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막차는 옛적에 끊기고야 말았다.
진형은 무심코 테이블 구석에 쌓인 빈 병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테이블로 와서 빈 접시와 병을 치워 주는 선호가 아니었더라면 이것보다 훨씬 더 쌓여 있었을 거다.
시간이 시간이기에 공간을 빈틈없이 차지하던 사람들도 제법 많이 빠지고 없었다. 다들 자리를 옮겨 마시러 가거나, 누군가와 밤을 지새우러 가거나, 혹은 혼자서 집에 가거나. 어찌 됐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보다 문밖으로 나가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아마 앞으로 한 시간만 지나면 지금보다 더 한산해질 거다. 슬슬 첫차가 다닐 시간이다. 막차 행 결심이 졸지에 첫차 행으로 변해 버렸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진형은 지금 제법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술다운 술을 마셔서 그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눈앞의 윤민이 재미있었다.
윤민은 지금껏 주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타입이었다.
스타일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격 역시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과 합석하여 크리스마스이브에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역시 사람 일이란 내다볼 수가 없다.
가끔 이쪽과 눈앞의 남자를 번갈아 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행여나 그들이 자기와 이 사람이 막역한 사이라고 오해할 것 같아서 쪽팔리기까지 했다. 물론 대놓고 그런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고윤민. 며칠 뒤면 서른셋. 그래픽 디자이너. 진형처럼 〈웬즈데이〉에 도착하고 나서야 오늘이, 아니 어제가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것을 알게 됐음.
몇 시간 동안 잔뜩 떠든 거 같은데 지금까지 윤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게 고작이었다.
그가 궁금해하든 말든, 물어보든 말든. 진형은 윤민에게 이런저런 말을 꺼냈다. 현재 휴학생이라는 것과, 한 달 전 자기치고 꽤 장기간 관계를 지속했던 섹스파트너와 드디어 갈 길 갔다는 정보까지 덧붙여 주었다.
윤민은 별 시답지도 않은 소리까지 열심히 들어 주었다.
적어도 진형이 느끼기엔 그랬다. 멍해 보이는 얼굴은 그냥 타고난 듯했다. 정신이 딴 곳에 팔린 것도 아니다. 네가 뭐라고 하든지 난 무시할 테다, 하는 식의 태도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꾸도 하면서 무슨 말을 해도 귀를 기울였다.
“슬슬 형 연애담이 듣고 싶은데요. 계속 나만 얘기했잖아.”
어느덧 호칭은 형이 되어 있었다. 말투에도 은근슬쩍 반말이 섞여 들어 갔다. 그럼에도 윤민은 불쾌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쪽으로는 할 얘기가 정말 없어서요.”
“왜요? 형 설마…… 사람이랑 연애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거나, 섹스를 어떻게 했었는지 감도 오질 않는다거나. 그런 가슴 아픈 얘기는 하지 마. 오늘은 크리스마스라고요.”
진형도 밑 빠진 독처럼 술에 강하긴 했지만 그건 윤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서로 꽤 많은 술병을 비웠으나 그의 말투는 여전히 또렷했다. 이쪽이야 취할 틈도 없이 떠드느라 그렇다지만, 묵묵히 술잔을 비우는 윤민은 술의 강자처럼 보였다. 술고래라는 별명을 붙여 줘도 아깝지 않다.
일정한 간격으로 비워지는 술잔을 보며 진형은 내심 감탄했다. 햇볕에 노출된 적이 별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창백한 뺨이 알코올 기운으로 붉게 물들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마셔야 하는 걸까. 어쩌면 몇 병을 마신다고 한들 그런 얼굴은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아, 형. 말씀 낮추세요. 편하게 해요.”
진형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윤민이 눈을 정신없이 끔뻑거리며 느릿느릿 대답을 꺼냈다.
“그건 좀, 전 반말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문제…….”
예상하지 못한 말에 진형이 박장대소했다.
“왜요? 내가 불편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워낙 좀…… 서툴러요. 노력은 해 보겠지만 자신은 없어요.”
말을 낮추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이 없다는 덧붙임까지 듣고 나니 더더욱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진형은 이 자리가 점점 더 즐거워졌다. 술기운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잘은 몰라도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를, 굉장히 재미있는 놀잇감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은 먹잇감.
“그럼 그건 양보할 테니까 형도 너무 철벽 치지 마요. 가장 최근에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최근에 만난 사람?”
윤민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진형은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에 속으로 혀를 찼다.
기억을 되짚고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라고?
그렇게나 오래된 건가. 하긴. 저 말도 안 되는 옷을 시작으로, 머리며 안경이며 당장 바꿔야 할 게 수두룩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꾸밀 줄 알아야 사람의 호감도 사고 그럴 텐데 말이다. 외적 모습은 중요하다.
“아마도 윤 팀장님.”
몇 분이 흐르고서 나온 대답이 바로 이거다. 저도 모르게 절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 나간다.
“네?”
“1주일 전이었나……. 기획안 때문에, 아, 근데, 저기, 이거 아직 외부 발설하면 안 되는 단계라서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윤민에게는 미안했으나 진형은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시원스레 웃어 버리는 진형을 윤민은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한 것뿐인데 왜 웃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거 말고요, 형. 일 말고 연애요. 우리 연애 얘기 하던 중이었잖아.”
“아아…….”
그제야 대답이 몹시 엇나갔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윤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설핏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형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도 느꼈지만, 윤민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 중에 자꾸 마음을 치고 올라오는 몇 개가 있다. 저걸 잘 살렸더라면 이 구역의 내로라하는 바텀으로 군림했을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일단은 저 안경부터 때려치워야 얘기가 되겠지.
말도 안 되는 욕망을 가로막듯 재빨리 딴생각을 했다. 진형은 몇 번을 봐도 촌스럽기 그지없는 안경테를 보며 입술을 축였다.
“그쪽으로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요.”
“어? 형, 철벽 치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내가 지금 지뢰 밟은 건가? 입에 올리거나 기억을 떠올리면 당장 죽고 싶어질 거 같은 추억이에요?”
“네?”
“얼마나 이상하게 쫑 났으면 계속 말하기 싫어하고.”
“아…… 음.”
“아, 혹시 지금 내가 너무 캐묻나요? 미안해요, 형. 곤란하게 해서.”
진형의 말에 굼뜨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던 윤민이 핫, 하는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여러 번 가로저었다.
“아니, 어, 진짜 그런 게 아니라 정말이에요.”
“네?”
너무 두서없다. 이해가 잘 가지 않아 반문과 함께 헛웃음이 동시에 튀어 나갔다.
조용조용, 느릿느릿.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보통 사람들보다 시간이 걸리는 윤민이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를 내다니. 왜인지는 몰라도 그가 자기 말에 당황했다는 것만큼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여태까지 연애해 본 적 없어서, 그래서 할 얘기가 정말 하나도 없는 거예요.”
“…….”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떠들던 입술이 한숨과 함께 꾹 닫혔다.
계속 벌리고 있으면 한숨을 서너 번쯤은 더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속으로 계속 윤민의 스타일이나 외모에 대해 걸고넘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애 한 번 못 해 봤을 정도로 꽝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자기 기준으로는 시한 폭탄급이 맞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 사람보다 더 견적 안 나오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또, 되레 이 남자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의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기 마련일 텐데.
“한 번도?”
확인 사살은 미안했지만 도무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머릿속이 아찔하다. 일단은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세상에, 형.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천연기념물을 자처하고.”
진형이 쥐어짠 농담에 윤민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좀 버겁고…… 접할 기회도 많이 없었거든요. 이 나이 먹도록 안 해 봤으니까 이제는 겁도 나고요. 잘 모르는 걸 하는 건 어려운 거 같아요.”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딱하고 불쌍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윤민을 응시하게 됐다. 들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의 음성 자체가 워낙 여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형, 여기 다닌 지 얼마나 됐어요?”
“으음. 꽤 오래됐어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2, 3년?”
“목적은 술이에요? 아니, 그것보다 그렇게나 됐다고? 근데 왜 난 형을 본 기억이 없죠?”
“아, 저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윤민이 우물거리며 그다음을 망설였다.
대답하기 전까지 이쪽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고. 진형이 쏘아 대는 무언의 압박을 윤민도 느낀 게 분명했다. 그가 시선을 피하듯 고개 숙였다. 진형은 이제 재촉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조바심이 났다. 최대한 나긋이 웃으며 “저는?” 하고 들은 말을 고대로 되돌렸다.
“저는, 진형 씨를 자주 봤어요. 멀리서도 눈에 잘 들어와서요.”
드디어 흘러나온 대답에 맥이 풀렸다. 그나마 건진 건 오늘 처음으로 윤민이 진형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 정도다. 뭐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이토록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로 들어야 할 말이 전혀 아니다.
너무나 떨림이 가득한 음성이라 마치…….
“마치 사랑 고백이라도 들은 거 같네.”
진형의 중얼거림에 윤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다음, 그 많은 술이 들어가도 끄떡없던 윤민의 양 뺨이 빠른 속도로 붉어졌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웠어요, 형?”
눈앞의 변화에 진형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자니 무척 당황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기분 나빠 할 거 같아서.”
“내가요? 왜?”
“나 같이 별 볼 일 없는 아저씨가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혹시라도 마음 상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요.”
“아저씨? 하하하, 아저씨라니!”
오늘 이 사람이 몇 번이나 날 이렇게 웃게 했지?
윤민을 보고 있는 게, 윤민과 대화하는 게 어지간한 버라이어티 방송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오늘 이 사람과 얘기하면서 터졌던 웃음은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뚫고 나오는 거였다.
“형이랑 진짜 안 어울려, 아저씨라는 단어.”
“그래요?”
“그래요. 내가 아까 형 동안이라고 했었던 거 아부 같은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요즘에 서른둘 정도로 아저씨가 뭐예요? 아직 창창한 나인데.”
“그런가요.”
겸연쩍게 슬쩍 웃음 짓는 입술이 아까보다 한결 더 편안해 보였다. 그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며 진형은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과 한두 번 마주쳤던 거 같기도 하다.
만남이나 교류가 목적이 아닌 구석에 박혀서 술만 마시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엉뚱한 단골에 대해 얘기를 들었을 때, 진형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누군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지인 한 명이 자기가 알려 주겠다며 어떤 테이블을 가리켰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윤민의 행색은 그때도 오늘처럼 믿기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당연히 혼자 술 마실 만하다고 생각했다. 진형은 쓴웃음 한 번과 함께 윤민의 테이블을 바로 외면했다.
그날 그 사람이 윤민이었구나. 지금까지도 줄곧 단골이었던 거다. 사람은 관심 있는 것만 보인다더니 딱 그 짝이다. 수십 번 같은 공간에 있었을 게 분명함에도 그날 이후 윤민의 존재를 인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형, 여기 다니는 동안 연락처 같은 거 한 번도 안 오갔어요? 원나잇 나가자고 하는 건?”
진형의 물음에 윤민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없었어요.”
“뭐야. 형이 직원들한테 다 거절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만약 그렇다면 ‘안 되죠, 형. 그렇게 계기를 사전에 차단하니까 여태껏 연애 한 번 못 한 거잖아요.’ 하고 충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을 입으로 옮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직원들한테 그런 거 미리 거절해 달라고 할 수도 있나 봐요?”
“…….”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진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예상과 완전히 다른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이건 아니네. 빨리 다른 얘기를 해야겠어.
“그럼, 형. 연애 말고 사랑 얘기 해요.”
윤민이 이해가 안 갔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다른 거예요?”
“완전히 다르죠. 예를 들면 형이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능글맞은 목소리에 윤민이 순간적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 음.”
“어? 뭐야, 그 반응. 있구나?”
