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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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의 비밀 토끼

파티가 끝나고 도명은 소파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채 잠들어 있었다. 도화가 아주 조금만 떨어져도 계속 우주의 법칙을 논하는 도명이 피곤해서 술을 더 먹여서 아주 완벽히 보내 버린 것이다.

확 손날로 목덜미를 가격할까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랑하는 애인의 몸에 그런 험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분장이 조금 지워졌지만, 도명은 여전히 새하얀 모습으로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왁자지껄하고 혼잡스러운 와중에 그 모습이 마치 시체 같아 풍경이 묘했다.

“도화 씨 정리 도와줄 필요 없는데요.”

파티로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같이 청소하는 도화를 향해 유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이 많아 보이는데 그냥 가기 미안해서요.”

“에이, 손님인데. 그냥 가도 아무도 뭐라 안 해요.”

“아니요. 아니요. 도명 씨도 쓰는 사무실이기도 하고.”

“그것보다 대표님만 잘 모시고 가요. 아이고, 완전히 뻗으셨네.”

“어느 정도 치우고 집에 데려가야죠.”

“청소에 대표님 챙기는 것까지. 도화 씨 힘들 텐데.”

“뭐, 착한 아기처럼 잘 자는데요.”

도화가 흐뭇한 표정으로 잠든 도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자고 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 도화가 터질 듯이 안이 꽉 찬 100L 쓰레기봉투 2개를 가볍게 번쩍 들었다.

“아. 이거 어디다 버려요?”

“건물 뒤편에 쓰레기 버리는 곳 바로 있어요. 고마워요.”

“네.”

도화는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온 후 마대 자루로 바닥까지 박박 닦았다. 힘이 좋은 사람이 바닥을 닦으니 같은 걸레질이라도 바닥의 윤기가 달랐다. 도화는 파티를 위해 옮겨 놨던 테이블도 혼자 번쩍번쩍 들어 옮겼다. 그렇게 정리가 거의 완벽하게 됐을 무렵 도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대리기사를 불렀는데 도착한 모양이었다.

“같이 부축할까요? 그래도 대표님 남자에다가 키도 작은 편도 아닌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도화가 웃으며 얌전히 잠든 도명을 마치 뒤로 매는 가방을 메듯이 가볍게 등에 얹으며 말했다.

“도화 씨 다음에도 꼭! 놀러 와요.”

“네. 안 해칠게요. 꼭 놀러 와야 해요!”

“잘해 줄게요~!”

“또 안 놀러 오면 정말 섭섭할 거예요. 이건 진담이라고요.”

도화는 사람들의 지나친 환대에 부담스러워하며 일일이 인사를 하고는 도명을 들고 사라졌다.

도화가 가고 난 후 유리가 멀어져가는 도화의 등을 욕망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회사 정말 신입 사원 필요 없어요? 저런 막내 너무 탐난다!”

“그러게 일일이 안 시켜도 눈치껏 일 잘하지, 힘 좋지, 거기다가 대표님을 마크할 수 있어.”

“세상에. 저런 싹싹한 신입이 대표님 컨트롤러라니. 탐나!”

“섹시했어요. 감히 대표님 얼굴 틀어쥐고 입에 술 들이부을 때.”

“아, 그때! 정말 최강의 남자야.”

“아, 이런 상상 하면 안 되는데.”

“무슨 상상?”

“아니 솔직히 처음에는 세련된 대표님하고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이 일 잘하고 다정한 돌쇠에게 반한 새침한 도련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걸 대표님한테 절대 말하지 말아요.”

그녀는 차마 실제 있는 사람을 두고 ‘힘 좋은’이라는 미묘한 말을 육성으로 내뱉을 수가 없어 뺐다.

“그나저나 대표님은 왜 새삼 결혼을 못 한다는 말에 욱해서 술을 그렇게 마신 거야?”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어댈 뿐 그 누구도 확실한 답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집에 들어온 도화는 도명을 그의 침대에 눕히고 한숨 돌렸다. 진짜 폭풍 같고 떠들썩한 핼러윈 저녁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떠들썩하고 또 생각보다 즐거웠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도화는 도명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수줍게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가 괜히 혼자 뭐가 쑥스러운지 머리를 북북 긁다가 그의 오늘 하루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도명같이 깔끔한 사람을 이대로 재우면 다음 날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관리가 까다로운 하얀 캐시미어 코트는 물론이고, 실크 베스트 등등, 저대로 입고 잘 옷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옷도 옷이지만 핼러윈 분장으로 잠이 들었다가 그의 피부가 다음날 엉망으로 일어난다면 그의 히스테릭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도화는 도명의 옷을 벗기고 최대한 안 구겨지게 옷걸이에 걸어 놨다. 그리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어댔다.

‘세상에 이렇게 눈처럼 하얀 옷이라니! 하얗고 재질까지 세탁하기 까다롭다니! 저걸 입고 돌아다닌다고 생각만 해도 때 탈까 봐 날이 선다고.’

도화는 옷이 벗겨져 나체가 된 도명을 살짝 벌어진 손 틈으로 보며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아무리 애인이라도 술 취한 사람 상대로 허락 없이 이런저런 야한 짓 하면 범죄야. 착한 생각.’

도화는 일단 도명의 드레스 룸에 가서 도명의 화장품들을 체크했다. 그중에서 클렌징 오일을 찾아서, 올바른 사용법을 검색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건 도명이 단체 사진을 찍은 직후 바로 컬러 렌즈를 뺀 것이었다. 도명 역시 자주 안 쓰는 렌즈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렌즈도 안 껴 본 도화가, 그것도 남의 렌즈를 뺄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도화의 상상 속에서는 다음 날 아침 도명이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도화는 클렌징 오일로 도명의 분장을 지웠다. 성가신 일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즐거웠다. 아주 명분 좋게 그의 얼굴을 꼼꼼히 보고 만질 수 있었다. 얼굴에 서리가 내린 후 천천히 녹는 것처럼 그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도 기분 좋았다.

도화의 등 뒤에는 달빛이 아스라이 비추고 있어서 고작 화장 지우는 일이 뭔가 마법 같은 일처럼 느껴졌다. 마치 도화가 아름다운 비스크 인형과 사랑에 빠졌고, 그 인형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손길로 그의 영혼을 집어넣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도명이 이 순간을 알게 되면 아주 질색할 게 분명하지만. 도화는 도명을 씻기기 위해 욕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도명을 끌어안고 적절한 물의 온도를 확인해 가며 그의 몸 위에 물을 뿌렸다. 도명의 살갗의 곡선에 따라 작은 폭포들이 만들어졌다.

도화는 온몸이 질척질척 젖은 도명을 보고 다시 야한 생각이 떠올라 벌벌 떠는 손으로 샤워볼에 향긋한 거품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문질거렸다.

‘착한 손길, 착한 손길, 착한 손길. 으아아.’

도화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선 혼자 난리를 치다가 붙잡고 있던 도명을 놓쳤다. 도화가 빠르게 뒤로 넘어가는 도명을 잡았지만 이미 그의 뒤통수가 타일 벽에 살짝 부딪힌 뒤였다. 도화가 안절부절못하며 도명의 뒤통수를 문질렀다.

“으아.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이건 너무 위험해! 내가 도명 씨를 희롱하고 말 거야.’

도화는 도명의 몸을 샤워볼로 문지르다 말고 급하게 샤워기로 그의 몸을 헹궜다. 그리고 수건으로 몸을 말려 주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도화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숨을 헉헉거렸다.

도명을 샤워시키는 것이 술에 취한 그를 보살피고 그를 업고 집까지 데려오는 일련의 과정보다 더 힘들었다. 어서 빨리 옷을 입혀야 했다. 안 그럼 도명을 해치고 말 것이다.

도화는 도명에게 입힐 옷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도화는 아직도 도명의 홈웨어 개념이 이해가 안 갔다. 다행히도 자는 순간에도 정장을 입는 변태는 아닌지 파자마가 있었다.

도화가 파자마를 들고 도명의 침실에 나타났을 때, 침대 끝자락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털옷이 하나 보였다. 핼러윈 파티장으로 가기 전 도명이 그냥 버리라고 한 토끼 옷이었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도명의 파자마를 툭 놓았다.

마치 악마의 옷에 홀린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토끼 옷을 본 도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니야. 이건, 감히 내 완벽한 돔을 능욕하는 일이야.’

도화가 혼자 고개를 저어대며 고심했다.

‘하지만 도명 씨가 정신을 잃은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고.’

도화가 나쁜 생각이 들자 정신을 차리라는 듯이 손바닥으로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때렸다.

‘감히 섭이! 그러니 도명 씨가 제멋대로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그러니까 나쁜 짓은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야.’

도화가 어둠 속에서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토끼 웃을 쥐었다. 도화는 정말 인형 놀이를 하듯 술에 취해 축 늘어진 도명을 반쯤 일으켜 세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옷을 입히는 건 힘이 들었지만, 결과물을 보자 깊은 만족감이 들었다. 위험을 감수한 보람이 있었다.

‘세상에! 복슬복슬한 토끼 옷을 입을 도명 씨라니! 최고의 핼러윈이야!’

도화가 토끼 옷을 입은 채 순하게 잠들어 있는 도명을 보며 발을 동동거렸다. 아까의 차갑고 섬뜩한 버전의 토끼 코스튬도 분명 멋졌다. 하지만 도명은 언제나 멋진 사람이니 그냥, 도명답다고 생각했다. 그저, 오늘도 멋지네. 정도의 감흥이었다.

하지만 귀여운 도명의 모습은 아주 희귀했다. 사람은 희귀한 것에 더 매료되는 법이었다.

도화는 핸드폰을 들어 토끼 옷을 입은 도명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도명의 두 손을 주먹 쥐게 한 후 그의 턱 쪽에 갖다 대게 했다.

‘귀여워! 귀여워! 아주 귀여워! 아주 귀엽고말고!! 잘생기고 귀엽다고!’

도화가 광기 어린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완벽한 범죄를 위해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도화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토끼 옷을 벗기고 도명의 파자마로 바꿔 입혔다. 도화는 도명을 마지막으로 가지런히 눕히고 이불까지 자로 잰 듯 완벽하게 덮었다.

