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9)

16811098818363.jpg

빨간 생일

도명의 본사 안, 회의실에서 40분 정도 되는 회의 시간이 끝났다. 도명이 검토한 자료에는 빨간 줄과 구체적인 메모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무자비한 수정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명이 지나치게 서둘러 일하는 것을 싫어해서 잡지 출간 간격이 다른 회사보다 뜸했고, 오히려 무자비한 수정사항이 나오는 날에는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사람은 결국은 같은 일이라도 당장 다가올 시간을 더 크게 느낀다. 작업량은 엄청 늘어났어도, 적어도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도명이 일부러 수정사항을 체크하는 날에는 직원들이 사무실 밖 공기를 맡을 수 있도록 방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무자비한 수정에 대한 방어 정도나 원성이 낮아진다.

적당한 휴식을 취한 뇌는 같은 일을 또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환기도 돼서 능률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완벽함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욱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이들이 피곤을 모르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임을 기억하고 부려먹어야 하는 것이다.

도명은 회의가 끝나자 회의실 탁자 위에 쿠키와 홈 메이드 주스를 올려놓았다. 별안간 펼쳐진 간식 타임에 모두들 서로의 얼굴과 도명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표님이 봐도 오늘 수정은 너무하셨죠.”

“아니요.”

“……아. 네 죄송합니다.”

“이중 헤테로, 그러니까 이성애자 남성 여러분은 잠깐 남아 주겠어요? 뭐 여유 있으면 이성애자 여성분도 괜찮습니다.”

도명의 말에 모두가 떼고 있던 엉덩이를 붙였다. 새삼 도명은 자신이 성 소수자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그냥 립스틱 색 좀 골라 주겠어요? 철저히 남자 이성애자 관점에서 말입니다.”

도명이 그렇게 말하며 5가지 색의 립스틱을 하나하나 꺼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붉은 색이 존재했다. 그나마 도명이 화장품 가게에서 세련됐다고 생각되는 것을 추려 온 것이다.

“아는 여성분에게 선물하려고요?”

“아니요. 내가 바르려고 합니다. 잠깐이지만.”

도명의 뜬금없는 말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니까 우리 대표님이 왜 자기가 바를 립스틱을 고르는 건데. 모두의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아, 설명이 필요합니까?”

“네. 꼭이요.”

“이야기가 길 텐데요. 대충 골라 주고 다들 칼퇴근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지금 햇볕도 좋은데.”

“아니요. 칼퇴근보다 지금 대표님 기행의 이유가 더 궁금한데요. 대표님 성적 취향을 확장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럼 뭔데요?”

“내일이 백구, 그러니까 도화 씨 생일입니다.”

“도화 씨라면.”

“개복치요.”

“아, 대표님 애인이요!”

“네.”

“그러니까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너무 대놓고 나, 사랑하고 있어요. 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두 꿀벌이 시작이었습니다.”

***

도명과 도화는 주말을 맞아 한강 둔치에서 피크닉을 하기로 했다. 볕이 잘 드는 잔디밭 위에 간단한 텐트를 치고 쨍한 오렌지 색 돗자리를 깔았다.

약간은 헐렁한 회색 니트에 하얀색 면바지를 입은 도명이 선글라스를 쓴 채 누워 있었다. 분명히 잔디 색과, 돗자리, 옷 색깔까지 맞춘 게 분명했다. 햇볕 좋은 날의 피크닉에 어울리는 콘셉트를 잡아서 말이다.

도화는 파란색 줄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포장해 온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도명은 분위기 좋은 음악을 들으며 레모네이드를 홀짝거렸다.

“우리, 주말을 맞아 놀러 온 게이 커플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도화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도명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주말을 맞아 놀러 온 게이 커플 맞잖아요.”

도명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맞긴 맞는데.”

“주변 둘러봐요. 모두 자기 행복에 겨워 우리 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써요.”

“노래가 남자 둘이 한강 놀러 와서 들은 노래가 아닌 것 같아요.”

“남자 둘이 한강 놀러 와서 듣는 노래란 건 뭔데요.”

“음, 모르겠어요.”

“그것 봐요. 여기서 텐트만 부자연스럽게 들썩이지 않는 이상 아무도 우리 신경 안 써요.”

“근데, 사람들이 자꾸 이쪽 쳐다보는데요.”

“그거, 내가 잘생겨서 그래요.”

도명이 빤빤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도화 역시, 도명이 잘생겨서 넋을 놓고 보긴 하지만 자기 입으로 저러면 얄밉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는 게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보고 있는 건 도화와 도명, 두 사람이 아니라 도명이었다.

“그러게 적당히 꾸미고 나와야죠! 이 느낌 있는 선글라스는 대체 어디서 구입한 거예요?”

도화가 도명의 선글라스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 선글라스는 분명 백화점 물건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나름 피크닉이라고 편하게 입고 나온 겁니다.”

하긴 도명의 기준에서는 편하게 입고 온 것이 맞았다. 중간중간에 힘쓰는 일도 많은 화원에서 언제나 정장의 정석대로 입고 있는 그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시선 받고 사는 거 안 피곤해요?”

“어딜 가나 이렇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냥, 아무 생각 없습니다.”

‘얄미워!’

도화가 도명을 얄밉다는 듯이 쳐다보자 도명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자신의 옆에 눕혔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참으로 변덕스러워서 그의 잘생김이 얄밉다가도 이렇게 바로 옆에 잘생김이 있자 표정이 노곤하게 녹았다.

도명의 목덜미에서 향기로운 허브 향기가 났다. 이게 사람 냄새인지 요정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이러고 있으니까 더 주말을 맞아 놀러 온 게이 커플 같아요.”

“그만요. 한 번만 더 그 말 하면 주말을 맞아 한강 공원에서 SM 플레이하러 온 게이 커플 같아 보이게 할 거니까요. 하하, 농담 같죠?”

“아니요.”

“다행이네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눈치가 있어서요. 그만 다른 사람들 시선 의식하고 주변이나 구경해요. 그럼 자연스러운 한강 시민 같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네.”

도명이 단언하듯 말하자 그제야 도화는 한강 둔치의 풍경을 보기 시작했다. 한강 둔치에는 도명과 도화 같은 연인들만 온 게 아니었다. 가족도 오고, 친구도 오고, 다양한 사람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도화는 노랗고 검은 줄무늬가 있는 커플티를 입은 연인이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와. 도명 씨, 저기 봐요. 꿀벌 지나간다. 꿀벌.”

“아. 그렇군요.”

도명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화의 시선이 계속 한 쌍의 꿀벌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꿀벌의 꽁무니가 희미해지고 나서야 시선을 뗐다.

“왜요? 부럽습니까?”

“아니요. 그냥 신기해서요. 저렇게 대놓고 나 연애한다고 티 내는 기분이란 어떤 기분일까요?”

“글쎄요. 도화 씨는 어떨 것 같습니까?”

“음, 저도 굳이 저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적어도 나도 누군가에게 엄청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철없이 자랑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도화 씨 같은 개복치가요?”

‘그냥 한강에 둘이 피크닉 왔을 뿐인데, 피크닉 나온 게이 커플 같아 보인다고 노심초사하는 백구 네가?’

“그럼요. 단지 그렇게 할 엄두를 못 낼 뿐이죠. 회사에서 자꾸 약 올린다니까요. 걸핏하면 얼굴 퉁퉁 부어서 오니까 걸핏하면 헤어지자고 하는 여자랑 사귀고 있는 거 아니냐고. 저만 엄청 목메고 있는 것 같다고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자꾸 울컥하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연애사를 확 말하고 다닐 수도 없고 진짜 짜증 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네?”

“무슨 말인지 알았다고요.”

“도명 씨 방금 말 왠지 불길한데요.”

도화는 왠지 모르게 진득함이 배어 나오는 도명의 알았다는 말이 불길했다. 너무나도 간단한 말인데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하면 뭐가 이렇게 불안할까.

“불길할 게 뭐가 있어요?”

“저, 도명 씨 보통 이런 고민 말할 때 들어 달라는 거지, 해결해 달라는 뜻은 아닌 거 알죠?”

“알고 있어요.”

“커밍아웃 싫습니다. 이번 진영이 건은 잘 됐지만, 그건 진영이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거고요. 무슨 이야기인 줄 알죠?”

“백구야, 알았다니까.”

***

“일명 도순이, 아 이건 촌스러운데, 어쨌든 도화 씨가 커밍아웃의 위협을 안 당하면서 사랑받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생일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사무실로 꽃과 미역국, 생일 선물을 보내는 것이죠. 그래서 필요한 게 전형적인 헤테로 여러분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목적은 도화 씨 사무실 안 헤테로들의 배를 아프게 하는 거니까요. 일단 이 생일 축하 카드에 도순…… 아 일단 이름 좀 그럴듯한 걸로 지어 봐요. 도화 씨가 저인 줄을 알아차리게 도 자 돌림으로요.”

“도희!”

“그거 제 여동생 이름입니다. 제 여동생이 보낼 줄 알고 도화 씨 이상한 방향으로 심각해집니다.”

“도실이.”

“기각.”

도명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명이 이렇게 공을 던지자 직원들은 방금 전 업무 회의보다 더 열정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했다.

“도윤.”

“묘하게 중성적이지 않아? 개복치, 아니 도화 씨, 놀라겠어.”

“도빈.”

“그것도 좀, 중성적이잖아.”

“도화.”

“그거 개복치 님 이름이잖아요. 자작 생일 축하 극이냐고. 너무 슬프잖아요.”