눈웃음을 샐쭉대며 놀림조로 중얼거렸다. 윤민이 아까 보았던 것처럼 볼을 연하게 물들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혹시 내가 이름 들으면 알 만한 사람인가? 여기 다녀요? 어떤 사람?”
“어떤 사람…….”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건 꽤 답답했다. 그럼에도 짜증이 나진 않았다. 아주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또 고르는 표정이 눈앞에 있으니 오히려 호기심이 들었다.
“제가 좋아하면 안 될 사람 같아요.”
이번에는 진형의 차례였다. 조금 전 윤민처럼 고개가 비스듬히 기운다.
좋아하면 안 될 거 같은 사람?
들은 대답을 괜스레 머릿속에서 되새김해 본다.
어? 아, 이 패턴, 이거 엄청나게 자주 있는, 하아…….
그랬다. 초반에 이런 식으로 운을 떼는 흐름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을 정도로 자주 겪었다. 주변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윤민과 똑같은 말을 내뱉고 고민 상담 혹은 하소연을 해 대곤 했다.
운이 좋은 건지, 지금 이때까지 자기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형도 그거구나?”
“네? 그거요?”
“유부남, 혹은 노멀에 마음 동하는 타입.”
“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감정이 폭주해서 정신 차려 보니 돌이킬 수 없어지는 쪽이거나. 혹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마음 놓고 불타오르다가 정신이 잿더미가 되는 쪽이거나. 형이 어느 쪽이든 절대로 좋은 취향은 아니네.”
윤민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형은 점점 눈앞의 남자가 딱해졌다.
이러니 줄곧 연애를 못 했을 만도 하다. 스타일도 미칠 노릇인데, 하물며 마음이 동하는 상대가 스트레이트라니.
“형, 접어요.”
“읏.”
진형의 딱 자른 말에 윤민의 어깨가 움찔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얼마만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뒤끝 안 좋아. 유부남이면 가정 파괴범이고 노멀이면 자기 학대의 끝판왕이라고요. 지금도 마음 편하진 않죠?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할 수도 없이 괴로움만으로 피폐해지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니까? 형도 모르는 거 아닐 거고.”
가만히 듣고만 있는 윤민의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인형같이 멍한 표정보다 훨씬 나았지만, 자기가 초면에 할 말 못 할 말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는 자각도 들었다. 노멀을 좋아한다는 고민 상담에 이 정도로 시원스럽게 말해 본 건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을 상대로 했을 때뿐이다.
어쩐지 윤민의 탓을 하고 싶어졌다. 그쪽이 가학성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인 게 나쁜 겁니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역시 접는 게 좋을까요.”
잠시 사이를 두고 흘러나온 말을 진형이 넙죽 받았다.
“당연하지, 형. 거기다가 애초에 가망 없는 사람한테 애정 쏟는 것도 시간 낭비의 일종이라는 거 알아요? 세상에 게이가 얼마나 많은데. 바이까지 더하면 더 많아지고. 보는 눈을 넓혀요, 형.”
“그런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저 같은 사람이랑 연애를 해 주겠어요.”
“에이, 형. 그 말은 좀 아니다. 연애는 누가 해 주는 게 아니지. 같이하는 거잖아요.”
진형은 딱 거기까지만 말할 수 있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입에 침을 발라도 ‘형이 뭐 어디가 어때서.’ 같은 말까지는 해 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윤민의 말을 듣고 있자니 본인도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있는 거 같다. 오가는 대화를 통해 그의 자존감이 밑바닥 수준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슬슬 연애해야죠, 형도. 그런 사람 다 때려치우고 괜찮은 게이 만나서요. 연애는 어지간한 사람들 한 번 이상 다 하는데, 그걸 형만 안 해 보면 손해잖아.”
진형이 눈가를 찡긋거리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윤민이 이윽고 천천히 미소 지으며 시선만으로 실내 풍경을 한 번 쓱 훑었다.
“저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던데요.”
“보는 것만으로도?”
들은 말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진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보충해 주듯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웬즈데이〉는 술 마시는 것보다도 사실, 다른 이유로 더 많이 오는 거 같아요.”
“다른 이유?”
“여기 계신 분들께 좀 미안한 얘긴데…….”
“뭔데요?”
진형의 기대된다는 눈초리가 심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윤민은 고개를 숙이고서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지켜봐요, 커플들을.”
“커플들을?”
“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연인끼리 손을 잡거나, 음, 머리를 쓰다듬거나. 여기선 눈치 볼 일이 없으니까 스킨십도 다들 자연스럽게 하시잖아요.”
“하죠.”
“전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아요.”
“…….”
이쪽이 지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한숨을 꾹 참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윤민은 마치 엄청난 비밀 얘기를 하는 사람처럼 볼마저 연하게 붉힌 채 말을 소곤소곤 이어 갔다.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다르잖아요.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들리진 않지만, 그렇지만 어쩐지 알 거 같기도 하고.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가끔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기도 하거든요. ……제가 몰래 훔쳐보는 게 너무 죄송하긴 해요. 그래도 보고 있으면 정말 좋아요. 저도 덩달아서 행복해지거든요.”
세상에. 뭐야, 이거? 그러니까, 커플들 애정 행각을 구경하러 여길 온다고?
진형은 최대한 억척스럽게 무표정을 유지했다. 여기서 마음을 놓는 순간 표정이 황당함으로 붕괴될 위기다.
누가 보면 자기 연애담을 읊는 사람처럼 간질간질한 표정을 해 대면서 하는 말이 정작 이거다. 하물며 윤민이 오늘 했던 말 중 가장 길게 한 게 이딴 거라니.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비밀 하나를 털어놨을지도 모르지만, 진형은 속으로 꽤 기겁했다. 여태까지 이런 사람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무척 음침하고 음울하게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도대체 왜 다른 커플을 훔쳐보며 기분이 좋아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형이 아무 말 없자 윤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거 이상하죠.”
그저 웃을 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이 당장 생각나질 않았다.
“저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해요. 제가 마치, 여기 오가는 커플들을 눈요기로 쓰는 거 같아서 너무 죄송스럽기도 하고.”
아니. 그건 너무나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는 말을 하는 내내 계속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오히려 헛웃음을 자아냈다. 진형은 단언할 수 있었다. 아마 여기 오는 커플들은 누구 하나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였다.
이 남자의 소심한 성격상 대놓고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도 아니었을 거다. 무엇보다 그의 존재감이란 실낱처럼 부질없다. 하물며 서로만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기 바쁜 커플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이나 썼을까.
속으로 탄식하던 진형이 슬쩍 입을 열었다.
“형, 저기 말이죠.”
“네?”
“나 솔직히 이해 안 가거든요? 형이 연애를 안 해 봐서 그런가. 그래서 마음으로 연애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걷잡을 수 없이 키우다가 이상한 취미 생활 하나 갖게 된 거 같은데.”
스리슬쩍 깔보고 업신여기는 게 저변에 깔린 말투에도 윤민은 전혀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 아니다. 그저 수줍다는 듯 멀겋게 웃을 뿐이었다.
“연애는 하는 거예요, 보는 게 아니라.”
“그게, 전 좀 달라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에요.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냥…… 음, 어느 순간 감정적인 부분이 충족되곤 해요.”
“나 진짜 이런 사람 처음이야!”
진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재잘거렸다.
“남들은 사람 많은 곳에서 닭살 떨 거면 가까운 모텔에 방 잡으라고 놀리는 게 고작이죠. 더 느껴지는 건 없고요. 형은 오히려 그런 걸 적극 반기면서 좋아하니.”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윤민은 무척 진지하게 대답했다.
“보기만 하면 제가 안 해도 되니까요.”
“뭐를 안 해요?”
“감정 소모.”
“…….”
진형의 입술이 꾹 닫혔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자주 말문이 막혀 본 적이 있던가? 없다. 이런 건 기억에 없는 일이다.
진형은 오늘 눈앞의 남자 덕분에 이 상황을 매우 여러 번 겪었다. 술도 어느 정도 들어갔기에 가뜩이나 얼얼한 머릿속이 더더욱 멍해져 갔다.
“세상에는 많은 연애가 있어요. 노래에도 있고요, 드라마에도 있고요. 책이나 영화에도 있고…… 어디에서라도 손쉽게, 굉장히 많이 접할 수 있잖아요. 사랑은, 음,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곳저곳 가득하니까요.”
“…….”
“딱 이렇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경험 없는 제가 봐도…… 연애나 사랑은 무척 격렬하고 과격하고,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 같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윤민이 양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열심히 말을 이었다.
“어떤 식으로는 수없이 접할 수 있는 연애를, 제가 굳이 스스로 하면서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달까. 그것만으로도 기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한다.
진형이 듣기엔 한없이 가여운데, 윤민은 제법 기쁜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좋아하는 사람 있다면서요?”
“제가 좋아하는 분도 그래요.”
윤민이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전 그분이랑 딱히 뭘 해야겠다, 하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말로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그분이 행복한 걸 보는 게 좋아요.”
“하아.”
진형은 이번에야말로 터지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윤민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그분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한 계기도 그런 거였어요. 남들 행복한 모습을 볼 때보다 그분 웃는 걸 볼 때 제 마음이 더, 아주 많이 환해진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 사람이 형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랑 하하 호호 온갖 스킨십을 해 댈 때도?”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에 주눅이라도 든 걸까. 윤민은 어깨를 움츠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 전 보기 좋던데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형이 확 잘라 말했다.
“그거 사랑 아니야, 형.”
“읏.”
“미쳐 돌아야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아야죠. 어떻게 웃으면서 볼 수 있어요? 행복하다고? 와, 절로 쌍욕 나오는, 아주 개 같은 상황인데.”
“그, 그래요?”
“네. 당연하죠. 처돌아서 깽판을 치든, 아니면 빨리 그 자리를 피하든. 하여간 제정신으로 절대 가만 볼 수 없어요. 정말 좋아하면 그렇게 돼요.”
“그런 건가요?”
정말 모르는 걸 묻는 어조에 진형이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아는 사랑은 그런 건데 말이죠.”
“역시 어렵네요.”
윤민이 수줍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가게 안은 한결 한산해졌다. 이젠 폐점 시간이 코앞이었다.
진형이 주변을 둘러보자 좌우 앞뒤 사람들이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가 앉아 있는 테이블은 여기를 포함해서 서넛도 되질 않았다. 직원들도 슬슬 마감 준비를 하려는 듯했다.
다시 정면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형.”
“예?”
“우리도 슬슬 일어서야 할 거 같은데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진형이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보여 주자 윤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그러고 보니 사람이 많이 없어졌네요.”
정말로 몰랐다는 듯 윤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진형도 그랬다. 정신 차려 보니 이 시간이다.
“오늘 시간이 되게 빨리 지나간 거 같아요.”
“네. 저도 방금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처음 본 사람과 이렇게 집중해서 대화하다니. 원나잇 목적으로 초면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까지 시간을 할애해 본 적이 없었다.
“저기, 진형 씨.”
오늘 두 번째로 불린 이름이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진형은 냉큼 알아듣고서 대답했다.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진형 씨 것까지 계산해도 될까요?”
“형이?”
“진형 씨만 좋다고 해 주면요. 괜찮다면, 진형 씨가 불편하지 않다면 꼭 제가 내고 싶어서요.”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는 두 개였다. 윤민은 그걸 양손에 각각 거머쥔 채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진형은 이번에도 웃음이 났다. 도대체 오늘 이 사람 때문에 몇 번을 웃는지 모른다. 계산을 해 주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주눅 든 채 머뭇거리는 태도 역시 자기의 이해 범주에서 한없이 먼 행동이다.
“아니, 나야 고마운데 그래도…….”
“저야말로요.”
“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윤민은 감사하다는 말에서 그치지 않고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진형도 얼떨결에 함께 묵례했다.
