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39)

16811099499454.jpg

도화가 사랑에 빠진다면 역시, 도명.

퇴근한 도화를 도명이 반가운 얼굴로 반겼다. 평소 도화를 맞이하는 도명이 퉁명스러운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반가운 표정이었다.

“표정이 왜 이렇게 좋아요? 기다리던 택배라도 왔어요?”

도명이 기분 좋아 보이자 도화도 일단 뭔지 모르겠지만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네.”

“아. 정말요?”

“네. 딱 맞췄네요.”

도명이 도화에게 어떤 작은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인쇄물들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드디어 주문한 초대장이 왔어요. 음, 완벽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나온 것 같아요.”

도명이 초대장 하나를 뽑아 도화의 손에 쥐여 줬다. 검은 바탕에 로즈골드 색 금박으로 레터링 된 초대장이었다. 도화는 그것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걸 나눠 주게요?”

“왜요? 마음에 안 드는 것 있어요? 디자인 같이 체크했잖아요.”

“아니요. 완벽해요. 완벽하고말고요.”

“그런데 왜요?”

“아뇨. 그냥 얼떨떨해요. 내가 이런 지랄을 떨다니.”

“지금 내가 지랄 떤다고 돌려서 깐 거죠?”

“아뇨. 아뇨! 사, 사실 아주 약간의 10분의 1쯤이요.”

도명이 인상을 팍 쓰며 자기 손가락 끝에 이마 딱 대라는 듯이 손짓했다.

“아주 약간의 10분의 1쯤이라니까요!”

“그것도 괘씸하니까 딱 대요.”

도화가 이마를 미리 문지르면 덜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이마를 손바닥으로 마구 비빈 다음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댔다. 도명이 있는 힘껏 손가락을 튕겨댔다.

“내가 회초리 가져올 거 참았어요. 나도 아주 약간의 10분의 1쯤 때린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아주 약간의 10분의 1쯤 착하네요.”

“아. 그런데 뭐랄까 검은색이니까 뭔가.”

“섹시하죠?”

“아. 네 것도 그렇고. 그렇고말고요. 이게 청첩장은 아니지만, 청첩장 같은 거잖아요. 불만이라기보다 그냥 디자인이 좀 낯설게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래서 남들 다 하는 것처럼 하얀색이 옳았다는 겁니까?”

“아. 음.”

“왜 디자인 회의할 때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다가 물건 나오고 나서야 이러는 겁니까?”

도명이 도화를 괘씸하다는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냥 도명 씨는 언제나 이런 쪽으로 저보다 옳으니까…….”

“그래서 아무 생각을 안 했다고 지금 나한테 자랑하는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닌데.”

“우리는 하얗게 안 살 거예요. 아주 섹시하게 살 거예요. 이의 있습니까?”

“아니요. 아니요!”

도화의 반응에 도명이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는 초대장을 흔들어 보이며 디자인 통과냐는 듯이 되물었고 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여유롭게 뽑았어요. 인쇄물은 대량 인쇄가 기본이라 우리 같이 조촐한 결혼식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뭐든 여유롭더군요. 도화 씨는 몇 장 가져갈래요?”

“네?”

도화는 도명의 간단한 질문에서 목이 막혔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반응을 분명히 눈치챘지만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 쪽에는 한 20장이면 될 것 같군요. 직원들이 온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 끼면 이 집 뒷마당에서 다 수용 못 할 것 같아서 사장 개인사에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 섭섭해하지는 않던가요?”

“뭐 경조사에 동원되는 것보다 집에서 누워 있는 게 좋죠.”

“아 그런가요?”

도화는 사실 도명의 직원들이 이런 도명의 선 긋기에 오히려 이런 이벤트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확실한 게 아니니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네. 왜요? 신경 쓰입니까?”

“아. 네. 그런데 도명 씨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요.”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나중에 도화 씨가 떡이든 케이크든 돌리러 가든가요.”

“으아. 그게 무슨 지랄이에요.”

“이도 저도 못 할 거면서 신경만 잔뜩 쓰기는. 사람이 참 효율성이 안 좋네요. 그래서 도화 씨는 몇 장 필요해요?”

“아. 저는 일단 진영이 부부하고.”

“서윤이 것도 챙기고.”

“아, 진짜요?”

“네.”