그는 상상해도 슬픈지 콧등을 움켜쥐었다.

“역시 도순이가 최고인 것 같아요. 누가 봐도 여자잖아요. 촌스럽긴 해도, 이 정도는 돼야 도화 씨가 놀라지 않지.”

“아니요. 그게 최선입니까?”

깍지를 낀 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도명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도혜.”

“좋아요. 일명 도혜 프로젝트는 사무실의 이성애자 남자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그런 매력적인 여성임이 선물 포장지, 꽃, 그리고 입술의 색깔 등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일단 카드에 입술 도장을 찍기 위해 립스틱부터 골라야 하겠죠. 사람들은 당연히 도화 씨의 연인이 여인일 거라 생각하겠지만 인식에 쐐기를 박는 어떤 상징이 필요하죠.”

다수의 디자이너들이 껴 있는 그 모임에서 립스틱 색깔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했다.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데는 이 청순한 복숭아색이지!”

“세상에, 도화 씨 나이가 있는데 그런 소녀 이미지에 끌리기엔 이미지가 좀 그렇죠.”

“뭘 소녀까지 가. 그냥 청순한 이미지지.”

“에이, 복숭아색은 소녀 이미지가 강하죠. 그래요. 소녀까지는 아니더라도 20대 초중반 여인의 이미지가 강하죠. 도화 씨 상대로 어울리는 여성은 30대의 초입에 들어선 성숙한 여인의 향기죠. 그리고 성숙한 여인의 향기에는 버건디만 한 건 없습니다.”

“아니, 여러분, 일단 우리는 도혜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난 대표님을 상상해야 하죠. 대표님한테 어울리는 색깔은 이 원초적인 레드가 옳습니다. 정열적이고 솔직한 도시 여자인 거죠. 치명적인 나쁜 여자인 것입니다. 직장에서 편집부 피 말리는!”

“솔직한 의견 감사해요.”

도명이 말했다. 도명의 말에 ‘직장에서 편집부 피 말리는’이라는 단어를 쓴 직원은 금세 말린 건포도처럼 쭈글쭈글해졌다.

“하지만 차갑고 정열적인 도시 여자, 도혜가 준비한 건 미역국입니다. 뭐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어떤 확실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미지는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상투적이어야 메시지가 확실한 법이죠. 차갑고 정열적인 도시 여자와 미역국이 웬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 살색에 가까운 색도 괜찮지 않나요? 이런 미묘한 뉘앙스가 어떤 면에서는 더 성적이라고요.”

“디자이너 같은 특수한 직업도 아니고 일반적인 헤테로 남자가 이런 미묘한 색에서 뭔가를 느낄 것 같습니까? 어쩔 수 없이 헤테로 남자에겐 강렬한 레드인 겁니다!”

회의는 점점 격앙되어 갔다. 도명은 그들을 향해 말없이 웃으며 생각했다.

‘아, 회의를 이렇게들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구나. 내가 아직 이 사람들의 열정을 덜 착취했구나.’

끝날 것 같지 않은 회의에 도명은 말없이 버건디에서 선명한 레드가 조금 더 섞인 립스틱을 골라 입술에 발랐다. 그리고 준비한 종이 카드에 입술을 살짝 벌리고 찍었다. 그리고 열띤 토론이 한창인 그들에게 카드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카드에 입술을 찍고도 도명의 입술에는 립스틱 색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상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좀 섹시한 여인이 생각납니까?”

사람들이 도명과 카드를 번갈아 보였다.

“네. 대표님.”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잘생긴 사람은 남자가 립스틱을 찍어 발라도 참으로 보기 좋았다. 더군다나 상대방 표정이 지나치게 뻔뻔하기까지 하면 이상할 것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도명은 만년필을 들어 생일 축하 메시지를 썼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도화 씨, 사랑해. / 유도혜.」

필기체를 정식으로 배운 도명인지라 간단한 메시지도 뭔가, 세련된 느낌이 났다.

***

다음 날 아침 생일인 도화는 아침에 별다른 말이 없는 도명의 반응에 내심 섭섭한 기분이었다.

분명 전에 넘긴 보고서에 생일까지 적어 놓았는데, 잊었나. 도화는 도명이 자신과 처음 맞는 생일이라서 미처 못 챙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괜히 서운해하지 말고 오늘 생일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나 하자고 점심시간쯤에 말할 생각이었다.

도화가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시작하려는 찰나, 꽃 배달이 왔다. 난데없는 꽃 배달에 다들 어수선한데 정작 꽃의 주인은 평소에 그렇듯이 업무 외의 사건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이 대리! 이거, 이 대리 앞으로 온 건데.”

“그럴 리가요.”

“맞는데?”

도화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붉은 장미꽃 100송이를 받아 들었다. 장미꽃을 두 팔 가득 안아 들자 황홀한 꽃향기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갑자기 온 엄청난 꽃 배달에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장미꽃과 카드를 받아드는 도화에게로 향했다.

장미꽃 바구니 가운데에는 장미꽃처럼 붉은 레드 와인과 검은색 타이가 들어 있었다. 세련된 붉은 타이 끝에는 D라는 이니셜이 붉은색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온통 빨갛고 자극적인 선물이었다.

여전히 모두의 시선은 도화에게로 향했고 도화는 차마 카드를 열 수 없었다. 이런 선물을 보낼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도화의 시선이 타이 끝에 물든 D라는 이니셜에 고정되었다. D는 도화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도명을 상징하기도 했다.

‘으아, 도명 씨, 역시 그때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었잖아! 회사로 이런 화려한 이벤트를 하는 게 어디 있어?’

“뭐야. 뭐야. 이 대리 빨리 카드 열어 봐.”

“나중에 확인할게요.”

도화가 식은땀을 흘리며 카드를 재빨리 주머니 안으로 넣으려고 했다. 그때 친밀함과 무례함의 차이를 모르는 상사가 도화의 카드를 낚아챘다. 그리고 재빨리 카드를 열었다.

“와, 이 대리, 애인 장난 아니네.”

“네? 뭐. 뭐가요.”

“도화 씨 애인, 뭐 하는 사람이야? 와, 카드에서까지 섹시한 향기 나.”

그가 도명의 입술 자국을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남자 입술이 찍힌 카드를 보고 야릇한 상상을 했다는 걸 안다면 나중에 뒷목이라도 잡을 것이다. 도화는 겨우 카드를 탈환하여 덜덜 떠는 손으로 카드를 열었다. 그리고 카드 안 내용을 보았다.

립스틱으로 찍어 바른 입술을 골똘히 보니, 그가 잘 아는 입술이었다. 그리고 도혜라니, 도명이 벌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벤트에 도화는 놀란 가슴 와중에 웃음이 픽 하고 퍼졌다.

‘아이고, 이 또라이가.’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화의 손이 무거웠다. 과시용으로 받은 장미꽃 100송이와 점심때 먹은 미역국을 담은 보온병, 회사 동료들과 먹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와인 등을 들고 왔다.

와인은 거의 병밖에 안 남은 수준이지만 도화는 그 병조차 기념품으로 따로 보관하고 싶을 만큼 소중했다. 다들, 업무 중에 반주라도 안 된다고 하더니 도수는 낮아도 비싼 와인이라는 동료 중 한 명의 말에 조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애썼다.

도화는 이왕이면 도명과 먹고 싶었지만 그가 와인을 굳이 회사로 보낸 건 회사 동료들과 와인으로 생색내면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받으라는 뜻일 것이다. 또, 도명은 집에 항상 와인을 쌓아 두고 사는 편이니까 집에 가면 도명과 다른 와인을 마실 수도 있었다.

사실 도화에게 동료들의 생일 축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애인이 모시조개를 넣고 아침부터 정갈하게 끓인 미역국에 감탄할 때도, 아무리 책상 밑에 욱여넣어도 커다란 부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미의 강렬한 빨간색은 그가 얼마나 애인에게 중요한 사람인지 하루 종일 상기시켰다.

도명이 거짓말할 때는 그냥 말을 최대한 아끼라는 조언을 한 덕분에 도화는 말없이 하루 종일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도화는 하루 종일 이상하게 들뜬 기분 덕분에 집을 나설 때보다 양손 무거운 느낌은 성가셨지만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진영에게도 중간에 전화가 왔었다. 생일 축하한다고. 매년 도화의 생일만은 다른 사람과의 모든 만남을 미뤄뒀던 진영이었다.

도화가 이번엔 들뜬 표정으로 애인과 지내게 됐다고 하니 눈치껏 빠져 줬다. 그는 오래간만에 자기도 아내와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나 할 거라고, 경쟁하듯 사랑꾼 흉내를 내었다.

도화의 발걸음이 도명의 가게 현관에 들어섰다. 사람이 내뿜는 냄새도, 공간이 내뿜는 냄새도 모두 달짝지근하게 느껴졌다.

“저, 도명 씨.”

“왔어요? 고기 구웠어요.”

“아, 아까 낮에 생일 파티해 줬잖아요.”

도화가 뭔가 하루 종일 자신의 생일로 도명의 고운 손에 습진 생길 것 같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쯤 되면 도명의 생일에 채석장에서 돌이라도 지고 와서 도명의 이름을 새긴 돌탑이라도 쌓아 줘야 하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도화는 도명처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런저런 재주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도화가 자신 있는 건 힘쓰는 것뿐이라 할 수 있는 상상이라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상뿐이었다.

