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소모 2권 @중독
Chapter 3
같이 샤워를 했다.
반쯤은 강제적이었다. 요구 조건은 ‘씻고 싶다.’였지 ‘혼자 씻고 싶다.’는 아니지 않았느냐는 말에 윤민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과 함께 그러자고 대답했다.
〈좁을 텐데. 둘이 같이 씻기엔 많이 좁은데.〉
몇 번이고 중얼거림을 들었지만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윤민과 교대로 들어가는 것보다 나란히 들어가는 것이 시간을 한결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진형은 일단 의식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머릿속에 담아 두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 사람은 처음이라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몸을 여는 날이라고.
윤민이 긴장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자기 자신도 조금쯤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첫날밤을 맞이하는 새색시의 옷고름을 푸는 심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새색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서른 넘도록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오늘 자기와 처음 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첫 경험에 나이는 상관없다. 누구라도 떨리고, 누구라도 반쯤 정신없기 마련이다.
그랬기에, 비록 미친놈처럼 들이닥치긴 했지만 최대한의 배려를 할 생각이었다.
씻는 것도 그렇다. ‘급하다.’라거나. ‘빨리하고 싶다.’라거나. 그런 말들을 하면 아마 윤민은 씻는 것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오늘 자기가 저돌적으로 구는 건 섹스의 승낙을 얻어 낼 때 정도면 충분했다. 역시 처음은 신경 쓸 게 많다고. 좀 번거롭다고.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지워 냈다. 그건 너무하다. 그딴 건 자기가 할 생각이 아니었다.
아까,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돌아서는 나를 잡은 걸까.
제법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그걸 지금 물으면 상황 자체가 몹시 어색해질 게 확실했다. 윤민에게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다. 한 마디로 분위기를 산산조각 낼 법한 질문이라는 거다. 그러니 굳이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계속 물어보지 못할 것만 같다. 오늘이 지나도, 시간이 많이 흐르고서도 줄곧 속으로만 궁금해하다가 끝날 것 같다.
샤워는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훌렁훌렁 거리낌 없이 옷을 벗어 던지는 진형에 비해 윤민은 엄청나게 느린 동작으로 티셔츠 하나를 벗었을 뿐이다. 느린 동작을 타박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의 드러난 상반신 때문에 놀라기 바빴다.
아까 안아 보고 알았다지만 역시 시각으로 확인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갈비뼈 부근부터 골반 위까지. 곡선이 예쁜, S라인의 허리는 당연히 기대 안 했다. 그런데 보통 남자들처럼 통짜 역시 아니다. 그야말로 말랐기에 허리 부근의 살이 파여 나간 것처럼 보이는 허리였다.
샤워라는 행위를 앞뒀고, 샤워 후 펼쳐질 행위 역시 인식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몸에 자연스럽게 맴돌던 기분 좋은 열기가 아주 조금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연달아 치고 올라왔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를 모르겠다.
〈여기서 조금만 더 살이 빠지면 기아 체험 포스터도 찍을 수 있겠어요.〉
진형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윤민이 멋쩍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웃음이 나와?〉
구박을 하고는 있지만 목소리에 독기가 없다는 걸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진형은 바지에 벗을까 말까 눈치를 보는 듯한 윤민 대신 직접 걸레짝 같은 바지를 벗겨 주었다. 이번에는 깡마른 다리가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완전히 굳은 채로 입만 뻐끔뻐끔 벌리는 걸 내버려 뒀다. 다음은 자기 부친 속옷 함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법한 촌스러운 체크무늬 사각팬티를 벗겼다.
윤민이 보통 사람들보다 음모를 포함해 체모가 전체적으로 옅고 숱이 없다는 것은 나중에 안아 가며 알게 됐다. 욕실에서 옷을 벗겨 낼 땐 차마 그런 정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나 왜소한 몸에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쉬기 바빴을 뿐이다.
앞으로 이 형이랑 저녁 좀 같이 먹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윤민은 먹는 것을 거를 때가 많고, 그런 생활을 아주 장기간 유지한 것처럼 보였다. 생활에 지장이 없게끔. 생명 유지만 적당히 될 만큼 음식을 섭취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제가 살이 원래 잘 안 붙어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이래요. 진형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제가 많이 안 챙겨 먹는 것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유전자 탓인 거 같아요. 부모님도 그렇고 외가나 친가 사람들 보면 다들 마르셨거든요.〉
마치 변명을 하는 듯한 목소리에 진형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남들이 들으면 질투 나서 죽을 거 같은, 잘 살리면 아주 좋은 유전자이긴 한데 형한테는 진짜 완벽하게 쓸모없는 유전자네요.〉
이때 다시 한번 마음을 굳혔다.
그래, 내가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저녁 같이 먹어 준다.
키스하며 나눴던 ‘빼 줄까요?’라는 대화는 윤민이 옷을 벗는 순간부터 기억에서 날아갔던 것 같다. 자꾸 몸을 움츠리며 구석으로 슬슬 뒷걸음질 치는 윤민을 잡아다가 더운물을 끼얹어 주었다. 상대적으로 윤민이 너무 겸연쩍어하고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되레 진형이 처음보다 많이 차분해지고 말았다.
