쓴웃음이 묻어났다. 윤민의 얼굴은 단숨에 타들어 갔지만, 진형은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며 농을 던졌다.
“왜요, 형. 이제 슬슬 누굴 좀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쳐요?”
“그래, 엄청나게 솟구친다. 아주 고맙다?”
“형은 매번 말뿐이잖아. 저랑 사장님 보면서 외로움을 느꼈다면 진작 만들어도 만들었겠죠.”
“야, 너 누굴 좀 소개해 주고 그런 소리를 해라?”
선호가 씩씩대며 빨리 주문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진형은 일단 가볍게 시작하겠다며 냉큼 맥주와 이런저런 안주를 시켰다. 물론 윤민을 위해 얼음물을 주문하는 것까지 잊지 않고 수행했다.
선호가 떠나고서도 한참 멍하니 앉아 있던 윤민은 곁눈질로 홀을 내려다봤다.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로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잠시간 응시하고서 슬쩍 입을 열었다.
“복층에 앉아 볼 줄은 몰랐어요. 신선한 기분이네요.”
“나도요. 형 덕분이라니까.”
“참, 그거 무슨 뜻이에요?”
“형이 사장님 애인분 동거 상담을 들어 줘서요.”
“아…….”
진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쪽이 대답한 순간 윤민의 낯빛에 갑작스레 우울한 기색이 올라왔다. 걱정스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어투로 질문을 해 봤다.
“그러고 보니, 상담은 요즘 어떻게 돼 가요?”
“그거 말인데요, 진형 씨…….”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요?”
진형은 허리를 틀어 몸을 기울였다. 점점 더 흐릿한 표정으로 변해 가는 작은 얼굴에 손을 가져가 뺨을 살짝 매만졌다. 손끝이 건네는 온기에 애써 웃으며 윤민이 우물거렸다.
“제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요.”
속으로 남몰래 웃었다.
그렇지. 어차피 처음부터 친분 외에 별다른 소득은 없을 상담이었다. 서로 자각 없는 애인 자랑하기 바쁘니. 둘은 꽤 진지하게 얘기했겠지만, 이쪽이 보기엔 동거의 장단점 따윈 완전히 뒷전이 된 것처럼 여겨졌다.
잠시 망설이던 윤민이 슬며시 말을 덧붙여 왔다.
“아니, 그보다…… 제가 진형 씨랑 동거하면서 느꼈던, 그런 상황이나 감정들을 이미 은수 씨는 다 겪으셨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겠지. 어느 한쪽 집에 전입 신고만 안 했다 뿐이지 이쪽과 거의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애초에 상담 자체가 그리 의미 없기도 했던 거다. 아니, 사장님을 생각하면 동거의 장점만을 쏟아 내는 윤민의 메시지가 괜찮았을 수도 있다. 사장님 애인분이 갖고 있었을 일말의 걱정도 꽤 사라졌을 테니까.
“걱정 마요, 형. 괜찮아.”
“괜찮아요?”
“네. 형은 정말로 훌륭하게 잘해 주고 있다니까. 사장님이 흡족해서 이 자리까지 내어 준 걸 보면, 거의 100점에 가까워요.”
“그, 그래요? 정말요?”
“나를 믿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하던 대로 하면 돼요.”
다정하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이다음 살짝 낮아졌다.
“대신, 너무 친해지진 말고. 질투 나니까.”
얼굴을 매만지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턱 끝을 살살 매만지던 엄지가 아랫입술을 건드려 왔다. 약하게 문지르는 느낌에 전신이 움츠러들었다.
윤민은 잠시 고심했지만 정답일 것 같은 대답은 계속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한테는 진형 씨밖에 없어요.”
“알지. 하지만 질투는 그거랑 상관없어요.”
진형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형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미친놈처럼 화가 날 때가 있거든.”
서로의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윤민이 숨을 잔뜩 집어삼켰다.
키스하나? 여, 여기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쪽으로 기울어지는 얼굴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감기려 하는 눈꺼풀이 조금쯤 창피했다.
“못 해 먹겠네, 진짜.”
위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어깨가 크게 떨렸다. 진형이 슥 고개를 들며 키득 웃어 보였다.
“형이야말로 타이밍 진짜 못 맞추네요.”
