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한 애교
도명이 정원기획 건으로 팀원들과 회의를 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도명이 문득 창밖을 쳐다봤을 때 중년의 남자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도명과 도화의 아버지 얼굴이 마주쳤다.
도명은 유리창을 경계로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각자 맡은 일을 직원들을 향해 어서 하자는 듯이 손을 마주쳤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도명이 가게 안에는 못 들어오고 넋이 나간 듯 벤치에 앉아 있는 그 옆에 다가왔다.
“도화 씨는 지금 회사에 있습니다.”
“알고 있네. 초면에 반말이 기분 나쁜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실 초면은 아니잖아요. 저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네. 다만 도화가 좋아했던 케이크를 전달하러 오고 싶었을 뿐이네.”
“가게 바로 위층이 우리 둘이 사는 곳인데 차 한 잔 어떻습니까? 가게 안에서 먹어도 저야 상관은 없습니다. 다들 제가 동성애자인 것도 알고 있고 또 도화 씨가 누군지도 저와 또 무슨 관계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눠도 저야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쓸데없는 시선을 신경을 쓰시는 쪽은 아버님 아닙니까?”
그는 도명의 ‘쓸데없는 시선’이라는 말이 거슬렸으나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사람은 햇빛을 받으며 깔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장면 하나에서 그는 정말 많은 것이 거슬렸다.
지나치게 말끔하고 화려한 이 남자의 얼굴도, 아들의, 그것도 게이 애인이면서 어른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 저 지나친 매끄러움도, 고개를 드니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지나치게 쨍한 햇빛도, 한 사람은 벤치에 앉아 있고 한 사람은 서 있기에 생긴 눈높이의 차이도, 진창은 한 번도 안 굴러 본 사람처럼 향긋한 냄새가 나는 남자의 냄새도, 그의 목덜미를 사늘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과 겨울의 중간 경계에서 부는 차가운 바람도,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층집에 올라갔다. 도명은 도화의 아버지에게서 케이크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보란 듯이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집 구경하고 싶으시면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 집이긴 하지만 이제는 도화 씨 집이기도 하니까요.”
도명이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비치는 모든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그의 시선이 아들의 결혼식 날 찍은 사진과 서윤이 선물한 사진 선물, 그리고 초대장이 꽂힌 벽에 머물렀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겐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아름답고 일상적이었지만 확실히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차는 뭐로 드릴까요?”
“커피 부탁하네.”
“집에 커피 종류 웬만한 건 다 만들 수 있습니다. 그냥 작은 카페 왔다고 생각하시면 될 정도로요.”
도명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인스턴트커피 브랜드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도명의 집이라고 인스턴트커피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가 말한 것만큼 대중적인 것은 없었다.
“아, 그게 없으면 커피 믹스면 다 괜찮네.”
‘아니, 그런 인스턴트커피 믹스 자체가 없다고요.’
“프림 들어간 거 말이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프림 같은 게 있을 리가. 커피 만들 때 집어넣는 4~5℃의 냉장 살균 우유는 있었다. 도명은 이마를 긁적이다가 스팀 피처에다가 우유를 담고 커피 머신의 스팀 노즐을 담가 우유를 데웠다.
아버지는 도명이 무슨 커피 하나 내오는데 뭐 저리 요란한가 하는 표정이었다.
도명은 우여곡절 끝에 프림 대신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내왔다. 아버지는 일단 이 요란한 커피를 마셨는데 자신이 알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는 그게 내심 못마땅했지만 커피 마시러 온 건 아니니까 그러려니 했다.
“왜 도화 씨 있을 때 안 오시고요. 제가 마음에 들어서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버지는 어른을 상대로 돌려 말하지 않는 도명이 맹랑해 보였다.
“아직 도화의 얼굴을 볼 용기는 없네.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자식인데 계속 등 돌리고 지낼 수도 없고.”
“그래서 일단 케이크라도 줘서 자식 마음이 더는 멀어지지 않게 하고 싶은 거로군요.”
“그렇다네.”
아버지는 도명을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손바닥으로 테이블 상판에 손을 올려놓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는 도명이 만들어 준 커피를 두 모금 정도 마시다가 그대로 남겼다.
도명의 입장에선 큰 굴욕이었다. 언제나 그는 사람들의 입맛을 기가 막히게 현혹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 부분에서는 더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저같이 지나치게 빤지르르한 놈이 순진하고 사회 규범의 실금 하나 안 넘었던 도화 씨 꾄 것 같죠?”