“그건 그냥 쇼윈도 생일 파티고 진짜 생일 파티해야죠. 참고로 이것도 생일 이벤트는 아니에요. 내가 생일 아니더라도 스테이크는 해 줬잖아요. 매일 해 주지는 않았어도. 그냥 이건, 좀 신경 쓴 저녁 식사에 생일 케이크 얹은 것뿐입니다. 본 행사는 저 밑에서 합시다.”

도화는 본 행사는 저 밑에서, 라는 말에서 뭔가 소름이 돋았지만, 도명이 적당한 온도로 잘 달궈진 불판 위에 고기를 얹고 굽기 시작하자 그 냄새에 불길한 기분을 잊었다.

식탁에는 이미 스테이크와 같이 먹을 샐러드, 간단한 식전 빵 같은 것들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새 와인도 올라와 있었다.

“그나저나 직장 동료들이 눈치껏 케이크는 사 왔습니까?”

“네?”

“저는 절화에 대해서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커다랗고 강렬한 붉은 색의 꽃바구니를 보낸 줄 압니까?”

도명이 도화가 힘들게 들고 온 커다란 장미꽃 바구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음…… 보라고요?”

“네. 그 정도 크기는 되어야 시선을 단번에 끌죠. 그리고 도화 씨가 사귀는 도혜라는 여인이 그 정도로 도화 씨에게 열정적이고 또 이만큼 어마무시하게 섹시한 연인이라는 걸 상징하기도 하죠.”

“도명 씨가, 어마무시하게 섹시하긴 하죠.”

도화가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장미꽃 표면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네?”

도명은 고기 굽는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 와중에도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도화의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분명 방금 귀에 단 소리가 들렸는데요.”

“들었는데 지금 다시 한번 더 들으려고 못 들은 척하는 거죠?”

“네. 칭찬은 분명한 어조와, 적당한 목소리 크기로 상대방에게 들리게 해야 하는 겁니다. 도화 씨는 항상 그게 부족하더라고요.”

“몰라요.”

“어떻게 만날 모른대.”

도명이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으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와인을 보냈으면서 같이 먹을 케이크 같은 것을 안 보낸 건 오늘 도화 씨 생일인 거 이제라도 알았으면 누구든 알아서 케이크 정도는 사 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직장 동료들이 눈치껏 케이크 사 왔냐고 아까 물었어요.”

“네. 윤정 씨가 사 왔어요.”

“아, 그분이요. 다행이네요. 그래서 그냥 얻어먹기 미안해지게 비싼 와인 보냈는데.”

도명이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놓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뭘 그런 것 때문에 비싼 와인을 보내고 그래요.”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노력과 돈에 인색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노력과 돈을 써도 사람이란 게 뜻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

“그럼요. 그들의 배에 내 비싼 와인만 들어갈 수도 있죠. 하지만 원하는 게 있으면 투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죠. 수고가 들어갔는데 뜻대로 안 되면 좌절하지 말고 수고의 방향을 검토해서 재설계해야죠. 그나저나 데면데면했던 회사 동료들의 생일 축하를 받으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아, 좀 이상했어요.”

“어떻게 이상하던가요?”

“음, 일단 제발 우리 사이에 생일 축하 노래는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생일 축하 노래는 부르던가요?”

“다행히, 안 했어요. 진짜 노래까지 불렀으면 바닥에 땅 파고 기어들어 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요?”

“확실히 기분 좋았던 건, 도명 씨 칭찬했을 때요. 그리고 본의 아니게 관심받으니까. 조금, 좋았어요. 어색한 기분이 훨씬 강했지만요.”

“정확히는 도혜요.”

“네. 도혜 씨가 칭찬받을 때요. 아니, 근데 아무리 골똘히 봐도 그거 도명 씨 입술인데 그거 찍기 위해 혹시 립스틱 발랐어요?”

“네.”

도명이 짧고 굵게 답했다.

“정말요?”

“도화 씨가 동성애자인 건 아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설마 다른 여자 입술을 도화 씨에게 찍어 보내게 할 수는 없잖아요. 상상만 해도 기분이 더럽네요. 그나저나 그게 무슨 대수라고 재차 묻습니까?”

“으아.”

“아니 그 반응 뭔데요?”

도명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나이프로 접시 가장자리를 툭툭 쳤다.

“상상하니, 이상해요. 도명 씨가 곱상한 편이긴 하지만 여자같이 생기지 않았잖아요.”

“도화 씨, 이렇게 생긴 얼굴은 뭘 해도, 옳아요.”

“요즘 도명 씨 왕자 병 심각해진 거 알아요?”

“왜 그런 줄 압니까?”

“글쎄요.”

“이게 다 애인이 칭찬에 인색해서입니다. 애인한테 제대로 칭찬을 못 받으니, 자화자찬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닌데, 저 도명 씨 잘생겼다고 잘 말하잖아요.”

“부족해요.”

“안 부족해요.”

도화는 그래도 3일에 한 번은 자신도 모르게 저놈의 얼굴에 넋이 나가서 그에게 잘생겼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말하니 난감했다.

“칭찬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충분하다고 느껴야 적절한 수준인 겁니다.”

“도명 씨 잘생긴 거 세상이 다 아는데, 꼭 저까지.”

“세상이 다 아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도화 씨가 아는 게 중요하죠.”

“알아요. 도명 씨 잘생긴 거.”

“아는 사람이 내가 자화자찬할 때까지 방치합니까?”

“알았어요. 매일 말할게요.”

“두 번. 하루 두 번은 채웁시다.”

“그 두 번이라는 말 정말 좋아하네요. 전에는 대답 쓸데없이 두 번 한다고 혼내기까지 했으면서요.”

“네. 좋아합니다. 누구 덕분에. 왜 그렇게 좋은지 생각해 봤는데, 마치 그냥 써도 되는데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남을 정도로 꾹꾹 눌러 쓰는 글씨 같습니다.”

“도명 씨 잘생겼어요. 정말 잘생겼어요.”

“이런 여우 같은 거에는 학습 능력이 아주 좋습니다.”

도명이 어금니에 스테이크 조각을 넣고 씹고 있는 도화의 뺨을 손가락으로 늘이다 비비며 속삭였다.

“그나저나, 내가 불러 주는 생일 축하 노래도 싫습니까?”

“네? 아. 음.”

“싫어요?”

“단둘이 있는데 노래 부르고 듣고 이러면 너무 낯간지러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네, 알아들었어요.”

“아. 음. 네.”

도화가 괜히 길지도 않은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도명에게 말한 것처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낯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도화는 두 감정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말없이 샐러드를 씹어 먹을 뿐이었다.

오늘이 도화의 생일이라는 화제가 중간중간에 섞여 있는 것 빼고는 도명의 말대로 평소의 저녁 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같이 식기를 대충 정리해서 싱크대 안에 집어넣었다.

“아 밑에 생일 케이크 세팅해 놨어요. 내려가요.”

“굳이 여기서 왜 안 먹고요?”

아까 도화의 등줄기를 잠깐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예감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여기서 생일 케이크 보긴 좀 그런데.”

‘아니, 생일 케이크에 뭔 짓을 했기에! 불안하게 왜 그래. 아! 도명 씨가 스트립쇼 하면서 몸에 생크림 발라 주나! 그런 건가! 인간 케이크인 건가! 케이크 볼래! 케이크 어서 볼래!’

도화가 신이 난 얼굴로 도명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만으로도 신나 보이는 도화의 반응에 도명이 싱긋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도화의 양 볼을 쭉 늘렸다.

“아니, 뭐가 이렇게 신이 났어요.”

“아닌데요.”

“아니긴요.”

도화가 도명의 뒤를 따라 내려와 보니 도명의 집 안이 무슨 작은 스튜디오처럼 커다란 반사판도 있고, 비싼 카메라에, 갈아 끼울 2개의 렌즈, 삼각대, 노트북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트의 한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는 설탕에 절인 과일이 풍성하게 올라와 있는 생크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아, 이 장비들은 대체 뭐예요?”

도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이크가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도화가 상상한 인간 케이크가 아닌 평범한 생크림 케이크였다. 도화는 자괴감에 어린 표정으로 평범한 케이크를 쳐다보았다.

하필이면 인생 첫 애인이 수준 높은 고급 변태라서 자신도 어쩌면 중급 이상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명 씨 이 장비들은 뭔데요?”

도화가 도명에게 너무 궁금해 재차 물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남는 게 뭐겠어요?”

“기억이요?”

“제가 준비한 답은 아니지만, 네. 기억 맞아요. 이것들은 그 기억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에요. 시간이 지나고 같이 사진첩 들척이면서 아, 이때가 우리가 처음 맞은 도화 씨 첫 생일이었지, 하는 거죠.”

“네! 좋아요! 그런데 보통 그냥 핸드폰으로 찍잖아요. 무슨 서윤 씨 스튜디오 같아요.”

“뭐 그쪽이랑 비교하면 장비도 실력도 다르겠지만, 평균 이상은 되니까 좋은 사진들이 나올 거예요.”

도명이 일단 생일 케이크 앞에 앉은 도화의 얼굴을 찍었다. 그리고는 카메라 설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너무 의식하지 말아요. 지금은 그냥 기본적인 카메라 설정 잡는 거예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입꼬리 끝에 힘을 주고 있던 것도 풀고, 숨을 왜 참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이게 진짜 생일 선물이에요.”

도명이 도화에게 빨간 상자를 내밀었다. 빨간 상자를 웨딩드레스처럼 흰 실크 리본이 감싸고 있는 것이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 타이하고, 꽃, 와인이 선물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쇼윈도용이라니까요.”