“도명 씨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왜요? 아직도 서윤이가 도화 씨 때문에 질질 짜고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그럴 존재라도 되나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에요?”

“아니, 서윤 씨는 도명 씨 쪽 지인이라는 게 더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서윤이는 나보다 이제 도화 씨 쪽 지인입니다. 나하고 서윤이 은근히 사이 안 좋은 거 알면서 그러네요.”

“그렇게 티격태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친하다는 증거인데요.”

“그래서 서윤이는 내 초대 손님 해요?”

“그게 누가 초대하든…….”

“알았어요. 아. 그리고 혁준 씨 초대할 건데. 도화 씨가 불편하면 뺄게요. 아주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말해요.”

“아뇨! 아뇨! 꼭 초대해요!”

도화가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도명에게 말했다. 도명이 도화의 반응에 잠시 깜짝 놀라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왜요? 내 남자인 거 자랑하고 싶어서요?”

“아뇨!! 제 마음은 순수한데요. 그냥 와서 맛있는 저녁 식사 하고 가시라는 거죠.”

“순수하긴요. 혁준 씨가 막 화가 난다고 파티장에 슈퍼카 기어 올리고 난입하면 어쩌죠?”

“안 그럴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초대 손님 목록에 도명 씨가 올리죠.”

도화가 자기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럴 거 아는 사람이 그렇게 꼭 혁준 씨를 의식해댑니까?”

“일말의 감정의 씨를 말려야죠. 모든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해요. 도명 씨.”

“우리 백구. 그런 똑 부러진 마인드는 대체 언제 생긴 겁니까?”

도명이 도화가 기특하다는 듯이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완벽한 도명 씨한테 배웠죠.”

“잘 배웠어요. 일 처리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도화가 도명의 칭찬에 기쁜지 뺨을 도명의 품 안에서 비벼댔다.

“그럼 초대장은 일단 2장이면 됩니까?”

“아. 그리고 2장 더요.”

도화가 심호흡을 크게 하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비장했다. 그리고 조금은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머리를 세게 끌어안고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큰 결심 했네요. 도화 씨.”

“무서워요.”

“그런데 하는 거예요?”

“네.”

“왜요?”

“연습 많이 했잖아요. 무서운 순간이 지나고 난 후에도 별일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왜 지금이에요? 초대장 수 도화 씨 쪽으로 더 채우고 싶어서요?”

“그냥, 인생에서 가장 의기양양한 순간이라서요. 그런 게 아니면 제가 언제 용기를 내겠어요.”

“나한테 만날 유난 떤다고 하더니, 지금이 가장 의기양양한 순간이에요?”

“네. 남들이 유난 떤다고 욕할 게 두려운 것도 나고, 도명 씨가 내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도 나니까 그렇게 너무 놀리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만 놀릴게요.”

“도명 씨, 오늘 나를 거칠게 안아 줘요.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따뜻하고 안전한 아침을 맞이하게 해 줘요. 아주 완벽하고 보슬보슬한 아침 말이에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고이 모셔 둔 결혼식 첫날밤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지만 자신의 셔츠를 꽉 쥐고 올려다보는 도화의 얼굴을 보자 그까짓 거 한 번 잔다고 뭘 얼마나 큰일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이고 100번이고 그저 알량한 숫자에 지나지 않을 것을.

“네. 알겠어요.”

“아주 거칠게요!”

“자기야, 알겠다니까.”

“그리고, 나 직접 안을 생각하지 말아요. 그, 야한 기구만 쓰라고요.”

도화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도화가 내뱉는 의외의 말에 도명은 당황했다.

“나도 좋아해요. 도명 씨 안달 난 표정. 도명 씨만 그런 취미 있는 거 아니라고요.”

“도화 씨 날 너무 따라 하는 거 아니에요?”

“따라 하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전부터 난 도명 씨 안달 난 표정이 좋았다고요. 도명 씨처럼 수단 방법이 없었을 뿐.”

“나 참, 내가 개를 주워 온 줄 알았더니 늑대를 주워 왔었네.”

“그냥 순한 개가 되는 것만으로는 도명 씨 같은 남자를 가질 수가 없어요.”

“어째서요? 내가 순한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는 말 잘 듣는 걸 질린 적이 없어요. 도화 씨 이겨 먹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래요.”

“생각해 봐요. 도명 씨. 내가 도명 씨의 말을 무조건 다 잘 들었으면, 지금쯤 그저 그런 SM 파트너였겠죠. 안 그래요?”

