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Prologue​​ (1/10)

감정 소모 1권 @중독

Prologue

흡연자가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잠깐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던 진형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기가 차디찼다. 어서 따뜻한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 반면 너구리굴 같은 흡연 부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다는 욕망도 컸다.

승리는 후자가 차지했다.

남의 담배 연기를 옆에서 맡느니 차라리 자기가 피우고 만다는 흡연자가 꽤 많을 거였다. 거기에, 겨울은 춥지만 담배의 맛이 각별해지는 계절이기도 했다. 그걸 즐길 수 있는 이 계절에 마음껏 즐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윽고 진형이 도착한 곳은 제법 유명한 게이바인 〈웬즈데이〉의 뒷문이 나 있는 골목이었다. 일전에 〈웬즈데이〉의 직원인 지선호가 직원들이 종종 이곳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알려 주었다.

해만 떨어져도 인적이 뚝 끊기는 이 골목에는 최근 〈웬즈데이〉 사장이 직원들을 위해 몇 개의 의자와 쓰레기통을 설치해 두었다. 물론 이 추운 밤에 굳이 얼음장 같은 의자에 잠깐이라도 엉덩이를 걸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진형은 쓰레기통 근처에 우두커니 선 채로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 진형 씨다.”

허공에 연기를 뱉을 때마다 숨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릴 정도로 사방이 조용했다. 그 정적은 〈웬즈데이〉의 뒷문이 벌컥 열리며 깨졌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음성을 듣자마자 이곳을 알려 주었던 사람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진형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대꾸를 날렸다.

“딱 들켰네.”

머쓱하게 웃어 보였더니 선호 역시 씩 웃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여길 이용하려면 들키는 것도 각오했어야지!”

“그건 그러네요.”

옆으로 다가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선호를 힐끗 쳐다보며 진형이 물었다.

“사람 많아요?”

“말도 마. 장난 없어. 나 다리가 후들거린다니까?”

말을 마치며 선호가 의자에 털썩 몸을 앉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말은 농담이 아닌 듯하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얼음 같은 의자에 앉는 걸 보니 그 피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죽겠다. 오픈하자마자 한자리에 30초 이상 서 있어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그 정도예요?”

“심지어 아직도 계속 몰리는 중. 이젠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제때 문 닫고, 제때 마감하고, 제때 퇴근할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하여간 내가 지금 이렇게 늦장 부리면서 담배 빨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거지.”

말을 하면서 마음도 다급해진 모양이다. 선호는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비벼 끄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진형 역시 다 피워 가는 담배를 끄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안에 앉을 자리 있어요? 나 헛걸음한 거 아니야?”

“어? 어디 보자…….”

선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다음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큰일이다. 없을 거 같은데?”

“그럼 이대로 집에 가면 되는 건가요.”

진형이 등을 돌리는 시늉을 하자 선호가 냅다 손목을 잡아 왔다.

“어허, 여기까지 와서 그건 좀 아니지.”

“자리 없다면서요.”

“어떻게든 되겠지 뭐!”

선호가 기세 좋게 진형의 팔을 끌고서 안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역시 자리가 없다는 거다.

진형은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질려 버렸다.

바의 카운터며 널찍한 공간에 놓인 테이블까지 사람 머리로 빼곡하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흡사 시장 바닥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웬즈데이〉 내부가 좁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아니다. 히터에서 나오는 텁텁한 공기와 사람 체온이 뒤섞인 공간은 답답했고, 숨조차 막혀 왔다.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직원과 사람들로 인해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초 단위로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쳤다.

“가야겠다.”

툭 던진 말을 선호가 용케 들은 모양이다.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을 향해 진형이 키득거렸다.

“괜찮아요.”

사람이 고픈 것도 아니었고 섹스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단지 술이 목적이었다.

〈웬즈데이〉는 진형이 아는 곳 중 가장 기분 좋게 혼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긴 손님이 말을 걸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대화를 청하는 법이 없는 사장이 있었다. 오늘은 술만 마시러 왔노라고 말하면 연락처니 합석이니 알아서 거절해 주는 직원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였나.

