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 이후
도명은 도화가 길에서 뽑아온 기름나물 한두 줄기를 잘랐다.
“이걸 왜 잘라요?”
도화의 질문에도 도명은 말없이 가는 식물 줄기를 꼼꼼하게 원형으로 매듭짓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사람들이 중요하고 행복한 순간에 꽃을 왜 선물하는지 이해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관습이거니 하는 거죠.”
“음, 예쁘니까요?”
“저한테는 가장 찬란한 순간을 꺾어 간다는 뉘앙스가 더 강하죠. 그러니까 저한테는 찬란한 순간 어깨너머, 이별이 보이는 겁니다.”
“아. 그런가요?”
“하지만, 나는 좋은 정원사니까, 이 찬란한 순간 한두 자락을 나를 위해 빌려 주면, 다음 해에 더 많은 찬란한 순간들을, 적어도 다음 해에도 찬란한 순간을 무조건 만날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요.”
어느새 도명의 손에는 꽃으로 된 원형, 화관이 완성되어 있었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에 그 화관을 씌워 주며 그의 손등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눈을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도화 씨, 나와 다른 층 말고 같은 층에서 같이 살래요? 이사 가지 말아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깜짝 놀랐다. 도화는 도명과 완벽히 같은 공간에서 살 선택지 같은 건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지금 도명의 말을 들으니, 왜 그런 선택지를 완전히 배제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 생각에 섭섭해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같이 살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아……”
“도화 씨? 뭘 그렇게 놀라요?”
도명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만 벌리고 앉아 있는 도화의 뺨을 조금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아. 네. 네. 아. 네?”
“하아…… 같이 살자고요.”
“아. 네. 네?”
“아니, 뭘 얼마나 대단한 말을 했다고 사람이 고장이 나고 그래요. 같이 살 거예요? 안 살 거예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아들으면서 하는 말이에요?”
“아, 그러니까, 같이 살자고.”
“다행이네요. 한국말은 안 잊어버리고.”
도명이 여전히 얼빠진 도화의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당겨 입을 쪽 맞추었다.
“그러면, 오늘 같이 진행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우선, 제가 오늘 오전 업무를 처리한 후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주말에 대체 왜 일거리가 있는지 스케줄 잡은 저조차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쩌겠어요. 먹고 살아야죠.”
“아. 네.”
“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 이왕이면 도화 씨가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아, 저녁이요?”
“네, 저녁이요. 이제는 저녁 먹자는 말도 어렵습니까?”
“아, 그게 오늘 저녁은…… 진영이랑 선약이 있어서요?”
도화는 이미 결정 났다는 약속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상하게 말끝을 올렸다.
“아침까지는 아무 말 없었잖아요?”
“아, 네? 그게 지금, 도명 씨가 이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네요.”
“도화 씨.”
“네? 네?”
“뭐, 우리 둘 다 남자라서 결혼하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살자는 건데 설마 내가 도화 씨가 주워온 이 꽃으로 때우겠습니까?”
“아니, 이 꽃이 어때서요? 지금 나물이라고 무시해요?”
“아니, 도화 씨 반응이.”
“제 반응이 왜요?”
“됐습니다.”
도명의 말투가 어딘가 응어리져 있었다. 조금 전 이모님과의 추억 이야기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도화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일하러 가는 도명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 저.”
“말해요.”
“아, 혹시 지금 뭐, 화가 나거나 섭섭한 거 있어요?”
“그럴 게 뭐가 있습니까? 도화 씨가 나랑 살겠다는데. 진영 씨랑 맛있는 거 먹고, 조심히만 들어와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언제나.”
“차 조심이요.”
“네. 착하네요.”
도화는 외출 준비를 하며 급하게 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영아 오늘 웬만하면 나랑 만나 주면 안 되냐? 갑작스럽게 말하는 거긴 한데? 응?”
“아, 음 왜?”
“으아아아. 나 큰일 났어.”
진영은 도화의 말에 온갖 큰일이라고 불릴만한 일들을 떠올렸다. 도화가 저렇게 호들갑 떠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아. 그래. 알았어. 아니, 그 전에 무슨 일인데?”
“도명 씨가 나랑 결혼하재.”
도화가 여전히 머리 위에 도명이 만들어 준 화관을 쓴 채 정신 사납게 제자리를 뱅뱅 돌았다.
“아…… 응?”
“그래! 결혼!”
“……아, 그래 축하한다. 아니, 근데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나라에서 동성 간 결혼이 가능하냐? 그사이 법이 바뀌었나?”
“응? 아. 아니, 아니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나랑 결혼하재! 아니, 아니 동거하재.”
“아. 그래. 축하한다.”
“아, 어떡하지?”
“왜 하기 싫어?”
“아니! 아니!”
“아. 그래. 축하한다.”
진영은 도화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도명이 도화에게 동거를 제안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스무고개 같은 통화에 진영은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갔다.
“아니, 축하할 일이 아니야!”
“왜 하기 싫어?”
“아니! 아니!”
“아. 그래. 축하한다.”
그렇게 대화에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같은 대화가 완벽한 원을 이루어 반복되었다. 의미 없이 이 원이 두세 바퀴 더 돌자 결국 두 사람 다 전화 통화에 지쳤다. 두 사람 다 답답한 마음에 숨을 거칠게 쉬었다.
“만나서 이야기해!!”
“그래 만나서 이야기해! 네 멱살 좀 잡게!”
진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
도화와 진영은 룸 카페에 자리 잡았다. 도화는 만나기 전 난리 친 것이 민망해져 머쓱한 표정으로 머그잔을 쓰다듬었다.
“일단, 진정 좀 됐냐.”
“아, 응. 조금.”
“조금밖에?”
“아. 일단 도명 씨가 나한테 동거를 제안했어. 나 다음 달 말이면 도명 씨 집이랑 계약 끝나잖아. 그러니까, 이사 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내심 섭섭했는데, 도명 씨가 이사 안 가고 그냥 자기랑 살면 안 되냐는 거야. 정확히는 지하층에 살던 도명 씨가 내가 지금 사는 우리 집에 올라와 사는 거지. 언제나 지금 내가 사는 집 탐냈거든. 지하층과 달리, 채광이 좋다고. 그리고 난 도명 씨 얼굴에 홀려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 버렸고.”
“아니, 난 지금 가장 알고 싶은 게 네 기분이거든요. 일단, 그래서 싫으냐고!”
“싫을 리가! 좋아!”
“아니, 근데 왜 교통사고 당한 표정이냐. 너.”
진영이 피곤해진 얼굴을 쓸어 넘겼다.
“아니, 근데 무서워.”
“뭐가?”
“나랑 도명 씨랑 얼굴 본 게 8개월 전이었지. 다짜고짜 우리 집 올라와서 계약 연장 안 된다고 한 그 기준으로 말이야. 아 정확히 7개월 하고도 2주인가. 어쨌든.”
“나 전부터 계속 궁금한 게 있는데 두 사람이 나 몰래 사귄 지는 얼마나 됐냐?”
“어… 어…… 어……?”