지금 모습만 보면 오늘 하루 도명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핼러윈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날 중 하나라고 이 장면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다만 도명이 회사에서 도화와 핼러윈을 보내는 꿈을 꿨을 뿐이었다.

도화는 완벽한 범죄를 위해 바로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도명이 아무리 술에 취해 있다고 해도 방심하고 범죄를 은폐하는 일을 미루면 안 됐다. 오늘 하루 그가 움직인 활동량을 보면 금방 침대 위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그의 눈빛은 아주 초롱초롱했다.

도화는 노트북을 열어 핸드폰 속 토끼 옷을 입은 도명을 찍은 사진을 옮겼다. 도명이 집착이 심한 편이긴 해도 평소에 도화의 핸드폰을 검열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쩌다 그의 핸드폰 사진첩을 보는 순간, 재앙이 될 것이다.

만약 SM 협회 같은 것이 있다면 도화같이 건방진 M은 영원히 영구제명 시킬 것이 뻔했다. 도화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이단 중의 이단이었다. 그래서 파일을 옮기는 도화의 손길이 초조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도명이 좀비처럼 갑자기 일어나 자신의 등 뒤에 서 있을 것 같았다.

도화는 사진을 다 옮긴 후 파일들 속에 도명의 토끼 코스튬 사진들을 숨겼다. 그리고 핸드폰 자료는 완벽하게 지웠다.

도화의 얼굴 위로 어슴푸레한 컴퓨터 모니터 빛이 음산하게 비쳤다. 도화는 사악하게 손바닥을 비빈 후 집 안 구석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마분지 종이 상자였지만 바닥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상자였다.

도화가 바닥을 꺼내자 거기에는 도명의 러브레터가 들어가 있었다. 도화가 그것을 보며 후후 웃었다. 도화는 도명의 러브레터에 입을 맞춘 후 다시 곱게 정리하여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도명에게 입힌 토끼 옷을 곱게 접어 그 안에 집어넣고 다시 그 은밀한 바닥을 덮었다.

***

다음 날 아침 도명은 아침 7시에 울리는 알림 소리에 깼다. 주위에 보이는 풍경은 모두가 다 익숙했다. 다른 점은 그의 속이 뒤집힐 것 같고 머리가 지끈지끈 울린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도명은 어제 그가 술을 과하게 마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게 숙취란 것이구나.

도명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끙끙 앓아 댔다. 그가 어떻게 집에 오고,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파자마 상태인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도명이 숙취와 씨름하고 있을 때 도화가 우당탕거리며 도명의 집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깼어요?”

“네.”

“괜찮아요?”

“아니요.”

“어제 도명 씨가 술을 무리해서 마시긴 했어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갑자기 머릿속에 백구가 악의로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입에 테킬라를 들이붓는 장면이 생각났다. 도명을 아주 완벽히 보내 버리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도명은 설마 우리 백구가 그런 험악한 표정을 지었을 리가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도명 씨 진짜 아픈가 봐요.”

도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명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 도화의 표정에 도명은 역시 자신의 기억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착한 백구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저, 해장국 끓였어요. 콩나물국이 그나마 가장 끓이기 쉬운 해장국이라고 해서요.”

“아침부터 저 때문에 콩나물국 끓인 거예요?”

도명이 숙취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 없더라도 먹어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힘들죠.”

도화가 적당히 식힌 콩나물국을 사발 채로 도명의 입에 내밀고는 사발을 천천히 기울였다. 도명의 입으로 도화가 끊인 콩나물국이 넘어갔다. 첫 입맛은 콩나물의 비린 맛이 올라왔다. 그리고 다음 맛은 강렬한 고춧가루가 목 안에서 회오리쳤다.

이 짧은 순간에 도명은 도화의 요리 순서가 마치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도화가 요리하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닌데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느껴지다니! 그만큼 도화가 끓인 콩나물국은 나쁜 의미로 강력했다.

분명 콩나물국 초보자답게 콩나물의 비린 맛을 못 잡았을 것이고, 그 실패를 고춧가루의 강렬한 맛으로 덮어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도화의 희망대로 도명의 숙취는 날아갔다. 정확히는 잊혔다. 콩나물국이 주는 강력한 고문 앞에서 말이다. 도명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침대 시트를 주먹을 꽉 쥐고 콧등 안에서 휘몰아치는 고춧가루 기운의 회오리 앞에서 조용히 눈물 흘렸다.

“도명 씨 왜 울어요. 아침부터 왜 울어요.”

도화가 급하게 소매로 도명의 눈물을 닦았다. 도명은 범인은 콩나물국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춧가루로 타들어 가는 목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다.

“도화 씨 물. 물.”

도명이 겨우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도화가 빠르게 물을 가져왔다. 물을 마시고 그제야 도명을 살 것 같았다.

“도화 씨.”

“네!”

“콩나물국 끊이는 거 배웁시다. 살고 싶습니다. 아니면 그냥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사 와요.”

“인스턴트는 마음이 없잖아요!”

“마음이 모든 걸 해결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더 못 먹겠어요?”

도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신이 끓인 첫 콩나물국을 내려다보았다. 도명은 눈을 질끈 감고 도화가 가져온 콩나물국을 한 번에 비웠다. 그리고 쓴 알약을 삼킨 사람처럼 급하게 물을 마셨다.

***

도명이 가게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화가 졸래졸래 쫓았다. 그 간격이 한 걸음 차이도 안 돼서 도명이 움직일 때마다 꽤 성가셨다. 처음엔 그저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그러니까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도화는 지금 도명의 기분을 어느 정도 알지만, 잠깐이나마 어젯밤 자신의 기분을 도명에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붙어 있는 건데 왜 싫어하냐 등등의 말을 다시는 안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런 복수심 어린 기분도 있지만, 막상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며 붙어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저 도화 씨 왜 자꾸 따라다닙니까? 아, 그나저나 회사 안 갑니까?”

“월차 썼습니다. 저는 핼러윈 다음 날 반드시 월차 쓰거든요. 밤새 영화 보고 피곤하잖아요.”

“아. 그렇군요.”

“네!”

도명이 노트북을 가지러 걸음을 옮기자 아니나 다를까 도화가 또 뒤따라 왔다. 너무 가까이 붙은 도화 때문에 스텝이 엉켜서 귀한 노트북을 떨어뜨릴 뻔했던 도명이 결국 노트북을 한 손으로 품 안에 부여잡고 도화의 이마를 때렸다.

“왜 자꾸 따라다니는지 물었잖아요.”

“아. 그게 우주의 법칙이니까요.”

“그게 무슨 개 소리입니까.”

“아니 저는 도명 씨 그림자잖아요. 그러니까 만물의 법칙, 음, 즉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도명 씨한테 붙어 있는 거라고요.”

“아. 난 또 뭐라고. 핼러윈 끝났어요. 정신 차려요. 도화 씨.”

“그럼 이제 우주의 법칙은 끝난 겁니까?”

도화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아니 그나저나 오글거리게 우주의 법칙이 뭡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의 볼이 봉긋 솟았다. 웃음을 참기 위한 표정에 도명은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거, 어제 도명 씨가 한 말이잖아요. 도명 씨와 제가 떨어지지 않는 건 우주의 법칙이라고요.”

“하하. 설마요.”

“나. 이럴 줄 알았어요! 도명 씨가 그 특유의 깔끔한 표정으로 그럴 줄 알았다고요!”

도화가 그렇게 말하고는 호기로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녹음한 음성을 틀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도명의 목소리였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내가 다시 한번 더 우주의 법칙을 알려 주겠습니다. 멍청한 백구. 어떻게 사람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습니까? 내 법칙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를 떠나지 말아요. 그게 내 모든 규칙입니다. 도화 씨가 어떤 모양으로 뻗든 내 알 바 아닙니다. 이제 만족합니까?]

[그렇다면 제가 도명 씨를 실망하게 하더라도 나한테 화내지 않을 거예요?]

[내가 도화 씨한테 화를 왜 내요.]

[예를 들어 같이 살면서 생활 방식이 다르다거나요.]

[화 안 내요.]

[화내면요?]

[안 내요. 우주의 법칙이 그렇다니까요.]

[그럼 그 우주의 법칙을 걸고, 약속해요.]

[약속해요.]

[말로만 말고 공약 좀 걸어 주세요.]

[공약이요? 나 참.]

[어? 어? 지금 회피하잖아요.]

[회피 아니에요.]

[아니면 어서 공약 좀 걸어요.]

[알았어요. 알았어요. 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든 들어 주겠습니다. 우주의 법칙이 견고한데 제가 뭐가 겁나겠습니까?]

[저 손가락 하트 말고 더 큰 하트 원해요.]

[뭐, 팔로 만드는 하트요?]

[아뇨. 아뇨. 더 섹시한 하트 원해요.]

[뭔데요.]

[엉덩이로 하트 그려 주세요!]

[나 참, 초등학생 벌칙도 아니고.]

[어어. 피한다! 피한다! 우주의 법칙은 견고하다면서요!]

[네! 엉덩이 하트 공약 겁니다. 그러니까 백구야. 쓸데없는 거로 겁먹지 말고 나랑 사는 겁니다.]

[네! 네! 좋아요! 좋아요!]

***

본격적으로 도화가 사는 집의 공사가 시작되고 약 3주의 공사 기간 동안 갈 곳 없어진 도화의 짐은 도명의 집으로 옮겨졌다. 도화가 쓰던 가구는 일부 버리게 됐다.

도화의 침대는 오래되었어도 아직 쓸 만했다. 하지만 공동 침실이 있는데 굳이 덩치가 커다란 침대를 하나 더 떠안고 살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의 침대 중에 도명의 것이 더 비쌌기에 결국 버려진 건 도화의 침대였다.

옷장 역시 버려진 가구 중 하나인데 공간에 맞춰서 행거를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쓸모없는 유물 취급당했다. 남은 가구는 도화의 DVD 장과 책상이었다. 도화가 쓰던 식탁은 두 사람이 쓰기로 했다.

사실 도화가 가구 스타일 모르고 두서없이 하나둘 사 모은 가구는 뭘 하든 완벽하게 디자인 조화를 맞춰야 직성이 풀리는 도명의 성격에서는 뭐든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도화는 이미 쓰고 있던 가구의 반을 버려야 했고, 식탁마저 버리게 할 명분은 없었다.

