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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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약

일요일 아침, 도화는 아침부터 동네를 돌며 조깅을 하기로 했다. 그러자 도명은 동네 도는 김에 동네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오라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적당히 흐른 후, 도명은 가게에 들어선 도화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화의 손에는 뿌리째 뽑힌 식물이 들려 있었다. 식물의 뿌리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간 흙이 화원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도화 씨, 내가 바게트를 사 오라고 했지, 누가 풀 뜯어 오라고 했어요?”

“아 맞다. 바게트.”

도명은 바게트 사 오라는 미션을 완전히 잊어버린 도화가 황당해서 입꼬리를 비죽거렸다.

“아. 그게 걷다가, 길가에 얘가 피어 있는데 너무 예뻐서요.”

“예쁘면 그냥 한두 송이만 꺾어오지 뿌리째 뭉텅이로 뽑아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도명 씨 절화 싫어하지 않나요? 꽃 꺾어 왔다고 도명 씨한테 혼날까 봐요.”

“싫어하지만, 지금은…… 이게 더 황당하고 싫네요.”

“아.”

도화가 도명과 자신의 손에 들린 꽃을 빠르게 번갈아 보다가 낑낑거렸다.

“버, 버리고 와요?”

“네.”

도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이미 이렇게 뿌리째 뽑아 버려서요. 이제 와서 사정이 변했다고 버리면 너무 미안하잖아요.”

“미안하면 그 자리에 다시 심고 와요. 잠깐, 설마 남의 화단에서 막 뽑아 온 건 아니죠? 그게 사람들이 원예식물로 키우는 종은 아니긴 한데.”

“아니에요! 저 그렇게 상식 없는 사람 아니에요.”

“평소 도화 씨는 상식이 있지만 갑자기 확 돌변해서요. 저 아직도 안 잊고 있습니다. 도화 씨가 남의 택배 뜯어 보고, 집까지 무단침입한 거요.”

“으아. 제발 그것 좀 잊어 주세요.”

“평생 안 잊고 우리 자기 몰지각함을 놀려 먹을 겁니다. 그나저나 바닥에 계속 흙 떨어지는 그거 계속 그렇게 들고 있을 겁니까?”

“아니, 화원에 흙 떨어지는 게 뭐가 대수라고요. 여기 온통 흙 천지인데.”

“내가 정한 곳에만 흙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도명 씨, 나 이거 키우고 싶어요!”

도화가 도명에게 떼를 썼다. 도명은 미간을 구기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기야! 자기는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원래 자리에 다시 심고 와요. 잘 살던 애를 마음대로 뽑아 와서 사랑 운운하는 거예요?”

“그런 걸로 치면 도명 씨 화원에 있는 식물 대부분 외국에서 온 애들이라면서요. 아주 강제로 이민시켜놓고 저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죠.”

“나는 원래 못돼 먹는 사람이고 도화 씨는 착한 사람이잖아요.”

“나 막 그렇게 착하지 않아요. 키우고 싶어요!”

“아니, 식물 한 번 안 키워 본 사람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걸 막 뽑아오는 겁니까?”

“저한테는 도명 씨가 있잖아요.”

도명은 도희가 도도를 데리고 왔을 때 기분이 생각났다. 데려온 건 다른 사람인데 결국 돌보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될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도화는 화분 안에서 예쁘게 잘 크는 꽃을 보고 예쁘다 말하면 그만이었다. 도명은 앞으로의 미래가 빤히 보여 혀를 차 댔다.

“저는 이 꽃이 너무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도화가 하얗고 아주 작은 꽃들이 우산 모양으로 모인 걸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 꽃이 얼마나 갈 거라 생각합니까? 보니까 오래 펴 봤자 1개월 남았네요. 지금은 8월이고 7~9월 동안 꽃을 피우는 애니까요. 꽃이 사라지고 입만 남아도 지금처럼 예뻐해 줄 자신 있어요?”

“우와. 얘가 누군지 알아요?”

“일단은 기름나물속이네요. 기름나물도 종류가 다양해서 정확히 어떤 기름나물인지는 저도 더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요. 보통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황식물입니다.”