도화는 진영의 질문에 식은땀이 났다. 그와 전쟁 같은 커밍아웃을 치렀지만 두 사람이 섹스 파트너로 시작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것도 SM 섹스 파트너 말이다. 그러니 진영은 자신이 간단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도화에게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복잡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정확히 달력에 표시해 놓고 세어 본 적은 없지만, 섹스 파트너를 맺은 기준으로는 약 4개월 반인 듯하고 사귄 지는 3개월쯤 된 것 같았다.
“아니, 누가 보면 도명 씨가 네 머리에 총알 박은 줄 알겠다. 그만 정신 차려. 어려운 질문 아니잖아.”
도화는 간단한 질문에 괜한 자격지심을 가졌다는 생각에 급히 정신을 차렸다.
“3개월 조금 넘은 것 같아.”
“아, 조금 빠르긴 하다. 네가 놀랄 만도 하지. 도명 씨 안 그렇게 생겨서 생각보다 엄청 열정적이네.”
사실 진영이 도화의 기분을 생각해서 조금이라고 표현한 거지, 그의 기준에서는 확실히 빠른 편이었다. 진영은 20대 초반에 사귄 수정과 결혼을 했다. 친구로 알고 지낸 지는 2년쯤 됐고, 친구에서 연인으로 이어진 후에는 7년 가까이 사귀었다. 그리고 역시 이 사람이다 싶어 결혼했다.
진영의 기준에서는 거의 이들은 폭풍 같은 사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0년을 연애 근처에도 가지 못한 도화야 처음 사귀어 보는 애인에 흥분해서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왠지 딱 봐도 연애 경험을 종류별로 도장 찍었을 것 같은 도명까지 이러는 건 신기하긴 했다.
진영은 그의 기준에서는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 것투성이지만 사실 혼인신고를 할 것도 아닌데, 동거 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이들에겐 결혼 자체가 옵션이 없으니 동거가 결혼만큼 중차대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아, 그런데, 아, 진짜…… 이 질문하면 분위기 어색해질 것 같은데, 못 참겠다. 혹시 네가 무서워하는 게, 그거냐?”
“그거 뭐?”
“아니, 그거.”
“아니 그게 뭔데?”
결국 진영이 도화의 머리를 콱 쥐어박았다.
“아 왜!”
“아니, 꼭 내 입으로 불알 친구한테 이걸 질문해야겠냐? 첫날밤이 무서운 거냐고! 섹스 말이야.”
“응??”
“아니, 그렇잖아. 사귄 지 3개월이면 당연히 끝까지 못 갔을 것 아냐. 동거라고 하니까 당연히 같은 공간에서 잠잘 거고 그걸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까 무서운 거 아냐?”
‘아니, 이 양반아. 우리 프로 변태들한테 무슨 막말이야.’
도화가 짜게 식은 얼굴로 진영을 쳐다보았다.
“했어?”
“뭘, 그런 걸 물어봐. 미친놈아.”
“아, 그래서.”
“했어! 했다고. 그만.”
“끝까지?”
“지구 끝까지. 새끼야. 그만.”
“아니, 그럼 구체적으로 뭐가 무서운 건데! 아오. 진짜, 답답하네.”
“아니, 우리 사귄 지 얼마 안 됐는데 동거는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 조금? 아주 조금.”
진영이 도화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너 결국 도명 씨랑 같이 살 마음의 준비는 안 된 거네. 한마디로. 아니 이걸 하나 말하는 데 소비한 시간이 얼마야.”
“도명 씨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난 지금 딱 이 거리가 좋거든.”
“아니, 그러면 그렇게 말해. 우리 너무 빠른 것 같다고. 지금 이게 도명 씨한테 숨길 문제야? 아니 두 사람이 3개월 된 연인이든, 3년 된 연인이든 네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면 안 된 거지. 그걸 도명 씨가 이해 못 하면 안 되는 거야.”
“도명 씨 얼굴 보고 그걸 어떻게 거절하냐. 그 잘생기고, 세상 혼자 잘난 사람이 나 이사 가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젖은 눈동자로 같이 살자고 하는데!”
“야,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정도는 했어야지.”
“도명 씨가 같이 살자고 했을 때 기쁘면서도 너무 무서운 거야. 여기로 버스 타고 오면서 생각했지.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걸까.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점 때문에 끌린 면이 있거든. 그래서 더는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무섭지 않았거든. 그런데 막상, 거리가 갑자기 바짝 좁혀지고 나니까 갑자기 무서워지네. 피할 공간 없이 한 공간에서 부대끼고 살다 보면 그 서로 다르다는 점 때문에 부딪히고, 그러다 보면 아주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게 무서운 거지.”
“그거야, 일단 같이 살아 봐야 아는 거지. 지레 겁먹을 건 뭐 있어.”
“나 이제 도명 씨 없는 삶이 상상이 안 돼. 너무 섣부르게 거리 좁혔다가 다 망쳐 버리면 어떻게 하지?”
“너 말하는 거 보니까, 동거하기엔 시기상조 같다. 네 얼굴 좀 봐.”
“내가 만약 아까 대답한 거 번복하면 도명 씨가 나한테 아주 크게 실망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대화로 잘 풀어야지. 껄끄럽다고 피할 문제는 아니잖아.”
“나 이제 이사 가잖아. 그 물리적 거리감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틈이 생겨 버리면?”
“누가 보면 네가 이민 가는 줄 알겠다.”
“왜 우리 동네는 적당한 매물이 없는 거지?! 딱 도명 씨 네 가게 건너편에 있는 그 집, 전세나 월세로 비면 딱 좋은데.”
“아니,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
“결혼, 아니 동거해야지. 뭐. 이러나저러나 불안한걸.”
“아. 그렇구나. 파이팅.”
‘아, 그래 답은 정해져 있고, 난 네 하소연 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구나. 그렇게 불안한 관계라고 하면 진지하게 서로에 대해서 고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내 말 같은 건 안 들리겠지. 이걸 왜 몰라서 내 머리만 지진 났지. 아 서윤 씨 보고 싶다. 얘는 왜 그런 편하고 어른스러운 사람 놔두고 왜, 폭풍 같은 사랑에 휘말려서 이러고 있냐. 그나저나 이 순진한 애가 도명 씨랑 그 짧은 기간 동안 이미 할 거 다 했다는 게 충격이다.’
진영은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던 수정하고 손잡는 것만 2개월 걸린 사람이었다. 아니 오히려 잘 알고 있던 친구라 어려웠던 것 같기도 했다. 결국 키스를 하는 것도 지나치게 오래 걸릴까 봐 수정이 진영의 멱살을 잡고 사귄 지 5개월 만에 했다.
거의 멱살 잡힌 채로 입술로 폭행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넌 좋겠다.”
도화가 진영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뭘?”
“아니, 서로 충분히 겪을 만큼 겪은 다음에 결혼한 거잖아. 거기다가 수정 씨랑 너랑은 성향도 똑같잖아. 그래서 결혼한 후 갑자기 불편한 거 없지?”
도화의 질문에 진영은 눈을 살짝 피하며 레몬차를 훌쩍거렸다.
“설마 있어?”
“동거, 아니, 결혼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아니, 뭐가 어쩔 수 없는데?”
“성격이 비슷해도 사람이 어떻게 완전히 같을 수가 있어. 우리도 차이가 있지. 그런데 결혼 전에는 그 차이들이 사소했거든. 근데 결혼하고 나니까 사소한 차이가 사소한 게 아니게 되더라고. 양말 뒤집는 문제 하나까지도 별거가 된다니까. 사이 좋다가도 벌써 몇 번을 싸웠는지 몰라.”
