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형.”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려던 진형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 바람에 멍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얼굴을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던 윤민의 표정도 변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엄청나게 낮디낮은 탓이다.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부름에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며 눈치를 봤다.
“뭐예요, 이거?”
“……? 네? 뭐가 이상해요?”
눈을 끔뻑끔뻑 뜨면서 점점 더 난감해하는 표정을 바라보았다. 진형은 잠시 윤민의 얼굴만 빤히 바라봤다. 엄청나게 당황한 표정이라도 좀 보고 있어야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쌍욕을 참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진짜 짜증 난다, 이 냄새.”
입가를 간질대던 쌍시옷들을 그나마 ‘짜증 난다.’로 묶긴 했지만 이마를 우그러뜨린 주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사우나에 있는 싸구려 업소 로션 냄새 같기도 했고, 질 좋은 브랜드 향수가 아닌 이것저것 조향한 저급 향수 냄새 같기도 했다. 어찌 됐든 지독하게 강했고, 그만큼 사람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집에서 냄새가 나요? 이상하네.”
“혹시 누가 왔었어요?”
“아!”
윤민이 감탄하는 것은 자기 말이 바로 정답이기 때문이겠지.
그러자 이번에는 짜증보다 울컥함이 먼저였다. 이딴 냄새가 코에 익숙해질 정도로, 그만큼 오래 같이 있었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훅 하고 불쾌감이 몰려들었다.
“누군데요?”
진형은 일단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종종 뒤따르던 윤민이 너무나 별거 아니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사장님이 오셨었어요.”
윤 팀장이 아닌 건가.
“왜 왔는데요? 일?”
“네. 그것도 있고요, 이것도 주셨어요.”
베란다 입구 근처에 못 보던 박스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름 아닌 배였다.
“새해 선물이라고, 매년 이런 걸 주시곤 해요. 주변 사람 챙기실 때 저도 덩달아 같이 주셔서 늘 감사하…… 진형 씨?”
“왜요.”
“표정이 안 좋아서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
심사가 뒤틀렸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왜 심사가 뒤틀렸는지도 모르니까.
“호, 혹시 열이라도 있는 건 아니고요? 요즘 감기 걸리기 쉬울 때라……. 그리고 진형 씨 요즘 계속 바빠서 무리했잖아요. 저기, 진형 씨만 괜찮다면 잠깐 이마 좀 짚어 봐도 될까요?”
“그런 거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진형은 슬쩍 허리를 숙여 주었다. 자기를 보는 얼굴에 그야말로 ‘걱정돼서 노심초사합니다.’라고 써 붙어 있기 때문이다.
아, 그래. 이거지. 이거잖아.
가까이 다가와 이마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내버려 둔 채 진형이 남몰래 웃었다. 서로의 옷이 맞닿는 거리에서 은은하게 오이 비누 향이 났다. 같은 싸구려 냄새라 할지라도 차원이 다르다.
“음, 열은 없는 거 같은데.”
“그러게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 집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독해서 그래.”
“앗, 진짜요? 그 정도예요?”
“네. 그 정도예요. 좋은 냄새도 이렇게 강하면 코가 썩는 거 같다고요. 적당히 뿌리든가 바르든가 해야지. 이건 뭐, 아주 냄새로 사람 잡을 작정이네.”
“그렇구나. 저는 자주 맡아서 그런가 익숙해졌나 봐요.”
이마에 닿았던 피부 덕에 조금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금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자주 맡을 정도로 뻔질나게 와요, 그 사람?”
“네?”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는 말투에 진형은 오히려 강한 어조로 되물었다.
“얼마나 오는데. 목적은 뭐고요. 이상하잖아. 일로 만나는 사람이 집에 막 들이닥치는 게.”
“아! 그러니까…….”
윤민이 조금 생각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질문받은 걸 차근차근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대답하는 듯하다.
“불규칙하긴 한데, 1주일에 두세 번 볼 때도 있으면, 2~3주 내내 못 볼 때도 있고요. 아! 사무실이 여기랑 가까워서요.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거든요. 저 바쁠 때 집에 먹을 거 사 들고 와 주시거나 작업 진척 보러 오시기도 하고.”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진형의 얼굴은 점점 표정을 잃어 갔다. 평소처럼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열심히 대답해 주기 바쁜 윤민은 완전히 가라앉은 진형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저 회사에서 독립한 뒤로도 꾸준히 써 주셔서 많이 감사한 분이에요. 여러 가지로 신세도 많이 져서 은인이기도 하고요. 저를 동생처럼 귀여워해 주셔서 저도 형처럼 생각하면서 따르고 있거든요. 으음, 절 좀 안쓰럽게 생각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요. 정말 좋은 분이…… 지, 진형 씨?”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조막만 한 턱 끝으로 향했다. 강압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기운에 윤민의 고개가 아주 약간 위로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진형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입을 반쯤 벌리며 왜 그러냐는 눈빛을 지어 올렸다.
“그 사람 몇 살인데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좁은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어, 올해로 아마 서른아홉이 되셨을 거예요.”
“결혼은 했고요?”
갑자기 이상한 걸 캐묻는 진형 탓에 윤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런 질문을 하냐고 묻고 싶어 하는 게 빤히 보였지만 무시로 일관했다.
“네, 하셨는데…….”
“애는요. 있어요?”
“아내 분이 지금 둘째, 임신 4개월째라고 들었어요. 첫째는 으음, 몇 살이었더라…….”
진형은 순간적으로 나올 법한 말을 목구멍 너머로 흘렸다.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제어력을 죄다 끌어 쓴 기분이 들었다.
혹시 그 사람이에요? 보기만 해도 좋다는 인간이?
묻는 건 쉽다.
대답 역시 간단히 나올 거다.
맞다, 혹은 아니다.
그런데 그다음엔?
왜 질문했는지를 생각해야 했다. 왜 궁금했는지도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왜 이딴 폭탄한테 꼴렸을까, 하고 머리를 싸매는 시점은 이미 끝났다. 그걸 뛰어넘었기에 이 사람과 섹스했다. 그러니 이제 이 이상 다음 선으로 넘어가면 정말로 많은 고민과 갈등을 끌어안아야 했다.
지금 정도가 딱 좋다. 선을 넘었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섹스를 했다고 치부할 수 있는 지금의 이 관계.
“형.”
“네?”
“초중고대, 다 합쳐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 있어요? 절친이라든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하여튼 가끔 안부 정도는 주고받는다거나.”
“으음. 아니요, 알음알음 지내는 사람들은 있었는데 시간 흐르니까 서서히 소원해져서……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건 가족들이랑 방금 말한 전 직장 분들 정도라. 아! 가끔…… 그, 뭐지? 결혼한다는 소식이 적힌 문자가 올 때가 있어서 신기해요. 해에 한두 번 정도고, 단체 문자긴 하지만요. 저 같은 사람한테도 이런 문자가, 절 기억하고 이런 문자를 보낸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
안 좋은 예감으로 머릿속이 범벅됐지만 일단 물었다.
“계좌 번호 찍힌 문자요?”
“앗! 네, 맞아요. 진형 씨도 받아 봤어요? 요즘은 다들 그렇게 보내나 보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입금했어요, 형? 계좌 찍혀서 올 때마다 현찰 쏴 준 거예요?”
“……? 네, 많지만 않지만.”
저도 모르게 확 떠오른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번에는 딱히 목구멍을 뜯어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호구.”
“네?”
“호구야, 형은. 진짜 믿을 수가 없네. 하아…….”
한숨을 푹푹 내쉬던 진형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형이 최근 가장 자주 연락하거나, 만나거나 하는 사람들은 죄다 일 연관이라는 거네요?”
질문에 비해 대답은 아주 짧고 명료했다.
“네.”
그래, 결국 이 사람이 반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친구나 그 비슷한 종류가 아닌 순전히 일로만 알게 된 사람 중 하나일 거라고 좁혀졌다.
그래서? 이다음 네가 원하는 건 뭔데?
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듯 말을 빙빙 돌려서, 추측과 떠보기를 섞어 가며 결국 그럴싸한 답까지 추론해 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데?
자기 자신에게 골백번 물어봐도 어차피 나오지 않을 답이다.
진형은 절로 터지는 한숨을 “하아.” 하고 크게 한 번 몰아쉬며 고개를 흔들흔들 저었다.
처음 잤던 날. 콘돔을 기어코 세 개까지 쓰고 난 뒤 푹 잠들고 일어났던 그날. 자기보다 먼저 일어나 있는 이 사람에게 물었다.
〈좋았어요?〉
윤민이 잠깐 고민하고서 대답했다.
〈정신없었어요.〉
전혀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이었다. 만족스러운 대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어라 핀잔을 주기에도 참 애매한 대꾸였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처음이니 모든 게 다 생소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거 말고 다른 대답을 해 보라는 말은 차마 나가지 않았다.
진형이 다시 물었다.
〈형만 괜찮으면 가끔 하지 않을래요?〉
이번에는 윤민이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
〈진형 씨만 좋다면 저도 상관없어요.〉
이것은 좋은 대답이었다. 자기 마음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아주 완벽한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듣는 순간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진형은 가끔 하자는 말을 꺼내면서 그런 얘기도 덤으로 했었다. 이제부터 이따금 저녁 같이 먹자고. 어차피 형이나 나나 일 때문에 저녁을 패스하는 일이 많지 않냐고. 서로서로 상대 챙기면서 먹다 보면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리송한 얼굴을 하면서도 윤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진형은 가까운 마트에 들러 무언가를 사 오곤 했다. 아니면 진형이 메모로 적어 준 것들을 윤민이 낮에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두는 일도 있었다.
그 덕에 이 집 냉장고는 이제야 좀 사람이 쓰는 것처럼 변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생수통만 즐비하던 때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괜찮아졌다.
주방의 선반도 마찬가지다. 라면만이 채워졌던 공간에 소금과 설탕, 식용유와 고춧가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 냄새 나는 주방의 풍경과 가까워진 거였다.
“물어보는 게 늦었는데, 형 가리는 거 있어요?”
진형이 비닐봉지를 싱크대 옆 조리대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육류는 잘, 많이 못 먹어요. 못 먹는다기보다 속에서 좀 안 받아요.”
“그러니까 몸이 그 모양이지.”
툭 내뱉는 말에 윤민이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안 먹어서 그래요, 안 먹어서. 워낙 안 먹으니까 못 먹게 되는 거라고요. 편식이나 속에서 안 받는 거나 거기서 거기야. 자주 넣어 주면 몸이 그걸 기억하는 거고, 자주 안 넣어 주면 몸이 ‘이건 뭐지?’ 하는 거고.”
“그런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난 고기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앞으로는 형도 같이 먹어 줘요. 난 좀 타고난 육식 체질인 거 같아요. 고기반찬 없으면 밥상 엎는 것까진 아니지만.”
“진형 씨, 고기 좋아했구나.”
“없는 살림에도 고기는 자주 챙겨 먹을 만큼 좋아하죠. 그래서 오늘도 고기를 사 왔어요. 체력 보충에는 고기만 한 게 없더라고요.”
진형이 비닐봉지에서 가장 자리를 많이 차지하던 것을 꺼냈다. 양념 갈비 4인분이 깔끔하게 포장된 팩이었다. 말이 4인분이지 사실 굽다 보면 그게 다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다.
“양념 갈비가 이렇게 나오기도 하는구나…….”
신기해하는 음성에 진형이 푹 웃었다.
“세상 좋죠?”
“네. 좋아졌네요.”
이미 윤민이 밥을 해 뒀기에 서둘러 사 온 상추를 씻고 고기를 구웠다. 고기 냄새가 단숨에 그득그득 차올랐고 그 이상으로 연기도 천장을 슬쩍 덮었다. 기웃기웃하며 진형에게 끊임없이 “저도 뭐 좀 할까요?”라고 묻던 윤민이 슬쩍 베란다 문을 열었다.
아까 그 미친 거 같은 냄새보다는 고기가 양념에 탄 냄새가 훨씬 향기롭고 좋네.
안경을 치키며 코를 훌쩍하던 윤민이 슬쩍 옷걸이로 향했다. 들이닥치는 찬 공기에 몸이 추웠나 보다. 걸려 있는 후드 집업은 한 3일 정도 공기에 노출 시킨 머스터드의 말라비틀어진 색이었다.
아아, 제발.
저번에는 한 번 옷걸이 옆 옷장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윤민이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간 사이 그 옷장 앞에서 손을 가져갔다가 다시 떼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다.
얼마나 별별 쓰레기 같은 게 걸려 있을까. 차마 두 눈 뜨고 못 볼 것만 같은 걸레짝들로 즐비하겠지.