“구황식물이요?”

“흉년이나 기근이 심할 때 농작물 대신 먹는 식물이요.”

“얘, 먹을 수 있어요?”

“어린잎 부분은 나물로 먹을 수 있고 뿌리는 약용으로 쓰입니다. 중국에서는 뿌리를 인삼 대용으로 쓰기도 하고요.”

“왜 먹을 게 길에서 막 나요?”

도명은 도화의 바보 같은 질문에 피식 웃었다.

“식물은 일반 사람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애들도 쓸모가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좋은 애인데 우리가 키워요. 네? 네?”

도명이 이마를 짚으며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신은 호구임이 분명했다.

도명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식물을 화분에 옮겼다. 도화는 옆에 쭈그려 앉아서 도명이 하고 있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꽃이 이렇게 예쁜데 나물이라니!”

도화가 도명의 옆에서 생긋생긋 웃으며 말했다.

“도화 씨, 그나저나 도화 씨 집에 둘 거죠?”

“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두려고요.”

“나 없이 잘 키울 수 있어요? 이미 충분히 강한 식물이지만, 오히려 사람 손에 들어가면 맥을 못 추는 경우 많아요. 대부분 사람들은 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거든요.”

“저한테는 도명 씨가 있잖아요.”

“한 달 정도는 괜찮겠죠. 계단 하나만 올라가면 잘 자라고 있는지 제가 보살펴 줄 수 있으니까. 혹은 도화 씨가 잘못 키우는 걸 옆에서 교정해 줄 수도 있고.”

“한 달 정도는요?”

“도화 씨, 요즘 다시 부동산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집 계약 기간 한 달밖에 안 남아서요.”

“아. 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그나저나 마음에 드는 매물은 있어요?”

“적당히 타협해야죠. 제가 저금한 돈에서 전세 계약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은 또 이 동네가 아니더라고요.”

“여기가 작은 동네긴 한데, 그래도 서울이니까 이런저런 조건 맞추다 보면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게 좋긴 하죠. 아무래도 서울은 집 조건에 비해서 비싸니까.”

“적당히 욕심 빼면, 옆 동네에는 타협할 수 있는 매물이 있더라고요.”

“어차피 내가 차가 있으니까, 서울이나 서울 외곽이나 그렇게 시간 차이 얼마 안 나요. 주거 환경에서 지나치게 타협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도화가 복잡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얽어 들어갔다. 도명이 차로는 얼마 차이 안 난다고 했지만 도명과 최대한 가까이서 살고 싶었다.

도명이 이 건물을 유산으로 받자마자 건물 전체가 사업 계획서 안에 들어간 터였다. 도명이 살고 있는 지하층은 정원기획팀과 식물 세밀 화가들의 작업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도화가 살고 있는 집은 도명이 자신의 주거로 지정해 놓은 곳이었다. 도화는 우연히 그의 집에서 그 사업 계획서를 보고 그가 이 계획을 틀기에는 리스크가 크다는 것을 알았다.

“나 참.”

도명은 뭐가 그렇게 어이가 없는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

“제가 불쾌할 만한 일이었단 걸 알아서 다행입니다.”

“아, 네.”

도명의 말에 도화는 테이블 상판의 클래식한 타일 무늬를 훑기만 했다.

“불쾌한 일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같이 식사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 꼭 그렇게 노력하실 필요는…….”

도화는 도명이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불쾌한 관계는 할 수 있다면 모른 척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우리 이 앞에서 거의 매일 볼 수밖에 없는 사이에요. 남은 7개월, 길다고 하면 긴 기간인데? 안 그래요?”

“짧다면 짧은 기간이기도 하죠.”

“사람에 따라 그렇죠. 9년 5개월의 시간이 있었는데 정든 사람의 장례식에도 못 올 만큼 거리를 좁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별 것 아닌 시간이겠네요.”

***

도명은 자신이 7개월이 길다고 하면 긴 기간이라고 말해놓고 그 7개월이 지금의 이런 감정을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도화가 어디 멀리 외국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차로 가면 한 시간도 안 될 거리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침전될 수가.

“이모님 유언 중에 도화 씨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아. 진짜요?”