“나 참. 그러네. 요즘 자존심 상하게 도화 씨한테 말발로 밀리는데 각오해요. 지금까지 실점한 거 역전시켜 줄 테니까.”

“왜 밀리는지 알아요? 난 도명 씨보다 마음의 지도를 잘 읽거든요. 결국 언어란 건 기술보다 결국은 좀 더 점도 높은 진심에 더 강해지거든요.”

“그래서 우리 유능한 백구는 마음의 지도를 어떻게 읽기에 이렇게 잘난 척을 하는지 들어나 봅시다.”

“마음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아요. 도명 씨는 마음도 너무 잘 차려입고 있다고요.”

“아 결국은 또 같은 맥락의 문제네요. 그건 너무 오래돼서 체화된 습관이에요.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거예요. 거의 무의식의 영역까지 내려왔다고요.”

“도명 씨가 기억을 자꾸 잃어버리는 물고기인 것처럼 자꾸자꾸 말해 줄게요.”

“자기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잘난 맛으로 살아온 사람한테 약 오르게 핀잔만 하지 말고.”

“잘생겼다.”

“아니, 그거 말고요.”

“사랑해요.”

“네. 그거요. 아니 둘 다요.”

***

도화는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렸다. 10년 가까이 되는 사이 풍경은 적당히 바뀌고 적당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도화가 살던 아파트 단지는 예전보다 조금 낡았다.

도화는 괜히 가방 안에 집어넣은 초대장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이 갈림길 앞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용기 내서 집 초인종을 누른다 해도 부모님이 안 계실 수도 있다. 그사이 이사를 가셨을 수도 있다.

도화의 마음 한편에서는 차라리 그편을 바라기도 했다. 끊임없이 두려워하던 일을 직면하지는 않고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쨌든 시도는 했고 그저 상황이 어쩔 수 없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음의 한 편에서는 현관문이 열리면 부모님의 얼굴이 보이고 이 모든 번뇌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도화는 모두가 내 마음이니 어느 쪽이든 기뻐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살던 101동 화단 앞에서 다리가 풀렸다. 도명이 원한다면 같이 가 주겠다고 했었는데, 괜찮다고 거절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됐다. 도화는 고민 끝에 도명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도화 씨, 말버릇이 그게 뭡니까?”

수화기 너머로 숙영 특유의 정갈하고 사늘한 목소리가 퍼졌다.

“아. 엄마! 엄마……?”

“네. 잘했어요.”

“저, 그, 청첩장, 아니 초대장은 잘 받으셨어요?”

“네. 잘 받았네요.”

“저. 그.”

“갈게요. 도희와 함께요. 도희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아주 신이 났어요. 도화 씨한테 줄 선물도 준비한 것 같던데요.”

“아 정말요. 아이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환불하라 할까요?”

“아니요! 아니요!”

수화기 너머로 숙영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도화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도명이 아버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혹시 섭섭해요?”

“아니요.”

“도명이는 어떤 것 같아요?”

“엄마가 오는 것만으로도 도명 씨는 충분히 기쁜 것 같아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 저.”

“말해요.”

“감사합니다.”

“뭐가요? 내가 내 아들 초대에 가는 건데.”

“아. 그렇긴 한데. 우리 사이가 조금은 특별하잖아요.”

“네. 우리 아들은 특별해요. 도화 씨도 특별해요.”

특별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투가 온화했다. 그러니 다른 수식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도명 씨하고 제가 음식 준비 신경 많이 썼어요. 맛있을 거예요.”

“그래요. 기대할게요.”

“아. 저. 제가요. 지금 부모님께 초대장 전해 드리러 가거든요.”

도화가 자세히는 이야기 안 했지만 숙영도 도화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대충 알고 있기에 잠깐의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그렇군요.”

숙영은 이내 여상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저…… 저.”

“도화 씨.”

“아. 네.”

“도화 씨가 원하는 일이 마법처럼 생기지 않을 수도 있어요. 사실 인생의 99.9%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아. 그렇죠.”

‘역시 도명 씨 어머님! 도명 씨랑 똑같이 한결같아서 다른 의미로 익숙하고 편하네.’