“아 세상에. 그래도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
“물론 당연히 그러지.”
“아니, 근데 왜 싸워?”
“동거가 이래서 딜레마야. 서로 기분 좋고 정서적으로 안정적이면 양보하고 이해 쉽지. 근데 세상 살다 보면 그게 완벽히 되냐? 어떤 날은 이미 밖에서 정신적으로 고갈되어서 온단 말이야. 혼자 살면 혼자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사람으로 지친 걸 풀 수 있거든. 그런데 동거란 건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날에도 둘이 반드시 같이 붙어 있게 되는 거거든. 그러다 보면 평소 잘 참았고 대수롭지 않았다고 여기게 된 것도, 도화선이 되어서 싸움이 된단 말이야. 물론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그 싸움도 결국엔 대수롭지 않게 되긴 하다만, 어쨌든 동거에 완벽한 평화는 없다.”
술술 나오는 진영의 말들에 도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아니, 표정이 왜 그래?”
“나, 나 어떡해?”
“아니,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내 말은 안 들려?”
“도명 씨 엄청 까다롭단 말이야. 겉모습만 완벽한 줄 알아? 집 안에서도 그래. 난 도명 씨가 완벽하고 조화로운 생활에 들어온 작은 곰팡이가 될 거야.”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그래. 그리고 네가 작을 수가 있냐. 으아아, 어쨌든 내가 잘못했어. 내가 눈치 없이 이 타이밍에 이상한 말이나 하고 그랬네. 아니, 현실적인 조언이지. 아니 그 정도로 무서우면 동거를 하지 말라고!”
“도명 씨랑 사는 거 무서워. 그런데 도명 씨랑 떨어지는 게 더 무섭단 말이야.”
진영은 다시 도돌이표를 찍는 도화의 고민에 간절하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근데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머리에 그 꽃은 뭐냐 대체.”
“응?”
“바보야, 네 머리 위! 하얀색 꽃 뭐냐고!”
도화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머리 위 꽃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도화는 자기가 지금까지 도명이 씌워 준 화관을 쓰고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이내 모든 걸 놔 버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 이거 도명 씨가 나한테 씌운 금고아야.”
“어? 아. 그 삼장법사가 손오공 머리에 씌운.”
“그래. 구속 도구.”
“아 그래. 축하한다.”
***
한편 도명은 혼자 간단한 샐러드와 주스를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때웠다. 식사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간결하고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도명은 냉장고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꺼내서 야금야금 먹었다. 도명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이렇게 단것을 섭취해 댔다.
도명은 바닥에 들러붙은 케이크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그리고 허전한 마음에 빈 포크를 입에 물었다.
도명은 혹시 하고 기대하며 창밖을 보았다. 백구가 꼬리를 흔들며 골목 어귀에 나타날 것 같았다. 하지만 백구는 정말 저녁 약속이 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도명은 손가락으로 고민 중인 평면을 두들겼다. 도화가 지금 사는 2층 평면도였다.
‘아, 백구가 와야 완성하는데.’
도면 위에는 도명 혼자만의 고민으로 빨간 선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도화와 둘이 살 공간이니 도명이 혼자 백날 고민해 봐야 진전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도화와 도명이 사는 집이 있는 골목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명의 가게 앞 전등이 차가운 색으로 변한 길의 표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화가 등장했다. 얼핏 보기엔 화려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겐 이 길의 주인공인 사람이었다.
진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 노느라 늦게 들어온 도화를 도명이 불러 세웠다. 도화를 불러 세우는 도명의 표정이 어딘가 좋지 않았지만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화는 저 사람 좋은 도명의 미소가 자꾸 신경 쓰였다. 언젠가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가면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도명이 부쩍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도화는 그게 신경 쓰였다. 도명이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신호니까.
“도화 씨 늦었네요.”
‘오늘 같은 날은 웬만하면 나하고 시간을 보내면 안 돼? 이미 선약 잡은 약속이 있다 해도 취소하면 안 됐나? 그래, 약속을 깨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저녁만 먹고 헤어졌어야지. 내가 지금 너랑 상의할 게 얼마나 많은데. 아니, 상의할 것이 없다 해도 말이야, 좀 같이 있어 줬어야지.’
“아. 네. 간만에 진영이하고 술도 마시고 오래간만에 노래방도 갔다 왔습니다.”
‘나한테는 아직 그 피아노 연주도 안 해 줬잖아. 그래, 피아노는 연습이 필요하니 그렇다고 치자. 나, 붙잡고 노래해 준 적도 없는데 진영 씨한테는 지겹도록 들려 줬겠네. 그 사람은 나만큼 감흥도 없을 텐데.’
“지금 시간이 많이 늦어서 지금 이야기하긴 좀 그렇고 내일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납시다. 출근 준비로 바쁜 건 아는데 이쪽도 일정이 만만치 않아서요.”
“아. 네.”
“아니면, 컨디션 괜찮으면, 지금.”
“아,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아, 그렇다면, 저 술을 좀 마셔서.”
“도화 씨, 술 센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닙니까? 전에는 회식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하아. 어쨌든 줄여요. 백해무익합니다.”
‘어떻게 오늘 같은 날 술을 먹고 들어오는 거지? 나만 오늘이 특별했던 건가. 아니면 역시 결혼이 아닌, 그냥 동거라도 제대로 된 반지라도 준비했어야 했나? 그래서 오늘이 그렇게 특별한 날처럼 느껴지지 않았나? 그냥 평소와 같은 애정 표현처럼 느껴진 거야? 아니, 싫어할까 봐 그랬지. 반지 끼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런저런 질문 할 거고 거짓말 서툰 도화 씨는 매번 힘든 거짓말을 해야 할까 봐.’
“네. 잘못했습니다.”
도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도명에게 말했다.
“올라가서 씻고 얼른 자요.”
“네.”
“하아,”
도명이 어둠 속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잘못했습니다.”
도명의 깊은 한숨에 도화가 제 발 저려 하며 다시 한번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게 아니고, 자기야. 사랑합니다.”
“아. 저도요.”
“정말요?”
“네!”
“그래요.”
‘자기야, 왜 대답이 한 번이야. 그리고 애초에 아, 저도요가 뭐야. 대체. 나보다 들뜬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크게 외쳐 줘야지. 애정 표현이 왜 이렇게 간소해진 거야. 자꾸 애정 표현 약식으로 할래?’
“그나저나 머리 위, 화관 계속하고 다닌 겁니까? 사람들이 꽤 쳐다봤을 것 같은데요.”
“아, 아. 네.”
도명의 질문에 도화가 얼굴이 빨개진 채 대답했다.
“왜요?”
“아, 그게 처음에는 실수로 하고 다니다가…….”
“실수로 하고 다니다가 뭐요? 왜 말을 하다 맙니까? 감질나게.”
“진영이가 이게 뭐냐고 지적하고 나서야, 제가 이걸 내내 머리에 쓰고 다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빼고 돌아다니는데, 손에 들고 다니기에도 망가질까 봐 불안하고, 그렇다고 가방에 넣자니 더 심하게 망가질 것 같아서 이도 저도 못 하다가요.”
