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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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결혼식

도화와 도명이 살 집의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럴듯한 넓은 거실이 생겼고 도화의 개인 방은 거실 뒤 켠 고시원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도명이 마지막 양심이 있는지 그 안에 있었을 때 조금이라도 덜 답답함을 느끼라고 환기와 볕이 잘 드는 창문을 따로 만들어 줬다. 그리고 그 창문이 있는 쪽에 계절이 바뀌는 것이 잘 보이도록 작은 정원도 만들어 줬다.

도화의 방이 조금이라도 넓어지게 결국은 옷 방은 통합하기로 했다. 대신 도명이 덜 입는 옷을 추려내야 했다.

도명과 도화의 2층 살림집뿐 아니라 아래층도 새 작업실 집기가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명이 SM 플레이를 하던 욕실은 언제 거기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냐는 듯이 일반적인 화장실 겸 창고가 되어 있었다.

도명의 드레스 룸은 기록 보관함이 되어 옷 냄새 대신 종이 냄새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짐 정리와 함께 새집 냄새가 빠지게 환기도 하고 잔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청소도 했다. 도명과 도화는 환기 때문에 살짝 싸늘한 공기를 맞으며 테이블에 대충 앉았다.

“와. 힘드네요.”

도화가 땀이 뚝뚝 흐르는 이마를 소매로 대충 닦은 후 배달시킨 자장면을 뜯었다.

“도화 씨가 힘들 만도 했죠. 무거운 짐은 혼자 다 계단 오르내리며 옮겼으니까요.”

“대부분 도명 씨 물건이 많긴 했죠.”

도화가 생색을 잔뜩 내며 말했다.

“내가 하겠다는 걸 말린 건 도화 씨인데.”

“아니, 도명 씨 허리 소중하니까요.”

“아. 그런 이유입니까? 아까는 계속 자기가 힘이 세서라고 했잖아요.”

도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짬뽕 국물을 얌전히 떠서 먹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화는 무슨 짬뽕을 저렇게 서양 수프 먹듯 고상하게 먹는지 신기했다.

“아니요! 아니 그냥 허리 소중하다는 게 어떻게 그런 것하고 연결되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도명이 도화의 변명을 같잖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그거 알아요? 섹스할 때 받아들이는 도화 씨 허리가 더 부담 갑니다. 겉으로 보면 움직임이 격렬한 내 쪽이 더 다칠 것 같지만요.”

“아 진짜요?”

“모르겠어요?”

“아 그렇구나.”

“이제 알았다는 표정인 거 보면 더 과감하게 해야겠네. 튼튼해서 정말 박음직스럽고 기특합니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마구 비비며 말했다.

“진짜 이게 우리 집이구나.”

도화가 시선을 괜히 돌리며 말했다. 도명은 이제 와 새삼, 그것도 이 타이밍에 감상에 빠진 도화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답지 않게 뭐가 그리 마음이 급했던 건지, 일정을 너무 빠듯하게 잡은 것 같습니다. 오늘 이사만으로 이렇게 지칠 줄 알았다면 결혼식은 적어도 삼 일은 쉬고 진행할 걸 그랬습니다. 오늘은 위층으로 이사, 내일은 또 결혼식 준비해야 하니까 이래저래 정신이 없네요.”

“그동안 천천히 준비 많이 했잖아요. 이제 테이블 세팅하고 손님들하고 식사하면 끝이죠. 뭐. 물론 손님 수가 22명이면 평소보다 많긴 한데 도명 씨 프로잖아요.”

물론 손님 접대하는 게 쉬운 건 아니건, 알고 있지만, 도화는 도명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변수를 계산하려면 정신과 시간의 여유가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완벽하죠.”

“또! 또!”

“내가 뭘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변수라고 해 봤자 준비한 잔이 좀 모자라거나 동선이 좀 꼬여서 왁자지껄해지는 것 정도일 거예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미리 계산해둔 식기 세팅과 의자 배치를 열심히 계산했다. 다시 한번 점검하라고 한 말이 아닌데 도화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도화는 그런 도명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자장면 면발을 흡입했다.