도명은 역시 도화의 식탁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고 디자인 부조화를 참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못 참을 것도 없었다. 그 식탁에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도화가 술에 반쯤 취한 채 자신이 선을 딱 그은 도명을 초대했을 때 그 식탁에서 식사했으며 그 테이블 위에서 카디건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목덜미를 무는 벌을 주기도 했다.

도화가 도명이 관장을 해 주는 것을 원치 않아서 관장약을 찾느라 도명과의 약속 시각을 못 지켰을 때 도명이 앉아서 기다린 곳이기도 했다.

주로 두 사람이 도화의 집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할 때 이 테이블을 이용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테이블을 굳이 버려야 하나 싶었다. 테이블에 특별한 기억들이 이렇게나 끈적이게 달라붙어 있는데 버리는 게 아까워졌다. 도명이 둘이 살 생각하며 같이 밥 먹을 식탁을 이미 알아봐 둔 후임에도 말이다.

그렇게 도화의 살아남은 가구들은 도명의 화원 창고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창고마저 꽉 차게 되어 당분간은 여유 공간 하나 없이 짐들로 꽉 틀어 막혀 살게 생겼다.

뭐든 아름다운 공간은 그 공간이 가진 평수가 절대적으로 정해 주는 건 아니다. 적절한 위치에 기능적이며 아름다운 물건이 있고, 그 물건들이 제 기능을 하는 데 매끄럽도록 여분의 공간이 주어지면 된다.

모든 물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간과하고 공간을 지나치게 물건들로 빡빡하게 채우면 100평의 집에 살고 있다 해도 우아하게 살기는 글렀다.

도명은 그가 사랑하는 물건들이 많아서 그의 공간은 이미 이 이상적이고 우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임계점 아래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도화의 물건들이 임시지만 이렇게 도명의 공간 여기저기에 내려오게 되면서 그의 공간은 금방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게 됐다.

거기다가 공사한다고 안과 밖을 드나드는 사람들까지 더해지면 별일을 안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3주만 버티면 되니까 못 버틸 시간은 아니었다.

도명은 어수선함 한 가운데서 도명의 집에 내려온 도화의 짐들을 내려 보았다.

“짐이 이게 다입니까?”

“네.”

“10년 동안 살아간 짐치고는 간단하네요.”

‘그리고 이 짐 중 4분의 1이 공포 영화 DVD라는 것이 놀랍다.’

“그나마 최근에 옷 짐은 는 편이에요. 도명 씨 만나고 옷을 자주 사서요. 아, 이 상자는 도명 씨가 사 준 옷이거나 골라 준 옷들이에요.”

도화가 소중하다는 듯이 따로 정성스럽게 포장한 상자를 가리켰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태도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휴, 그나저나 어수선하네요.”

“일단 3주 동안 도화 씨도 생활해야 하니까 당장 필요한 짐부터 풉시다.”

“저, 정말 3주 동안 다른 곳에서 살아도 된다니까요.”

“그림자가 건방진 소리를 하네요.”

도명이 도화를 노려보며 그의 귓바퀴를 세게 잡아당겼다.

“집 계약금도 굳었겠다, 3주 동안 호텔에서 지내려고 했죠. 한 번 사는 인생 그 정도는 호사는 누려도 되잖아요.”

“내가 호텔 못지않게 도화 씨를 잘 케어해 줄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 저 때문이 아니라 도명 씨 이 난장판 속에서 살 수 있겠어요?”

“자기야. 내가 다 계산을 해 놨어요. 일단 옷 상자 들고 드레스 룸으로 와요.”

도명이 손가락을 까딱거렸고 도화는 일단 그의 말대로 했다. 도명의 드레스 룸에 도착하자 평소보다 도명의 옷이 줄어들어 있었다.

“도화 씨 칸입니다. 여기에 일단 옷 채워 놓고 쓰면 됩니다.”

“도명 씨 옷은요? 여기 꽉 채워져 있었잖아요.”

“입는 빈도수가 낮은 옷은 일단 상자에 정리해서 창고에 넣었습니다.”

“아 그럼, 여기가 제 자리에요?”

“그렇다니까요.”

“그럼 이 칸 외에는 절대로 안 건드릴게요. 관계에서 신뢰는 중요하니까요.”

“도화 씨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우리 사이가 너무 빡빡하게 느껴지는군요.”

“네? 아니. 그게 예의니까요. 아무리 우리가 애인이라도 선은 지켜야죠.”

“만약, 자기가 이 시계를 차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돼요. 만약 차 봤더니 마음에 무척 들어서 달라고 하면 줄 수도 있고요.”

도명이 시계나, 넥타이핀같이 반짝이는 장신구가 정리된 유리 케이스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아니요. 아니요.”

‘이 사람 안 그렇게 생겨선 나쁜 애인 만나면 대 호구 될 사람이네.’

도화가 당황하며 두 손을 흔들었다.

“뭐가 그렇게 아연실색하고 그래요.”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남의 집에 침입하고, 아 그전에는 남의 소포 뜯어보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왜 그어져 있지도 않은 이 공간에 38선을 긋고 그래요.”

“아니 그 일 언제까지 말할 거예요! 제발 좀 잊어 주세요!”

“어떻게 잊습니까? 내 집에 이렇게 커다란 것이 뚝 떨어졌는데.”

도명이 도화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화 씨가 내 물건 들고 전당포 갈 사람 아니라는 거 아니까, 그냥 이렇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요.”

“당연히 안 그러죠!”

도화가 도명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네. 안 그러죠.”

“아. 전 그러니까 도명 씨가 물건을 아끼니까 제가 저도 모르게 구경하다가 엉뚱한 곳에 놓거나 실수로 망가뜨리는 걸 걱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애초에 아주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직도 그걸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도화 씨가 제 규칙을 망가뜨릴까 봐? 내가 이해한다고 했잖아요. 녹취록까지 따 놓고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아요.”

“그 녹취 도명 씨가 심신 미약 상태에서 딴 거라 효력 없다면서요.”

“나 참. 일단 도화 씨 짐 정리 다 하고 그 건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합시다.”

“도명 씨 엉덩이 하트 건으로요?”

도명은 도화의 엉덩이 하트라는 말에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을 꿈틀댔다.

“아주, 맹랑하기 짝이 없네요. 도화 씨 귀여움으로 커버 칠 수 있을 만큼 까붑시다. 평소에 체력 좀 더 다져놔요. 지금 내가 여러모로 바빠서 플레이를 안 하는 거지, 벼르고 있습니다.”

도명이 손가락 끝에 힘을 줘 도화의 배꼽 언저리를 꾹꾹 누르며 속삭였다.

“잘못했습니다…….”

도명은 당장 도화를 데리고 플레이를 하고 싶었지만 일단 집 안에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는 도화의 짐들을 생각하며 참았다.

“도화 씨 이 상자는 어디에 둘까요?”

도명이 가리킨 상자에 도화가 화들짝 놀라며 정리 중인 것도 놔두고 도명에게 달려왔다. 그런 도화의 호들갑에 도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대수롭지도 않은 질문에 그렇게 놀라요?”

“이건, 제가 정리할게요! 제가!”

“뭡니까? 이 상자?”

“도명 씨가 싫어할 것들이에요!”

“왠지 제가 좋아할 것 같은 상자인데요.”

도명이 그렇게 말하며 도화가 말릴 새도 없이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상자 안에는 공포 영화 DVD가 가득 쌓여 있었다. 흉흉한 상자 안 풍경 속에서 도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아무리 도화와 같이 지내도 이 흉측한 것들은 좀처럼 적응이 안 되었다.

“아. 이 상자마저, 공포 영화 DVD이었습니까?”

“네.”

“진짜 끝도 없이 나오네요.”

‘바퀴벌레같이 말이야.’

“그러니까 제가 정리한다고 했잖아요. 도명 씨 열어보고 놀랄까 봐 그런 건데 사람 말도 안 듣고 말이에요.”

“네. 그래요.”

도화는 상자를 안고 도명의 계단실 밑 창고로 갔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서 그 상자를 뺨으로 비비적거리며 후후 웃었다. 바닥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토명의 토끼 옷과 러브레터를 숨긴 상자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USB 하나도 있었는데 도명의 토끼 옷 입은 사진이 백업되어 있었다.

도명은 도화가 창고에 가 있는 동안 차가운 물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이 기시감 너무 익숙한데.’

도명의 눈동자가 계단실 창고에 가 있는 도화를 향해 또르르 굴러갔다. 일단 지금은 도화의 짐 정리가 대부분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도화의 짐 어디에도 그 빌어먹을 러브레터를 발견 못 했다.

이미 도화에게 내용을 다 들킨 이상, 이를 갈고 찾아내서 파괴할 건 아니지만 뭔가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 러브레터를 찾아내서 뭐 어떻게 할 건 아니라도 사람은 비밀을 못 참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도명같이 아는 척하고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랬다. 그래서 도화의 짐을 풀면서 내심 그 러브레터 찌꺼기를 다시 발견하기를 바랐었다.

‘그래, 러브레터 건은 잊기로 하자. 그저 거슬리는 작은 수수께끼 같은 거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도명은 고개를 구관조처럼 기울이며 기시감을 설명할 키워드를 찾기 위해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을 거슬리게 하는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로 공포 영화 DVD였다.

공포 영화 DVD는 원래 도명이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것 자체로 기분이 나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도명은 공포 영화 DVD가 나오는 사건들을 곱씹었다.

그렇다. 언제나 공포 영화 DVD는 도화가 무언가를 숨기거나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도화는 방금 자신이 본 공포 영화 DVD가 그저 공포 영화 DVD가 아니라 결계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떤 관계에서든 비밀을 존재한다. 도명 역시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의 비밀의 꼬리 끝을 우연히 알게 됐을 때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명 씨, 저도 물이요. 짐이 얼마 없어도 힘드네요.”

도화가 나와서 생각에 빠진 도명에게 물을 달라 했고 도명은 완벽하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도화에게 물을 건넸다. 그리고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어가며 도화의 동그란 두상을 쓰다듬었다.

“왜요?”

“어디서 이렇게 (요망하고) 예쁜 사람이 떨어졌나 싶어서요.”

