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의 법칙
도화는 핼러윈 당일, 신이 나 있었다. 언제나 도화는 핼러윈을 크리스마스보다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화가 도명을 만나기 전부터 유일하게 챙기는 행사였다.
행사를 챙긴다고 해 봤자 혼자 방안을 으스스하게 꾸미고 가장 좋아하는 공포 영화를 보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기념일이었다. 이번 핼러윈은 특히 기대가 컸다. 이번 해에는 이 특별한 날을 같이 보낼 연인이 생긴 것이다.
물론 전에는 진영과 한두 번 핼러윈을 같이 보내긴 했었다. 문제는 첫 번째 핼러윈 때 도화가 만든 으스스한 공포의 방 안에서 영화를 보는 게 진영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던 듯했다.
도화가 잔뜩 기대하며 두 번째 핼러윈을 기획했고 진영은 그답지 않게 도화와의 만남을 피하며, 도망을 갔다. 그리고 도화가 사채업자처럼 진영이를 잡아 같이 핼러윈을 보냈다.
그렇게 진영에게 핼러윈은 정말 귀신이 잡아 오는 것처럼 무서운 날이 되어 버렸고 진심으로 싫어하는 진영의 반응에 도화는 결국 그 후부터는 혼자 핼러윈을 즐기게 되었다.
도화는 도명과 함께 보낼 핼러윈에 엄청난 기대가 있었다. 물론 진영처럼 이 특별한 날에 질려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서 눈치껏 적당히 놀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부푼 마음에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열정을 멈출 수는 없었다.
도화는 엄선한 공포 영화 DVD를 훑어보았다. 어느 정도는 도명의 취향을 담아 1차원적인 공포가 아닌 심미적인 공포를 담은 예술영화에서 골랐다. 또 사람을 무참히 도륙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도 골랐다. 그래 봤자 도명에게는 공포 영화는 공포 영화이겠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기대가 큰 만큼 도화도 꽤 정성을 들였다. 이왕 공포 영화를 같이 볼 사람이 있는데 원래 핼러윈의 목적이 그러듯 코스튬을 할 화장 도구도 샀다. 도화는 그동안 집 안을 장식할 핼러윈 장식들이 담긴 상자와. 분장 상자, 그리고 DVD를 챙겼다. 그리고 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명 씨, 저 지금 도명 씨 집으로 내려갈 건데 괜찮아요?”
“도화 씨.”
도명이 오래간만에 뜸을 들이자 도화는 긴장되었다. 그가 전에 그어 놓은 선들이 세포 속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
“뭘, 그런 걸 허락을 받아요. 우리 사이에.”
“아. 네! 네!”
“나 참.”
수화기 너머로 도명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퍼졌다.
“아, 그게. 그래도 내 집이 아니고, 이게 예의고.”
“앞으로 그냥 내려와요.”
“아. 네!”
도화는 신이 나서 상자 두 개를 번쩍 들며 계단을 내려왔다. 도명의 지하실에는 일단 아무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졌다. 도화는 일단 무거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명 씨?”
도화가 도명을 찾기 위해 그를 불렀다.
“드레스 룸 안에 있어요. 할 게 좀 있어서요. 기다려요.”
드레스 룸 안에서 도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명이 있는 것이 확인되자 도화는 입꼬리를 기분 좋게 올렸다.
“네!”
도화는 자신의 핼러윈 장식들을 어디에다가 둘지 보기 위해 도명의 집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도화는 도명의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하얀 털옷을 발견했다. 도화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얀 털옷을 들어 보았다.
털옷의 정체는 토끼 귀가 달린 하얀 색 전신 옷이었다.
헐렁한 옷의 엉덩이 부분에는 하얀 털 공 같은 꼬리가 달려 있었다. 그 옷을 보고 도화는 자신만큼이나 도명도 이번 핼러윈을 설레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옷 주변에는 그 옷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리본 달린 상자가 대충 열려 있었다.
