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
USB 파괴 사건이 있고 난 뒤 이틀이 지났다. 도화는 여느 때와 같이 저녁에 도명과 식사 후 피아노 연습을 했다. 도화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다 말고 깊은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도명이 질색할 걸 알면서도 몰래 사진을 찍었다.
알면 너무 싫어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사진을 숨겼다.
그래, 들키면 큰일 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틀이 지났는데도 서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도화는 쓸데없는 나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에 힘을 주며 수련을 하듯 피아노 건반을 꾹꾹 눌러 댔다. 이 정도로 꾹꾹 눌러 칠 필요가 없는데 피아노 건반을 서러운 기분의 머리를 누르듯 눌러 댔다. 하지만 점점 눈앞의 악보에 집중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도화는 결국 비효율적인 피아노 연습을 그만두었다. 도화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악보를 챙겼다. 그리고 피아노가 있는 온실을 나섰다. 화원 테이블에서 예술 관련 서적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명이 연습하다 말고 나온 도화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도명은 도화가 연습 중이 아니므로 음악도 안 나오는 헤드셋을 뺐다.
“쉬려고요?”
“아. 네. 뭐.”
도화가 좋지 않은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그래요. 솔직히 도화 씨가 실수해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적당히 해요. 뭐, 마실래요? 차 내려 줄게요.”
“아. 저, 차보다 바람이 쐬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너무 한 공간에 있어서 답답해서요.”
“산책하러 나가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같이 나가요.”
도명이 의자 등받이에 걸어 놓은 외투를 걸치려고 반쯤 일어났다.
“아니요. 뭘 같이 나가요.”
“네. 굳이 같이 나갈 필요는 없죠. 필요 때문에 나가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죠.”
“아. 저. 음. 사실 술이 마시고 싶어서요. 거창하게는 아니고요. 간단하게요.”
“술이요? 뜬금없이요?”
“네…….”
“뭐. 그래요. 다만 적당히만 마셔요. 도화 씨 술 센 건 알고 있지만요. 무슨 말인지 알죠?”
“네.”
도명은 여전히 도화와 같이 나갈 생각인지 외투를 걸친 채 도화를 쳐다보았다.
“아, 도명 씨도 나가게요? 음, 그런데 도명 씨 술 잘 못 하잖아요.”
“도화 씨만큼 술을 같이 못 마셔도 근사한 안주는 사 줄 수 있죠.”
“술은 옆에 있는 사람이 잘 마셔야 마시는 맛이 있는 건데요.”
“도화 씨. 왜 그래요?”
“네? 제가 뭘요.”
도화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도명은 이미 이상한 기분을 강하게 느낀 후였다.
“지금 나하고 있고 싶지 않아요?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요?”
“그냥, 혼자 생각하며 산책하고 싶어요. 옆에 사람 신경 안 쓰고요. 섭섭해요? 도명 씨?”
‘섭섭하지. 섭섭하고말고.’
도명은 낮게 한숨을 푹 쉬고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말끔한 표정을 지었다.
“안 섭섭한 건 거짓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도화 씨가 저한테 여러 번 설명해 줬잖아요. 사람은 애정도와는 상관없이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있다고요.”
“네. 정말 애정도와는 상관없이요.”
“알았어요.”
“정말 신경 쓰는 건 아니죠?”
“걱정하지 말아요. 매번 이런 일로 도화 씨를 힘들게 하면 어떻게 같이 살아요. 자기야. 조심히 잘 들어와요.”
“네.”
***
도화는 긴장된 표정으로 진영의 신혼집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요. 도화 씨. 결혼식 때 보고 오랜만에 보네요. 자주 좀 놀러 오지.”
“신혼부부 집에 이렇게 늦게 죄송합니다. 제가 밖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자꾸 진영이가 눈치 없이…… 죄송합니다.”
도화는 수정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부하듯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자기야, 자기 친구 중에 도화 씨가 그나마 제일 센스 있다. 여기서 누가 갑인지를 알잖아.”
수정이 꽃다발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안아 들며 말했다.
“도화 씨 남자친구, 생겼다면서요.”
“아. 네.”
도화가 그녀의 말에 민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진영과 같이 사는 그녀에게까지 비밀로 하기 힘들어서 그의 성향을 말하는 것을 동의하긴 했는데 이렇게 직접 들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축하해요. 그것도 엄청나게 잘생겼다고 하던데. 스타일 좋고, 자기관리도 엄청 철저하고요.”
‘그 자기관리 철저한 거에 내가 치여 산답니다.’
세 사람은 다 이미 저녁을 먹은지라 도화가 들고 온 과일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니, 그나저나 도화 씨, 그 잘난 애인 사진 없어요?”
수정이 도화를 향해 말했다.
“자기야. 그게 그렇게 궁금해?”
진영이 수정에게 말했다.
“궁금하지.”
“아니, 남의 남자 얼굴이 왜 궁금해.”
진영이 잔뜩 경계하며 말했다.
“남의 남자니까 내가 궁금해해도 되지. 도화 씨 사진. 사진.”
도화가 주섬주섬 쑥스러운 표정으로 까다로운 도명이 허락한 사진들을 보여 줬다. 원래 도명이 잘생기긴 했지만, 천하의 유도명이 통과시킨 사진이니 더욱 완벽했다.
이 와중에 얄미운 것은 자기가 잘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그가 통과시킨 사진들은 도화가 옆에서 눈을 감았건 꼴뚜기 같은 표정을 짓고 있건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명은 도화가 어떤 모습이건 정말 다 좋아서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게 정확한 사건의 경위긴 한데 새삼 그의 검열을 통과한 사진들을 보니 이 남자의 자기관리가 얄미워서 부아가 치밀었다. 환장하겠는 건 그 와중에도 내 남자 잘난 건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세상에, 아주 영화배우랑 사귀고 있네. 도화 씨 능력 어쩔 거야.”
