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보슬보슬한 저녁
도화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다. 도명은 집에 없었다. 도화의 시선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케이크 상자에 가려는 순간, 도명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주인만 기다린 개처럼 바로 고개를 획 돌려 도명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도명을 향해 졸래졸래 달려갔다.
도명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고 도화가 눈을 꾹 감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도화의 이마에 도명의 입술을 꾹 찍었다.
“도명 씨, 오늘은 순두부찌개 먹고 싶어서 바지락하고 순두부 사 왔습니다. 순두부찌개 할 줄 압니까?”
“자기야.”
도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도화를 쳐다보았다.
“네.”
“내가 그깟 순두부찌개 못 끓일 것 같습니까?”
“그 막 불 맛도 낼 수 있습니까?”
“불 맛 그까짓 거 손으로 툭 치면 나는 겁니다.”
“내가 너무 도명 씨한테 이것저것 해 달라고 조르는 건 아니에요? 힘들면 말해요. 나는 이런 거로 막 사랑이 변했다고 하는 사람 아닙니다.”
“나는 웬만하면 도화 씨 먹고 싶은 거 다 해 줄 겁니다. 못하면 배워서라도.”
“도명 씨, 빈말이라도 정말 고마운 말이에요.”
“진짜 빈말 아닌데요.”
“진짜요?”
“네. 그런데 도화 씨,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나 악착같이 내가 베푼 호의와 선의 받아 냅니다.”
“아 진짜요? 날 상대로도?”
“도화 씨니까 내가 사채 이자 안 받는 겁니다. 기억해요. 세상에 공짜 없어요.”
도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방에 섰다. 그리고는 도화가 사 왔다는 재료들을 하나둘 열어보았다.
도명은 바지락을 열어보자마자 인상을 팍 쓰며 옷 갈아입으러 가는 도화에게 다시 이리로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도화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일단 도명에게 다가갔다.
“왜, 왜요?”
“도화 씨 바지락 사 온 꼬락서니 봅시다. 이런 걸 돈 주고 사 왔습니까? 어떻게 아직 장 볼 줄을 몰라요.”
“잘못했어요. 아니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 도명 씨가 잘못 골라왔다고 하면 타당한 이유가 있겠죠.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좋은 바지락을 구분하는지 알려 주면 다음엔 제대로 사 오겠습니다. 제가 차분히 알려 주면 또 잘하잖아요. 아니 근데 바지락 고르는 걸 알려 주지 않았잖아요. 두 번 같은 거로 잘못한 것도 아닌데 너무 표정 심각한 거 아니에요?”
도명이 여전히 도화를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자 도화가 다시 깨갱대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을 말로만 때우는 건 진짜 잘못을 뉘우친 게 아니죠.”
“네?”
“어차피 갈아입을 옷, 여기서 엉덩이 깝시다. 식탁 잡고 엉덩이 까요.”
“네?”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우리 공동 생활비 이렇게 허투루 쓸 작정입니까?”
“아니, 그게.”
“무슨 욕실 매트를 5만 원짜리를 결제했냐고 나한테 그렇게 뭐라 하던 사람 어디 갔습니까?”
“욕실 매트가 5만 원이면 비싸긴 비싸죠.”
“그래서 매트 좋아요? 안 좋아요?”
“촉감이 좋긴 하더라고요. 발에 물기도 깔끔하게 잘 빨아들이고.”
“촉감 좋고 관리 잘하면 정말 오래가고 예쁩니다. 좋은 거 샀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도명 씨, 저는 4000원 쓴 건데요.”
“도화 씨, 4000원은 돈 아닙니까?”
‘야, 이 오만 원아!! 정확히 51400원아!’
도화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만 뻐끔거렸다.
“난 좋은 거 샀잖아요. 1년 365일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밟는 겁니다. 돈 쓴 걸 뭐라 하는 게 아니라 괜찮은 걸 사야죠. 어디서 물에 담가진 상하기 직전 조약돌을 사와 놓고.”
“아니, 잘못했는데. 아. 그.”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뭐해요. 그럼.”
도화는 우물쭈물하며 정장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렸다. 그리고는 제법 숙련된 섭답게 엉덩이를 똑바로 내밀고 자세를 곧게 잡았다. 도명은 자신의 허리에 있는 벨트를 풀어서 도화의 엉덩이를 후려졌다. 도화는 이게 대체 무슨 생활인가 싶었다.
하지만 벨트로 어느새 자연스럽게 맞고 있는 자신이 황당했다. 이 와중에 달아오르는 것도 말이다.
도화의 손이 테이블 모서리를 꽉 쥐었다. 도명은 도화가 슬슬 달아오른다고 생각할 때 가죽 벨트 매질을 멈췄다. 도화가 달아오르다 만 엉덩이를 하고 주섬주섬 바지를 올리려고 하자 도명이 제지했다.