정문 근처에 형형색색 전구를 휘감은 트리가 있었다. 진형은 쓰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짝짓기에 불이 붙는 날에 여기를 찾은 게 잘못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진형은 이벤트에 무뎠다. 특정한 사람과 만나 연애라는 걸 해야 그나마 이런 걸 챙겨야 한다는 게 기억나기 마련이다. 현재는 자기에게 연인들의 행사를 일깨워 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 솔로에게 크리스마스라는 건 이렇듯 어딜 가도 사람이 붐벼서 짜증만 나는 날이다. 오늘 편의점에서 콘돔이 아주 불티나게 팔렸겠구나. 근방 모텔이며 러브호텔은 이미 넘쳐나는 커플로 공실이 없겠구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만 들었다.

“미안해, 진형 씨.”

풀죽은 목소리를 들은 덕분에 잡생각에서 벗어났다.

“나오기 전에 카운터에 한두 자리 정도는 남았던 거 같아서 끌고 온 건데. 그게 언제 다 찼지.”

“괜찮다니까요.”

“으아, 오늘 술 마시러 온 거야?”

만약 사람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당장 어딘가에 합석이라도 시켜 줄 기세였다.

실제로 합석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거였다. 진형 스스로도, 또 선호 역시도 진형이 제법 인기 많고 잘나가는 탑이라는 걸 모르지 않으니까. 지금도 테이블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통행로를 피해 구석에 서 있는 선호와 진형을 힐끗힐끗 눈짓하느라 바빴다.

“네. 혼자서, 술.”

진형이 ‘혼자서’라는 말을 굳이 강조하며 싱긋 웃자 선호의 얼굴이 더더욱 울상으로 변했다.

“아, 미치겠네. 그럼 준비실에서 나랑 맥주라도 깔까? 앞으로 한 대여섯 시간만 기다려 줄 수 있어?”

“하하하!”

이런 날에 혼자 술을 마시러 온 단골이 측은해 보인 걸까. 아니면 억지로 끌고 와서 이대로 휙 보내기가 미안하기라도 했던 걸까. 선호가 쓴웃음 반 장난기 반을 섞어서 던진 말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정말로 괜찮다고. 나중에 다시 오겠노라고.

진형이 그런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저기, 선호 씨…….”

선호는 자기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옷을 살짝 잡아 오는 기척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선호가 등을 휙 돌리자 진형도 얼떨결에 같은 곳으로 몸을 틀었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2인석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 한 명에게로 향했다. 옷을 잡아끈 손이 서둘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앗! 윤민 씨.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두 분 대화를 들었어요. 그러니까 저분만 괜찮으시다면 여기 앉아서 드셔도 될 거 같은데. 저도 어차피 술만 마시러 온 거니까.”

진형은 남자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답답해 보일 정도로 덥수룩한 앞머리며, 정돈되지 않아 이리저리 삐죽삐죽 솟구친 옆머리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단골이라는 딱지가 붙을 정도로 최근에는 〈웬즈데이〉에 열심히 다녔다. 지금도 눈에 익은 얼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선호가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할 정도면 이 남자도 제법 〈웬즈데이〉에 자주 오는 사람인 게 확실했다.

남자의 말에 선호가 반색하며 슬쩍 진형에게 시선을 던졌다. 합석에 응할 생각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눈빛에 잠시 고민했다.

진형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바텀이다.

남자가 안는 것보다 안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마에 써 붙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의 감 좋은 레이더가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 탑이었다면 별생각 없이 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텀인 남자의 테이블에 합석하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지금은 얌전해 보이는 이 남자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대뜸 우리 나가서 모텔을 잡자고 돌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섹스도 좋아하고 원나잇 역시 꺼리지 않는다.

다만 오늘은 그다지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사람의 체온과 호흡보다는 알코올의 알딸딸함이 더 당기는 날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남자는 폭탄 수준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지뢰급으로.