수정이 도명의 사진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자 옆에서 진영이 샐쭉한 표정을 짓다가 수정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말했다.
“왜 자기 능력이 더 좋잖아.”
진영이 자신의 얼굴을 수정에게 비비적대며 말했다. 그러자 수정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냐. 도화 씨 능력이 더 좋아. 응. 응.”
“그나저나 너 또 이 잘나신 영화배우님과 트러블 있어서 나한테 술 마시자고 한 거지?”
“……아냐.”
도화가 진영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긴.”
도화는 저렇게 말하는 진영이 얄밉긴 하지만 이렇게 먼저 운을 떼 주자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터뜨릴 수 있어서 좋았다.
“아니, 도명 씨가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싸웠냐.”
“아니, 싸우진 않았어. 정확히는 싸울까 봐 피난 온 거야. 너한테 이야기하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아서.”
“아…… 설마. 너 또 혼자 끙끙 앓아 대고 말도 못 하고 이러는 거야? 아니 싸우더라도 직접 말하라니까. 보면 너만 도명 씨한테 목매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도명 씨도 너하고 싸울 것 같으면 먼저 본능적으로 꼬리를 말아 넣는 느낌이던데.”
“아냐! 그 인간이 꼬리를 말아? 그 오만한 푸른 심장의 유도명이?!”
“오만한 푸른 심장? 뭐?”
“그 인간은 자기가 잘난 걸 너무 잘 알아서 얼마든지 나한테 배짱부릴 수 있는 사람이야. 나만 이 남자한테 평생 양보하고 지고 살 거라고. 사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 보니까 나 혼자만 사랑하는 것 같아서 초라한 기분이 들어.”
“아니, 아니 그렇게 추상적으로만 말하지 말고 무슨 사건 때문에 이러는 건지 말해 봐.”
도화가 문제의 USB 폭행 사건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이건, 애매하다. 진짜.”
“뭐가 애매해?”
“아니, 아니, 네가 도명 씨가 싫어할 거 뻔히 알면서도 몰래 찍고 몰래 보관하던 거잖아. 음 나는 토끼 옷이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싫은 건 싫은 거지 뭐.”
“자기야, 자기는 도화 씨가 느끼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이해 못 하고 있잖아.”
수정이 진영의 말을 뚝 끊으면서 답답하다는 듯이 그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응? 무슨 본질?”
“답답하다. 답답해. 이야기의 겉이 아니라 안을 훑어야지. 라디오 작가가 왜 이래. 정말. 도화 씨는 지금 도명 씨가 도화 씨의 행복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우선시하는 것 같아서 우울한 거라고. 아마 이번 일뿐만 아니라 도명 씨는 크고 작게 매번 그랬을 거야. 그 모든 감정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터진 거지.”
수정의 말에 도화가 무릎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 자신도 자기가 왜 이 일로 이렇게 오랫동안 우울한 기분이 안 가시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저런 문제였다.
“아니 수정이 네가 도명 씨가 매번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의 셀카 사진.”
“응?”
“아니 사진 봐 봐, 딱 답 나오지. 도화 씨가 어떻게 나오든 자기만 완벽하게 잘 나오고 있잖아.”
수정이 도화에게 어서 핸드폰 사진첩을 다시 열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도화가 공손하게 두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마치 유능한 변호사를 만난 억울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봐 봐! 여기 도화 씨 주꾸미 같은 것 봐! 그런데 본인만 잘 나왔잖아. 모든 사진이 하나같이 그렇잖아. 지금.”
‘저기요. 수정 씨, 그 주꾸미 바로 앞에 앉아 있잖아요.’
“아니, 이건 도화가 그냥 원래 주꾸미 같은 거고 도명 씨가 기본 디폴트값이 잘생긴 거 아냐?”
‘야, 주꾸미 바로 앞에 앉아 있다고.’
“아니, 사진 보면 알지. 그냥 디폴트값하고 최선을 다한 사진하고 다른 거야. 그게 구분이 안 가? 이분 고스펙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그에 반해서 옆에 도화 씨는 무작위네.”
“아니 무슨 최선.”
“이게 안 보여? 와 도명 씨 셀카 좀 많이 찍어 봤네. 프로야. 프로. 아…… 옆에 있는 도화 씨 셀카 찍는 법도 몰라. 슬퍼. 이 사진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이따위인 것 봐. 모르는 거지. 셀카 찍는 법을. 어떻게든 남들 다하는 커플 사진 찍어 보겠다고 없는 경험 끌어모아서 최선을 다한 거야. 세상에.”
“그게 보여?”
부부는 그것 가지고 한참을 싸우다가 그냥 진영이가 눈썰미가 없는 거로 급하게 결론지었다.
“이 남자 매번 이런 식이죠? 이번 일뿐만 아니라 자잘한 것들까지.”
“네…….”
도화는 차마 매일 밤 안대를 끼고 손이 묶인 채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말까지는 못 했다.
“저는요, 도명 씨가 저에 관해서 모아놓은 상자도 못 던졌거든요. 그때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는데도 난 도명 씨가 좋아하는 거란 이유로 못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도명 씨는 어떻게 망설임 하나 없이 그럴 수가 있는 건데요.”
도화가 수정에게 읍소했다.
“너에 관해서 모아 놓은 상자?”
“응. 내 자잘한 사진 출력해 놓은 거하고 여러 가지 추억의 물품. 그리고 백구 그림 물건들. 뭐 이따위 것들 말이야.”
“백구?”