“자꾸 이렇게 애정 표현 훅 들어오실 거예요?”

“네.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그럴 겁니다.”

‘그래. 애정 표현은 다양하고말고.’

“하던 짐 정리마저 끝나고 이야기합시다. 정말 고작 층수만 바꾸는 건데도 일이 많네요.”

“아. 네. 그런데 도명 씨는 혼자 사는 사람이 무슨 사과를 박스째 샀어요? 그것도 손님 접대 때문에 산 거예요?”

“사과요?”

“네. 창고에 사과 상자 있던데요.”

“아. 그냥 종이 상자 필요해서 얻어다 급한 대로 이것저것 담은 거예요.”

도명은 드레스 룸에 있던 백구 관련 상품 및 기타 도화 관련 물품을 사과 상자에 옮겨다 담았다. 도화와 3주 동안 드레스 룸을 공유하기로 한순간, 들키고 싶지 않은 걸 창고로 옮긴 것이다.

원래 상자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가죽 상자였는데 사람 심리란 게 너무 그럴듯한 상자에 담긴 건 궁금해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마트에서 구해온 최대한 볼품없어 보이는 종이 상자에다가 무심한 듯 창고 구석에 밀어 넣었었다.

“아. 그렇구나.”

“도화 씨는 별게 다 궁금하네요.”

“그냥 도명 씨 사과 좋아하나 싶어서요. 저는 도명 씨가 좋아하는 게 뭔지 다 알고 싶다고요.”

‘이상하단 말이지. 도명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상자에다가 물건을 관리한다고? 도명 씨는 둘 중 하나 아닌가? 가지고 있을 거면 완벽하게 관리하든가 아니면 소유하지 않거나. 사과 상자 안에는 뭐가 있지? 도명 씨의 소중하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못하는 물건이 대체 뭐지? 아 궁금해하면 안 되나?’

“그래요?”

“그럼요. 내 애인인데.”

“우리 백구는 어쩌면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합니까?”

“그나저나 그 안에 뭐가 있어요?”

“고작 창고 구석에 박힌 건데 그게 궁금해요?”

“그러게요. 쓸데없이 궁금하네요.”

“뭐였더라? 잡동사니인가? 잘 기억나지 않네요. 그나저나 오늘 우리 할 일 많아요. 서두릅시다.”

도명이 생긋 웃으며 도화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말했다.

***

도화의 점 정리가 끝나고 두 사람은 허브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 사실 하고 싶은 거 있는데 도화 씨 눈치 보고 있습니다.”

도명이 도화에게 슬쩍 운을 띄었다.

“네? 아. 그러면 안 되죠. 뭐든 저에게 말해 주세요.”

“저는 도화 씨와 결혼식을 하고 싶어요.”

“네?!”

도화는 도명의 말을 듣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아니 식장 대관하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결혼식 말고요. 그냥 우리 집 뒷마당에서 우리 사이를 진심으로 축복해 줄 사람들하고 식사하면서 우리 앞으로 잘 살겠다고 선언하는 정도로요.”

“아. 네…….”

“역시 내키지 않나 보네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 사이를 진심으로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들 모아서요. 도화 씨 그렇게 혼자 겁먹더니 우리 회사 가서 핼러윈 파티 잘 즐기고 왔잖아요. 그냥 조금 더 특별한 저녁 식사일 뿐입니다.”

“아.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하는 겁니까?”

도명이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을 일부러 숨기지 않고 물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표정에 더욱 난감해졌다.

“아.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도명 씨는 사람들의 인정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잖아요. 굳이 다른 사람들의 축하를 받아야만 우리가 잘 살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죠. 제가 사람들이 우리 둘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바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건 한마디로 자랑질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네?”

“나도 사람들 마음에 염장도 지르고 자랑도 하고 싶다고요. 어렵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자랑이요?”

“네? 아니, 무슨 자랑이겠어요. 도화 씨를 자랑하고 싶은 거지.”

“제가 그렇게 자랑할 만큼 화려한 사람도 아니고…….”

“자랑하고 싶어요. 도화 씨 같이 좋은 사람을 잡은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자랑하고 싶다고요. 도화 씨는 안 그렇습니까?”

“자랑하고 싶죠! 도명 씨 같은 완벽한 애인을 잡은 내가 능력자 같다고요. 당연히 자랑하고 싶다고요.”

도화는 하루에도 마음이 수십 번 바뀌었다. 자신이 동성애자만 아니면 도명같이 멋지고 완벽한 사람이 애인이라고 걸핏하면 은근히 자랑질을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인생 역전 아닌가. 평생 애인은커녕 연애 근처도 못 가 본 도화가 이런 꿈같은 애인과 사랑질을 하고 있었다.

도화는 그렇게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자격지심을 보상받는 것을 자주 상상하곤 했다. 아마 평생 못 할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냥, 너무…… 나대는 것 같아서요.”

“나대요? 나 참.”

“아니, 도명 씨가 나댄다는 건 절대 아니고, 사람들이 뭘 동성끼리 같이 산다는 게 뭐 그리 이렇게 일을 벌이며 자랑할 일이냐고…… 내심 생각할까 봐서요.”

“헤테로 커플들이 이상하게 만든 가짜 궁전 같은 예식장 빌리면서 온갖 난리를 피우는데 고작 우리 잘 살겠다고 지인들 초대해서 식사하는 게 뭐가 그리 나대는 겁니까? 도화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확, 예식장까지 잡고 대형 스크린으로 둘이 키스하는 장면 내보내고 싶어지네요.”

“으아아아아아아! 아니요. 아니요. 잘못했습니다.”

도화는 도명이 말한 것을 상상만 해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났다.

“아니 도화 씨한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곱씹어 보니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도화는 도명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도명의 말이 틀린 소리도 아닌 건 같아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안 할 테니까, 그냥 둘이 가장 좋은 옷 입고, 좋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앞으로 같이 살 거라고 말합시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싫다, 좋다 어느 한쪽도 말 못 하고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이렇게 들어보니 도명이 틀린 소리 하는 것 하나 없었다. 문제는 일을 벌일 용기였다. 도명은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반응이라서 준비한 카드를 꺼냈다.

“이번 건에 대해서 도화 씨가 좋은 쪽으로 생각해 준다면 제가 심신 미약 상태에서 한 약속 말입니다. 그거 유효한 약속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엉덩이 하트요?”

도화의 엉덩이 하트라는 말에 도명은 정말 싫은지 미간을 거칠게 구기다가 한숨을 쉬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도명은 도화가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 이미 진심으로 자신의 생활 규칙을 못 지킨다고 도화에게 화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그런 돔의 체면에 안 맞는 우스꽝스러운 벌칙을 당할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 예쁜 백구를 진심으로 미워하며 화낼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이요?”

“네. 물론 계약이라는 게 세부 규칙을 만들어야 나중에 논쟁거리가 없겠지만요.”

“네! 네!”

“그래서 하는 겁니까? 결혼식?”

“아…… 그건 저도 생각을 더 해 봐야…….”

“엉덩이 하트. 제가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그걸 하느니 아무리 화가 나도, 도화 씨를 예뻐해야 하지 않겠어요?”

“…….”

“우리의 결혼 생활을 감정의 무절제로부터 지켜 줄 겁니다.”

“네. 우리도 까짓거 남들 하는 것 해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네. 부러워서 오장육부 모두 뒤틀리게 해 봅시다.”

***

도명과 도화는 새로 단장한 집에서의 공식 동거는 아니지만, 첫 동거를 하는 밤을 맞았다.

도화는 도명의 집에서 처음 자 보는 건 아니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도명은 이미 씻고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고, 다음으로 씻으러 들어간 도화가 욕실에서 나왔다. 도화가 어색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침대 모서리에 얹었다. 그리고는 도명을 흘깃 보더니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췄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제재를 가했다.

“왜, 왜요?”

“잠자기 전에 새 규칙을 의논합시다.”

“새 규칙이요?”

‘아니, 이 사람아.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게 유일한 규칙이라며.’

“일단은 침실을 공유하면서 지켜야 할 규칙 말입니다.”

“아. 네.”

“일단 나는 정해놓은 게 있는데 도화 씨도 혹시 있습니까? 먼저 말해 봐요.”

‘당신이랑 자는 거 새삼 너무 살 떨리니까 내 방을 줘!’

하지만 이 생각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한다고 한들 방이 갑자기 생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여러모로 지금 내뱉기에는 쓸데없는 말이었다.

“아니요. 저는 생각해 둔 게 없어서요.”

“그렇군요. 일단, 이 동거는 제가, 아니 우리가 서로 조금이라도 떨어져서 살 수 없을 거라고 판단되어서 급하게 결정 내린 감이 좀 있잖아요.”

“네. 그렇죠.”

도화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깊은 동의를 표현했다. 안 그래 보였던 도명 역시 사실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는 말이 왜 이렇게 반갑고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우리가 모든 걸 완벽히 내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 대한 환상이 진실한 관계에서 무조건 유해한 것도 아니고요.”

‘내 말이!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쭉- 그 말을 하고 싶었다고요. 역시 도명 씨도 막상 닥치니까 현실적인 판단이 되는구나. 그동안은 도명 씨가 너무 신이 나 있어서 걱정했지 뭐야.’

“네, 그렇고말고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침대에 들어올 때는 일단 옷은 모두 벗고 들어오고요.”

“네?”

“두 번째, 이게 중요한 건데 안대를 쓰고 들어옵시다.”

“네? 네?”

“세 번째, 이건 권고 사항인데 솔직히 전 도화 씨에 대한 신뢰도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낮습니다. 중간에 도화 씨 마음대로 안대를 벗을 수 있으니, 손 역시 결박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네? 네?”

“알아들었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어려운 말 하나도 없는데요.”

“아니 한국말이 어렵다는 게 아니라, 도명 씨 새 규칙의 내용이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정확히는 왜 그래야만 하는지가 이해가 안 가요.”

“그래요. 차분히 다시 설명할게요. 첫 번째는 음, 환상도 필요하다는 말과는 상관없고요. 저는 도화 씨 체온을 좋아합니다. 체온을 느끼기에는 다 벗은 몸만 한 게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래서 벗으라고요? 홀딱?”

