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정벌레 신
두 달이 조금 넘는 해외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혁준이 도명의 가게에 들어섰다. 도명은 혁준이 좋아하는 비율로 만든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래간만입니다. 혁준 씨.”
“네, 오래간만이네요. 도명 씨.”
5년이 조금 넘게 관계를 가진 사람들치고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어색했다.
“문자로 말하기에는 무례한 것 같아서 바쁜 사람을 불렀습니다.”
“뭐, 해외에 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기분 나쁘지는 않았을 겁니다. 출장도 너무 길었고요. 도명 씨도 알다시피 할아버지가 3세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어서 언제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은 노력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많이 배우고 온 것 같습니까?”
“뭐, 적어도 회장님께 올릴 보고서 하나 쓸 정도는 배우고 왔죠. 아. 여기 선물 가져왔습니다.”
도명은 혁준이 싱가포르에 다녀온 후라 그곳에서 사 온 기념품쯤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명의 예상과는 다르게 혁준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성인 남성 상체 크기쯤 되는 오래된 액자였다.
액자 안에는 화려한 등껍질을 가진 딱정벌레들이 은색 핀에 꽂혀 있었다. 도명이 플레이를 하기 위해 혁준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침실에서 봤던 것이었다. 혁준의 집에는 희귀식물들과 함께 이런 것들이 꽤 많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침실에 걸린 건 딱 이거 하나였다.
“저한테 주는 겁니까?”
도명이 액자를 매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혁준은 푸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혁준 씨한테 꽤 의미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물건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서 지킨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다른 표본들처럼 태워 버릴까 봐 침대 밑에 깊이 박아 넣고 밤새워 지켰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제 기억이 틀립니까?”
“네 맞아요. 그런 거죠. 하지만 말 그대로 어렸을 때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정말 받아도 되는 겁니까?”
“네, 우리의 완벽했던 관계를 정리하는데 이것만 한 것이 없죠. 혹시 마음에 안 듭니까?”
“저는 뭐든 반짝이고 예쁜 걸 좋아합니다. 자연이 만든 것만큼 질리지 않고 오래 즐길 수 있는 건 드물죠. 그나저나 내가 오늘 할 얘기를 알고 있군요.”
“그럼요. 제가 무인도에 갇혀 있다가 나온 건 아니거든요. 도명 씨가 정리한 섭들로부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전화기에 불이 나는데 모를 리가요.”
“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제가 아는 그 얼굴입니까? 이 집 윗집에 사는 그 남자 말입니다.”
“네.”
짧게 대답하는 도명의 얼굴 표정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런 도명의 표정을 혁준이 신기하다는 듯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명은 자주 웃음 짓는 편이었지만 언제나 웃음 끝이 싸늘했다.
그와 관계를 맺어왔던 5년 동안 이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처음 보는 표정을 보니, 아,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기분이 묘했다.
도명을 추궁하러 온 건 아닌데, 도화 씨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냐고 추궁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혁준은 도명을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그 이유를 알면 뭐가 달라질까? 혁준은 도명에게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SM 플레이는 어떻습니까?”
“엉망진창이죠. 본능적인 가학성과 계산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오는 다정함 사이에서 헤매다가 맹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묘하게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 사람인데, 더 큰일입니다.”
“그러면 SM을 안 하면 되지 않나요?”
“개 버릇을 남 주지는 못하지요. 안 그래요?”
“상상할 수가 없네요. 맹탕인 플레이라니. 도명 씨는 언제나 제게 사늘한 온도였는데요. 목 뒤가 빳빳해지고 솜털이 다 곤두서는 그런 온도 말입니다.”
“그래서 섭섭합니까?”
“그 사늘함을 즐겨놓고 섭섭하다고 하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SM 플레이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바로 이겁니다.”