“못하다가?”
“아, 애초에 쓰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망가지지 않게 집 안 어딘가 안전한 곳에 두고 왔어야 했는데요.”
“말이 왜 이렇게 쓸데없이 길어져요.”
“아, 네. 네. 역시 가장 안전한 곳은 내 머리 위다 싶어서요. 저는 또, 남들보다 키도 크니까 남들이 머리 위 칠 일도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도화 씨 머리를 화관 거치대로 쓴 겁니까?”
“그게, 제일…… 안정적이었다고요.”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았습니까? 생화를 머리에 쓰고 다니는 패션은 흔하지 않을 텐데요.”
도명이 내내 표정이 안 좋다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안 쳐다보겠어요. 더군다나, 저는 이런 꽃하고는 어울리지도 않는데요.”
“도화 씨가 왜 꽃과 어울리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름에 한자로 꽃까지 들어가는데요.”
“안 어울리죠. 이렇게 크고 촌스러운 남자인데요.”
“크고 귀여운 남자요.”
“네? 아. 네. 네.”
“도화 씨 성격에 잘도 주목받는 걸 참았습니다.”
“못 참아서 돌아오는 길에, 창피해서 술의 기운을 빌렸어요.”
“술기운에 완전히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저, 그 정도로 취한 적 없어요. 딱, 체면이 없어질 정도로만 마셔요. 그러니까, 너무 기분 좋아서 평소보다 사람들 시선이 덜 신경 쓰일 정도로만. 저 술 먹고 들어오는 거 많이 봤잖아요. 그걸 다 알면서 괜한 걱정 하네요.”
“그거, 드라이플라워도 아니고, 생화라서 금방 망가지는 건 알고 있겠죠?”
“아, 네. 그렇죠. 뭐.”
“어쨌든 화관 운반하느라 수고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 뭘 그렇게 일일이 재냐. 이렇게 귀여운데.’
***
다음 날 아침, 도화는 도명의 말대로 출근 한 시간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명의 가게로 내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삶은 감자 요리와 계란 프라이와 함께 방금 내린 아메리카노가 올라와 있었다.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잘 먹겠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집은 적어도 2달 반 후에는 짐 다 빼 줘야 해요. 안에 가구만 바꿔서 작업실에 필요한 집기들이 들어갈 거라서요.”
“아, 네. 그때 도명 씨 사업 계획서에서 봤어요.”
“그렇게 되면 제 짐은 어디로 올라갈지 알죠?”
“우리 집이요.”
“네, 우리 집이요.”
도명은 우리 집이라는 말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빙그레 웃으며 단어를 되새김질했다.
“사실, 지금 도화 씨가 사는 집 구조가 많이 비효율적이에요. 여기 도면을 보면 알겠지만, 이모님이 2층에 마당을 많이 만들어놨어요. 물론 2층에도 마당이야 있으면 좋지만, 건물 전체로 보면, 마당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차라리, 마당 면적을 줄이고, 내부 공간을 더 넓게 쓰는 편이 좋은 편이죠. 도화 씨 혼자 살 때야 좁다는 느낌 안 들었겠지만, 알다시피 난 이런저런 물건이 많은 편입니다.”
“이. 그래서 공사를 또 하시려고요?”
“원래, 5개월 전에 건축사하고 도면까지 다 나와 있었는데, 알겠지만, 계획에 변경이 생겼잖아요. 제가 버릇없는 2층 세입자하고 지나치게 사랑에 빠져서 말입니다.”
“아, 네.”
‘반응이 그게 끝이야? 정말?’
“어쨌든 도면을 보면 알겠지만, 어차피 전부터 마당 면적 줄여서 내부를 넓힐 생각이었어요. 이미 건물 허가 문제도 체크했고 해결했습니다. 다만 문제는 내부 평면입니다. 어제 고민을 해 봤는데, 원래 계획대로 가도 저는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침대는 제가 쓰는 것이 꽤 큰 편이니까 그거 올려서 같이 침대 공유하고, 욕실도 그렇고, 주방하고 거실도, 그냥 공유하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문제는 각 실의 크기 조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 네.”
도화는 도명의 말에 땀이 삐질 나왔다.
‘잠깐, 다 공유하는 거야? 아, 어차피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내가 뭐라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으아, 진짜 다 공유하는 거네. 아 진짜, 내 공간은 하나도 없구나. 털털한 내가 이런데 예민한 도명 씨는 정말 괜찮은 거야?’
“드레스 룸, 1m만 늘이면 충분할까요? 도화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아, 네? 네. 듣고 있어요.”
“도화 씨 집에 옷장 하나 있잖아요. 그거 하나에 옷이 다 들어가 있습니까?”
“아. 네.”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그 가로 길이가 800인 옷장에 옷이 다 들어가다니.”
“물론 계절 지난 옷은 상자 한두 개에 나와 있긴 하지만 어쨌든요. 도명 씨가 유난히 옷이 많은 편이긴 하죠.”
“그래도 요즘 도화 씨 옷 욕심 많이 생겼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1.5m 늘일까요? 그렇게 되면 침실 공간이 조금 좁아지긴 하는데 침실이야, 잠만 자는 곳이니까 조금 좁아도 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어때요?”
“아. 음. 네.”
“네라고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 좀 해 봐요. 공사란 게 한 번 하고 나면 계속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아, 꼭 옷장을 공유해야 할까요?”
“네?”
“아, 그게, 도명 씨 하고 제 옷하고 섞이면 서로 불편할 것 같은데요.”
“정확히 어떻게 불편해지는데요? 도화 씨가 자기 옷인 줄 착각하고 제 옷이라도 걸치고 나간다 이 말입니까? 음, 어느 정도는 신장 차가 있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될까요? 그리고 옷 입는 스타일도 다른데 착각할 일이 뭐가 있죠?”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라. 굳이 꼭 같이 공유해야 하나 싶어서요. 도명 씨는 정리를 완벽히 하잖아요. 저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서요.”
‘나 도명 씨 매뉴얼 따를 자신 없단 말이야. 도명 씨 옷 방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 와, 이 정리 변태! 이런 거였는데.’
“같이 규칙을 만들면.”
도명은 계속 자신이 말을 이어 갈수록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도화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계속 말을 이어갈수록 자신이 무언가를 강요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반영했으면 하는 사항 있습니까?”
“아, 네. 기존 구조 그대로 쓰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마당을 줄이니까 공간이 나오긴 하네요.”
“뭐, 하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 그게. 할 수 있다면 제 방을 가지고 싶은데요. 조그맣게라도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는 도화의 말에 작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백구 네가 네 방이 따로 왜 필요해?’
“그렇게 하려면 거실을 줄일 수밖에 없어요. 기존 구조가 사실은 이게 주방인지 거실인지 용도가 애매했잖아요. 그렇게 되면 기존 구조와 크게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아, 거실이요…….”
“네. 거실이요. 우리가 함께하는 공용 공간이잖아요. 같이 뭐든 할 수 있는 공간인데.”
“아. 그러니까 도명 씨는 이게 공용 공간이라서 이렇게 넓게 잡은 거예요?”
“네,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 거실이 넓으면 들어올 때 시야가 달라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도화 씨와 나의 공용 공간이잖아요.”
도명이 계속 도화에게 공용 공간임을 강조했다.