초면에 폭탄이라고 생각하는 게 미안하기는 했다. 그래도, 자기 취향에서 한없이 먼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옷차림. 거짓말 좀 보태서 좋게 말해 보자면 수수하다.

즉, 같이 다니기에 부끄러운 수준이라는 거다.

몇 살인지도 도통 가늠이 되질 않았다. 얼굴을 덮은 노티 나는 안경과 어스름한 조명 때문에 나이대가 제대로 분간이 안 됐다.

섹스 상대의 용모와 스타일은 중요했다. 그게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점이자 시작점이었다. 잠깐의 하룻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평상시의 얼굴이 도무지 직시하지 못할 수준이면 침대에서 붉게 상기된 얼굴을 바라봐 봤자 무슨 짓을 해도 흥이 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스타일을 보는 건 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얼마만큼 돌보는지 알 수 있는 척도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옷차림이 말끔하고 세련된 사람일수록, 그 옷을 벗겨 놨을 때도 신체를 보며 실망하지 않을 확률이 더 컸다.

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았다. 그럭저럭 준수하다고 생각해서 방을 잡고 침대로 데려갔어도 언제나 고비는 존재했다. 전부 벗기고 보니 세 겹으로 접히는 복부비만의 뱃살을 마주하게 됐을 때라든가. 그러면 열이 모이던 하반신이 급속도로 식었고, 결국 도저히 못 하겠다며 방을 등졌다.

며칠 전에도 폭탄에게 걸린 적이 있었다. 상대가 목욕 가운을 벗는 순간, 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여드름의 행렬을 마주하게 됐다. 그 즉시 구역질이 몰려왔다. 오돌토돌한 여드름이 들러붙은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엄두는 도무지 나지 않았다. 당신 피부가 더러워서 정말이지 못 해 먹겠다고 말한 순간, 협탁 위에 있던 휴지며 수건 등 온갖 것들이 날아왔다. 난동 부리는 상대를 버려두고 방을 등지면서 ‘이제부터는 피부 상태도 물어봐야 하는 건가?’라는 고민을 꽤 진지하게 했었다.

그래. 뭐. 괜찮겠지. 술 한잔 걸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뭐하니까.

진형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남자가 이따 모텔을 잡자고 하면 너 혼자 가세요, 하고 말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굵디굵은 안경테가 걸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며칠 전의 여드름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옆에 서 있는 선호가 안절부절 눈알을 굴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제 슬슬 미안해질 지경이다. 더 기다리게 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다.

진형은 픽 웃으며 남자에게 “그럼 감사히, 좀 앉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테이블의 주인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진형을 주시하던 선호는 그 대답이 퍽 반가웠는지 “그렇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것보다야 낫잖아!”라고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머지않아 그리 넓지 않은 2인석 테이블에 진형이 주문한 안주와 술병이 들어섰다. 선호가 사장에게 ‘고맙게도 합석을 청해 주고 응해 준 손님들’이라고 입김이라도 넣었는지 서비스라고 내주는 과일과 감자튀김이 몹시 호화로웠다.

진형은 술잔에 술을 따라 가볍게 몇 모금 들이켰다. 이제야 잠시 어딘가에 외출했었던 정신이 머릿속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아까는 인파에 짓눌려서 현기증까지 났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이 이윽고 정면을 향했다.

남자는 진형이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잊은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서비스로 나온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본인이 시켰던 기존의 것들만 건드릴 뿐이다. 마주 앉아 있음에도 마치 테이블 중앙에 담벼락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진형의 입술이 살짝 비죽거렸다.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워서였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남자는 손톱만큼도 이쪽에 관심이 없다. 조금 전 모텔 운운하던 머릿속이 부끄러워질 정도다. 자기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이 남자의 입술이 열릴 일은 일절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같이 드세요. 저한테만 나온 거 아니니까.”

“아…….”

안주를 권하는 말에 남자는 그제야 진형의 존재를 인식한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드세요.”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입술이 달싹거렸다. 친했더라면 당장에 립밤을 내밀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흉하게 부르튼 입술보다 더 거슬리는 게 있었다.