“하지만, 그것만 알아둬요. 부모도 틀려요. 보모와 자식이 만나는 시선의 시작점이 어딘지 알아요? 아이는 연약하고 작아서 나를 올려다봐요.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을 하죠. 그러면 나는 답을 모를까 두려워져요. 하지만 그 두려움도 들키면 안 돼요. 그 누구도 흔들리는 나무에 몸을 기댈 수 없으니까. 이 연약하고 작은 아이가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낄까 봐 그렇게 두려움이 밀려와요. 내 답을 모르는 두려움이 아이에게 들킬까 봐 무서워요. 나는 아이에게 존경받고 싶고 잘못된 길로 안 가게 이끌어야 하는데, 사실은 나도 답을 몰라요. 그래서 사실은 답을 모르면서도 눈빛을 정돈하고 목소리를 단호하게 내뱉으면서 답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마치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내가 불안과 초조함에 급하게 정의한 답에 아이가 상처받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도화 씨는 답을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어요.”

“그럼 된 거예요.”

“네.”

“인생에 좋은 일은 마법처럼 일어나는 게 아니라 느리고 쪼개진 화면으로 보는 밀물처럼 오는 거예요. 도화 씨 발등에 닿은 물결은 그렇게 해서 온 거예요. 갑자기 폭죽 터지듯 나타난 마법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번 물결도 그렇게 기다려요. 왜냐하면 도화 씨는 답을 알고 있으니까. 잘 가고 있잖아요. 부모들은 결국은 내가 틀렸다 해도 결국은 자식이 잘 가고 있는 것에 기쁠 거예요.”

“네. 엄마.”

“이제 대답 예쁘게 잘하네요.”

***

도화가 초인종을 누르자 도화의 눈에는 아주 느린 화면으로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너무나도 낯에 익으면서 동시에 낯설어진 얼굴이 보였다.

도화의 어머니는 너무 오래간만에 그리고 뜻밖에 아들을 보자 말을 잃었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뚝뚝 끓어진 음성을 내었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도화의 아버지가 누구냐며 나왔고 도화와 눈을 마주쳤다. 도화는 그들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죄인처럼 급하게 얼굴을 내렸다.

어머니는 도화를 끌어안고 무너지듯이 현관 앞에서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도화의 잘 차려입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도화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줄기에 손을 얹었다.

“들어와라.”

아버지가 잠긴 목소리에 애써 힘을 주고 말했다. 도화는 어머니를 부축했다. 집 안은 어느 것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마치 도화가 집을 떠나기 직전 그대로 스노우볼 안에 담가놓은 풍경 같았다. 사소한 가구 하나, 가전제품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도화가 무거운 손짓으로 식탁 위에 가져온 케이크와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황망한 손으로 케이크 포장을 풀고 과일을 접시에 담았다. 그녀의 손에 닿은 사과의 감촉이 왠지 모르게 비현실적이었다. 도화와 아버지는 서로 말없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냐.”

오랜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온 한 마디는 지나치게 여상스러웠다.

“네.”

“아침밥은 챙겨 먹었고?”

“네.”

“이렇게 예쁘고 신기하게 생긴 케이크는 처음 본다.”

어머니가 식탁 위에 도화가 가져온 것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대수롭지 않은 내용을 말하면서도 지나치게 젖어 있고 떨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녀 자신도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이 그녀의 말처럼 이렇게 예쁘고 신기한 케이크는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정신의 한 끝자락일지라도 신기한 케이크에 정신 팔렸다니.

도화가 사서 온 것은 체리 케이크였는데 빨간 보석처럼 표면이 완벽하게 설탕으로 코팅되어 있었고 묘한 마블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케이크 한가운데 미의 정수처럼 설탕에 코팅된 체리가 얹어져 있었다.

도화의 어머니는 과일 중에 체리를 제일 좋아했다. 그래서 도화는 자신도 단골이 된 도명의 단골 케이크 가게에서 신중하게 골라 온 것이었다.

도화는 맨 처음에는 이 작은 것이 이렇게나 비싸고 쓸데없이 지나치게 미학적이라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입안에 들어가면 끝일 게 이렇게까지 예쁠 필요가 있나? 이건 일반 사람들이 즐길 수 없는 부르주아 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도화는 도명이 사 오라고 해서 사 오는 것이거나 그가 줘서 먹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특별한 케이크가 하나둘 생기고 맛이나 종류도 미세하게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기함했던 식사 한 끼 가격대의 작은 설탕 덩어리들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그의 작은 기분전환 거리가 되었다. 간식치고는 가벼운 소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이건 부르주아들이나 즐기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뭘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생각했나 싶었다.