진형도 옷을 엄청나게 쌓아 두고 입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했을 때 더 입지 않을 거 같거나, 혹은 충동적으로 샀는데 영 아니거나 싶을 경우에는 주저 없이 의류 수거함에 먹이 공급을 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대체로 자기와 비슷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그런 것도 없나! 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섰을 때, 그 꼬락서니를 봤을 때 이거 영 아니올시다, 싶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 거냐고!
명색이 그래픽 디자이너면서 말이다. 저번에 슬쩍 일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모니터에 펼쳐지는 풍경은 나름 장관이었다. 그런 쪽으로는 전혀 문외한이었지만 적어도 보이는 이미지가 촌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옷은 그 모양 그 꼴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옷에 관해 입을 열어 버리면 정말로 가감 없이 막말이 쏟아질 거 같았다.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가 다 없을지 모른다. 윤민을 앞에 세워 두고 색깔이 어쩌고저쩌고, 촌티가 어쩌고저쩌고 일장 연설을 하고 싶진 않았다.
간섭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간섭하려면 그 간섭을 서로 불쾌해하지 않을 만큼의 친밀함도 필요했다.
그래서 참는 것뿐이다. 어느 쪽이든 자기가 원하는 게 아니었기에. 하지만 가끔 충동적으로 잔소리를 입에 담고 싶을 때가 있으니 위험했다.
양념이 스며서 맛있게 잘 익은 고기를 접시에 담으며, 진형이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함께 자는 사람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았다. 진형 역시 어느 정도 조건만 맞는다면 가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 모든 게 과거가 됐다.
진형은 최근, 은밀한 제의를 모조리 거절하고 있었다.
가끔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나, 아니면 테이블을 치우고 있을 때 말을 거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진형이 느끼기에 마치 선착순 게임의 타깃이 된 듯했다.
유혹하는 사람들을 위아래로 훑으며 늘 윤민을 떠올렸다.
나와의 섹스밖에 모르는 그 사람보다 재미있을까. 내가 섹스를 가르친 그 사람 몸보다 만족스러울까.
그럴 거 같지 않았다. 현재가 만족스러웠기에 딱히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았다. 선약이 있다는 말을 하며 적당히 사람 좋은 미소를 꾸몄다. 속으로는 음흉하게 그런 생각도 했다.
선약 잡힌 사람이 누군지 알면 이 사람들은 펄펄 뛰려나. 어떻게 그런 사람 때문에 나를 깔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미친 거 아니냐고. 진형 씨 요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그런 소리들을 지껄이며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지 않을까.
물론 윤민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도 남에게 말할 생각 없으니 상상으로 그려 내는 이 말들을 그 누군가에게 들을 일도 없을 거였다.
진형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질문하고 고민했다.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혹은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이다지도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아 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있긴 있었나 싶다.
굉장히 좋았나?
그렇게만 묻는다면 당연히 좋았다. ‘굉장히’도 어렵지 않게 붙일 수 있다.
자기로 말미암아 그가 오만 가지 표정을 지으면서 헐떡대는 건 아주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비단 윤민뿐만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그렇다. 쌀쌀맞은 얼굴이든, 온순한 얼굴이든. 그 어떤 표정을 짓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몇 번 박아 주고 흔들어 주면 다들 하나같이 매달려서 앙앙거리기 바빴다. 그걸 보는 건 언제나 유쾌했다.
윤민과의 처음은, 겁을 잔뜩 먹은 구멍이 물크러질 때까지 풀어 주고 길들이기에 바빴다. 즐거운 섹스라기보다는 그에게 체험 학습의 장을 열어 준 것과 비슷했다. 번거로웠느냐고 묻는다면, 그랬다. 귀찮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럼에도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좋았다는 말 외에는 더 보탤 말이 없었다. 번거롭고 귀찮았지만.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결론은 무척 좋았고 나름 천국 근처까지는 다녀왔다는 거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섹스를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좋았다.
심지어 할 때마다 더 좋아지고 있다.
여기서 슬슬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먹어 보고 싶었던 걸 먹었으니까. 호기심도 해결했고, 욕구도 충족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좋다니.
딱 잘라 말해서 윤민과의 섹스는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는 스타일로 할 수 없었다. 무작정 해 대거나, 미친 듯이 해 대거나, 정신 놓고 해 대거나 그런 게 전혀 불가능하니까. 물론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 하지만 늘 할 때마다 신기한 눈빛으로 어설프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여태껏 해 왔던 그 어떤 섹스보다 입이 가장 바쁘다.
입이 열심히 일을 해 줘야 그다음에 비로소 성기가 분출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었다. 키스를 하든, 베갯머리 송사를 하든. 둘 중에 뭐라도 자주 해야 했다. 그게 그의 긴장을 가장 빠르게 푸는 방법이었다.
주춤주춤. 머뭇거림 가득한 팔로 목을 꼭 안아 오는 그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흥건한 타액을 빨아 마시는 키스보다, 뺨과 이마에 가볍게 해 주는 입맞춤에 더 부끄러워하는 표정도 아주 쉽게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런 모습들이 미칠 수 있는 순간을 주었다.
정신 차려 보면 그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귀두가 닿도록 허리 짓을 하고 있었다.
벗겨 놓으면 걸리는 것도 없으니.
부러뜨리면 소원이 없겠다 싶은 그 안경도, 쓰레기 같은 바지도, 안구에 테러를 해 대는 그 목 늘어난 티셔츠도.
모든 게 벗겨진 윤민의 나신은 보기 좋았다. 지독할 정도로 마른 게 단점이긴 했지만 하다 보면 그런 것도 잊을 정도였다. 가끔 뼈가 부딪쳐서 아플 때가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흥분의 자극제로 여겨질 정도였다.
붉게, 아주 붉게 물들어도 늘 하얗고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이 내가 사정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질 때면. 의지할 곳은 오직 나밖에 없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내 등을 힘껏 끌어안을 때면.
“하아.”
오늘도 곧장 윤민의 집으로 가야겠다.
“형! 형도 촉이 죽은 거 아냐?”
“……!”
진형은 옆에서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마감을 다 마친 직후의 〈웬즈데이〉는 휑하기 그지없었다. 경쾌한 음성이 귓가에 닿는 것에 아무런 방해물이 없다. 고개를 돌리자 바 근처에서 무언가 잡담을 나누고 있는 선호와 지겸이 보였다.
“무슨 촉.”
이번에는 선호가 진형을 바라봤다. 이쪽을 슬쩍 턱짓하는 그의 얼굴이 야릇했다.
“2주면 충분하다며? 어떻게 된 거야.”
의기양양 놀림까지 담아내는 얼굴에 지겸이 참으로 쓸데없는 걸 묻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네 2주의 기준은 뭐였는데.”
“으음, 진형이가 윤민 씨한테 사랑한다고 매달리거나? 반했다고 고백한다거나? ……아! 혹시 너 이 자식, 했냐? 이 2주 사이에 윤민 씨한테 말한 거야? 그걸 깜빡하고 안 물어봤네.”
“하아.”
지겸이 한숨을 쉬었지만 선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둘을 번갈아 가며 보던 진형은 푹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그런 말을 그 형한테 하는 일은 없을 거 같은데요.”
“과연 그럴까.”
선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진형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완벽하게 무시하며 선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서 지겸을 향해 “형 기준은 뭐였는데?”라고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거지.”
“오, 하긴. 그거부터 시작해야 얘기가 되긴 하겠다.”
선호가 탄성을 뱉으며 다시금 이쪽을 바라봤다.
진형은 침묵했다. 선호의 말을 들었을 때 나왔던 강한 부정이 지금 이 순간에는 나오지 않았다. 지겸에게 들었기에, 그에게 꼬리를 말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입을 다무는 게 아니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바깥으로 들릴까 봐 걱정이다.
진형은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큰일인데.
그랬다. 정말 큰일이었다.
웃는 얼굴로 어찌어찌 잘 넘어갈 수야 있겠지만 이건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정말 윤민과의 관계가 까발려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들키기 싫었다. 스스로도 요즘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말이다. 남들에게 윤민과 섹스 파트너 비슷한 게 되었노라고 알려지는 것은 결단코 사양하고 싶었다.
후줄근한 초록색 셔츠를 청바지에 넣어 입은 윤민 옆에서 걷는 것과, 윤민과 섹스하고 있다는 것이 가게 사람들에게 다 알려지는 것.
전자보다 후자 쪽이 단연 낯 뜨겁고 창피하다.
“그래서, 진형이 넌 요즘 윤민 씨랑 어때?”
“어떻긴요. ……아, 요즘 며칠에 한 번씩은 저녁 같이 먹게 됐어요. 그 형 집에서.”
“데이트하는 거야? 그것도 집에서!”
흥분하는 목소리에 그저 웃어 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 그 형이 밥을 자주 거르더라고요. 저도 여기 일하면서부터 저녁 잘 못 챙길 때가 많으니까 저 출근 전에 겸사겸사.”
전부 숨기려고 하면 전부 들통난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그랬기 때문에 진형도 모든 걸 말하지 않는 것보다 사실인 것을 하나 꺼내 들었다. 슬슬 웃으면서 입에 담아 보니 꽤 괜찮은 임기응변인 듯했다.
우리는 단순히 형 동생 사이로 지내고 있노라고.
2주라는 말을 들었던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였고 이 앞으로도 없다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진형은 천천히 홀에서 벗어나 퇴근을 위해 준비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서 곧장 윤민의 집으로 갈 생각이다.
“하아.”
이렇게까지 하면서 윤민과의 관계를 숨기는 것이, 정작 그에게는 미안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다물자마자 쉴 틈 없이 울렁거리는 속과 함께 딱 한 가지의 생각만이 머릿속에 들끓는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너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싶냐고.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준비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캐비닛에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진형은 마음 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일단 가자.
진형은 일부러 몸을 빠릿빠릿 움직였다. 여기서 더 꾸물대는 건 아까운 시간이나 좀 먹는 짓이었다.
“…….”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빠르게 벗어 던져 캐비닛에 넣으려던 참이었다.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건, 언젠가 윤민이 들고 왔던 비타민 드링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직원 중에 저걸 마시지 않은 사람은 자기뿐일 듯하다. 왜 저걸 까서 못 마시는지 모르겠다. 딱히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사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이런 거창한 마음가짐 없이도 당연히 마실 수 있다.
그냥, 출근과 퇴근으로 옷을 갈아입는 시간. 그럴 때마다 저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출근 때는 저 드링크를 바라보며 ‘드디어 시작인가.’ 싶었고, 퇴근 때는 ‘오늘도 별 탈 없이 일을 끝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치 하루의 시작과 끝을 드링크를 바라보며 인지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냥 놓고 보는 게 좋았다. 자기치고 굉장히 감성적인 사고방식이라 웃음조차 안 나오지만, 그래도 역시 나쁘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으면 준비실을 나서서 곧장 버스를 탈 것이다.
집에 가는 버스만큼 익숙해진 번호의 버스를 타고, 저 드링크를 사 들고 왔던 남자의 집으로 갈 참이다.
“그러고 보니, 눈은 좀 괜찮아졌나.”
그저께 또 안과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기억났다. 충혈된 눈을 끔뻑거리며 힘겨워하던 모습이 조금쯤 안쓰러웠다.
역시 번호를 따든가, 카톡을 따든가 해야겠지.
아마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눈이 아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전화번호나 카톡 알아내기는, 늘 생각만 할 뿐 실행으로 옮기진 않게 됐다.
자기 휴대폰에 윤민과 연락이 가능한 것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의 휴대폰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까지고 ‘남진형’의 연락처가 없었으면 했다. 서로가 서로의 연락처를 알아 버리는 순간, 이제 몇 개 남은 거 같지도 않은 선 중 하나를 또 넘는 기분이 들 거였다.
자꾸 이렇게 선을 넘다 보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특별함을 기대한다. 아마도 자기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단지, 윤민이 그럴까 봐 겁이 났다.
그 노멀이나 유부남한테 까이고 나한테 갑자기 들이댄다거나 하는?
불쑥 든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윤민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됐지만, 이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존재해서 사람 골머리를 썩이게 한다.
아니, 말이야 바른말로 그 사람에게 요즘 미친 듯 들이대고 있는 건 내 쪽이지.
연락처를 모르니 무작정 들이닥친다.
그런데도 그 집 현관 앞을 맥없이 돌아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인종을 누르면 언제든 문이 열렸고, 또 항상 놀랍고 신기한 표정으로 맞이해 주는 윤민이 있었다.
그 얼굴에 겸연쩍음을 눌러 참으며 냅다 안으로 들어가서, 기세 좋게 목적한 바를 이루는 자기 자신의 모습.
제멋대로 굴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윤민이 거절하지 않으니까. 윤민이 오늘은 미안하지만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그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 주면서 자기 욕심으로 매번 밀어붙이곤 했다.