안경도 없고, 쓰레기 같은 옷가지들도 없다. 덥수룩한 머리칼은 흠뻑 물기를 머금은 채 뺨과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때만큼은 진형도 불가항력으로 얼굴이 조금쯤 붉게 물들었다. 날아갔던 열기가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욕실에서 나와 바닥에 팽개쳐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려는 남자의 팔을 잡아채서 침대로 끌고 갔다. 눕혀지자마자 이불을 끌어당기는 윤민의 창백한 얼굴이 슬슬 벌겋게 변해 가고 있었다. 진형은 한 번 씩 웃고서 그 이불마저도 죄다 치워 버렸다.
일단은, 노골적인 섹스를 위해 성감을 부추기는 접촉이 있다는 걸 윤민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이 남자가 최근 타인과 나눴을 스킨십은 잘해 봐야 악수 정도일 듯하다. 그런 사람에게 대뜸 여러 단계를 건너뛴 것을 습득시켜야 했다. 누군가에게 막중한 임무라도 부여받은 느낌이다. 윤민의 것은 그새 시들어서 고개를 들 생각조차 안 한다. 긴장한 탓이다.
“으아, 앗!”
목덜미부터 겨드랑이의 여린 살, 젖꼭지 아래에서 배꼽 부근까지. 진형은 혀랑 손가락을 사용해 성심껏 빨고 주물렀다. 위쪽에서 색정적인 맛이 전혀 없는, 기겁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직 상반신에 불과하다. 부들거리는 하반신은 혀끝을 세워서 제대로 요리해 줄 생각이었다.
“아아, 이건 진짜…… 진형, 진형 씨, 읏, 정말로 좀…….”
본격적으로 떨리기 시작하는 윤민의 목소리 덕분에 진형 역시 손과 입술에서 장난기가 날아갔다. 처음에는 오로지 이 남자의 물건을 흥분으로 세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은 스스로를 점점 억누르는 쪽으로 바뀌었다. 눈앞의 귀두가 아직 젖지도 않았는데 자기 것부터 꼿꼿해지면 자존심이 상할 거 같다.
체구가 워낙 작은 탓일까. 입술과 손바닥이 누빌 수 있는 곳은 거의 다 누볐다. 하얀 살결에 타액이 발라지고 곳곳이 울긋불긋해졌어도 윤민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진형은 약간 낙심했지만 금세 털어 냈다. 그에게 맛보기 정도를 알려 줬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으읏……!”
진형이 온몸으로 작은 몸을 덮어 눌렀다. 양손으로 머리칼을 헤집고 젖은 뺨을 만져 주며 길고 진한 키스를 했다.
아까 키스했을 때 그의 것이 열기를 머금었었다. 그가 가장 흥분하고 좋아하는 접촉이 키스라면 굳이 빙빙 멀리 돌아갈 것은 없었다.
“흡, 아, 하으읍…….”
닿아 오는 시선에 몸을 크게 한 번 떨더니, 혀끝으로 입술을 두드리자 그 떨림이 더더욱 진해졌다. 살랑살랑 입술 사이를 노크하는 혀의 움직임에 입이 점차 크게 벌어졌다. 치과에서 ‘입 더 크게 벌리세요. 자꾸 오므리시면 개구기 넣을 거예요.’라고 들은 사람처럼 말이다.
진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쉽게 혀를 넣을 수 있었고, 위축된 살덩이를 미친 듯 빨 수 있어서 좋았다. 고의성이 아주 다분한 소리가 맞닿은 입술 주변에서 새어 나왔다. 쪽, 츄읍. 안을 빨고 타액을 마실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에 좁은 어깨가 간헐적으로 부들거렸다.
드디어 하반신 부근에서 윤민의 것이 조금씩 고개 들며 커지는 게 느껴졌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신호다.
“흐앗……!”
하반신을 좀 더 바싹 붙였다. 무릎을 세운 채 벌어져 있던 윤민의 다리가 허공에서 잠시 하느작거렸다.
“아, 아으, 우읏…… 잠, 진형, 잠깐, 읏, 무슨, 아앗……!”
진형은 당황하는 음성을 무시하며 허리 짓을 했다. 이미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자기 것과 그의 것이 밀착된 채 비벼졌다. 땀과 쿠퍼액으로 흠뻑 젖은 부분에서 질퍽질퍽 되직하고 음란한 소리가 났다.
미처 손을 아래로 뻗어 만져 줄 틈도 없었다. 직접적으로 성기에 가해지는 쾌감 탓에 윤민의 사정은 무척 빨랐다.
몸을 버르르 떨며 연거푸 쏟아지는 신음이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새하얀 얼굴은 이미 어디고 할 것 없이 불거진 채다. 처음 맛보는 쾌감에 흠씬 얻어맞은 그의 육신이 몇 번이고 부들거리며 잘게 전율했다.
“그렇게 좋았어요? 근데 난 아직이거든.”
“읏……!”
진형이 설핏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가느다란 다리 사이에 자세를 잡고서 망설임 없이 자기 것과 윤민의 것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가 열로 몽롱하던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겹쳐져서 문질러지는 느낌에 기절하는 것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쾌감 사이로 아찔함까지 더해지는 매 순간이 충격적인 듯했다. 그의 입에서는 거의 죽어 가는 신음과 비슷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 하아…… 앗, 으아아…….”