“아이고, 손님.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선호 뒤에는 원길도 있었다. 둘은 재빠르게 테이블 위에 이런저런 것들을 올려놨다. 윤민은 내심 놀라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많이 시키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좋은 시간 보내세요.”
원길이 꾸벅 인사하며 자리를 떴다. 선호는 “방금 못 봤어? 우리가 그딴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보내잖아.”라고 말하더니 실실 쪼개며 그 뒤를 따랐다.
호화스러운 테이블을 보며 윤민이 다시금 질겁했다.
“진형 씨, 이거 너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은 거죠. 오늘 선호 형이 서비스 팍팍 내준다고 했거든요. 직원 찬스로.”
서로의 잔에 맥주를 채워 주고서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건배를 했다.
따뜻하다 못해 다소 덥게 느껴지는 실내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야 비로소 다양하게 놓인 안주에 시선이 갔다. 윤민이 포크를 들어 사과를 집으려 하자 바로 방해가 들어왔다.
“내가 주는 거 먹어요.”
진형이 치즈 소시지를 잘라 호호 불고는 입에 넣어 주었다. 둘이 있을 때 진형이 챙겨 주는 게 익숙해져서 무심코 받아먹었지만 뒤늦게 서서히 열이 올랐다.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됐다.
복층 테이블에서는 둘이 마주 앉았던 2인석 테이블이 훤히 잘 보였다. 거기에 잠시 시선을 주던 진형이 키득 웃으며 말을 걸었다.
“형, 우리가 잘되기 전에요. 내가 형한테 돌아 버렸나 싶어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그 무렵에. 내가 여기 형들 붙잡고서 고민 상담을 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 선호 형이 날 엄청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어떤 말인데요?”
“미안하다고. 그날, 크리스마스이브에 너랑 윤민 씨를 합석시켜서.”
“아…….”
진형에게 고민의 대상이 됐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좋기보다는 미안한 감정부터 앞섰다. 그때는 그와 잘되면 좋겠다거나, 애인이 된다는 가정 따위는 전혀 하지도 못했다.
고백하지 않으면 상대는 그 마음 영원히 모를 거라고.
폭발적으로 감정을 토해 내던 그를 봤을 때도, 지금에 와서 가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도. 언제나 드는 마음은 항상 같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그토록 소리치기까지 얼마만큼 속을 썩였을까 생각하면 늘 안타까움이 물씬 든다.
“나도 그때 받아쳤거든. 왜 그랬냐고. 나 정말 미치겠다고. 그런데 요즘은 어떠냐면, 선호 형이 마치 내 생명의 은인처럼 느껴지거든요? 후광이 보이는 것도 같고요.”
윤민이 살짝 미소 지었다. 먼저 합석을 권한 건 자기였지만 그 자리가 성사된 건 결과적으로 선호가 압박을 넣은 덕이었다. 진형이 말하는 ‘후광’이 어떤 건지 이해할 수 있다. 자기도 선호의 얼굴을 보면 그 누구를 볼 때보다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진형의 눈매가 살짝 짓궂어졌다. 이제부터 농담할 거라고 예고하는 듯했다.
“만약 형이랑 데이트 약속 잡은 휴일에, 선호 형이 오프 바꿔 달라고 하면 한 번 정도는 해 줄 수 있겠다, 그런 마음도 들고.”
말을 마치며 진형이 살짝 눈짓해 왔다. 이쪽도 입을 열어야 할 때였다.
“저도 선호 씨가 부탁해서 진형 씨가 쉬는 날을 바꿔 줬다고 하면, 약속 취소돼도 안 섭섭할 거 같아요. ……한 번 정도는요.”
윤민이 상기된 얼굴로 농담을 받아 주었다. 진형이 기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넣었다. 윤민의 몸이 자연스레 진형에게로 기울었다.
“진형 씨한테 합석 권했던 거…… 술기운 없었으면 아마 불가능했을 정도로, 정말 용기가 많이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가슴 쿵쾅거리는 거 꾹 참아 가며 진형 씨에게 또 말을 걸 거 같아요.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니까요. 며칠에 한 번씩은 꼭 드는 생각이에요.”
잔잔한 음성을 듣자 마음이 뭉클해졌다. 진형은 어깨에 두르던 손을 올려 윤민의 머리칼을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형, 나도 그 비슷한 생각 엄청 해요.”
“진형 씨도요?”