도화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혹시 나는 안 벗어서 그게 억울해서 이러는 겁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그게. 그게.”

‘아니, 그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닌데. 댁은 내가 홀딱 벗고 옆에 누워 있는데 편히 숙면을 할 수 있겠어요? 난 아닌데요.’

“아니군요. 나는 적당히 뭔가 걸치고 자는 게 편해서, 다행입니다.”

“네?”

도화는 이따금 터져 나오는 도명의 자기중심적인 면이 황당했다. 아까 분명 체온을 느끼기에는 알몸만 한 게 없다고 할 땐 언제고 자기는 옷을 입고 자야 편하다니.

“아니 아까는 알몸만큼 체온을 느끼기 좋은 게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더욱 도화 씨도 옷을 걸치고 있으면 체온을 느끼기 좋지 않죠.”

“아니, 도명 씨!”

“알았어요. 알았어요. 저도 모두 벗고 자겠습니다. 그러면 규칙이 좀 공평합니까?”

‘아니, 아니, 그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데……!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솔깃해지는 건 뭐냐고! 내가 원래 느꼈던 그 문제가 줄기는커녕 더 가중됐는데 왜 솔깃하고 난리냐고!’

“표정을 보니 승낙했군요. 그럼 일단 첫 번째 안건이 통과됐네요.”

‘지금뿐이야. 싫다고 이야기하는 건 지금뿐인데, 사실 도명 씨도 벗는다고 하니 싫지가 않네!’

도명은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파자마를 하나둘 벗었다. 그리고 속옷마저 깔끔하게 벗었다. 그리고는 깔끔한 표정으로 새빨갛게 익은 도화를 향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속옷도 벗는 겁니다.”

“속옷도요?”

“뭐든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왜요? 할 거 다 한 사이인데 속옷 하나 제대로 못 벗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요.”

“아니면 됐고요. 두 번째 안건이요. 두 번째 안건 어디가 이해가 어려운데요?”

“아니 왜 굳이 안대를…….”

“제가 이해되라고 환상이니 뭐니 하는 운을 띄웠잖아요. 나는 아직 내 모든 면을 보여 줄 자신이 없어요. 사람이 자는 모습, 그리고 자고 일어난 모습까지 보기 좋을 수는 없거든요.”

“보기 좋던데요.”

눈치 없이 튀어나오는 도화의 말에 도명이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세게 튕겼다.

“그동안 몰래 훔쳐본 티를 내서 도화 씨가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아니, 보기 좋아서 훔쳐보기까지 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것 봐요. 이런 반성 하나 없는 표정 보세요. 그러니까 제가 손을 묶는 세 번째 안건을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도화 씨가 위풍당당하게 말하는 내용이 성범죄자의 말과 뭐가 그렇게 다릅니까?”

“네??”

“아니, 가증스럽게 황당하다는 표정만 짓지 말고 오목조목 반박을 해 봐요. 뭐가 다릅니까?”

“아니, 도명 씨와 전 애인 사이고.”

“그래서 데이트 성폭력이니 뭐니 하는 건 범죄가 아닙니까?”

“네?? 아니, 아니, 그건 범죄가 맞는데요. 저와는 경우가 다르죠.”

“정확히 어떻게 다릅니까?”

“아니 일단 도명 씨를 강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시선 강간은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신체적으로 접촉해야만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까?”

“아니죠. 아니죠!”

“그렇죠. 잘못이죠.”

“아니 그건 그건데요. 아. 그래. 강도의 문제죠! 자는 모습 본 게 뭐가요?”

“내가 싫다고요.”

‘아 밀린다! 마구 밀린다고! 아니 그래도 뭔가 이건 아닌데. 아니야. 쫄리면 안 돼. 난 이미 도명 씨에게 논리로 몇 번이나 이긴 적이 있다고. 도명 씨 은근히 개 논리 잘 펼치잖아. 저거 분명 알면서도 저러는 거라고!’

“아니, 도명 씨. 도명 씨는 지금 저한테 성적인 이유로 싫은 게 아니잖아요. 어디서 물을 타요. 지금. 아 넘어갈 뻔했네. 그냥 본인이 망가진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거잖아요. 항상 완벽하게 관리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요. 아니 같이 살면서 정말 그런 모습만 보여 줄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저는 잘 때와 자고 막 일어났을 때 빼고는 언제나 항상 완벽합니다. 그게 뭐가 어려워요.”

‘아 맞다. 이 남자 혼자 집에 있을 때 입는 홈웨어도 남다르지. 핏이니 뭐니 따지잖아! 홈웨어에 말이야! 잘 때도 정장 풀 세트로 차려입고 반듯하게 누워 있지 않은 게 어디야.’

“도명 씨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요. 도명 씨 같은 사람이 흐트러질 때 얼마나 퇴폐적으로 관능적인지 알아요?”

“그렇습니까? 플레이 때 참고할게요.”

‘아니 제발 그것조차 연출하지 말란 말이야! 당신 그렇게 무대와 연출이 좋으면서 배우를 왜 안 해 먹고 있냐고. 아주 천직일 텐데.’

도화는 고통스러운 듯 손가락 끝을 꿈틀꿈틀했다.

“나는 도명 씨의 모든 면이 좋다고요! 아니, 그럼 평소의 내 모습은 대체 어떻게 참고 있는 거예요? 도명 씨 기준에서는 아주 온종일 후줄근한데요. 같이 살다 제가, 제가 만약 실수로 도명 씨 앞에서 방귀라도 뀌면 아주 큰 충격에 휩싸이겠네요. 사람이 방귀를 뀔 리가 없다면서요.”

“도화 씨가 내 앞에서 방귀를 뀐다고요……? 아 세상에.”

“그렇죠. 그렇죠. 충격이긴…… 하겠죠.”

“도화 씨가 방귀를…… 내 앞에서.”

“네. 네.”

“세상에- 너무 귀엽겠네요.”

“네……? 네?”

“내 앞에서 엉덩이로 뽕뽕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아닙니까?”

“아니, 아니, 방귀가 언제나 그렇게 애교 섞인 소리인 건 아니죠. 거기에 냄새까지 섞이면 큰일이고요.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요.”

“도화 씨는 그런 걱정하지 말아요. 뭐든 귀여울 테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 그래요. 도명 씨도 모든 모습이 멋있다고요. 그래요! 심지어 방귀를 뀌어도 아주 멋질 거예요.”

“도화 씨는 망가져도 귀엽잖아요. 하지만 난 도화 씨 표현대로라면 귀여운 사람이 아니라 멋진 사람이라는 건데, 멋진 사람은 방귀를 뀌면 멋지지 않아요. 아니, 어디 한번 들어나 보고 싶네요. 어떻게 하면 방귀를 멋지게 뀔 수 있는 겁니까? 피곤해서 다음날 얼굴이 퉁퉁 부으면 멋지지 않아요. 무슨 차이인지 알겠어요?”

“아니, 도명 씨도 망가지면 귀엽겠죠. 그래요. 반전 매력이라고요.”

“도화 씨, 정신 차려요. 내가 단 한순간이라도 귀여울 리가 없잖아요. 어디서 거짓 사탕을 쥐여 주려고 해요. 감히 사기를 쳐요? 이 유도명한테?”

‘아 도명 씨 귀엽던데. 도명 씨 귀엽던데! 아 당장 토끼 옷 입은 거 보여 줄 수도 없고, 환장하겠네.’

“아니요. 도명 씨도 귀여워요.”

도명이 도화의 말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도명의 반응에 도화는 더욱더 답답해져 침대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몸부림을 쳤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이마를 짝 소리 나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돔한테 귀엽다느니 뭐니 해요? 내가 벼르고 있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아니. 그게…….”

“도화 씨 어쨌든 확실한 건 난 아직 도화 씨에게 모든 걸 완벽히 보여 줄 마음의 준비를 못 했다는 거예요.”

“아니 내가 이미 도명 씨의 자는 모습도 보고, 우는 모습도 보고…….”

“그렇다고 그런 모습들이 일상이 되는 건 다르죠. 많이 생각했는데 역시 가끔 보여 주는 거하고 매일 보여 주는 건 심리적 부담감이 달라요. 도화 씨, 내가 싫어요. 그런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그것만으로 도화 씨에게 이유가 되기 충분하지 않아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도명이 싫다. 그 이상의 다른 설득력 있는 말이 있을까?

“네. 충분해요.”

“그럼 두 번째는 된 것 같고.”

“아니 그런데요. 중간에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으면요?”

“날 깨워요.”

“굳이 잘 자는 사람을요?”

“나 잠귀 밝아요.”

“아니, 도명 씨가 안 깨서 화장실에 못 갈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깨우기 미안해서 그러죠.”

“그런 것까지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어요.”

“하아…… 알았어요.”

“고마워요. 안대도 하고 손도 묶고.”

“진짜 손도 묶어요?”

“네.”

“…….”

“도화 씨 중간에 안대 안 벗을 자신 있어요? 나를 훔쳐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이길 자신 있냐고요.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요.”

“자신 없어요.”

“우리 백구. 거짓말도 못 하고 착하네요. 역시 내 백구네요.”

“네…….”

여전히 시무룩한 도화의 표정에 도명은 그에게 아부하듯 그의 얼굴에 이리저리 입을 맞추었다.

“자. 그러면 잘 준비 합시다.”

도명이 도화의 티셔츠를 벗겨 주었다. 도화는 자신이 착하게 말 잘 들을 때 도명이 유달리 관대하다는 것을 알기에 도명이 자신의 옷을 벗기는 내내 도명의 얼굴과 목덜미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에게 추임새처럼 귀엽다는 말을 반복해서 해 줬다.

도명의 손가락이 쫀득하게 달라붙은 도화의 브리프 고무줄에 손가락을 얹고 늘렸다. 내내 논쟁을 했는데 언제 흥분했는지 도화의 페니스가 반쯤 서 있었다.

“나랑 입씨름하면 흥분되는 줄은 몰랐네요? 도화 씨 설마 맹랑하게도 나한테 도전하면서 오르가슴을 느껴요?”

“아니에요.”

“아닌데, 우리가 지금 대체 뭘 했다고 흥분했어요?”

“아니, 아까… 도명 씨가 옷을 홀랑 벗기도 했고요.”