“아, 그거, 도명 씨가 날 그렇게 부르거든.”
“아. 그러니까, 도명 씨가 네 캐릭터 물품을 만들어서 고이 보관해 놓고 있었다고?”
“그래, 그런 동네 똥개 새끼로 그려놓고 말이야!”
‘아 시발, 둘 다 염병을 하고 앉아 있네.’
그때 진영의 핸드폰 알림음이 울렸다. 도명이 그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진영 씨 지금 도화 씨와 같이 있죠?]
[네.]
[어딘데요?]
[우리 집이요.]
[제가 도화 씨 마중 나가는 게 좋을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무조건 마중 나와요.]
[그렇군요. 도화 씨가 혼자 있고 싶다고 했는데 혹시 제가 마중 나가면 좀 지겨워하지는 않을까요?]
[아니요. 전혀요. 마중 반드시 나오시고 그것도 낮은 자세로 마중 나와야 할 것 같은데요. 집 주소 찍어 드릴게요. 얼른 수거하러 오세요.]
진영이 그렇게 은밀하게 도명과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 도화는 한참 수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도화가 시계를 보고 두 신혼부부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아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시간이 늦긴요. 도화 씨만 괜찮다면 더 놀다 가요.”
남편 친구가 신혼부부 집에 와서 이렇게 노가리를 까고 있는 게 가장 싫을 법한 그녀가 말했다. 사실 도화는 마음속 이야기를 하느라 아직은 한창 신이 나 있는 상태였다. 도화는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재기 위해 수정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아니, 정말 제가 너무 민폐가 아닌지.”
“아니 들어보니까 이미 임시지만 같이 사는 것 같은데, 지금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고 싶겠어요? 도화 씨 성격에 제대로 화도 못 낼 거면서. 세상에 친구 좋다는 게 뭐예요. 이런 날에 피난처라도 돼야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손님 방 하나 있으니까 거기서 자고 가도 돼요. 그래야 그 잘난 분도 같이 사는 사람 소중한 걸 알죠. 안 그래? 자기야?”
수정이 진영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너도 어서 시원스럽게 자고 가도 된다고 말하라는 듯이 말이다.
“아, 음. 아니 나야 자고 가는 건 상관없는데, 도화야 도명 씨 너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그러니까 그 까다로운 사람이 그렇게 급하게 같이 살자고 한 거고.”
“어머, 자기야. 그렇다면 더구나 똥줄 타게 만들어야지. 도화 씨 마음 약해지면 안 돼요. 지고 사는 거 맘 편하고 좋죠. 무조건 상대방 이긴다고 행복한 거 아니고. 하지만 도화 씨가 이미 자기가 너무 져 줘서 초라하다고 느끼고 있잖아요. 그럴 땐 너무 제멋대로인 상대방에게 도화 씨 눈치도 좀 보게 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 도화야. 너도 문제야.”
“아니! 자기야! 어떻게 친구가! 그것도 도화 씨의 둘도 없는 친구가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너도 문제라니? 도화 씨가 호구같이 다 맞춰 준 것 외에는 뭘 잘못했냐고.”
“아니, 아니 으아, 도화 너, 그냥 직접 도명 씨에게 말하라고. 만날 나 혼자 정리할 수 있는 마음이야, 어쩌고저쩌고하는데, 결국엔 혼자 정리 못 하잖아!”
“그건 그래요. 하지만 사과를 받으려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그래야 일단 기선제압을 하죠.”
“자기야. 왜 자꾸 자고 가래.”
“어머, 자기야. 우리는 앞으로 우리 단둘이 있을 날이 아주 많아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극성이야.”
“아. 진영아. 미안하다. 내가 눈치가 없었다.”
도화가 진영을 향해 고개를 저어대며 말했다. 도화는 진영에게 밖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굳이 집으로 오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는 반응이었다.
“자기야! 아무리 우리가 신혼이지만 절친한 친구한테 이러면 안 되지!”
“괜찮아요. 수정 씨. 하하. 시간이 늦긴 늦었네요.”
도화가 시계를 보며 반쯤 일어섰다. 그러자 수정이 진영을 비난했다.
“친구 이렇게 눈치 주기 있어? 자기야! 도화 씨 그냥 앉아요.”
“야, 앉아. 앉아. 가더라도 지금은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 지금 네가 바로 나가면 내가 뭐가 되냐.”
“외로워서 온 친구 차가운 밤거리로 혼자 내보낸 친구 되는 거지.”
“자기야! 쟤가 외롭긴! 염병!”
“자기야. 이 예쁜 입으로 방금 욕한 거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꼭 이렇게 서로 예뻐 죽는 커플의 말 같지도 않은 불평을 들어 줘야겠어? 염병!”
“아냐! 서로 예뻐 죽긴! 그건 아냐. 나만 도명 씨한테 매달리는 것 같아.”
도화가 진영의 서로 예뻐 죽는다고 한다는 표현에 억울해하며 말했다.
“염병할 새끼. 지랄해라.”
진영이 잇새로 욕을 다시 한번 내뱉더니 짧은 다리를 열심히 뻗어 도화의 엉덩이가 빵 차댔다.
“자기야! 지금 도화 씨 때린 거야? 저 외롭고 커플 셀카도 못 찍는 사람을?!”
“괜찮아. 자기야, 쟤 엄청 튼튼해. 나한테 맞아도 하나도 타격 없다니까!”
“폭력은 무조건 나쁜 거야. 자기가 도화 씨와 비교하면 아담해도 맞으면 어쨌든 아픈 건 아픈 거지.”
“잠깐, 나 우리 자기 말에 마음이 아팠어. 쟤가 방금 엉덩이가 아팠다고 치더라도 분명 내가 지금 더 아파.”