도명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도화가 빨간 상자를 여는 것을 쳐다보았다. 도명의 표정에 도화는 상자와 도명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열어 봐요. 진짜 기간 아슬아슬하게 맞췄어요. 주문 제작이라서 애 좀 썼죠.”

“아 돈 많이 썼겠어요.”

“걱정 말아요. 이번만큼 보람 있게 돈 쓴 경우도 드무니까요. 역시 장인은 장인이에요. 저는 물건 나온 거 보는 순간, 흡족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니까요.”

도명답지 않게 묘한 호들갑을 떨어댔다. 도명의 반응이 이 정도이니 도화 역시 기대가 되었다. 도화가 조심스럽게 하얀 리본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나온 것은 멋진 수제화였다. 퀄리티 좋고 디자인이 멋진 수제화이긴 한데, 빨간 하이힐인 게 문제였다.

도화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기대에 차 있는데 선물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면 도명이 얼마나 실망할까 걱정되었다.

“저, 도명 씨…….”

“너무 완벽하지 않나요?”

“아 저, 도명 씨답지 않게 실수, 아니 도명 씨 같은 사람이 실수했을 리는 없고, 물건이 잘못 포장되어 온 것 같아요.”

“아니요. 내가 직접 포장했는데 그럴 리가요.”

“아니, 근데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것 봐요. 여성용 신발이잖아요.”

“발에 한번 대 볼래요?”

“네? 제가 이걸 왜요?”

“일단 질문 좀 멈추고 신어 봐요.”

도화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낯선 하이힐에 발을 집어넣었다. 도화의 발 모양대로 신발이 완벽하게 들어갔다. 끝이 날렵한 디자인 특성 때문에 발볼이 코르셋을 입은 듯 접히긴 해도 말이다.

“이래도 실수 같아요?”

도명이 구두에 완벽하게 들어간 도화의 발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잘, 신을게요.”

도화는 남들보다 키가 큰 만큼 발 크기도 큰 편이었다. 거기다가 기본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발이 작은 편이니, 도화의 발에 딱 맞는 하이힐이란 게 우연히 여기 있을 확률은 낮았다. 그러니 이건 배달 실수가 아니라, 도명의 의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 신지? 성의가 있으니 집에서라도 신어야 하나? 아니, 근데 한쪽만 신어도 발목이 후들후들 떨리는데 이걸 신고 집에서 어떻게 지내나? 아니, 도명 씨, 지금 진지하게 이걸 선물로 주는 거예요? 아니면 놀리는 건가? 아니 근데 놀리는 것치고는 너무, 물건은 좋아 보이는데.’

도화는 일단 선물을 받았으니 고맙다고는 했는데 차마 입꼬리를 올릴 수 없었다. 도명이 여전히 이게 무슨 일인가 감을 못 잡는 도화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뭉갰다.

“아, 어떻게, 억지로 웃으려고 노력하는 거 귀여워 죽겠네요.”

“네? 아. 역시 저를 놀리는 거.”

“이거 꽤 비싸요. 놀리려고 그런 돈을 쓸 만큼 제가 그렇게 돈을 막 쓰지는 않습니다.”

‘이미 나한테 수제 하이힐을 사 준 순간, 돈을 길에다 뿌리며 퍼레이드 하는 사람 같은데요.’

“아. 저는 사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으아. 미안해요.”

도화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울먹이며 말했다.

“플레이 도구를 사 준 거예요.”

“플레이요?”

“이거 신고 나하고 오늘 밤 밤새 놉시다.”

“저, 도명 씨 여장 남자로까지 취향 확대됐어요? 그렇다면…… 저도 노력해 볼게요. 그런 것들하고 너무너무 안 어울리는 얼굴과 몸이라도 괜찮다면, 노력해 볼게요.”

‘차라리 도명 씨가 진짜 도혜가 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그쪽이 더 수월하고 빨라 보이는데.’

도화가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말했다. 도화의 그런 노력은 필요 없지만 도명은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는 도화가 예뻐 죽겠다. 진짜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오늘 도화의 생일이 아니라 자신의 생일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화 씨,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도화가 복잡한 표정으로 빨간 가죽 표면을 어루만지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도화 씨 하이힐 신어 본 적 있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도화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 저었다.

“도화 씨가 이거 신고 다리를 바들바들 떠는 게 보고 싶은 거예요.”

“나, 나. 나 오늘 생일인데요?”

“도화 씨 태어난 날 뭐부터 했어요?”

“네? 그런 게 기억 날 리가 없잖아요.”

“울었겠죠.”

“아. 네. 울었겠죠.”

“네, 그러니까, 생일은 우는 날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생일 빵이라는 게…… 응?”

도화는 깨달음을 얻는 듯 소리치다가 말을 멈췄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자기야!’

“자 일단 초부터 꽂을래요?”

도명이 준비한 초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도명이 준비한 상자는 두 개였다. 한쪽 상자에는 평범한 알록달록한 생일 초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하얀, SM 플레이용 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도화 씨가 원하는 걸 꽂아요. 평범한 생일 초 고르면 다정하게 안아 주고 예쁜 새 신발 신은 다리에 정성스럽게 입 맞춰 줄게요. SM 플레이용 초를 고르면, 밤새 온몸이 빨갛게 되도록 울려 줄게요. 자. 도화 씨 선택이에요.”

“저, 저는 오늘 생일인데. 당연히, 다정하게…… 난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도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선택을 못 하고 손만 바르작댔다.

“도화 씨가 인내심 있고 용감한 사람이란 걸 증명하면, 난 여기에 도화 씨 이빨 자국 남기게 해 줄게요.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남기게 해 줄게요.”

도명이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진득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내 몸에 빨간 마커로 메시지 남기는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어요. 그리고 음, 이거 가지고 놀게 해 줄게요. 나를 마음껏 찍어요.”

도명이 묵직한 사진기를 도화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도화의 귓바퀴를 손톱 끝으로 자극했다.

“이거 비싼 장난감이에요. 나쁜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도화는 도명이 말한 비싼 장난감이라는 게 도명의 몸을 말하는 건지, 고가의 카메라를 말하는 건지 헷갈렸다.

“하긴, 나쁜 사람은 무슨. 도화 씨는 착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은 소중하게 쓰다듬어 줘야겠죠.”

“아니요! 저는 나쁜 사람인데요.”

도화가 다급하게 도명을 향해 소리쳤다. 마치 시즌 세일을 놓치기 직전의 절박한 사람 같았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놓고 부끄러워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기야, 그렇다면 뭐 하고 있어, 케이크가 뭉개지고 싶어 하잖아. 초 꽂아. 얼른.”

도명이 다리를 뻗어 도화의 다리 사이를 누르며 고압적으로 말했다. 도명의 말에 도화가 다급하게 무릎을 꿇으며 공손한 손으로 생크림 케이크에 SM 플레이용 초를 꽂았다. 그리고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명령을 내려 달라는 눈치였다.

“자기야. 뭐 해? 빤하잖아. 옷부터 벗어야지.”

“네. 네.”

도화가 두 번 대답하며 정장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도명의 집 바닥 위에 도화가 입고 있던 셔츠, 바지, 벨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도명과 야한 짓을 하기 위해 옷을 벗는 것은 쑥스러웠다. 옷을 벗는 행위만으로도 달아올랐다는 것을 도명이 알면 놀려 댈 것이 빤했다.

“천 조각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안 돼.”

“네.”

도화는 마지막 보루로 남겨 놓았던 브리프마저 내렸다. 그리고는 태어난 그대로 알몸이 된 상태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자기야. 우리 사이에 왜 그러고 있어?”

“네? 네?”

“일단 소파에 편하게 앉아. 그래야 신발 예쁘게 신겨 주지.”

“저, 그런데 도명 씨 왜 갑자기 반말을……”

도화가 적응이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나보다 어리잖아.”

“아. 네 그렇죠.”

“그리고 지금 나에게 받고 싶은 게 있는 상태고.”

“아. 네.”

“자기야, 말 편하게 해서 섭섭해?”

“아니요. 아닙니다.”

도화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도명의 말처럼 섭섭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적응이 안 되었다.

“왜? 자기도 말 놓고 싶어?”

“아니요.”

“다행이다. 눈치는 좋다. 사람은 눈치가 좋아야 원하는 걸 받는 거야.”

“아. 네. 그렇습니다.”

“일단 편하게 앉아.”

“네.”

도화는 도명이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지도 못하고 척추가 일직선이 되도록 힘을 바짝 준 상태였다. 도명이 도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핏 보기에는 도화가 주인이고 도명이 그의 집사라도 되는 것 같은 자세였지만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누가 주인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주인의 자리에 앉은 도화는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을 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편해 보였고 또, 도명의 눈치를 지나치게 많이 보았다. 도명이 소파에 앉은 도화의 다리를 일직선으로 훑었다. 그리고 정강이를 손끝으로 힘주어 누르다 그의 아킬레스건을 훑었다.

“다리가 꽤 예쁜 편이네.”

“네, 감사합니다.”

“다리가 예뻐서 주는 상이야.”

“감사합니다.”

“잘하고 있어. 감사할 줄 아는 남자는 매력적이니까.”

도명이 도화의 발에 빨간 하이힐을 신겼다. 도화의 발에 맞춘 거지만 발볼이 아치형으로 좁혀지는 느낌이 벌써부터 긴장감이 돌았다. 발을 감싼 가죽의 느낌이 싸늘했다.

도명이 남은 한쪽 발에도 하이힐을 신겼다. 도화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발꿈치가 바닥에 바로 닿지 않고 끝이 갈수록 가늘게 뽑힌 막대에 의해 붕 뜬 느낌이었다.