“고작 그 이유만으로요? 내 몸 처음 봐요?”

“도명 씨는 나랑 해 본 거 또 한다는 이유로 발기가 안 돼요?”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또, 그냥. 아니 그냥.”

“자꾸 그냥 그러는데 그냥 발기하는 거면 도화 씨는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위험한 사람이네요.”

“아니, 우리가 뭘 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침대 쓴다는 생각에 괜히. 자꾸 캐묻지 말아요.”

“또, 혼자 야한 상상 엄청나게 해댔네요.”

도명이 도화의 브리프를 완전히 벗기고 그의 눈에 실크로 된 검은 안대를 채우며 말했다. 도화는 눈앞이 강제로 캄캄해지자 괜히 무서운 느낌과 함께 기분이 이상야릇해졌다. 이제는 공포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오르가슴하고 연결하는 것 같았다.

“이제 손 묶을게요. 도화 씨가 안대에 손을 대지 않으려면 손을 뒤로 한 채 묶어야 하지만 그러면 잠들기 불편하잖아요.”

“네 그렇죠.”

“그러니까 줄을 허벅지에 감은 후 손을 거기에다 연결할 거예요. 손과 허벅지를 연결한 줄은 적당히 느슨하게 잡아 줄게요. 그러니까 손이 얼굴에 안 닿을 정도로만.”

“네.”

“그래요. 말 잘 듣고 착해요.”

도화는 여전히 도명의 착하다는 칭찬에 약했다. 그에게 착하다는 말만 들을 수 있다면 이 정도 불편함도, 부당함도, 너무 길드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허벅지에 줄이 감겨오며 적당히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손이 움직여지는 반경도 제한되었다. 손을 묶은 줄이 팽팽해지도록 최대한 뻗으면 가슴 조금 아래 정도까지밖에 안 올라갔다. 도화가 상체를 접어도 손이 얼굴에는 안 닿게 할 작정이었다.

도명은 도화를 자신의 옆자리에 눕혔다. 도화는 앞이 안 보이고 또 다른 사람에 손에 의해서 눕혀지니 머리가 폭신한 베개에 푹 잠기는 느낌이 묘했다. 마치 늪에 잠기는 감각처럼 평소에 베개에 머리를 뉘는 편안한 감각과는 달리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도화는 아직 눈을 뜨고 있지만, 눈이 감긴 것 같은 풍경 또한 이상하게 느껴졌다.

도명이 도화를 자신과 마주 보게 하고 눕힌 채로 그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도화 씨 참 따뜻하네요.”

도명은 도화의 체온이 정말 좋았다. 야한 느낌과는 다른 좋은 느낌이었다. 도명은 도화의 숨결을 더욱 느끼고 싶어서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다 댔다. 도명의 콧날과 도화의 콧날이 아스라이 겹쳐졌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에게 키스라도 하는 줄 알고 혼자 입술을 쩝쩝거렸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쩝쩝거리는 소리에 소리 내어 웃었다. 도명은 도화에게 키스를 하려고 얼굴을 겹친 것이 아니었다. 도화의 따뜻함에 중독되어 그의 콧날과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그 숨결을 아스라이 느끼고 싶어서였다. 도명은 한참을 눈을 감고 그렇게 도화의 숨결을 느꼈다.

도화는 여느 때처럼 도명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쳤다. 그가 미웠다. 그제야 도명이 봐 줬다는 듯이 도명의 입술 사이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러자 원망 섞인 도화의 손길이 어느새 야릇하게 변해 도명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도화 씨 지금 숨소리 너무 야해요.”

“저, 도명 씨.”

“왜요? 나한테 뚫리고 싶어요?”

도화가 도명의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할 정신도 없었다. 아까부터 은근히 달아 올라와 있었으니까.

“도화 씨.”

“놀리지 말고요.”

“나 도화 씨 아껴 주고 싶은데.”

“그게 무슨 개 소리예요.”

“자기야. 입이 거칠다.”

“왜 아껴요! 나 엄청 튼튼한데 왜 아끼는데요! 이렇게 다 벗겨놓고 왜 아껴요.”

도화가 칭얼거리며 도명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집어넣고 문지르며 앓아 댔다.

“우리 결혼식 때까지 참으면 안 될까요?”

“왜요? 왜요?”

도화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놀라 되물었다.

“그래야 우리 결혼식을 도화 씨가 손꼽아 기다리죠.”

“네? 굳이 왜요?”

“그거야 나한테 우리 결혼식이 매우 중요한 날이거든요.”

‘아니 그거랑 섹스랑 무슨 상관인데! 또 무슨 개 논리를 펼치려고 그래!’

“그런데 내가 그동안 너무 속상했던 게 뭔지 알아요? 나만 마냥 이 동거에 설레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기다려왔단 거예요.”

“그러니까 도명 씨의 말은…… 설마 나한테 복수하는 거예요?”

“네. 복수에요. 도화 씨. 사랑해요. 내가 도화 씨를 사랑해서 결혼식을 기다린 만큼 돌려 줄 겁니다.”

도명이 도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

도화는 아침부터 멍한 눈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물론 잠의 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깨끗하고 폭신한 침구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잠을 자니 깊은 안정감이 들었다. 나체로 자면 수면의 질이 좋아진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거기다가 짙은 남색의 실크로 된 안대를 하니 눈에 희미한 빛 한 줄기 안 들어왔기 때문에 깊은 잠에 빠지기 좋았다. 어디까지나 이 모든 것에 도명이 도화의 성욕까지 제대로 채워 줬다면 말이다.

도화는 눈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감각으로 아침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시각적으로는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도명이 먼저 일어나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다. 그가 블라인드를 올리자 도화의 이마 위로 아주 희미한 햇빛 온도가 느껴졌다.

햇볕은 강렬하다기보다 어딘가 설익어 있었다.

도명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옅게 퍼트리는 신음 소리. 곧이어 그가 가볍게 인스턴트커피를 타 먹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도명이 인스턴트커피 같은 것을 마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들렸다. 그가 비닐봉지 안에서 여기저기에 퍼진 분말을 한쪽으로 몰기 위해 흔들어 대는 소리, 곧이어 봉지의 끝자락을 뜯고 무심하게 탁탁 티스푼을 휘젓는 소리가 났다.

그는 아침의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간편한 인스턴트커피로 정신에 응급 처방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도명이 그답지 않게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어차피 이렇게 몽롱한 정신에서는 정성을 들여서 내린 커피의 미묘한 맛의 밸런스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듯했다.

도명은 그렇게 대충 커피를 타서 햇볕이 내려앉은 창가에 서서 커피를 호록 마셨다.

그렇게 도화의 코끝에 도명이 마시는 커피 냄새가 퍼졌다.

커피를 다 마신 후 도명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손가락을 빗 삼아 쓸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욕실로 들어가고 물줄기가 쏟아지다가 바닥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명이 욕실 문을 달칵하고 여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젖은 발이 폭신한 러그를 여러 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도명이 머리의 물기를 말리며 침대에 발가벗겨진 채 손이 묶인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도명은 아침부터 펼쳐지는 이 풍경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아침부터 자신이 사로잡은 것을 내려다보는 건 그의 나쁜 성미에 부합하는 취미였다.

“저, 도명 씨 저 일어났는데요.”

“알아요.”

도명이 아침이라 살짝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저, 그러니까.”

“아직 5시 10분이에요. 더 자도 돼요.”

“아. 네. 그건 아는데.”

“6시 반에 알아서 깨울게요.”

“근데 이미 깨 버렸는걸요.”

“도화 씨는 날 못 믿어요? 늦지 않게 깨운다니까요. 그나저나 아침에 잠귀가 밝네요. 혹시 내가 깨웠어요?”

“어느 정도는요.”

“미안해요. 다음에는 좀 더 조용히 움직일게요.”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는 그저 이왕 잠에 깬 거 일어나고 싶어요.”

“흠, 15분만 참아요. 아니, 20분에서 25분.”

“왜요?”

“안대 풀어 주기 전에 할 것들이 있어요. 첫째, 지금 도화 씨가 얼마나 보기 좋은지 알아요? 가볍게라도 수음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군요. 두 번째. 나 아직 제대로 단장 안 했어요.”

“지, 지금 내 모습 보고 수음하겠다고요?”

“안 됩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니면 됐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말허리를 뚝 끊고 마침표를 찍었다.

‘아니, 날 좀 마구 확! 확! 그거 있잖아. 왜 보기만 해.’

도명은 도화가 덮은 이불을 걷었다. 몸을 감싼 것이 사라지자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태아처럼 구부렸다. 도명은 순식간에 귀 끝까지 빨갛게 익은 도화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페니스를 매만졌다. 도화는 귀로 도명이 페니스를 가지고 노는 소리를 들으며 달아올랐다.

“저, 저, 도명 씨.”

“네. 말해요.”

도명은 최대한 깔끔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는 수음 중이라 목소리가 허스키했다.

“그, 빨. 빨아 드릴까요?”

도화는 최대한 용기를 내서 말한 건데 도명은 별다른 반응도 말도 없었다. 그저 기계적인 속도로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 그게 더 기분이 좋을 텐데요. 도명 씨가 혼자 하는 것보다요.”

“…….”

“아니, 도명 씨 뭐라고 말 좀.”

하지만 들리는 건 야한 도명의 신음밖에 없었다. 도화는 민망함에 웅크려 있다가 갑자기 가슴에서 천불이 났다. 도화는 침대에서 확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눈앞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살갗의 센서들과 귀가 있었다.

도화가 입술을 벌리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 사이에 뜨겁고 습한 것이 물릴 것 같다가 뒤로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하아, 이렇게 발작할 줄 알았습니다.”

“아, 진짜 이렇게 치졸하게 복수하기 있어요?!”

“치졸이요?”

“네. 치졸이요.”

도화가 도명이 욱하기를 기대하며 힘주어 말했다.

“하긴, 원래 복수는 치졸하긴 하죠.”

도화의 표현에 욱하는 것 같다가 도명이 이내 여유를 찾으며 말했다. 도명이 손가락으로 도화의 두피를 헤집으며 열에 들떠 있으면서도 억눌린 음성을 내뱉었다. 도명은 팔을 뻗어 도화의 머리를 누르며 그의 머리를 자신의 하체와 거리를 두게 했다.