“정말 오랜만에 말을 많이 했어요. 진형 씨 덕분이에요.”
또 이렇게 웃네.
신경 한쪽을 살살 건드리며 자극해 오는 그런 미소.
역시 묘하다.
진형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미소의 잔상이 남은 입술을 응시했다.
윤민의 웃는 얼굴은 ‘저는 선하고 착합니다.’ 같은 기운을 뿜고 있었다. 또, 그 이상으로 사람을 마른침 삼키게 했다. 어찌 됐든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미소다.
아깐 가학심보다 간지러움이 더 컸는데. 역시 술이 좀 취한 걸까. 지금은 어쩐지 울려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운 얘기도 많이 해 버리고 말았지만, 진형 씨가 들어 주고 이것저것 말도 해 줘서 너무 기뻤어요.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받은 거 같아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러네. 자정이 훨씬 지났으니 크리스마스구나.
달싹거리는 입술을 멍하니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그거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다음, 자기가 윤민에게 한 행동은 스스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진형이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매만졌다. 뒤늦게 올라오는 술기운 탓인지 제법 뜨거웠다.
입술의 온기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주변을 슬슬 둘러봤다.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이쪽을 보는 시선 역시 없다. 이제야 안심이 됐다. 이 사람에게 장난치는 건 좋지만 남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윤민은 계속 무언가 감사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진형은 그를 향해 허리 숙였다. 이윽고 어렵지 않게 창백한 볼을 입술로 훔칠 수 있었다.
“웃……!”
윤민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지, 진형 씨?”
진형은 한 번 웃고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방금 어땠어요?”
“뭐가요?”
“느낌이요.”
눈을 끔뻑거리던 윤민이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부드, 음, 굉장히 부드러웠던 거 같아요. 뜨거웠고요. 너무 순간적이라서 정확하진 않지만요.”
“그게 다예요?”
그가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하고 눈빛만으로 질문해 왔다.
“형, 정말 갈 길이 머네요.”
“네?”
“감촉부터 나오면 안 되죠. 심장이 두근거렸다거나, 깜짝 놀랐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낸다거나?”
“아…….”
윤민을 바라보며 진형은 대충 그의 속이 짐작 갔다. 아마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확인 사살을 자꾸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입이 멈추질 않았다.
“형, 혹시 연애가 아직이면 역시 이런 것도 경험 없어요?”
“이런 거?”
“키스랑 섹스.”
진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윤민은 대구 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창백한 뺨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대답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다.
뺨이라서 다행이었네.
진형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허리를 숙일 때까지만 해도 목적지는 뺨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최종적으로 방향을 바꾼 건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윤민이 연애뿐만이 아니라 타인과 그럴싸한 접촉조차 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에게 입맞춤 정도는 장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첫 키스를 이런 식으로 빼앗기는 건 그가 너무 가여웠다.
심지어 그 추측은 보란 듯 맞아떨어진 거 같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었다. 자리를 마무리하는 것도 이쪽의 몫인 듯하다. 진형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윤민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아, 그럼.”
뭐 받고 싶은 게 있냐는 눈빛이다. 진형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형도 내년에 노력해서 나한테 선물 주세요. 내가 받고 싶은 건 형의 연애담인데, 그게 만약 어려우면 첫 키스 경험담도 괜찮아요.”
한참 말을 못 잇던 윤민이 가까스로 대꾸했다.
“미안해요. 어느 쪽이든 너무 어려울 거 같아요.”
미안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며 진형은 되레 웃어 보였다.
“왜? 또 모르는 거잖아요. 이 1년 사이에 형한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누가 알아요. 형 자신도 모를 텐데.”
“그건 그렇지만요. 그래도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기어가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진형이 불쑥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커플을 지켜보기만 해도 충족되는 감정. 그건 형이 육체로 느낄 수 있는 쾌감이나 감각을 완전히 제외했기 때문이 아닐까? 형의 ‘보는 연애’는 그래서 성립 가능한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제외했다기보다 모른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윤민의 시선을 지긋이 마주하며 진형이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한번 맛을 봐요. 헤어 나올 수 없을걸.”
그러자 아주 진지한 대답이 날아왔다.
“그건 그거대로 무서워요.”
“하하하!”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 승강장으로 간다는 윤민과는 정문 앞에서 바로 헤어졌다. 마지막까지 허리를 두어 번 숙여 보이며 오늘 정말 고마웠노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진형 역시 만나서 반가웠다고 화답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까 계산할 때 나란히 서게 됐다. 마주 앉아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옆에 선 윤민은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또, 놀랄 만큼 왜소했다. 빈상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나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두툼한 코트를 입었어도 피부가 워낙 허여멀쑥해서 그런지 추위에 잔뜩 질려 보이기도 했다.
줄곧 응시했던 그의 뒷모습만 해도 그렇다.
주로 많은 시간을 책상에서 보낸다고 들은 탓일까. 어깨며 등이 지나치게 굽은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에 한없이 위축된 사람처럼.
역시, 내 주변에 없는 타입이네.
그다음, 진형은 금방 생각을 정정했다.
주변에 없진 않겠지. 실제로 오늘 이렇게 봤으니까.
다만 자기가 관심 한 번, 눈길 한 번 안 줄 타입임에는 확실하다. 스타일도 그렇고, 오늘 나눈 대화도 그렇다. 머나먼 저편에 있는 부류였다.
잠시간 〈웬즈데이〉 정문 앞을 지키던 진형은 발걸음을 돌려 뒷문으로 향했다. 차가운 공기 탓에 술은 옛적에 깼다.
“푸핫.”
뒷문에 도착하자마자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목적이던 담배와 라이터가 손에 잡혔을 때, 진형은 저도 모르게 터지는 웃음을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어쩐 일인지, 행복함을 가득 담아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멋대로 재생됐다.
〈전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아요.〉
“푸흣, 대박.”
오늘뿐인 만남이다.
자고 일어나면 지워질 기억이다.
대화 자체는 강렬했다. 다만 그에게까지 강렬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잠깐은 재미있는 먹잇감을 찾는 느낌도 들긴 했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그런 느낌을 가진 것조차 잊게 됐다. 그런 사람이었다.
까놓고 말해 몹시 부담스러운 타입이기도 하다. 놀잇감으로 어울려 주기에도 어딘지 모르게 거북하다. 그가 나이 차 있는 연상이라는 이유보다, 단순히 극과 극인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됐다.
뭐, 아무려면 어때. 술 한잔 잘 얻어 마셨고, 세상에는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거뿐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역시 간지럽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담배를 피우는 내내 머릿속을 간질거렸다.
마치, 그가 짓는 미소의 잔상처럼.
* * *
“아주 좋은 손님이지.”
선호가 딱 잘라 얘기했다.
“그래요?”
“응. 이 세상 모든 손님이 윤민 씨 같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을 정도야.”
윤민을 만난 것도 작년이었다.
그래 봤자 며칠 전이지만.
어찌 됐든 해가 바뀌었어도 〈웬즈데이〉는 바글바글 붐볐다. 단골들의 방문이 송년회에서 새해맞이로 바뀐 것뿐이라 여전히 단체 손님 예약으로 정신이 없는 듯했다.
진형 역시 오늘은 단체 손님 중 한 명이었다. 주기적으로까진 아니더라도 이따금 연락해서 술을 마시는 그룹이 있다.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참이었다.
약속 시각보다 한두 시간 일찍 도착했다. 아르바이트 마감 시간과 약속 시각 사이가 어중간하게 비어서 일찌감치 이곳으로 왔다. 혼자 앉아 있는 진형을 생각해서였는지 선호가 한가한 틈을 타서 기꺼이 말동무를 자청해 주었다.
선호랑 얘기하는 바람에 불현듯 떠올랐다.
그 이후로 기억에서 잊고 있던 남자의 존재가.
“여기 다닌 지 2, 3년 됐다고 들었는데 전 제대로 얼굴 본 적이 없는 거 있죠.”
진형의 말에 선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만하지. 오면 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얌전히 술만 마시고 돌아가거든.”
“그 형, 늘 혼자 와요?”
“응. 나도 그게 안쓰러워서 한번 슬쩍 물어본 적 있는데 이쪽 친구나 지인이 한 명도 없는 거 같더라고.”
“쓸쓸하네요.”
진형의 씁쓰름한 말투에 선호 역시 비슷한 어조로 대꾸했다.
“좀 그렇지.”
그러다가 생각났다는 듯, 선호가 떠보듯이 말을 걸었다.
“그 뒤로 윤민 씨랑 진형 씨, 뭐 없었어?”
기대감마저 섞인 목소리에 진형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있을 게 있나요. 정말 술만 마시고 헤어진 거라.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았고요.”
“진짜? 그날 슬쩍슬쩍 보니까 화기애애하게 대화 오가는 거 같아서 난 혹시나 했지.”
“아, 대화 자체는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은 부류랄까. 가깝게 지내면 좀 버거울 거 같은? 감당이 안 될 것 같다고 말해야 하나.”
“아아, 어떤 건지 알겠다. 내가 봐도 둘이 너무 다른 타입이긴 해.”
“그렇죠.”
“난 윤민 씨 같은 사람 귀여워서 꽤 좋아하지만.”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난다. 진형의 궁금하다는 눈빛을 읽었는지 선호가 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윤민 씨가 늘 주말에 오거든. 그리고 주문받으러 가면 혼자서는 절대 다 먹지 못할 정도로 시킨다? 주말에 사람 붐빌 때, 혼자서 테이블 차지하는 게 어지간히도 미안한 모양이야. 또, 직원들 부르는 것도 엄청 불편해해서 주문할 때 한꺼번에 많이 시키는 거 같기도 하…… 하핫.”
말하다 말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선호 덕에 진형도 얼떨결에 따라 웃었다.
“뭐예요, 왜 웃어.”
“아니, 저번에 대뜸 윤민 씨가 주방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는 걸 내가 발견했거든. 뭐 필요한 거 있냐고 물었더니 얼음물 한 잔만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 부르죠!’라고 했더니 윤민 씨가 너무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바쁜데 물 정도로 부르는 게 죄송해서요.’라고 하는 거 있지. 세상에. 나 윤민 씨한테 미안해도 웃어 버렸어. 윤민 씨 꼭 끌어안고서 다독여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니까?”
유쾌한 어투로 과거를 회상하는 선호 덕분에 진형도 푹 웃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어땠을지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었다. 또 그 특유의 말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중얼거렸으리라.
지금 막 생각난 것처럼, 진형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형 웃거나 미안해할 때 그런 거 좀 있지 않아요? 일부러 끼 떠는 건 절대 아닌데, 보고 있으면 슬슬 당기는 느낌.”
선호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가슴 한쪽 쿡쿡 찌르는 거? 동한다고 해야 하나.”
“맞아요, 맞아요. 역시 선호 형도 아는구나.”
맞장구를 치던 진형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바꾸며 은근히 떠보듯 말을 꺼냈다.
“아니, 저 말고 선호 형이 그 형이랑 잘 좀 해 보면 좋을 것도 같은데?”
“하하하! 내가 또 이 대사를 해야 하나. 난 손님이랑은 자지 않는 주의라.”
능글맞은 목소리에는 마찬가지로 능글맞게 대꾸해 줘야 인지상정이다.
“누가 여기서 보래요? 밖에서 보면 되죠.”
“어, 그러게?”
“그리고 제가 언제 뭐 배 맞추랬나. 그저 친하게 지내라는 거였죠.”
“앗, 나 지금 패배감 드는데? 진형 씨한테 당한 거 같아.”
선호와 시답지도 않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자니 시간이 잘도 흘렀다. 어느덧 약속 시각이 가까워졌고 무리도 삼삼오오 모였다.