‘아 세상에 도명 씨 알아서 코스튬도 준비하고!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이야. 이렇게 마음도 잘 통하고 말이야. 아니, 근데 도명 씨 취향이 그사이에 바뀌었나? 아무리 봐도 도명 씨 취향은 아닌데. 아, 설마! 이거 내 옷인가. 아 그런데 나도 덩치가 있고 귀여운 스타일도 아닌데 토끼라니. 장난이 좀 지나친데.’
도화가 토끼 옷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을 때 도명이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도명이 토끼 분장을 마치고 나온 후였다. 하지만 직원들이 원하는 분위기의 토끼는 결코 아니었다.
오늘 도명은 온통 새하얀 색이었다. 도명의 피부가 적당히 밝은 톤에 부드러운 편이긴 한데 오늘은 마치 백색증에 걸린 사람처럼 지나치게 창백했다. 도명은 자연스럽게 혈색 도는 뺨과 입술까지 하얗게 덮어 버렸다. 그래서 피부에 투명하고 엷은 분홍색이 묘하게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가발을 썼는지 머리카락도 서리 맞은 것처럼 새하얀색이었다. 하얀 털에 대한 그의 집착은 눈썹에까지 퍼져서 눈썹까지 하얀색이었고 심지어 속눈썹까지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또 옷은 어떠한가. 하얀 셔츠에 하얀색 실크 조끼, 하얀 바지. 하얀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하얀색 가죽 구두까지 꺼내져 있었다.
그에게서 색은 오로지 눈동자에만 있었는데 선명한 핏빛 빨간색이었다. 토끼처럼 새하얀색이긴 한데, 문제는 귀엽고 복슬복슬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도명이 도화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얀 그 얼굴에 표정이 없자 뭔가 소름이 돋았다. 거기다가 빨간 눈이라니!
“어때요?”
“아. 네?”
“좀, 소름 돋아요? 기이하면서 숭고하고 또, 권위적일 정도로 아름답습니까?”
“아. 네. 네.”
“아, 그런데 왜 이렇게……”
“오늘 핼러윈이잖아요.”
“아. 네 그렇죠. 그런데 무엇으로 분장하신 건가요?”
“아. 이게 없어서 모르겠군요.”
도명이 지금 당장은 귀찮아서 안 쓰고 있던 토끼 귀 머리띠를 썼다. 하지만 그 토끼 귀조차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복슬복슬한 재질이 하니라 도명의 얼굴만큼 긴 뾰족한 금속 귀였다.
누군가 실수로 귀를 스치면 손 등에 서리가 묻어나올 것 같은 차가운 질감이었다. 그가 쓰고 있는 건 토끼 귀라기보다는 두 개의 날카로운 검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공감 갈 정도였다.
“아!”
“네. 토끼입니다.”
도명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명은 괜히 의상 준비한다고 고생하지 말라고 직원들이 보내온 털 토끼 옷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자신에게 귀여움을 입히려 한단 말인가.
표면상으로는 수평적인 척하지만 권위적이고 이 오만한 자신에게 감히 귀여움을 입히려 들어? 사악한 것들.
하지만 유도명이 누구인가. 그 어떤 순간에도 공포를 만들어 낼 줄 아는 남자가 아니던가. 맨 처음에는 불길하고 악마적인 검은 토끼를 콘셉트로 분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간단한 콘셉트 같았다. 그들의 빤한 상상 안에서 놀아 주되 그것을 살짝 비틀어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하얀색은 오묘한 색이었다. 하얀색은 자극적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은 색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모든 것이 하얀 것은 검은색 이상으로 불길하고 공포를 자아내며 또 동시에 우상적이다. 도명은 다시 한번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창백한 비스크 인형 같은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도명을 쳐다보는 도화의 시선이 묘했다. 도명이 의도했던 대로 송장처럼 창백한 그가 낯설고 무서우면서도 눈처럼 고결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 저 근데 이건 뭐예요?”