“알았어. 알았어. 우리 자기 귀여워.”
“아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어떻게든 때리겠다고 짧은 다리 늘리는 자기 귀여워.”
수정이 정말 진영의 사지가 귀엽다는 듯이 그의 발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말했다.
“그게 아니야.”
“아, 어, 어, 딱 30분만 더 있다가 갈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도화는 그렇게 두 사람이 실랑이하자 중간 타협점을 잡아가며 중재했다.
“그게 무슨 슬픈 소리예요! 자고 가요!”
수정이 다시 한번 더 도화를 향해 강력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자고 가.”
‘어차피 너 수거해갈 사람 오니까. 일단 그렇다고 치지. 염병할 새끼. 어서 가.’
도화와 도명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어느새 화제는 사람 사는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그러던 중 진영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도화와 수정은 이 시간에 누가 초인종을 눌러대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진영이만은 마치 해외 배송을 기다리던 사람처럼 반가운 표정으로 현관문을 향해 갔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진영이 기대한 것처럼 도명이 서 있었다. 도명은 언제나처럼 완벽한 모습이지만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 있었다. 진영이 어서 도화를 수거해가라는 듯이 그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웬일인지 도명이 몸에 힘을 딱 주고 버티며 집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진영에게 은밀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도화 씨 지금 정확히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요?’
‘아니, 도화 지금 바로 넘길 테니까 둘이 이야기해 봐요.’
‘이야기는 당연히 해 볼 겁니다. 일단 힌트 좀 얻읍시다.’
소심한 도화는 그렇다 치고 언제나 명료한 도명마저 이러자 진영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진영은 다시 폭발한 짜증을 아직 친하지도 않은 도명에게 할 수가 없어서 만만한 도화에게 달려가 다시 그의 엉덩이를 팡 찼다.
“자기야!”
수정이 별안간 도화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진영에게 소리쳤다.
“도명 씨 왔어. 이제 집에 가.”
“응? 도명 씨가 여기 왜 와? 너희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도화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한참 편안한 분위기에서 잘 놀고 있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나한테 문자 왔기에 내가 말했다.”
“지금 날 밀고한 거야?!”
도화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어대며 말했다.
“밀고라니요. 제가 도화 씨 잡으러 온 순경이라도 됩니까?”
도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진영의 거실에서 억울해서 나뒹굴고 있는 도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수정은 한참 도화와 도명의 지나친 자존심에 대해서 욕하다가 도명의 얼굴을 실제로 본 순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완벽한 스타일링이라니.
“아, 도명 씨 그럴 리가요. 다만 이 늦은 시간에 운전해서 왔을 도명 씨가 피곤할까 봐 걱정된 거죠.”
“자기야, 자기 보러 오는 건데 어떤 시간이든 피곤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남의 집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우리 집에 갑시다.”
“아. 네. 그래야죠.”
도화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우리 백구를 이렇게 늦게까지 맡아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명이 수정에게 얼그레이로 만든 쿠키와 직접 블렌딩 한 커피를 넘겨 주며 말했다. 수정은 도명이 넘긴 쇼핑백 안을 흘깃 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직접 포장하신 거예요?”
“네.”
도명이 수정에게 눈웃음을 살살 치며 말했다. 내 남자는 아니지만 잘생긴 얼굴과 그가 건넨 물건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좋은 향기가 기분 좋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머, 센스 있어라.”
“예쁜 거 싫어하는 사람 없죠? 안 그래요?”
“그럼요!”
“고마워요.”
도명은 마지막까지 수정에게 교태를 부리고는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코너에서 억센 손으로 도화의 뒷덜미를 잡고 진영의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내내 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그 침묵이 묘했던 것이 일련의 사건들로 도명에게 화가 누적된 도화도, 어떤 말도 없이 자신이 싫어서 외출을 감행한 도화에게 화가 난 도명도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도명 쪽이었다.
“아니요. 왜 제가 집에 들어가기 싫겠어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짜증이 썰물처럼 다시 밀려왔다.
“시발, 싫다면 싫다고 이야기해요. 사람 끊임없이 눈치 보게 하지 말고.”
“네?”
도화가 도명의 짧은 욕지거리에 놀라며 되물었다.
“내가 도화 씨 괜찮다는 말 하나하나가 진짜인지 의심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요? 내 피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거 즐겨요? 지금? 다시 한번 물어요.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아니요. 진짜 그런 건 아닌데…….”
“아닌데?”
“그냥, 도명 씨 얼굴 보는 게 복잡해요.”
“정확히 뭐가 그렇게 복잡한데요?”
“그냥…… 도명 씨는 내가 도명 씨 말 잘 들어서, 다루기 쉬우니까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자 도화가 도명의 웃음 의미를 쫓기 위해 눈동자를 옆으로 빠르게 굴렸다.
“그 웃음 의미 뭔데요……?”
“그냥, 도화 씨가 다루기 쉽다는 말 자체가 웃기네요. 뭐? 다루기가 쉬워요?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아니면 잘 져 주니까?”
“잘 져 주는 건 나지.”
도명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얼씨구.”
“얼씨구??”
“아니 그게 저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옆에 이렇게 잘생긴 호구를 놔두고 어이가 없다고요?”
“무슨 호구가 남의 USB를 그렇게 부숴요. 남의 노트북도 다 뒤지고.”
“그 USB 안에 내용물이 다 나인데 뭐가 이렇게 당당해요.”
결국 도명도 열이 뻗치는지 차를 도롯가에 세우고 말싸움에 열중했다. 운전하며 말싸움을 하는 건 불리했다.