도화의 집에서는 케이크라고는 언제나 딱 한 종류였다. 아버지의 오랜 단골집인 동네 빵집에서 사는 과일이 잔뜩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가게도 안 변하고 아버지도 안 변하니 케이크는 시간이 흘러도 한 가지였다.

그러니 도화의 어머니에게는 충분히 도화가 사 들고 온 케이크가 낯설고 신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케이크 하나가 그렇게 비쌀 수도 있다는 것도.

“체리 좋아하시잖아요. 맛있을 거예요.”

“아. 그래.”

다시 이어지는 침묵, 세 사람은 말없이 도화가 들고 온 것들을 먹었다. 도화가 들고 온 케이크와 어머니가 경황이 없는 와중에 타 준 달짝지근하고 싸구려 크림 맛이 나는 커피 믹스가 묘하게 조화롭지 않아서 속이 살짝 부대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그 흔한 커피 믹스가 소중한 것인 것 마냥 손에 쥐고 최대한 입꼬리를 올렸다. 커피 믹스가 담긴 머그잔을 감싸 쥐면 손바닥이 따뜻해져서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데우기 좋았다.

이 서로 안 어울리는 달콤한 맛들 사이를 채운 공기가 현기증 나고 현이 떨리듯 파르르 떨렸다.

“그래 잘 살고는 있냐?”

“네.”

“대학은 무사히 졸업했고?”

“네.”

“그리고 취직은?”

이어지는 아버지의 질문들이 참으로 빤했다. 그동안 이어진 대화의 공백들이 갑자기 메워질 리가 없었다. 대화의 맥은 가닥을 잡으려고 해도 희미했다. 그러니 질문의 내용은 서로 잘 모르는 사람이 만난 면접에서의 대화처럼 상투적이었다.

“했어요. 자리도 어느 정도 잡았고요. 지금 5년 차에요. 대학 졸업하고 적당한 곳에 바로 취직했어요.”

“그래. 장하다. 부모 도움 없이 힘들었을 텐데.”

“네. 대학은 매번은 아니지만, 장학금도 꽤 받았고, 집도 좋은 집주인을 만나서 별로 부담되지 않은 가격에서 좋은 주거 환경에서 살았어요. 집도 튼튼하고 혼자 살기에 공간 빡빡하지 않고, 환기도 잘돼요. 겨울에 지나치게 춥지도 여름에 지나치게 덥지도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햇볕이 잘 들어요. 아침이 오면 바로 온몸이 알 정도로요. 그런 곳을 고시원 방 한 칸 살 돈으로 지금까지 잘 살았어요.”

“그래. 도화 네가 얼핏 보기에는 안 그래 보여도 어릴 때부터 실속 있긴 했지.”

“운이 좋았어요. 정말 좋은 분을 만났거든요.”

“그래. 집 계약은 계속 연장 가능하고?”

“아니요. 이제 곧 끝나요.”

“그래. 걱정할 건 없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네 방도 그대로고.”

아버지의 말에 도화는 난감한 표정으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내내 오늘 여기 와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미뤄왔다. 계속 이런 일상적인 말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마치 이대로 두면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계약 연장이 안 되는 이유가 집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 제 후회로 남을 만큼이요.”

“저런.”

어머니가 짧게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그분 조카가 집을 상속받았어요. 첫인상이 참 사늘한 남자였어요.”

“저런. 그 남자가 계약 연장이 안 된다고 했구나. 젊니?”

“네. 저보다 4살 많아요.”

“집을 유산으로 받기에는 젊네.”

“네. 그렇게 잘 지어진 벽돌 건물을 갑자기 소유하기에는 젊고 또…….”

도화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말을 이어나갔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흘러간 대화 흐름이 아니면 도저히 오늘 반드시 하고 말아야 하는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말 그대로 모든 면이 말이에요.”

도화의 이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로 묘해졌다. 도화는 계속 복받치는 감정을 삼키다 보니 눈가에 눈물이 점점 가득 차올랐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또 무르기 때문에 오히려 유리처럼 단단해진 사람이고 세밀하기 때문에 세련됐고 또 그렇기에 옆에 사람이 있어 줘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것도 세밀한 그의 풍경을 잘 아는 그런 사람이 말이에요.”