“네. 형 앞에서 소리소리 질렀던 그 미친 짓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 통틀어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나 역시 또 하라면 못 할 거 없죠. 쪽 좀 팔리면 어때. 형을 가졌는데.”
그 뒤, 둘은 서로의 체온에 휘감긴 채 잠시 옛일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간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 진형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시간이 참 빠르다.
함께 웃으며 지내다 보니 1년이 순식간에 흐른 듯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스물다섯과 서른넷의 인생을 함께 맞이하게 될 거였다.
커플을 지켜보러, 대리 만족을 위해 이 〈웬즈데이〉를 찾았다던 윤민의 모습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음침하게 느껴졌고, 나중에는 서글퍼졌다. 커플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윤민을, 이쪽도 몇 번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까우면서도 화가 났다.
나중에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윤민이 3년 남짓 〈웬즈데이〉 단골로 다니며 훔쳐봤다던 커플 가운데는 나도 있었을 거라고. 나와, 빈번하게 바뀌던 옆의 누군가.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자기에게 무수한 감정을 떠안겼던 그가 지금은 자기와 커플이 되어 이곳에 앉아 있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면서도 다행스럽다.
진형이 “형.” 하고 윤민을 부르며 살짝 고개 숙였다.
“나랑 이러고 있으니까 어때요?”
“좋아요. 정말 좋아요.”
윤민이 시선을 맞추며 냉큼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입가에 그득 차올랐다.
“사람들 시선 신경 쓰이다가도, 결국 나밖에 안 보이죠.”
“네, 맞아요.”
윤민이 속으로 연거푸 감탄했다.
역시 진형 씨는 천재라고. 이토록 자기 마음을 잘 안다고.
마치 홀린 듯한 표정으로 응시하자 진형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그렇거든요. 그리고 예전에 형이 몰래몰래 훔쳐봤던 커플들도 그랬겠지.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 알 게 뭐야. 상대방밖에 안 보였을 거예요.”
윤민은 고개를 내려 홀을 한번 훑었다. 커플처럼 보이는 이들이 곳곳에 있었다. 저들을 숨죽여 바라보며 혼자 이런저런 감정을 상상하던 때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저한테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새삼 신기해요.”
한 번 신기하다고 생각하니 한도 끝도 없다. 윤민은 자기 옆에 꼭 붙어 앉은 진형을 몇 번이고 응시하게 됐다.
요즘은 그나마 익숙해졌지만 초반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진형의 연락처가 찍힌 전화번호부나, 함께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수도 없이 느꼈다.
심지어 진형은 거의 매일같이 찾아왔다. 꿈이면 어떡하냐고 불안해할 틈을 아예 차단하려는 것처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방문해서 몸을 꽉 끌어안고 키스하곤 했다. 신기하다거나 놀랍다는 표현을 할 틈이 없었다. 널찍한 품에 푹 파묻힌 채 얼굴 곳곳에 떨어지는 입맞춤을 받아야 했다.
지난 1년간을 멍하니 떠올리던 윤민의 이마로 입술이 다가왔다. 피부를 어루만지듯 입맞춤을 하며 진형이 살짝 웃어 보였다. 윤민은 떨리는 시선으로 미형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요, 처음 진형 씨를 봤던 날에. 아, 제가 일방적으로 진형 씨를 알고 있던 때요. 그때, 진형 씨 웃는 얼굴을 보고 참 좋았거든요.”
“정말?”
“네. 그래서 〈웬즈데이〉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진형 씨가 있는지 확인하곤 했어요. 그러다가 진형 씨가 있는 날이면, 오늘 운이 참 좋다고 속으로 막 기뻐하면서 계속 훔쳐보고 그랬어요.”
“그날은 나만 계속 바라봤어요?”
“네, 진형 씨가 있는 날은 항상 그랬어요. 정말로 예쁘고 잘생겼다고 몰래 감탄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아요. 용기 쥐어짜서,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괜히 진형 씨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로 지나가고. 목소리 들으면 또 좋아서 괜히 웃음 나고.”
마치 그때 어떤 식으로 웃었는지 보여 주는 것처럼 윤민이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한참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진형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지, 진형 씨.”
기다란 손가락이 턱을 가볍게 붙잡아 왔다.