“도화 씨 미리 맞춘 예물 잘 챙겨요. 그게 도화 씨가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에요. 나 그거 맞추려고 신경 많이 쓴 거 알고 있죠?”

“그럼요. 매일 디자이너랑 통화하고 그랬잖아요. 잎 모양 가지고 도명 씨가 왜 그렇게 설전을 벌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요. 초안도 예쁘던데. 도명 씨 로즈골드 색이면 뭐든 그냥 다 환장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아 맞다. 내 황금 팬티도 깠었지…….”

도명은 도화의 황금 팬티를 생각하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황금 팬티를 입은 사진이 아직도 도명의 핸드폰 안에 있었다.

“초안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그게 정말 좋았다고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아, 도화 씨 왜 이렇게 믿음이 안 가지?”

도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괜히 도화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수가 생긴다면 이쪽일 것 같은 것이다. 그것 외에는 계산이 안 섰다.

“내가 챙길까요?”

“네? 아니 도명 씨 신경 쓰는 거 많다고 비교적 맡은 일 간단한 제가 맡으라고 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그날 피아노 연주하고 예물만 사수하면 되는 건데 그걸 못 맡겨요? 섭섭해요. 나도 나름 똑 부러진 사람인데. 도명 씨보단 나을 거예요. 도명 씨는 지금 머릿속 엄청 복잡하잖아요. 뭐 하나 실수하지 않으려고. 이 머릿속에 냅킨 개수까지 떠다니는데 그 와중에 예물까지 챙긴다고요? 나는 길 가다 누가 각목 들고 뒤에서 후려쳐도 살아남아서 예물은 사수할 수 있어요.”

“뭐, 우리가 갱단 싸움판 속에서 결혼합니까? 그냥, 도화 씨가 아차 할까 싶어서죠.”

“안 그래요. 섭섭해요! 나도 치밀할 땐 엄청 치밀해요.”

“내 뒤통수칠 때는 치밀하긴 하더군요.”

“도명 씨, 정확히는 소중한 게 생길 때죠. 저는 소중한 건 지키는 남자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런 걸 지키지 못한 적이 있어요?”

도화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도화가 지킨 소중한 것들이 러브레터 찌꺼기들과 결국은 다시 찍어서까지 소유하게 된 도명의 토끼 분장 사진이기에 그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얄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명은 햇살처럼 활짝 웃으며 어금니를 을씨년스럽게 갈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이 호구가 봐 준 거잖아요. 어른이 봐 줬으면 어린이는 이게 자기 능력이 아닌 거란 걸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어른은 어린이가 계속 자기 능력으로 한 거라고 믿게 해 줘야 진짜 어른이고요.”

한마디를 안 지는 도화의 태도에 도명이 깍지를 낀 채 말없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넌지시 말했다.

“자기야 첫날 밤 기대해요.”

도명이 넌지시 말하는 말이 어딘가 도화를 불안하게 했다.

“아 진짜 SM 플레이하는 거예요?”

“도화 씨가 골라 놓고 인제 와서 발 빼는 건 뭐 하자는 거죠? 내가 골랐나요? 심지어 이번에는 교묘하게 유혹해놓고 도화 씨 욕망인 것처럼 장난질도 안쳤어요. 요 한 달간 욕구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서 강한 매운맛 쑥스럽게 운운한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갔죠?”

“그 사람 여기 있긴 한데요. 아니 근데 자꾸 도명 씨가 SM으로 나한테 사소한 복수 하는 것 같단 말이에요. 이성적이고 훌륭한 돔은 그러면 안 되죠.”

“여기 누구 때문에 그 이성적이고 훌륭한 돔 이사 갔습니다. 나는 도화 씨 한정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니 적당히 사람 약 올려요.”

“그러니까 어른은 어린이가 계속 자기 능력으로 한 거라고 믿게 해 줘야 진짜 어른이라는 말에 할 말 없어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요. 어린이는 결국엔 자기가 배려와 사랑 속에서 컸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뭐, 의기양양한 모습도 귀엽긴 합니다만 그게 이 사회와 크고 귀여운 그 어린이의 기분에도 더 좋지 않겠어요? 나 혼자 마냥 잘난 것보다.”