도명이 입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아버지가 도명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틀렸습니다. 순진한 도화 씨가 절 꾄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순진함이 닳고 닿은 것보다 더 자극적이거든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 아닙니까. 서로 밀고 당기고, 아주 난리였습니다. 이성이 나가서 미친 듯이 당기다가 겁먹고 다시 밀고, 밀다가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당기고.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까 둘이서 감정을 가지고 춤을 춘 거네요.”
도명은 자신이 말하고도 두 사람이 그동안 춤을 췄다는 것이 마음에 들어 입가를 엄지로 훑었다. 그동안 격렬하면서 우아하지 않은 춤을 추었다. 우아하지 않으면 어떠리. 결국엔 춤인걸. 춤은 결국 다 옳은 것 아닌가?
“대체 서로가 뭐가 아쉬워서.”
“아쉬워서가 아니라 견딜 수 없어서요. 기호나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영원히 견딜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심지어 도화 씨가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불필요한 가정을 한다면 말입니다. 도화 씨는 제가 아니더라도 남자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마치 달의 인력처럼. 도화 씨가 사랑할 사람, 누군들 아버님 마음에 차실까요? 제가 순하고 수더분하게 생기고 어른을 어려워했다 한들 남자인 이상 마음에 차셨겠습니까? 오늘 여기 오시면서 햇볕이 좋은 것조차 마음에 안 드셨을 텐데요. 안 그러셨습니까?”
“……이, 이!”
아버지는 도명이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힘을 풀었다.
“결국엔 다 마음에 안 들어 하셨을 것을. 그렇게 예쁜 도화 씨조차. 그 소중한 도화 씨조차. 그렇다면 이 달콤한 케이크가 무슨 소용입니까?”
“도화가 앞으로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고 살아. 인생 길어. 나도 살면서 많은 확신이 무너졌어. 아직 젊으니까 그런 거야. 아직 많은 것들을 겪어 보지 않았잖아.”
“결국엔 남자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영원히.”
도명이 주문을 거는 건지, 저주를 내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하나 이야기할까요? 이야기가 긴데, 앉으시죠. 커피가 취향에 안 맞더라도 그냥 마시세요. 이게 제가 최선을 다한 거니까요. 부디 그 서투름을 너그럽게 봐 주세요.”
아버지는 문과 탁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침통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앉았다.
“이건 자식을 둔 부모님에게는 너무 끔찍하고 잔인한 협박이고, 또 나에게는 너무 부끄러운 비밀이라 입 밖으로 새어 나간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때인가 이 손목에 빨간 선이 하나 그어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페로몬 탓일 수도 인생의 무게 탓일 수도 있었겠죠. 뭐, 그걸 알아내는 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침구를 최대한 새하얗게 그리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반듯하게 누워서 머리를 가다듬고 손목 위를 커터 칼로 그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하얀 그 배경에서 저는 눈을 까맣게 감았습니다. 여린 손목 위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날카로움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감은 눈꺼풀을 뚫고 들어온 한낮의 햇빛이었습니다. 그 빨간 햇빛. 그리고 살고 싶어졌습니다. 붉은 피를 비적비적 뿜어내는 손목을 울며 급하게 지혈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를 조금이라도 더 흘리면 바로 죽을 사람처럼.”
“도화는 당신과 달라. 남자를 사랑하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이였어. 모두가 도화를 좋아했어. 이렇게 남들한테 손가락질받을 애가 아니라고.”
“네, 저는 여러모로 주변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어머니도 저의 예민함이 숨 막힌다고 소리 지르셨을 정도니까요. 도화 씨는 저와 달리 더 강하고 무딜 수도 있겠죠. 제가 아버님께 드리고자 하는 말은 자식들은 본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고 싶어 한다는 말입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협박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자식들은 살고 싶고 또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듯이 단정하는 거죠? 보기만 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데. 당신들은 보고 있고 우리는 지독하게 느끼며 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언제나 단정 짓죠.”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어. 이건 낭만적인 놀이 같은 게 아니야. 소수라고. 소수. 다수 속에 끼지 못하면 외롭고 도태당하는 거야. 이건 낭만과는 아주 멀다고.”
“성 소수자로 사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죠. 지금 아버님이 하시는 얇은 이해와는 달리 우리는 몸에 직접 부딪히는 일입니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뿐임에도 부당한 일도 많이 당합니다. 현실은 현실이죠. 하지만, 우린 최선을 다해서 그 모든 것들을 뻑뻑한 악기를 연주하듯 조율을 해가고 있습니다. 힘들고 섬세함이 있어야 하는 일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죽을 수는 없잖아요. 선택해야 합니까? 몸이 죽을 건지? 마음이 죽을 건지? 어느 한쪽을 포기하면 사람이 어떻게 살죠? 아니면 도화 씨의 마음을 죽이는 대가로 기어코 아버님이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으세요? 그렇게 아들을 죽이고 싶으세요? 도화 씨가 아버님으로부터 계속 도망간다면 철없는 자식의 일탈이 아니라 살려고 도망가는 거예요. 살려고.”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는 거야. 그 부모를 앞에 앉혀 놓고. 난 도화의 아버지야. 고작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이런다는 듯이 말하지 말게. 자식들은 부모가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하는지 몰라. 그걸 모르니까 이러는 거야.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이야.”