지금껏 끊임없이 학습한 덕분에 자동으로 눈이 질끈 감겼다. 온기가 닿아 왔고 곧장 입 안을 점령당했다. 속이 덜컹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입술을 맞대는 키스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안을 휘젓는 혓바닥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머릿속이 몽롱해질 무렵 입술이 떨어졌다. 윤민은 당황한 나머지 안경만 몇 번이고 추켰다. 타액으로 젖은 선정적인 입술이 눈동자에 파고드는 듯했다. 열이 잔뜩 오른 뺨이 더더욱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 이런 건 집에서…….”
“어쩔 수 없었어요. 방금은 형이 너무 예뻤잖아.”
“저한테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 진형 씨뿐이에요, 정말로…….”
옅게 미소 짓던 진형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해졌다. 혹시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조마조마하던 때, 그가 매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새끼한테도 듣고 싶어요?”
“아니요!”
다급한 대답에 눈앞의 남자가 다시금 미소를 되찾았다. 윤민도 작게 웃으며 필사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진형 씨라서, 진형 씨가 말해 주니까 부끄러우면서도 좋은 거예요.”
붉게 물든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진형이 한숨처럼 속삭였다.
“나 형이 이럴 때마다 가끔 헷갈린다?”
“헷갈려요?”
“네. 형이 순수하게 대답해 준 건지, 아니면 지금 당장 더한 걸 해 달라고 조르는 건지.”
“그, 어…… 그거 다 맞긴 한데 그래도 여기서는 좀, 아닌 거 같아요. 진형 씨가 해 주는 건 뭐라도 좋지만 그래도 단둘이 있을 때, 마음 편하게 하고 싶으니까요.”
“빨리 집에 가자는 소린가?”
진형이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눈가를 찡긋거렸다. 윤민은 마치 도망치듯이 몸을 살짝 돌려 포크를 들었다. 과일 접시에서 배 조각을 포크로 찍어 살며시 진형에게 가져가자 웃음기 가득한 입술이 넙죽 받아먹었다.
진형이 관자놀이를 작은 머리에 기댔다. 윤민도 스스럼없이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맡기고서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가게 안에 흐르는 재즈풍의 캐럴도.
사방에서 들려오던 떠들썩한 목소리도.
하나둘 사라져 간다.
상대의 체온에 도취한 채, 이 세상에 오직 둘만 존재하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크리스마스 오전에 이르기까지.
직원들은 영업 개시를 하자마자 폭풍처럼 밀려드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마감을 마치고서 전부 준비실 평상에 잠시간 드러누웠을 정도다.
죽겠다. 다리가 뽑힐 거 같다. 집에 갈 힘도 없다.
제각각 앓는 소리를 쏟아 내던 직원 중에서 가장 먼저 벌떡 일어선 것은 진형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지체하기 싫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윤민을 꼭 안고서 잠들고 싶다는 강력한 귀소 본능이 머릿속을 장악해 왔다.
“너, 얼마 전에 손님이 들이댔던 게 엄청 거슬렸나 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선호가 은근히 속삭였다. 기운 없는 와중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랬다. 오픈 준비를 할 때 생각보다 잠잠해서 오히려 이상했을 정도다.
일단, 진형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실 하나를 곧장 정정하기로 했다.
“그건 들이댄 게 아니에요. 나랑 싸워 보자는 거였지. 그냥 들이대는 정도였으면 나름 예의 갖춰서 잘 거절했을 거라고요.”
“하여튼 그 진상이 남진형 가슴에 불을 질러 버렸다는 거 아니겠어.”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진형도 비슷한 어조로 대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어제 네 행동이 그랬잖아. 집에 꼭꼭 숨겨 두던 윤민 씨를 아주 보란 듯 데려와서 영화 한 편 또 찍었지. 나 완전 행복하고, 애인 물고 빠느라 제정신 아니니까, 알아서들 꺼지라고.”
“역시 선호 형. 제대로 알아차려 주셨구나.”
“나뿐이냐? 어지간히 눈칫밥 말아 먹지 않은 이상 다들 알지. 그렇게 대놓고 보여 주는데.”
그날의 복층 테이블은 홀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바꿔 말하면, 홀에서도 고개를 조금만 올리면 단숨에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단 뜻이었다. 자리를 잡아 준 지겸이 이쪽 생각을 간파한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데서 오만 애정 행각을 펼쳤다. 선호나 원길이 바쁜 와중에도 몇 번이나 목격했으니 손님들 역시 비슷하게 둘의 모습을 눈에 담았을 게 분명하다.