“아, 그런데요. 평면 보면요, 굳이 거실이 아니더라도 다 공용 공간이잖아요. 침실도 그렇고, 욕실도, 주방도 그렇고요. 다 공용 공간인데요.”
“그러니까, 도화 씨의 말은 완벽한 개인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말입니까?”
“아. 음. 그런 말은 아닌데, 아, 네 그래요.”
도화는 도명에게 이 말을 하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도화가 고개를 들어 도명의 표정을 보니 섭섭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기본 성격상 도명이 이런 것을 더 요구할 것 같은데, 반대 상황이 되자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근 듯 목 언저리가 답답해져 왔다.
“그러니까 도화 씨는 방을 하나 더 만들어서 거기서 도화 씨 침대하고,”
“DVD 장하고요.”
“네. DVD 장하고, 드레스 룸 따로 없이 지금처럼 옷장 하나면 충분하군요.”
“아, 그리고 작은 책상이요. 아. 이렇게 되면, 작은 방이라 해 놓고 작은 방이 아니게 되네요.”
도화가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도화 씨는 그 방 안에서 잠자고, 취미 생활하고, 간단한 작업도 하고, 다 하겠다는 거네요?”
도명은 애써 날카롭게 올라가는 목소리 톤을 억눌렀지만 불편한 심기가 역력했다.
“네? 아니요. 아니요. 밥은 방 안에서 먹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이랑 뭐가 다른데요?”
“네?”
“밥은 지금도 같이 먹잖아요.”
‘도명 씨, 나는 사실 지금이 딱 좋단 말이에요. 아, 근데 이 말도 못 하겠다.’
“아, 그래도 한 층에 사는데, 훨씬 많이 보는 거죠.”
“도화 씨가 사춘기 아들처럼 방문 걸어 잠그고 안 나오는데 뭘 많이 봅니까?”
“아, 네? 아니요. 누가 방문을 걸어 잠근다고 했어요?”
“그렇다는 게 아니라 비꼰 거죠.”
“아니 그냥, 어딘가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매일은 아니고요.”
도화는 진영이 말한 그 날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다 보면 생기는 불상사에 대해서 상상하며 말했다.
“내가 지금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뜻입니까?”
“네. 하지만 전, 도명 씨 낭만이 넓은 거실이라면 그것도 좋아요. 아니, 그냥 도명 씨가 평면에 대해서 하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니까, 한번 말해 본 거예요.”
“우리 서로 각자 이유로 혼자서는 충분히 많이 살아 봤잖아요.”
“아. 그렇죠.”
“근데 아직도 같이 있는 공간보다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낭만이 더 있네요.”
‘아니, 아니, 그건, 안전장치지. 임시 벙커 같은 거라고. 낭만 같은 게 아닌데요. 나도 도명 씨랑 있는 거 좋다고. 그런데 좋은 날 중에 궂은 날이 오면, 비 피할 곳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이 궂은 날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날이 하루쯤은 안 찾아오리란 법은 없잖아요. 아,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이야기 하면 왜 우리가 안 좋은 날을 만날 거라는 걸 상정하냐고 뭐라 할 것 같은데. 아 나 진짜 쓸데없이 걱정이 많나.’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넓은 거실도 좋아요. 그냥 B안을 말한 것뿐이에요. 왜 이렇게 예민해요. 도명 씨.”
도화가 기분을 풀기 위해 살살 웃으며 그의 뺨을 감쌌다. 도명은 도화의 예민하다는 말에 신경을 잔뜩 쓰며, 애써 불쾌한 기분을 억눌렀다.
“침실은 양보 못 합니다.”
“네?”
“도화 씨 물건을 제 물건과 따로 빼놓든, 자신만의 책상을 가지든 뭐든, 네 좋아요. 그런데 잠은 같은 침대에서 매일 자는 겁니다.”
“네.”
도명의 말에 도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는 도명의 말에 괜히 몸이 후덥지근해졌다. 할 거 다 한 사이인데도 매일 같은 침대를 쓴다는 말에 빡빡한 뒤가 녹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도명과 매일 한 침대를 쓴다면 뒤가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성행위 없이 그냥 같이 잔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도화는 언제나 도명의 품 안에서 자면서 안 달아오른 적이 없었다. 성행위 없이 그냥 서로 안고 잔 날은 밤새 몸이 몽정 속에서 붕붕 떠다녀 있었다.
저런 치명적일 정도로 섹시한 남자랑 자는데 그냥 담백하게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화가 도명과 침실을 공유하기 싫은 이유는 사람이 어느 정도는 담백하게 자는 날들도 있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도명이 침실을 무조건 같이 써야 한다고 이렇게 못 박아 넣으니, 더는 말이 안 나왔다. 더 항의하다간 이미 섭섭함으로 물든 도명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질 것 같았다.
“도화 씨의 방은 딱 이만큼입니다. 침대도 안 들어가는데 클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아. 네.”
도화가 순순한 표정으로 도명이 그린 사각형을 보았다. 이게 베란다인지 방인지 알 수 없는 옹졸한 크기였다. 정말 고시원처럼 작아 보였다. 대충 도면상 치수선 뽑힌 것과 문 표시된 것의 크기를 기준으로 어림잡아 보니 약 1.5평이었다.
뭐 확실히 고시원 방 한 칸보다는 좋을 것이다. 고시원은 그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해야 하니까.
도화가 이곳에 책상 하나 놓고, 장을 사서 개인 물품을 정리하면 확실히 고시원에 비하면 괜찮은 공간이었다. 또 이 방에서 나오면 도명이 꿈꾸는 탁 트인 거실과 제대로 된 4인 식탁을 놓아도 적당히 넉넉한 식사공간과 조리공간이 나왔다.
하지만 다른 공간들에 비해 얄밉게 작은 공간이 여기서 생활하다가 답답해져서 조금이라도 빨리 튀어나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화는 여기서 협의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도명이 자신만의 방은 만들어 줄 것 같으니까.
“그럼, 일단 이 방향으로 인테리어 업체랑 미팅하겠습니다.”
“아. 저 도명 씨. 공사비는 어떻게 할까요?”
“네? 내가 이 집을 도화 씨 명의로 바꿔 줄 것도 아닌데, 공사비를 도화 씨가 왜 신경 씁니까? 호구예요?”
“아니, 그래도 제가 사는데요. 갑자기 저 때문에 구조를 바꾸시는 것도 있고요. 아, 계약 새로 할까요? 다시 월세든 뭐든.”
도화의 말에 도명이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세게 튕겼다.
“까분다. 백구야.”
“네? 아. 그래도. 아! 아니면 혹시 새로 살 살림 있어요?”
“그냥 지하 방에 있는 거 그대로 들고 올라올 거예요. 도화 씨는 새로 들이고 싶은 살림 있어요? 말해 봐요.”
도명이 당장이라도 예산 계산을 할 기세로 물었다.
“아니요. 아니요! 전 그냥. 도명 씨한테 미안해서요.”
‘아니 미안한 사람이 평면에다가 나를 완전히 배제한 자기 방을 추가해? 아주 괘씸해 죽겠네.’
“정 신경 쓰이면 여기서 페이 지급하든가요.”