서로 늘 하는 판에 박힌 인사를 나누고서 술병을 비운다.
주로 나누는 얘기는 언제나 그렇듯 연애 얘기다. 아웃팅에 직결된 주제를 가지치기하다 보면 연애 얘기만큼 만만한 것도 또 없다. 만나는 사람 얘기, 관심 가는 사람 얘기, 최근 화끈했던 원나잇. 이런 걸 대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말하면 술자리의 안주로 매우 충분했다.
진형은 오늘 말하는 쪽보다 듣는 쪽이었다. 최근에 이렇다 할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도 바닥나고 말았다. 양옆 사람들 잔이 비워지면 그걸 채워 주고, 자기 잔도 채워 가며 술을 마셨다.
그룹에서 가장 어린 진형을 사람들은 제법 귀여워했다. 그들은 앞다퉈 진형의 최근 섹스 라이프를 궁금해했지만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이번 달은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답지 않게 얌전히 지냈다고 말하니 모두가 웃었다. 그러다 무리 중 한 명이 슬쩍 이런 말을 해 왔다.
“혹시, 우리 진형이 상운 씨 못 잊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 말에 진형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본다.
상운 씨? 아,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이 상운이었다. 김상운.
그는 약 한 달 전에 헤어진 섹스파트너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동침한 상대이기도 하다. 약 3개월 동안 서로 편한 시간에, 서로 하고 싶을 때 거리낌 없이 연락해서 모텔을 잡는 사이였다.
그야 늘 ‘진형아.’라고 불렀으니 이름을 아직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쪽은 전혀 아니었다. 호칭은 형이었고 이름을 부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니 3개월 동안 만났다고 해도 그의 이름이 친숙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대답을 못 하는 거 보니 진짜 그런 거야?”
키득대며 묻는 목소리에 진형이 헛, 하고 정신을 차렸다.
“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러고 보니 누가 먼저 끝냈다고 했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이 동시에? 그랬던 거 같아요. 서로 재미가 없어져서요.”
“하하하!”
만나고 한두 주는 재미있었던 거 같다. 그건 상운뿐만이 아니라 누구와도 그랬다.
새로운 몸을 탐하는 과정은 각별한 맛이 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달라졌다.
상대가 어떤 체위를 좋아하는지, 어디를 만져 주면 자지러지는지, 어떻게 해 줘야 신음을 내뱉거나 호흡조차 못 할 정도로 흥분하는지.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어렵지 않게 나오는 시점이 바로 ‘흥이 가시는’ 때였다.
3개월의 종지부를 찍을 즈음엔 각자 반쯤 의무적으로 습득한 지식에 따라 침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상운을 후배위로 박아 줘서 먼저 가게 하고, 그다음 진형이 좋아하는 기승위에 상운이 어울려 주고. 그런 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배를 맞춘 날은 여태까지 습득했던 것들을 총 복습하는 과정이었다.
진이 빠지도록 해 댔다. 그리고 아스라이 해가 떠오를 무렵 모텔에서 나와, 서로 보는 앞에서 상대의 번호를 지웠다. 그동안 즐거웠다고 말해 주었고, 오고 가다 얼굴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자고 말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작별이었다.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단어를 붙일 수 있을 감정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것들을 전부 배제하고 만난 사이니까.
“연애해야지, 진형이도. 섹스만 가볍게 하는 것도 좋기야 하지만 그러다가 이팔청춘에 연애 세포 다 죽는다고?”
장난스럽게 던져진 말에 진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네요.”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니고?”
“으음, 그렇진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따질 건 다 따지면서 퍽이나!”
“당연히 어느 정도 보기야 하죠. 근데 나만 그런가. 형들도 그러잖아요.”
기세 좋게 비운 술병이 점점 늘어 갔다. 술자리는 점점 더 왁자지껄해졌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자기가 혼자 왔을 때만 해도 한산하던 공간이 지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번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압사의 위험까지 느껴지진 않았지만, 주말 저녁의 밤이라는 걸 입증하듯 북적거렸다.
진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담배였고, 다음은 화장실이었다.
정문 근처에 있는 흡연 부스까지 걸음하고서 잠깐 안을 살폈다. 사람은 없었지만, 안이 탁했다. 우르르 들어왔다가 우르르 나간 모양이다. 별수 없기에 일단 안으로 들어섰다. 매캐한 연기에 눈이 찌푸려졌지만, 곧 자기가 피워 올리는 연기가 기존의 연기에 더해졌다.
부스의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모임은 몇 시에 파장이 날까.
혹시 자리를 옮겨 가며 2차, 3차까지 해치울 것인가.
마시는 도중 앞뒤 좌우 테이블 중 누군가와 눈이 맞아서 원나잇을 하러 가는 사람이 없다면 오늘은 장기전이 될 듯했다. 제법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초반부터 꽤 마시긴 했어도 정신은 말짱하다. 오늘은 술이 좀 받는 날인 모양이었다.
담배를 끄고서 밖으로 나왔다.
그다음 목적지인 화장실로 향하며 반쯤 본능적으로 주변을 훑는다. 아니, 따라붙는 시선에 적당히 눈빛 교환을 해 주는 것에 가깝다. 자기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바텀들은 언제나 그렇듯 나이며 스타일이며 천차만별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있는가 하면 낯선 얼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 중 역시 마음이 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짜 연애 세포란 게 죽은 건 아니겠지?
스스로 농담을 건네면서 키득 웃었다.
지금도 젊긴 하지만, 더 어렸을 때는 특정한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 찌릿한 느낌도 받았던 거 같다. 졸지에 번개 맞은 것처럼 충격으로 전율하는 만남까진 없었다지만, 그래도 그 엇비슷한 설렘 정도는 누군가에게 느껴 본 적은 있는 거 같다.
그런 감각을 안겨다 준 이들과 만나기도 했다. 연애라는 것을 해 본 거다. 하지만 길게 인연을 유지할 순 없었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며 느낀 게 있다.
자신은 사람에게 제법 싫증을 잘 내는 부류가 아닐까.
싫어지진 않지만. 염증까진 아니지만. 흥이 가시는 속도가 남들보다는 좀 빠른.
보통 사람의 연애가 한여름에 뜨겁게 탄 커피라면, 자기 연애는 한겨울에 미지근하게 탄 커피다. 어느 쪽 커피가 먼저 식을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연애.
당장 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는 그런 거.
하지만 지금 연애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각은 ‘귀찮음’이다. 누군가를 속박하고, 혹은 구속당하고. 그 맛에 연애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적어도 자기는 아닌 거 같다. 가볍게 노는 생활을 쭉 이어 와서 그런 걸까. 당분간은 특정한 인물에게 정착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마음만이 전부였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연애는 나중에 나이 먹고 해도 충분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지금은 아직 젊으니 놀 수 있을 만큼 놀아 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소리를 하면 다들 가벼운 연애를 하라고 하겠지. 하지만 연애는 절대 가벼워질 수 없다는 게 진형만의 지론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무거움으로 기울어지는 게 연애라는 거고 사랑이라는 거 같았다.
“오.”
진형은 화장실 입구에서 살짝 감탄했다. 〈웬즈데이〉 화장실은 언제 와도 청결해서 좋다. 깨끗하다는 뜻도 있지만, 음습하지 않다는 의미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진형이 가 봤던 게이바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눈 맞으면 모텔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일을 치르는 놈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웬즈데이〉 사장은 이른바 ‘물 관리’라는 것을 하며 그런 사고를 치는 손님들을 죄다 쳐 냈다. 덕분에 화장실에 갔다가 난데없이 누군가의 신음을 듣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진형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응시했다.
자화자찬이긴 하지만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얼굴이다. 가벼운, 잘 놀 거 같은 인상이기도 하다. 옷을 잘 입는다거나 피부가 좋다는 칭찬을 꼭 받을 정도로 자기 관리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익숙하고 편할 정도로 훤칠한 키와 모델 체형이라고 칭송받는 몸매. 화려한 것을 좋아하기에 액세서리도 즐겨 했다. 목과 팔에는 기본적으로 항상 무언가를 차고 있었다. 귀도 허전해 보이지 않도록 양쪽 귓불에 피어스, 왼쪽 귓바퀴에 미니링 두 개로 꾸몄다. 머리 역시 가만 내버려 두질 못했다. 최근 진형의 머리칼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텀들이 연애까진 아니더라도 한 번쯤 자 보고는 싶은 탑이라는 거다. 같은 탑이라도 취향이 유별나지 않은 이상 배 나온 아저씨보다는 젊고 괜찮게 생긴 이쪽을 택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진형은 겉과 속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가벼움.
어쩌면 그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뭐든 가벼운 게 좋다. 연애도 그렇다. 무겁고 진중한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연애는 상상만 해도 질식할 것만 같다. 자기가 남들보다 빨리 식는 타입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욱 부담스러워지기도 했다.
연애라는 게 늘 즐겁고 유쾌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진형은 즐겁고 유쾌한 관계에 조금씩 무거움이 스며들 때 발을 빼곤 했다. 어떻게 보면 연애의 단물만 빨아먹는 것에 가깝다. 남들은 그런 건 연애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진형에게는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한 연애였다.
나이 먹으면 좀 달라지려나?
스스로 던진 질문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단언할 순 없지만 어쩐지 나이를 먹고 또 먹는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여전히 이대로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엇.”
화장실을 등지고서 복도를 걸을 때였다. 눈앞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낯익었다. 알아보았기 때문에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튀어나온 거였다.
잠깐 그 사람을 살피던 진형이 웃음을 삼켰다. 가방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도 혼자 왔구나.
혼잡한 가게다. 가방이나 소지품을 두고서 화장실에 오지 못했다는 건 혼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만약 혼자였더라면 계속 홀을 누비는 직원들에게 잠시 봐 달라고 했겠지만, 그는 그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아까 선호 얘기도 그렇고, 저번에 나눴던 얘기도 그렇고. 그는 융통성이 있는 타입으로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사실, 아까 선호의 ‘주말에만 오거든.’이라는 말을 듣고서 어쩌면 오늘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또, 그다음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윤민이 왔더라도 어차피 자기는 그를 발견하지 못할 거라고. 언제나처럼, 시야에 남자가 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 같다고.
그랬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될 줄 몰랐네.
화장실과 홀을 잇는 복도는 조금 좁았다. 이대로 윤민이 쭉 걸어오면 자리에 멈춰 선 자기와 몸이 부딪칠 거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진형은 어쩐지 장난기가 돌아서 줄곧 선 채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머지않아, 예상대로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앗, 죄송합니다.”
그 사죄에 진형이 무어라 말할 틈도 없었다. 두어 번 허리까지 꾸벅 숙여 가며 사죄한 윤민이 화장실 안쪽으로 쏙 사라졌다. 웃음이 났다. 진형은 입가를 손바닥으로 살짝 가리고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내보냈다.
나를 못 알아본 거지?
고개를 저토록 있는 대로 숙이고 있으니 방금 부딪친 사람이 진형인지 생판 타인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을 거다.
혼자 남은 복도에서 잠시 고민한 진형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홀로 나갔다. 아주 잠깐은 화장실 입구를 막아서고 기다려서 장난을 한 번 더 쳐 볼까 싶기도 했다. 물론 금방 접었다. 장난을 쳐서, 그걸 계기로 잠깐이나마 대화가 오가고, 또 그 대화가 다른 것으로 이어지고.
그건 관계가 생기는 거다.
사람으로 미어터지던 크리스마스이브. 접점조차 없던 둘이 마주 앉아 나누던 술잔.
역시 그날은 그날로 끝내는 게 나을 듯했다.