“뭐, 간단하다면 간단한 유언인데요, 이모님이 도화 씨한테 한 약속, 함부로 깨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약속이요?”

“집 계약 말이에요. 남은 계약 단축시킨다거나 하는 조건 등으로 새로운 협상을 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약속을 지키라고요.”

“왜요?”

“사람의 마음에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사람이 애써 마음을 정리하는데 협상이니 뭐니 하며 괜히 마음 어지러뜨리지 말라고. 착한 사람이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에는 착한 사람들 마음을 덜 다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뭐, 솔직히 저야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모님 몇 안 되는 유언이니까,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도명의 이모인 미영은 도명의 어머니와 15살 차이 나는 언니였다. 도명의 어머니는 집안의 늦둥이였고 맏딸인 그녀는 거의 엄마처럼 여동생을 돌봤다. 나이 80이면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더 못 사는 것이 후회가 될 줄은 몰랐다.

“아. 네.”

도화는 도명의 말에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올라왔다. 일개 세입자고 뭐고,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내 마음이 신경 쓰인다면 그냥 장례식에 찾아갈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깊은 후회가 도화의 혈관 속에 타고 돌았다. 갑자기 10년 가까이 지낸 집에서 이사를 가야 하는 도화의 섭섭한 감정과 불안감을 생판 남인 그녀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명 씨 앞으로는 다른 유언 없으셨어요?”

“어차피 준 재산, 이걸 현금화하든 뭐든 알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2, 3년간은 이 집을 팔지 말라는 말 정도요. 어차피 낡은 건물 네 식대로 바꿔도 상관없으니 공간의 좌표만은 놔두라고. 저도 어차피 팔 생각은 없었어요. 이 집 싫어하지는 않았으니까.”

“싫어하지 않았는데, 왜 안 왔어요? 예전에 도명 씨하고 이런 이야기 했을 때는, 그저 굳이 올 이유가 없었다고 했었는데.”

“사실은, 굳이 피한 거죠. 싫어했다기보다는 두려웠어요. 이 공간의 좌표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말이에요.”

“왜요?”

“이모님이 동네에서 슈퍼 하시기 전에는 뭐 하시던 분인지 안 궁금해요? 아주 어마어마하신 분인데?”

“궁금해요.”

솔직히 도화는 그분이 슈퍼를 운영하시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다른 직업 같은 건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장사를 하셨을 거라고, 막연하고 무심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도화는 지금 이 순간, 이 무심함조차 미안해졌다.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왜 그 인생의 다양성과 깊이를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을까?

“이모님은 강력계 형사셨어요. 그래서 괴물이 된 사람들의 수 없이 많은 심연을 일상적으로 들여다본 분이죠. 조직폭력범부터, 연고 없는 사람 토막 내서 인신매매하는 사람들, 유명한 연쇄살인범도 잡으시던 분이셨어요. 사람이 어떤 걸 지나치게 많이 겪으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직관이 생기죠. 그러고 보니 공간의 좌표가 딱 여기네. 높이는 다르지만. 이쯤이면 우리 집 기준으로 소파가 놓여 있을 거예요.”

“네. 대충 그런 것 같아요.”

“네. 소파는 제 것으로 바뀌었지만 같은 자리에 이모님이 쓰시던 촌스러운 꽃무늬 소파가 놓여 있었어요. 딱 이 자리에 말입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지하실에서 영화 자주 보셨거든요. 아주 근사한 개인 영화관이었죠. 중3 때 영화를 보며 그 소파에 앉아 있는 이모님에게 제가 물었죠. 이모, 나 괴물이에요? 이 간단한 질문을 하는데 현기증이 나고, 속이 메스꺼웠어요. 그때 취미이신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내 얼굴을 보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말없이 내 머리를 헝클였죠. 그리고 바로 영화로 시선을 옮기시고는 영화 속 배우들 연기에 털털하게 웃을 뿐이었죠. 방금 정말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모님은 그 당시 영화에 빠져 있어서 기억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짧은 그 순간,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내 눈동자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었어요. 이모님은 저한테 아무 말씀 안 하셨지만 저는 그때 이모님의 반응으로 제 마음속 불안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내가 유일하게 온몸으로 믿고 사랑하며 의지했던 도도가 죽었고, 내 마음도 도도와 함께 이 집 뒷마당에 묻었어요. 그 후로 어쩐 일인지 이 공간의 좌표 안에 들어오는 게 무서워졌어요.”