도화가 도명이 직원들에게서 받아 옷 토끼 옷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아, 그거 신경 쓰지 말고 버려요.”
“이거 새것 같은데요?”
“새것이든 뭐든. 아주 사악한 물건입니다.”
‘아니, 사악한 건 지금 도명 씨 모습인데요.’
“아, 그나저나 저, 도명 씨 오늘 핼러윈 특집으로 여기서 영화 보려고요.”
“그래요? 잠깐만요. 도와줄게요.”
도명이 파티가 준비 중인 본사로 갈 시간을 재며 시계를 보았다. 도명이 프로젝트와 오디오를 최적의 상태로 설정을 잡는 동안 도화는 설레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전자레인지로 튀긴 팝콘과 분장 도구를 살폈다.
“그건 뭡니까?”
도명이 도화의 특수 분장 메이크업 박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번에 핼러윈 분장하려고 샀어요.”
“나한테 미리 말하죠. 저 이미 있는데.”
“아, 지금 하고 계신 거 보니까, 그럴 걸 그랬어요.”
도화는 도명에게 은근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도명이 귀엽다는 듯이 그의 이마에 입술을 쪽 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분장 도와주세요. 저, 우람하고 건강하게 잘 자란 토시오 분장하고 싶어요.”
“아.”
도명의 표정에 난감한 표정이 가득했다.
“안 돼요?”
“아니, 그게 약속이 있어서요. 분장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해 주고 나가면 늦을 것 같은데요. 미안해요. 도화 씨.”
도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때야 도화는 뭔가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무슨 약속이요?”
도화가 애써 실망한 표정을 숨기며 인위적으로 목소리 끝을 올렸다.
“회사 사람들하고 본사에서 핼러윈 파티하기로 했거든요.”
“아.”
‘아. 어쩐지 도명 씨가 저렇게 힘주어 분장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당연히 핼러윈 날 나와 함께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것도 이런저런 모임 많은 도명 씨인데.’
“아, 그렇구나!”
도화가 애써 말꼬리 끝을 올렸다. 그의 음성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도화 씨, 혹시 나하고 같이 공포 영화 보고 싶었어요? 오늘 핼러윈이니까요?”
“아. 그게. 아니요. 아니요. 아. 그게 사실은, 네.”
도명은 난감한 표정으로 도화가 바리바리 싸 온 것들을 훑어보았다. 온갖 장식품에, 분장 도구 등등 많이도 챙겼다.
“아님, 저하고 같이 회사로 가요. 회사 사람들은 오히려 도화 씨가 같이 핼러윈 파티를 즐겨 주는 걸 좋아할 거예요.”
“아…….”
“역시 불편하군요. 그렇다면 너무 애쓰지는 말아요.”
“아. 네. 솔직히 아직, 용기는 안 나네요. 물론 그분들이 좋은 분들이라는 건 아는데. 역시, 음. 편하지는 않아서요.”
“그렇군요.”
도명은 도화에게 프로젝터를 조작하는 법을 알려 주다가 애써 밝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나, 그냥 가지 말까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바로 네! 라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 때문에 약속을 깨는 건 싫었다. 미리 이야기해서 자신이 도명과 선약을 잡은 게 아니라면 모를까. 이렇게 그의 사회생활에 발목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요. 저에겐 명작 공포 영화가 있는걸요. 맛있는 팝콘도 있고.”
도명은 도화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잘 오고 있냐는 직원들의 문자 독촉에 한숨을 쉬고는 도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도명이 자동차 열쇠를 들고 집을 나섰다.
***
그렇게 도화는 도명 없이 혼자 남아 공포 영화를 보았다. 계속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감도 크지만, 줄곧 혼자 핼러윈을 이렇게 보냈으니 괜찮다고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도화는 자신이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큰 화면에, 좋은 오디오 시스템으로 공포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영화 내용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다니. 자꾸 마음속으로 자신은 혼자 핼러윈을 보내게 돼서 우울하지 않다고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꽉 찬 탓이었다.