도화의 부모님은 도화의 말에 아무 말이 없었다.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도화가 만들어내는 성대의 떨림과 공기의 뜨거운 팽창을 모른 척하고 싶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 재계약이 안 돼도 걱정하지 말아라. 아까도 말했듯이 네 방은 그대로니까.”

“아빠.”

도화가 이 모든 기류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아버지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미 존재해 버린 걸 모른 척하면 마치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는 저 뒷걸음질. 도화의 DNA 속에도 있는 그 걸음걸이. 너무 잘 알기에 공감 가고 또 그렇기에 더 야속한 그 마음의 걸음걸이.

도화가 집을 나가 버린 후 작정하면 집 나가 버린 도화를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화는 이 오랜 시간 동안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완전히 도망가기 위해 애써 입학한 대학을 옮기지도 않았다. 도화는 한동안 학교 앞에서 부모님이 쫓아오는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막상 그렇게 되자 도화는 어떤 실망감이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자기 자신도 몰랐던 진심 덩어리들. 도화가 집을 나서면서 내심 바랬던 건 네가 집으로 돌아와 준다면 네가 남자를 좋아하든 뭐든 상관없다는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 도화의 상태는 직접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할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곪아 갈 수도 없다는 방황하는 마음이었다. 말 그대로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태였다.

덩치만 커다랗고 자신의 인생조차 제대로 감당 못 하는 아들의 어리광에 지나지 않는다고 누가 비난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누군가 그런 나에게 그런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무것도 안 하는 네가 잘못된 거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그 비난이 나의 나약함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을 것만은 분명했다.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부모님에게 책임 전가하면 안 된다고 비난한다 해도, 너무 오랫동안 혼자 같은 자리를 빙빙 돈 사람은 어쨌든 이 사이클을 깰 외부의 어떤 힘이 필요하다고 중얼거릴 수밖에. 너의 비난은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나약하고 한심한 나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좀 도와주세요, 비난만 하고 나를 도와주지 않은 당신들이 나빠, 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한심하게도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예요. 정말 그게 전부에요.

정말 그런 것이 나는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이렇다는 걸 타인을 향해 입 밖으로 내민 적이 없거든요. 내 입술을 내 목구멍 안에 말아 넣고 내 내장을 향해 그렇게 말한 거거든요.

나는 영원한 내 비밀 속에 갇혀 있어요. 내 입술과 내장을 연결해 만든 뫼비우스 띠에 갇혀 있어요.

어쨌든 인생은 시곗바늘처럼 눈을 감고 있는 순간에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대신 자신의 인생을 살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인생의 방향성을 어디든 결정 내릴 수 있게 내 마음이 이미 기울어진 그 방향을 향해 그것도 길일 수도 있다고 마지못해 인정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도화는 가출 후 인생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을 무기한 유예한 채 꼿꼿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무너지지 않은 것. 그게 정말 그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화는 도망가지 않는다면 멀뚱히 서서 버티는 것이 특기인 사람이고, 언제나 그럴 때마다 여상스러운 얼굴로 끌어당긴 건 진영이었다. 그 작지만, 어딘가 다부진 녀석이 큰 도화를 같잖은 힘으로 끌어당기면 도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끌려오곤 했다.

끌어당기면 끌려오는 것 그것이 도화가 유일하게 스스로 쓸 수 있는 두 번째 단계의 힘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기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줄곧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고 버티고만 서 있었고 누군가 당기면 끌려 걸어갔을 뿐인데 그의 몸은 어느새 스스로 경기장에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근력이 생겼다. 그냥 인생의 한가운데서 서 있는 것도 현기증 나서 못 했었는데.

누군가 이 장면만 본다면 기적이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미약하고 아주 천천히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느리고 쪼개진 화면으로 보는 밀물처럼. 몰랐는데 지금, 이 순간 돌아보니 그렇다.

“넌 이미 한 번 그게 아니라고 했잖아. 실수를 저질렀으니 우리한테 데리고 도망가 달라고 빌었잖아.”

“저 이도화에요. 제가 사랑에 빠진다면 당연히 남자죠.”