거절도, 돌아가라는 말도. 윤민이 좀처럼 꺼내지 못할 성격이라는 걸 아주 잘 알면서. 그걸 구실로 삼고 핑계로 삼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척이나 이상하다.
이런 사람까진 아니었는데.
물론 자기 성격이 착한 축에 속하지는 않는다. 나름 고집도 있고, 매사 순하지도 않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악질적이진 않았었다.
“하아…….”
이러니 자꾸자꾸 한숨만 늘어 갈 뿐이다.
* * *
섹스가 없는 밤도 있다.
윤민의 눈은 이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비록 그는 입버릇처럼 괜찮다고 말했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사람의 눈이던 눈동자가 이제는 붉디붉었다. 그리고 들이닥칠 때마다 작업용 모니터는 늘 켜져 있었다. 그 옆에는 처방받아 왔다는 안약 역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급한 거예요?”
그 질문에 윤민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많이? 몇 시간 안에 당장 해결 봐야 하는, 그런 거?”
이번에는 고개가 도리질을 친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음이 좀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럼 딱 다섯 시간만 나한테 쓸 수 있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눈앞의 얼굴이 끄덕끄덕했다. 그 고갯짓을 확인한 즉시 윤민의 팔을 잡아끌어 침대로 갔다.
“진형 씨…… 오늘은 안 하는 거예요?”
늘 생각하지만, 이 침대는 남자 둘이 누워도 괜찮을 정도다. 윤민의 잠버릇을 생각하면 싱글 침대만으로도 아주 충분할 텐데. 어찌 됐든 자신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형은 하고 싶었던 거야?”
일부러 잔뜩 웃음기를 담아 그런 말을 꺼냈다. 품에 폭 파묻혀 있던 얼굴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이 사람이 열성적으로 긍정할 리는 없으니 아마도 좌우로 흔들렸겠지.
“뭐야. 여태까지 나랑 그렇게 하기 싫었던 거예요?”
팔로 감아 안은 등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저 떨림이나 숨결, 심지어 침묵만으로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쉽게 알 수 있다. 그게 스스로 신기했다.
이번에도 진형은 속으로 웃으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다음 천천히 말을 덧붙여 나갔다.
“눈 뜨고 있으면 눈알이 터질 것만 같다면서. 형이 얼마나 힘들면 그런 소리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자든지, 아니면 눈이라도 감고 있든지. 일단은 이렇게 좀 있자고요.”
진형의 말이 끝났어도 좀처럼 되돌아오는 말이 없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아주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난데없는 사과다. 진형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뭐가요?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윤민은 이번에도 잠시간 침묵했다. 도대체 이 조막만 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바로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진형 씨 헛걸음하게 해서.”
이번에는 자기 차례인가.
입술이 바로 열리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마음 한쪽이 이상하리만치 차가워졌다. 몸이 굳어 가는 느낌도 아주 생생하게 피부 곳곳에서 전해졌다.
“환자 상대로 발정하는 취미는 없어서 그렇죠.”
머리를 쥐어짜서 하는 말이 고작 이딴 거다. 내뱉자마자 바로 입에 도로 담고 싶은 그런 말이다. 이딴 소리를 해 대면 윤민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할 텐데.
괜히 아픈 티를 내서 걱정을 끼쳤고 그 바람에 진형 씨의 흥미가 가셨구나, 하고.
이번만큼은 윤민의 마음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잘 알면서도 왜 후회할 말을 입에 담았는지.
“진형 씨는…….”
말을 해도 괜찮은지 아닌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다. 진형은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서 부추기거나 재촉했다가는 들을 말도 못 들을 게 뻔하다.
“저 말고 다른 분들도 많은데. 그런데도 저한테 오셨는데…… 제 상태가 이래서 정말 많이 미안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차디차게, 아주 차갑게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들은 말을 다 뜯고 분해해 보면 틀린 것은 하나 없다. 맞다. 그가 아니라도 밤을 함께할 사람은 널려 있었다.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다 뒤로하고 윤민에게 온 것 역시, 맞다. 지극히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이 윤민의 입에서 나왔다는 거다.
이건 좀 잘못됐다고. 아니, 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이. 지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 감정이 너무 강렬하고 뜨거워서 숨조차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윤민도 가벼웠으면. 자기처럼 이 상황을 가볍게 느껴 줬더라면.
오늘은 안 오려나 보다 정도면 충분하다. 혹은 오늘 나한테 왔지만 내가 지금 섹스를 할 상황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준다면 아주 좋았을 거 같다.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기에 풀 죽거나 침울해질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나는 이걸로 괜찮은 건가.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불쑥 머리를 쳐 댔다. 조금 전까지는 당혹스러움에 하얘졌던 머리가, 지금은 짜증과 울컥함으로 물든다.
윤민이 오늘은 안 오나 보네, 하고 생각하면. 올까 안 올까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랑 뒹굴고 있겠구나, 무심히 여기면.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당장 머릿속을 비웠다.
선을 더 넘지 말자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어제도, 그제도, 엊그저께도. 계속 그런 생각을 했었다. 굳이 이런 걸 생각하고 마음까지 다잡아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게 이상했지만, 줄곧 자기 자신에게 그런 말들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 선이란 선은 죄다 넘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구는 건 도대체 누구인지.
“형, 이럴 때 그 좋아한다는 사람 보고 싶지 않아요?”
화제를 빨리 돌려야 했다. 이대로 침묵하거나 정적이나 지키면 분위기가 몹시 이상해질 것 같았다. 급하게 생각한 질문치고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다음부터 괜찮지가 않아졌다.
“왜요?”
윤민이 잘 모르겠다는 목소리를 냈다. 진형은 살짝 웃으며 물어 뭐 하냐는 듯 대꾸했다.
“원래 아플 땐 그런 법이잖아요.”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아파서 눈을 감으면 그분 얼굴이 더 잘 보여요. 마주 볼 때보다 훨씬 더 잘 보이곤 해요.”
이때부터였다.
기분이 점점 급하강하기 시작한 게. 쉴 틈 없이 곤두박질을 해 댔다.
“진형 씨랑 처음 만났던 날, 제가 그런 얘기를 했었잖아요. 혹시 기억나요? 그분이 웃으면 제 마음이 환해지는 거 같아서 좋다고. 요즘은 더 그렇게 됐어요. 반짝반짝해요.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분을 떠올리면 너무나 눈부시고, 언제 어느 때고 마치 그분을 앞에 두고 보는 거 같아요.”
무슨 말을 할까. 할 수 있을까.
온갖 빈정거림과 짜증을 삼키느라 정신없는데.
“진형 씨가 그때 말했던 것처럼 이 마음을 빨리 접는 게 좋다는 걸 저도 아는데…… 그게 잘 안돼요. 계속 안 될 것 같아서 요즘은 겁이 나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오만 생각을 하며 참아 냈던 입놀림을 이번에는 멈추지 못했다.
“평생 보답 못 받아도? 형한테 그런 식의 눈길은 절대로 주지 않을 사람인데도? 이러다 형이 상사병에 걸리든 말든 손톱만큼도 눈치채지 못할,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줄 수가 있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마른 몸을 끌어안는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참 신기하죠. 저는 그분이 저를 보면서 웃어 주는 게 신기한 거 이상으로, 이런 감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제 자신도 신기할 때가 있어요.”
평소라면 듣기 좋았을 거다.
다른 주제였다면 더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겸연쩍음이 밴 말투가. 숨결과 함께 느껴지는 그의 순수함까지도. 그 모든 게 제법 좋아서 자기 역시 덩달아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목구멍을 간질이는 건 육두문자다. 온갖 쌍소리다. 역시 괜한 걸 물었다. 짜증은 점점 늘어 간다.
“그 마음이 민폐라도?”
그를 끌어안은 자기 팔은 진작 굳었지만, 품 안의 몸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굳어 갔다. 하지만 입술은 멈추지도 않고 잘만 움직여 댔다.
“잘 먹고 잘사는 사람한테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거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들고? 누울 자리 보고 누워야지. 말 안 한다고는 해도, 평생 비밀로 간직한다고는 해도 말이죠. 이미 누가 누워 있을 자리에 형 마음을 가져다 댄다는 게 변하는 건 아니잖아. 형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거예요?”
잠들었나 싶을 정도로 기나긴 침묵이었다. 이런 말을 듣고서 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다행이었다.
“그러네요.”
한참 뒤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도, 뜨거움도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다. 자신의 말을 한없이 긍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때문에 알량한 자기 마음이 한없이 초라해졌다.
“저는 예전부터 제 마음을 마주 보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지금도 고치지 못하고 계속 그래요. 딱히 고치지 않아도 괜찮았고요. 자기 자신의 마음에 어쩔 줄 모른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요. 그래서 진형 씨가 말한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 못 해 봤던 거 같아요.”
윤민이 느릿느릿 말을 이을수록 점점 더 비참해졌다.
“고마워요, 진형 씨.”
정신 차려 보니 숨도 쉬지 못하고 있다. 참으려고 참은 게 아니다. 숨을 쉰다는 자연스러운 행위마저도 하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백지장이다.
아, 제발. 이제 더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런데 갈피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와중이라, 어쩐지 해답지 비슷한 걸 얻은 기분도 들어요.”
이렇게까지 해서 나는 도대체 이 사람에게 뭘 원하는 걸까.
“정말 고마워요, 진형 씨.”
자, 이제 환호성을 내지르며 손뼉이라도 칠까? 이 사람이 드디어 그 병신 같은 새끼를 단념할 포석을 깔아 줬으니까? 아니, 아니지. 왜 내가 손뼉을 쳐. 무슨 놈의 환호성. 그럼 마치, 내가 이 사람의 그 빌어먹을 짝사랑을 파투내려고 작정한 것 같잖아.
너 그런 거 아니잖아?
멍해졌다가, 일순 모든 게 지워졌다가, 갑자기 미친 듯 번쩍거리더니, 어느덧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지는. 진형의 머릿속은 지금 계속 이런 상황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윤민이 잠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눈을 감고만 있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의 몸을 끌어안은 채 눈꺼풀을 열고 닫았다. 잠들 수 없다. 잠기운이라는 게 도무지 올 기미가 안 보인다.
그저 베란다 너머로 들어오는 빛깔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유부남이든 노멀이든.
그 누구든 간에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니까.
진형은 땀으로 흠뻑 젖은 등을 자기 몸으로 덮어 누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극히 사실인 것을 쓸모없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윤민이 어떤 사람에게 가여운 연정을 품고 있는지는 이젠 상관없었다. 원래부터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언젠가는 그게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유부남인지 혹은 노멀인지.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은근슬쩍 떠볼 생각도 처음에는 했었던 거 같다.
이제는 아니다.
그런 정보는 너무나 필요 없었다.
필요 없다기보다, 실은 듣고 싶지 않다. 윤민의 목소리로.
왜 듣고 싶지 않은지는 모른다. 다만 들으면 짜증이 날 것 같은 화제는 역시 피하는 게 상책이다.
윤민과 섹스를 하고 입을 맞추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다른 이들과 윤민을 볼 때 드는 감정이나 감각은 확실히 다르다. 그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이 남자를 섹스 파트너 그룹으로 넣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고 싶으니까 했다. 해 보고 좋았으니까 한 번 더 했다. 그 한 번이 자꾸 늘어났고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했지만, 그것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윤민은 여태까지 하자고 했을 때 거부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싫어하는 기색을 조금만 보였더라면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는 자기가 몰랐을 리 없다. 어느 날 이 남자가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다면 이쪽이 먼저 떨어져 나가 줄 생각이다.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이 몸은 나만의 것이니까.
취향대로 길들여 놓은 윤민의 몸은 꽤 맛있다. 구멍으로 남자를 받는 것이 조금 더 익숙해지고, 몸이 여물면서 농밀해지면 한층 더 맛이 좋을 거였다. 물론 지금도 삼삼하니 좋다. 그러니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항상 윤민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일 거다.
그래야만 했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게 윤민을 찾는 이유의 전부여야만 하니까.
“흐으읏…….”
왜 몇 번이나, 몇십 번씩이나 자기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도.
윤민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끙끙대고 있었다. 진형은 살짝 웃으며 관자놀이의 땀방울을 혀로 핥아 주었다. 그러자 끙끙거림이 한결 심해졌다. 그의 흐릿한 신음이 듣기 좋았다. 그의 흐느낌이 들릴 때면 뜨끈뜨끈한 구멍에 찔러 넣은 성기도 재깍 반응하며 굵디굵어졌다.
“아, 웃, 으윽…….”
베개 위에 올려 둔 작은 양손에 깍지를 꼈다. 두 손을 꽉 얽어 오는 기척 탓인지 그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 떨림이 이어진 곳까지 전해졌다. 진형은 욕망에 충실하며 느긋하게 움직이던 허리에 속도를 붙였다.