“네가 열받아서 손님이고 뭐고, 콱 받아 버리고 싶을 정도의 해충이 꼬이는 일은 당분간 없겠네.”
“그럼 더 좋고요. 그리고 형, 앞으로 그 진상 오면 형이나 원길이한테 주문 토스할게요. 다시 보면 면상 갈아 버릴 거 같아서.”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선호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마음이 점점 더 다급해졌다. 오늘은 쉬는 시간이 없어서 윤민에게 메시지 한 통 넣질 못했다는 게 초조함을 부추겼다.
당장 통화할 수 있도록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진형이 꾸벅 몸을 숙였다.
“가 볼게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들어가라.”
준비실 밖으로 나와 뒷문을 향해 걸었다. 문을 열자마자 어둑어둑한 길목이 바로 보였다. 이제 새벽 6시가 조금 지났다. 아직 일출 전이기에 가로등의 둔한 불빛만이 주변을 주황색으로 밝히고 있었다.
“아, 눈 오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가랑눈이 마치 부슬비처럼 쏟아졌다.
노출된 뺨과 손등으로 진눈깨비가 톡톡 떨어질 때마다 차가움에 눈가가 살짝 떨렸다. 세차게 내리는 밤눈 탓에 시야가 온통 흰색으로 물든 듯한 착각에 빠졌다.
오늘은 쉬는 시간이 없었기에 담배가 간절했다. 야상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려던 손이 갑작스레 뚝 멈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얇은 눈송이를 보고 있자니 윤민 생각이 물씬 난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그는 지금 바깥세상에 눈이 오는지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전화를 미루기 싫었다.
“형, 나예요. 이제 마감하고 나왔어요.”
- 고생 많았어요. 많이 바빴죠?
“네. 으아, 오늘 진짜 지독했어요. 여태까지 일했던 거 통틀어서 가장 바빴던 거 같아. 휴식 시간에 쉴 수가 없어서 형한테 연락도 못 하고, 야식도 거르고.”
- 정말요? 어떡해요.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형 목소리 들으니까 나아지네요.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야.”
수화기 건너편에서 기쁨을 꾹 눌러 참는 소리가 났다. 진형 역시 남몰래 웃으며 눈발이 바람에 무수히 휘날리는 장관을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을 머금은 작은 눈송이들이 참 예뻤다.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에 빠져들었다.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참, 형. 지금 눈 오는 거 알아요?”
- 네, 알아요.
예상 밖의 대답에 진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응? 알아요? 난 형 모를 줄 알, 어……?”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허리 부근을 꼭 붙들어 왔다. 등에 푹 감기는 체온을 느끼자마자 바로 누군지 알아차렸다.
진형이 통화를 끊고서 곧장 몸을 돌렸다.
“형!”
“진형 씨, 여기 있을 거 같더라고요.”
다소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얀 얼굴이다. 어두운 밤 풍경과 대비된 탓인지 더더욱 희게 보였다.
진형은 살짝 몸을 떨어뜨리고서 입고 있던 겉옷 지퍼를 단숨에 내렸다. 큼지막한 야상 안쪽으로 그를 잡아끌자 작은 몸이 단숨에 푹 파묻혀 왔다. 그를 가두듯 옷으로 덮고서 마른 등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형, 설마 밖에서 기다린 건 아니죠?”
“네, 아니에요. 옆 건물 카페에서요. 진형 씨한테 전화 오자마자 바로 나왔어요.”
“거기서 얼마나 있었어요?”
“음, 한두 시간 정도였던 거 같아요.”
진형이 정수리에 턱 끝을 비비며 걱정 어린 목소리를 늘어놨다.
“어떻게 된 거야, 얘기도 없이. 깜짝 놀랐잖아요.”
윤민이 잔잔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다정히 속삭였다.
“저희 크리스마스이브는 23일이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오늘을 그냥 넘기기가 싫더라고요. 집에 있다가 진형 씨가 보고 싶어져서, 마중을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무지하게 좋은데, 형 피곤했을까 봐.”
“아니에요. 진형 씨 기다리는 건데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아아, 정말…….”
진형이 앓는 소리를 뱉으며 동그란 이마에 여러 번 입 맞췄다. 쪽쪽. 아무리 입 맞춰도 확 올라온 들끓음이 가시질 않았다.
“나 진짜 미치겠다, 형 때문에. 너무 좋아서 가슴이 다 욱신거리네.”