혁준이 도명에게 넘겨 준 액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혁준 씨가 SM 플레이를 하는 이유는 유치한 맛 아니었던가요? 유치하지만 현실보다 더 선명한 감각을 느낄 수 있어서. 이 딱정벌레 같은 혁준 씨가 산산조각이 나는 감각이었던가요?”
***
“도명 씨는 이 모든 연극이 유치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플레이가 끝나고 난 후, 혁준의 몸에는 온갖 빨간 자국이 선명했다. 혁준은 아직 몸의 통증이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잘 모르겠으니까 질문하는 거죠.”
혁준은 포르노 배우처럼 아무것도 안 담긴 욕조 안에 발가벗은 채 누워 있었다. 혁준은 약간 취기가 올라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 안 하겠어요?”
도명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도명이 와인으로 목을 적시는 혁준의 잔을 빼앗아 그의 머리 위로 쏟아부으며 말했다.
“혁준 씨는 어때요? 이 모든 짓이 유치해요?”
“네. 유치해요.”
“아, 맞다, 혁준 씨 이 와인 얼마짜리라고요?”
“한 병에 200만 원이요.”
혁준의 말을 끝으로 도명이 입꼬리를 씩 울렸다. 그리고는 더욱 사치스럽게 혁준의 몸 위로 와인 병을 들고 그냥 물인 것처럼 뿌려댔다.
“와, 기분 최고네. 이 와인 만든 사람은 자기 작품이 이런 취급 받고 있는 것을 알까요?”
도명이 와인 병 주둥이에 흘러내리는 와인을 혀로 할짝거리며 말했다.
“입금된 돈을 보는 순간 만족스러울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혁준 씨는 유치하다면서 왜 이러고 놀아요?”
“원래 유치하게 구는 것이 솔직한 거고, 솔직해지는 건 언제나 짜릿하잖아요. 도명 씨의 이유는요?”
“저도 혁준 씨의 이유와 같습니다.”
“이게 연극이라고 해도 뭐랄까 그냥 흉내는 아니잖아요. 결국은 연극이니 뭐니 떠들어도 진심이 없으면 삼류 연극이 되는 거죠. 차라리 초등학생 연극을 보면 귀엽기라도 하지, 어른들이 어설프게 만든 삼류 연극은 정말 봐 줄 게 없습니다. 안 그래요?”
“그래요.”
“제 전 애인들은 원숭이같이 흉내를 내더군요. 음, 말 그대로 원숭이 같았어요. 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순간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러면 나쁜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게 참.”
“이미 튀어나와 버린 생각은 주워 담을 수 없죠. 마음에는 도덕이니 뭐니 하는 게 없으니까. 이미 참을 수 없어서 튀어나와 버린 마음에 마음을 너무 쓰지 말아요.”
도명이 와인에 흠뻑 젖은 혁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결국은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아주 없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미뤄왔던 감정을 꺼내서 쓰는 건 아닐까요? 연극은 연극인데 연극을 하고 있는 동안은 확실히 현실이죠. 현실 안에 현실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렇군요.”
“도명 씨, 나를 밟아서 나의 본질을 보여 줘요. 나는 밟으면 바스러질 화려한 등껍질을 가진 딱정벌레예요. 이 화려함에 속지 말아요. 모든 수식어를 빼면 난 한마디로 벌레 새끼죠. 그러니 나를 마음껏 밟아요. 당신의 그 오만함으로.”
“와 진짜,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촌스러운 옛날 연극 같네요.”
도명의 그렇게 이야기하자 혁준이 술의 흥을 빌려서 만든 유쾌한 말투로 ‘원래 유치한 맛이라니까요!’라고 하며 소리쳤다.