도화는 도명이 아버지에게 했던 그 대사 그대로를 했다. 자신을 옥죄던 금제를 깨서 신이 난 도명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도화는 두려워서 떨고 있었고 절박했다. 아버지는 도화의 말에 깊이 신음했다. 어머니는 세상 무너지는 표정으로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빠. 엄마. 제가 남자가 좋다고 쪽지를 남겼잖아요. 10년이에요. 왜 지금까지 그걸 곱씹지 않았어요. 왜 한 번도 제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는 걸 생각 못 했어요. 제게는 너무-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고요.”

“나는 네가 결국엔 그게 틀렸다는 걸 알고 돌아올 줄 알았어.”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10년 동안 두 분이 버틴 게 겨우 그런 희망이었어요?! 10년 동안!”

도화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처음 보는 소리 지르는 아들에 두 사람은 놀라서 숨을 헐떡였다.

“우린,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어. 이 낡아가는 집 안에서.”

“나는 남자를 사랑해요.”

“그 말을 하면서 왜 이렇게 떠니? 사실은 너도 알고 있는 거야. 그게 잘못됐다는 것을.”

아버지도 도화처럼 흥분해서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떠는 건 내가 틀려서가 아니에요. 두 분이 뿜어내는 감정이 무서워요. 나는 정답을 알고 있는데도 두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무섭다고요. 정답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두 분이 나를 이런 눈으로 보면 그게 나를 낭떠러지에서 미는 것 같고 무섭다고요. 나는 두 분에게 버려질까 봐 버려지기 전에 도망간 거예요. 두 분이 날 버리면 난 정말 감당할 수 없으니까.”

“도화야. 제발.”

어머니가 도화의 팔에 매달려서 흐느꼈다. 도화도 어머니의 팔을 잡고 흐느끼며 울었다. 그러다가 가방 깊숙한 곳에 구겨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넣어둔 초대장을 꺼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도화는 마지막까지 초대장 모퉁이 하나 구겨지는 일이 없도록 초대장을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결연하게 폈다.

“내가 사랑하는 도명 씨와 살림 합칠 거예요. 그걸 축하하는 자리고요. 이게 제가 두 분께 남기는 두 번째 쪽지에요. 이번에는 제대로 읽어 주세요. 10년 만에 드리는 쪽지잖아요.”

“도화야. 너 어쩌려고 그래.”

아버지가 도화에게 빌듯이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뭐?”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요. 날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 낳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이 집에서 속이 텅텅 비고 그 안이 고름으로 가득 찰 때까지 몰랐어요? 두 분은 내 속까지 만들지 않았어요. 이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에요. 내가 이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모르지만 내 안이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는 알아요. 그리고 그런 내 행복이 무해하다는 것도요.”

도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선 후에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으며 빠르게 달린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렇게 쫓기듯 아파트 단지를 나왔을 때는 익숙한 인영이 하나 보였다. 도명이었다. 도화는 눈이 동그랗게 된 채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단단하지만 슬픈 표정으로 도화를 향해 웃어 보였다.

도화가 도명의 차에 타고 도명은 주섬주섬 쇼핑백에서 따뜻한 단팥빵을 내밀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빵인지 봉투에 김이 서려 있었다.

“내가 먹보예요? 이 순간에도 막 먹고!”

도화가 괜히 도명에게 신경질 내며 말했다. 도명은 도화에게 내민 단팥빵을 쳐다보다가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어서 도화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러자 도화가 마지못해 울며 단팥빵을 받아 들고 베어 물었다. 그러자 도명이 착하다는 듯이 도화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만날 일단 뭐 먹이기만 해.”

“나 참, 잘 먹으면서. 아니 내가 위로에 재능이 없다면서요. 사람은 타고난 재능에 집중해야 나 잘난 맛에 살지.”

“이거 직접 만든 거예요?”

“네. 오븐에서 꺼낸 다음에 이동 중에 최대한 식지 않게 포장해서 왔어요.”

“따뜻하니까 엄청 맛있긴 하네요. 입안에서 보슬보슬하게 녹아요.”

“팥 직접 조려서 만든 건데 어때요?”

“맛있어요. 너무 맛있어서.”

도화가 갑자기 빵을 베어 물다 말고 눈물을 또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이 정도 반응이면 요리 만화 반응으로 손색이 없네요.”

도명이 도화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말했다.

“더 없어요?”

“왜 없겠어요.”

도명이 빵 봉지를 더 뜯어다가 도화의 입에 물려 주며 말했다. 도화는 순식간에 단팥빵을 5개나 먹어 치웠다.