앉아 있지만 벌써부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7cm의 차이인데 바닥과 다리의 관계가 재정의된 느낌이었다. 바닥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졌다. 고작 7cm의 차이인데 말이다.

“함부로 질질 싸는 남자는 매력이 없지. 안 그래?”

도명이 확인 사살하듯 도화에게 되물었다. 도화는 도명의 말에 벌써부터 페니스의 끝단이 아려왔지만 이 분위기에서 그의 말에 토 달 수가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헤픈 느낌이지. 자기는 어때? 헤픈 남자인가?”

“아, 아뇨.”

도화는 도명의 질문에 이상하게도 양심이 찔리는 느낌이었다.

“거짓말. 헤픈 남자는 싫어.”

대답이 시원찮은 도화의 대답에 도명이 심기가 불편한 듯 갑자기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그런 도명의 표정에 도화의 등가죽이 식은땀으로 축축 해졌다.

“네. 새겨듣겠습니다.”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한테서 헤픈 냄새가 나서 준비했어.”

도명이 손바닥만 한 검은 가죽 상자를 열며 티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쳤다. 마치 빛나는 결혼반지를 보여 주는 남자처럼 활짝 웃으며 도화의 눈앞에 내밀었다.

가죽 상자 안에는 4센티 정도 되는 은 막대가 있었고 은 막대 주변에는 연결 부속물과 함께 투명한 실리콘으로 된 막이 달려 있었다.

보통 고무링 정도만 매달려 있는데 마치 콘돔처럼 페니스 전체를 꽉 조이는 것이 조금도 정액을 질질 싸대는 꼴을 못 보겠다는 도명의 결벽증이 엿보였다.

도화는 그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얇게 뽑힌 이런 종류의 요도 플러그를 쓴 적은 없지만 어깨너머로 본 지식으로 그것이 어디를 막을 건지 알 수 있었다. 저런 것이 요도 끝을 파고들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또, 두려운 것 중 하나는 도명이 플레이를 어느 정도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정하지 못할 때의 미칠 것 같은 조바심과 그 아릿한 아픔이 절로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도화가 도명의 눈치를 급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저, 저는 도명 씨한테만 헤픕니다. 그, 그건 도명 씨가 너무 잘생기고 또, 섹시한 탓이라서……”

“자기야. 입 털지 마.”

도명이 구둣발로 도화의 이마를 찍어 누르며 말했다. 아, 외국도 아니고 도명이 실내에서 바닥을 딱딱 치는 소리가 센 구둣발을 신고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차려야 했다.

도명 같이 결벽증이 있는 사람은 플레이를 할 때면 일부러 바닥의 고무 부분이 단단한 구두를 신었다. 구두를 조이는 신발 끈조차 풀이 완벽하게 먹여 들어가 빳빳해 보이며 마치 구두코에 얼굴을 비춰 볼 요량인 것처럼 반들거리는 그런 신발이었다.

생일을 축하하는 도명의 다정한 얼굴에 홀려서 도명이 따각 소리를 내며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선명하고 소름 돋는 소리를 어떻게 못 알아챌 수 있었을까? 다정한 버전의 도명에게 아주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도화는 자신의 이마를 밟느라 시선 위로 올라간 도명의 허벅지에 눈이 돌아갔다. 그 다림질이 완벽하게 된 정장의 옷감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당겨진 모습에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곱상한 그가 바지를 내리면 단단하고 적당한 굵기를 가진 허벅지가 저절로 생각났다.

“자기야. 날 실망시킬 거야?”

“그,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요…… 이건 좀 무서워서.”

“자기야. 벌써 흥분했네?”

“네?”

도명의 말에 도화가 떨리는 시선으로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쳐다보았다. 발딱 서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도화의 페니스가 아까보다 부풀어 올라 있었다.

“흥분한 상태에서 넣으면 더 아플 텐데?”

“아…….”

도화는 급하게 자신의 페니스를 부여잡았다. 빨리 정액이라도 뺄 요량이었다. 하지만 도명이 도화의 머리통을 밟고 있던 발을 옮겨 그의 가랑이 사이를 짓이겠다. 다급한 도화의 손등 위로 도명의 단단한 신발 밑창 무늬가 새겨졌다.

“왜 벌써부터 요령 피워? 자기는 내가 싸구려로 보여?”

도화를 내려다보는 도명의 눈길에서 싸늘한 분노가 느껴졌다. 도명은 분노를 삭이려는 듯 괜히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손바닥으로 쫙 눌렀다.

“네? 아니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날 싸구려 노력으로 가질 생각을 하는 거지?”

“잘못했습니다.”

도화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부여잡은 페니스를 놓았다. 도명이 자세를 낮춰서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 시선을 맞췄다.

환장할 노릇인 게 도명이 자신의 페니스를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자 도화의 페니스가 더욱 딱딱해졌다. 도명이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던 타이를 풀고 도화의 입에 욱여넣었다.

“아플 거야.”

더 이상 도명을 실망시키거나 화나게 할 수 없는 도화는 달달 떨며 아래턱에 힘을 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명이 상자에서 사정방지 링을 꺼내 금속 고리 부분에 손가락을 넣고 돌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도명의 좁은 입 사이로 빠져나오는 휘파람 소리도 소름 돋았고 공기를 가르며 빙빙 도는 금속의 찰랑거림도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공격을 눈치챌 틈도 없이 불시에 공격하듯 푹 찔러 넣어 줬으면 좋겠는데, 도명은 오히려 도화의 날 선 공포에 숨을 불어 넣었다.

도화는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괜히 허벅지를 퉁퉁 때렸다. 사정방지 링을 돌리던 도명의 움직임이 일순간 탁 멈추고 금속 막대 쪽을 도화의 귀두 끝, 갈라진 좁은 틈 사이에 맞췄다. 소름 돋는 차가움이 뜨거운 살덩어리를 가르는 느낌이 끔찍했다.

“흐악.”

도화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자기야, 1mm도 안 들어갔다.”

도명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흐아.”

도명의 말대로였다. 금속 막대는 귀두 끝에 얹어져 있을 뿐이었다. 방금 느낀 것이 그냥 상상이라니! 도화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애써 심호흡을 했다.

“그러게 평소에 그렇게 헤프게 굴지를 말았어야지.”

“헤프지 않았어요.”

도화가 도명이 입속에 밀어 넣었던 검은 넥타이를 뱉고 억울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전, 도명 씨만 바라봤는데, 무슨 남창 보듯이! 흥분도 도명 씨 앞에서만 한단 말이에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입에 넥타이를 다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자기야, 내가 아무리 섹시해도, 아껴 싸야 하는 거야. 마치 내가 자기를 시도 때도 없이 흥분시켜 줄 싸구려 간식인 것처럼 소비하면 안 되지.”

도명이 그렇게 말하고는 복수를 하듯이 요도에 금속 막대를 슥 밀어 넣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프고 소름이 돋았다.

너무 소름이 돋는 나머지 비명조차 목젖 끝으로 말려 들어갔다. 빨간 하이힐을 실은 도화의 발꿈치가 달달달 바닥을 때려댔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보기 위해 실눈을 떴다.

도화의 속눈썹 끝에 습기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더욱 소름 돋는 상황은 금속 막대가 반밖에 안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까의 소름 돋는 느낌을 조만간 또 느껴야 한다는 생각에 온몸이 저릿해졌다. 도화가 도명의 손목을 억세게 잡고 벌써부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자기야 멋진 남자가 되려면, 의젓해야지.”

벌써부터 우는 도화에게 도명이 힘주어 말했다.

“흐윽, 씨발, 자기야. 발에 하이힐 신겨 놓고 무슨 개소리야.”

“자기야, 말본새가 그게 뭐야?”

도명이 도화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 주며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마무리 동작에서 손끝에 날이 선 것처럼 새겨진 압력이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자기야, 너무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내가 자기 보고 흥분하는 게 뭐가 그렇게 나빠요?”

“나빠.”

“네?”

예상외의 대답에 도화가 당황하며 딸꾹질을 했다.

“이해 안 가면 그냥 외워, 자기야. 원래 멍청하면 그렇게라도 해야 해.”

도명의 말에 도화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서럽게 울었다.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더니 도화의 뺨을 두 손바닥 사이에 가두고 엄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외웠는지 확인해 보자. 막 사정하면 나빠? 안 나빠?”

도화는 도명이 평소처럼 결국엔 져 줄 줄 알았는데 계속 엄격하게 굴자, 서러운 기분이 치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나 오늘 생일인데!’

“…….”

이번에는 도화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고집을 부렸다. 그런 도화의 표정에 도명이 고개를 가로저어대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도화가 다급하게 도명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졌다. 그리고 더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런 도화의 페니스 끝에는 박히다 만 사정방지 링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봐 줬잖아요. 나, 나. 오늘 생일이란 말이에요.”

“나는 자기가 이렇게 울고 매달릴 때 참 귀엽단 말이야.”

“정말요?”

“그렇고말고. 근데, 딱 귀엽기만 하단 말이야. 섹시한 맛이 조금도 없어.”

도명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눈가가 빨갛게 익은 채 매달리는 도화를 볼 때마다 그의 페니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방식으로 놀고 싶을 뿐이었다. 

오늘은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위해 철저히 그를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이토록 순하고 천성 착한 백구가 오랫동안 안 써서 무뎌지다 못해 뭉그러진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나도록.