우와, 지금 귀찮아한 거 아냐?

남자의 메마른 말투에 진형의 입술이 다시금 휘어졌다. 절로 나오는 웃음은 물론 좋아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헛웃음이다.

지금 순간적으로 기분이 약간 상하고야 말았다.

물론 세상의 모든 바텀이 자기를 열렬히 환영하고, 웃음을 흘리고, 다리를 벌리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었다. 자기가 눈앞에 있는데 이 정도의 냉담함을 보이는 이는 이제껏 없었다.

진형은 술잔이 아닌 얼음물이 담긴 컵을 들었다. 목구멍을 얼얼하게 하는 물을 몇 모금 들이켜며 시선을 줄곧 남자의 얼굴에 고정해 두었다.

남자랑 시선 한 번 마주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일부러 이쪽을 피하는 거 같진 않았다. 단순히, 정말로 믿어지진 않지만 자기가 앞에 앉아 있든지 말든지 이미 남자는 상관없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형이 한 번 헛기침하고서 밝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날에 굳이 혼자 술 마시러 오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을 거는 목소리에도 아래로 살짝 기울어진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을 차지한 건 접시에 담긴 땅콩과 구운 오징어였다.

아마도 무시당한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남자는 자기의 말을 듣지 못한 거다. 관심을 일절 두지 않으니, 이쪽이 뭐라고 떠들든 남자에게는 소음과 비슷한 수준이겠지.

진형은 또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치근덕거리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치근덕거리는 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긴 누구야. 딱 봐도 나지.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 가슴을 태웠다. 몸도 완전히 더워졌다. 입고 있던 겉옷을 훌렁 벗어서 의자에 걸쳐 놓았다. 계속 패딩 주머니에 푹 찔러 놨었던 두 손을 무심코 겹쳐 잡아 봤다. 뜨거웠다. 술 몇 잔에 이렇게 될 리가 없으니 다른 이유의 뜨거움이다. 심지어 한번 불이 붙은 열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진형이 슬쩍 왼손을 뻗었다.

남자의 시선을 독차지한 접시 근처까지 손끝을 옮겨 테이블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있는 대로 힘을 준 탓에 경박한 소리가 꽤 크게 났다.

어쭙잖은 목소리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렸던 남자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어 시선을 마주해 왔다.

진형이 씩 웃으며 속삭였다.

“제가 지금 무슨 말 했는지 들었어요?”

“네?”

나한테 무슨 말 했어요?

남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충 예상은 했다. 진형이 일부러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혼자 마시기 쓸쓸해서, 그러니까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 저한테 합석하자고 한 줄 알았어요. 이제 보니까 그게 아니었나 봐요?”

진형의 말에 남자가 꽤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 그런 건 아니었는데.”

“…….”

남자가 말을 마치며 흉측한 안경을 벗었다. 잘 보이지 않았던 눈가가 드러나자 보이는 짙은 다크서클을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내렸다. 안경알을 클리너로 닦는 손끝을 멍청히 바라보며 픽 웃고 말았다.

오늘 도대체 몇 번째 헛웃음을 짓는 걸까.

진형은 말문까지 턱 막히고 말았다.

마치 눈앞에서 ‘착각도 유분수지.’라고 적힌 현수막이 펼쳐진 듯했다. 지금 이 순간 얼굴까지 확 달아오른 걸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들끓어 올랐다.

혹시 이거 완전 선수 아냐?

불쑥 든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그럴싸하다.

일부러 살살 긁어서 넘어오게 하는 전략 같은 건가?

진형은 목이 늘어나고 보풀이 일어난 티셔츠를 시선으로 훑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긴, 이런 폭탄이면 뭐라도 한 가지 재주가 있어야 남자를 잡아먹든 후려 먹든 했겠지.

차라리 선수라면 유쾌하긴 할 거다. 적어도 자기에게 관심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니까. 계산된 행동으로 사람을 애태우는 여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형이 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그저 눈만 끔뻑거릴 뿐이다. 먼저 말을 걸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대화를 진행하는 건 또 이쪽의 몫인 듯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굳이 혼자 술 마시러 오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하고 말했어요.”