도화는 결국 우울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도명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도화는 결심한 듯 핼러윈 분장을 하기 시작했다.
도화가 부른 콜택시가 집 앞에 섰다. 도화가 택시에 타자마자 택시기사가 불안감으로 크게 떨리는 눈을 하고 백미러를 흘깃 보았다.
“오늘 핼러윈이잖아요.”
도화가 모기 같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렇죠. 압니다. 다들 이런저런 특이한 분장을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하하.”
택시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백미러에서 시선을 못 떼고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렸다. 도화가 전에 가 본 도명의 본사 주소를 불렀다. 도명의 본사가 땅값 때문에 번화가에 있는 게 아니라 택시는 점점 시야가 어둠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길 초목에 들어섰다.
택시기사가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도화는 불안에 떠는 아저씨를 위해 팔을 엑스자로 만들고 어깨를 감싸며 몸을 최대한 작게 구겼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대로 계속 있겠습니다. 아저씨. 죄송해요. 핼러윈이라.”
도화는 내리면서 아저씨에게 택시비를 결제할 카드를 내밀면서 그의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오렌지 색 호박엿을 올려놓았다. 그제야 아저씨는 방긋 웃었다.
***
도화가 도명의 본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직원들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이런저런 분장을 하고 열심히 놀았다. 도명은 소파에 앉아서 직원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적당히 사진 찍고 사라질 시간을 재고 있었다.
자꾸 집에 놔두고 온 풀이 죽은 백구의 뒤통수가 생각났다. 도명의 눈이 자신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동선을 생각하기 위해 현관문이 이어진 복도를 응시했다.
그때 복도의 멀쩡하던 형광등이 공교롭게도 깜빡거리고 검은 그림자가 복도를 빙빙 돌며 서서 사람들로 가득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명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역시 다시 봐도 그 커다란 불길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워져 복도 끝에 매달려 사람들을 음산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 설마. 왜 저 그림자가 묘하게 도화 씨 같지?’
“대표님, 우리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온 것 같아요. 대표님 보여요? 저 키 큰 그림자. 올 사람은 다 오지 않았어요? 아. 뭐야. 무섭게.”
사신으로 분장한 직원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네. 보입니다.”
그의 말에 도명은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명이 엉덩이가 눌어붙을 정도로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아. 정말 도화 씨네.”
“네.”
도화가 장갑을 낀 검은 손으로 도명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으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콘셉트에요? 아니, 그 전에 계속 여기서 있을 거예요? 아니, 형광등은 왜 이때 불이 거의 다 나가고 그래.”
도명이 도화를 핼러윈 파티장으로 이끌었다. 도화가 도명을 잃어버리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도명처럼 이 장소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눈에 띄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도화가 도명의 옆에 있자 사람들이 도화에 관해서 물었다.
“세상에! 도화 씨 왔네요!”
도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죄송하지만 대체 뭐로 분장한 거예요?”
“그림자입니다.”
“네? 아니, 온통 검으니까 그건 대충 알겠는데, 그러니까 정확히 무슨 그림자요?”
“도명 씨 그림자요.”
“아!!”
“아!! 그러네!!”
“토끼 귀가 있네! 토끼 그림자였어!”
그제야 사람들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일제히 떴다. 도화는 집에서 최대한 검은 옷은 다 끌어모아 온몸에 걸쳤다. 그 검은 헝겊들이 누더기처럼 엉킨 모습이 어둠 속에 있을 때면 묘하게 소름 돋았다. 도화는 별생각 없이 그냥 내 피부 표면 하나 들키기 민망하다는 집념 아래 만든 옷이지만 말이다.
얼굴에는 검은색 비니에 구멍만 뚫어서 복면처럼 썼다. 하지만 토끼 분장을 한 도명의 그림자니까 그냥 검기만 해서는 안 됐다. 도화는 토끼 귀를 표현하기 위해 검은 양말에 솜을 대충 넣고 머리에 쓴 비니 위에 급한 대로 스테이플러로 찍어 연결했다.