***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어렸을 때는 이 딱정벌레들이 저에겐 작은 신들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신의 파편이 땅 위에 떨어진 것들이라고 생각했죠. 작지만 아름답고, 또 견고하며, 정교하죠. 이 껍질이 그 당시에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지금도 매료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지만요. 제가 오늘 도명 씨에게 준 건 저의 첫 번째 신의 파편입니다. 부유한 할아버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저는 어린 나이에도 이 진귀한 것들을 모을 수 있었죠. 남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악한 딱정벌레를 가지고 놀 동안 저는 진짜를 가지고 놀았죠. 그것도 멸종위기니 뭐니, 하는 것들까지요. 딱정벌레로 방 안을 가득 메우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지자 아버지는 그것을 매우 못마땅해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빼고는 다 태우셨죠.”
“네. 어린 저에게 그런 커다란 상처를 주면서 아버지는 훈계나 하셨죠.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정당한 이유에 대해서 늘어놓았어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저에게 상실감을 가르쳐 주고 싶었답니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아버지의 돈으로 너무 많이 가졌다고요. 아마, 일부러 딱정벌레로 방 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신 것 같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이 가질수록 상실감도 더 클 테니까요. 얼마나 지독한 사람입니까. 저는 불과 12살이었는데요. 두 번째 이유는 설명이 길었죠. 도명 씨, 이것들과 우리 인간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뼈대가 몸 안에 있는 것과 거죽에 있다는 것이지요. 뼈대가 몸 거죽에 있으면 외부의 위험을 막는 껍질의 형태를 띱니다. 살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물렁해지고 거의 액체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그 껍데기가 뚫리면, 그 피해를 되돌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입니다.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요? 뼈대가 몸 안에 있으면 가늘고 단단한 막대 모양을 띱니다. 살이 외부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죠. 그래서 아주 조그만 위험에도 상처가 수도 없이 생깁니다. 그리고 매번 고통스럽죠. 하지만 밖으로 드러난 이 약점이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고 섬유의 저항력을 키워 줍니다. 살이 진화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너는 이런 방법으로 진화된 것을 동경하지 말라 하셨죠.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의 방법을 동경하라 했죠. 그 당시에는 아버지 말씀에 반발심만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었던 것을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앉아서 그걸 보게 하셨으니까. 그리고 저는 그 사건 이후로 벼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틀릴 순간들을 숨죽이고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세상을 오래 살수록 아버지 말씀이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머리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를 만큼 분하지만 어쩌겠어요. 진리가 내 입맛 따라 나에게 찾아오는 건 아닌걸요. 그래서 언제나 인생은 쓰죠. SM을 하게 된 건, 맞으면서 살이 단단해지는 것에 도취된 점이 큽니다. 그 지독한 밤이 지나도 난 언제나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아침 해를 보죠. 그렇게 어렸을 때의 신이 내 안에서 바스러지는 기분이죠. 강력한 신을 죽이는 그 희열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신에게 매달리면서 동시에 그 신의 머리의 밟는 발칙한 상상을 하는 족속이 아닙니까.”
“혁준 씨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던가요? 밟으면 바스러질 화려한 등껍질을 가진 딱정벌레라고.”
“딱정벌레 신을 제 마음 안에 심으면 제가 딱정벌레가 되는 것 아닙니까? 매일 스스로 그 껍질을 부술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새 그 껍질을 두르고, 또 밟아 달라 애원하고 또 그 껍질을 두르고, 그런 것의 무한 반복이죠. 내 안의 신을 도명 씨의 구둣발을 통해 짓이겨도 딱정벌레는 제게 신이라서 언제나 내 마음 안에서 부활하죠. 부활하지 못하면 신이 아니니까. 내 몸을 둘러싼 완벽한 껍질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달콤하지 않던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도명 씨도 그 감각을 모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혁준이 도명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당신도 그 껍질이 가진 안락함과 자아도취적인 감각에 대해서 잘 알지 않느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지금 혁준 씨 눈빛이 불손하군요. 저를 마치 당신의 딱정벌레 쳐다보듯이 쳐다보고 있군요.”
“부정할 수는 없군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양에, 딱정벌레 관절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는 규칙,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단단함.”