“기분이 나쁜 거야, 좋은 거야? 형, 시선 피하지 말고 나를 봐요. 여기 보라고.”
손짓도, 탄식 섞인 목소리도.
곧 펼쳐질 절정을 향해 쉼 없이 움직였다.
진형의 목소리에 이끌렸는지 옆으로 꺾어 두던 고개가 슬쩍 앞으로 돌아왔다. 그 얼굴이 보다 강한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를 보는 순간 자기 머릿속도 하얘지며 사정에 도달했다.
이 남자가 가는 모습을 봤다. 이 남자 역시 자기 사정을 눈앞에서 보게 됐다. 싸는 것만이 섹스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어쩐지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과 드디어 했다고.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울렸다.
기쁘기도 하고, 저질렀다 싶기도 했다.
묘한 성취감이 드는 와중에 윤민과 만난 첫날도 아주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제 막 오늘 할 섹스의 반 정도 온 거다. 그럼에도 어쩐지 만감이 교차했다.
윤민 역시 진형과 함께 두 번째 사정을 마치고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지 멍한 얼굴을 한 채였다. 아연한 눈길로 천장을 보다가, 이윽고 손에 꼭 쥔 주름 잡힌 시트를 보기도 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시선이 어쩐지 좀 불안한 듯 보였다.
이러니 쉴 틈을 주면 안 된다니까.
사정의 여운이야 이따 본격적인 것까지 제대로 다 해치우고서 느끼면 그만이다. 지금은 저 사람의 얼굴 구경이나 하면서 잡생각 같은 걸 할 때가 아니었다.
“읏, 사람들, 이, 하앗, 이런 걸, 아, 이런 거를 하고 산단 말이죠…….”
“네? 이런 거?”
오른손 엄지를 입 안에 넣고 타액을 흠뻑 묻히는 모습을 윤민이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점점 불꽃이 번진 것처럼 뜨거움으로 차올랐다. 음란한 소리가 짙어지고 커질 때마다 그 눈빛이 한층 달궈져 가는 듯했다.
진형은 이쪽을 보는 그 시선에 마치 서비스를 해 주듯 눈을 마주쳐 가며 쪽쪽 손가락을 빨았다. 질퍽질퍽한 소리까지는 가까스로 참는 듯했으나, 정성을 다해 빨아 댄 손가락이 안쪽 은밀한 곳을 눌러 오자 헉 소리와 함께 눈동자를 심하게 흔들어 댔다.
엄지가 부드러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구멍을 넓혀 나갔다. 구멍이 벌름댈 때마다 잔뜩 발라 놓은 타액과 사정액이 새지 않도록 안쪽 깊숙이 펴 발랐다.
아, 장난 아닌데. 풀어 주다가 내가 먼저 가겠어.
압박감이 상당했다. 손가락 하나 찔러 넣은 것뿐인데 사정한 지 얼마 안 된 자기 것이 그 감촉에 반응했다. 빨리 이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엄지가 안에서 원을 무리 없이 그리게 됐을 무렵,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손놀림이 다급함을 머금었다.
“아흣, 그, 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연인이나, 배우자랑…… 주기적으로 이걸 한다는 거잖아요…….”
진형이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키득 웃었다.
“그렇겠죠? 즐겁고 재미나게 섹스 라이프를 만끽하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엄지를 뺀 자리에 검지와 중지를 넣고서 휘젓던 진형이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열기가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지만 그 이상으로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문 역시 말끝에서 덕지덕지 묻어났다.
“하핫, 왜요?”
“무, 무서울 거 같아요…….”
윤민이 조금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누군가에게 이런 모습 보여 주기 싫을, 음, 저는 좀 무서울 거 같은데…….”
그럼 나는 형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이런 모습을 보여 줘도 괜찮다는 건가?
번뜩 든 생각에 기분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는 약간 신나기도 하고 들뜬 것도 같았는데 그게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충격적이기도 했다. 몹시 불안정한 그래프를 미친 듯 그려 대는 감정의 기복 때문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이래. 상관없잖아?
진형은 자기 자신에게 몇 번이고 말해 주었다.
그랬다. 상관없었다.
윤민이 따로 마음을 준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이 이 사람의 처음을 가졌으면 윤민이야 좋았겠지. 하지만 속으로 비웃음이 나오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다.
이 사람이 누굴 좋아하든,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 들키기 싫어하든.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그는 자기 앞에서 헐떡대고 있다. 잠시 뒤에는 안이 헐고 짓무를 때까지 이 구멍에 있는 힘껏 박아 대고 치댈 거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걸 원했기에 여기에 왔다. 다른 감정까지 생각하고, 그런 것에 놀라고 충격받는 것은 불필요한 짓이다.
내가 왜 충격을 받는데.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답을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억지스럽게 질문을 지웠다.
검지, 중지, 그리고 약지까지. 손가락 세 개가 안을 찌를 때마다 이물감과 생소한 통증으로 몸을 비트는 윤민의 표정을 꾸준히 관찰했다. 당장에라도 죽을 거 같던 표정이 이젠 그럭저럭 괜찮게 보일 때까지. 그가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해 줄 리도 없고 진형 역시 알기에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 신호를 받기까지 끊임없이 내벽을 더듬거리며 이곳저곳을 자극해 줄 뿐이다.