선호에게 했던 얘기는 한없는 진심이었다. 버거울 거 같고, 감당이 안 될 거 같고. 윤민과 자신은 겉이든 속이든 전부 극과 극이다. 절대로 친해질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면 굳이 관계를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도대체 어디에 앉은 거지?
아까 흡연 부스에서도 그렇고, 거길 나와서 화장실로 갈 때도 그렇고. 진형은 몇 번이고 홀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공간은 시야를 차단하는 가림막 같은 것도 없다. 그런데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걸 보니 역시 그의 존재감이란 비루하기 그지없다.
궁금증은 해소하고 싶었기에 진형은 테이블로 돌아오자마자 이따금 화장실 쪽 복도 끄트머리로 시선을 던졌다. 시야에서 한 번 놓치면 아마 오늘의 궁금증은 계속 해소할 수 없을 테지.
아, 나왔다.
윤민이 향한 곳은 뒷문 쪽, 2인 테이블이 서넛 놓인 곳 중 하나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번에 합석했던 곳도 저 테이블 중 하나였던 거 같다.
가방을 빈 의자에 내려놓고, 물을 마시고, 잔에 술을 채우고.
멀찍이서 그의 행동들이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어디에 앉았는지 궁금했을 뿐이고, 이제 그걸 해결했으니 시선을 돌리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진형은 어쩐지 계속 윤민을 보게 됐다. 이건 마치 오늘 밤 잡아먹고 싶은 바텀을 관찰하는 모양새 같았다. 그런 느낌으로 계속 눈길을 던지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계속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던 윤민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거리가 있어서일까. 진형이 쳐다보는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그 특유의 멍한 시선은 어느덧 홀의 테이블 곳곳을 훑어 내렸다.
마치 꿈결을 쫓는 것처럼.
진형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전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아요.’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울렸다. 윤민이 조금쯤 수줍은 시선으로 테이블 몇 곳을 슬쩍슬쩍 바라보며 웃음 한 줌 지을 때마다 계속 그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시선이 저도 모르게 윤민의 눈길 끝으로 옮겨졌다. 예상했던 것처럼 연인들이 있었다. 상대의 어깨에 가볍게 이마를 비비거나, 손을 깍지 끼고서 손장난을 치거나. 가벼운 스킨십을 즐기는 연인을 바라보며 윤민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설렘 가득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좀 울렁거리는데.
진형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한 번 느낀 울분은 조금씩 거세졌다. 뭐 때문에 속이 이렇게나 뒤집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짜증이 난다. 윤민 때문일까. 윤민의 시선을 따라간 탓인가. 솔로들의 외로움은 안중에도 없이, 완벽히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설탕 놀음을 하는 커플을 보게 돼서 울컥하기라도 했단 건가.
쓴웃음이 터졌다. 말도 안 된다.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이야 우스갯소리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커플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기필코 애인을 만들겠노라며 상심하는 것이야말로 진형이 가장 이해 못 하는 감정이다.
내가 취했나?
그다음엔 자기 자신을 의심해 봤다.
약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사리 분별 못 하고 이 세상이 흔들리는 것만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어지러움 정도였다. 오늘은 술이 좀 받는다고 느끼기까지 했었다. 백번 양보해서 취했다고 해도 갑작스레 짜증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왜?
진형은 다시 한번 윤민을 응시했다.
그는 여전하다. 여전히 홀 곳곳에 보이는 커플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이따금 술을 조금 들이켤 때면 고개를 테이블에 숙이는 것까지도 조금 전과 같았다.
한동안 알 수 없는 짜증에 속을 태우던 때였다. 그때까지도 계속 바라보던 윤민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안경을 벗었다.
별거 없는 행동이다. 어쩌면 자기 눈에 이상하리만치 느리게끔 보인 거 같기도 하다. 한 컷, 한 컷. 마치 눈동자에 새겨질 것처럼 윤민의 행동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감각은 너무나도 기이하고 이상한 것이었다.
뭐, 뭐야.
진형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잠깐 신음이 나올 거 같기도 했다.
벗은 안경을 테이블에 대충 올려놓은 채, 윤민이 양 손등으로 눈가를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심장이 놀라움으로 덜컹거렸다.
저거 우는 건가? 지금 우는 거야?
진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군가가 “왜 그래?”라고 묻는 것이 들린 듯도 했지만, 거기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 정신머리가 있었더라면 충동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제치고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에도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해 고정된 채였다.
윤민은 이제 본격적으로 두 손을 이용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더니 계속 걸음을 옮기는 자기 두 다리마저 느리게 여겨져 참을 수가 없다.
“왜 울어요?”
가방이 차지하던 빈 의자에 제멋대로 걸터앉으며 진형이 가장 처음 꺼낸 말이었다. 윤민의 어깨가 움찔하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양손을 휙 내렸다. 그가 꿈에 취한 사람처럼 멍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몽롱한 표정이 조금씩 녹아 사라지고, 거기에 신기해하는 듯한 미소가 깃드는 걸 진형 역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가뜩이나 동안인 윤민의 얼굴이 안경을 벗으니 보다 더 순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서야, 윤민이 작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안 울어요.”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닌데…….”
윤민이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안경을 쓰며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얼굴의 반을 다시 뒤덮은 촌스러운 안경테를 바라보며 진형이 실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거짓말을 하려면 그 시뻘건 눈부터 좀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은데요.”
가까이서 확인한 눈이 붉디붉었다. 이래서야 거짓말에 속아 주고 싶어도 도리가 없다.
“아, 이거는…….”
윤민이 부끄럽다는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안구 건조증이 심해서요.”
“뭐요?”
황당하다는 반문에 기가 눌렸는지 윤민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졌다.
“안구 건조증이요. 주기적으로 이래요. 겨울에는 더 심해져서 좀 힘든 거 같아요.”
집에서 나올 때 깜빡 잊고서 눈약을 놓고 왔다. 오늘따라 유달리 눈가가 뻑뻑한 거 같다.
웅얼거리며 변명하는 듯한 말투가 귓가에 계속 들려왔지만, 무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윤민의 목소리는 숨김이 없다. 그의 성격을 완전히 다 파악한 건 아니지만 괜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러자 콱 하고 목에서부터 뜨거움이 올라왔다. 잘은 몰라도 아마 윤민의 눈동자처럼 자기 얼굴 역시 시뻘겋게 물들었을 것만 같다.
“아, 뭐야.”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진형이 낮게 신음했다. 왜 부끄러움은 자기 몫인가.
“우는 줄 알았잖아요.”
그러자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제가 왜 울겠어요.”
그래. 왜 울겠는가.
조금 전까지 남들이 보기엔 염장질과 진배없는 커플들의 스킨십을 보며 샐쭉샐쭉 웃던 남자가 말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간단한 답인데 아까는 왜 이런 당연한 판단이 안 됐는지 모르겠다.
반쯤 넋을 놓고서 여기로 달려왔다. 마치 뚝 하고 신경 하나가 끊긴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의 아니게 걱정 끼친 거 같아서 죄송해요.”
“형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내가 멍청하게 착각한 건데.”
“그래도요. 정말 고마워요.”
진형이 얼굴을 가렸던 손바닥을 천천히 내렸다. 윤민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잠시 뒤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살짝 벌어졌다.
“아,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형도요.”
거기서 대화는 끊겼다. 윤민은 그저 눈동자만 끔뻑거리며 이쪽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진형은 그 시선을 바라보며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 속절없이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형. 이제 볼일 다 끝났으면 가라는 거야?”
“네?”
“방금 새해 인사는 작별 인사였어요?”
“그, 아니, 진형 씨 일행도 있으신데. 제가 계속 말을 걸면 진형 씨가 저 때문에 곤란하실 거 같아서요.”
얌전히 듣던 진형의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일행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윤민은 자기가 그를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이쪽을 발견했다는 얘기가 된다.
동시에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속을 불편하게 했다. 진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커플의 스킨십을 보며 웃던 윤민을 보았을 때 느꼈던 불쾌감과 비슷했다.
오늘 역시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같다.
“형.”
갑작스러운 부름에 윤민의 마른 어깨가 살짝 떨렸다.
“네?”
“오늘 혼자 온 거예요?”
“네.”
“그럼 이 뒤로 약속 있어요? 누구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거나?”
“아뇨, 오늘도 계속 저 혼자예요.”
“알았어요.”
진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금 일행이 앉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사이에도 자기 얼굴에 쏟아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렇지. 이거잖아.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이토록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 시선에 깃든 것이 욕정이든 호기심이든. 어찌 됐든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면 이렇게 쉽게 알아차리게 됐다. 시선에 예민해지는 것은 비단 자기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곳은 눈짓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게 합석을 부르고, 전화번호 교환을 부르고, 모텔도 부르는 거다.
그런데 왜.
어째서 저 남자의 시선은.
“진형아, 누구야?”
“무슨 사이야? 뭔데?”
잠시 내버렸던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심지어 주변의 다른 테이블에서도 진형의 대답이 궁금했는지 모두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형은 쓰게 웃었다. 질문하는 무리는 하나같이 기가 막힌다는 어조로 말했다. 진형이 아니었으면, 진형이 냅다 윤민의 테이블에 앉지만 않았어도. 이들 역시 윤민의 존재를 모르고 넘겼을 것이다. ‘저런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 진형이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모두가 어리둥절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형들, 미안한데 다음에 봐요.”
진형이 자리 자리에 있던 휴대폰과 옷가지들을 챙기며 작별 인사를 하자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우리 버리고 간다고? 벌써? 이제 시작이잖아!”
“너 설마 저 사람이랑 나가는 거야?”
“도대체 누군데 그래?”
이구동성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진형은 그저 웃기만 했다. 딱히 대답해 줄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훌쩍 가는 것도 어렵다. 자기가 떠나고서 얼마나 입방아들을 찧을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그냥, 좀 아는 사람.”
진형의 단순한 대답에 다시 질문이 쏟아졌다.
“그냥 좀 아는 정돈데 네가 내뺀다고? 야,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났는데!”
“남진형, 너 이 자식 좀 그럴싸한 변명을 해라!”
뭔가 한 마디 더 던져 주고 싶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지금 자기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판에 누군가를 이해시킬 법한 말이 떠오를 리가 없다. 구태여 머리를 굴려 고르고 고르다 불쑥 떠오른 한마디를 대수롭지 않게 입에 담았다.
“너무 불쌍해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행이 전원 폭소했다.
언제부터 이 구역의 천사가 됐냐고. 못 보던 사이에 성격 개조라도 당한 거냐고.
온갖 농담들이 쏟아졌지만 진형은 이번에야말로 무시하고서 무리를 등졌다. 반쯤 농담으로 듣긴 하겠지만, 또 반쯤은 진심으로 듣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처럼 만난 사람들을 버리고서 누가 봐도 지뢰급인 남자의 곁으로 갈 리가 없으니까.
모두가 아는 남진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진형이 다시 구석의 테이블을 찾았을 때 윤민은 벗어 놨던 코트를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곧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의 모양새다.
진형은 조금 전처럼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지런히 움직이던 윤민이 불쑥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다음, 진형의 얼굴을 발견하고서 무척이나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휘둥그렇게 뜬 눈을 보며 진형은 아주 조금쯤 기분이 좋아졌다.
“가려고요?”
“아, 네. 역시 눈이 좀 아파서요.”
“그러게, 뭐 하러 나왔어요? 아프면 쉬지.”
진형의 핀잔에 윤민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럴 걸 그랬어요. 눈약만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형, 근데 나 지금 일행 죄다 버리고 오는 길인데.”
“네?”
“형이랑 마시려고.”
윤민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완전히 일시 정지된 모습이 우스워서 진형이 쿡쿡 웃자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네?”
다시 한번 반문하는 걸 보니 이 상황이 쉬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다.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을 보며 진형은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난 왔는데 형이 가 버리네요.”