“화려한 미사여구로 방금 혁준 씨가 한 모욕을 포장하려 들지 말아요.”
“도명 씨가 지금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화 순서지만 딱정벌레와 도명 씨가 달랐던 점은 도명 씨만은 영원할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도명 씨의 눈을 보는 순간에는 정말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하면서 저는 정말 그런 꿈을 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액자 속 신들보다 더 완벽하고 아름다운 신이었죠. 그래서 율법처럼 도명 씨가 사랑하지 말라 해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신을 잃을까 봐요. 그리고 오늘 깨달은 건 역시, 사람은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아버지가 또 맞았지요. 분하지만, 어쩔 수 없죠.”
“사랑을 하게 된 지금, 전 그 어떤 살보다 무릅니다. 동년배의 살덩어리보다 더 무르죠. 마치 모자란 사람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불평은 그만두고 껍질이 깨졌는데, 액체가 된 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합니까?”
“네, 도명 씨가 불평할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그렇군요. 혁준 씨는 다른 신을 찾아 나설 겁니까?”
“글쎄요. 잠깐만이라도 신이 없는 삶도 살아 볼까 합니다.”
혁준이 가게를 나가고 도명은 혁준이 선물로 주고 간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침대 머리맡에 이것을 걸어 두었는지 생각했다.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는 성경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이대로 되면 안 되겠다는 굳은 다짐이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정확히는 매일 밤 이 딱정벌레 표본의 의미가 달랐을 것이다.
도명은 이것을 어디에 둘까를 생각했다. 고민 끝에 도명이 결정을 내린 곳은 그의 행운의 클립을 보관한 캐비닛 안이었다.
너무 눈에 띄는 곳에 두면 혁준이 말한 것처럼 매일 부활하는 딱정벌레 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눈을 지나치게 현혹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단단해 보이는 껍질은 인간에게 얼마나 유혹적인가. 그래서 빛이 풍부한 곳에 이것을 두면 안 된다. 햇빛이 껍질 표면에 부딪힐 때 더욱 오묘하게 빛나니까.
영혼이 있는 보석 같은 이것들을 신의 파편이라고 어린 혁준이 오해한 것은 어린아이 특유의 지나친 과장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이 위험한 유혹은 이따금 들여다보는 마음의 거울처럼 캐비닛 가장 깊숙한 곳에 둘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이 뇌 속의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지는 것처럼, 적당히 그늘져 있어야 표본의 진짜 본질이 보인다. 안이 텅 빈 시체 조각. 이것이 도명이 본 표본의 본질이었다.
요행을 바라는 반짝이는 행운도, 심연의 경고도 모두 캐비닛 가장 깊숙한 곳에 두어야 마땅했다.
***
서윤은 혁준과의 미팅을 앞두고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작업물을 훑어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와의 미팅 시간은 언제나 어색하고 묵직한 공기가 흘렀다.
혁준이 내내 말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윤의 작업을 한참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차라리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며 계약을 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혁준은 서윤과 재계약을 선택했다. 서윤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계약서를 내미는 그를 향해 육성으로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라고 말할 뻔했다.
공적인 일을 가지고 그의 사적인 취향을 들먹일 일은 아니지만 이해하기 힘든 그의 행동에서 그가 마조히스트임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는 한 끝 차이라고 했다. 도명과의 관계에서는 그가 마조히스트일지 몰라도 이 관계에서는 사디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자꾸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자신의 작업을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도 새로운 프로젝트의 계약서를 내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서윤은 혁준이 매번 주는 압박감에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자신 쪽에서 그와의 계약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혁준은 돈을 잘 준다. 다른 좋은 일 두 건을 합친 것만큼 돈을 후하게 준다.
그리고 혁준과 일해서 얻은 포트폴리오는 다른 클라이언트에게 내밀기도 좋았다. 순수하게 예술에도 후원을 많이 하고 문화 산업에까지 사업을 확장하는 데 성공한 Y호텔과 협업했다고 하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좀 더 쉬워졌다.