빨리 급하게 만들어야 하는 핼러윈 코스튬에 시간 들어가는 바느질은 사치였다. 그렇게 그는 온갖 종류의 검은 물체를 몸에 덕지덕지 붙인 것이다.
“아니 근데 왜 대표님 그림자로 분장한 거예요?”
“그게, 부끄러워서요.”
도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네?”
“도명 씨 그림자가 되는 게 가장 눈에 안 띄면서 제가 심리적으로 편하지 않을까 해서요. 도명 씨 옆이잖아요.”
도명은 두 사람의 동거를 준비하는 동안 그에게 쌓인 서운함 감정이 녹는 기분이었다. 하나씩 따지자면 너무 자잘한 일이라 따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따지기도 모호한 티끌들이 쌓이고 쌓여 도명의 발끝부터 명치 언저리까지 쌓여 있던 터였다.
적어도 오늘 저녁, 그와 회사를 누비는 한 시간 내내 그의 불만 반이 녹아 버렸다. 도명은 자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도화의 볼에 수시로 뽀뽀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원래 도화가 회사에 도착했을 무렵 도명은 카드 한 장을 내려놓고 슬슬 떠날 생각이었는데, 결국 회사 사람들과 지금까지도 어울려 놀고 있었다. 도화가 자신에게 의지하며 붙어 있는 그 시간이 너무 달콤했던 탓이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돼 버린 것일까. 도명은 어느새 흥에 취한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술 게임을 하고 있었다.
도명은 언제나 술 게임은 비효율적이면서 동시에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안 좋다고 생각한 것은 남에게도 쓸데없이 권하면 안 된다.
자신이 그렇게 해서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지거나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런 짓을 반복했다가는 상대방에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시킬 때 쓸 화력이 분산된다. 그래서 쓸데없는 일로 상대방을 평소에 괴롭히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명은 지금까지 업무 외에 회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힌 적이 없었다. 식사 한 번에 서로 잘 안 맞는 사람들이 갑자기 맞을 리가 없었다.
업무상 일어나는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강제로 회식에 참여시키는 것보다 회사 회의실에서 공론화시키고 중간 합의점을 찾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불편할지라도 고인 고름을 당장 터뜨려 줘야 한다.
업무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목적의 회식이라고 하면 더욱이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모으면 안 된다. 강제적인 것은 아무리 즐거운 일인지라도,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은 가게 해야 차라리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직원들끼리의 단합 문제는 솔직히 도명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도명이 나눠서 던져 준 일을 각자가 잘 해결해 주면 되는 일이고 일을 위한 각 부서 간의 유기적인 협업은 그가 조율할 일이었다. 오히려 지나친 단결력은 도명을 피곤하게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도명은 오히려 직원들의 단결을 싫어했다. 적당히 서로 뚝뚝 끓어져 힘이 분산되어야 도명이 그들을 장악하기 쉬웠다.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대표가 친목을 신경도 안 쓰는데 왜 이렇게 단합이 잘 되어 있는 걸까?
마치 하나의 신체 안에 담긴 장기들처럼 척척 맞아 돌아갔다. 생각해 보니 도명을 핼러윈 파티에 참석시키는 일 또한 그러했다. 그래도, 노는 데 단합이 잘되어서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를 과소평가한 대가는 더는 그가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 폭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어쩌다 천하의 유도명이 천박하고 비효율적인 술 게임 모임에 앉아 있게 된 거지?
아무리 그 집단의 수장이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집단행동의 마술 속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화려한 마술사의 손동작에 속아 빠르게 눈을 돌리고 보니, 내 뒤 호주머니에 정체불명의 카드가 꽂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유도명이 이 올망졸망한 미어캣들한테 당했다고? 왜 대표인 내가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는 문화를 알아서 거뒀는데, 왜 자기 스스로 구덩이에 들어가 저렇게 신나게 노는 거지?’