“내가 좋아서 그런 건데 도명 씨는 그게 그렇게 억울해요? 나는 항상 못생겼는데! 노력해도 쭈꾸미인데! 좀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렇게까지 좋아한다면 도명 씨도 조금이라도 좋아할 순 없어요?”
“내가 싫다면 싫은 거죠.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저는요, 도명 씨가 저에 대해서 모아놓은 상자도 못 던졌어요. 아무리 화가 나도 난 도명 씨가 좋아하는 거란 이유로 못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도명 씨는 어떻게 망설임 하나 없이 그럴 수가 있는 건데요. 날 좋아하긴 해요?”
“내가 모은 건 귀엽잖아요.”
“도명 씨도 엄청 귀여워요!!”
도화가 목에 핏대가 서가면서 발악하듯 외쳤고 도명은 감히 자기에게 귀엽다고 외치는 도화의 건방짐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귀를 잡고 흔들었다.
“아파요!”
“건방진 백구. 또, 소리 지르네요.”
“아프다고요!”
“아픈 거 좋아하잖아요.”
“이건 예뻐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예뻐서 아프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한테 자꾸 말장난 치지 말아요. 진짜 연예인이랑 사귀는 기분인 거 알아요?”
도명은 마지막 도화의 말에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칭찬 아니에요. 나쁜 의미로요. 진짜, 몹시 나쁜 의미에요. TV 화면이 선별한 모습만 보는 게 어떻게 반려에요. 사생팬도 나보다는 도명 씨의 TV 화면 밖 다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겠네요.”
“그것도 사랑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최선의 모습만 보여 주겠다는?”
“누구를 위한, 최선인데요. 대체! 확실히 말해두는데 나를 위한 건 절대 아니에요. 내 기분보다 도명 씨 자존심이나 이미지가 그렇게 중요해요?”
“내가 그게 좋다고요.”
“나는 그게 싫어요. 그냥 불편한 수준을 넘어서 너무 서럽고 싫다고요.”
도화는 정말 서러운 듯 목소리를 울먹거렸다.
“그게 왜 싫어요. 대체.”
그들이 두려워하던 대화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그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도명 씨에게 안전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결국 도화는 그동안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도명은 도화가 잠깐 화가 난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눈물까지 흘리자 당황스러웠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건데요.”
“내가 안전한 사람이라면서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여전히 불안한데요.”
“진짜 나는 못생겼으니까. 어딘가 교정이 필요한 사람처럼 일그러지고 어긋나 있을 것 같단 말입니다.”
도화는 도명이 말하는 못생겼다는 말이 단순히 외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고 또 놀랐다.
“잘하는 건 포장이고 연출이고, 그것 외에는 날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포장이고 연출이고 뭐고 하는 것들을 멈추면 알겠네요. 도명 씨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은 것뿐이잖아요.”
“충분해요. 자꾸 그런 의심의 말로 날 괴롭히지 좀 말아요.”
“아니요. 도명 씨는 나만큼 날 안 좋아하는 게 분명해요.”
“또. 개소리한다.”
“나는, 도명 씨가 날 백구라 불러서 백구라는 말도 좋아졌어요.”
“백구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나쁜데요.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울컥했다.
“백구, 개복치, 야망 발판, 변태. 이 중 객관적으로 좋은 게 뭔가 있는데요. 아 씨. 어떻게 나한테 이런 별명을 붙이고, 관련 물품을 모을 수 있냐고요. 그래도 난 도명 씨가 그렇게 불러 주면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좋아진다고요. 도명 씨는 왜 그게 안 되는데요! 만날 말로만 호구라고 하지. 진짜 호구는 나란 말이에요.”
“…….”
도화는 서럽다는 듯이 울다가 도명의 셔츠를 잡아당겨 일부러 코를 풀었다. 어디 한번 이물질 공격이나 받아 보라는 심상이었다. 하지만 도명은 셔츠가 도화의 콧물로 젖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서 중요한 건 도화의 생각과 기분이었다.
“내가 도명 씨가 방귀를 뀌어도 멋있다고 하면 신나서 탭댄스를 추면서 방귀를 뀌어야 한다고요.”
“그 무슨 소리예요. 진짜 환장하겠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진짜 하라는 게 아니라.”
“아니, 그렇다는 건 알겠는데, 비유가 너무 하잖아요. 하아. 어쨌든 도화 씨가 무엇으로 섭섭한지는 알겠어요.”
“정말요?”
“네.”
“정말,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노력하면 도화 씨 기분 풀리는 겁니까?”
“네.”
“정말요?”
“네!”
“대답이 왜 한 번입니까?”
“…….”
“왜 대답을 힘주어 두 번 못 하는 겁니까?”
“아니, 도명 씨가 이렇게 들어 주니까 기분이 이미 많이 풀리긴 했는데요, 저도 제 감정을 어쩌지는 못하겠어요. 자꾸 도명 씨가 제 USB를 망설임 하나 없이 망치로 내려치는 순간이 생각난단 말입니다.”
“도화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도화 씨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다 설명했잖아요.”
“네. 알아요.”
“아는 사람이 대답이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원래 저 이렇게 도명 씨한테 화낼 생각도 없었어요. 사건이 일어난 이틀 전만 해도 그냥 무조건 몰래 사진 찍은 내가 잘못했다고 나한테 끊임없이 말했다고요. 그런데, 오늘 보세요. 그냥, 도명 씨를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라 내 감정이 정말 내 뜻대로 안 흘러간다고요. 그래서 자신 있게 두 번 힘주어 대답하는 것까지는 못 하겠어요. 도명 씨에게 거짓말하는 것 같단 말이에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괴로운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시선을 괜히 차 유리창 윗부분에 고정한 후 한숨 쉬듯 말했다.
“그런데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요. 이미 망가진 USB를 되돌릴 수도 없고요.”