“흣…….”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신음을 참던 윤민이 어느 순간 비음을 흘렸다.
손길이 어떻게 몸을 주무르는지. 구멍이 어떤 식으로 매만져지고 파여 가는지. 온 신경을 사용해 그 흔적들을 쫓고 또 쫓은 몸은 금방 피로해졌을 거다. 진형이 잠시 놓아준 신체는 순식간에 나른해진 듯 축 처진 채 시트에 묻힐 듯 잠겨 있다.
“왜 그렇게 봐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윤민의 시선 끝에 콘돔을 씌우는 진형이 있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그 풍경을 보다가 이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몸을 부르르 떨어 가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아, 형 이거 쓴 적 있나? 궁금하면 형도 해 줄까요?”
진형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사코 도리질을 했다. 저렇게 기겁까지 할 정도인가 싶지만, 반응 자체는 꽤 귀여웠기에 한 번 더 웃음을 흘렸다.
손가락을 먹어 치웠던 구멍은 아주 잠깐이 흘렀음에도 금세 입구를 앙다물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주름의 틈 사이로 다시 한번 손가락을 넣고서 안쪽의 촉촉함을 확인했다. 조금 버거울 거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진입에만 성공하면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섰다.
“여기다, 이제 내 걸 넣을 건데…….”
“으, 으읏.”
“혹시 무서워요?”
무섭다고 하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며 달래 주긴 할 거다. 하지만 물러섬은 없다. 무수히 많은 시간 공을 들여서 열매를 붉고 다디달게 익혔다. 그걸 코앞에 두고 후퇴를 하는 상황 따윈 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윤민이 이윽고 고개를 서서히 저었다.
그의 눈동자는 고갯짓 이상으로 무언가 더 많은 말을 했으나 그걸 꼼꼼히 들어 줄 여유가 이제 손끝만큼도 남아 있질 않았다.
“흐…… 흐읏, 흐아앗, 흣, 으윽…….”
귀두를 조금 밀어 넣었을 땐 생경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던 얼굴이 시간이 지나자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윤민이 숨조차 멎을 것 같은 통증으로 싸울 때, 진형은 머리털이 설 정도로 강렬한 아찔함과 싸웠다. 뜨거운 내부를 조금씩 침범할 때마다 신음이 터질 정도로 굉장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그가 느끼는 고통까지는 아니지만, 진형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우와, 정말 장난이 아니네.
당장에라도 난폭하게 이 안을 거침없이 뚫고서 몇 번이고 허리를 놀리고 싶었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구멍을 파먹으며 전신이 마비될 때까지 움직이면 좋을 거 같았다.
잠깐 사이에 벼락처럼 머리통을 울려 대는 충동을 참는 것도 엄청나게 버티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직하리만치 허리 짓을 참고 있으니 윤민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물론 진형 그 자신은 죽을 거 같았어도.
시간이 약인 건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랗고 거센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며 구멍이 자기 것을 기억하기까지 기다렸다. 내벽이 성기에 적응하고 변해 가는 게 서서히 느껴져 왔다. 내벽이 꿈틀거리며 이 이상의 움직임을 허락할 때. 기다려 왔던 바로 그 순간.
진형은 더 참지 않았다.
이미, 참을 수도 없다.
오랜 시간 공들여 풀어 준 구멍이 오물오물 성기를 물어 왔다. 엄청난 압박감에 숨이 막히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기분 좋았다. 안쪽으로 파고들 때마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안쪽의 열기가 머릿속을 태웠다.
깊게, 더 깊게.
허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성기가 안을 매섭게 찌를 때마다 가냘픈 흐느낌이 귓가에 들려왔다. 통증보다 열기가 느껴지는 호흡을 듣고 있자니 더더욱 거리낄 게 없어졌다.
“흐, 하앗, 아아, 아, 앗!”
“어때요, 형? 좋지 않아요?”
촘촘한 내벽을 인정사정없이 파먹고 있어도 부족했다. 진형은 허전함을 채우듯 거세게 율동했다. 안에서 시시각각 굵어지는 흉포한 성기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윤민이 눈을 크게 떠올렸다.
“흐, 으읏, 아직, 세게 움직이, 잠깐, 아…… 아으으…….”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거라고.”
“하으, 하, 아아아…….”
많은 감정이 뒤섞인 신음을 간헐적으로 흘리는 윤민을 내려다봤다. 마음에 들었다. 평소처럼 반쯤 정신을 빼놓은 채 멍하니 있는 것보다 이 표정이 훨씬 좋다. 열을 가득 머금고서 토하듯 뜨겁게 호흡하는 입술도 먹음직스러웠다.
“이제, 형은 맛을 봤지.”
“흐, 아, 안, 으으…… 읏! 으읏, 우으읏…….”
“잊을 수 없을 거야. 오늘 맛본 이걸.”
“하지, 그런 말, 앗, 흐으읏…….”
“내일부터 형은 자다가도 이 맛이 생각나겠죠. 씻다가도 생각나고, 먹다가도 생각날걸. 형처럼 섹스를 안 하고 사는 사람은 있겠지. 하지만 한 번만 한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 이제 형도 후자라는 거야.”