“진짜예요?”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에 진형이 양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휴대폰을 살짝 들어 보이며 웃었다.
“네. 그럼 가짜겠어요?”
“왜 진형 씨가……?”
윤민이 혼잣말로 신음 섞어 중얼거린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진형은 미칠 노릇이었다. 또 울컥하고 말았다.
오늘 정말 이상한 날이다.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연이어서 하는 것도 그렇지만, 감정의 그래프가 마치 발작하듯 움직였다. 급상승, 급하강. 오락가락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금은 단연 급하강이다. 스스로 이유를 모르겠으니 몹시 죽을 맛이었다.
자기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어도 아프다는 사람을 붙잡고 술타령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시 일행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도 상황이 너무 우스워진다.
잠깐 생각하던 진형이 이윽고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형, 저쪽 자리 박차고 나올 때 형 핑계 대서 여기 이대로 있기가 좀 그런데.”
“아.”
부담을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운을 떼기 위해 고른 말이다. 그런데 거기까지 들은 윤민이 순식간에 입었던 코트를 다시금 척척 벗더니 무릎 위에 가지런히 접어 올려놓았다.
“그럼 우리 마셔요. 진형 씨 뭐가 좋아요? 제가 시킬게요.”
“푸흣.”
말과 표정이 이렇게 따로 노는 사람도 있는 거구나.
코트를 벗으면서도, 진형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면서도. 윤민은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눈빛을 지었다. 진형이 다시 이 테이블을 찾아왔을 때부터 신기함과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은 계속 지워지지 않은 채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형,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코트도 다시 입어요.”
“네?”
“형이랑 마실 생각으로 온 건 맞는데, 그렇다고 아프다는 사람 붙잡고 마시고 싶을 정도로 술이 고픈 건 또 아니라서요.”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진형이 생글 웃었다.
“이번 건 진짜 거짓말이다, 그렇죠?”
“읏.”
“그러니까 같이 나가요. 나도 자리 박차고 나온 이상 여기 더 있는 거 민망하기도 하고. 형 택시 타죠? 내가 거기까지 바래다줄게요.”
“그런,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진형 씨한테 너무 미안해요.”
“아까부터 같은 말 하는 거 같지만, 형이 나한테 미안할 필요 없다니까요? 내가 충동적으로 온 거니까요.”
아, 그러게. 오늘 내 행동들은 죄다 충동적이라는 게 해답인가.
진형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윤민 역시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잠깐 말이 없었다.
“편의점에 눈약 같은 거 팔았나…….”
진형이 슬쩍 웃었다. 윤민은 아마 혼자서 중얼거린 거였겠지만 들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형, 그렇게까지 무리 안 해도 나 괜찮아요.”
“그래도요. ……그래도요.”
풀 죽은 듯 중얼거리던 윤민의 표정이 이윽고 서서히 바뀌어 간다. 정신없어 보이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그의 입술에 지어진 건 언젠가 봤던 미소다.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잔상이 떠도는 특유의 웃음. 진형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윤민의 입술을 응시하게 됐다.
“그럼 진형 씨가 우리 집으로 오는 건 어떨까요?”
난데없는 말에 진형의 눈이 조금 커졌다.
“형 집?”
“네. 물론 진형 씨만 괜찮다면요. 저도 눈약 넣을 수 있어서 좋고, 진형 씨도…….”
잘 이어지던 말이 돌연 흐려지며 윤민이 살짝 고개 숙였다.
“그러고 보니 진형 씨한테 좋은 건 하나도 없네요.”
“하하하!”
터진 웃음을 되는대로 내뱉고 나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혼자 살아요?”
“네.”
“그럼 나도 좋은데요. 사람들 눈치 볼 거 없이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여기나 다른 술집처럼 안주 같은 것도 없고, 제가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요.”
“내가 만들면 되죠.”
진형의 딱 자른 대답에 윤민이 눈을 끔뻑거렸다.
“진형 씨가요?”
“네.”
대답하며 진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민 역시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며 코트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정신없어 보이는 그에게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진형은 조금 전부터 얼굴이 뜨거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이쪽을 응시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선들이 푹푹 찔러 온다. 더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진형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난데없이 폭탄 하나 끌어안고 자폭하는지 모르겠다고 수군대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기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이 남자랑 잘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나중에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노라고 대답하면 끝나는 얘기니까.
다만, 모이는 시선은 역시 불편하다.
충동적으로 관계를 이어 나간 건 자기지만 남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서 윤민과의 친분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만 같은 상황이 좀 창피했다. 부끄럽기도 하다.
인간성으로만 따지면 윤민은 괜찮은 사람이다. 다만, 외관이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자기 기준에도, 또 남들이 생각하는 남진형의 이상형에도 한없이, 끝도 없이 밑도는 타입이다.
쪽팔린데. 창피해 죽을 것만 같은데. 왜 난 이 사람이랑 이러고 있는 걸까.
진형은 역시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 * *
우리 집으로 가자.
게이바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생각나는 건 하나였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다. 딱 한 가지밖에 없었을 거다.
‘하자는 건가?’라고.
그다음, 진형은 생각을 바꿨다.
‘하자는 거네.’
진형은 조금 전 자기에게 그 대사를 읊은 사람의 등을 빤히 바라봤다. 이 남자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딱 하나밖에 없을 줄 알았던 그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사심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거나.
택시로 20여 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6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층마다 다섯 가구 정도 있는 듯한 윤민의 보금자리는 이 건물의 최상층인 6층 가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복도의 어스름한 불빛으로 ‘605호’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집은 꽤 넓었다. 진형이 자취하는 집보다 훨씬 넉넉한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같은 원룸이라도 책상과 침대가 공간을 다 잡아먹은 자기 집과는 완전히 달랐다. 또,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깨끗하고 깔끔했다. 차라리 자기 집처럼 온갖 잡동사니가 이곳저곳 나뒹굴었다면 웃고 말았을 텐데. 이 정도의 깨끗함은 신기하기 짝이 없다.
“형, 결벽증 같은 건 아니죠?”
진형의 농담에 윤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결벽증?”
“네. 남자 혼자 사는데 집이 왜 이렇게 깨끗해요? 매일같이 치우고 사는 거야? 하루 세 번씩 청소하면서?”
“아아, 거의 집에 있으니까요.”
윤민이 벗은 코트를 옷장 옆 옷걸이에 걸며 대답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기니까 남들보다 치우고 살 시간이 많아지는 거 같아요. 결벽증은 아니고, 청소도 하루 세 번까진 아니에요.”
윤민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금 더 말을 덧붙였다.
“정리하는 게 반쯤 습관이 된 거 같아요. 그냥 보기에 어지러우면 치워요.”
“대단한데? 난 한 번에 몰아서 치운다고요. 그것도 더 버티다간 쓰레기 소굴처럼 보이기 바로 직전에.”
집에 오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진형은 그런 윤민을 배려하기로 했다.
뻥 뚫린 이 공간에서 사람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화장실과 베란다뿐이었다. 자기가 줄곧 여기에 머무르면 멍하니 있을 것만 남자에게 “형, 나 담배. 베란다 좀 빌릴게요.”라고 말했다. 옷도 편안하게 입도록 권했다.
이쪽이 신경을 써 줬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듯 윤민이 감사해하는 표정으로 살며시 웃음 지었다. 여차하면 또 뚫어지게 그 얼굴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진형은 종이컵 하나를 들고 마치 도망치는 사람처럼 서둘러서 베란다로 향했다.
참아 왔던 담배를 피운 것까진 좋았지만 느긋하게 농땡이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안주 담당이라는 큰 역할이 주어졌다. 〈웬즈데이〉에서 나오기 전 자기가 자청했으니까. 택시에서 내려 가까운 편의점으로 들어가, 술이며 주전부리 이것저것 주워 담고 그걸 모조리 계산한 것은 윤민이었다. 그러니 자기는 도맡은 안주라도 그럴싸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됐다.
진형은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를 대충 비벼 껐다. 냄새가 좀 빠지기를 기다리고서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윤민은 어느덧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문을 있는 대로 열어젖힌 게 재미있었다. 물론 닫힌 문 건너편으로 씻는 소리가 났다면 그건 그거대로 애매한 감정이 생겼겠지만.
전혀 그런 쪽으로 의식을 안 하고 있는 거겠지.
자기에게 성적인, 혹은 손톱만큼의 연애적인 호감이라도 있었더라면 윤민처럼 행동하진 않는다. 망설임 없이 곧장 집에 불러들이거나, 또는 지금처럼 씻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거나.
아까 사람들 질문에 ‘좀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지만, 윤민 역시 자기를 ‘좀 아는 동생’이라고 생각하기에 부족함 없는 행동들이다.
뭔가 좀, 되게 미묘한 기분인데 왜인지를 모르겠네.
또다시 이상한 잡생각에 빠지기 전에 진형은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손을 씻고서 싱크대 바로 옆에 자리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쓸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눈 앞에 펼쳐진 살벌한 풍경에 냅다 표정이 굳고 말았다.
“심하네, 이건.”
윤민이 거짓말에 재주가 없을뿐더러 그리 잘하는 성격도 아니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아까 편의점에서 ‘집에 있는 게 물이랑 라면 정도라서요.’라는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던 거다.
냉장고에는 물이 담긴 페트병 서너 개가 전부였다. 그 흔한 계란이나 김치마저 없다. 그렇다면 라면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진형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싱크대 아래의 선반 문을 열었다. 정답이었다. 도대체 라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척 봐도 열댓 개는 넘어 보이는 똑같은 봉지 라면이 쭉 일렬종대하고 있다.
“형, 집에서 밥 안 먹어요?”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툭 입을 열자 머뭇머뭇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먹긴 먹는데 제가 해서 먹는 건 아니고 시켜 먹어요. 가끔은 나가서 사 먹기도 하고요.”
“왜 그런 짓을 해요?”
진형의 강한 어조에 윤민이 눈을 끔뻑거렸다.
“네?”
선반 쪽으로 수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칙칙한 밤색 추리닝 바지와 품이 많이 남는 하늘색 반팔을 입은 윤민을 보자 일순 말문이 막혔다.
이딴 옷은 도대체 어디서 사는 거지? 파는 옷이긴 한가?
진형은 애써 생각을 떨치고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도 좀 배워서 해 먹어야지. 죽을 때까지 사다 먹거나 시켜 먹을 순 없잖아요.”
진형의 말에 윤민이 되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저는 평생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말도 안 돼! 사 먹는 밥이랑 집밥은 차원이 다른 거라고요. 거기다가, 늘 사 먹기만 하면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저 버는 거에 비해 돈 들어갈 건 별로 없어서. 그러니까 밥 정도는 매일 사 먹어도 충분…….”
경악하는 얼굴에 주눅이라도 들었는지 윤민은 말끝을 흐렸다. 진형이 들으란 듯 탄식까지 내뱉자 서둘러 말을 덧붙인다.
“미안해요,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나한테 미안할 일은 없지. 근데 형, 그러다가 몸 상해요.”
진형의 말에 잠깐 멈칫하던 윤민이 그다음, 아주 천천히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미치겠네, 또 저렇게 웃어.
진형은 상황을 바꾸고자 생각나는 말을 되는대로 쏟아 냈다.
“시켜 먹는다면서 라면은 뭐 이렇게 산더미같이 쌓아 놨어요?”
“아, 그거는 비상식량이에요.”
“조만간 전쟁 나나요? 라면 싸 들고 어디 피난이라도 갈 생각이야?”
웃음기 섞인 농담에 윤민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건 아니고요. 밖에서 못 먹거나 시켜 먹지도 못하는 날이 가끔 있어요. 그럴 때를 위한 비상식량이에요.”
“예를 들면요?”