“도명 씨는 정말 이런 거로 만족이 돼요? 나만 도명 씨를 원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도화 씨 살덩어리가 뭉근해지도록 여기저기 주무르고, 쑤시고, 살갗에 열상을 입게 해도 언제나 모자라죠.”

도명이 페니스를 크게 부풀리며 도화를 젖은 눈동자로 내려 보았다. 당장 저 오밀조밀한 빨간 구멍에 페니스를 박고 가슴을 쥐고 흔들며 도화의 눈이 퉁퉁 붓도록 울리고 싶었다. 하지만 도명은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도화를 관상하기만 했다.

“그런데요. 그 얼마나 대단한 복수이기에 도명 씨 자신도 괴롭혀요. 이 복수가 대체 누구를 위한 건데요.”

“설마, 복수가 전부겠어요? 내가 아무리 이런 거로 사채 하는 사람이라도 우리 자기한테 이자를 칠 수가 있나. 복수는 그냥 다른 이유 중 하나에요.”

“복수가 아니면 대체 뭔데요! 아껴 준다는 개소리는 하지 말아요. 난 쓴다고 닳아 없어지는 소모품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첫날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서죠. 사건의 희소성, 그리고 참았다 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달콤한 상상들, 뭐 그런 것들 말이에요.”

“그렇게 해 놓고 첫날밤은 무슨요! 사귀기 전부터 저를 이리저리 굴려 놓고!”

도화가 계속 반발하자 손바닥으로 도명이 도화의 입술을 탁 소리 나게 때렸다.

“자기야, 이리저리 굴렸다니. 근본 없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주 신중하게 굴린 거예요. 덕분에 이렇게 잘 설계된 훌륭한 변태가 됐잖아요.”

“도명 씨 자꾸 이러면! 자꾸 이러면!”

“자꾸 이러면 뭡니까?”

도화는 도명이 사무실에서 플레이할 때 썼던 방법을 썼다. 도명이 쓰는 방법이자 홈쇼핑에서 쓰는 그 고전적인 방법 말이다.

“앞으로 절대 계약의 중간 타협은 없어요. 이게 마지막 기회에요. 결혼식 전까지 절대로 끝까지 안 해 줄 겁니다.”

도화가 도명의 말투까지 모사해가며 하는 협박에 그가 푸시시 웃었다.

“섭만 인내심이 중요한 덕목이 아닌 거 알고 있나요? 돔이야말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가지기 위해서 손에 바로 닳을 수 있는 달콤한 것에 손을 안 뻗는 훈련을 한답니다. 도화 씨는 내심 자신이 그러듯 나 또한 결혼식까지 이 금욕을 견디기 힘들 거로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도화 씨, 그런 낙관적인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내가 도화 씨에게 휘둘리는 건 마음이지, 욕정이 아니에요. 뭐 쉽다고 허풍은 안 떨게요. 다만 못 할 건 절대 아니죠. 갓 섭이 된 도화 씨하고 쭉 이 짓을 해온 나하고는 인내심의 연륜 차이가 달라요.”

도명은 얄밉게도 파정을 할 때 도화의 입술에 살짝 얹은 채로 했다. 마치 살짝 맛보는 것까지는 친히 허락하겠다는 태도였다.

도화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도명에 의해 제거되었을 때는 도명이 평소처럼 완벽한 옷차림으로 웃고 있었다.

***

‘씨발 새끼!’

도화는 도명을 생각하자 분해서 머리를 버스 창문에 박았다. 그리고 자신도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지 도명에게 한 협박처럼 다시는 해달라며 구걸하지 않는 건 당연하고 도명이 뜻을 바꾼다 해도 절대 들어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대를 걷자마자 보이는 도명의 완벽하면서 깔끔하며 여유롭기까지 한 모습이 분했다.

그렇게 금욕의 시간이 일주일 흘렀고, 결혼식까지는 2주일 남은 상태였다. 밤마다 벌어지는 신경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동거는 처음의 불안과는 달리 순조로웠다.

도명은 침대 위에서의 규칙 외에도 두 사람의 생활에 대한 규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규칙들은 빡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리적인 편이어서 그 규칙들로 인해 그들의 공동생활이 매끄러워졌다.

도화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침실에서의 생활 규칙은 그래서 더욱 그저 도명의 심술에 지나지 않게 느껴졌다.

일반적인 결혼식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냥 지인들을 불러서 하는 저녁 식사라고 해도 준비할 건 많았다. 도화는 도명이 하자는 대로 하는 편이었다. 딱히 관심이 없기보다는 아무래도 도명은 이런 종류의 파티를 많이 열어봤고 도화는 이런 쪽에 경험이 전혀 없다 보니, 선생님만 믿습니다. 라는 면이 더욱 컸다.

그렇다고 도화가 결혼 준비로 바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도명의 옆에서 자잘한 일들을 같이 준비해야 했고 무엇보다 가장 큰 건은 피아노 연습이었다. 도명이 워낙 도화의 피아노 연주에 대한 기대가 커서 도화는 집에 오면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뭐든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도화가 유독, 이 피아노 연주 건에 대해선 예민하게 굴었다. 도화의 관심사는 손님들의 귀가 아니라 도명이었다. 도화는 결혼식 당일 도명을 놀라게 하고 싶은지 자신이 연습하고 있는 곡에 대해서 비밀에 부치는 일에 공을 들였다.

같은 건물에 사는 두 사람이기에 도화가 연습 중인 곡을 비밀로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도명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파헤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화가 처음으로 도명에게 제안한 규칙은 피아노가 있는 온실 문에 공포 영화 DVD를 붙여 놓으면 도명은 그 근처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 귀에 무언가를 틀어막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명은 도화가 연습 중인 곡에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겠다고 공을 들이는 도화의 김을 팍 새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굳이 도화가 지키고 싶어 하는 비밀을 파헤치지 않았다. 사실 이런 호기심의 절제는 행복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나날들을 보내는 것에 대한 즐거움으로 견딜 수 있었다.

도명은 이 이벤트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도화가 준비 중인 피아노곡에 대한 꿈까지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이 참으로 기묘한 것이 그에 기대와는 달리 행복한 꿈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도화가 공들여 비밀에 부친 곡은 악마를 숭배하는 내용이 담긴 헤비메탈 곡이었고 결혼식 당일 공개되었다. 도화가 도명이 손수 골라 입힌 고상한 하얀 셔츠를 벗자 그 안에는 도화가 로즈골드 색 용 문신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황금용이라도 되는 양 몸통 전체에 용 비닐 모양 문신을 했는데 그의 옆구리에 혼자 반향이 다른 역린이 눈에 띄었다.

도화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대신 기타로 건반을 때리듯 눌렀고 손님들은 빨간 피 같은 와인을 흔들며 악마에게 하얀 양을 바친다고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합창을 했다.

도명이 히스테릭한 표정으로 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시끄러운 연주를 그만두라고 명령하자 도화가 순한 표정으로 ‘메에~’라고 답하며 조용히 손을 모았다.

도명은 그 꿈 때문에 놀라 옆에서 자는 도화를 흔들어 깨워 대체 무슨 곡을 준비 중이냐고 추궁할 뻔했다. 도명은 뒤숭숭한 기분으로 베개에 머리를 잠기게 했다. 도명은 그냥 우스꽝스러운 꿈을 꾸었다고 실소했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자는 도화를 보니, 평소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그가 미쳐 날뛰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상대는 동네 백구잖아!’

도명은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는 도화를 눈에 힘을 주고 응시했다. 이 순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자신이 매일 밤 침대에서 하는 이 복수를 도화가 가만히 당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명은 지금까지 수많은 보복을 해오면서 이런 불안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반려인 백구에게 하는 복수가 문득 불안해졌다. 백구가 침실에서의 규칙과 결혼식 날까지 금욕하는 일에 대해서 지금은 얌전히 순응하는 것 같지만, 사실 마음속에서 매일 도끼를 갈며 잠드는 것이라면?

***

도화는 연습 중인 노래를 핸드폰에 담아 듣고 또 들으며 퇴근했다. 도화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기를 사 들고 곧바로 도명이 있는 지하실 집으로 들어갔다.

“도명 씨!”

도화가 해맑은 표정으로 싱싱한 딸기가 든 봉지를 들어 올렸고 이내 딸기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화는 눈 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현실을 부정했다.

도명이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앉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USB를 들고 있었다. 도화는 그 USB의 생김새를 보고 그것이 어떤 USB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도명이 술에 취한 날 토끼 옷을 입히고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을 백업해 놓은 USB이었다.

“그게 어떻게……!”

“너무 같은 수법을 쓰면, 어떤 수도 읽히는 거 모릅니까? 공포 영화 DVD로 시선을 환기하는 건 이제 너무 빤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입니다.”

도명은 도화가 이 집으로 처음 짐을 옮긴 날, 수상한 상자에 대해서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결혼식 준비와 지금 사는 곳을 작업실로 바꾸는 것, 도화가 살았던 2층의 공사 진행 상황 등등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백구 관련 물품이 잘 있나 궁금해서 창고에 갔다가 잊고 있었던 수상한 상자가 생각났다. 도명은 공포 영화 DVD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상자의 높이와 안의 깊이에서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화가 도명에게 입힌 토끼 옷까지 욕심을 부린 나머지 바닥 차이가 육안으로 손쉽게 구별 가능할 정도로 나 버린 것이다. 토끼 옷은 포기하고 부피가 별로 안 되는 러브레터와 USB만을 넣었다면 아무리 꼼꼼한 도명이라도 이렇게 단번에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도화는 그저 도명이 상자 윗면을 가득 채운 공포 영화 DVD만으로 질색하며 안까지 살피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도명은 러브레터 찌꺼기 위치만 알면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도화가 버린 줄 알았던 토끼 털 옷을 보자 등골이 싸해졌다. 7년 만에 술에 취해 소실된 기억이 그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기억나지도 않은 일로 이렇게 불길할 수가 있다니.

그러다가 구석에 교묘하게 투명 테이프로 고정된 USB를 발견한 것이다. 도명은 자꾸 싸해지는 목덜미를 연신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USB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상상보다 현실이 더 충격적이고 끔찍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자신이 토끼 옷을 입고 두 주먹을 얼굴에다 모은 사진을 봤을 때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도명의 몸이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렷다.