진형이 팔을 내려 이어진 접합부를 더듬었다.
“앞으로는 여기가.”
“아, 아앗! 아아아……! 지, 진형, 진형 씨, 만지면 안, 아, 그러지, 안, 아…… 흐읏!”
두 손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애원하는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진형은 무시했다. 허리를 숙여서 그가 미처 삼키지 못하고 흘려보낸 타액을 핥아 줄 뿐이었다.
“이 구멍이 형에게 뭘 좀 쑤셔 넣어 달라고 할 거야. 왜 굵고 뜨거운 걸 제때 먹여 주지 않냐고 시도 때도 없이 항의도 하겠지?”
“하아, 흣, 아아아…… 흣, 으흡…….”
어찌어찌 버티던 윤민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창피함과 수치심으로 벌벌 온몸을 떨어 가며 눈물을 흘렸다. 이 얼굴을 보려고 서너 마디는 더한 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볼 수 있었다.
진형이 만족스러움으로 웃었다.
우는 얼굴 역시 상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양손으로 흔들리는 손목을 붙잡아 그대로 베개에 고정했다.
“왜 울어. 좋아해야지. 사람들 다 하고 사는 걸 이제 형도 맛봤는데 기쁘지 않아요?”
일부러 울린 주제에 잘도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진형은 속으로 쓰게 웃으며 울음을 위로하듯 눈가를 입술로 훑어 주었다. 오열로 한껏 젖은 눈동자가 조금 안쓰러웠다.
“무서, 흐윽…… 무서워요.”
“내가 무서워?”
“아니, 진형 씨가, 읏, 아니라…….”
“그럼.”
어서 말해 보라는 신호를 주듯 턱짓하자, 윤민이 헐떡거림과 함께 간신히 목소리를 낸다.
“진형 씨가 말한, 말하는, 흐읏, 사람처럼 제가, 그렇게 변할까, 봐…… 웃, 무서, 무서워요…….”
“그게 왜 무서워.”
“싫어, 그런 건…… 싫어요…….”
창피함도, 수치심도 없다.
정말로 싫어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섭다는 말도 한없는 진심이다. 진형은 일순 속이 철렁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왜요.”
“혼자라고, 좀 외로운 거, 같다고…… 느끼는 순간, 읏, 더 많아질 것 같, 그런, 그건…… 무서, 무서워요…….”
“하…….”
양 손목을 거머쥔 손가락에 괜스레 힘이 들어갔다.
흠뻑 젖은 눈동자를 보면서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기보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단어를 잘 고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달콤한 말도 할 수 있을 거고, 틀에 박힌 웃음 몇 번 지어 주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섭다고 우는 이 사람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손목을 놓아주었다. 대신, 시트와 젖은 등 사이에 팔을 밀어 넣고서 작은 어깨를 꼭 안아 주었다.
이어진 곳이 더욱 깊게 맞물리자 윤민이 읏,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귓가에 선명히 들려오는 호흡에 귀 기울이며 진형은 바로 보이는 뺨과 관자놀이에 입술을 비볐다.
“무서움도 잊고, 방금 내가 한 말도 잊어버려.”
잠시간 침묵하던 진형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진형 씨…….”
“지금은 나만 봐. 내가 어떤 얼굴로 느끼는지 보고, 당신 안에서 어떤 표정으로 가는지만 보라고. 알았어요?”
끄덕끄덕.
윤민이 대답 대신 두어 번 고개를 흔들며 어설피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마주 웃고서 땀방울이 맺힌 이마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오늘 나랑 이것저것 처음 하는 거니까. 나중에 형이 이날을 떠올릴 때 적어도 나쁜 날은 아니었다고 기억되게 해야지. 뭐, 앞으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도 하겠지만 기왕이면 처음 기억이 좋…….”
진형이 말끝을 흐렸다. 점점 짜증이 나고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났다. 그러자 저절로 꺼내려던 말들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지, 진형 씨…… 왜, 읏, 왜 그래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정색하는 얼굴에 윤민이 멈칫멈칫 눈치를 봤다. 오늘 이 집에 쳐들어와서 단 한 번도 웃음을 꾸민 적 없었지만, 지금은 그게 절실히 필요했다. 지금 자기가 지었을 표정이 얼추 상상 갔다. 이런 건 윤민에게 보여 줄 것이 되질 못 한다.
“방금 거 취소.”
“네?”
“취소. 지금 내 말 잊어요.”
“으, 아, 알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수다 떨 때도 아닌데.”
장난스럽게 허리를 움직이자 윤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베개를 쥐었다가 시트로 넣었다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양팔을 바라보며 진형이 턱을 치켰다.
“여기서는 내 목에 감아야지.”
“으…….”
진형이 눈을 흘기며 삐뚜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아, 아니요!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럼 왜 망설여.”
“읏.”
마른 두 팔이 천천히 목에 감겼다. 눈알을 굴려 요리조리 시선을 피하는 남자 덕분에 슬쩍 웃음이 났다.
바로 이거다. 이런 게 간지럽다는 거다.
긴장으로 좀처럼 열리지 않던 구멍을 한계까지 넓히고 늘릴 때, 윤민은 뜨거움보다 낯설고 생소함으로 신음했다. 겁을 먹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해 본 감각을 어떻게든 참고 견딜 생각만이 전부인 듯했다.