“음, 파일 넘기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가 일어났는데 새벽이거나, 밖으로 나갈 기력이 전혀 없다거나.”
방금 세수해서 그런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도드라져 보였다. 하반신에 열이 고이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저쪽에서 하자고 달려들면 못 할 것도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금욕 기간이 자기치고 제법 길었지만 그렇다고 폭탄을 끌어안고 전사할 순 없다. 그것만큼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도, 시간을 되짚어 봐도 함께 침대에서 뒹굴었던 이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라는 게 있었다.
진형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움직였다.
“라면이랑 계란, 김치는 셋이서 세트나 다름없는데 형 집에는 왜 라면밖에 없는지 원.”
“제가 라면을 끓이는 일이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잘 먹지도 않는 거 냉장고에 넣어 두기만 하면 상하거나 맛이 변하거나……. 그러니까 식재료는 잘 안 사게 돼요.”
듣다못해 못마땅한 목소리가 절로 입 밖을 뚫고 나간다.
“그러니까 몸이 그 모양이죠. 뼈밖에 없어 가지고.”
“진형 씨도 말랐는데요.”
“나는 보기 좋게 마른 거지만 형은 좀 아니지 않나? 내가 형처럼 못나게 말랐어요?”
“아뇨!”
못나게 말랐다, 하는 말에 기분 상하거나 불쾌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엄청난 말실수를 한 사람처럼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가득하다.
“농담이잖아요, 형.”
이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더 이어지면 되레 이쪽이 민망해질 듯하다.
편의점에서 사 온 것들을 쭉 꺼냈다. 캔에 든 참치와 봉지 김치를 버무려서 기름에 볶고, 계란 풀어서 계란탕을 끓일 참이었다. 마른오징어와 땅콩도 샀으니 소주 안주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거창한 걸 하기에는 시간도 애매했고 재료도 부족했다.
소금과 식용유가 없는 집이라니. 아무리 집에서 뭘 안 해 먹어도 그렇지, 이건 좀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나. 냄비랑 프라이팬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주방에서 보이는 선반 서너 곳을 다 열어 봤지만 어디에도 조미료는 없었다. 편의점에서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사야 해요.’라는 말을 듣고서 반신반의 소금과 식용유를 집은 건 정말 잘한 짓이었다. 졸지에 다시 편의점으로 달려가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미안해요, 진형 씨.”
옆에서 슬쩍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무엇에 관한 사과일까.
아까부터 사죄하기 바쁜 남자다. 진형은 속으로 웃으며 “뭐가요?”라고 물었다.
혼자서만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거? 아니면 눈약 넣기 전에 얼굴을 씻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세수까지 해 버린 거? 그것도 아니면 먹을 거라고는 정말 라면이 전부인 집이니까?
“손님한테 대접을 해도 부족한데 안주까지 만들게 해서요. 제가 뭐 도와줄 건 없을까요?”
다 꽝이었네.
진형은 냉큼 대꾸했다.
“형은 그냥 앉아 있어요. 그게 나 도와주는 거야.”
익숙한 손놀림으로 김치와 참치를 볶는 진형 곁에서 윤민은 안절부절 제자리를 맴돌았다. 안경 너머의 불안정한 눈동자가 미안함으로 시종 떨린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몇 번의 곁눈질 끝에 진형은 웃음을 흘리며 살짝 중얼거렸다.
“형, 그러면 차라리 저리 가서 테이블 세팅이나 좀 해 줘요. 술잔이랑 젓가락 같은 거.”
“아아, 네!”
주어진 임무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윤민이 부리나케 주방을 벗어났다. 토끼처럼 허둥대는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도대체 이 짧은 사이 몇 번이나 웃었을까.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행동거지를 보면서 이렇게 웃어 보긴 또 처음이다. 웃음의 종류는 다양하다. 윤민에게는 미안했지만 거기엔 비웃음도, 쓴웃음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괜히 안쪽이 근질거려서 절로 나와 버리는 영문 모를 웃음도 있다.
진형이 괜찮게 만들어진 계란탕과 김치 참치 볶음을 접이식 좌식 테이블에 내려놓자 본격적인 술자리가 이어졌다.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주며 무리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윤민은 눈이 좀 아프다 싶을 때 약만 넣어 주면 괜찮다고 웃었다. 잠을 못 잔 것도 아니고, 피곤한 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 말에 거짓은 없는 듯했다. 느릿느릿 이어진 윤민의 대답을 다 듣고 나자 그제야 편안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사회적 입장도 다르고 공통분모도 거의 없으니 술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화젯거리가 참으로 빈약했다. 오랜 인연이라면 사생활에 관련된 질문도 거침없이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하물며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던 시끌벅적한 술집과, 조용한 공간에서 단둘뿐인 집은 분위기마저 달랐다.
진형은 이것도 참 신선했다.
끊임없이 입을 조잘거리지 않아도 괜찮은 술자리. 윤민의 속까지는 모르겠으나 진형은 개인적으로는 이 자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너무 이상하고 신기한 기분이에요.”
서로 빈 잔에 술을 따라 주길 서너 번. 가만히 앉아서 테이블에 놓인 안주들을 바라보며 윤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땅콩을 씹던 진형이 그 말에 “어떤 거가요?”라며 대꾸해 주었다.
“진형 씨가 저한테 다시 말을 거는 일은 없을 줄 알았거든요.”
“……!”
뜨끔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가라앉았다. 윤민은 그 표정을 불쾌함으로 착각했는지 서둘러서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그냥…… 제 느낌이 그랬어요. 진형 씨랑 〈웬즈데이〉 정문 앞에서 헤어질 때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거 같아요.”
“왜요?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준비해 둔 것도 아닌데 한없는 진심처럼 얘기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네요. 제가 괜한 말을 한 거 같아요.”
윤민이 말갛게 웃었다.
“난 왜 형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게 궁금한데요.”
“어, 음, 진형 씨랑 저는 너무 다르니까요.”
진형은 말을 잠깐 멈추고서 숨을 고르는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긴장이 몰려왔다.
“진형 씨는 멋있는 사람이고 아는 분도 많은 거 같고요. 저랑 만난 건 진형 씨한테 별거 아닌, 해프닝 정도였을 거 같기도 해서요. 으음. 제 얼굴이나 이름, 저랑 만난 거 자체도 그다음 날 바로 진형 씨 기억에서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말이 반쯤 사실이라 움찔한 가슴속은 일단 무시하고 봤다. 그것보다, 눈앞에서 직구로 멋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상대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게 분명해서, 되레 겸연쩍어지는 자기 자신에게 창피함이 물씬 들었다.
“어떻게 형을 까먹어요. 크리스마스이브부터 크리스마스 새벽까지 함께 보낸 사이인데.”
“…….”
“앞으로 〈웬즈데이〉든 다른 곳이든 나 보면 인사해요. 나도 형 보면 인사할게요.”
거짓말에 이어서 이번에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윤민은 진형이 자기 자신에게 놀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되나요?”
진심으로 한 말이냐고 묻는 듯한 말투였다. 진형은 놀라움으로 움찔거리는 입술에 힘을 꾹 넣었다.
“그래도 되냐니. 형,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제가 시선 많은 곳에서 진형 씨한테 인사하면, 그러면…….”
그리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건 아니지만 진형은 알 수 있었다. 말끝을 흐리며 슬쩍 곁눈질하는 것. 이건 윤민 스스로 생각하기에 무언가 미안한 말을 입에 담고자 할 때 보이는 습관인 듯했다. 도대체 뭘까 하고 들어 보면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들이 태반이라 진형은 왜 윤민이 미안해하는지 이해조차 못 할 게 대부분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윤민이 미안해할 말은 아니었다.
“저 때문에 진형 씨가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할 거 같아서요.”
다만, 이쪽 가슴을 한 번 들었다가 놓기엔 충분했다.
“네?”
뭐야, 이 사람.
반사적으로 큰 소리가 나간 건 뜨끔한 정도가 아니라 사정없이 푹 찔렸기 때문이다.
일순 머릿속이 멍해져서 마땅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는다. 낭패감에 휩싸일 무렵, 윤민은 정말 고맙게도 진형의 상태를 난감함이 아니라 놀라움으로 판단했는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이상한 소리 해서 진형 씨를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니요, 미안할 건 아니지만.”
단지, 엄청나게 정곡이라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진형은 차마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속내를 눌러 죽이며 어설프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긴 해야 할 거 같은데 지금은 입을 놀리는 것보다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침묵만 유지하면 ‘진형 씨가 화난 게 아닐까.’라고 윤민이 거대한 착각을 할 것만 같다. 그건 또 그거대로 난처하다.
“내가 왜 창피해해요?”
일단은 반문이었다. 이거 외에는 지금 당장 떠오르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
“저 같은 사람이 진형 씨한테 인사하면…… 그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 같은 사람이랑 진형 씨가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오해할 테니까요.”
저 같은 사람. 그놈의 저 같은 사람.
그게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전혀 가꾸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듯한 윤민을 보며, 진형도 그간 폭탄이니 지뢰니 비하적인 단어를 속으로 되뇌곤 했었다. 그런데 그걸 그 당사자 입으로 듣고 있으려니 이렇게 거슬릴 수가 없다. 아까 〈웬즈데이〉에서 느꼈던 영문 모를 짜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울컥함이 몰려왔다.
“형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덕분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와, 시발. 나 미쳤나 봐. 소주 세 잔에 벌써 회까닥 돌았냐고.
무턱대고 내뱉은 짜증 어린 목소리를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우리 다른 얘기 할까요?”
“아니, 형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나 아직 대답 못 들었잖아.”
“그게…….”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형 같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잔인한 독촉이라는 걸 아는데. 지금 엄청나게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모를 수가 없는데도. 진형은 지금 그런 것까지 배려하고 생각해 줄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짜증으로 울분까지 느껴진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리고 자기는 윤민과 짧은 시간을 보내면서 도대체 몇 번이나 ‘오랜만이다.’, ‘처음이다.’라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잠시 사이를 둔 윤민이 반쯤 뭉개진 목소리로 기어가듯 대꾸했다.
“제가 외형적으로 너무 못나고 보잘것없어서요. 성격도 많이 소심한 편이고요. 보이는 부분도, 안 보이는 부분도 전부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은 사람이라…….”
가만히 듣던 진형의 눈이 일순 희번덕거렸다.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면!
속으로는 무슨 말을 못 할까. 일단 생각나는 대로 소리 없는 고함을 쳐 봤다.
그렇다면 일단, 그 촌스러운 안경부터 내던지고! 의류 수거함에서 찾을 법한 그 괴상망측한 옷가지들도 좀 내다 버리고! 덥수룩한 머리도 어떻게 좀 하고! 끼니때마다 뭐라도 입에 꾸준히 처넣어서 살도 찌우고! 작달막한 그 키는 어쩔 수 없다지만!
무수히 떠오르는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물론 그럴 순 없었기에 인내심을 최대치로 끌어모아 간신히 참아 냈다. 입은 여전히 열 수 없다. 지금 무슨 얘기라도 꺼낸다면 폭발적인 짜증이 묻어날 게 뻔해서였다.
진형은 그저 묵묵히 소주잔만 비웠다. 언제까지고 입을 닫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울컥함이 조금쯤 가라앉기를 기다리고서,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꿔 가면 되잖아요.”
진형의 중얼거림에 윤민이 살짝 웃었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네?”
“이미 자기 자신의 이런 모습에 익숙한데, 꽤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외적이든 내적이든 고쳐 나가는 건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닌 거 같아요. 타인의 시선보다는 제 익숙함에 만족하는 게 훨씬 마음 놓이고요.”
윤민의 이야기는 진형에게 쉽사리 이해 가지 않았다.