“더요.”

“아.”

도명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더 없어요?”

“네.”

“왜 더 없어요.”

도화가 겨우 멈췄던 눈물을 또 서럽게 흘리며 말했다.

“울지 말아요. 집에 가서 또 만들어 줄게요.”

“지금 너무 허기진단 말이에요. 이상하게 아무리 먹어도 허기져요.”

“마음이 허기진 거예요. 배가 허기진 것이 아니라.”

도명이 살짝 볼록해진 도화의 배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허기져요. 빵 진짜 더 없어요?”

“근처에 제과점 있던데. 사 올까요?”

“그런 그저 그런 빵 먹고 어떻게 이 허기가 가셔요.”

“하아. 뭐 어떻게 해 줘요? 아니 일단 집에 가자니까요. 가면 빵 10개도 구워 줄 수 있다니까요.”

“도명 씨라도 먹어야겠어요.”

“네?”

도화가 도명에게 달려들어 그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입술을 움직여댔다. 그러자 도명은 이게 뭔가 싶어 하다가 도화의 혀를 물고 빨았다.

“도명 씨, 셔츠. 셔츠.”

“셔츠 벗으라고요?”

“네. 얼굴만으로 어떻게 배불러요.”

“아니, 여기 사람들 지나갈 수도 있어요. 운 나쁘면 도화 씨 부모님이 볼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몰라요. 그냥 지금 나는 참을 수 없이 허기진다고요!”

“뭐. 내 알 바는 아니죠.”

도명이 셔츠 단추를 푸르며 말했다. 도화는 여전히 물기 젖은 빨간 눈가로 드러난 도명의 어깨를 악물었다. 도명은 도화가 상체 곳곳을 베어 물을 수 있도록 셔츠 끝자락까지 풀었다.

“배부를 때까지 먹어요. 너무 배가 불러서 슬픈 기분도 나른해질 때까지.”

도명이 도화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속삭였다.

“나 오늘 밤도 때려 주면 안 돼요?”

“안 돼요.”

“왜요?”

“플레이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지금도 등 쓰리잖아요. 엉덩이도 퉁퉁하고.”

“몰라요. 해 줘요.”

“안 돼요.”

“안 그럼 도명 씨 여기서 다 먹어 버릴 거예요. 나 지금 너무 허기져서 위험해요!”

도화가 도명의 바지춤에 코를 묻은 채 말했다. 도화는 옷감 아래 도명의 살 냄새를 수색하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는 것을 반복했다.

“카섹스 좋네요. PS. 부모님 집 주차장에서. 나름 내 낭만인데요.”

도명은 자신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남자와 즐기는 모습을 전시하듯 보여 주는 상상을 하자 짜릿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통쾌해서 그는 자신의 엄지를 입 사이에 집어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표정에 이 남자 또라이 지수는 못 넘을 것 같아서 아쉬운 표정으로 도명의 셔츠를 하나둘 잠갔다.

“왜요? 왜 벌써 배불러요?”

“그만할래요.”

“아. 왜요.”

“계속하다가는 진짜 여기서 카섹스할 것 같아서요.”

도화가 앞섬을 들어 올리는 자신의 페니스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난 괜찮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CCTV도 있는데 음란죄로 잡혀갈 수도 있어요. 집에 가면 진짜 단팥빵 구워 줘요.”

도화의 말에도 도명이 도화의 쪽에 몸을 기울이더니 그의 귀를 물어뜯어 댔다.

“아. 진짜. 안 돼요. 안 돼.”

도화가 도명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거리를 두며 다급하게 말했다.

‘진짜 끝까지 갈 것 같단 말이에요. 진지하게.’

“사람이 참- 이렇게 날뛰다가 갑자기 얌전해지는데 뭐가 있어요. 내가 호빵맨인 줄 알았더니 잼 아저씨였네. 뭐가 이렇게 기운 빠져.”

도명의 난데없는 드립에 도화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아니 울다가 뭐가 그렇게 웃겨요.”

도화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차 시트까지 손바닥으로 쾅쾅 쳐대며 헐떡이며 웃어댔다.

“그게 그렇게 웃겨요?”

도화가 너무 웃긴 나머지 말을 내뱉지 못하고 숨을 꺽꺽 들이쉬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얼씨구. 사람이 참 실없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