난생처음으로 구멍을 사용했다고. 아래로 남자의 성기를 먹었다고. 진형이 생각하기에 그런 사실을 훨씬 더 크고 강렬하게 여길 것 같았는데 윤민은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았다. 지켜보고 있자니 점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가까운 곳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껴안고서 체온을 나누고, 장난기 묻어나는 대화를 원 없이 나누고.
윤민은 한없이 자잘한 것에 더 크게 반응했고 얼굴을 붉혔다. 그게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또 마음 한쪽을 쿡쿡 찌르는 게 있었다.
진형이 작은 몸을 꽉 안은 채 천천히 허리 짓을 했다. 목을 끌어안고서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 남자의 숨이 귓가를 희미하게 덥혀 왔다.
“하, 후우, 후아아…….”
“움직이면 아직 힘든가?”
“으, 아, 아니요. 괜찮아요.”
“내가 형 안에 있는 건 느껴져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끌어안은 어깨가 부들 떨렸지만,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들을 수 있었다.
“아주 잘, 느껴져요.”
“조금씩 이렇게, 흔들면.”
“흣! 으으, 아, 웃, 더 커지, 으읏!”
“그래요, 더 커졌어. 잘 느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네.”
“저, 하아, 진형 씨, 하으, 한테, 거짓말, 아, 안 해요…….”
“그럼 나도 안 할게.”
앞으로 당신 신음에 통증보다 희열이 더 많이 묻어날 때까지 박을 거라고. 마음 같아서야 섹스가 처음인 당신에게도 나름의 천국 관광을 시켜 주고 싶지만, 그게 무리라면 적어도 정신을 쏙 빼놓고 아무 생각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거라고. 어느 순간 자제심이 사라져서 강하게 처넣을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하라고.
나도 오늘 이 순간이 머릿속에서 그리 쉽게 지워지진 않을 것 같다고도.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이 말들을 하긴 할 거였다. 하고도 싶었다. 말 한마디에 변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은 즐거우니까. ‘귀엽다.’라고. 처음에는 저항감이 들던 그 느낌도 이젠 몇 번이고 머릿속을 어지럽게 할 만큼 떠오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입에 담는 것보다 키스가 하고 싶었다. 윤민이 내뱉는 달뜬 신음이 바깥으로 흐르는 게 아까울 지경이다. 모조리, 남김없이. 자기가 죄다 먹어 치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Another Chapter 1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잠에서 깨어난 지 꽤 됐다. 다만, 진형 씨가 허리를 꽉 끌어안은 통에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체를 일으킨 지금도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미약하게나마 힘이 들어간 팔은 여전히 내 허리에 감겨 있었다. 고개를 내려서 그 팔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목덜미가 뜨끈뜨끈 붉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허리며 등이며, 전신이 시큰거렸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나 목이 말랐다. 진형 씨가 침대 옆에 놓아 주었던 생수통은 아까 몇 번이고 마신 끝에 이미 비었다.
아쉽게 빈 병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슬쩍 베란다로 시선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본 창밖은 보랏빛이었지만 지금은 연하디연한 노랑이다.
〈알람 소리 못 들으면 큰일인데.〉
자기 전에 진형 씨가 걱정하는 걸 들었다. 진형 씨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내 휴대폰도 알람을 맞췄다. 두 개가 동시에 울리면 누군가는 일어나서 알람을 끄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진형 씨가 환하게 웃으며 볼에 살짝 입을 맞춰 왔다.
난 좀 얼어붙었고, 그게 끝나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진형 씨가 내 얼굴을 보면서 더 밝게 웃어 주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잘 몰랐지만, 진형 씨가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형 씨, 걱정하지 말고 푹 자요. 알람 소리는 내가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곤히 잠든 옆얼굴을 보고 마음속으로 소곤거렸다. 속으로는 진형 씨에게 많은 말을 한 거 같은데 정작 얼굴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의 반도 전하지 못한 거 같다.
이러고 있으니 진형 씨를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무더운 날이었다. 〈웬즈데이〉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차디찬 맥주로 조금쯤 더위를 식힐 무렵이었다. 정문이 열리고 왁자지껄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 진형 씨가 있었다.
새하얀 스니커즈. 한쪽 무릎이 훤히 보이고 이곳저곳 트임이 난 청바지. 영문 레터링이 큼지막이 들어간 티셔츠. 길쭉한 다리에서부터 위로 차근차근 올라가던 시선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멈췄다. 음악과 말소리로 시끄러웠던 소음이 단숨에 잦아들었다. 그때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직 진형 씨만 보였다.
매끈한 이마와 잘 정리된 짙은 눈썹을 멍청히 바라봤었다. 골격이 또렷한 얼굴 위를 수놓은 눈 코 입을 마치 눈에 새길 것처럼 응시하게 됐다. 옆으로 길게 뻗은 눈매와 오뚝하고 맵시 좋은 콧날, 도톰하고 큼직한 입술과 반듯하게 딱 떨어지는 턱선.