도명이 도면상에 침실로 정해놓은 곳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그러자 도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 표정 보니까, 진짜 침실에 철장 디자인 넣고 싶네. 아주 몸을 팔 준비 되어 있다고 얼굴에 다 쓰여 있습니다.”
“아니에요!”
“아니긴요.”
“아니, 근데 진짜 그동안 도명 씨 행적 보면 불안해서 그런데요, 진짜 할 건 아니죠?”
“침실에 철장 넣는 거요?”
“네.”
도화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설마요. 나도 사회 생활하는 사람인데 인테리어 업체 미팅에서, 내 남자 애인을 가두고 플레이할 철장 좀 설치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아, 그렇죠? 아니, 제 생일 이벤트 준비한 거 보면, 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남성용 빨간 하이힐 주문 제작한 것도 범상치 않아요. 도명 씨. 아니 그건 대체 어떻게 설명했을까? 거기다가 발목 부분에 체인 거는 것도 있는 수상한 물건을 말이야.’
“설마요.”
“다행이다.”
도화가 정색하는 도명의 표정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도화는 잊었다. 도화가 한강의 공개적인 꿀벌 커플을 부러워하자 도명이 아무 짓도 안 할 거라면서 도혜 프로젝트를 진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
도명은 도희 부부가 원장으로 있는 영어, 수학 학원에 들어섰다. 학원에 들어서자 홀에 작은 북 카페가 있어서 수업이 끝나면 영어 원서를 읽거나 못다 한 숙제를 하는 곳이 있었다.
도명은 북 카페에 설치된 조명이 전체적인 공간 분위기와 안 맞아서 언제 한번 바꿔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명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본 목적인 도희를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도명이 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도착했어. 어디야?”
도희는 원장실로 오라고 말하려다가 자기가 홀로 나오겠다고 했다. 도희는 도명을 발견하자 그녀 특유의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오빠를 와락 껴안았다. 역시 평균적인 남매치고는 도희의 애정이 살가웠다. 여학생 하나가 도희와 도명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서정아. 왜? 뭐 물어볼 거 있니?”
“쌤, 정우 쌤한테 이를 거예요.”
“뭘?”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정우 쌤 있는데 그러면 안 되죠.”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다. 우리 오빠야. 선생님하고 안 닮았어? 내 이름은 도희고 오빠는 도명이고.”
“아.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해요. 말 그대로 묘하게.”
도희는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이 반쯤 포기한 상태로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은 남매다 보니 당연히 닮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보기 좋음에 있어서 도명이 모든 유전자를 다 가져간 느낌이었다. 물론 도희도 미인이었지만 도명만큼은 아니었다.
“저, 선생님, 오빠분은 애인 있어요?”
“있어요.”
도명이 학생의 말투를 따라 하며 답했다.
“왜 있어요?”
“애인이 있게 생겼잖아요. 그냥 막 생겨요.”
도명이 약간의 거짓말과 허세를 보태가며 말했다.
“아. 그렇겠죠.”
학생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시간이 많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요.”
“뭘 기다려요?”
“선생님 오빠가 애인하고 헤어지는 시간이요.”
아이의 말에 도명이 도희를 쳐다보며 요즘 애들은 뭐가 이렇게 당돌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 2년만 지나면 미성년자 아니에요.”
“잘생긴 아저씨가 중요한 거 하나 알려 줄게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에요.”
“오빠.”
“아니, 아저씨. 따라 해 봐요. 아저씨.”
“잘생기면 오빠예요.”
“아니요. 그냥 잘생긴 아저씨예요. 아무리 멀쩡하게 생겨도 내 나잇대에서 너를 연애 상대로 보면 도망가요. 2년 후든 뭐든.”
“왜요?”
“겉만 멀쩡한 덜떨어지고 도태된 놈이니까. 아니 오히려 이것저것 멀쩡한데 그러면 더 빨리 도망가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선생님 오빠는 괜찮은 사람 아닐까요?”
“아니요.”
도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도명과 도희가 원장실에 앉았다. 도희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인기는 여전하다. 아주 살기 피곤하시겠어요.”
도명은 그런 도희의 말에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은 이런 자신에 대한 자잘한 관심을 모아서 환을 만든 다음 도화의 입에 넣어 주고 싶었다. 그러면 도화가 지금보다 더욱 맹목적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도명이 도희에게 손에 든 쇼핑백을 넘겼다. 쇼핑백을 열어 보니 반찬 통이 있었고 반찬 통 안에는 연어 장이 있었다. 연어 장 외에도 어느 정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반찬으로 먹으라고.”
“세상에! 정말 고마워. 오빠. 직접 담근 거야?”
“응, 도화 씨하고 같이 이런저런 밑반찬 만든 김에 들른 거야.”
“요즘도 도화 씨랑 잘 지내나 봐.”
도희의 말에 도명은 묘하게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 도희의 남편, 정우가 수업을 끝내고 인사차 원장실에 들렀다. 정우가 도명에게 예의를 차렸다. 도명 역시 형식적인 예의를 차렸다. 도희가 오빠가 반찬 만들어 온 거 보라며 반찬 통을 열어 남편의 입에 연어 장을 넣어 주었다.
“맛있어! 맛있어요. 형님. 세상에.”
정우의 반응이 뭔가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다는 듯이 지나치게 감동에 겨워 있었다. 그의 과한 반응에 도명은 그의 결혼 생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도희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는 재능이 없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요리 실력은 요리하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실력이 느는 면이 컸다.
하지만 도희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반복 학습이 되지 않았다. 도명의 어머니, 숙영이 맞벌이로 바쁠 때는 도명이 도희의 밥을 챙겨 줬고, 도명이 독립한 후에는 숙영이 생활의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주방에 음식이 마를 일이 없었다.
도희는 결혼 후에야 오랫동안 안 하던 요리를 하기 시작했고 결과가 갑자기 좋게 나올 리는 없었다.
“수고가 많아요.”
도명이 정우를 향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정우가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아냐. 나, 점점 늘고 있어.”
“뭐, 내 동생이 요리에 능숙하지 않은 건 제 탓이 큽니다. 도희가 주방에 설 일이 없게 만들었죠.”
“아, 진짜 어쩐지. 손맛이 좋으시네요.”
정우가 도명이 가져온 반찬 통들을 소중하게 안으며 말했다.
“도희야. 차라리, 사서 먹지그래? 일하는 사람이 집밥 매번 고수하는 것도 힘들다.”
“사서 먹으면 비싸. 오빠도 일하는 사람이 매번 해 먹잖아.”
“나는 뭐, 취미 생활이고. 나도 누가 강요하면 안 해.”
“저, 형님 사실은 견디기가.”
정우가 말을 꺼내자마자 도희가 환하게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창처럼 푹 찔렀다. 그러자 정우가 공격당한 옆구리를 감싸며 벽에 눌어붙었다. 그 모든 장면에도 불구하고 도명은 조금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도희가 타 준 커피를 호록 마셨다.
“견디기 힘드시면 시간 될 때마다 화원에 놀러 와요.”
“네?”
“요리 가르쳐 줄게요.”
“아, 도희야 들었지? 어서 배우자. 형님 진짜, 요리 잘하시네요. 남자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고 엄청 신기하네요.”
“아니, 도희 말고, 매제가 와요.”