“알아요. 저 진짜 기분 많이 풀렸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하아…….”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저도 그 일 더는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할게요.”
“아니, 도화 씨가 그랬잖아요. 내 감정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또, 도화 씨 나 혼자만의 시간 필요하다며 한밤중에 나가 버리면 저 진짜 환장합니다. 알아요?”
“안 그래요. 안 그래요!”
“하아…… 이미 망가져 버린 USB는 어쩔 수 없고 하아…… 사진, 하아…… 다시 찍어 주면 뭐, 그 일 없던 일처럼 되는 겁니까?”
“……진짜요? 진짜 다시 찍어 줄 거예요?”
“……네.”
도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을 쳐다보는 도화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도명의 뺨에 입술을 자꾸 쪽쪽 거리며 뭉갰다.
“하, 나쁜 새끼. 이제야 제대로 웃네요.”
도명이 방긋 웃는 도화를 얄미워 죽겠다는 듯이 쳐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도명 씨가 너무너무 좋아요.”
“진짜, 얄미워 죽겠네.”
“오늘 가서…… 다시 찍어 주는 거예요?”
“하아…… 하기 싫은 일은 빨리 해치우는 게 좋죠.”
“네! 네!”
“아주 이럴 땐 대답 두 번.”
도명이 도화의 콧등을 손가락을 튕겨 때렸다. 도화는 코끝이 찡 울리는 느낌에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그런데 맨정신으로는 절대 못 해요.”
“그럼요?”
“가는 길에 바 좀 들립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야밤에 데이트 좀 하자고요. 그리고 마지막엔 나 좀 술로 기절시켜서 가요. 농담 아니고 진짜 기절시켜야 할 겁니다.”
***
도명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S와 M은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통제력을 잃은 몸, 그리고 그런 내 몸을 끌고 가는 남자의 경쾌한 휘파람 소리. 정말 이런 것을 즐길 수 있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바에서 제일 독한 술을 먹은 것 같은데. 왜 수술 중 마취가 애매하게 깬 것처럼 정신이 살아 있는 거지?’
S와 M은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건 이 순간에는 정말 모르겠고, 어떤 몽롱한 경계로 정신이 날이 섰다가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분명 바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낑낑대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백구의 얼굴이 보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갑자기 암전되었다.
도명이 어설픈 상태로 정신이 다시 든 시점은 도화가 그의 얼굴에 스킨로션을 정성스럽게 발라 주는 지점이었다. 피부가 뒤집히면 다음 날 난리를 칠 거라고 도화가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리고 도화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음흉한 표정으로 도명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도명은 좁고 흐린 시야 안에서 그런 도화를 보며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핀잔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 입술 근육조차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도명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웅얼거리자 도화가 도명의 웅얼거리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물컹한 도화의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아, 젠장. 술을 더 독하게 타서 먹었어야 했는데.’
옷이 벗겨지는 상황이 느껴지고 다시 정신은 암전되었다. 도명은 정신이 다시 암전되자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정신을 다시 잃기 직전 본 것은 도화가 방 안에서 혼자 탭댄스를 추며 토끼 털 옷을 가지러 가는 뒷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젠장 너무 무서웠다. 그래 잠이나 자야지.’
***
‘빌어먹을, 왜 다시 정신이 든 거지?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도명은 자신의 머리 위로 토끼 귀가 달린 후드가 소중하게 덮이는 것을 느끼며 괴로워서 앓아 댔다. 도화는 도명이 눈을 감으며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끙끙 앓아 대자 도명의 이마에 연달아 입을 맞추며 등을 토닥였다. 도명은 그런 도화가 아주 가증스러웠다.
그리고 이내 다시 끔찍한 도화의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잠을 자자. 잠을 자자. 잠을 자자.’
도명이 자신에게 세뇌를 걸듯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도명은 다시 의식이 아래로 천천히 잠기는 것을 느꼈다. 몸이 진득하고 꾸덕꾸덕한 검은 어둠에 기분 좋게 천천히 잠기려고 할 때 그의 평안한 어둠에 하얀빛이 강하게 내리쬈다.
그의 몸을 감싼 꾸덕꾸덕한 검은 어둠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질 정도였다. 도명의 정신이 다시 위로 떠올랐다.
‘아, 젠장. 왜.’
도명의 눈꺼풀 안쪽이 레몬색으로 투명하게 물들었다. 도화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열심히 사진 촬영을 하는 모양이었다. 카메라 플래시는 도저히 도명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종말을 맞은 세상의 대기처럼 계속 번개를 내렸다.
도명의 미간이 계속 구겨졌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이 부셨다.
‘아. 사진 적당히 찍자.’
도화가 촬영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 찍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도명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고마워요. 도명 씨.”
‘그래.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 영원히 S쪽 커뮤니티에 발을 못 들여놓을 거야. 두고두고 회자될 거라고. 이 유도명이 말이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해요.”
도화가 그렇게 말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숨소리와 히잇, 하고 웃는 웃음소리가 소름 돋았다.
‘아, 제발 뭔지는 모르겠지만, 멈춰 줘.’
도화가 도명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 짧은 순간 도명은 자신을 가장 경악하게 했던 사진 한 장이 머릿속에 빠르게 지나갔다. 곱게 모인 두 주먹이 턱에 닿아있는 사진이었다. 도명은 몸부림을 쳤다.
‘도화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다니까. USB 부숴서 미안해요.’
하지만 도명의 몸부림은 미약했다. 도화가 미세하게 꿈틀대는 도명이 팔을 잡고 동그랗게 모인 입술 사이로 바람 소리를 내며 도명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쉬, 금방 끝날 거예요. 아이 귀여워라. 너무 잘생겼다.”