“난 섹시한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저번에 도명 씨가 그랬잖아요. 저는 섹시하려고 노력하면 안 된다고. 멋 부리려고 애쓰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자기야, 섹시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 그래, 구체적인 설정을 잡자고. 자기는 아무래도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도명이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오늘 자기가 할 건, 용기도 없고, 인내심도 없는 그저 그런 남자들한테 질린 여왕님을 감동시키는 일이야. 기교를 부릴 필요는 없지. 기교는 오히려 독이야. 그의 주변에서 온갖 화려한 기교와 술책들로 가득한 사람들이 그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헛된 노력들을 하고 갔기 때문이지. 그런 여왕을 감동시키는 건, 그저 그가 주는 시련을 묵묵히 해내는 성실하고 진실하며 강한 남자야. 거기다가 연하고.”

도명이 싱긋 웃으며 도화의 콧방울을 살짝 물었다. 그가 마치 익기 진전의 파랗지도 빨갛지도 않은 사과를 살짝 맛보듯이 말이다.

“저기요. 근데 도명 씨 왜 여왕이에요? 도명 씨는 남자잖아요.”

도화가 도명을 올려다보며 초등학생 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나한테 남자다움을 요구하면서 왜 나한테 하이힐 신겼냐고요.’

“한때는 영웅이었으나 권태에 빠진 왕은 배 나오고, 더 이상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지. 난 권태에 빠지고도 아름다우며, 또 강하니까, 그저 왕과 결혼한 공주 출신이 여왕이 된 게 아니야. 권태에 빠진 왕의 목을 자르고 왕이 됐으며, 왕의 유산으로 권태를 물려받은 그런 빨간 여왕이야.”

도명이 도화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긁으며 속삭였다. 그러다가 도화의 턱을 강하게 잡으며 말했다.

“그러니, 빨간 여왕의 인정을 받으려면 가혹한 시련 앞에서 굳건하며, 섣불리 욕망을 드러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지 말 것.”

도명이 알아들었냐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다가 도화의 페니스 끝에 매달린 은색 막대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눌렀다. 그런 작은 힘만으로도 은색 막대는 도화의 몸을 달달 떨리게 만들었다.

“굳건할 것.”

도명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도화가 도명의 허벅지를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반응에 입꼬리를 쭉 올리며 요도 플러그의 나머지 부분을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새된 소리를 지르려는 도화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쉬. 굳건하라고 말했잖아. 내 발기 식히려고 작정했어?”

도화는 도명의 말에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빨간 눈가를 팔뚝으로 가렸다. 도명은 그런 도화가 기특하고 귀여우면서도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표정을 사늘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나머지 사정방지 링을 채웠다. 사정방지 기구가 주는 아릿하면서 야릇한 느낌에 가랑이 사이를 좁히며 무릎 꿇고 있는 도화의 옆을 지나 세팅을 시작했다.

도명이 주변 불을 암전하고 하이라이트 같은 전등 조명 하나만 남겨 놨다. 도명의 지하실은 온통 까맣고, 바닥을 동그랗게 비추는 한 줄기 빛이 전부였다.

도명이 키가 높은 작은 클럽용 테이블 위에 커다란 하얀색 SM용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초 윗동이 투명한 물처럼 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옆에 굵은 회초리 하나와 얇은 회초리를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도화가 없는 빈 공간에서 카메라 설정값을 다시 맞추었다.

그 모든 밑 작업이 끝나자 도명이 도화에게로 다가왔다. 도명이 힘주어 도화의 어깨 근육을 주무르니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자기야, 너무 긴장되면 음악 틀어 줄까?”

“아니요.”

“왜?”

도명이 도화의 등허리에 상체를 얹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치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것 같은 다정함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본능적으로 이것 역시 그가 자신을 나락에 빠트리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그냥이요.”

“자기야, 삭막하게 왜 그래? 생일인데, 달콤한 노래 들어야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건지 도명은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한강에서 들었던 적당한 저음의 달콤한 사랑 노래였다. 빛 한 줄기만 남겨 놓고 암전된 지하실 안에서 울리는 달콤한 노래는 왠지 모르게 소름 돋았다.

“일단, 형이랑 다정하게 춤추면서 긴장 풀까?”

“…….”

“응?”

“아. 네. 좋아요.”

도화는 도명이 하자는 것은 무조건 해야 함을 깨달았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다정한 척하는 말투에 속으면 안 된다. 다정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모든 말은 여왕의 지엄한 명이니까.

도명이 도화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했다. 그리고 바닥에 껌딱지처럼 붙어 앉은 도화를 일으켜 세웠다. 처음 신은 하이힐에 도화의 다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발목이 잔가지처럼 꺾일 것 같았다. 벌써부터 도화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도명이 자꾸 굽어지는 도화의 허리를 조이듯 강하게 끌어안았다. 도화는 빨간 구두에 발이 삼켜진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도명에게 매달렸다.

“저 그런데요. 형, 아니. 여왕님…… 으아…… 뭐라고 존함을…….”

‘이번 플레이 너무 어려워.’

도명은 도화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는 뭐가 좋을까?”

도명이 도화의 승모근에 이를 살짝 세워 깨물어 물었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의 몸 냄새를 자신의 폐에 깊이 빨아 들었다. 벌써부터 도화에게서 야릇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전 도명 씨가 좋은 걸로.”

“아니, 자기가 좋은 걸로.”

도명이 하이힐을 신어 제대로 스텝도 밟지 못하는 도화를 이리저리 리듬에 맞춰 끌고 다니며 말했다. 도화는 이 와중에 도명의 발을 밟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노심초사했다. 애초에 도화가 감당하기 힘든 하이힐을 신기고 춤을 추게 한 도명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 음…… 둘 다 포함해야 좋을까요?”

“음, 할 수 있어?”

“아…… 누님?”

도화가 여왕의 여성성과 수직관계, 형의 관계성 사이에서 고른 계 이거였다. 그리고 순간 기억 안 나는 도명의 가명, 도혜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도자 돌림 여성 이름이라는 것만 생각났다.

“아…… 도순이 누님?”

“아냐. 그거 아냐. 절대 아냐.”

도명이 웃음을 겨우 참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여기서 웃으면, 애써 잡아 놓은 분위기 완전 무너져. 참자. 유도명. 참자. 참자. 아니 도순이 누님이 뭐야. 백구야.’

“그냥, 형이라고 하자.”

도명이 어금니를 갈며 도화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흔들며 말했다.

“네.”

도명이 어느새 도화를 인공적인 빛 한 줄기가 쏟아지는 곳으로 안내했다. 도명은 도화를 그곳에 세우자 그에게서 깔끔하게 떨어진 채 말했다.

“이제, 무대에 올랐네.”

도명이 조명을 받고 서 있는 도화를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도화는 처음 서 보는 기묘하고 가학적인 무대에 잔뜩 긴장했다. 도명은 카메라를 들고 그런 도화의 모습을 찍었다.

일단 나체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서 있는 몸은 가학적이며 동시에 미학적이었다. 바닥에 닿아 있는 발도 구속되어 있고 사정방지 링에 의해 페니스도 구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섹시함과 거리가 멀었다. 바들바들 떠는 게 귀엽긴 해도 섹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명에게는 이 초짜 모델은 교육시키면 단단하고 섹시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될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도명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릴 때마다 도화는 멀뚱히 서서 더욱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 맞다, 자기야. 신발 사 주면 도망간다는 설이 있잖아.”

“아. 네. 물론 저는 도망가지는 않습니다.”

“알아. 우리 자기는 도망갈 수가 없지. 나를 사랑하잖아.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감을 자기가 어떻게 참겠어?”

도명이 한 손에 묵직한 카메라를 든 채 그의 어깨 위에 두 팔을 얹었다.

“자기야, 사랑해.”

“네. 저도 사랑합니다.”

“대답이 왜 그래?”

“네?”

“대답 참 영혼 없다. 두 번, 힘주어 말해야지.”

“형,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요.”

“그래. 그래. 예쁘다. 그런데 내가 뭐든 확실한 거 좋아하잖아.”

도명이 그렇게 말하며 얇은 쇠로 된 사슬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하이힐의 힐 부분에 채웠다.

“이렇게 세트야. 사슬 잘 뽑혔지?”

“네.”

“다리 벌려. 사슬이 팽팽해지도록. 그 간격을 유지해. 어서. 오늘 밤 이벤트가 아주 많아. 하나, 하나에 지체할 시간이 없어.”

도명의 재촉에 도화는 금방이라도 혼이 날까 봐 다리를 벌렸다. 도화의 생각보다 사슬이 조금 느슨했는지 도명이 성격 급한 사람처럼 굴며 굵은 몽둥이를 들고 도화의 허벅지 사이에 집어넣고 때렸다. 도화는 도명의 매질이 멈출 때까지 다리 사이를 최대한 벌렸다.

“이제야 자세가 좀 섹시하네.”

도명이 그렇게 혼잣말하듯 말하고는 도화의 전신을 다시 한번 찍었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을 주느라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한 도화의 다리 근육을 하이힐 끝 단에서부터 골반까지 세밀하게 찍기 시작했다.

가늘게 솟아난 아킬레스건, 아슬아슬한 감각을 보완하기 위해 봉긋 솟아난 장딴지 근육, 그리고 허리가 밖으로 휘면서 더욱 동그래 보이는 볼기 근육, 엉덩이가 나온 만큼 들어간 허리의 섬세한 곡선, 모든 근육과 선들이 뜨겁게 팽창하고 떨리고 있었다.