다들 사진에 대해 아는 척하지만 서윤이 내민 강력한 사진 한 장보다 그 부분에 더욱 강한 설득력을 느끼곤 했다.
그런 아주 현실적인 이유로 서윤은 자기 스스로 혁준의 제안을 걷어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혁준이 더 이상 당신과 일을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부를 수도 있었다. 정말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것이다.
‘이번엔 제발 그만 좀 넘어가라!’
서윤은 그러다가 생각난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도명의 로즈 골드 색 클립이었다. 도명이 소중하다고 하니까 일단 사채업자 담보 잡듯이 받아왔지만 자신은 이걸로 코를 쑤시어야 하나 싶은 그 물건 말이다.
도명이 중요한 제안을 클라이언트한테 통과시킬 때마다 썼다는 그 전설의 아이템을 기억해 낸 서윤은 서랍 한구석에 싸구려 플라스틱 통에 담아 놓은 클립을 찾아냈다.
‘그래, 그 인간 속을 모르겠으니 행운이라도 얹어야지.’
서윤은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사진에 도명의 클립을 끼워 놓았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스튜디오를 나섰다.
혁준은 아니나 다를까 또 그 특유의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서윤이 가져온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서윤은 갑자기 말라오는 목에 비싼 호텔 생수를 목구멍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혁준이 손을 뻗어 서윤이 도명의 클립을 꽂아놓은 사진을 집었다. 그 순간 혁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방금 전까지 와는 다른 혁준의 표정에 서윤은 희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거, 도명 씨 클립이군요.”
‘거기에 반응한 거냐!’
혁준은 미묘한 표정으로 도명의 클립, 정확히는 가짜 클립의 표면을 매만졌다. 혁준은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다시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제가 도명 씨 잡지사에서 작업한 서윤 씨 사진 보고 부른 건 알고 있나요?”
“네.”
“서윤 씨는 BISCUIT FOREST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가장 특별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서윤은 혁준에게 칭찬을 받으면서도 명치끝이 안 좋은 방향으로 울렁거리는 게 그다음 이어질 말이 그다지 좋지 않은 말일 것임을 예상했다.
“그래서 불렀는데, 이상하게도 항상 제 기대만큼 못 미치더군요. 그래서 시간을 내서 서윤 씨의 다른 작업도 훑어보았습니다. 지금 제 앞의 사진처럼 기대에 못 미치더군요. 이것 참, 사람을 가지고 희망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못 미치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손보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더군요.”
혁준이 손가락 끝으로 도명의 클립을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어갔다.
“이 클립의 주인은 뭐랄까, 작품의 끝을 압니다. 물론 서윤 씨처럼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제품과 작품을 가르는 그 끝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도명 씨는 좋은 원석을 만났고 서윤 씨는 좋은 세공사를 만난 겁니다.”
‘그래서 일을 여기까지 하자고? 돌려서 말하지 말고 좀 확실하게 말해 봐.’
“중간에 도명 씨한테 도움 요청한 적 있죠?”
“네.”
‘그래서 도명 형 도움 계속 받으라고?’
“역시. 하아…….”
혁준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러댔다.
“도명 씨하고는 일이 좀 수월합니까?”