도명이 애정이 녹아 내려간 눈으로 도화를 지그시 쳐다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도화는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요.’라고 빠르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도명은 그런 대답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푸시시 웃으며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아니 근데 뭐가 이렇게 불안하죠? 아니, 아니 도화 씨한테 맡긴 임무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상하게 뭔가 빠뜨린 것 같단 말이죠.”

“전 그 이유 알아요.”

“뭔데요?”

“도명 씨 완벽주의 때문에 그런 거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머릿속에 상상하는 거라고요.”

“차라리 완벽주의자의 기우였으면 좋겠는데 동물적인 촉은 도화 씨만 좋은 게 아니거든요. 내가 그게 유난히 잘 발달한 편이에요. 아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요. 진짜 그러니까요.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감도 못 잡겠다는 거죠.”

“도명 씨, 다 잘 될 거예요. 우리 결혼식은 완벽할 거라고요.”

도화가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는 도명을 뒤에서 꽉 껴안으며 말했다.

“도화 씨가 날 열심히 안심시키고 있는 건 알겠는데 이 사람 이러는 건 못 말린다는 못마땅한 표정을 좀 숨기고 합시다.”

“나 뒤에 있는데 표정이 보여요?”

“동물적인 촉, 백구야.”

“진짜 뒤통수에도 눈 있어요? 가끔 진짜 온몸에 눈이 있는 것 같다니까요!”

도화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 도명을 안은 상태에서 척추 선부터 날개 죽지까지 부르르 떨었다.

“진짜 있으니까 조심합시다. 안 본다고 내 흉내 우스꽝스럽게 내지 말고.”

“아, 아닌데요!”

‘아 소름 돋아! 너무 얄미울 때마다 몰래 뒤에서 푸른 심장 유 도명 흉내 내는 걸 진짜 다 안다고?!’

도명이 도화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 밀며 혀를 차며 말했다.

“알겠어요? 이 배려와 사랑을 엄청 받는 어른이야.”

***

결혼식 저녁 식사 당일, 도명이 종이를 들고 준비가 완벽하게 됐는지 체크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파티 준비를 도와줄 아르바이트생 2명에게 손님들이 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 주고 도화와 아침부터 지금까지 밑 작업한 음식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일반적인 결혼식과는 다르게 파티는 사람들이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새벽까지도 마시고 놀 생각이었다. 밤새 반려와 같이 산다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에게 좋은 사람인지 이야기하며 말이다.

그래서 차가워져도 맛이 괜찮을 두 종류의 샐러드와, 간단한 핑거 푸드 3종류, 과일과 케이크, 메인 메뉴로는 손님들이 이야기하며 천천히 원하는 재료를 익혀 먹을 샤부샤부를 준비했다.

고기를 구워 먹는 것도 고려 대상에 두었으나 파티가 고기 냄새와 자욱한 연기에 절어 있을까 봐 결국엔 샤부샤부를 준비했다.

각종 신선한 채소와 마블링이 좋은 소고기, 대게, 여러 가지 귀한 버섯, 여러 해산물이 잘 펼쳐진 부채처럼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아이스박스에는 각종 세계 맥주와 탄산음료가 들어가 있었다. 와인 셀러도 간만에 스파클링 와인으로 가득 채웠다.

“우와 진짜 우리가 열심히 준비하긴 했네요. 준비하면서 그냥 출장 뷔페 부를까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뷔페는 맛이 없어요.”

“맞아요. 도명 씨가 만드는 것보다 맛이 없죠.”

“흠, 좀 초대받는 느낌이 드나요?”

“저 같으면 정말 좋아요.”

“하여간 사람이 무조건 다 좋대.”

“다 좋으니까요.”

도화가 은근슬쩍 잘 차려입은 도명의 엉덩이를 살포시 만지고는 피아노를 점검하러 후다닥 뛰어나갔다.

“하여간, 내가 변태 하나 잘 길렀지.”