직원들이 각자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빙 둘러앉은 사람들 순서대로 술잔을 옮겼다. 차례가 된 사람이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고 쪽지를 펼쳤다.
「1년 동안 키스를 못 해요.」
“에잇 키스가 별거야. 패스!”
“역시 6년 모태 솔로의 내공이야.”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남자는 거대한 술잔에 와인을 섞었다.
“와, 이번 폭탄주 점점 거대해지는 거 아냐.”
“빨리 다음! 다음 넘겨.”
다시 쪽지가 열렸다.
「1년 동안 돈을 못 벌어요.」
“와- 이거 쓴 사람 누구야? 너무한다!! 사이코잖아. 이거.”
“이건 진짜 마실 수밖에 없다.”
‘아니, 내가 월급을 주는데 그 쪽지가 뭐가 무서워. 미신이잖아.’
도명은 이들의 호들갑에 고개를 저어댔다. 까짓거 미신인데 그냥 술잔을 넘기면 그만이었다. 도명은 차라리 이 게임이 다른 술 게임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냥 술잔만 넘기면 그만이니까. 저 상자에서 어떤 말이 나온들, 그게 실제로 무슨 효력이 있을까. 그저 장난질 아닌가.
결국 거대한 핵이 될 예정이었던 폭탄주는 돈 앞에서 제거되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운명의 폭탄주 수레바퀴는 돌아가고 또 다른 악마의 폭탄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탄주가 도명의 앞에 놓였다. 사이다, 콜라, 맥주, 테킬라가 들어간 폭탄주였다.
도명은 술이 약한 사람이었다. 분명히 이 500cc 맥주잔을 가득 채운 폭탄주를 한 번에 들이키면 한 번에 완전히 취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명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도명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쪽지를 펼쳤다.
「1년간 결혼을 못 해요.」
쪽지가 펼쳐지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동성애자인 도명에게는 미묘한 뉘앙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적을 뚫고 직원들이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하기 시작했다.
“술잔 바로 넘겨야겠네. 대표님 원래 비혼주의자잖아.”
“그래. 에이 이건 대표님한테 씨알도 안 먹히겠네. 거의 놀이공원 프리 패스 티켓 뽑으셨네.”
“역시, 대표님, 운도 좋아.”
그렇게 사람들이 도명에게 어서 폭탄주를 만들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술잔을 쳐다보는 도명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내가 백구랑 이번에 결혼을 못 해. 그래. 이건 미신이야. 미신. 나는 이거 먹으면 한 방에 간다고. 이 쪽지가 무슨 효력을 발휘한다고 그래.’
도명이 술잔 손잡이를 꽉 쥐었다.
“대표님, 어서 뭐든 넣고 다음으로 돌리시죠?”
“흑기사.”
“네?”
“술 게임엔 흑기사가 있잖아요.”
“아. 그렇죠. 누구를……?”
“당연히 도화 씨입니다.”
도명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화는 도명과 다니면서 어느새 회사 분위기에 익숙해졌는지 도명의 그림자 역할을 그만둔 지 30분쯤 된 후였다. 도명이 고개를 돌려 도화를 찾아 보니 다른 직원들과 다트 게임을 하고 있었다.
“shadow! shadow! shadow!”
두 열로 나눠진 사람들의 구호 속에서 도화가 수줍은 표정으로 다트 화살을 받아 들었다.
“부끄럼 타지 말고, 그냥 던져요.”
“네. 못 해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도화가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일일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트 화살을 던졌다. 화살이 다트판에 박히자 엄청난 쩍 소리를 내며 중앙에 박혔다. 화살촉이 아직도 도화가 실어 보낸 힘의 여운으로 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휘둥그레지고 곧 함성이 들렸다.
“토르! 토르!”
“토르~~~!!!”