“어차피 갈아입을 건데, 뭘 올려요.”
“아. 네.”
도화는 도명의 앞에서 빨개진 엉덩이를 괜히 가리며 옷을 갈아입으러 주섬주섬 드레스 룸으로 갔다. 그러다가 문득 울컥해서 문에 들어가다가 말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데요. 도명 씨 제가 잘못하긴 했는데 매 맞을 정도로 잘못한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음.”
도명이 도화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혀를 찼다.
“왜. 왜요?”
“자기야, 제발 SM 기본기 좀 익힙시다. 왜 내가 아직도 기본기 설명하고 있는 겁니까.”
“아!”
“네. 바지락이 문제가 아니라 도화 씨가 뒤돌아서는데 엉덩이가 너무 봉긋하니 예쁘잖아요. 뭐로든 갈길 수밖에. 누가 엉덩이가 그렇게 갈기고 싶게 생기래요?”
“아. 음. 네.”
그제야 도화가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여전히 엉덩이가 화끈하고 달아올라 요리하는 도명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이 짐승 같은 생활이라니. 도화는 도명에 대한 공격 욕구가 더 달아오르기 전에 급하게 이제는 익숙해진 홈웨어를 찾았다. 양모로 만든 하얗고 보슬보슬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도화는 옷을 다 갈아입은 후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도화는 가자미눈을 하고 도명이 요리하고 있는 거실로 터벅터벅 나왔다. 도명은 도화가 나오자마자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화의 모습을 열심히 찍어댔다.
“내 홈웨어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왜요. 원단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입는 거라면서요. 그게 토끼 모양이든 백구 모양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저기요.”
“왜요. 30 찍고 토끼 옷 입는 거나 백구 옷 입고 있는 거나 무슨 대단한 차이라고요.”
“대단한 차이이죠.”
“무슨 차이요?”
“진짜 내가 도명 씨가 키우는 개 같잖아요.”
“내가 키우는 개 맞죠. 내가 주인이고.”
도명이 국자를 깨끗한 접시에 내려놓고 도화의 볼을 살포시 뭉개며 말했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도화는 도명 같은 사람이 자신을 보며 해맑게 웃자 가자미눈을 옆으로 굴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봐 줬어요. 내가.”
“고마워요.”
도명이 도화의 하얀 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기며 도화를 예쁘다고 해 줬다.
“아니 대체 이건 언제 바꿨대. 요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정원 설계 건으로.”
“오래 안 걸렸습니다. 오전에 시간이 애매하게 비워서 한 30분 작업한 것 같습니다. 명품 정장 수선까지 하는 사람이 겨우 이런 코스튬 옷 고치는 건 일도 아니죠. 걱정하지 말아요. 고생 안 했어요. 오히려 너무 상쾌한 기분으로 작업했습니다. 골치 아픈 서류 보다가 좋아하는 거 하니까 기분전환도 되고 좋더군요.”
“걱정하지 말아요. 도명 씨 수고스러운 거 걱정은 안 했으니까요.”
도명은 도화의 반항이 가소롭다는 듯이 푸시시 웃었다.
“아. 엉덩이 만져 봐요.”
“네?”
“꼬리 밑 부분 손가락 집어넣고 만져 보라고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동공을 확장했다. 왠지 겁이 나서 엉덩이 부분을 만지고 싶지는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정말 알고 싶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명이 집요하게 도화의 손을 잡고 자신이 말한 지점을 강제로 만지게 했다. 도화는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손가락 끝 감각을 부정했다.
‘왜 손가락이 옷에 쏙 들어가서 내 엉덩이 살이 그대로 느껴지냐고!’
“여기에 구멍이 왜 있죠?”
도화가 입은 옷 꼬리 밑에 주변이 고무줄 처리된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알면서. 이유.”
“야 이 또라이.”
“자기야, 말버릇 조심해요. 입이 왜 이렇게 더러워요.”
도명이 도화의 입에서 욕이 완전히 완성되기 전에 입술을 부리 집듯이 집으며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로 저었다.
“내 홈웨어에 무슨 짓입니까. 사람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진짜 주책이야. 이 정장 변태가.”
“자기야, 변태한테 변태라고 말한들 무슨 타격이 있겠어요.”
“내 이지적인 도명 씨 돌아와요.”
“체면이 뭐가 중요합니까? 도화 씨 때문에 머리에 나사 풀린 지 꽤 됐습니다. 아니 그리고 원래 배운 사람이 더 변태 같은 거 알아요?”
도화가 여전히 도명을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명은 그런 건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도화 씨, 저 그리고 아까 내가 세상에 공짜 없다고 했죠? 말한 지 얼마 안 돼서 정말 잘 기억해야 할 텐데.”