그가 입는 옷을 제 돈 주고 사고 싶지 않은 건 단순히 자기 취향과 백만 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쪽팔리게, 어떻게 저딴 걸 입고 다녀?’라고 생각하는 건 그다음이다.
보기에 예뻐 보이면 사고, 어울릴 거 같으면 사고. 쇼핑에 낯익음이라는 건 없다. 취향은 있겠지만 익숙함은 모른다. 도대체 그놈의 익숙함이 다 뭐란 말인가. 그저 어느 정도의 심미안을 갖춘 사람이라면 옷걸이에 걸린 옷이 괜찮은지 아닌지 정도는 분별할 수 있을 텐데.
“난 잘 모르겠다, 형의 마음을.”
내던지는 듯한 말투에 윤민은 연하게 웃어 보였다.
“진형 씨는 몰라도 괜찮아요.”
왜 난 몰라도 괜찮은데?
스스로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남에게 넌 몰라도 괜찮다고 듣는 것. 단연 후자 쪽이 더 기분 상한다.
진형은 무어라 말하려던 입술을 억지스럽게 꾹 닫았다. 여기서 더 질질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을 얘기다. 윤민의 말에 일일이 울컥하거나 짜증이 나는 스스로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쩐지 휘둘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가장 기분 나빴다.
내가 왜?
시원하게 답이 나왔으면 짜증이 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 * *
왜 짜증이 났는지, 이 짜증을 어떻게 풀 것인지.
그런 모호한 기분으로 마셔서일까.
진형도 주량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남들이 취하면 주변을 정리하고 택시를 태워 보내는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알코올에 해롱해롱 정신을 놓는 일은 여태껏 없었다. 그런 자기가 소주 한두 병에 나가떨어지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오늘 바로 그 드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알싸한 어지러움이 아니라 자칫 눈감으면 그대로 잠들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사나 냅다 필름이 끊기는 일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라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지는 게 진형의 술버릇이었다.
그 뒤로 무슨 얘기를 했더라.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진형이 주말 평일 관계없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말하자, 그도 재택근무라서 주말의 두근거림 같은 건 거의 없다고 했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더니 그가 살짝 웃어 보인 것도 기억났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슬쩍 질문도 했었던 거 같다.
〈형이 주말에만 〈웬즈데이〉에 가는 건…… 주말에만 시간이 생겨서가 아니구나. 커플이 주말에 몰리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대꾸는 없었다. 이번에도 수줍은 미소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기에 진형은 들으란 듯 한숨을 쉬었다. 형이 지금 아저씨는 아니지만 진짜 아저씨가 되기 전에 연애를 해 봤으면 좋겠다는, 진담 반 우스갯소리 반을 섞어 말하자 윤민도 농담 비슷한 걸 건넸다.
〈아마 이대로 할아버지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자기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 같다. 지금 들은 말은 윤민 나름의 농담이지 않겠냐고.
그런 건 너무 씁쓸하고 허무하지 않나?
누군가와 섹스하고 입 맞추는 즐거움을 티끌도 모른 채 그대로 할아버지가 된다는 건.
윤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육체적 쾌락도 살아가는 묘미 중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진형은 속절없이 안타까웠다. 너무 애처로워서였는지 계속 참았던 잔소리가 또 튀어 나갈 뻔했지만 어렵사리 잘 참아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박할 입장은 아니었다. 아니, 입장이라기보다 그 정도의 친분이나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형이 잠깐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섰고, 내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 보다가 테이블에 엎드렸던 것 같다. 그다음 기억이 없으니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진형은 눈을 떴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생김새가 낯설다. 역시 여긴 자기 집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숙취와 두통으로 고생하는 건 남의 얘기였다. 물론 약간은 속이 허한 느낌도 들었지만 이건 밥 한술 뜨고 나면 곧 사라질 느낌이었다. 두통 같은 건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다. 다만, 숙취가 없는데도 오늘 아침만큼은 약간의 패배감이 들었다. 자기가 먼저 잠을 처자다니. 그 ‘아저씨’를 상대로 말이다.
“하하핫, 아저씨…… 푸흣…….”
도대체 어디가 아저씨라는 건지. 팔을 눈가에 걸친 채 나직이 웃던 진형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쩐지 춥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자기 몸에 두꺼운 이불이 단단히 덮여 있다. 누가 덮어 줬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이야기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이 집 주인이 보였다. 그 바람에 진형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가까운 곳에 침대가 있는데도 굳이 자기 옆에서 잠든 윤민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것 역시, 굳이 입으로 듣지 않아도 얼추 알겠다. 아마 물어보면 십중팔구 ‘손님을 바닥에 재우고서 어떻게 저 혼자 침대에서 자요.’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
진형은 저도 모르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잠든 남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늘 얼굴을 덮는 안경을 베개 근처에 벗어 놓은 채 참으로 무방비한 얼굴로 색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니 속단할 순 없지만, 윤민의 잠버릇은 굉장히 얌전한 듯했다.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한 채 숙면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정면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다.
“흐음.”
진형은 허리를 숙여서 무릎에 팔꿈치를 댔다. 턱을 괸 다음 조금 더 본격적으로 윤민의 잠든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마치 잠자리 상대를 눈앞에 둔 것처럼 상대를 위아래로 훑어보게 됐다. 시선만을 이용해 구석구석 살피는 것도 거리낌 없이 가능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에 빠진 사람을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가 잠에 빠져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도 생각됐다.
“보면 또,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단 말이지.”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목까지 덮은 이불 덕분에 볼 수 있는 건 허여멀건 피부를 자랑하는 얼굴뿐이었다. 옷차림도, 행동과 말투에서 묻어나는 소심함도 모조리 없어진 상태다. 그러니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점수를 매겨 보면 지뢰나 폭탄까진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엄청난 동안이 한몫했고, 지저분하지 않은 피부 역시 청결감이 돌아서 좋다. 머리를 숱 쳐서 정돈하거나, 왁스를 사용해 손질해 주면 더더욱 보기 괜찮을 얼굴이다. 윤민을 보는 그 순간 바로 ‘촌스러움’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안경도 그렇지만 이 머리 역시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형은 역시 웃어야 진국이네.
미안함 혹은 고마움이 가득한 눈빛. 감정을 눈동자로 표현할 때마다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옅은 미소. 이 조그마하고 희끄무레한 얼굴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표정.
멍하니 윤민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진형이 턱을 대고 있던 슬쩍 팔을 내렸다. 베란다로 시선을 돌리자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이부자리 바로 옆에 놓인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아침 7시를 막 지난 참이었다. 역시 겨울의 아침은 늦다.
“난리도 아니네.”
휴대폰 상태 표시줄에는 단톡방의 메시지들이 즐비했다. 단톡방 멤버는 어제 저녁때 만났던 일행들이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소리를 떠든 거야.”
너 설마 그 폭탄이랑 모텔을 잡았냐, 우리를 버리고 미친 거 아니냐. 온갖 말도 안 되는 추측들과 불평이 단톡방을 수놓았다. 그걸 읽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도 없어서 조금 웃고 말았다.
접이식 테이블이 치워진 주변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이부자리를 마련한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주변을 죄다 정리하고 청소한 다음 잠을 청한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혀가 내둘러졌다. 조금 전 단톡방을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당황함이다.
이 사람도 주량이 장난 아니구나. 소주 몇 병까지 물처럼 마실 수 있는 거지? 게다가 보통 술 마시면 늘어지는 게 사람인데 그 와중에 청소까지 하고 잤단 말이야?
혀가 차이는 것도 부족해서 고개마저 설레설레 저어졌다. 깊게 잠든 하얀 얼굴에 한 번 더 시선을 준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윤민이 깨지 않도록 소리 죽여 이불을 개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의점에서 칫솔도 살걸.
아쉬운 대로 일단 세수를 했다. 클렌징 폼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풋내 풀풀 나는 오이 비누는 생각지도 못한 장벽이었다. 잠시 좌절했지만 별수 없다.
대강 씻었겠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비교적 친분이 있었다면 잠깐 늘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 안쪽이 말랑말랑했지만 애써 자기 상태를 무시했다.
이따 일어나면 그는 또 무언가를 시켜 먹으려나.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사 먹거나.
진형은 옷걸이에 윤민의 코트와 나란히 걸려 있는 패딩에 손을 뻗으며 부엌을 바라봤다. 이 집 냉장고에 최소한의 식자재라도 있었더라면 보답 삼아 뭐라도 좀 만들어 놓고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다음에 마시게 되면 내 집이 낫겠네.
갑자기 든 생각에 스스로 놀라,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다음은 아마 없겠지.
아니, 없었으면 좋겠다.
내 무덤 내가 팠으니 어쩔 수 없이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더라도.
술이라도 덜 깬 거냐며 자기 머릿속을 마구 혼쭐낸 다음, 진형은 윤민에게 다가갔다.
제법 소리를 죽여 움직이고 했지만, 그는 역시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드는 타입인 듯하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확인한 자세에서 미동조차 없다. 저렇게 요지부동으로 숙면할 수 있다는 게 몇 번이고 감탄을 자아냈다.
푹 잠든 사람을 깨우는 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형은 윤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한두 번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거세지는 미안함을 꾹 눌러 죽이며, 조금 더 세게 흔들자 그가 드디어 잠에서 깬 듯 실눈을 떴다.
“진형 씨……?”
눈을 깜빡거리는 윤민과 시선을 마주하며 진형은 머쓱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네, 형. 깨워서 미안해요. 그런데 문 안 잠그고 나가는 건 좀 마음에 걸려서.”
“아…… 가려고요?”
“네, 가야죠.”
윤민이 굼뜨게 상체를 일으키고서 안경부터 찾았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큼지막한 안경이 걸쳐지는 게 내심 안타까웠다. 진형은 애써 시선을 돌리고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내가 잠든 사이에 형이 다 술자리를 치운 거냐고 묻거나. 형도 꽤 주당이라거나. 오이 비누보다는 다른 것으로 세안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거나.
혼자서 생각했던 것들을 말로 옮길 기회가 현관으로 나서기 전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진형은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술자리는 끝났다. 맨정신인 상태에서 얘기가 길어지는 건 어쩐지 피하고 싶었다. 이 집을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전부였다.
“잘 마셨어요, 형. 그럼 이만 갈게요.”
“네. 저도요. 조심해서 가요.”
짤막한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바로 현관을 등졌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얼굴부터 차가워졌다.
오늘 아침도 여전히 추웠다. 따끈따끈한 집 안에 있다가 갑자기 바깥 공기에 노출된 얼굴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션을 깜빡했다. 아니, 그 집 화장실이나 어딘가에 로션이 있긴 한 건지도 의문스럽다.
이 근방은 한 번도 온 적 없었지만, 어찌 됐든 차도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버스를 타도 괜찮고,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다면 더욱 좋다. 〈웬즈데이〉에서 택시로 20여 분 남짓이었으니 자기 집과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아.”
그걸 깜빡했다.
걸음을 옮기던 진형이 다리마저 멈춘 채로 낮게 신음했다. 술이 좀 들어갔을 때 계속 궁금했던 게 있었다. 은근슬쩍 물어보겠다고 타이밍도 재고 있었는데 잠드는 바람에 기회가 날아갔다.
당신의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던 그 사람은 유부남과 노멀, 둘 중 어느 쪽인지. 아니면 양쪽 다인지.
“그거 듣는 것도 꽤 재미있었을 텐데.”
물어보면 분명히 대답을 해 줬을 거다. 아마 뚱딴지같고, 같잖고, 자기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조잘거렸을 텐데.
뭐, 나중에라도 혹시 기회가 생긴다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또 모르는 일이다.
어제저녁, 충동에 백기를 흔든 것처럼. 윤민이 혼자 앉아 눈을 비비고 있는 걸 보며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던 것처럼.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