도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체크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이상하다. 빠진 게 없는데. 아르바이트생도 내가 게이 바에서 오너가 엄선한 일 잘하는 애들로 완벽하게 스카우트했단 말이지. 주차 문제까지 생각했다고. 사람들이 차를 얼마나 끌고 오는지까지도 사전 조사해서 주차 문제 정리까지 했는데. 손님들 음식 알레르기도 체크 했고 내가 어쩔 수 없는 날씨 문제도 혹시 몰라 대형 파라솔들도 창고에서 미리 꺼내 놨어. 내가 지금 뭘 모르지? 내가 모르는 건 백구 노래……인데?’

도명은 꿈속에서 봤던 록을 부르는 도화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백구가 아무리 발작해도 그건 아니지. 설마 이별 노래 부르나? 자기도 모르게 상징적인 노래 가사 못 읽고 그냥 멜로디가 좋아서 골랐다가 불렀는데 이별 노래인 거지. 아 역시 서프라이즈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내가 같이 체크했어야 했어. 백구가 이벤트 한다기에 신나서. 노래는 그만 생각하자. 이건 이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또 신경 쓸 게…… 맞다. 제일 중요한 거 체크 안 했네.’

도명이 거울 앞에 서서 용모를 점검했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점검 중인 도화에게 다가가서 귀찮다고 하는 그를 달래가며 뽀득뽀득 꾸며 줬다. 도화는 대체 짧은 머리에 스타일이 뭐가 있냐고 날 좀 가만히 놔달라며 구시렁거렸다.

“아니 잔디 쓰다듬어 봤자 잔디지. 잔디가 바람에 오른쪽으로 쏠리면 뭐 더 예뻐 보여요?”

“요즘 그냥 네라고 하는 게 없네요.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잔디도 길이란 게 있어요. 화관 안 쓸 거예요? 그 화관에는 앞머리를 이쪽으로 넘겨야 어울린다니까요. 아니 언제는 나만 사진 잘 찍는다며 뭐라 했잖아요. 밤새 하소연하며 사람 괴롭혀 놓고 이렇게 굴기 있어요?”

도화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낑낑대며 눈을 꾹 감고 도명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화관 쪽팔린 것 같아요.”

“아니, 생화 화관 영정 사진 만들어 놓고 시위한 게 누군데요.”

“네? 도명 씨는 걸핏하면 내가 시위했대요. 그냥 사진 찍어놓고 액자에 곱게 담아 책상 위에서 본 거죠.”

“그거 프러포즈해놓고 영원히 갈 귀금속 안 끼워 줬다고 시위한 거 아니에요?”

“그냥, 생화라서 시들기 전에 사진 찍고 기념한 건대요.”

“아니, 근데 흑백이고 왜 이렇게 분위기가 바스스해요? 영락없이 영정 사진인 줄.”

도명은 살짝 초점이 안 맞아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모서리가 흐른 피사체와 칙칙한 먼지 같은 갈색 톤의 사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거 사진을 분위기 있게 만들겠다고 필터 넣은 건데요.”

“아…… 사진도 못 찍고 필터 고를 줄도 모르네. 이걸 어쩌면 좋아. 아 진짜 나한테 시위하는 줄 알았어요. 뭐 도화 씨가 좋다면 다행이고요. 이제 곧 손님들 오겠네요. 문 열어 놔야지.”

도명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뒷마당과 화원 중앙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도명은 가게 메인 도어 유리와 손잡이를 뽀득뽀득 닦은 후 손님들이 올 입구를 쳐다보며 두 손을 결연하게 마주 잡으며 말했다.

“완벽한 밤이 될 겁니다.”

***

도화의 아버지는 도화의 방에서 지난 앨범을 들추고 있었다. 도화의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입학식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조금 맹한 구석이 있지만, 막상 뭐든 하면 똑 부러지게 잘하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건강하며 키도 훤칠했고, 공부도 싫고 좋은 과목이 분명해서 그렇지 중간은 했다. 부모 말도 잘 듣고 사춘기 때조차 반항 한번 한 적 없었다. 거기다가 사진 속 모습처럼 구김살 하나 없던 웃음들 하며. 그는 아련한 표정으로 사진의 표면들을 훑었다.