“왜요?”

“같은 좌표 안에서 이모님에게 그때와 다른 답을 들을까 봐요. 네 그래요.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이었죠. 그렇다고 이모님을 안 만나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언제든지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그분과 만나면서도, 이 좌표에 그분과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내심 이모님에게 다시 내 마음 안을 들춰 보이기 겁이 났던 것 같아요.”

“도명 씨, 그분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그것에 대해서 안 물어봤어요?”

“어떻게 물어봐요. 만약 내가 원하는 대답을 못 듣는다면, 이제는 영원히 다른 답을 들을 기회는 없을 텐데요.”

“아, 그랬겠네요.”

“하지만 임종 전 내 눈을 다정한 눈으로 들여다보셨죠. 생각해 보면 이모님은 언제나 그렇게 절 쳐다봤는데요. 저는 그걸 내내 몰랐어요.”

“저도, 몰랐어요…….”

도화가 후회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리는 도화의 머리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이 도명 자신을 위한 것인지 도화를 위한 것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내 눈을 들여다보시곤, 넌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더 외롭구나, 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으로 온 지 약 7개월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어요. 이모님이 내게 주신 유산은 이 벽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었어요. 돌아올 마음의 좌표가 이모님 유산이었어요.”

도명은 이렇게 말하고는 곧 눈물을 조용히 떨어뜨릴 것처럼 안구가 뜨거워졌다. 도화가 도명의 눈가를 손가락을 훔쳤다.

“아, 울보 아닙니다. 아직 안 울었어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도명 씨 표정 봐요. 이미 숨넘어갈 정도로 잔뜩 운 걸로 쳐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예요.”

“이모님은 너무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같은 동료들끼리 형사 생활을 오래 못 버틸 거라고 했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다정함을 잃고 감정에 무뎌지는 거죠. 그런데 이모님은 누구보다 괴물들을 상대하는 일을 잘 해냈어요. 그리고 여전히 다정하셨죠. 다정함을 바탕으로 그 누구보다 굳건하고 강하셨어요. 그런 강함은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또 숭고하죠. 나는 그게 너무 아득한 곳에 있어서 흉내 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이 오만한 유도명이 말이에요.”

“네,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도명 씨 표현대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걸 거예요.”

“그래서 생각한 게 나빠도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거였어요. 중학교 때 영화를 봤는데 거기 나오는 악당이 참 나빴거든요. 그런데 매력적이니까 사람들이 그 악당을 참 좋아하더라고요. 결국 인생의 지향점으로 잡은 건 가까이 있는 이모님이 아니라, 영화 속 싸구려 악당이었죠.”

도명은 도화가 길에서 뽑아온 기름나물 한두 줄기를 잘랐다.

“이걸 왜 잘라요?”

도화의 질문에도 도명은 말없이 가는 식물 줄기를 꼼꼼하게 원형으로 매듭짓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사람들이 중요하고 행복한 순간에 꽃을 왜 선물하는지 이해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관습이거니 하는 거죠.”

“음, 예쁘니까요?”

“저한테는 가장 찬란한 순간을 꺾어 간다는 뉘앙스가 더 강하죠. 그러니까 저한테는 찬란한 순간 어깨너머, 이별이 보이는 겁니다.”

“아. 그런가요?”

“하지만, 나는 좋은 정원사니까, 이 찬란한 순간 한두 자락을 나를 위해 빌려주면, 다음 해에 더 많은 찬란한 순간들을, 적어도 다음 해에도 찬란한 순간을 무조건 만날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요.”

어느새 도명의 손에는 꽃으로 된 원형, 화관이 완성되어 있었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에 그 화관을 씌워 주며 그의 손등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눈을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도화 씨, 나와 다른 층 말고 같은 층에서 같이 살래요? 이사 가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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