“토르!! 토르!”
그렇게 도명의 구조 요청은 사람들의 함성에 완벽하게 먹혔다.
‘백구, 너 불편하다며. 이 자리 불편하다며. 그래서 내 그림자 코스튬 했다며. 그런데 그림자 주제에 어느새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 놀고, 나보다 더 잘 놀고 그래. 아주 파워 인싸잖아. 지금.’
“저 대표님이 지목하신 검은 토르가 매우 바빠 보이는데요.”
“아니, 잠깐 만요. 내가 불러올게요.”
“대표님, 눈치 없이 저쪽 흥을 왜 깨고 그래요.”
“아니, 나는 술을 잘 못 마십니다. 도화 씨는 술을 아주 잘 먹어요.”
“아니, 대표님 그러니까, 검은 토르 바쁘잖아요. 지금.”
다트 게임을 하는 무리에서 다시 토르를 부르짖는 소리가 울렸다.
“못 마시겠으면 그냥 넘기세요. 그냥 게임이잖아요. 대표님.”
“내가 결혼을 못 한다잖아요. 지금! 이게!”
도명이 자신이 뽑은 쪽지를 신경질적으로 흔들면서 말했다.
도명은 급한 대로 다른 흑기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직원들은 모두 다 같이 짜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한 기회를 엿본 간신 한 명이라도 나올 법한데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이들의 단합은 완벽했다.
결국 밀려오는 압박감에 도명은 술잔을 잡고 꿀꺽꿀꺽 삼켰다. 도명은 목이 타들어 가는 듯이 아파졌고 정신이 몽롱하게 붕 뜨는 것을 느꼈다.
다트 게임을 마치고 온 도화가 도명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도명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어, 도명 씨?”
“아…… 대표님이 술 이렇게 약한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도화 씨.”
“그러게, 그렇게 같이 오래 일했는데 그동안 왜 몰랐지? 와- 한 번에 훅 가시네.”
“아. 그러게. 그러고 보니 우리 대표님이랑 술 제대로 마신 적 한 번도 없지?”
“아…… 그러네.”
“도화 씨는 알았어요?”
“아, 네? 아. 몰랐어요. 나도 왜 몰랐지. 그동안 와인 같이 마셨…… 아.”
그러고 보니 도명과 같이 술을 마신 적은 많아도 그가 술잔을 완벽히 비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도명 씨 괜찮아요?”
도명의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도화의 얼굴이 비쳤다. 도명이 인상을 팍 쓰더니 도화의 목덜미를 잡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도화 씨는 내 그림자 아닙니까?”
“네? 아. 네.”
“그런데 그림자가 만물의 법칙을 깨고 어디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 놀고 그럽니까?”
“아, 잘못했습니다.”
도화는 도명의 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술에 취한 사람에게 맞장구를 쳐 주기로 했다.
“도화 씨가 감히, 우주의 법칙을 깬 겁니다.”
“아. 네. 네?”
“건방진 백구. 우주의 법칙을 깨? 한낱 백구가?”
“도명 씨, 정신 차려요.”
“앞으로 나한테서 떨어지면, 혼납니다.”
도화는 도명의 혼난다는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보통 그가 혼낸다는 말은 SM 플레이와 바로 직결되곤 했으니까. 도명은 지금 술에 취해 있었고, 그답지 않게 말실수를 할 확률이 아주 높았다. 전에 도명이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더 불안했다. 그의 술주정이라도 정확히 알면 대처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도화는 도명이 말실수를 할까 봐 악착같이 그의 옆자리를 지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화가 조금만 그의 곁에서 떨어지기만 해도 아까처럼 우주의 법칙을 깼다고 나무랐다.
결국 도화는 도명 대신 술 게임을 했고 도명과 달리 벌칙을 받아도 아주 멀쩡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도명처럼 취하지는 않아도 오줌은 마려운 법이었다.