진형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행복한 듯 웃던 윤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형 씨, 있잖아요.”
윤민이 품 안에서 호흡을 깊게 가다듬었다.
“연애는, 음, 역시 좀 어려운 거 같아요.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순간보다, 아직까지도 신기하고 놀라운 순간들이 더 많거든요.”
응?
연거푸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이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혼자서 하는 게 뭐든 익숙했기 때문에, 어…… 연애는 둘이 하는 거니까 어쩌면 순탄하지 않을 날도 꽤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지레 겁먹은 부분도 좀 있었고요.”
뜬금없이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윤민을 안으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만끽하는 이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도, 귓가에 파고드는 음성 탓에 기쁨을 한껏 만끽할 수가 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다. 이 순간, 애인의 입에서 연애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매한 느낌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제야 조금씩 순수하게, 행복을 맛보는 거 같기도 해요. 반쯤 꿈꾸는 듯 지내다가 비로소 제 일상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하면 좋을까요. 그래도 아직은 신기한 것투성이지만.”
의아한 기분으로 일단 침묵했다. 어째서일까.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리고 처, 첫 키스는, 그, 사실 어떻게 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정확하게 생각이 잘 안 나요. 그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
진형의 얼굴에서 억척스레 올려 두던 미소 한 줌까지 싹 사라졌다.
“연애도 그렇지만 키스는 정말로 저랑 인연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이랑 그런 식의 접촉을 할 수 있을 줄은, 음, 애초에, 아예, 그런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얼떨떨하고 부끄럽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이러다가 기절할 것만 같아서 무섭기도 했어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던 윤민이 겸연쩍은 목소리를 냈다.
“저 그날 다리가 풀렸잖아요.”
아, 이건…….
익숙한 얘기다. 윤민의 말을 듣자마자 단번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서 당혹스러워하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다른 건 좀 흐릿하기만 한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주저앉았다는 것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나요. 떠올릴 때마다 매번 부끄럽고, 얼굴 뜨거워지고요.”
아아, 뭐야.
진형이 소리 없이 웃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삽시간에 느슨해졌다.
다행이다. 우리 얘기구나.
형은 지금 나랑 하는 연애, 나와 했던 첫 키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거였구나.
잠시 가만히 있던 윤민이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이게, 어, 안 좋았다는 게 아니라요! 절대 그런 거는 아니고요. 그냥, 그날 제가 심하게 당황했던 것만 또렷이 기억나니까 할 수 있는 얘기가 그리 없어서요. 하지만 진형 씨랑 할 수 있어서 기뻤고 정말 행복했다는 건 확실해요.”
그의 목소리로 자기 이름까지 듣게 되자, 비로소 진형이 환한 웃음을 되찾았다. 품에서 꼬물거리던 윤민이 고개를 쏙 들고서 눈치 보듯 질문했다.
“진형 씨, 선물이 괜찮았나요?”
“네?”
무슨 소린지 눈빛으로 물어 오는 진형을 보며 윤민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 진형 씨가 선물로 받고 싶다고…… 저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제가 말을 제대로 못해서 미안해요. 감정을 말로 옮긴다는 게 쉽지가 않네요.”
수줍음 가득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가물가물, 뭔가 알 듯 말 듯 하다.
“지키지 못할 약속일 줄 알았는데, 그래서 지키기 힘들 거 같다고 했는데. 진형 씨 덕분에, 진형 씨에게 이렇게 제 마음을 선물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선물? 약속?
진형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꽤 괴로운 과정이다. 그날 자기가 윤민을 바라보며 속으로 업신여기거나 깔아뭉갰던 것까지 함께 떠오르니 아주 미칠 노릇이었다.
아, 이 개새끼.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어떻게 이 형을 보면서 그딴 생각을 했어.
스스로에게 욕설을 들이부으며 그날 나눴던 대화의 기억을 열심히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니까 형도 내년에 노력해서 나한테 선물 주세요. 내가 받고 싶은 건 형의 연애담인데, 그게 만약 어려우면 첫 키스 경험담도 괜찮아요.〉
그래. 어슴푸레 떠오른다. 그의 뺨을 입술로 훔치고 나서 그런 식의 말을 했던 거 같다.
“하아…….”
이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깊은 안도감부터 밀려들었다. 진형은 품에 가둔 몸을 다시금 고쳐 안으며 가늘게 한숨 쉬었다.