“하, 앗, 으으…… 읏, 흐응…….”
“이제 아프기보다는 느껴지는 게 더 많죠?”
“읏, 물어보지, 하앗…… 응, 우읏.”
“너무 조이지 마요. 아직 싸고 싶지 않으니까.”
동그란 귓바퀴에 웃음 섞인 농을 흘려보내며 진형이 빙글 허리를 돌렸다. 부드럽게 벌어진 물기 어린 구멍이 성기를 쫀득하게 감으며 벌름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언젠가 이 구멍도 내 거가 아닌 다른 이의 것을 받는 날이 오겠지.
그렇다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윤민은 그런 일이 생길 거 같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아…… 아아, 흣, 흐읏!”
두 손으로 윤민의 가냘픈 양 손목을 거머쥔 채 허리를 맹렬히 움직였다. 안쪽을 들입다 후벼팔 때마다 머릿속이 쨍 울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힘주어 박으면 구멍이 움찔하는 게 느껴져 왔다. 거기에 자극 받아서 한층 더 허리 놀림이 거세졌다.
어찌 됐든, 그 사람이 누가 되든. 그자는 이쪽에 고마워해야 함이 마땅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을 그래도 이 정도 가르치고 길들여 놨다. 이다음 타자는 자기보다 한결 손쉽게 이 구멍을 먹어 치울 수 있을 것이다.
“읏……! 우웃, 지, 진형…… 아, 아프, 잠깐, 앗, 아앗…… 잠, 윽, 아파…….”
“……!”
고통 섞인 신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녀린 어깨에 처박아 뒀던 고개를 살짝 비틀어 바라보자 눈물로 흥건히 젖은 뺨이 보였다. 타액으로 젖어 있던 베갯잇에 새로운 얼룩이 생겨났다.
그제야 가감하지 않고 미친 듯 허리를 흔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낭패다. 윤민을 안으면서 딴생각을 하다니.
그러자 그다음, 머릿속이 이상한 질문으로 쨍하고 울렸다.
그럼 언제 하면 괜찮은 생각이었는데? 넌 언제라도 짜증 냈을 거잖아.
일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런가. 방금 자기가 생각한 게 이토록 짜증이 밀려오는 것들이었나. 그렇다면 무척 이상하다. 이상하기 짝이 없다.
왜 이렇게 요즘 이상한 게 많은 건데?
도대체 왜.
“하아, 시발…….”
참을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터졌다. 번쩍 정신이 든 기분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속절없이 마음 한쪽이 어두워져만 갔다.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 지, 진형, 씨?”
당황한 음성에 최대한 숨을 몰아쉬었다. 목소리도 가다듬는다.
일단 하자. 하고 생각하자. 집에 가서 머리를 싸매든, 가게 가서 캐비닛에 머리를 박아 대든. 여기서는 아니다. 지금 당장은 머릿속을 비워야 했다.
“미안해요. 형, 미안. 많이 아팠어요? 정말 미안해요.”
“혹시, 무슨, 읏, 일, 있었어요……?”
“아니요.”
사실이다. 정말로 아무 일 없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당신에게 누군가가 생기지 않는다면 계속 ‘그런 일’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없을 거 같다.
모두가 이 폭탄을 피해 갔으면.
그렇게만 된다면 이 몸은 오로지 내 건데. 갑작스레 확 올라오는 짜증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 * *
사람이 식물처럼 말라비틀어지려면 이런 과정을 겪는 거구나.
아니, 이미 건드리면 바스러질 정도로 미쳤는지 모른다.
“하아.”
뺨을 뚫듯 불어오는 바깥바람이 차디찼다.
머릿속도 얼어붙게 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늦겨울 추위가 더 무섭다더니 정말 그랬다. 아까 정문을 밀고 들어서던 직원들이 추위에 관해서 한마디씩 했을 정도다. 출근길이 이 정도인데 이따 퇴근길은 더더욱 가혹할 거라는 예상들도 주고받았다.
진형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은 정말 죽을 만치 춥다고.
그리고 이따 여기로 올 윤민의 옷이 부디 두툼하길 바란다고. 얼마나 촌스럽든 두껍기만 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아, 시발.”
갑작스러운 욕설에 놀란 건, 그 쌍욕을 입에 담은 진형 그 자신이었다. 아무런 가감 없이 툭 튀어나온 바람에 깜짝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교대로 돌아가는 담배 타임이었다. 돌고 돌아 진형의 차례였다. 평소라면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을 시간이기도 하다.
인적 하나 없는 으슥한 뒷문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니, 붙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강한 바람은 싸구려 라이터 불을 자꾸만 꺼뜨렸다. 입 밖으로 확 욕을 내뱉은 건 두 번째로 불붙이기에 실패했을 때였다.
겨우겨우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았다.
이 잠깐의 끽연이 가져다주는 ‘이제야 좀 살 거 같네.’를 오늘은 느낄 수 없었다.
정말 재미있는 게, 담배가 피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 지금 피우고 있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채 10초를 유지하지 못했다. 다시금 담배 한 대 피웠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얼마나 우스운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질 않았다.
딱 한 대만 더 피우고 들어가자.
오픈을 하고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문만 쳐다봤다. 그게 한 시간이 됐고, 세 시간이 됐다. 바쁘게 홀을 누비면서도 시선은 몇 번이고 사람들이 오가는 문만 바라봤다. 그 사람 중에 있어야 했다. 주말이면 반드시 오는 그 사람이. 커플 염장질 구경이라는, 진짜로 이해할 수 없는 취미를 가진 바로 그 사람이.
워낙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라 자기가 또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차단이라도 한 건가. 그런 마음으로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윤민이 자주 앉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이따금 눈이 마주친 손님이, 윤민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앉은 손님들이 놀란 기색을 했다. 그럴 때면 자기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만 같아서 급속도로 미소를 꾸미곤 했다. 얼마나 어정쩡한 웃음이었을지는 거울을 굳이 볼 필요도 없다.
이제 날이 바뀌어 가려 한다.
윤민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일이 바쁜가.”
저도 모르게 툭 던진 말이었다.
“누가?”
“……!”
옆에서 말을 걸어 오는 바람에 진형이 순간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주변이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상태였다.
“헛, 사장님. 저 금방 들어가려고 했어요. 이제 끄려고요.”
왜 하필이면 지겸인가. 어째서 이 정적을 깬 게 무시무시한 사장님이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만큼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길게 농땡이를 피웠나 싶어서 걱정이 휘몰아쳤다.
“됐어. 편하게 피워. 그럭저럭 한가해졌으니까.”
“네…….”
한가해졌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편하게 피우라는 말은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셔츠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살을 찢을 것만 같았다. 잊고 있던 추위가 느껴질 정도면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지겸에게 감사해야 할 따름이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궁금해 가지고.”
“해 봐. 뭔데.”
“윤…… 윤민이 형 있잖아요.”
왜 이렇게 입에 잘 안 붙나 했더니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내는 듯했다.
지금은 ‘왜 그랬지?’ 혹은 ‘부를 기회는 많지 않았던가?’ 같은 의문이랑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장님에게 말문을 열어 놨으니 딴생각을 한다는 것 역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고윤민이 뭐.”
맞아, 성은 고 씨였지.
“그 형, 어떻게 〈웬즈데이〉 단골이 된 거예요?”
이런 걸 물어도 될까 싶다. ‘2주 발언’ 때문에 한동안 선호에게 지속적으로 놀림과 추궁을 들었던 걸 생각하면 말이다. 그 ‘2주’를 장담한 사람에게, 윤민에 대해 묻고 있는 상황도 꽤 겸연쩍다. 별거 아닌 질문인데도 마치 속내를 다 까발리는 듯하다.
까발려진다고 여기는 그 속내가 뭔지는, 역시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자기 자신에게 해 대는 질문 타임은 여기서 가질 게 못 됐다.
“자주 오면 단골이지 따로 뭐 할 거 있나.”
“하핫, 그게 아니라……. 그 형 늘 혼자 왔다가 혼자 가잖아요. 처음부터 그랬다는 거 같고. 그런데 사장님 뜨내기손님 싫어하시잖아요. 인맥 없는 사람은 잘 받지도 않으시고요. 그러니 그 형이 도대체 〈웬즈데이〉로 어떻게 들어왔나 싶어서요.”
질문보다는 주절거림에 가까운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모양이다. 지겸이 흐릿하게 웃으며 진형을 곁눈질했다.
“넌 그게 왜 궁금한데?”
“……! 어, 음. 그냥?”
“그냥? 인생에 시간이 얼마나 많이 남아돌면 그냥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거에 관심을 가져. 부럽네.”
“와아…….”
손님일 때가 나았다.
진형은 자꾸만 터질 것만 같은 헛웃음을 애써 참았다.
지겸과 얘기를 나누려면 역시 손님이었던 시절이 훨씬 낫다. 물론 우리의 사장님은 손님한테도 막 대하기로 유명하지만 적어도 이렇게까지 대뜸 조롱부터 하진 않는다. 물론 그 손님이 성미를 건드리면 그때부터 장난이 아니지만.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본인한테 직접 물어.”
쉴 틈도 안 주고 공격이 들어온다. 진형은 생각할 겨를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냥 좀 그래서요.”
아, 미친! 안 되지. 이번에는 ‘그냥’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안 되는 거였잖아!
늦은 후회를 할 때였다. 이번에는 ‘그냥’에 트집이 잡히진 않았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한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왜? 어떤 새끼랑 같이 왔다는 말을 고윤민 목소리로 듣는 게 싫어서?”
“……!”
전신이 죄다 얼어붙었다.
추위도 얼어붙게 하지 못했던 머릿속마저 단숨에 동결 상태로 돌입했다. 어찌어찌 하던 대꾸도 이번만큼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생각나는 게 없을뿐더러 쩍쩍 갈라진 입으로는 도무지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고윤민한테 그런 걸 물어보는 자신의 모습이 싫거나.”
“…….”
칼이 던져지는 대로 가슴이며 등을 푹푹 찌르고 들어왔다. 예리한 칼날에 살점이 썰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던 것들을 다른 누군가의 입으로 듣는다. 그것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지겸에게 꼼짝없이 확인 사살을 받고 있자니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너는 둘 다겠지.”
절벽의 낭떠러지까지 몰렸을 땐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다.
“사장님이 보시기엔 제가 그래요?”
말을 돌리듯 되묻는 수밖에.
“그래. 왜냐하면 네가 지금 아니라고 말 못 하고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니까.”
“아아, 진짜…….”
진형은 결국 맥없이 웃었다. 허탈함에 연거푸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사장님 정말 너무하시다. 도망갈 구석 정도는 좀 주시면 안 되나. 그게 연장자의 미덕 아니었어요?”
지겸이 코웃음을 치며 낮게 속삭였다.
“내가 연장자의 미덕을 발휘하는 건 딱 한 사람이라서. 앞으로도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한다면 버리는 게 좋아.”
“두들겨 맞은 것 중에 이번 거가 가장 아프네요. 솔로한테는.”
“너야말로 솔로 탈출이 코앞인데 뭘 그렇게 돌고 돌아. 정말 한가한가 보네.”
진형은 옛적에 담배를 껐다. 코앞에서 사장님이 너무나도 맛있게 담배를 태우니 군침이 돌 정도다. 물론 다시 담배를 꺼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사장님 입에서 ‘당장 튀어 들어가.’라는 말이 나왔을 때 냅다 안으로 줄행랑을 칠 수 있어야 했다.
“그럼, 미덕까지는 아니라도 제가 방금 한 질문에 대답 정도는 해 주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지겸은 이번에도 픽 웃으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나한테 떨어지는 이득도 없는데.”
“직원이기 이전에, 〈웬즈데이〉에 절대 충성했던 오랜 단골 하나 살리는 셈 치시면 어떨까요.”
지겸이 뚱한 표정을 거두고서 목울대를 울려 웃었다. 그 모습에 아주 조금 안심이 됐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겸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었나 보다.
“지선호처럼 아끼는 동생 운운하면서 까불댔으면 오만 정이 떨어졌을 텐데.”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 전 사장님 대할 때 선호 형처럼은 못 할 거 같아요. 사장님이 싫어하시면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거고요.”
“아주 마음에 드네. 계속 유지해.”
“네.”
진형이 힘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겸은 한 번 더 픽 웃고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럼 나도 이제 상을 줄 차례인가.”
그러더니 잠시 옛일을 되짚는 눈치다. 하긴. 그도 그럴 게, 윤민이 단골 된 지가 벌써 2~3년 됐다고 들었으니 제법 오래된 일이긴 했다.
“그때, 고윤민이 덩치가 좋았다면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네.”