“여보, 입맛 없으면 밥은 나가서 먹을까?”

“뭘 먹어도 지금 밥이 넘어가겠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숨죽이고 살겠다고? 도화 말 들어보니까 우리 도움 없이도 자리도 알아서 잘 잡았고.”

“대학 나오고 직장만 잡으면 그게 인생 잘살고 있는 거야?”

“몰라.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지금 엄마가 돼서 무책임하게 그게 할 말이야?”

“모르겠다는 게 뭐가 무책임한 건데.”

“책임 회피한 거잖아. 지금.”

“도화 인생 그렇게 신경 썼으면 집 나갔을 때 바로 잡아 왔어야지! 그땐 가만있고 인제 와서 왜!”

“영원히 도망갈까 봐. 잡으러 갔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놓치기라도 하면 영원히 단서도 없이 도망갈까 봐. 그렇다고 애를 영원히 가둘 수도 없고. 그래서 어깨너머로 도화 눈 피해 가며 대학에서 확인했잖아. 학교 잘 다니고 있는지. 기억해? 도화 어릴 때 말이야. 도화 혼내려고 했다가 그놈이 겁이 유난히 많아서 작정하고 도망가면 우리가 온종일 기운 빼는 거 허다했잖아. 그날은 유난히 답이 없어서 경찰서 가서 미아 신고하고. 이틀 동안 우리가 그때 느꼈던 공포가 자꾸 생각나는 거야. 그 공포가 자꾸 머릿속에서 불어나. 도화를 잡으러 집을 나설 때마다 자꾸 그때 생각나는 거야. 그 쪼그만 녀석도 그렇게 잘 도망 다녔는데 머리 다 큰 녀석은 어떻겠어.”

“도화 우리 다시 찾아왔잖아. 또 찾아올 거야.”

“맘 편한 소리 하지 마. 그게 다 무서운 기분 없애자고 하는 생각이지.”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건데!”

“더는 이렇게 살기 싫어. 더는 이렇게 무서워하며 기다리기 싫다고. 그놈이 주고 간 초대장 줘 봐.”

“갈 거야? 이미 안 가겠다고 답했잖아.”

“갈 거야.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답을 아직 모르겠어. 여보. 거기서 편한 얼굴로 앉아 있을 순 없다고.”

“갈 거야. 파티에 참석하는 게 아니라 이번엔 도화 잡으러 갈 거야!”

“여보! 그 애한테 중요한 날인데 그걸 망치면 애가 우리 미워할 거야.”

“부모니까 미움받더라도 해야지! 애가 우리 미워할까 봐 무서워서 기다리기만 했는데,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됐잖아. 더는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무서워하는 거 싫다고. 나를 매일매일 갉아 먹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

“여보, 난 잘 모르겠어.”

“그놈의 모르겠다는 소리! 지겹지도 않아? 세상에. 사람들 불러놓고 남자 둘이 잘살아 보겠다고 한다고? 조롱받을 게 분명해.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왜 저지르는 거야. 여보, 그때 기억해? 도화가 충동적으로 성우한테 고백했다고 도망가 달라고 했을 때, 그때 우리가 손 내밀어 주니까 그 녀석 표정 기억하냐고. 다행이라고,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고. 이번에도 구해 줄 거야. 아버지잖아.”

***

도명과 도화는 나란히 서서 집에 도착한 사람들을 하나둘 맞이했다. 도화는 이런 손님맞이가 어색해 도명의 등 뒤에서 반 발자국 물러나서 그와 몸을 겹친 채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대부분 도명의 손님들이라 모르는 얼굴도 있고 낯이 익은 얼굴도 있었다. 다행히 낯이 익은 얼굴이 더 많았다.

우선 도명의 식구 중에는 어머니와 도희,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왔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뭐라도 거들어야 하나 싶어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도명과 도화가 준비를 다 했고 아르바이트생까지 있어서 그들은 그냥 식사와 이벤트만 즐기면 될 터였다.