도화는 일단 무조건 도명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고개 들어요.”

“네? 용서해 주는 거예요? 도명 씨 저는 정말, 나쁜 의도가 아니라.”

“지겨워 죽겠네. 매일 이렇게 사고를 쳐놓고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말입니다.”

“잘못했습니다.”

도화는 더욱 자세를 낮게 잡았다. 도화의 이마가 거의 바닥에 닿을 것 같았다.

“내가 고개 들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내 말이 우습습니까?”

도화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잘못했으면 그 해결 방법은 언제나 명료한 겁니다. 벌을 받으면 되는 겁니다. 그렇죠?”

“네. 회초리 들고 올까요?”

“도화 씨는 맞으면 질질 싸는 변태가 아닙니까? 그게 왜 벌입니까? 상이지. 고개 들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 눈 크게 뜨고 잘 봐요.”

도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무판 위에 USB를 올려놓고 망치를 그 위에서 들어 올렸다. 도화가 도명의 행동에 놀라 그의 앞에 달려 나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놔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음산하게 속삭였다.

“자기야. 진정해요. 사진 그렇게 나쁘지 않았잖아요.”

“뭐, 나쁘지 않아요?”

도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도화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이 사진이 얼마나 소중하면, 이렇게까지 했겠어요. 내가 이것들을 정말 좋아한단 말이에요.”

“자기야. 손 놔.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거로 보입니까?”

“도, 도명 씨도 비밀 있잖아요! 제 허락 없이 이상한 거 만들고 이것저것 모아 놨잖아요.”

“내가 뭘 말입니까?”

“도명 씨의 비밀스러운 사과 상자 말입니다.”

백구가 그림자가 진 얼굴로 도명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도명은 순간 도화의 말에 크게 당황했으나 이내 무너져 내려가는 포커페이스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요?”

“네?”

도화는 도명의 반응이 생각보다 담담하니 당황했다.

“도화 씨. 그래서요?”

“아니, 막 이상한 거 이것저것 많던데요.”

“이 시점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도, 도명 씨가 내 USB 망가뜨리면 저도 가, 가만히 안 있어요. 나도 마냥 당하고 살지는 않는다고요.”

도화는 이렇게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문제의 상자가 있는 창고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 사과 상자를 들고나왔다.

“그 망치 내리쳐 봐요. 그럼 나도 이 상자 던질 거예요. 이 안에 도자기 컵 같은 것도 있던데, 어디 물건들이 얼마나 멀쩡하게 살아남는지 보자고요.”

망치를 들고 있는 도명과 상자를 들고 있는 도화 사이에서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도명이 자세히 보니 상자를 들고 있는 도화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명이 한쪽 눈썹을 쓱 올리더니 망설임 없이 도화의 USB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한 번에 제대로 망가뜨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힘이었다. USB가 쩍 소리를 내며 뭉개지는 소리가 도화의 귓가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도화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린 채로 온몸이 고장 난 것처럼 멈췄다. 도명은 도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확인 사실을 하듯 USB에 망치질을 한 번 더 했다. 도화의 심장까지 도명의 망치질에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충격받은 것 같은 가증스러운 표정 연기하고 있죠? 도화 씨 노트북 안에도 파일 있죠? 그러니까 이건 백업용이고요.”

도명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단 지금 도화의 충격 받은 얼굴은 연기가 아니었다. 도화는 자신이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도 일말의 망설임 하나 없이 그 소중한 USB를 도명이 부쉈다는 것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도명의 말처럼 도화의 노트북 안에는 따로 이 파일이 있었다. 도화의 눈이 도명의 탁자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노트북을 향해 굴러갔다. 저 노트북이라도 지켜야 했다. 지금 도명이 하는 행동을 보니 노트북에 망치질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노트북을 망가뜨리고는 쿨하게 새 노트북을 사 주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릴 위인이었다.

도화가 도명과 신경전을 벌이며 노트북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도명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깍지를 끼고는 느긋하게 도화의 행동을 방관했다. 도화와 도명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도화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고 도명은 한쪽 입꼬리를 쭉 올린 채 싸늘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설마…….”

“가증스럽게 비밀번호가 1091004가 뭡니까? 양심도 없지. 컴퓨터 안에 감히 그런 파일을 숨겨 놓고서 1091004? 하.”

“……내 노트북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절망적인 눈동자를 한 도화를 향해 도명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그것만 알아둬요. 도화 씨 머릿속은 내 뇌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도명은 그렇게 말했지만, 도화의 비밀번호를 알아낸 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 직관이었다.

도명은 맨 처음에는 도화의 생일, 혹은 자신의 생일, 핸드폰 번호 등등을 적었다. 하지만 도명이 해커도 아니고 풀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도명은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한 마음에 잠시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야속한 표정으로 노트북 로그인 화면을 쳐다보는데 프로필 사진에 해맑은 백구 한 마리가 있었다. 눈처럼 하얀 들판 위에 눈처럼 하얀 백구가 천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뇌리에 스쳐 지나간 숫자 1091004에 도명은 설마 그것이겠냐며 혼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7자리 숫자를 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겠냐며 속은 셈 치고 한 번 쳐봤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도화의 보안이 풀렸다.

도명은 일단 파일 검색기를 돌려 보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된 파일을 하나만 찾았을 뿐이었다. 파일 이름은 정확히 ‘주님 유도명’이었다. 도명은 파일 이름에 내심 기대가 찬 게 사실이었다. 그 빌어먹을 토끼 옷을 입힌 사진만 아니라면 사실 도명은 도화가 자신에 관해서 따로 파일을 만들고 그 정보를 정리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도명은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이상한 기대감과 함께 파일을 열었다.

하지만 도명의 묘한 기대와는 달리 ‘주님 유도명’이라는 파일 안에는 엑셀 파일과 다른 파일 포맷의 파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파일은 그동안 도화가 도명에게 월세를 송금한 내용과 함께 집 계약 관련 자료를 모아 놓은 파일이었다.

‘아, 건물주 유도명. 이 뜻이냐. 애인 관련 파일 한번 살갑다. 백구야.’

도명은 왠지 모를 실망감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진짜 백구는 낭만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도명은 그 USB가 전부인 건가 싶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여전히 목 뒤가 싸늘했다.

도명은 좀 더 집요하게 도화의 컴퓨터를 뒤지기로 했다. 도화의 컴퓨터는 평소 도명이 느끼는 그의 성격과는 다르게 정리벽이 있나 싶을 정도로 문서들을 하나하나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도화의 노트북 안 파일은 크게 두 가지 테마로 말할 수 있었다. 생활비나 연말정산 같은 것을 회계 정리한 엑셀 파일과 공포 영화에 관한 정보를 용도별로 정리하고 있었다. 특히 공포 영화에 대한 자료는 지나치게 체계적이어서 이걸로 칼럼이나 논문을 써도 될 정도였다.

다른 자잘한 정보는 최근 7개월 안에 생성된 것들이었는데 정보 테마는 요리, 피아노였다. 도명은 도화가 피아노 악보를 모아놓은 폴더가 매우 궁금했으나 참았다. 도명은 요즘 그의 비밀 곡이 불안하긴 했지만, 도화가 준비한 깜짝 파티를 이렇게 자신 스스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도화의 컴퓨터 안은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정보량도 은근히 많아서 일일이 뒤져 보는 것은 꽤 고된 일이었다. 그것도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파일을 찾아 헤매는 건 정신적 피로가 꽤 쌓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집요함으로 도명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일단 도명은 공포 영화 폴더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도화는 최근 들어 무언가를 숨길 때 꼭 공포 영화를 결계로 썼으니까. 공포 영화 폴더 안을 뒤지는 것은 예상한 대로 엄청난 고문이었다. 도명은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며 자신의 토끼 사진을 찾았다.

그리고 의지의 도명은 공포 영화 스크린샷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했다. 하지만 뭔가 도명이 USB에서 본 것들과 사진의 양이 달랐다. 잔인한 백구는 사진을 한 폴더에 집어넣은 게 아니라 여러 폴더에 분산시켜 놨다. 그렇게 의지의 도명은 도화의 노트북에서 자신의 토끼 분장 사진을 영구삭제했다.

“도화 씨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도명이 자신의 노트북 앞에서 절망한 도화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도화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도명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이 모든 일이 거짓말이라고 그가 말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도명은 혀를 차며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왜 쓸데없이 소중한 걸 만들어서 이렇게 상실감을 느껴요?”

도명은 이런 일이 생겨서 안타깝다는 어투로 말을 하면서도 눈빛은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결국 도화는 폭주하며 자신이 노트북을 지키고자 임시로 바닥에 내려놓은 사과 상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도명의 사과 상자를 머리 위로 올렸다. 도명은 그저 그 모습을 앉아서 지켜볼 뿐이었다.

“도화 씨 그런 일을 저지르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도명 씨도 했는데 왜 나라고 못 할 거로 생각하는 거죠?”

“그건 내가 도화 씨를 생각하며 모은 것들이에요.”

“나도! 그런 거라고요!”

“도화 씨는 나에게 모욕을 줬어요. 도화 씨가 가진 시간은 날 모욕하며 즐긴 것뿐이라고요. 하지만 도화 씨가 내 것을 부수면서 기분이 풀린다면 어디 한번 부숴 봐요. 어디 한번 내가 도화 씨를 추억했던 시간을 망쳐 봐요.”

도명이 턱을 까딱하며 말했다.

“나 진짜 해요! 해요!”

“네.”

도화가 상자를 든 팔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하지만 결국엔 도화는 그럴 수 없었다. 도화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그것 말고도 도화 씨 핸드폰에 내 사진들 많잖아요. 내가 사진 많이 찍어 줬잖아요.”

도명이 도화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린 후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충분히 괴로워하니까, 벌은 여기서 끝입니다. 앞으로 이 일로 내가 도화 씨를 추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나저나 상자 제 자리에 잘 가져다 놔요. 착하죠?”

도화는 도명의 말대로 슬픈 얼굴로 비틀비틀 걸으며 도명의 사과 상자를 제 자리에 가져다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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