도화는 이 변태 애인의 행각에 손으로 턱을 감쌌다. 피부 표면을 스캔 뜨듯이 차가운 렌즈가 반짝였다.

도명이 서 있는 것만으로 땀을 흘리는 도화의 앞에 다가와서 자랑하듯 카메라에 담긴 것들을 보여 주었다.

“마음에 들어? 자기 다리가 이렇게 예쁜 언덕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

“…….”

“자기야, 내가 말하고 있잖아. 장단 맞춰야지. 나한테 잘 보이고 싶지 않은 거야?”

“아. 네. 아, 음, 마음에 듭니다.”

“신발은 어때? 적응돼?”

“아. 네.”

‘적응되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아요.’

“거짓말. 아직도 이렇게 온몸이 후들거리면서.”

도명이 도화의 배꼽에 손가락을 걸치고 빙 돌리면서 얄미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는 배꼽이 자극되자 입술 사이로 엷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도화의 자세가 비틀거렸다. 그런 도화의 반응에 도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자기야, 안 돼. 벌써 이러면 안 되고말고. 이 엉덩이에 로터도 물고 있어야 하고, 뜨거워서 달콤한 설탕물도 몸의 가장 예쁜 부분에 입어야 해. 그저 그런 창백한 밀랍 인형보다 우리 자기가 더 보기 좋을 거야.”

도명이 투명하게 녹은 촛농을 생크림 찍듯이 손가락 끝으로 훔친 다음 도화의 아랫입술에 문지르며 말했다.

“형, 나…….”

‘나 지금 서 있기도 힘든데 뭘 한다고? 도명 씨, 아 제발. 아 못 해. 난 못 해. 아, 그냥 울까. 울면 도명 씨가 좀 봐 줄까?’

하지만 도화는 도명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뱉을 수 없었다. 계속 머릿속에서 ‘굳건하게’라고 속삭이는 도명의 입 모양이 생각났다. 도화는 결국 말도 못 하고 손바닥을 폈다 쥐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도명은 도화가 속으로 ‘난 못 해!’라고 절규를 하든 말든 손가락 한마디만 한 로터를 들고 다가왔다. 도화가 간절한 눈빛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명은 흔들림 하나 없는 표정으로 다가와 한쪽 팔로 도화의 허리를 억세게 끌어안고 도화의 엉덩이 뒤에 로터를 슥 밀어 넣었다. 하지만 로터를 밀어 넣자마자 로터가 다시 빠져나왔다. 그러자 도명이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기야, 뒷구멍으로 반항하지 마.”

도화가 도명을 끌어안고 호흡을 거칠게 쉬었다. 입술로는 못 한다는 말을 못 하고 거친 호흡을 통해, 자기가 얼마나 지금 힘들고 절박한지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명은 도화의 이마를 냉정하게 손바닥으로 밀었다.

“실망시킬래? 자기야, 물어.”

도명이 손가락 끝에 힘을 잔뜩 주며 로터를 밀어 넣었다. 도화는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명의 명대로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애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의 눈앞에서 로터를 작동시켰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손동작이었다.

도화는 애널 안에서 로터가 맹렬히 진동하자 무릎이 접힌 채로 다리를 달달 떨었다. 이대로 발목이 꺾이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명은 쓰러지면 안 된다는 듯이 도화의 턱을 잡고 서서 내려다보았다. 로터를 작동시킨 지 얼마 안 됐는데 도화의 뺨에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기분 좋은데 왜 울어. 바보같이.”

“흐아. 아, 형. 나, 으아. 서 있기, 힘들어요. 제발.”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도화의 거친 호흡이 도명의 아랫배에 닿았다. 그의 서러운 호흡이 정장 조끼와 하얀 셔츠를 뚫고 도명의 아랫배를 뜨겁게 달궜다.

“힘들어?”

도화가 도명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은 채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눈 감고 있어.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실망스러운 모습 안 보려고.”

도명의 말에 도화가 고개를 살짝 들어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도명의 말처럼 그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인내심의 줄이 뚝 끊어질 사람처럼 보였다.

“나 30초간만 눈 감고 있을 거야. 자기야. 빨리 감정 추스르고 아까처럼 예쁘게 서 있자. 힐 사이에 있는 사슬 팽팽하게 유지하는 거 잊지 말고.”

도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그리고 묵직한 무게감으로 30초를 세었다. 30이라는 숫자가 가까워질수록 도화의 머릿속 경고음이 빨갛게 울렸다.

오늘의 도명은 평소와 달랐다. 그가 정말 크게 실망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망 끝에 그가 자신만 남겨 놓고 떠날 거라는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다른 날에도 그런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특히 오늘은 혼자 남겨질 수 없었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니까. 도화는 가쁜 숨을 겨우 정돈하며 자꾸 굽혀지는 허리를 애써 곧게 폈다.

그리고 지나치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도 벌렸다.

“29.”

“……아. 하아. 하아.”

“30.”

도명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도명의 눈앞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애써 눈물을 삼키고 있는 도화의 얼굴이 있었다.

“그래, 이게 섹시한 거야. 자기야.”

도명이 도화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이 도화를 관음하며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혀를 차더니, 다시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서 그의 엉덩이를 때렸다.

“사슬 신경 쓰랬잖아! 발정하지 말라고 막아 놓은 자기 페니스가 이것보다 더 빳빳하잖아!”

도명이 신경질적인 말투를 참지 않고 소리쳤다. 도화는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도명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서러운 감정이 복받쳤다. 도화가 굵은 눈물을 툭 흘렸다.

“내가 소리쳐서 상처받았어?”

도명의 질문에 도화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자기가 잘하면 내가 소리 지를 일도 없잖아.”

“형, 나한테 소리친 적 없잖아요. 오늘 나 생일인데, 으흑, 진짜 왜 그래요.”

‘으흑, 오늘 진짜 나한테 왜 그래.’

도화는 도명에게 얻어맞은 엉덩이보다 말이 더 아픈지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또 귀엽네? 나 귀여운 거 질렸는데. 제발 좀 섹시해지자. 응? 대답.”

“네.”

‘나쁜 새끼!’

도화가 속으로 외쳤다.

“마지막 관문 남았어. 이것만 하면 저기 편하게 누워서 나한테 예쁨받으면서 박히는 거야. 우리 자기, 잘할 수 있지?”

“네. 하아. 하아.”

도명은 일단 너무 놀라지 말라는 듯이 물처럼 투명해진 촛농을 손으로 덜어서 도화의 아랫배에 문질렀다. 도화의 배에 도명의 손자국 그대로 촛농이 진득하게 묻었다. 도명은 도화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손 위에 촛농을 흥건하게 부었다.

SM용이라서 일반 초보다 온도가 낮지만 안 뜨거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도명처럼 굳은살 하나 없는 고운 손을 가진 이가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으며 무미건조한 눈으로 손가락 사이에 흘러내리는 촛농을 쳐다보았다.

오히려 살갗을 감싸는 뜨거움을 즐기듯 입꼬리를 쭉 올리고는 자신의 입술을 붉은 혀로 훑기까지 했다. 도화는 홀리듯 도명의 혀의 궤적을 훑었다.

“자기야, 나 섹시해?”

“네. 네……!”

“자기도 할 수 있어.”

도명이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 촛농을 떨어뜨리며 속삭였다. 도화가 허벅지를 부르르 떨며 어금니를 갈았다.

“흐아.”

“뜨거우니 좋지?”

“흐윽. 하아. 하아.”

“아냐? 난 뜨거우니까 기분 좋던데.”

도명이 도화의 음모에 엉겨 붙은 촛농을 손가락 끝으로 뭉개며 속삭였다. 도명은 투명해진 촛농을 잔뜩 품은 다른 초를 가지고 와서 도화의 눈앞에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지금, 자기 어디가 제일 예쁠 것 같아?”

“모, 몰라요.”

도화가 눈을 질끈 감으며 도리질을 했다. 진짜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자꾸 도명이 아까 한 말이 생각났다.

‘자기야, 안 돼. 벌써 이러면 안 되고말고. 이 엉덩이에 로터도 물고 있어야 하고, 뜨거워서 달콤한 설탕물도 몸의 가장 예쁜 부분에 입어야 해.’

“알 텐데. 내가 아까 공들여서 찍었잖아.”

“하아. 흐악, 형, 형. 잠깐, 내 말 좀. 형. 형, 사.”

도화가 ‘사랑해.’라는 세이프 워드를 내밀려고 하자 도명이 그의 입술을 가로채며 말했다.

“자기야, 굳건하게.”

도명이 떠는 도화를 껴안으며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초를 든 팔을 들어 올려 도화의 등줄기에 끼얹었다. 도화가 온몸을 너무 크게 떨어대자 도명은 이를 악물고 도화를 크게 조이듯 안았다.

덕분에 도명의 완벽하게 깔끔했던 정장이 주름지고 표면에 서리를 맞은 듯 촛농이 엉겨 붙었다.

뜨거운 촛농이 도화의 등줄기를 타고 엉덩이골까지 뚝뚝 흘러내렸다. 도화가 도명의 품에 안긴 채로 주먹으로 도명의 가슴을 퉁퉁 쳤다.

도명은 가슴에 멍울이 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눈을 감으며 참았다.

“자기야. 나 눈 감는다. 또, 30초. 아까처럼 섹시하게 서 있어.”

“흐윽. 하아. 하아.”

도화가 도명의 품 안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명을 올려다보는 도화의 눈동자가 빨갛게 날이 서 있었다. 원망으로 가득한 눈초리가 도명의 살가죽을 꿰뚫었다.