잠시 사이를 두고 흐른 말에 진형이 놀라서 “네?”라고 반문했다. 누군가의 멱살을 잡는 사장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참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다.
“걔가 나를 좀 많이 긁었거든.”
아무리 사장님 말이라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진형이 질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형이요? 사장님을? 그렇게 간 큰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거동 수상자도 그런 거동 수상자가 없었다는 소리야. 며칠 간격으로 계속 정문 근처에서 기웃기웃하니까 당연히 짜증 나고 신경 긁히지. 내 가게 앞에서 무슨 지랄을 해대는 거냐고 물었더니 반쯤 겁에 질려서 그런 말을 하더라.”
“…….”
“들어가고 싶은데 좀처럼 한 명만 들어가는 손님이 안 보여서 그랬다고. 혼자서 들어가는 손님이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고.”
“…….”
“거기서 무슨 말을 더 하겠어. 들어오라고 했지.”
“그 형이 요주 인물이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그런 새끼들은 감이 와. 고윤민은 아니었고.”
진형이 그도 그렇다며 한 번 웃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뒤부터 쭉, 계속 혼자서 왔던 거구나.”
“이렇게 오랜 단골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을 끝내며 지겸이 등을 돌렸다. 진형 역시 쏜살같이 그 뒤를 따랐다.
“남진형.”
“네!”
“너도 고윤민 못지않게 여기 오랜 단골이지. 지금은 내 직원이기도 하고.”
“그렇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무의미한 편 나누기인데, 그걸 굳이 해야 한다면 난 너 말고 고윤민 골라. 왠지 알아?”
“앗, 그건 좀 섭섭한…… 왜요?”
“같은 폭탄이라도 차원이 달라서.”
“으윽, 사장님 저 이번에는 진심으로 섭섭해졌어요. 제가 폭탄이라고요?”
길길이 날뛰는 목소리에도 지겸은 신경 하나 쓰지 않고 메마른 목소리를 냈다.
“둘 다 폭탄 맞지만 적어도 고윤민은 아무 때나 터지진 않을 거 같거든. 첫인상이 그랬듯, 계속 문제 일으킬 거 같지 않다는 뜻이지.”
그 말에 진형이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럼 저는 사고 칠 거 같으세요?”
“그래.”
지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진형을 노려본다.
“언제 한번 가게 들쑤실 거 같아서 짜증 나.”
“사장님, 제가 그렇게까지 간이 크진…….”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빨리 해결해.”
“…….”
불가항력으로 터졌던 웃음도 순식간에 멎었다.
“지금 ‘그냥’을 운운할 시간 있으면 해결이나 지어. 지선호 말처럼 한 달 채울 생각 아니라면.”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재빨리 몸을 트는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해결은 어떤 건데요……?”
지겸은 앞으로 쭉 걸어 나가며 비웃음 섞인 목소리를 흘린다.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세 살 먹은 애새끼가 아니잖아?”
그 말이 마치 ‘별걸 다 수저로 떠먹여 달라고 난리군.’이라고 들렸다. 물론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틀림없기도 했다.
알지만.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자기 자신밖에 해결 못 하는 문제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요즘 같아서는 누가 해결책이라며 떠먹여 주면 그걸 날름 받아먹을 것만 같다.
그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한동안 통로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진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홀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서자, 반사적으로 테이블을 하나부터 열까지 쭉 훑었다.
마지막 시선이 머문 곳은 역시 ‘그의 자리’다.
그는 없다. 그는 이쪽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결국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운이 쫙 빠지셨는데? 윤민 씨가 결석해서 그런가.”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와 농담을 던지는 목소리가 장난기 가득했다. 진형은 쓰디쓴 웃음과 함께 힘없이 대꾸했다.
“형까지 놀리지 마요. 저 방금도…….”
“방금도?”
“아, 음. 아니에요. 아무것도.”
“뭘까.”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이 오늘은 너무나도 얄미웠다.
“그건 그렇고, 윤민 씨 몸 많이 안 좋은가 보더라.”
“……!”
갑작스러운 말에 진형이 눈을 부릅떴다.
“너 지금 윤민 씨 몸이 안 좋은 거에 놀란 거야, 내가 윤민 씨 소식을 알고 있어서 놀란 거야?”
“네? 아…… 둘 다요, 둘 다.”
“난 윤민 씨랑 가끔 카톡하거든. 그래서 우리 풀 죽은 진형이의 모습이 안타까운 나머지, 내가 아까 쉬는 시간에 살짝 톡을 넣어 봤다는 말씀이지.”
“…….”
선호의 농담에 태클을 걸 기운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아까 나도, 지금 방금 너처럼 놀랐어.”
“네? 무슨 일이 더 있어요?”
“있지.”
잔뜩 힘주어 대답하는 선호의 이마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주름까지 잡혀 있다.
“너 아직도 윤민 씨 번호나 카톡 모르지? 윤민 씨가 네 걸 모르는 거 보니 그렇겠지.”
“네…….”
“아이고, 너 왜 그러냐, 대체.”
딱하다는 표정을 짓는 선호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멋쩍게 웃었다.
“크게 아픈 건 아니고 그냥 두통이 심한 거 같더라. 윤민 씨 안구 건조증도 장난 아니라며? 그러니 오늘은 그냥 집에서 푹 잠이나 잘 생각이었나 봐.”
“그렇구나.”
무언가 말을 들었으니 기계적으로 대꾸할 뿐인 진형을 보며 선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윤민 씨 아픈 거 걱정은 되는데 그것보다 진짜 이상한 게 있어서.”
“뭔데요?”
“내가 윤민 씨한테 ‘진형이가 아주 목을 빼고 기다려서 내가 대신 연락 한번 해 봤다.’라고 했더니…….”
“네.”
“그 부분은 선호 씨가 오해하고 계시는 거 같다, 하더라. 야, 나 지겸이 형 덕분에 멘탈 어느 정도 단련됐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급속도로 무안해졌다고. 내가 말하는 게 분명히 ‘사실’인데, 윤민 씨가 워낙 강하게 부정하니까 진짜 ‘아닌가?’ 순간적으로 의심해 볼 만큼.”
“왜 사실이라고 생각하세요?”
진형이 쓴웃음과 함께 건넨 말에 선호가 옅게 미소 지었다.
“우리 사이에 이러지 말자, 진형아. 너 그거 부정할 단계는 이제 좀 아니잖아.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고.”
잠시 가만히 있던 진형이 조용히 속삭였다.
“저 오늘 진짜 이리저리 치이는 날인가 보네요.”
“하핫, 왜? 나 말고 또 누가 널 긁었어?”
“그러니까요. 형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누군데?”
“그건 비밀이에요.”
“짜게 군다, 우리 사이에!”
이런 수다를 떨 수 있는 것도 그나마 홀이 한가해졌기 때문이다. 직원을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지지만 않는다면, 지겸 역시 이 정도는 눈감아 주었다.
평소라면 주말치고 한가하다며 좋았을지 모른다. 서 있느라 다리는 좀 피곤했지만 왔다 갔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한결 좋다고 생각했을 거다.
오늘은, 빨리 바빠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선호랑 지금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다.
또, 선호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모르는 번호를, 카톡을.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전, 열댓 명이 〈웬즈데이〉 문을 열고 우르르 나타났다. 홀에 있는 모든 직원 표정이 ‘어서 오세요!’라고 외치기 전 일순 굳은 게 느껴질 정도다. 진형은 오히려 반가웠다. 반가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역시 바쁜 게 좋다.
그러면 그나마 남은 정신도 죄다 날려 버릴 수 있을 테니까.
* * *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내가 그 형에게 반했을 수 있다는 거다.
그게 언제인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 처음 만났던, 묘하게 웃는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인정하는 것은 이렇듯 간단히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울컥하는 것은 역시 있는 대로 상처받은 자존심 탓이다. 물론 그런 폭탄에게, 도 아직은 약하게나마 존재한다. 언제부턴가 그 형을 상대로 폭탄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게 조금쯤 꺼려지긴 했다. 자기 마음이야 어떻든 폭탄이 졸지에 폭탄이 아닌 게 될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다름 아닌 열등감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름 석 자 파악도 못 한 사람에게. 아는 거라고는 그저 윤민의 그 가여운 사랑을 받는 게 전부인 그런 사람에게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열폭’이라는 걸 하고 있다.
유유자적. 어떻게든 되겠지. 가벼움의 끝판왕.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나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남진형이 누구한테 열폭이라는 걸 한다. 이 정도면 남진형 성격을 잘 아는 지인들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던 개도 웃지 않을 거다. 기가 막혀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 마음을 인정해 버리면 내가 뭐가 돼.
내 꼴이 뭐가 되겠냐고.
지겸은 한 달 채울 생각이냐고 했지만 이대로라면 한 달이 다 뭐란 말인가. 그 정도는 아주 가뿐히 넘을 수 있을 듯하다.
윤민과 저녁도 이따금 먹는다. 섹스 역시 이따금 한다.
섹스 파트너치고는 아주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다.
지금껏 다른 사람과 수도 없이 이런 관계를 맺어 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섹스를 함께하는 지인이다.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지만, 얼굴 보면 반갑고 술 정도는 같이할 수 있는 그런 사이. ‘친하다’는 아니지만 ‘익숙하다’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딱 그런 정도의 느낌으로 유지할 수 있는 관계. 늘 다양한 사람과 그런 관계를 맺어 왔다. 최근에는 윤민뿐이니 근래 유일한 섹스파트너라고 해도 괜찮을 거다.
저녁은 거창한 걸 먹는 게 아니었다. 종종 밖에서 사 먹기도 했지만 가급적이면 윤민의 집에서 가정식 위주로 했다. 워낙 사서 먹는 경력이 오래된 그 사람을 위한 거였고, 진형 역시 기본적으로 국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전형적인 한국인 입맛이었다.
저녁을 먹고, 자기는 출근을 하고, 그는 집에서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그의 집으로 가서 섹스를 하고.
그다음엔 그의 침대 위에서 자 버리거나, 아니면 기어코 그 집 현관을 나서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거나.
초반에는 윤민의 집에서 잤다. 〈웬즈데이〉가 그의 집에서 더 가까웠기에 굳이 집에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편하게 자라고. 자기는 이제부터 일 좀 하겠다고. 그런 말에 태연히 어리광도 부렸다. 하드한 섹스로 반쯤 기진맥진한 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요즘은 섹스가 주는 노곤함을 어떻게든 뿌리치고서 문턱을 기어 나갔다.
억지스러운 귀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눈약을 분 단위로 달고 사는 그가 안타까워 어떻게든 자리를 비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같이 자도 좋겠지만 섹스가 끝나면 냅다 누워 버리는 이쪽을 내버려 두고 책상을 향하는 뒷모습을 도무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같이 자자고 권하면 그만이겠지만 어쩐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거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 호구라는 단어가 절로 튀어나왔을 정도로, 그는 그런 사람이다. 타인에게든, 누구에게든. 아마 살면서 자기 실속과 이익부터 챙겨 본 적 없겠지. 싫은 소리를 못 하는 걸 알기에, 그 때문에 같이 자자고 말하는 것이 몹시 꺼려졌다. 자기 권유에 그가 억지로 눕는 일이 벌어질까 봐. 그리고 자기가 나가면 시간에 쫓기며 작업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니 어떻게든 빨리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 집을 그렇게 돌아 나오면 그 순간부터 마음 곳곳이 찝찝해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스스로의 모습이 마치 ‘나 할 거 다 했네요. 섹스 좋았고 오늘도 덕분에 한 발 잘 뺐습니다. 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기에 이제 꺼집니다.’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아, 아닌데. 정말 그런 게 아닌데.
자기가 착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쌍놈은 아닌데.
아무리 부정해도 윤민이 그렇게 오해하기에는 부족함 없는 행동이었다. 자기가 아무리 편하게 자라고 말하며 그 집을 떠나도, 방해해서 미안했다고 말 서너 마디 덧붙여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 거였다.
이 사태의 확실한 해결책이 있다.
안 가는 것이다.
정말로 그게 맞았다. 안 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연락처를 알아내서 가도 되느냐고 물어본다 한들 나올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질문하는 거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러니 아예 이쪽이 발길을 끊어 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고민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해결이야말로 지겸이 말했던 해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억지스러운 귀가의 두 번째 이유는 윤민 때문이다.
이것은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가 요즘 묘하다.
뭐가 어떻다 설명할 순 없어도 초반에 비해 느낌이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물론 여전한 것도 있다. 초인종을 누르는 자기를 맞이하는 그의 얼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다른 표정은 보지 못했다.
신기해하고, 깜짝 놀라는.