‘안 돼. 내 돔 인생은 이제 끝이야.’
결국 도화의 힘에 의해 도명은 문제의 그 포즈를 취하게 됐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리고 도명은 정신을 다시 잃었다.
아침이 찾아왔다. 도명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목 아래 몸 상태를 훑어보았다. 다행히 토끼 옷이 아닌 평범한 파자마가 입혀져 있었다. 도명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베개에 머리를 눕힌 채 멍하니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살의 입자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햇살의 입자가 아니라 미세한 먼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거지만.
도명은 어제 새벽에 꿈 꾼을 되새기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토끼 털 옷을 입은 자신이 토끼 털 옷을 입은 작은 자신에게 망치질하는데 망치질을 할수록 토끼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꿈이었다.
“도명 씨! 일어났어요! 세상에. 속 아프죠?”
‘아니, 난 지금 마음과 정신이 더 아픈 것 같은데.’
끔찍한 전날 밤을 생각하며 미세한 몸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도명의 정신을 사납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가 앞치마를 하고 침대 옆 작은 탁자에 콩나물국이 담긴 쟁반을 올려놓았다.
도명은 눈동자를 굴러서 도화가 또 직접 끓였을 거라고 추정되는 콩나물국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콩나물 특유의 비린내와 목의 점막에 달라붙어 물어 뜯어대는 것 같은 고춧가루가 작은 섬을 이루며 떠다니는 걸 상상하니 도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도명이 누운 상태로 눈동자를 굴려대 봤자 콩나물국을 담은 사기그릇의 표면만 보일 뿐이었다.
“졸리더라도 국은 먹고 자요.”
도화가 도명의 옆에 털썩 누우며 말했다. 아침 햇빛을 받은 도화의 얼굴이 뽀송뽀송해 보였다. 거기다가 아침부터 저 생기 넘치고 기분 좋은 표정이라니. 저 표정이 얄미우면서도 참으로 예뻐 보여서 도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좀 정신이 들어요?”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목소리 좀 낮춰요. 무슨 아침부터 목소리가 이렇게 카랑카랑해요.”
“아침 햇살이 너무 좋잖아요.”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도명이 이사이로 도화의 콧방울을 물고 늘어지며 말했다. 도명이 도화에게 하는 작은 복수였다.
“아니~ 햇살도 좋고요, 마지막 사진 빼고는 사진이 너무 잘 나왔어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질색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와중에 ‘마지막 사진 빼고는.’이라는 말이 귓가에서 파리처럼 윙윙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건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았다.
“진짜 완전히 멋있게 나왔다니까요.”
“관심 없어요.”
“털끝 하나하나에도 잘생김이 막.”
“그만, 자기야. 확 물어 버리기 전에.”
“알았어요. 콩나물국 먹어요.”
“아…….”
“이번엔 잘 만들었어요. 진짜예요. 진짜 안 먹을 거예요?”
도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머리카락이 뻗었을까 봐 막 일어난 고양이처럼 머리를 손으로 빗질하며 매만졌다.
“아이, 잘생겼다.”
도화가 아침부터 그루밍 하는 도명을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 달래듯 말하는 도화의 말투에 도명이 도화의 목젖을 손가락을 튕겨 때렸다. 그리고는 흘겨보았다.
“왜요. 잘생긴 사람을 잘생겼다고 하는데.”
“놀리는 것 같으니까 그만둬요.”
“진짜 놀리는 거 아닌데요. 도명 씨는 제 선의를 항상 그렇게 비비 꼬아서 듣더라고요.”
“내가 피해망상이 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까?”
“네.”
“피해망상 아니에요. 진짜로 도화 씨한테 당한 게 많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건 피해망상이 아니라 논리적인 경험치가 많이 축적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진짜 놀리는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콩나물국이요. 진짜 먹기 싫어요?”
“도화 씨가 끓여 준 건데 사약이라도 먹어야죠.”
“지금, 설마 제가 끓여 준 콩나물국을 사약에 비유한 거예요?”
“사약까진 아니더라도 실력이 좋지 않다는 건 사실이죠.”
도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콩나물국을 응시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고춧가루가 적당히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도명이 콩나물국을 맛보았다. 그런데 막상 먹어 보니 생각보다 얼큰하고 맛있었다. 도명이 웬일이냐는 듯이 도화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화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도명 씨는 과거의 데이터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니까요. 그걸 보통 피해망상이라고 하죠.”
“어디서 사 왔어요?”
“사 오긴요. 연습했죠.”
“왜요? 또 술 먹일 날을 기약하면서요?”
“콩나물국을 해장으로만 먹나요. 그냥 도명 씨 밥해 주려고 이것저것 연습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기특하네요.”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퉁퉁 때리며 말했다. 그러자 도화가 기분 좋다는 듯이 발라당 누우며 콩나물국을 먹는 도명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었다. 그려다가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이는 눈으로 도명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 씨 사랑해요.”
“어젯밤 일을 무마하려고 아침부터 애 참 많이 씁니다.”
도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입꼬리를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올렸다.
“진짜 사진 안 궁금해요?”
“안 궁금해요. 보여 주지 말아요. 보면 확 삭제하고 싶어지니까.”
“진짜 잘 나왔어요. 마지막 사진 빼고.”
도명은 도화가 거듭 말하는 잘 나왔다는 사진보다 자꾸 잘 못 나왔다는 사진이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진 보여 줘 봐요. 그 못 나왔다는 사진 말이에요. 사진을 대체 어떻게 찍었기에 그래요.”
도명이 응징하듯 도화의 손목에 이빨 자국이 남도록 물며 말했다.
“세상에. 잘 나온 사진이 궁금한 게 아니라 지금 못 나왔다는 사진 때문에 초조해서 그러는 거예요?”