“저, 도명 씨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도화는 이미 도명의 눈치를 보며 소변을 참을 만큼 참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하고 떨어지겠다고요?”
“아주, 잠시만요. 빨리 해결하고 올게요.”
“아주 잠시라도, 우주의 법칙이 어떻게 깨집니까? 우주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요.”
‘그놈의 우주의 법칙! 아까부터 지겨워 죽겠네! 하지만 나 진짜 쌀 것 같다고.’
“도화 씨 표정이 왜 그래요?”
“아. 사실은…… 화장실 가고 싶어서요.”
“아, 대표님 때문에 못 가는군요. 대표님은 저희가 맡고 있을게요.”
도화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도명이 다시 우주의 법칙을 논하며 도화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도화는 결국 힘으로라도 떨어뜨리고 도명을 놓고 갈까를 생각하다가 술에 취한 도명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도저히 그만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었다. 술에 취해 고삐 풀린 그의 혀가 무서웠다.
도화는 낑낑대다가 결국 도명을 부축해서 화장실에 같이 갔다. 도화가 한숨을 쉬며, 소변기 앞에 섰다. 술에 취한 도명은 도화의 옆에 나란히 서서 멍한 눈으로 화장실 타일 눈금을 보고 있었다.
“아. 도명 씨 술에는 대체 언제 깰 거예요! 환장하겠네. 아니 못 마시면 받아먹질 말지. 대체 도명 씨답지 않게 왜 그랬어요.”
도화는 이제 집에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도화 씨 나랑 결혼하기 싫습니까?”
“네?”
도화는 바지 지퍼를 급하게 올리다가 도명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분명한 우주의 법칙이 있는데도 나랑 결혼하기 싫은 겁니까?”
도명이 그렇게 말하고는 지퍼를 반쯤 올린 도화를 벽에 밀었다.
“아. 지금 여기 도명 씨 회사 공중화장실이에요!”
“왜 나랑 떨어지려고 하죠? 내가 피곤한 남자라서 미안합니다.”
도명이 도화의 몸에 얼굴을 묻고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도명 씨처럼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 완벽한 게 싫습니다. 내 섬세함이 싫습니다. 지금껏 공들여 길들여 날을 세운 감각을 뭉개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 어쩔 수 없이 도화 씨한테 섭섭한 게 많아요. 아주, 아주 많아요.”
“뭐가요? 설마, 내 방 만들어 달란 것 때문에요?”
“네. 그것도 있고. 그것 외에도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우주의 법칙이 있는데, 왜 나만 도화 씨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까? 도화 씨는 내 마음의 반도 못 따라오잖아요. 다리 길이만 황새 같고 뱁새가 따로 없습니다.”
‘아 또 나왔다. 우주의 법칙.’
“도명 씨, 내가 왜 도명 씨 마음의 반도 못 따라와요.”
“우주의 법칙을 깼잖아요.”
‘아, 내가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진지한 이야기를 시도하는 거지? 아니 역시 요새 반응이 묘하다 싶더니 대체 무슨 마음들을 쌓아놓고 사는 거야.’
“나랑 살고 싶어요?”
“네! 네!”
“두 번이네. 근데, 나한테 왜 그래요.”
도화는 도명을 품에 안고 그의 하얀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한숨 쉬듯 말했다.
“난 당신이 좋아하는 그 우주의 법칙이니 뭐니 하는 거에 균열을 낼 사람이라고요. 도명 씨는 당신이 사는 공간의 신이라서 모든 것에 법칙이 있잖아요. 하지만 난 어쩔 수 없이 그 규칙 밖에서 살다가 온 외부인이라고요. 알아요? 난 무섭단 말이에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행성 출신이고 그 사실을 당신이 못 견딜까 봐요. 겪기 전엔 사람은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어리석은 그림자야. 내 법칙은 단 하나밖에 없어. 나를 떠나지 마. 그게 내 모든 규칙이라고. 네가 어떤 모양으로 뻗든 내 알 바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