심지어 저녁을 먹고 ‘이따 아침에 들를게요.’라는 말을 건넨 날이라도 그가 이쪽을 맞이하는 표정은 변함없다.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웃었고, 이상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멍한 눈빛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 표정이 좋았던 거 같기도 하다. 그 놀라움 다음으로 이어지는 특유의 미소를 바라보며 역시 은연중에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노라고 감탄도 했다.
요즘은 어떠냐면, 전혀 좋지가 않다.
윤민이 자기를 볼 때마다 놀란 표정을 지으면 지을수록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당연한 것이 될 수 없구나. 이 사람에게 남진형이라는 사람의 존재는 아마도 계속 이런 식으로 남겠구나. 신기하고, 너무나도 믿어지지 않는 것.
좋았는데.
이 거리감이 너무나 좋았었는데.
이딴 폭탄이랑 가까워지지 않고, 이 폭탄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인사하지 않으며, 자기도 걸어 다니는 안구 테러범과 어느 정도 선만 유지한 채 적당히 지낸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관계였고, 그게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고 여겼는데.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요즘은 계속 윤민의 표정을 관찰하게 됐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최근 윤민은 얼굴에 무표정을 기본적으로 깔았다. 특유의 몽롱함조차도 없는, 그런 무미건조함. 그건 바빠서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고, 고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의 표정도 아니었다.
거기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저 형 지금 표정 관리하고 있구나.
왜?
내 앞이라서?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을 때면 가시방석도 이런 가시방석이 없었다. 그를 보며 불편함이나 억지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전적으로 진형 자신이 문제였다. 언제가 됐든 스스로 폭발할 것만 같아서 무서워졌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리하신 사장님 말씀이 모두 옳았다.
이쪽이 지금 그에게 폭탄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당장에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것은 바로 나였다.
이렇게 여러 문제를 끌어안고 있음에도.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평소처럼’ 버티고 있는 이 와중에도.
우리는 섹스를 한다.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게.
윤민과 하는 섹스는 첫 단추부터 그랬지만 요즘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물론, 자기 모습이 너무나도 기이하다는 뜻이다.
진형은 여태껏 이런 섹스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섹스 스타일은 늘 확고했다. 침대에서는 오로지 몸으로 대화할 뿐, 성대가 필요한 대화 따윈 사절이었다. 목구멍은 오로지 신음하기 위해서만 쓰였다. 많이 봐줘 봤자 거기를 더 찔러 달라거나, 이쪽을 더 만져 달라거나, 그쪽을 더 빨아 달라거나. 즐거운 섹스를 위한 요구가 오갈 때뿐이다. 진형이 선호하는 파트너 역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이었다.
삽입 전, 전희에 이렇게까지 공과 시간을 들인 적이 없다. 상대가 누구든 옷을 벗자마자 성기를 더듬거나 주물러서 열부터 돋웠다. 열기가 부글부글 끓으면 러브젤을 아낌없이 써서 섹스의 가장 기본이자 모든 것인 삽입을 진행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정도까진 아니라도 어느 정도 빨리빨리 일을 치르는 게 좋았다.
어차피 섹스라는 건 넣고 싸기 위함이니.
쌓인 걸 방출하고 말끔히 풀어내기 위한 수단이니.
동시에 같이 목적한 바가 있고, 그걸 서로 해결하면 되는데 굳이 시간을 끌고 유희를 나눠 가며 진을 뺄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진형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아니, 그랬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윤민은 아직도 삽입 시 희미하긴 하지만 조금쯤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누군가의 것이 내부를 향해 진입하고, 뚫고, 여린 살을 먹어 치울 듯 파고드는 감각. 진형은 한 번도 느껴 보질 못했고, 앞으로도 어지간한 일이 없는 이상 계속 느껴 보지 못할 느낌이다. 친하게 지내는 형 중에는 물론 바텀도 즐비하기에 그들 입에서 가끔 경험담 얘기가 나오면 ‘아, 그렇구나.’ 정도로 가볍게 흘려들었던 것들.
윤민이 그런 느낌들을 안에서 어떻게 소화하고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감조차 오지 않지만. 어쨌든 삽입을 앞둔 그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형이 택한 방법은 하나였다.
그의 머릿속을 녹여 태우는 것이다. 삽입의 순간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라는 단어 자체를 머릿속에서 날려 버릴 만큼.
윤민이 가장 좋아하는 게 확실한 키스를 자주 하는 거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셀 수 없을 만큼 했다. 섹스를 끝마치고 나면 그의 입술도, 자기 입술도 얼얼한 감각을 수반한 채 부풀어 있었다.
거기에 이쪽은 그의 조그만 입술만 빠는 게 아니다. 그의 몸 전부가 입술이 누빌 수 있는 곳이었다. 엄지 손끝부터 새끼발가락까지. 입 안에 넣고, 빨고, 굴려 가며 흔적을 새겼다. 몸 어디라도 건드리면 그가 반응하도록. 전신을 성감대로 만들어 줄 기세로.
항상 받는 게 익숙해져서 상대적으로 해 볼 일이 별로 없던 펠라도 적극적으로 하게 됐다. ‘적극적’ 앞에 ‘대단히’까지 붙이면 그게 바로 최근의 자기 모습이다.
펠라를 할 때마다 그는 항상 기겁을 하고 반쯤 울먹거림까지 더해 가며 만류했다. 그게 채 1분을 가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생물은 어쩔 수가 없다. 그 또한 사람이다. 그 어떤 곳보다 가장 강력한 흥분이 일어나는 곳. 성기에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자극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은 단연컨대 없다.
그런 곳은 더럽다면서 울고, 그런 것까지는 안 해도 괜찮다며 울고, 미안하다면서 더욱더 울고.
흥분하고 사정에 도달하면서도 그는 언제나 몸을 곱송그리며 그런 말들을 했다. 자기가 내뱉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으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을 말들. 그게 매번 윤민의 입에서 터져 나왔지만, 그때마다 ‘잘 느껴서 보기 좋아요.’라는 말을 해 줄 수가 있었다. 하물며 한없는 진심이었다.
진형도, 파트너들도 가리는 체위는 없다지만 대체로 뒤치기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제멋대로 푹푹 찔러 댈 수 있어 좋고, 가장 깊은 곳까지 자극받아서 좋은. 몸을 오므리고 무릎을 꿇은 채 바싹 엉덩이를 들면, 상대가 원하는 만큼 그 사이에 물건을 처박아 주면 됐다.
섹스만을 위해 만난 사이라면 서로가 가는 얼굴에는 별반 감흥이 없다. 자기 자신의 쾌감만이 절대적이다. 그런 의미로 뒤치기만큼 좋은 체위가 또 없었다.
그 좋은 체위를 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났다.
기본은 정상위였다. 그리고 이따금 전희만으로 녹초가 됐을 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삽입을 건너뛸 때도 있었다.
삽입으로 빼지 않아도 자기 역시 윤민을 자극하다 보면 이미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들이 다가왔다. 그럴 때면 그의 꽉 다물린 허벅지 사이를 쓰기도 했고, 아니면 그의 손을 빌리기도 했다. 물론 그에게 흔들어 달라거나 만져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가 김을 펄펄 내며 기절이라도 해 버릴 거 같으니 말이다. 그저 그가 이쪽 성기만 쥐어 주면 좋았다. 그다음은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었다.
섹스의 시작도, 마지막도.
우리는 언제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키스를 한다.
애들 장난처럼. 혹은 상대방의 타액으로 흥건해질 만큼.
윤민과의 섹스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그걸 제삼자의 시점으로 바라본다. 그럴 때면 스스로 생각해도 낯간지럽다고 여길 법한 순간들이 한가득했다.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해 달라고 부탁했더라면, 물론 앞에서는 웃었겠지만 속으론 ‘이제 너한테 연락하는 일 없겠네.’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오글거린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지간한 기적 따윈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그렇게나 달콤한데.
우리가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가 욕실로 향하는 그 순간까지도, 눈빛 한 번에 가슴 근처가 미칠 듯이 달아오르는데.
그런데.
옷을 입고 인사하며 배웅을 받는 그 순간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것처럼 돌아간다. 자기 태도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건지. 누가 먼저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이 애매한 분위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요즘은 아주 조금쯤 이해가 가는 것이다.
꿈을 꾸는 듯한 그의 표정이.
* * *
마감하는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던 진형이 슬쩍 옆을 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형, 오늘 오프죠?”
선호가 한껏 더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엄청나게 기다리던 날이지.”
“오늘, 이 뒤로 뭐 하세요? 자고 일어난 다음에.”
“밥 먹고 더 자겠지?”
“약속 같은 거 없고요?”
질문하자마자 한숨을 팍팍 내쉬며 선호가 툭 입술을 내민다.
“없다, 없어. 약속을 잡을 체력도 없다. 언제나 기력 넘치는 누구랑은 다르게!”
진형이 맥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형, 마감하면 그 누구랑 어디 가서 한잔하실래요?”
“어?”
선호가 눈을 번쩍거렸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빛은 무언가의 기대감을 내뿜고 있었다.
“혹시 S.O.S.야?”
“으음.”
인정하긴 싫지만 별수 없다. 어차피 술 마시며 얘기하면 다 까발려질 테니까.
“그 비슷한 거긴 하죠.”
선호의 장난기 어린 웃음이 한결 더 짙어졌다.
“네 고민 상담 주인공은, 이번에야말로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고?”
“그런 거기도 하죠.”
“드디어 올 게 왔네.”
선호가 싱긋 웃으며 진형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가볍게 맥주 할 거지? 우리가 지금 소주 마실 체력은 아니지 않냐. 그러니까 멀리 가지 말고, 마감하고 사람들 다 나가면 아무 테이블에나 자리 펴자.”
“그래도 돼요?”
“네, 그래도 됩니다. 지겸이 형도 냉장고랑 술 창고 거덜 내는 수준 아니면 우리가 마시고 먹는 거 정도는 넓은 마음으로 허락해 주거든.”
말을 마치며 선호가 ‘형 괜찮지?’라는 눈빛으로 지겸을 빤히 바라봤다. 그 반짝거리는 눈빛에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안 돼,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허락이었다.
“아, 대신 네가 한 평소보다 20분 정도 일찍 오긴 와야겠다. 난 오프니 네가 열쇠 가지고 가야 하니까.”
“그건 상관없는데요.”
“그럼 됐네.”
“진형이한테 열쇠 줄 필요 없어. 나도 남을 거니까.”
옆에서 툭 들려온 기선의 목소리에 선호가 보란 듯 이마를 구긴다.
“형은 좀 빠져! 노친네가 낄 때 안 낄 때를 모르고. 젊은 사람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까 집에나 가세요.”
물론 기선은 그 목소리를 깡그리 무시하며 진형에게 묻는다.
“진형이도 선호랑 단둘만 있는 게 좋냐.”
“아니요, 당연히 기선이 형도 괜찮죠.”
“그럼. 저 자식보다는 내가 낫지. 쟤는 너무 허무맹랑하니까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아, 기선이 형. 지겸이 형도 환장하겠는데 왜 형까지 날 쪼고 그러, 아! 진짜 아프다고!”
퇴근을 위해 정문으로 나가던 지겸이 선호의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후려쳤다. 아프다는 투덜거림은 당연히 무시했다. 기선의 “들어가세요, 형.”이라는 목소리에 고개 한 번 끄덕이고서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지겸이 나가고, 마감을 마친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원길이 있었다면 그도 남았을 테지만 오프였기에 이 자리에 없다.
마지막까지 주방에 남아 있던 강진이 동생들이랑 술은 못 마셔 줘도 안주 정도는 만들어 주고 갈 수 있다면서 팔을 걷었다. 순식간에 감자튀김과 모둠 소시지구이가 쟁반에 담겼다.
후다닥 만들어 주고 잽싸게 가게를 등지는 강진의 모습을 보며 진형이 “같이 드셨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자 선호가 깔깔 웃었다.
“아서라. 우리보다는 썸남이 더 중요하지.”
“아, 그런 거예요?”
“요즘 엄청 공들이고 있는 사람 있거든. 강진이 형이야 그렇다 치고, 네가 문제지. 뭔데. 오늘 표정 관리 안 된 거랑 상관있어?”
선호의 말을 기선이 받았다.
“잠깐 한가해지면 한숨도 푹푹 쉬었지.”
“저 그렇게까지 티 났어요? 큰일이네.”
“괜찮아. 손님들 앞에서만 안 그러면 상관없으니까. 어쨌든 나나 기선이 형이나 엄청 걱정했다고. 네가 척 봐도 기운 없어 보이니까.”
“기운도 없고, 기분도 이상하고. 그렇긴 한데 이게 왜 이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답답해서 죽을 정도로요.”
“막 기분이 오락가락하는데 정작 네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네. 미칠 거 같아요.”