“아 네.”
“날 위해 애교 하나만 연습하면 안 됩니까?”
“무슨 애교요?”
도화가 큰 눈을 도명을 향해 부라리며 말했다. 도명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강아지들 손가락으로 빵 하면 배 뒤집는 거 말입니다. 합시다.”
“아니, 내가 진짜 도명 씨가 키우는 개입니까?”
도화가 황당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사람이 짐승 같아지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야한지 압니까?”
“몰라요. 전 몰라요. 평생 모를 거예요. 내가 자꾸 이런 이상한 거 해 주니까 사람이 자꾸 이상한 요구 생각해 내는 것 같아요. 나 아주 단호한 사람이에요.”
“하아. 진짜 싫어요?”
“네! 네!”
“내가 이렇게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도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이미 요리한다고 걷은 소매를 더욱 바짝 걷었다. 그런 도명의 반응에 도화는 상체를 움츠리며 안절부절못했다. 도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도명이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손가락 끝을 꾹꾹 구부리며 도화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뭔데요.”
“토명입니다.”
“네? 네?”
“아. 이게 아닌가. 역시 애교는 어렵네요. 협상 실패네.”
“아니 잠깐만요! 다시 해 봐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다시 하라고요? 그걸?”
도명이 도화가 무슨 엄청난 요구를 해대는 것처럼 굴어댔다. 표정을 보니 협상을 하기 위해 도화를 떠 보는 게 아니라 정말 못 할 짓을 시킨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이 인간은 손가락에 금칠했나. 고백도 손가락 두 개로 해, 애교도 손가락 두 개 대충 구부려서 때우려 하고 그래. 네 손가락에 금칠 했냐고!’
“손가락 구부리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래요. 자기야.”
“백구야. 빵.”
도명이 뭐하냐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도화는 깊은 번뇌에 휩싸였다. 고작 손가락 두 개 구부리는 것 보자고 인간의 존엄성을 깨고 진짜 도명이 키우는 개새끼처럼 몸을 뒤집어 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토명이의 유혹은 생각보다 강했다.
도명은 도화가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는 실망감을 얼굴에 여실히 드러내며 다시 조리대 앞에 섰다.
“아니 도명 씨.”
“둘 다 애쓰지 말고 밥이나 먹읍시다. 역시 나이가 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사랑에 나이가 어디 있나요!”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도명의 뒤통수를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할 거예요?”
“…….”
“애쓰지 말자니까요. 나도 민망하네요. 도화 씨랑 살다 보니까 온종일 주책없는 생각만 듭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봄 같고 그러네요. 머리에 꽃이나 안 달면 다행이지. 나 참.”
“하아. 에잇, 진짜!”
도화가 눈을 질끈 감고 결국 주방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어서 다시 그 요망한 손가락 두 개 좀 꿈틀 좀 해 보라고 쳐다보았다.
“아니, 잠깐만. 그냥 그렇게 뒤집으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손가락 총 쏠 때 타이밍 맞춰서 해야죠.”
“아. 네.”
도화는 이걸 맨정신에 다시 하려니 민망함에 괜히 없는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며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도명의 손가락 끝을 주시했다. 도명이 손가락 총을 날렸다.
그러자 도화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바닥에 배를 뒤집어 깠다. 역시 자괴감이 밀려와 도화는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푹 가렸다. 도명은 그런 도화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화는 오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토명이! 토명이요!”
도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도명의 손짓 하나에 배를 뒤집어 깐 것에 대한 수치와 한을 담아 주먹으로 마룻바닥을 퉁퉁 쳤다. 그 모습이 마치 흥분한 고릴라 같았다. 아주 여러모로 흥분한 고릴라 말이다. 이번에는 도명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손목을 매만졌다.
“아니 무슨 애교를 적장에 들어가는 표정을 짓고 해요. 좀 웃어요. 도명 씨 필요할 때는 눈꼬리 살랑살랑 잘 치잖아요.”
“알았어요. 제가 또 하기로 하면 완벽하게 합니다.”
도명이 도화를 향해 살랑살랑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까딱였다. 도화는 조금 전까지 분해하다가 바닥에 앉은 채로 그게 또 좋다고 넋을 놓고 보았다. 도명은 그런 도화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토끼라면 환장을 하지.”
“아니에요.”
“뭐가 아니에요. 뭐 어떻게 만날 아니래. 바보같이 표정에 다 쓰여 있는 줄도 모르고.”
“진짜 토끼는 아니에요. 저는 호랑이 좋아합니다.”
“압니다. 호랑이와 용 좋아하잖아요. 조폭같이.”
“토끼가 좋은 건 도명 씨가 그냥 이 옷을 입어서 좋아진 겁니다.”