전체적으로 몹시 화사한 인상이었다. 잿빛과 보랏빛이 섞인 독특한 머리색과 농염한 용모는 마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여 가며 일부러 진형 씨가 앉은 테이블 근처를 지나쳤다. 운 좋게도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주변에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듯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자기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에 들릴 거 같다는 걱정마저 하게 될 정도였다. 그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숨이 가빠올 정도로.
그 후로도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진형 씨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사람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훤칠한 신장에 얼굴까지 화려하니 항상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봐도 눈부셨다. 햇살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형 씨만 바라봐도 그 주변의 모든 풍경마저 반짝반짝 빛났다.
진형 씨는 징이 잔뜩 박힌 재킷을 입을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셔츠와 팬츠를 단정하게 갖춰 입기도 했다. 어쨌든 진형 씨는 뭘 입어도 태가 났다.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속으로 ‘오늘 입은 것도 멋있다.’, ‘언제 봐도 예쁘다.’라고 골백번 읊조리며 진형 씨를 훔쳐보는 나날을 지금 이때까지 보내왔다.
손가락으로 진형 씨 머리칼을 매만져 봤다.
부드러웠다.
그러고 보니 앞머리를 내린 모습은 오늘 처음 보았다. 늘 왁스로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를 보다가 베개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진형 씨의 모르는 모습들을 많이 보았다. 나도 이상한 얼굴을 많이 들키긴 했지만, 진형 씨의 첫 모습과 교환한 거라고 생각하면 꽤 괜찮은 거 아니었나 싶다.
보드라운 머리를 만지작대던 손가락이 무심코 귓가에 닿았다.
반짝반짝. 이 귀걸이의 주인처럼 빛을 머금은 쇠붙이를 손끝으로 아주 살짝 쓸어 봤다.
언젠가 보았던 풍경 속 남자처럼.
그 풍경을 바라본 처음도, 그걸 떠올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저 ‘잘 어울린다.’라는 마음뿐이다. 그 감상에 괜히 내 사사로운 감정까지 섞을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어야 했다.
자신은 없지만 아마 진형 씨에게 들키지 않을 수는 있을 거 같다. 지금까지 많은 고비가 있었음에도 충분히 잘 넘겼다.
오늘 일이 우리의 사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진형 씨랑 웃으면서 볼 수 있다면 좋을 거 같다. 꽤 큰 욕심인 거 같긴 하다. 당장은 진형 씨가 어떤 식으로 나를 대할지 감이 잘 오지 않으니까 욕심이라도 크게 가져 보고 싶다.
처음으로 대화를 한 날.
진형 씨에게 합석을 권한 건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술을 좀 마셨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진형 씨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 합석을 권한 게 아니었냐고 물어봤지만 절대로 그런 마음은 없었다. 자리가 없어서 곤란해 보이는 진형 씨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으로 권했던 거였는데.
어차피 나 같은 건 별 관심도 없을 테니까.
내 테이블에는 짐이나 올려 두고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연락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말을 걸어 오는 진형 씨 때문에 당황했다. 어쩌면 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보다 꽤 취했구나. 하긴. 오늘 너무 마시긴 했다. 그럼 내가 혹시 〈웬즈데이〉 테이블에 엎어진 게 아닐까. 만약 그게 맞는다면 직원분들께 엄청난 폐를 끼치고 있겠구나. 더 폐를 끼치기 전에 일어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해 나가는 과정도 벅차디벅찼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못 하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 와중에도 눈앞에 앉아 내게 웃어 주는 진형 씨 얼굴이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왈칵 마음이 뜨거워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노멀이나 유부남인 거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신이라고. 이게 정말 꿈이라고 해도 말할 수 없었어요.
진형 씨.
난 오래전부터 진형 씨를 봤어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웃고 있는 얼굴도 봤고, 누군가와 나란히 〈웬즈데이〉 정문을 나서는 얼굴도 바라봤어요. 진형 씨랑 함께 나가는 사람은 자주 바뀌었지만 다들 진형 씨랑 굉장히 잘 어울려서 저도 행복했어요.
계속 그렇게 행복했는데.
그냥 행복할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어느 순간 진형 씨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면서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덕분에 제가 진형 씨를, 다른 분이나 다른 커플을 볼 때와는 다른 감정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고, 달라지는 것도 좀 무서워서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마음속으로 말을 해 봤다.
진형 씨에게 직접 말할 일은 앞으로도 없겠지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혼자서 중얼거리는 건 꽤 도움이 됐다. 내 감정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어느 부근까지 도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매일 감정을 소모한다.
혼자서.
그것만으로도 이따금 감당이 안 되는 기분이 들곤 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 감정을 들키거나 주체하지 못하고 말해 버린다면. 그땐 정말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덧대어지는 건 필요 없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 누군가 때문에 고민한다는 건 너무나도 많은 기력을 소비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가슴에 담기에 아슬아슬하고 커다랗다.
혼자만의 감정은 혼자 안으면 그만이다.
이 감정을 전하거나 들켜서, 그게 졸지에 내 문제만이 아니게 되어 버리면 감정의 소모는 더 커질 것이다.
체온을 머금은 귀걸이는 따뜻했지만 어쩐지 손끝이 조금 차가워졌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귓가에서 손을 거뒀다. 허리에 둘린 팔을 양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아 보자 체온이 느껴졌다. 진형 씨는 만져 보면 무척 따듯한 느낌이 들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상상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으로 끝났던 얘기가 오늘은 현실이 됐다.