“네. 그러면 안 됩니까?”
“진짜 사람은 쉽게 안 변하네요.”
“사람은 원래 쉽게 안 변해요. 적당히 원래 이런 사람이거니 하고 살아요. 아니 그래서 그 못 나왔다는 사진 좀 보자니까요.”
“아니, 근데 이건 내 손목이 잘못한 게 아니라 도명 씨가 자꾸 인상 써서 그래요.”
도화가 핸드폰 사진을 도명에게 내밀며 말했다. 문제의 턱밑을 향해 곱게 모인 두 주먹 사진이었다.
“아, 얼마나 고통스럽고 싫었으면.”
도명이 애잔한 표정으로 핸드폰 속 구겨진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귀여운 것 같아요.”
도화가 핸드폰 속 도명을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다가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나한테 귀엽다는 말은 수치스러우니까 그만 해요.”
“그런데 도명 씨 아직도 진짜 본인이 어딘가 교정이 필요한 사람처럼 일그러지고 어긋나 있다고 생각해요?”
“……모르죠.”
“왜 자꾸 그런 생각 해요. 속상하게. 전에 도명 씨가 도명 씨 이모님한테 자신이 괴물이냐고 물었다고 했잖아요. 이모님께선 뭘 그런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하냐는 듯이 웃고는 보고 계시던 영화를 마저 보셨다고 했고요. 그리고 도명 씨는 이모님께서 임종 직전에 같은 질문을 할 수 없었다고 했잖아요.”
***
“네. 소파는 제 것으로 바뀌었지만 같은 자리에 이모님이 쓰시던 촌스러운 꽃무늬 소파가 놓여 있었어요. 딱 이 자리에 말입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지하실에서 영화 자주 보셨거든요. 아주 근사한 개인 영화관이었죠. 중3 때 영화를 보며 그 소파에 앉아 있는 이모님에게 제가 물었죠. 이모, 나 괴물이에요? 이 간단한 질문을 하는데 현기증이 나고, 속이 메스꺼웠어요. 그때 취미이신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내 얼굴을 보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말없이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죠. 그리고 바로 영화로 시선을 옮기시고는 영화 속 배우들 연기에 털털하게 웃을 뿐이었죠. 방금 정말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모님은 그 당시 영화에 빠져 있어서 기억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짧은 그 순간,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내 눈동자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었어요. 이모님은 저한테 아무 말씀 안 하셨지만 저는 그때 이모님의 반응으로 제 마음속 불안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내가 유일하게 온몸으로 믿고 사랑하며 의지했던 도도가 죽었고, 내 마음도 도도와 함께 이 집 뒷마당에 묻었어요. 그 후로 어쩐 일인지 이 공간의 좌표 안에 들어오는 게 무서워졌어요.”
“왜요?”
“같은 좌표 안에서 이모님에게 그때와 다른 답을 들을까 봐요. 네 그래요.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이었죠. 그렇다고 이모님을 안 만나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언제든지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그분과 만나면서도, 이 좌표에 그분과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내심 이모님에게 다시 내 마음 안을 들춰 보이기 겁이 났던 것 같아요.”
“도명 씨, 그분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그것에 대해서 안 물어봤어요?”
“어떻게 물어봐요. 만약 내가 원하는 대답을 못 듣는다면, 이제는 영원히 다른 답을 들을 기회는 없을 텐데요.”
***
“제가 도명 씨 이모님은 아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도 돼요? 아. 같은 사람이 아니라 의미가 없나요?”
“도화 씨 말이 내게 의미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이모님은요, 도명 씨의 눈 안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행성에 떨어져서 나는 왜 여기서 태어났고 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하나를 봤을 거예요. 도명 씨는 정답을 모르겠고 어떤 역할이라도 받고 싶어서 넘치는 재능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그 배역을 연기하며 그 불안이 주는 공백을 메웠을 거고요. 어딘가 비틀려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인생이라는 행성에 떨어진 사람이 관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눈을 여기저기로 돌리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그걸 비틀려 있다고 도명 씨가 잘못 느끼는 거예요.”
“도화 씨, 남의 영혼에 대해서 너무 확신 넘치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확신할 수 있죠.”
“그 대단한 논리의 근거나 어디 한 번 들어봅시다.”
“언제나 특별하고 우월한 도명 씨가 이런 말 들으면 조금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도명 씨도 다른 사람과 같아요. 모두 그래요. 나도 내가 이 행성에 왜 떨어졌는지 모르겠으니까. 왜 나는 내 사랑을 혐오하는 세상에 떨어져 살게 돼서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왜 나는 일 외의 개인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방어적으로 철로 된 가면을 쓰고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는 시간으로 인생의 반을 채우나. 내 인생에 어떻게 이렇게 잘생긴 애인이 떨어졌나. 등등. 그러니까 이모님도 도명 씨 질문이 대수롭지 않았을 거예요. 질문의 무게가 대수롭지 않았다기보다 흔했기 때문일 거예요. 왜냐하면 모두가 그런 질문 속에 있어서 특별한 질문이 아니었던 거죠. 이모님이 보고 계셨던 영화 속 인생도 그랬을 거고. 내가 만약 도명 씨 눈동자에 들어간다면 그냥, 그 속의 도명 씨에게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 거예요. 다행이다. 나만 여기에 떨어진 게 아니었네. 나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아니었네. 그리고 머지않아 참을 수 없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일 거예요. 이런 미지의 행성에서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그동안 여기서 혼자 너무 외로웠는데 너무 다행이다.”
“그러게요. 참 다행이네요.”
“휴,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다행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그리고 도화는 침실에서 안대를 벗을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