진형이 대답하며 기선과 선호의 잔에 맥주를 따라 주었다. 그럼에도 모두 맥주를 마실 생각조차 못 했다. 음식을 앞에 놓고 셋은 잠시간 침묵했다.
“윤민 씨랑 요즘 어떻게 지내는데?”
정적은 선호가 깼다. 그 질문에 진형이 별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잘 지내죠.”
“잘 지낸다고 생각하는 건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네?”
“윤민 씨도 너랑 잘 지낸다고 생각할까?”
“그건…….”
진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모르겠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바로 대답할 수 없는 걸 보니, 내심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나 보다.
“너랑 윤민 씨 얘기니까, 네가 우리한테 말을 하면 덩달아 윤민 씨도 자기 사생활 죄다 까발려지는 꼴이라 참 뭐하긴 한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이건 물어볼 수밖에 없어.”
선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는 듯 기선이 소리 없이 웃었다.
“너 윤민 씨랑 잤지.”
“……!”
갑작스러운 말에 놀랄 틈은 좀 줬으면 한다. 선호의 이어지는 말은 정신마저 아찔하게 했다.
“게다가 한 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지? ‘사고 쳤다.’라거나 그냥 워낙 이색적인 사람이라 호기심으로 ‘한번 해 봤다.’라는 말을 하면서 관계를 끝낼 수 없을 정도로.”
“와…….”
저도 모르게 탄식이 터지는 걸 내버려 두었다. 선호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 형이 눈치가 좀 빠르단다.”라며 싱글싱글 웃었다. 기선은 “그 눈치 좀 지겸이 형한테 써라.”라며 구박했지만, 그 역시도 선호와 같은 생각인지 질문 자체를 타박하진 않았다.
“이 얼마나 간단한 얘기냐. 왜 답답해? 뭐가 짜증 나. 서로 합의하고 섹스가 전부인 관계를 이어 나가도 괜찮을 거고. 너나 윤민 씨가 그러길 원하지 않으면 당장 관두면 그만이고. 그것도 아니면.”
선호가 히죽 웃으며 능글능글 중얼거렸다.
“너도 연애라는 걸 해야겠지. 아니면 짝사랑.”
잠시 멍하니 있던 진형이 살짝 고개 숙였다. 맥주를 마시거나 안주를 집거나. 뭐든 하고 싶은데 갑작스러운 탈력감에 손도 움직이기가 싫어졌다.
“그 사람 참 폭탄인데.”
“뭐? 폭탄?”
기선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선호는 제대로 알아들은 듯 깔깔 웃었다.
“윤민 씨가 너한테? 하긴, 그렇게 보였겠지.”
“지금도 그래요. 그 형이 옷장에 있는 쓰레기 같은 옷을 죄다 버리지 않는 이상, 어디 가서 머리도 좀 하고 안경도 바꾸지 않는 이상, 저한테는 계속 폭탄이거든요. 다른 건 어떻게든 넘어가겠는데, 제발 땅딸한 키를 생각해서 바지에 셔츠 좀 안 넣어서 입었으면 좋겠어요. 아아, 그 식겁할 것 같은 벨트도 좀 버렸으면…….”
“하핫, 내 배! 하하하!”
선호가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를 하는 동안, 기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맥주를 마실 뿐이다.
“전 그런 사람이 아니, 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잖아요. ‘이상형 물을 때 마음을 봐요.’라거나. ‘어차피 늙으면 다 주름 잡히는 거 외모가 크게 상관있나요. 오래 봐도 진국인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좋지.’라거나. 전 절대 그런 말 못 해요. 제가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한다면 거짓말이에요.”
“뭐, 사람 볼 때 외모가 어느 정도 중요하긴 하지.”
“안 그런 사람 찾기도 힘들걸.”
진형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선호와 기선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 줬다. 그 덕분에 진형은 그간 계속 응어리로 맺혀 있던 가슴속의 말들을 미친 듯 내뱉었다.
“그 형이 못생긴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원판은 준수하죠. 그런데 하고 다니는 모양새가 그 꼴이니까! 같이 서 있으면, 아, 정말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부끄러울 때가 있어요. 좀 창피하다는 느낌? 근데 제가 정말 미쳐 돌아서, 막말로…… 정말, 만약에 그 형한테 반했다고 쳐요. 그런데…….”
“왜 ‘만약에’가 들어가?”
슬쩍 끼어드는 기선의 속삭임에 진형이 말을 멈추고 얼음처럼 굳었다.
“네?”
“형은 그것만 이상해? ‘반했다고 쳐요.’도 이제 와서는 좀 아니잖아.”
“아, 그러네.”
기선의 말을 거들던 선호가 웃음이 잔뜩 깔린 목소리를 냈다.
“진형아. 너, 마치 싸우고 있는 거 같다?”
“네? 누구랑요?”
“자기 자신의 마음이랑? 듣다 보니 그런 느낌이네. ‘내가 왜 이딴 폭탄한테.’랑 ‘반한 거 같은데 이거 정말 큰 일이네.’랑 둘이 대판 싸우는 통에 머릿속이 엉망이 된 거지. 쯧쯧. 너도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구나.”
기선이 쓰게 웃으며 감탄조로 중얼거렸다.
“살다 보니 지선호 말을 제법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날이 나한테 오는구나.”
“형, 좀! 지겸이 형한테 배운 거야?”
진형은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맞은편에 앉은 둘의 얼굴만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 형들 말씀처럼 반한 거면, 제가 그 사람한테 눈 돌아간 거면 어쩌죠.”
한없이 낮은 목소리에 선호가 물어 뭐 하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긴 뭘 어째? 가져. 당장 네 사람으로 만들어 버려.”
“이야, 지선호. 너 아까부터 계속 맞는 말만 하잖아.”
선호가 우쭐대며 어깨를 쓱 올렸다.
“봤어, 형? 이게 내 진가라고.”
둘의 말을 가만히 듣던 진형이 이윽고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아까 선호 형이 그랬잖아요. 연애를 하든가 짝사랑을 하든가.”
“응, 그랬지.”
“제가 만약 그 형을 좋아한다고 여기서 인정하면, 전 앞으로 후자를 해야 돼요.”
“뭐?”
“짝사랑. 그거요.”
진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이 동시에 눈을 크게 뜨며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우리 잘나가는 아우님께서 뭐? 짝사랑? 왜? 세상 말세다 말세다 하더니 진짜 말세였나 보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윤민 씨한테 연애할 생각 없다고 들었다거나?”
흥분한 목소리와 걱정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날아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쨌거나 놀라워하는 둘의 마음만큼은 확실히 전해졌다.
“실은, 그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진형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번에도 둘의 표정이 똑같아졌다. 완전히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해진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환장하겠네.”
“하아……. 이건 또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잖아. 갑작스레 너무 큰 장벽인데.”
“그거 네 생각이 아니라, 윤민 씨 본인한테 직접 확인한 거야?”
기선의 말에 진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호가 머리를 싸매 가며 한숨을 푹푹 쉰다.
“아니, 이건 좀 진짜…… 이걸 어떻게…… 하아…….”
“선호 형이 왜 나보다도 더 죽을상을 하는데요.”
“쇼크 받아서 그러지. 됐고, 누군데? 윤민 씨 사랑을 받는다는 그 사람이?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다 까고 말하는 김에 그것도 말해 봐. 우리 입에 지퍼 달 테니까 걱정 말고.”
“형들이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뭐 하기는. 이름 듣고 좋은 놈이면 어쩔 수 없다지만, 쌍시옷 소리 나오는 놈이면 당장 윤민 씨 뜯어말려야지.”
“윤민 씨야 사람 보는 눈이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걱정은 없을 거 같다만, 하기야 또 모르지.”
“그러니까, 형. 내 말이 그 말이야. 혹시 모르는 거잖아? 진형이를 봐. 얘도 윤민 씨 좋아하려고 좋아한 게 아닌 것처럼.”
선호의 말에 진형이 힘없이 웃었다.
“우리 가게 단골이면 일단 인간성은 보장받은 거네. 지겸이 형 물 관리 통과하는 게 좀 힘들어? 근데 최근 뉴페이스라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하지만 윤민 씨 보면 딱히 뉴페이스고 뭐고 별반 관심이 없는 거 같지 않냐?”
“어쨌든 그 누구 씨한테 관심을 가졌으니까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 아니, 그래서 도대체 누구야?”
선호의 질문에 진형이 한숨을 섞어 대꾸했다.
“우리 가게 손님이 아닌 건 확실한 거 같아요. 전 그래서 아마도 그 형이 일로 만나는 사람 중에 하나구나 싶은 정도고요. 이름이나 얼굴까지는 저도 모르죠.”
“한 번도 본 적 없어? 윤민 씨한테 좀 캐묻지. 뭐든 알아내야 할 거 아냐. 서로 좋은 감정 오가는 중이래?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넌 궁금하지도 않았어? 적을 이기려면 나 자신도 알고, 그다음에 뭐야, 하여간 적도 알아야 하잖아? 백전백승을 위해서?”
머릿속이 엉망인지 선호의 말투가 어수선했다. 기선이 쓰게 웃었으나 태클을 걸지 않는 걸 보니 그 역시도 속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실 그게…… 아. 이거 정말 형들만 아셔야 돼요.”
진형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을까 싶긴 하지만, 결국 선호와 기선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이겨 낼 수 없었다.
“노멀인 거 같아요. 어쩌면 유부남일 수도 있고요.”
그러자 선호가 가게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엄청나게 큰 소리를 냈다.
“야! 너 농담하는 거 아니지? 형들 심장 약하다, 어? 놀리는 거면 작작 해라?”
난동을 부리는 선호를 내버려 둔 채, 기선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쉰다.
“이거 참. 산 넘어 산이네.”
잠깐의 침묵 후, 셋은 일제히 맥주를 들입다 비웠다. 잔이 비면 채우고, 또 바닥나면 채우고. 여기서 가장 목이 타는 사람은 진형이겠지만 졸지에 엄청난 얘기를 듣게 된 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연거푸 술만 마셔 대며 이걸 어쩌면 좋을지 생각한다.
“진형이가 술 마시자고 할 만하네. 그렇지, 형?”
“그러게.”
“이런 얘기를 우리 말고 또 누구한테 하겠어.”
둘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을 받던 진형이 힘없이 속삭였다.
“저 요즘 너무…….”
아아, 위험하다.
진형이 서둘러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봤다. 눈가에 갑작스레 번진 뜨거움이 가라앉길 기다렸지만 쉽게 식을 기미가 없다.
맥주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는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좀 못 잤어도 맥주는 그저 음료 정도다. 그러니 지금 이 울컥함을 딱히 알코올의 탓으로 돌릴 수가 없다. 그게 안타깝다.
“너무 화가 나요.”
“진형아…….”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사람이랑 졸지에 엮여서, 폭탄을 폭탄이라고 부르는 거에도 묘한 죄책감을 들게 하더니, 이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질투 비슷한 걸 느끼기 시작하고.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의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다 아는 건 나뿐이라고. 너무나도 같잖은 우월감을 느끼다가…… 결국, 이런 거 다 소용없다고. 어차피 형이 원하는 건 그 인간이니까.”
“아이고, 진형아…….”
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형의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축 처진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저조차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결론 같은 건 계속 나오질 않으니까 한숨이나 팍팍 쉬고. 제가 이러는 걸 그 형은 모르니까 좀 억울하기도 하고. 억울함을 느끼는 것조차도 분해서 더 화가 나요.”
토닥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진형은 완전히 터져 버린 울분을 마구 내뱉었다.
“그 형이 웃는 게 좋아요. 웃을 때만큼은 안경이니 배 바지니, 그런 거 다 안 보이고 그냥 그 사람 얼굴만 빤히 보게 될 정도로 좋은 거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제 앞에서 잘 웃지도 않아요……. 슬슬 끝인가 싶어서, 아, 하지만 난 좀, 아직, 아직…….”
“그냥 다 말해 버리면 속이라도 편하지 않을까, 윤민 씨 붙잡고서.”
선호의 말에 진형이 픽 웃었다.
“말하면요? 그다음은요?”
“으음.”
“그럼 진짜 끝날 거 같더라고요. 저 처음에는 그 형한테 이 질문 저 질문 꽤 많이 해 대고, 조잘대고 그랬는데…… 요즘은 스스로 몸 사리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형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물어 보거나, 우리의 현재 관계에 대해 말했다가…… 그랬다가는 진짜 그 형이 이런 상황 좀 시궁창이라고 생각해서 이제 끝내자고 말하면 어떡하지, 불안해서요.”
진형의 두서없는 주절거림을 가만 듣던 선호가 죽을상을 하면서 어깨를 거머쥔다.
“미안하다, 진형아. 내가 죄인이다.”
선호의 굳은 목소리에 진형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왜요, 형?”