신기하지만 역시 좀 무섭기도 하다.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지었던 상황들이 하나둘 덜컥 눈앞에서 벌어지면 다들 이런 감정을 느낄까? 타인의 마음까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마음 놓고 무작정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진형 씨가 들이닥쳤을 때부터 정신이 없었다. 콘돔 상자를 받았을 때도, 나와 쓰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나중에는 이게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계속 의심하게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지지?
다시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진형 씨에게 그 마음, 접으라는 말을 들었었다.
물론 진형 씨가 오해를 해서 한 말이었다. 내가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품었다고 착각을 해서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더 낫다고 조언해 준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진형 씨.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노멀이든, 유부남이든.
아니면 진형 씨이든.
진형 씨가 말했던 것처럼 ‘어차피 가망 없는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게 달라지진 않죠. 그게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변함없이 이런 생각을 할 것 같아요.
그 당사자에게 마음을 접으라고 들었지만. 시간 낭비라고도 듣긴 했지만.
나는 앞으로 늘 그래 왔듯 어느 순간 가슴을 주기적으로 채우는 이 감정을 떨치지 못하고 유지할 거다. 주말에는 커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얻는 것도 달라지지 않겠지. 그래도 좋다. 지금의 이런 내 모습이 스스로 잘 어울리고, 나 자신에게도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니까.
허튼 꿈은 꾸지 않는 편이 좋고, 그런 꿈을 꿀 시간에 좋은 것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여러 가지 마음고생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바꾸는 것보다는 지금에 안주하는 것이 더 나은 사람도 있다.
그게 나였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나는 이게 스스로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심지어 평생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좋을 거 같다고 여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진형 씨에게 호감을 가진 채로, 진형 씨가 남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적당히 선을 유지하면서, 이따금 좋아하는 술도 마시고 행복해하는 커플들도 바라보면서. 그런 식으로 내가 행복하면 좋을, 내가 가장 편안해하는 인생을 살 거였다.
그런 삶을 살 생각이었는데.
“왜…….”
아차, 싶어서 빨리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너무 집중했는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렀다.
왜 진형 씨를 잡았지?
모르겠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머리를 싸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관계가 서먹해지는 걸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서로 등지고 나면 나중에 얼굴 볼 때 어색할 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을 수도 있다.
아니지. 지금도 진형 씨가 내게 다가오면 마냥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그 짧은 순간에 서먹함이나 어색함을 염려했을 리가 없다. 진형 씨가 불현듯 내게 다가오는 건 그저 잠깐의 호기심일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없을 게 분명하고 장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도 모르는 마당에, 사이가 벌어질 걸 걱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정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역시 어렵다. 해 보지 않은 것으로 고민을 한다는 건.
인생에 없을 일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를 진형 씨 덕분에 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말을 걸어 준다거나, 좋아하는 사람의 몸을 끌어안는다거나. 그런 건 나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역시 신기한 것투성이다.
요즘 일상은 신기함을 위주로 돌아간다.
나는 침대 옆 협탁에 놓았던 휴대폰을 소리 죽여 손에 쥐었다. 알람이 울릴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다. 이 조용한 집에 기계음이 동시에 울리면 너무나 시끄럽겠지. 어쩌면 진형 씨가 인상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진형 씨가 기계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 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깨를 흔들어서 깨우기로 결심했다.
곤히 자는 얼굴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반짝반짝.
진형 씨를 볼 때마다 내 조그맣고 소심한 마음에 빛이 깃드는 기분이다. 마음대로 빛을 나눠 받아서 미안하지만, 아주 조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빛을 많이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니까. 누군가에게 빛을 많이 나눠 받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휴대폰의 알람을 껐다.
진형 씨 것도 끄고 싶었지만, 그의 물건에 완벽한 ‘타인’인 내가 손을 대는 것조차 미안해서 그것은 내버려 둘까 싶다. 당연히 잠금 키가 걸려 있겠지. 그걸 확인하려면 역시 그의 휴대폰을 손에 쥐어야 했기에 포기하고 만다.
진형 씨, 이젠 정말 일어나야 할 시간이에요.
나는 목소리가 나지 않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마음으로 말했다. 역시 진형 씨는 푹 잠든 채 내 허리만을 끌어안고 있다. 자꾸자꾸 보다 보니 귀여워져서 나도 모르게 또다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푸르게 빛나는 이 머리카락이 참 좋다. 진형 씨랑 잘 어울려서 좋고, 진형 씨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것이기에 좋다.
조심조심, 부드럽게.
얼마 남지 않은 이 몇 분 동안만, 아주 잠시만.
두 손바닥으로 진형 씨의 머리를 살짝 덮어 주듯 쓰다듬었다.
진형 씨를 깨워야 할 시간이 다가오지만.
진형 씨가 눈을 뜨고 난 뒤 우리가 어떤 말을 주고받을지 겁도 조금쯤 났지만.
웃어 줬으면.
언제나처럼.
그 미소가 비록 동정이나 연민으로 지어진 웃음이라도.
진형 씨가 웃어 주면 나는 그걸로 좋으니까.
오늘도 진형 씨가 웃는 걸 볼 수 있었다고, 마음껏 행복해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