“네?”

“아까 그런 말을 했었는데 대답이 없어서 엄청 민망했고요.”

“아……. 그랬구나.”

대답은 그게 다였다.

남자의 조그마한 입술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꾹 닫혀 버렸다. 그걸 확인하고서 진형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지금 그쪽을 귀찮게 하는구나. 그렇죠?”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빛이다.

“아닌데요.”

“진짜 아니라면, 그럼 말 상대 정도는 좀 해 줘요. 저도 오늘 혼자 마실 생각으로 오긴 했지만 그래도 기왕 이렇게 합석했는데, 서로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마실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진형은 일부러 생글생글 웃어 가며 말을 꺼냈다.

남자는 잠시 뒤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단답형에 이어서 이번에는 고갯짓이다.

지금 이 몇 분의 짧은 대화로 확실히 결론 났다.

이 남자가 선수든 아니든 이제 그런 걸 의심하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정말로 자기에게 관심이 손톱만큼도 없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없다.

“남진형이에요. 이제 며칠 있으면 스물넷이고요.”

자기가 먼저 이름과 나이를 깠으니 이번에는 남자의 차례였다. 한데 그의 차례라고 생각한 건 또다시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전처럼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이다. 그것도 마치 이름과 나이를 들었으니 어떠한 반응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예의상 해 주는 끄덕임으로 보였다.

이번만큼은 한없이 민망해졌다. 남자의 눈빛이 마치 ‘갑자기 그걸 왜 말해? 나 안 물어봤는데? 안 궁금한데?’ 하고 말하는 듯 보였다.

“뭐야. 저만 까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쪽은요?”

진형의 말에 남자는 그제야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고윤민이고 나이는 서른둘…… 아, 곧 서른셋이 돼요.”

손뼉 치며 감동의 환호라도 질러야 하는 건가.

남자와 마주 앉고 나서 가장 장문의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선호에게 합석을 권할 땐 곧잘 말하더니. 그것도 자기에게 어지간히 마음이 없었다는 증거의 하나로 여겨져서 한 번 더 마음이 상했다.

“생각보다 나이가 좀 있네요? 동안이다. 어쩌면 제 또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동안까지는.”

“뭐라고 부를까요? 형? 아니면 윤민 씨?”

“편한 대로요.”

집에 갈까.

불쑥 그런 마음이 들었다.

벌써 지쳤다. 오늘 대화를 계속 이런 식으로 자기가 이끌어 나가야 하는 거라면 지금보다 더 지칠 게 눈에 훤했다. 어떤 말을 해도 단답형이 돌아오니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 리도 없다.

아아, 오늘 왜 나왔지. 집에나 있을걸.

아까 선호의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하며 앉을 자리 없음’을 들었을 때 그 즉시 발걸음을 돌렸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합석 권유를 물리치고 자리를 뜨는 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진형은 스스로 사서 고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쯤 억울하기까지 했다.

아니,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뭐 하는 거지?

진형은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스스로 되물어 보았다. 다 떠나서, 자신의 태도도 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시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서 마시러 왔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인 줄 알아차렸더라면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기어 나와서 여기 앉아 있다. 그러니 난데없는 무관심 공격 같은 건 그냥 웃어넘기면 된다. 원래 목적한 술이나 마시고, 기분 좋게 취했을 때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그만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난 왜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의 무뚝뚝함에 이토록 부아가 치밀까. 심지어 어떻게든 환심을 사려고 환장한 새끼처럼 웃음까지 지어 올리고 있다. 정말 모를 일이다.

진형이 입을 다무니 예상대로 테이블은 정적이 흘렀다.

앞뒤 좌우로 사람들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틀어 놓은 음악이 다름 아닌 캐럴이라는 것도 이제야 알아차렸다.

다시 한번 실소가 터졌다. 얼마나 정신이 팔렸던 걸까. 앞에 앉은 남자에게 신경을 기울였을 때 주변이 저절로 음소거가 됐던 거 같다.