“사람에게 사랑만큼 대면하고 싶지 않은 감정에 효과 좋은 마취제도 없고 좋은 정치 선전도 없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목줄을 채우고 또 가해자에서 피해자처럼 굴 수도 있고. 타인에게는 물론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쓰기 편리한 도구죠. 여러모로 너무 편리한 말 아닌가요? 사랑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내가 도화를 학대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뭐야. 자네는 과장도 심하고, 또 왜 그렇게 꼬여 있는 거야.”
“네. 제가 아버님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나는 도화 씨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 대상이 설령 도화 씨의 부모님으로부터일지라도 말입니다. 내가 겪은 것을 도화 씨는 겪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버릴 수도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는 보모로부터 해체당하고 다시 살려고 고통 속에서 꿰매고, 회복하고 다시 해체당하고. 그게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 알아요? 이렇게 혀에서 피가 나도록 신랄하게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자기는 그런 줄 몰랐다고 오리발 내미실까 봐 내 연인의 아버지 앞에서 예의 차린다며 돌려 말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 되자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만하기만 했던 도명이 깊은 상처로 얼룩진 눈동자를 하고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 내 아들과 자네가 왜 여자가 아닌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됐는지 모른다고. 도화가 그게 어떤 건지,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제대로 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달랑 쪽지 하나 남기고 떠났다고! 갑자기 아들이 떠났어! 설명 하나도 없이! 그 살가웠던 아들이 그렇게 하고 떠났다고. 그래놓고 이 나쁜 놈이,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제 혼자 잘 먹고 잘산 그놈이 10년이나 지나서 연락도 없이 집에 찾아와서 나를 알아 달라느니 소리나 지르고 갔다고. 내가 갑자기 뭘 알겠어. 부모도 사람이야. 뭘 이렇게들 몰아붙이는 거야. 나도 무서워 죽겠는데 천하의 나쁜 부모 취급이 뭐냔 말이야. 집사람이랑 지금까지 편히 누운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그런데 결국엔 내가 다 나빴다고? 쌍놈의 새끼들이!”
“잘 모르시는데 왜 그렇게 그게 정답인 것처럼 세뇌를 걸고 윽박지르는 겁니까? 적어도 답을 유예하고 우리를 지켜볼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무서우니까! 내 자식이 내가 모르는 곳으로 신나서 뛰어들어 가는데 어느 부모가 가만히 있어! 일단 붙잡고 봐야지. 우리 힘으로 끄집어낼 수 없는 일이 생겨 버리면 어떻게 하냔 말이야. 부모는 자식을 지켜 줘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평생 인생 대신 걸어 줄 수도, 도화 씨의 영혼을 끄집어내고 아버님 영혼으로 대신 욱여넣어 채울 수도 없잖아요. 결국엔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허깨비 같은 위안을 쫓다가 눈앞의 아들 표정은 못 보고 있잖아요. 그게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
“아니에요. 내가 떠는 건 내가 틀려서가 아니에요. 두 분이 뿜어내는 감정이 무서워요. 나는 정답을 알고 있는데도 두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무섭다고요. 정답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두 분이 나를 이런 눈으로 보면 그게 나를 낭떠러지에서 미는 것 같고 무섭다고요. 나는 두 분에게 버려질까 봐 버려지기 전에 도망간 거예요. 두 분이 날 버리면 난 정말 감당할 수 없으니까.”
“도화야. 너 어쩌려고 그래.”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뭐?”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고요. 날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 낳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이 집에서 속이 텅텅 비고 그 안이 고름으로 가득 찰 때까지 몰랐어요? 두 분은 내 속까지 만들지 않았잖아요. 이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에요. 내가 이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모르지만 내 안이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는 알아요. 그리고 그런 내 행복이 무해하다는 것도요.”
***
아버지는 도화가 한 말들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갑자기 너무나도 선명한 공포가 그의 몸을 엄습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도화가 빨갛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도화가 멀어지고 멀리서 별안간 빨갛게 터져 버렸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말이다.