도화가 얼굴을 아는 사람들로는 살짝 민망하게도 도명이 만든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책 만드는 진호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도화의 머리를 잘라 줬던 세영과 그녀의 애인이 왔다. 도화는 보기 좋은 레즈비언 커플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도명은 두 사람 다 아는 사람인 것처럼 살갑게 인사했다.

“이제 도화 씨는 내 애인이니까 앞으로 도화 씨 머리는 공짜죠?”

도명이 세영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도화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도명을 툭 쳤다. 하지만 세영이 자기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오히려 민망해하는 도화에게 일부러 다른 미용실 가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그리고 외식업을 한다는 덕호와 수제 명품 구두를 만든다는 수영은 도화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덕호는 뭔가 안에서 크게 덜컹거리는 상자를 들고 와 변수를 싫어하는 도명과 겁이 많은 도화를 긴장하게 했다.

그리고 도명의 회사 사람으로는 대표로 딱 두 사람이 왔다. 이들은 그냥 오게 된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오디션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가장 최고의 비디오 촬영 기술을 겨루는 엄청난 오디션이었다. 도명이 회사 직원들의 항의에 딱 두 명 자리를 주겠다는 말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촬영 장비를 잔뜩 챙겨왔다. 도명은 두 사람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차하면 마음을 확 바꿔 그들이 들고 온 황금 초대장(오디션을 더욱 극적으로 하기 위해 원래 초대장에 금박을 입혔다. 회사 장비로.)을 뺏고 수문장이 되어서 이 문턱을 못 넘게 할 기세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설마 했는데 그냥 평범하게 오는 법이 없구나. 아니, 우리 마감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다들 생각보다 체력이 엄청 좋잖아.’

“그러니까 이런 좋은 일은 회사 옥상에서 하자니까요. 미디어가 극찬한 그 옥상 정원에서 신랑신랑 행진도 하고요.”

도화가 도명의 뒤에서 얼굴이 새하얗게 된 채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개복치가 싫다고 하잖아요.”

“막상, 우리 만나면 잘 놀면서. 핼러윈 때 우리만 즐거웠어요?”

그와 그녀가 섭섭한 표정으로 도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도화가 너무 완벽한 핼러윈 파티였다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신랑신랑 행진? 콜? 그 검은 토르의 다이내믹 폐백 받기 코너도 있다고요.”

‘우리 백구 체육 예능으로 데리고 놀지 마. 언제 그런 코너를 또 만든 거야.’

“아니요. 그건 좀.”

“아. 아쉽네요.”

“도화 씨 그만 괴롭히고 제발 들어가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열정 과다인 하객 둘을 집 안에 들여 보내고 눈에 띄는 슈퍼카 한 대가 집 앞에 도착했다. 혁준의 차였다. 혁준이 차를 대자마자 그 안에 탔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도화가 같이 식사했던 그 SM 그룹이었다.

소휘가 빨간 칵테일 원피스를 입고 나오고 요셉은 하얀 정장에 검은 가죽 초크를 하고 내렸다. 도명은 그런 두 커플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내 파티에서 나보다 눈에 튀려고 해? 하지만 이내 눈이 마주치자 도명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누님, 오늘 너무 예쁜 거 아니에요?”

“아니, 좋은 날인데 예의를 차려야지. 그리고 주인공들만 하겠어. 도화 씨 오래간만이에요.”

“안녕하세요.”

“도화 씨 한껏 꾸민 것 봐. 도명이야 원래 그렇다 치지만. 요셉아, 도화 씨 한껏 꾸민 거 너무 귀엽지 않니? 그사이 반들반들해진 것 좀 봐.”

“혁준 씨 왔어요? 와 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와야죠. 좋은 일인데.”

두 남자가 서로 마주 보며 웃고는 악수를 했다. 도화가 도명의 등 뒤에서 두 사람의 손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혁준과 도화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전에는 대놓고 소유욕 티도 못 내더니, 도화 씨 솔직해지니 참.”