도명이 그를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 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견디기 힘든 사람이 와서 요리를 배워야죠. 도희는 살 만한 것 같은데.”
도명의 말에 뼈가 있었다. 내 여동생 요리 평가질 할 시간에 네가 내 여동생 밥상이나 차리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정우가 깨갱대며 그러겠다고 했다. 정우는 학생이 불러서 다시 원장실을 나갔다.
“역시, 영원한 내 편. 우리 오빠.”
도희가 도명을 향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도화 씨는 어때? 요리 잘하는 편이야?”
“못하는 편. 하지만 수습 역할은 잘해. 사람이 성실해서 하라는 대로 잘 따라오거든. 아 참, 나 여기 그냥 반찬 전해 주러 온 건 아닌데.”
“그럼?”
“시간 괜찮아?”
“아니 뭘 하려고?”
“그냥, 수다 좀 떨려고. 별 건 없고.”
“수업은 한 시간 반 후에 있어.”
“수업 준비는?”
“일단 이번 거는 준비랄 것도 없어. 항상 하던 거라.”
“아 참, 도화 씨 참고로 너처럼 수학 잘한다.”
“아 그래?”
“응. 섹시할 정도로 잘해.”
“아이고 팔불출 오빠가. 애인 자랑하려고 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일단 도화 씨랑 나랑 동거하기로 했어.”
“세상에! 아니 잠깐, 이미 같이 사는 거 아냐?”
“층이 다르잖아. 아예 같은 층에서 사는 거지. 이번엔.”
“그거 자랑하러 온 거야?”
“아니. 한탄. 지금 내가 너한테 하는 이야기는 듣고 해결 방법 알려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수다.”
“그래. 그냥 수다. 일단 도화 씨도 같이 살고 싶대.”
“잘됐네.”
“근데, 반응이 묘해.”
“묘하다니?”
“마치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뭐 어쨌든 대답은 yes니까, 딴지 안 걸고 넘어가려고 했어. 하아, 뭐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그런데, 그런 반응 이후 내가 문제인 것인지 도화 씨가 문제인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거슬리게 하잖아.”
“예를 들어서?”
“내가 같이 살자고 고백했는데 그날 친구를 만나더라고. 솔직히, 갑자기 없던 약속 잡은 느낌 드는데 이건 뭐 증거가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그날 술 먹고 밤늦게 들어오지를 않나. 하아, 다음 날에는 같이 살 집 평면을 보는데 자꾸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 마치 최대한 조금이라도 나하고 접점을 없애기 위해서 그 작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더라. 그 후부터 다 그런 식이지. 나만 몸 달아올라서 사업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이런저런 준비하고, 도화 씨는 미적지근한 온도로 끌려오고. 아니, 사람 기분 상하게 해 놓고, 그 특유의 표정으로 왜 나, 도명 씨말 순하게 잘 듣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듯이 빠져나간단 말이야.”
도명은 밀려오는 스트레스를 참는 듯 좁혀 오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듣는 도희의 눈치를 살피다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듣기만 해.”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
“뭐, 내가 예민하다고?”
“응? 아니. 아니. 아니 오빠야 원래 예민했으니까 그게 새삼스러운 건 아닌데.”
“내가 동거 상대로서 대체 어디가 빠지는데. 잘생겼는데 집 있지, 돈 잘 벌어오지. 살림까지 잘하지.”
“오빠가 완벽하긴 하지.”
“그래. 알아. 바로 그게 문제인 것 같아.”
“응? 완벽한 거?”
“그래.”
도명의 말에 도희는 오빠의 자화자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잘난 오빠지만 너무 얼굴이 두꺼워 보였다.
“내가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에다가 예민하니까 온종일 같이 붙어 있고 싶은 건 아닌 거지.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만 붙어 있고 싶은 거야.”
“아, 음. 그런 걸까? 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오빠가 그렇게 섭섭해할 필요는.”
‘아 맞다. 듣고만 있으랬지.’
“그런데 난, 도화 씨랑 살면서 그 완벽주의와 타협할 생각이거든. 나도 내가 피곤한 거 알고 있으니까. 도화 씨 헐렁한 거 뭐든 귀엽게 봐 줄 수, 아니 귀엽다고.”
“그래. 서로 노력하면.”
“그 개복치가 지레 겁먹고 있는 거야.”
“도화 씨한테 그렇게 말해 보면 어때?”
“그건 말할 수 있어.”
“그래. 그래.”
“그런데, 이 예민함은 내가 어떻게 안 돼. 난 정말 고백 후 도화 씨 반응이 미적지근했든 뭐든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단 말이야. 그런데 도화 씨 작은 반응 하나하나에 곱씹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 도화 씨가 이것 때문에 숨 막힌다고 하면 내가 할 말이 없어져.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나야말로 이 예민한 감각 좀 무뎌지게 대충 뭉개고 싶어.”
“아니, 근데 오빠, 도화 씨도 오빠 예민한 거 알고 사귄 거잖아.”
“사귀는 거하고 동거하고는 다른가 보지.”
“일단 도화 씨와 진지하게 오빠 그동안 섭섭한 거 다 말해 봐. 혼자 그렇게 힘들어하지 말고.”
“그랬다가 도화 씨가 역시 난 같이 살기 피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
‘아이고! 오빠!! 도화 씨만 개복치가 아니라 쌍 개복치였네.’
“아니, 그래도 역시 이건 다른 길이 없어.”
“난 도화 씨 없이 못 산단 말이야.”
‘아이고오! 호구 오빠. 우리 툭 건드리면 깨질 연약한 오빠.’
도희가 도명의 머리를 안쓰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도명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생각나겠지만 지금은 자신의 감정에 취해서 자신이 여동생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도화가 이삿짐을 싸 들고 나가는 모습만 자꾸 생각났다.
“아니, 그 말 하면 헤어질 각이야?”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동거는 무산되지 않을까?”
“도화 씨, 이번에 같이 살지 않으면 아주 멀리 가?”
“집값 때문에 서울 외곽으로 이사 가겠지. 아무래도 도화 씨 나잇대에서 아무리 알뜰하게 돈을 모아도 살기 괜찮은 서울 전세 구하는 건 힘들지. 도화 씨가 부모님께 기댈 처지도 아니고.”
“누가 보면 도화 씨 강원도로 이사 가는 줄 알겠다.”
“아, 내가 매물 구해 볼까? 우리 동네에서 매물 한번 구해 보고 도화 씨 예산으로 안 되면 내가 보태 주면 될 것 같은데. 아, 경기도권은 안 돼. 도화 씨는 꼭 우리 동네에 살아야 해.”
‘아니, 오빠 벌써 상상 속에서 도화 씨한테 동거하자고 한 거 차였어. 정신 차려 오빠!’
“오빠가 너무 의욕 과다로 도화 씨 무조건 잡아당기는 거 아냐? 도화 씨는 또 오빠 실망하게 하고는 싶지 않으니까 오빠가 느낀 게 맞는다면 미적지근하게 끌려다니는 거고. 아니 어쨌든 이것도 내 예상일 뿐이니까 대화를 해! 오빠.”
“아.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속 시원하다.”
‘아니,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내가 대화하라고 하니까 갑자기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도망가는 거잖아. 그렇게 차이는 게 무섭냐고. 오빠!’