“그날, 그때 너를 윤민 씨 자리에 합석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아, 그거……. 맞아요, 형. 왜 그랬어요? 나 요즘 미치겠어.”
“미안해! 아, 정말 미안해!”
둘의 대화를 듣던 기선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금 어떻게든 해결이라는 걸 봐야 할 상황인 건 맞지. 심플한 원나잇 관계로 가기에는 이미 진형이가 자신을 잃은 거 같고.”
“윤민 씨가 그 노멀인지 유부남인지 모를 인간이랑 잘되는 것보다 진형이가 고백해서 받아 줄 확률이 더 크지 않나?”
선호의 말에 기선이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게 지금 확률 싸움이냐? 너도 아까 말했잖아. 진형이가 윤민 씨를 좋아하려고 좋아한 게 아니라고.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역시 아무도 모르는 거지.”
선호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진형은 이어지는 기선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좀 잔인한 상황이긴 하다만 결론 역시 진형아, 네가 내야 할 거 같다. 이 이상 더 감정 소모했다가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겠어. 지금도 아슬아슬한 것처럼 보이고.”
감정 소모.
그 사람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혼자 하는 사랑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니 더 억울하다.
혼자서도 감정 소모를 할 수 있다. 서로의 감정이 오가지 않아도 그 소모전은 내부에서도 어렵지 않게 벌어졌다.
그 사람 덕분에 최근 며칠 사이 엄청나게 감정을 소모하고 있다. 기력이 죄다 빨려 나갔다고 스스로 알 수 있을 만큼. 얼굴 보고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짜증 났다가, 창피했다가, 좀 좋았다가, 귀엽게 보이거나, 갑작스레 화가 나다가 또 어느 순간 웃고 마는.
그 사람은 이런 게 편하다는 건가? 아무 말도 전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는 게?
역시, 그 사람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더 흘러도. 언제까지고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였다.
난 지금 딱 죽을 맛인데.
Another Chapter 2
끝난 걸까?
끝난 거라고 해도 아직 감은 쉬이 오지 않았다.
꿈만 같은 일상이 이제 더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기나긴 꿈에서 깨어났다는 감각 정도만이 전부였다. 끝났다는 사실에 슬퍼하거나 가슴 뜨거워지는 순간도 어쩌면 오지 않을지 모른다.
진형 씨가 오지 않은 지 며칠이나 됐을까.
기억이 났던 거 같은데 막상 기억하려니까 떠오르지 않는다.
적어도 1주일은 훌쩍 넘었다.
이제 더는 진형 씨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멍하니 자리에 앉은 채로, 이제 ‘마지막’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순간들을 떠올렸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했었나. 진형 씨가 날 보며 얼마만큼 웃었더라.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날, 그날 몇 번이나 눈을 마주쳤더라.
굉장히 의미 없는 과정이다.
그런 것을 떠올려 봤자 어차피 진형 씨는 오지 않을 테니까.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이어졌던, 너무나 길었던 해프닝이 끝난 것에 불과하니까.
이게 오래도록 지속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던 게 아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진형 씨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잠깐 흥미를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 흥미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장받을 길이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보냈던 새벽과 아침 사이.
계속 집으로 돌아가던 진형 씨가 그날은 어쩐 일인지 씻고 나서 곧장 내 침대를 차지한 채 누워 버렸다. 이제 옷을 입고 그의 집으로 가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조금 놀라서 그 얼굴을 바라봤다. 진형 씨는 그저 픽 웃었고, 도무지 집에 갈 기력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 전부터 진형 씨가 집에 가지 않을 때마다 습관처럼 내뱉었던 말들을 그때도 했다. 이제부터 일을 할 생각이라고. 그러니까 진형 씨는 푹 쉬라고.
당연히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섹스가 남기는 여파는 제법 큰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진형 씨가 매번 잘해 주는 덕분에 그나마 긴장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완벽하게 떨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책상 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봐도 일이 진행될 리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진형 씨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형 씨는 잠기운에 취해 고른 숨을 내쉴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주 조심히 의자에서 일어나 등지고 있던 침대로 다가갈 생각이다. 진형 씨가 부디 엎드려서 자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날은 정말 고맙게도 진형 씨가 옆으로 누운 채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푹 잠에 빠져든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오늘도 반짝반짝하다고.
나는 진형 씨의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았다. 나도 사람이라 가끔은 너무 피곤해서 진형 씨 옆이든, 아니면 바닥이라도 좋으니까 눕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에도 이렇게 진형 씨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면 피로도 근육통도 말끔히 가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아, 역시 좋다.
진형 씨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그리고 나는 그 마지막 날.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진형 씨가 더는 오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는지 모른다.
조금씩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예를 들면, 진형 씨의 입에서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는 말이 상당히 자주 나오게 된 것.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마는 진형 씨의 모습.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순 멈칫했다가, 그다음엔 힘없는 목소리로 저 말을 하곤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러면 나는 그때마다 고민에 빠졌다.
혹시 진형 씨,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나?
이제 더는 오지 않을 거라고 내게 말해야 하는 걸?
진형 씨가 멈칫할 때면 나도 좀처럼 긴장이나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던 것 같다. 정말 미안한 일이다. 내가 좀 태연하게 웃으면서 편안하게 말해 보라고 거들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거꾸로 먹은 거 같다. 연장자답게 좀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고민하는 진형 씨 앞에서 같이 전전긍긍하다니.
그런데 나도, 정말 욕심이 지나치다는 걸 스스로 알지만.
아직 진형 씨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서.
게다가 나는 그것 말고라도 반쯤 겁에 질린 상태였다.
진형 씨에게 기울었던 이 마음이 점점 다른 종류의 것으로 변해 간다는 건, 자꾸만 변질되어 간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으니까.
진형 씨에게 말했다.
나는 ‘그분’이 행복한 것을 바라만 보아도 그저 좋다고. 나 역시 행복하다고.
그게 점점 거짓말이 되어 간다는 게 너무 무서웠다.
주말이었던 이틀 전, 〈웬즈데이〉에 다녀왔다.
항상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는 직원들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웃어 주는 진형 씨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홀을 누비는 진형 씨가 그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이곳저곳에 나눠 주며 모두를 기쁘게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
내가 너무나도 아끼며 홀로 행복해했던 그 모습들이.
어느 순간부터 가장 아픈 것으로 변해서 내 심장을 할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 숙인 채 술을 마셨다. 아주 많이 마셨다. 그런데도 취하지 않았다.
술에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술이 들어가면 조금은 어지럽기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머리 한쪽이 차가워지는 느낌만이 가득했다.
연거푸 술만 마시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홀을 바라보니 사람이 많이 빠져 있었다. 주말임에도 이렇게까지 한산해졌으니 시간이 제법 지났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때까지 내 정신은 아주 멀쩡했다.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 생각한 건 그다음이었다.
진형 씨를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냥 가장 반짝반짝 빛이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됐다. 그때도, 그 순간에도 마치 습관처럼 그 밝음을 좇아 눈길을 건넸을 뿐이었다.
시선이 바 근처로 향했다.
직원분들은 늘 웃어 주니 이젠 조금쯤 편히 바라보며 얘기할 수 있었지만, 사장님만큼은 아직도 대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 근처로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늘 바 한가운데서 가게를 호령하는 무시무시한 사장님이 어쩐 일인지 자리에 없었다. 가끔 쉬는 시간 같은 게 있다고 하니 그런 거구나 싶었다.
바에 손님으로 앉아 있는 어떤 사람이 진형 씨의 팔을 가볍게 붙잡고 있었다. 진형 씨 역시 밝게 웃으며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웃었던 거 같다. 그냥 그 순간은 진형 씨랑 눈이 마주쳤다는 게 좋아서 웃었다. 보고 있다는 게 들켜서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평소처럼 웃을 수 있었다.
시선의 교환은 생각보다 몹시 짧았다.
나를 잠깐 보던 진형 씨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마, 그때부터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아까는 그토록 원했던 술기운이 너무 늦게 내 부름에 응답한 기분이었다. 그다음엔 눈이 너무나 뻑뻑해졌다.
아, 이거는…… 이건 눈약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구나. 다른 이유의 아픔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 가며 꼭 눈꺼풀을 닫아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픔은 조금씩 더 심해졌다.
더는 앉아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선 씨에게 갔다. 말을 몇 마디 주고받았던 거 같은데 정말 죄송하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택시를 잡으려고 승강장으로 향하며 알아차린 게 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진형 씨 목소리를 못 들었구나.
한 번도 내 옆으로 오지 않았구나.
생각해 보면, 그동안은 항상 진형 씨가 맞이해 줬던 거 같다.
테이블 안내도 그렇고 주문도 그랬다. 가끔 이쪽으로 와서 필요한 거 없냐고도 물어봐 줬고, 또 아주 가끔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얼음물을 챙겨 주곤 했었다. 오늘은 진형 씨의 배려를 아마도 선호 씨랑 원길 씨가 번갈아 해 줬던 거 같다.
우리 둘은, 이제 원래의 자리로.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있어야 할 자리로.
그렇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나아졌다. 나는 늘 그랬듯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질 뿐이었고, 진형 씨 역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지내는 거다. 따지고 보면 진형 씨랑 접점이 생긴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거라고 여겨졌다.
나 같은 사람이랑 이렇게까지.
주변의 시선도 거슬렸을 거고, 무언가 진형 씨 스스로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들이 많았을 거였음에도. 그런데도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랑 이렇게나 긴 시간을 보내 줬다. 내게 진형 씨의 시간 일부분을 많이 할애해 줬다.
그러니까 나는 배부른 소리도, 고집 같은 것도 피우면 안 될 입장이다.
진형 씨한테 그동안 고맙고, 또 미안해서라도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기적은 단발성이다.
그러니 영원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렌즈……. 렌즈로 바꿔 볼까 했었는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에 푹 웃음이 났다.
내가 진형 씨의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은 헤아릴 수 없겠지만. 아마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 꼽게 하는 편이 더 빠르겠지만. 그럼에도 진형 씨는 언제나 딱 두 종류의 투덜거림만을 입에 담았다.
냉장고의 빈곤함. 그리고 안경.
내 안경을 벗기면서 투덜투덜하는 진형 씨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나는 진형 씨가 볼멘소리를 할 때 짓는 표정을 보는 것도 무척 기뻤으니까. 보기 드물었으니까. 늘 웃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진형 씨가 내 앞에서 연하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게 행복하기까지 했다.
〈세상에는 렌즈라는, 아주 편리한 게 있는데 왜 형은 이기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데요?〉
침대에서 날 안으며 그런 불만을 털어놓는 진형 씨에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안구 건조증이 너무 심해서 렌즈는 많이 불편해요.〉
그 뒤로 진형 씨가 렌즈를 하라거나 렌즈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일절 없어졌다.
다만, 아주 가끔 내 얼굴로 다가오다가 입술을 툭 내밀며 안경을 벗기는 일은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형이 키까지 작아서 각도 맞추기가 힘들다는 말뿐이었다. 어떤 각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진형 씨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었다.
그 웃는 얼굴도 아직 기억 속에서 선명한데.
나는 조용히 한숨 쉬고서 자리에 누웠다.
일감을 전부 처리했으니 당분간은 한가롭다. 바쁘면 자연스럽게 날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남들 자는 시간에 맞춰서 자려고 노력했다. 일이 없으니 딱히 할 것도 없다. 언제나 그렇듯 일상은 무료하고, 무척이나 느릿느릿 흘렀다. 진형 씨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제외하면.
앞으로도 〈웬즈데이〉에 발길을 옮길 것이다.
나를 보고 진형 씨가 전혀 불편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거였다. 그러니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주말이면 가게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많은 이들의 행복을 나눠 받고 싶었다.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행복해하는 연인을 보고. 그러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충족하고.
내가 할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부분은 이렇게 해결하는 게 좋았다. 진형 씨 말처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난 어쩐지 자신이 없다. 겁도 이렇게나 많고, 새로운 사람 대하는 것도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나는 이제 진형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며 눈부시다는 감각은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햇살 같은 사람들은 많지만. 보고만 있어도 에너지를 받는 것 같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누군가로 말미암아 눈이 부셔서 눈물이 쏟아질 거 같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생경한 이 감각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누군가와 격렬한 감정을 주고받으며 자기 자신의 몸을 태우는 일은 없겠지. 그래서 누군가로 하여금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게 하며 스스로를 잃는 일도 아마 벌어질 리 없다.
지금은 좀 무섭지만.
점점 내가 내 자신이 아니게 되어 가는 건 정말 무섭지만.
늘 그래 왔다는 건, 그게 가장 편안하고 그것에 가장 잘 적응했다는 증거니까.
그렇기에 돌아갈 수 있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끝난 기적 앞에서 꿈길을 좇아 걸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꿈은 깨어나기에 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