그 크고 옹골지며 살갑고 따뜻했던 아들이 냉장고 구석에 박힌 무르고 물어진 토마토같이 보였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전화번호 남겨 주세요.”
“도화가 집을 나간 후로 전화번호를 바꾼 적이 없네. 난 바꾼 적이 없고, 도화는 숫자를 웬만해선 잊어버리지를 않는 애인데 전화가 안 오네. 나는 도화가 8년 전에 갑자기 전화번호를 바꿔 버려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는데 전화가 안 오네.”
“그래도 이 케이크 상자에 전화번호는 적고 가세요.”
“그게, 무슨 소용인가. 도화가 전화번호를 몰라서 전화를 안 거는 게 아닌데.”
“도화 씨는 마음이 기울어 있는 상태에서는 깃털을 움직일 만큼 아주 작은 힘에도 훅 넘어옵니다. 도화 씨가 번호를 알고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신호를 보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도화 씨는 이미 마음이 차서 기울어져 있어요. 초대장 들고 아버님 집을 찾아간 순간, 이미 차고 넘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살짝 툭 밀어 봐요. 그것만으로도 아버님이 원하는 모든 답을 해 줄 겁니다. 물론 남자가 더는 좋지 않다는 말은 빼고요.”
도명이 케이크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펜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펜을 쥐었다. 그리고 그 펜 끝이 케이크 상자에 툭 닿을 때 도명이 손가락으로 펜 끝을 잡으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정말 도화 씨가 절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쓰시는 겁니까?”
“…….”
“제가 도화 씨의 평생 연인입니다. 이해하셨어요?”
“……알았네.”
도명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살가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렇게 케이크 상자에 아버지의 전화번호가 적혔다.
“아버님 오실 때 뭐 타고 오셨습니까?”
“택시 타고 왔네.”
“이 앞에서 택시 잡기 힘든데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도명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 열쇠를 챙기며 말했다.
“아니, 잠깐, 나 자네가 아직은 좀 무서우니까 그렇게 섣불리 다가오지 말게.”
“알고 보면 제가 얼마나 살갑고 다정한데요.”
도명이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 아직은 확실히 무서우니까 그 차 열쇠 좀 내려놓게.”
“같이 집에 가면서 도화 씨 이야기하면 좋잖아요. 도화 씨가 어떨 때 참을 수 없이 귀여운지 라디오처럼 계속 떠들 수 있습니다. 아, 집에 간 김에 저도 커피 믹스 맛이 어떤지 보면서 도화 씨의 방. 아. 그전에 도화 씨의 방 그대로죠?”
“그대로인데…… 왜?”
그가 공포에 떠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집에 도화 씨 어릴 때 앨범 있습니까? 학교 다닐 때라든지.”
“있네. 아니. 없어. 없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방금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세상에. 너무 설레네요. 도화 씨가 진짜 작았을 때 사진이라니. 어머님은 집에 계시나요? 뭐 좋아하세요? 아 저번에 도화 씨 손에 들려 보낸 케이크 마음에 들어 하셨나요? 마음에 들으셨으면 잠깐 제 단골 케이크 가게 들러서 가요.”
“다음에! 다음에!”
그가 헐레벌떡 구두를 급히 구겨 신으며 말했다.
“하아, 아쉽네요. 아버님, 다음에는 꼭, 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래. 알았네.”
“꼭 말입니다. 도화 씨와 전 한 세트니까 도화 씨를 만나면 저도 자연스럽게 엮이게 되는 거 아시죠? 피할 수 없으면 이왕이면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잖아요. 그러니까 적은 가까이 두는 게 오히려 좋아요.”
“그래. 꼭. 그렇게 쳐다보지 말게. 약속하겠네.”
“아버님,”
“응. 왜? 왜?”
“제가 아버님 미워서 말 밉게 한 거 아닙니다. 도화 씨 아버님인데 제가 미움받고 싶겠어요? 아버님, 어쩔 수 없이 독설하게 되어서 저도 가슴이 몹시 아픕니다.”
“염병!”
“아 진짜인데요.”
“알았으니까 제발 나 좀 집에 좀 가게 해 주게.”
“다음에 뵙게 되면 아빠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미친놈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빠,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그래. 그. 그.”
“유도명이라고 합니다.”
“도명 씨도. 잘 들어가. 아니, 잘 있게.”
그렇게 도화의 아버지가 부랴부랴 식은땀을 흘리며 집에 나가고, 도명 역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여우 같은 얼굴을 풀고는 이마에 흘린 땀을 손수건으로 탁탁 두들겼다. 그리고는 괜히 소매 끝을 빳빳하게 늘리며 중얼거렸다.
“애교는 참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