“압니다. 나한테 환장한 거. 그나저나 도화 씨, 후식 준비되어 있는데 구경 안 해요? 오자마자 알아볼 줄 알았더니, 사람이 내 얼굴만 쳐다보느라 다른 건 통 보지를 않네요.”
도명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제야 도화는 바닥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를 훑어보았다.
“케이크네요.”
“그냥 케이크 아닌데요? 아주 많이 구하기 힘든 거예요.”
도화는 홈웨어의 충격을 잠시 잊고 어딘가 눈에 익은 촌스러운 케이크 상자를 향해 홀리듯 다가갔다. 도명은 도화를 향해 봄날처럼 눈웃음을 치며 턱을 괴었다. 도화는 괜히 긴장된 표정으로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사 오던 그 케이크가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너무나도 변한 것이 단 하나도 없어서 케이크가 상자에서 완전히 나오기 전에도 알 수 있었다.
도명이 이런 케이크를 살 리가 없었다. 트렌디한 그가 사 오기에는 이 케이크는 너무 옛날식 케이크였으니까. 도화는 떨리는 손으로 케이크의 눈처럼 하얀 크림을 찍어 먹어 보았다. 맛도 그대로였다.
“우리 결혼식 선물이 조금 늦게 도착했네요.”
“아. 네. 늦었네요. 사람 애태우는 것도 아니고.”
도화는 멍한 눈으로 식탁 의자를 빼고 의자에 앉아 케이크 한 조각을 벌써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식사 전에 간식부터 먹는 거 아니라고 잔소리할 것 같았던 도명은 말없이 순두부찌개를 보글보글 끓였다.
진짜 케이크는 단 하나도 안 변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이 케이크 좀 그만 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다른 애들이 이 생크림 케이크 말고 다른 별난 케이크를 먹은 자랑을 한 날은 더군다나 그랬다.
“요즘은 그런 상자 구하기도 힘든데. 안 그래요?”
도명이 넌지시 상자도 좀 구경하라고 힌트를 주었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상자를 손끝으로 훑었다. 그러다가 매직으로 쓴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도화는 그 전화번호를 한참을 보다가 입술을 어렵게 열었다.
“아. 저, 도명 씨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네. 그래요.”
도화는 전화기를 들고 베란다로 나왔다. 괜히 도명에게 전화 통화를 들려 주기 민망했다. 도화는 베란다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이미 외우고 있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사람을 쓸데없이 긴장하게 통화 대기음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저 도화에요. 그, 저 케이크 잘 받았습니다. 잘 먹을게요. 아. 저 아빠.”
도화는 그 말을 끝으로 말이 없었다. 통화의 상대방은 그 침묵이 답답할 만도 한데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있잖아요. 제가, 제가요. 다 잘못했어요. 제가 나약했던 걸 엄마, 아빠 탓하고. 그냥, 정말 두 분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제가 충분히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아서. 그냥 모든 걸 대면하기엔 약한 아들이라서. 너무너무 죄송해요. 아, 계속 같은 말만 하는데, 너무 죄송했던 것들뿐이라서.”
도화가 핸드폰을 든 채로 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미안했다. 버팀목이 돼 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집 나간 거 너무 죄송해요. 도망만 가놓고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왜 나를 못 받아 주냐며 떼쓴 것도 죄송하고요.”
“도화야. 저녁이나 먹으러 와라. 그냥 얼굴이 보고 싶다.”
“……저, 도명 씨도 같이요?”
“……그래.”
“고마워요.”
“엄마가 옆에서 보챈다. 통화해라.”
“네.”
“집에 와서 밥 먹어. 저녁은 먹었니?”
“아직 이요. 방금 집에 들어와서요. 지금 도명 씨가 순두부찌개 끓여 주고 있어요.”
도화가 넌지시 자랑하듯 말했다.
“그래. 근데 도화야, 아버지가 도명 씨라고 했나. 너무 번지르르하게 생겼다고 하시더라. 너무 잘나서 사람들한테 나쁜 소리를 안 들어서 그런가. 당돌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제비같이 생겼다고 한 걸 순화해서 말했다.
“네. 잘생겼어요.”
“남자든 여자든 얼굴값 한다. 잘 챙겨라.”
“아. 난 또 뭐라고. 걱정하지 말아요.”
“너는 애매하게 생겼잖니.”
“아니, 엄마. 여기서 내 얼굴을 왜 욕해요. 아무튼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말을 그렇게 했지만, 아직도 어머니의 목소리는 근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걸 도화 역시 느끼고 있었다.
“아니, 엄마.”
도화가 도명이 혹시 들을까 봐 괜히 도명이 있는 주방 쪽으로 눈동자를 교묘하게 빠르게 굴리다가 목소리를 급히 낮추며 말했다.
“도명 씨 생긴 것과는 달리 연애 고자예요. 고자도 그런 고자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