“그리고 나 사실 하고 싶은 거 있어.”
“뭐?”
“결혼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동거 기념으로 사람들 불러서 축하받고 싶어.”
“아. 하면 되잖아. 아. 또 도화 씨 신경 쓰는 거야?”
“싫어하겠지.”
“아니, 일단 물어봐.”
도희는 아까부터 자기가 같은 말만 본의 아니게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역시 다른 적절한 조언은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이게, 솔직히, 도화 씨 좋아하라고 하는 이벤트가 아니야. 도화 씨가 이제 완전히 내 것이라고 공식 석상에 그의 얼굴에 내 이름을 박고 싶은 욕구라서. 도화 씨는 지금 아무 생각 없겠지. 상대방이 얼마나 집요한 욕구를 누르고 있는지 모르겠지. 알면 역시 도망치고 싶을 거야.”
***
도명은 회의실에 앉아 이미 확정된 사업 계획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아, 도화 씨 때문에 순서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일을 멈추게 하는 건 역시 미친 짓이지. 그래. 미친 짓이야.’
“아, 대표님, 혹시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아니, 보고 계신 거 찢을 듯이 노려보고 있어서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혹시 변경 사항 있으면 지금이라도 말씀하셔야 일에 차질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희가 감당 가능한 변경 안에서 말입니다. 이번에 정원기획 건으로 쓴 계약서만 너무 많아서, 차질 생기면 진짜 우리 모두 힘들어집니다.”
“아. 네 압니다.”
“정말 아시는 거죠?”
“네.”
도명은 미련을 완전히 버리는 듯 사업 계획서를 아예 뒤집었다.
“아 저 그리고 대표님.”
그가 도명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큰일 아니긴 한데, 기분 안 좋으시면 다음에…….”
“아니요. 말하세요.”
“아니, 다름 아니라, 일주일 후면, 핼러윈이잖습니까. 그게 직원들끼리 사무실에서 핼러윈 파티하기로 했거든요.”
“아, 하세요. 회사 안에서 담배 피우는 것 외에 제가 사무실을 어떻게 사용하든 웬만하면 모른 척하거나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던 것 같던데요. 뭘 그걸 그렇게 어렵게 말해요.”
“그때쯤이면, 마감도 끝나고 나름, 시간도 괜찮고.”
“네. 여러분이 마감만 잘 마치면 그 후로 뭘 하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죠.”
“대표님은 핼러윈 안 챙기시나요?”
“네. 굳이 챙겨야 하나요?”
“아. 그러시구나.”
그가 문을 열고 돌아서려고 하자 대표실 밖에 있던 사람들의 손이 촉수처럼 튀어나와 그를 다시 대표실로 밀어 넣었다. 그 수상한 움직임을 도명이 못 볼 리가 없었다.
“뭐, 또 제비뽑기에 걸렸나 보네요. 대체 그들에게 어떤 미션을 받은 겁니까? 나 참, 내기들 참 좋아하네.”
“대표님 핼러윈 때 오실 생각 없으세요?”
“아. 굳이요?”
“네. 굳이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왜요?”
도명이 어디 한번 설득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우리가 나름 젊고 신선한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잖아요. 요즘 소비자들은 그런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회사를 또, 좋아하고요. 그것도 일종의 좋은 홍보 전략 중 하나로서.”
그의 말에 도명이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유리가 그의 무능과 소심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대표실에 난입했다.
“대표님!”
“아니, 뭐가 그렇게 비장합니까?”
도명이 피곤하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엄지로 빙빙 돌렸다.
“우리가 고작 제 친구가 다니는 E사에게 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제 친구가 거기에 다니는데 이 SNS를 보세요!”
유리가 도명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SNS 안에서는 회사 안에서 파티를 하고 있었다. 도명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핸드폰 속 신나 보이는 사람들을 휙휙 넘겼다.
“아, 음 그래서요?”
“우리는 더 세련되게, 그 이번 연도 화젯거리인 그 드라마, ‘정원이 내게 왔다.’의 그 유명한 정원에서 핼러윈 파티를 하는 겁니다.”
“아. 네. 잘들 놀아요. 하하, 거기 정원인 거 알죠? 그런 거 고려해서 조심히만 놉시다. 불붙을 만한 거 철저하게 배제하고요.”
“그리고 거기에 우리는 결정타를 날리는 겁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잘생긴 대표가 있는 아름다운 회사!”
“아. 고작 유리 씨 SNS 장식하려고 나를 파티에 행사용 풍선처럼 세울 생각입니까.”
“그러면 왜 안 되나요! 저희가 대표님 자존심을 세워 주듯이 대표님이 일개 사원 자존심을 왜 못 세워 주시나요. 저도 멋진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SNS에 자랑질 하고 싶다고요!”
너무나도 당당하고 패기 넘치는 유리에 모습에 도명은 오히려 두 손을 들었다.
“하아, 뭐 참석만 하면 되나요? 뭐, 사진도 한 장 적당히 찍고.”
“네! 대표님이 그래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이고 뭐고, 난 그냥 여러분들이 어깨에 지나친 힘 좀 빼고 날 좀 가만히 놔 줬으면 좋겠습니다.”
“대표님 이리로 오시죠.”
유리가 깍듯한 자세로 도명을 대표실 밖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대표실 밖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줄지어 도명의 뒤를 따랐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마치 왕의 대관식 같은 모양새였다. 불길한 예감이 도명의 몸을 엄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명이 이끌려 나온 곳은 어떤 다트판 앞이었다.
“아, 그러니까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대표님, 핼러윈이잖습니까?”
왕을 잡아먹는 간신 상이 도명의 옆에서 정중히 아뢰었다.
“핼러윈다운 복장을 하고 나오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아서 잘 입고 올게요.”
“우리 직원들에게는 대표님에 대한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잘생긴 얼굴에는 그것에 맞는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도명의 손에 다트 화살이 정중하게 올라갔다. 도명은 그냥 확 뒤집어엎을까 하다가 이미 도화에게 신경을 다 써서 쇠약해진 그가 한숨을 낮게 쉬며 다트 화살을 잡고 대충 날렸다.
“81점이시다.”
점수가 올라가고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81점에 해당하는 쪽지를 열었다.
“나야! 내가 81점을 적었어!”
그녀의 말에 모두 부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명의 눈이 살벌하게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당첨됐다는 사실에 기뻐서 살벌한 대표의 원한을 보지 못했다. 쪽지가 열리고 그녀의 환상 역시 열렸다.
“토끼……입니다. 대표님.”
“그러니까 뭘요.”
‘쓸어 버린다.’
“토끼 복장을 하시고 파티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역시 내가 이들의 열정 착취를 덜 했나.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도명은 그들의 스트레스가 오히려 이런 이벤트들에 대한 기이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렇게 회사를 못 떠나는 유령이 될 수밖에 없다면 이 회사를 즐거운 곳으로 만들자고 생각한 것이다.
“아 혹시, 개복치 님, 아니 도화 씨는 안 올까요?”
“그 겁 많은 성격에 오겠어요?”
도명이 뭘 빤한 걸 묻느냐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물어보기라도 하면 안 될까요? 뭐, 모두 큰 기대는 안 합니다. 다만, 다들 연인 혹은 지인들도 오는데 대표님만 혼자 있기에는 좀 그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