선호에게 이끌려 왔을 때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앉고 나니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정신이 없어진 거다.

기계적으로 술잔을 비웠다. 주문한 술을 다 마시고 나면 그 즉시 이 자리를 뜨겠노라고 다짐도 했다. 집에서 나올 땐 막차 타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대로라면 그렇게까지 늦지 않을 듯하다. 여유롭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집 근처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 들고 혼자만의 조촐한 2차라도 해야지.

차라리 처음부터 그랬으면 좀 좋았을까.

진형이 늦은 후회를 하며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였다.

“저도 오늘은 저뿐이라고 생각했어요.”

“……?”

술잔만 쳐다보다가 앞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두어 번 치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까, 그런 말 했다고 해서. 이런 날에 혼자 술 마시러 오는 사람…… 저도 오늘 저 혼자일 줄 알았어요.”

마른 웃음이 터졌다. 너무 늦은 대답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남자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한 거 같아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지금 그의 모습과 아까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쪽이 입을 닫아 버리니 남자는 당황했을지 모른다. 마음 상하게 한 거 아니냐며 걱정도 조금쯤은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오늘은 감정 기복이 심한 날인 거 같다.

“2인석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좀 미안했고요.”

“아, 그래서 저한테 대뜸 합석하라고 하신 거예요?”

진형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남자가 연하게 웃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지은 미소는 금방 사그라졌지만, 그 잔상이 머릿속에 제법 오래 남았다. 처음 본 남자의 웃음은 꽤 묘한 구석이 있었다.

구미가 당긴다고 해야 하나.

“혼자서 마시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가끔은. 근데 집에서 먹긴 또 싫고.”

진형의 말에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그다음 조금 사이를 두고 입을 벌려 “맞아요.”라고 대꾸를 건넸다. 그의 행동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조금 전 침묵으로 일관한 게 꽤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든 대답을 돌려주려 노력하는 게 보여서 제법 마음이 근질거렸다.

“죄송해요.”

조금 사이를 두고서 흘러나온 사과에 진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모르겠다. 아까 느끼긴 했지만, 이 남자의 화법은 너무나도 두서가 없다.

“뭐가요?”

“제가 말주변이 워낙 없어요.”

“아.”

답답하던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졌다. 남자의 계속된 침묵이나 단답형은 그저 부족한 말솜씨가 낳은 결과인 듯했다.

진형이 비로소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남자는 이쪽을 응시할 생각이 여전히 없는 거 같다. 그는 접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랑 말하는 거 자체가 좀 익숙하지 않아서. 낯설어요.”

“진짜요? 사회생활 하면 그러기 어렵지 않나요?”

“저는 집에서 혼자 일해서요.”

“와아, 재택근무!”

달라진 건 없다. 남자는 역시 진형에게 관심이 없는 게 맞다.

적어도 이상한 호감을 사려고 일부러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화술에 뛰어나지 않다는 점도 분명 사실일 것이다. 이 몇 마디를 주고받는 동안 그의 고군분투가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다행이네요.”

“네?”

“제가 귀찮게 치댄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진형이 농담을 섞어 던진 말에 그가 몹시 당황한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손사래까지 친다.

“아니, 정말로 그런 거 아닌데.”

“네, 이제 알겠어요. 그래서 다행이라고요.”

진형이 눈가를 찡긋하며 웃자 남자도 어설피 웃음을 되돌렸다. 그 미소가 너무나 수더분해서 가슴이 또다시 간지러워졌다.

저 구시대 고리짝 유물 같은 안경 때문일까. 아니면 남자가 워낙 순하게 생겨서 그런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가 웃을 때면 괜스레 마음 한쪽이 들썩거렸다.

“그럼 제가 주로 떠들 테니까 간간이 맞장구라도 쳐 줘요. 혼자서 주절주절 떠드는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게끔. 아셨죠?”

농담 섞인 투정이 끝나자 멍하니 있던 남자가 이윽고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급하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형은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막차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 술을 좀 더 시켜도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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