혁준은 일부러 뒷말은 삼키고 여유롭게 웃으며 들어갔다. 도화는 그런 혁준의 빤한 수에 넘어가 낑낑댔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표정에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볼에 입을 쪽 맞추었다.

“하여간 아마추어 같긴.”

“솔직해지니 제가 뭘요?! 네? 추잡해요? 그런 뜻인가?”

“도화 씨, 무슨 승자가 왜 이렇게 여유가 없어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혁준의 차에서 얼굴이 파리한 서윤이 슈퍼카의 차 키를 들고 내렸다.

“서윤이 네가 왜 이 그룹에서 내려?”

“어? 아. 그럴 일이 있어.”

서윤이 주머니에 소중하게 슈퍼카 열쇠를 집어넣으며 어수선하게 말했다. 도명이 정신 차리라는 듯이 서윤의 눈앞에서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와- 나는 저런 비싼 차는 후들거려서 운전 못 하겠네.”

“혁준 씨 운전사로 투잡하는 거야 뭐야?”

“아니거든. 그냥 이런 거 사람들 로망이잖아. 이런 차 한 번이라도 운전해 보는 거.”

“뭐 운전이야 비슷하지. 운전 잘하는 애가 엄살은.”

“아니, 그런 게 있어. 아 도화 씨 오래간만이에요.”

서윤이 도화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며 말했다. 내내 안색이 하얗던 서윤이 도화의 얼굴을 보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도화는 그런 서윤의 웃음에 동화되듯이 그도 지금까지 손님 중 가장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서윤은 쇼핑백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들어갔다.

“서윤 씨는 여전히 사람이 참 좋네요.”

도화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지겹네.”

“네?”

“서윤이 사람 좋다는 말이요. 도화 씨한테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들어앉겠어요.”

도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도화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러자 도화가 푸시시 웃으며 말했다.

“도명 씨, 무슨 승자가 왜 이렇게 여유가 없어요?”

“그나저나 진영 씨 커플은 왜 이렇게 안 오죠?”

“그러게요. 다 도명 씨 손님이고 내 유일한 지인인데.”

도화는 초조해지고 시무룩해졌다. 그때 진영이 커다란 토끼 인형을 들고 낑낑대며 도착했다.

“진영아!”

진영이 안 올까 봐 초조했던 도화는 버선발로 진영을 맞이했다.

“수정 씨, 안녕하세요. 오느라 수고했어요.”

“그렇게 멀지도 않은걸요. 뭘. 도화 씨 너무 축하해요.”

“아니, 그런데 이건 웬 인형이야?”

도화가 진영이 힘들게 들고 있는 인형을 쳐다보며 말했다.

“빈손으로 올 수 있냐! 결혼 선물이다. 이놈아.”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인형을 준비해.”

“내가 장담한다. 너 좋아 죽을걸. 각오해. 네가 이걸 받고 가장 행복한 순간에 뺏어 줄 테니까.”

진영은 힘들게 준비했건만 투덜대기부터 하는 도화가 얄미워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런 진영의 옆에서 수정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도화는 일단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지만 여전히 인형 선물은 참으로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

먼저,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 전에 간단한 애피타이저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너무 처음부터 본 식사가 올라오면 준비한 이벤트에 사람들이 집중 못 하기 때문이었다. 도명이 와인 잔을 들며 능숙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도화는 여전히 너무 상석에 앉은 것이 어색해 빳빳한 나무토막처럼 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화 씨는 제게 갑자기 부딪쳐 오는 사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고를 당한 거죠.”

도화는 어색해서 괜히 힘주어 마련한 정장 구두 끝만 골똘히 보고 있다가 도명의 사건이라는 말에 빠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사건이라니! 사건이라니!’

“이 크고 귀여운 남자한테 치여서 죽을 뻔했다니까요.”

도명이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사람들이 웃었다. 그리고는 도화가 도명의 말처럼 정말 크고 귀여운지 훑어보았다. 도명은 그냥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의 말은 완벽하게 과장은 아니었다.