“형, 방금 얘기 들으면서 나 두어 번 움찔한 거 알아요?”
“왜요? 제가 말을 너무 못해서요?”
풀 죽은 듯한 음성에 웃음이 왈칵 터졌다.
“아니야, 그런 거! 그게 아니라 내가 착각을 했어요.”
“착각?”
“네, 듣다 보니까 형이랑 내 얘기 맞는데, 처음에는 그 생각을 못 하고 열이 콱 올랐거든요. 눈이 뒤집히는 기분이 드는 거지.”
“어, 정말요?”
“네. 형한테는 내가 다 처음이었을 텐데, 이건 도대체 어떤 시발 새끼지? 혹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싶어서 잠깐 이성이 끊기는 줄 알았다니까.”
윤민이 한껏 당황한 시선으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해요! 제가 좀 뜬금없었죠. 카페에서 진형 씨 기다리면서 열심히 생각했는데, 정작 말을 하려니까 운을 어떤 식으로 떼면 좋을지 몰라서……. 처음에 진형 씨 얘기라고 말하는 편이 좋았을까요?”
“아니, 아니.”
떨림을 머금은 작은 신체를 여러 번 토닥거렸다.
“형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내가 제멋대로 울컥한 건데.”
진형이 키득거리며 재잘댔다.
“난 형 관련된 일이면 뭔가 좀, 가뜩이나 별로 없는 침착함이 죄다 사라지는 거 같아. 그때그때, 즉각 반응해야 하는 사람처럼 머릿속이 제멋대로 날뛴다니까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금 벌컥 웃음이 터졌다. 경쾌하게 미소 짓는 남자를 윤민이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형 때문에 내가 나한테 쌍욕 하는 일이 또 생겼어. 재밌지 않아요?”
“아…….”
“선물 고마워요, 형. 잘 받았어요. 마음속에 저장해 두고 종종 꺼내서 기억할게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진형 씨.”
윤민이 조그맣게 웃더니 다시금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몸을 꼭 고쳐 안고서 바람에 흐트러지는 눈송이를 응시했다.
워낙 고요하기 때문일까. 마치 둘만의 세상 같았다.
온통 흰색으로 물들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진형은 지금 이 순간 떠오른 말을 고백하고자 입을 열었다. 진심을 담아서.
“민이 형, 앞으로도 우리 이렇게 지내요. 줄곧, 계속.”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듯하다. 허리에 둘린 팔에서 사랑스러운 떨림이 느껴졌다.
“형만 있어 주면 난 정말 늘 웃으면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거든. 형도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가져 주면 더 좋고.”
“그럼요. 저는, 전…….”
그의 목소리가 마구 흔들거렸다. 한껏 떨림을 머금은 음성이 최선을 다해 마음을 전해 왔다.
“저야말로 지금 진형 씨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데요. 늘 고맙고…… 정말, 정말로 많이 좋아해요. 진형 씨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돼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언제까지고 항상, 쭉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아, 미치겠네.
진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눈시울을 바람이 식혀 주길 바라게 됐다.
내 눈물샘은 맨날 이 형 한정으로 고장이야.
울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꼴사나운 모습을 매우 많이 들켰기 때문에 당분간만이라도 씩씩하게 보이길 바란다.
아직은 폼을 잡고 싶고, 오래도록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으니까.
들끓음으로 간질대던 목구멍이 조금쯤 차분해졌다. 진형은 다소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고 말해 줘요. 형이 날 좋아한다고 말하면, 내가 얼마만큼 기뻐하는지 잘 알잖아.”
“네. 생각날 때마다 자주 말할게요.”
이 사람에게만 말하게 하는 건 미안한 일이다. 진형은 고개 숙여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민이 형, 좋아해요.”
“저도요, 진형 씨. 진형 씨가 참 좋아요.”
어느새 주변이 서서히 밝아져 왔다.
계속 이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어째서인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잠깐 잊고 있던 허기도 다시금 배 속을 괴롭혔고, 오늘 온종일 혹사당했던 다리도 슬슬 아픔을 호소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만.
아주 조금만 더.
윤민을 놓기 싫다는 욕심이 모든 욕구를 잠재웠다.
언제까지고 이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동이 터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다.
이 사람과 같이 맞이할 수 있어서.
[감정 소모 외전: Christmas Swing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