“자기야. 지금 표정 좋아. 딱, 붉은 여왕의 취향이야. 30초, 셀까? 말까? 이게 마지막 시험이야. 자기가 섹시하게 서 있고 나는 그걸 촬영하고 끝. 그리고 상품 받으러 오세요.”

도명이 얄밉게 이죽거리며 말했다.

“……씨발, 자기야, 30초 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상품 해쳐도 돼요?”

“그거야 고객님 마음이죠. 양도하기로 한 건데.”

“자기야! 왜 그래요! 나한테 자꾸 왜 그래요!”

“똑바로 서. 거의 다 해놓고 상품 날리지 말고.”

도명의 말에 도화는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 서러움과 고통의 쓴맛을 애써 삼키며 섰다. 이번에는 구두의 양 끝단에 매달린 사슬을 팽팽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전히 엉덩이 사이가 축축하게 될 만큼 로터는 요동쳤다. 그리고 발끝의 하이힐은 바닥을 아득하게 느껴지게 하고 있었으며 온몸은 축축 늘어졌다. 하지만 끝을 보기 위해 마지막 힘을 내서 섰다. 하지만 도명은 순찰하듯 도화의 몸 주위를 뱅뱅 돌며 회초리로 구부정한 신체 부위를 툭툭 휘갈기고 다녔다.

그렇게 조련 끝에 도화의 뒷모습이 완벽하게 되자 도명은 카메라를 들고 와서 하얀 촛농으로 코팅된 그의 몸을 찍었다. 비부에 하얗게 흘러내리다 굳은 하얀 촛농의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카메라 셔터 스피드를 조정해서 빨간 살 안쪽에서 울리는 로터의 흔들리는 잔상도 담았다. 피사체의 가장자리가 선명하지 못한 느낌이 묘했다.

“도화 씨, 수고했어요.”

“……상품 내놔요.”

도화가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도명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와, 이제 잘 신네요. 그것도 엉덩이에 로터 박은 채 말입니다.”

“상품이요!”

도화가 한이 서린 얼굴로 외쳤다. 그리고는 너무 울어서 빨갛게 부은 코를 하고 훌쩍였다. 도명은 얄밉게 두 손을 올리며 낙하하듯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상품 여기 있습니다.”

“상품이 왜 포장되어 있어요?”

도화가 힐을 벗다가 발목을 감싸는 가죽 부분과 사슬이 엉켜 못 벗고 낑낑대다가 포기하고 도명의 다리 사이에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도명의 옷을 벗기며 투덜댔다.

“흐아. 상품이 왜 번거롭게 포장되어 있냐고요!”

도화가 딱딱해진 페니스를 위아래로 꺼덕이며 울어댔다. 어서 이 답답한 느낌과 통증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요도 플러그를 확 뽑기에는 겁이 났다. 그래서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일단 상품에 대한 집착만 보일 뿐이었다.

“셔츠 단추 조심해요.”

“왜 만날 단추 많은 셔츠만 입어요.”

도화는 지금 이 순간 너무 많은 것들이 서러웠다. 결국 도화는 서러움과 분노를 못 이기고 도명의 셔츠를 잡아 뜯었다. 도명이 아끼는 셔츠 단추가 사방으로 튀어 나갔고, 가구 밑바닥 구석구석에 들어갔다. 도명의 깊은 한숨이 천장으로 치솟았다.

“그렇게 가만히만 있지 말고 엉덩이 좀 들어요.”

도화가 도명의 바지 벨트를 푸르고 힘으로 바지를 쭉쭉 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명은 히죽 웃으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그러자 열이 뻗친 도화의 손길이 더욱 거칠어졌다.

도화의 노력 끝에 도명의 희면서 단단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리고 도명의 검은 브리프가 물에 젖은 수영팬티처럼 젖어 있었으며 앞섬이 크게 부풀어 올라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 물 겁니다!”

“물어요.”

도명이 남의 일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다. 도화가 도명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그의 탐스러운 살덩어리를 한 움큼 물었다.

허벅지 안쪽이 물린 만큼 아프기는 했지만 도명이 예상한 정도의 통증까지는 아니었다. 도명이 상체를 일으키며 도화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왜, 왜요?”

“그게, 다입니까?”

“네?”

도명이 상체를 안쪽으로 말며 자신의 허벅지를 살펴보았다.

“애걔~?”

“그 반응 뭔데요?”

“내가 도화 씨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겨우 이겁니까? 이거 다음 날까지 자국이나 남겠어요?”

“더, 더 물어요?”

“네. 그리고 세게 좀 물어 봐요. 아 좀, 내가 아까 보인 냉정함에 대한 수고 값 좀 제대로 쳐요. 무섭고 서러웠던 마음 좀 끌어모으고.”

“아, 아플 텐데요.”

도화가 도명의 가랑이 사이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는 하얀 마음 백구라는 걸 내가 간과했네.’

“요도 플러그로 놀 경우 통증이 3일에서 일주일까지 갑니다. 워낙 자극적인 거라 한 달에 한 번 이상 하는 것도 몸에 안 좋고요. 도화 씨는 내내 아플 텐데, 나는 안 그럴 거라는 게 얄밉지 않아요?”

“돔님에게 그래도 돼요?”

“돔에게 감히 복수하면 안 되죠. 하지만, 오늘은 도화 씨의 무슨 날이죠?”

“생일이요!”

“네, 생일이잖아요. 아 진짜, 기운 빠지네. 제대로 좀 해 봐요.”

도명이 도화의 얼굴에 자신의 허벅지를 들이밀며 재촉해댔다. 도화가 침을 꿀꺽 삼키며 도명의 허벅지를 보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도명의 살에 이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도명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도명의 눈길이 도화의 페니스로 향했다.

“자국 난잡하게 나는 거 싫으니까 아까 박았던 데다 이빨 좀 제대로 맞춰 봐요.”

“네.”

도명도 긴장되는지 호흡을 정리한 후에 도화의 페니스에 박힌 요도 플러그를 뽑았다. 미칠 듯이 소름 돋는 아픔에 도화가 도명의 허벅지를 세게 물었다.

도명은 고개를 젖힌 채 통증을 겨우 참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도명은 브리프를 입은 채로 사정을 했다. 사디스트인 그가 통증에 사정을 한 것이다.

도화 역시 요도 플러그가 제거되자마자 신음을 거칠게 내뱉으며 정액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도명의 허벅지 위로 도화의 침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도명은 사정의 여운을 즐기며 도화의 땀에 젖은 두피를 만지작거렸다.

“으악, 도명 씨, 괜찮아요? 어떻게 너무 세게 문 것 같은데.”

“네, 세게 물었어요.”

도명이 발가락 끝을 움직이자 허벅지 근육이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나저나, 비싼 장난감 왜 안 가지고 놉니까?”

도명이 도화에게 빨간색 유성 펜을 건네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손을 거두고 더 좋은 장난감이 생각났다.

도화의 생일 카드에 단 한 번 찍기 위해 앞으로 쓸 일 없는 립스틱을 5개나 사는 건 아까운 일이었다. 도명은 도화가 벗기다 만 거추장스러운 바지를 벗고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왔다.

“자, 장난감.”

“아. 네.”

“내 몸에 메시지, 남기고, 기념사진 찍고 침대에서 2차 뜁시다.”

“2차요?”

“네. 비공식 행사죠.”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골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지분거리며 속삭였다. 도명은 도화의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완전히 넣고 손톱 끝으로 진동하는 로터를 만지작거렸다.

“다정하게 안아 줄 거예요?”

“자기야, 박는 데 다정한 게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죽겠다 싶을 정도로 박아야지.”

도화는 도명의 말에 꼬리뼈가 부르르 떨렸다. 도화는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숨 막히는 페니스를 상상하자 겨우 식어가던 온몸이 달아올랐다.

“어서 박히고 싶은 건 알겠으니까 일단 공식 행사부터 끝냅시다.”

도화는 조심스럽게 빨간 립스틱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도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꾸 시선이 그의 입술에 머물렀다. 도화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립스틱을 들고 도명의 입술로 다가갔다. 그러자 도명이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도화를 쳐다보았다.

“왜요? 안 어울릴 것 같다면서요.”

“그러니까요. 궁금해서요. 진짜 이상한지, 안 이상한지.”

도명이 도화의 말에 새침하게 돌린 얼굴을 도화를 향해 내밀었다. 도화는 집중을 하며 도명의 입술에 립스틱을 공들여 발랐다. 립스틱을 바른 도명의 얼굴을 본 도화의 표정이 묘했다. 그런 도화의 표정에 도명이 눈꼬리를 얄밉게 휘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렇게 생긴 얼굴은 뭘 해도, 옳다고.”

“아, 분하네요.”

“내 말이 맞으니까 분한 거지. 안 그래요?”

“…….”

“그것 봐, 도화 씨는 칭찬에 인색하다니까요.”

“맞아요. 으아, 이게 어떻게 위화감이 없지? 으아 왜 심지어 섹시하고 그래요.”

“잘생겨서 그렇다니까요. 아, 빨리 침대에 데려가서 뭉개 주고 싶어서 미치겠으니까 빨리 메시지 남깁시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팡 치며 말했다. 도화는 립스틱을 들고 고민에 빠진 얼굴로 도명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고민 끝에 도명의 몸 전체에 아주 크게 글씨를 썼다. 몇 번 안 쓴 립스틱이 뿌리 끝까지 뭉개질 정도로 크게 썼다.

- 2018. 9월 15일 pres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