정말 그때의 감정을 돌이켜 보면 용케 감정에 압도 안 당하고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만한 제가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겠더군요.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러졌습니다. 저는 언제나 사건을 싫어했습니다.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을 사건이라고 하니까요. 아마 누구나 그럴 것 같습니다. 통제할 수 없다면 참을 수 없이 불안하고 또 외로우니까요. 하지만 도화 씨를 만나고 삶은 예상하고 통제할 수 없고, 또 그런 걸 운 좋게 성공하며 살았다면 그건 인생이라는 우주를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에 억지로 구겨 넣고 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화 씨는 맹랑하고 순진하게도 그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더라도 편안하고 또 행복해졌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달곰한 사건이든 달갑지 않은 사건이든 그와 함께 살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서 이 뜻밖이지만 아름다운 사건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도명의 말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사건들을 생각하며 다양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도화 씨는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아 네? 네? 아니, 준비하라고 안 했잖아요. 갑자기 아. 그러니까. 도명 씨, 으아. 그러니까. 음, 사랑해요. 네. 사랑하고말고요. 아 어떻게 하지. 왜 갑자기 이런 걸 시키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도명 씨를.”

“사랑한다는 거 알겠어요.”

사람들이 웃으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도화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다음에는 도명과 도화가 예물을 나눠 가졌다. 일단 도명이 도화가 예전에 썼던 기름나물 꽃을 모티브로 한 금속 화관을 썼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이 팔찌를 나눠 가졌다. 도화가 쓴 화관처럼 기름나물 꽃이 모티브였다.

“근데 그 팔찌에 있는 꽃은 뭐예요? 앙증맞고 너무 귀엽다. 이런 쪽 전문가인 도명 씨니까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겠죠? 꽃말이라든가.”

“기름나물 꽃입니다.”

도명의 말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잘 모르는 식물이었고 이름도 낭만적인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도명이 이 꽃에 대한 일화를 설명했다.

이건 도화가 바게트 사 오라고 했더니 난데없이 꽃을 뿌리째 뽑아왔고, 그걸 같이 심다가 그 꽃을 가지고 도명이 충동적으로 프러포즈를 했다고 말했다.

도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에 놀랐다. 도명 같은 사람이 충동적으로 프러포즈를 하다니. 그리고 그 꽃으로 예물을 만들다니.

“의미는 사건이, 그러니까 이야기가 만들어 주는 것 아니겠어요?”

도명의 이어지는 말에 사람들이 그제야 너무 적절한 예물 디자인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 씨 준비한 거 있죠?”

“아. 네.”

도화가 긴장된 표정으로 어기적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도화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며 피아노 연주를 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치지만 내내 여유로운 표정이었던 도명까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화가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놓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한숨을 크게 쉬었다. 구경하는 사람까지 숨 막히게 하는 연주자였다.

“으아, 도명 씨. 완벽해야겠죠?”

도화가 도명을 향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주하다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그만둬도 되니까 그냥 뭐든 해 봐요. 그냥 피아노 연주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도명 씨도 긴장하고 있잖아요.”

“하하. 긴장은 무슨.”

도명은 괜히 소맷자락을 빳빳하게 늘리며 말했다.

“저, 박치예요. 음치예요.”

도화가 관객들한테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사람들은 푸시시 웃으며 별 기대감 없이 도화의 재롱을 두고 보았다. 사실 별 기대도 없었다. 저 숫기 없는 사람이 뭘 할까 싶었다. 오직 도화의 축가를 받아 본 진영 부부만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긴장해도 결국엔 어느새 노래에 빠져들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약간은 심드렁한 분위기 속에서 도화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우울한 듯 달콤하고 울림이 깊은 멜로디가 뒷마당에 울려 퍼졌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 때문에 당신을 진정 사랑하기는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그럴 가치가 있어요.

전 그런 전율이 좋아요.

자. 어서요. 제게로 와서 제 마음속을 파고 들어와요.

육체란 당신의 모든 분노, 행복, 고통을 담는 곳이잖아요.

어서요. 어서, 제게로 와서 제 마음속을 파고 들어와요.

나는 그런 긴장감을 즐겨요.

c'mon through /Lasse Lin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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