“아, 네. 딱히,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서윤은 정말 도명과 일하면서 불편하거나 어려운 일이 없었다. 평소에 티격태격하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매끄럽다고 이 따끔 느낄 정도였다. 도명이 까다로운 편이긴 하나, 자신의 작품이 깎아내려지는 느낌이 든 적도 없었다. 그냥 일상적이고 흔한 회의의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문제네요.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계산기 두들기는 사람이라 그런가, 서윤 씨가 뭐가 부족한지 설명하기 어렵네요. 서윤 씨, 사람들이 하룻밤에 가치를 느끼고 많은 돈을 쓰게 만들려면 어떤 감정을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일단 공들여 만든 비싼 브랜드니까, 단순히 Y호텔에서 묵는다고 지인들한테 과시할 생각으로 묵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우리 호텔의 미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하루를 위해 남은 29일의 노력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느낌, 예술에서는 아우라라고 표현들 하죠. 서윤 씨가 가져온 이 사진들은 숭고미와 아득함이 없어요. 굳이 까치발을 들고 손끝을 최대한 펼치지 않아도 그냥 닿을 수 있는 느낌입니다.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다정다감함에 큰돈을 지출하지 않아요. 이 노래, 알아요? 알 것 같은데. 너무 많은 가수들이 자신만의 색으로 끊임없이 부활시키는 노래죠. Over the Rainbow.”
“네 압니다. 모를 리가요.”
“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잖아요. Somewhere over the rainbow, 계속 반복되죠. 사람들은 이 노래 가사 같은 걸 꿈꿉니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 너머의 것을 꿈꾸죠. 보통 이 점을 건드리면 상품이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걸 알면 서윤 씨에게도 다른 세상이 찾아올 겁니다.”
“저에게 찾아올 다른 세상이라는 게 뭔데요?”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천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직설적으로 표현하죠. 돈과 명예가 있는 세상이요. 오히려 Somewhere over the rainbow라는 가사보다 현실적이라서 서윤 씨도 손에 쥘 수 있는 다른 세상이에요.”
서윤은 그의 말에서 그의 전 애인을 떠올렸다. 승진을 위해 스스로 미국지부로 건너간 사람, 그가 들뜬 표정으로 서윤에게 말했었다.
‘거기서 2, 3년만 있으면 우리에게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야!’
매일 같이 잠든 침대 머리맡에서 서윤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왜, 우리지? 당신 이야기잖아.’
그리고 두 번째 든 생각은,
‘왜 우리에게 다른 세상이 필요해? 우린 지금 충분히 행복하잖아. 당신은 그게 충분하지 않았어? 나만 행복했어?’
서윤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 해도, 완벽히 같은 인생의 관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가 기다려 달라 하면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서윤에게 같이 미국으로 건너가자고 하고 서윤이 그걸 거절했을 때 그가 불같이 화를 낸 순간 그와 이제는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서윤이 섭섭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그의 인생을 존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서윤이 한국에 남긴 그의 인생을 존중해 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한국에 들어왔는지, 연락이 왔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었다. 서윤은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지금도 이따금 형하고 지낸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형은 내 옆에 없지. 그래도 나는 슬프지 않아. 좋았던 기억이 생각나는 순간, 형이 내 옆에 없다는 게 슬프지 않아. 형.’
서윤은 그렇게 다시 시작하자는 옛 연인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대표님 말씀이 뭔지는 알겠습니다. 반영하겠습니다.”
“한서윤 씨, 정말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일 적인 면에서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일 적인 면에서는요?”
혁준이 서윤의 말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서윤은 그런 그의 표정에서 괜히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진짜 그토록 고대하면서 두려워했던, 그, 시원섭섭한 순간이 찾아오는 건가 싶었다.
“서윤 씨는 예술가예요. 물론, 상업적인 사진을 찍으니까, 사업가이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서윤 씨에게 다른 사진사보다 더 많은 돈으로 계약을 하는 건, 서윤 씨가 사진작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영혼 값을 인정하고 돈으로 쳐 준 겁니다. 그런데 일 적인 면에서는 알겠다는 말은 제가 요구한 내용이 감정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작가가 느끼지 못한 걸 어떻게 여기에 담죠?”
혁준이 서윤이 들고 온 사진을 흔들며 말했다.
‘아 여기서, 허언이었다고 할까? 이 사람은 그럴 어설픈 변명이 통할 사람이 아니야. 그래,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 이 일 없어도 굶어 죽는 건 아니잖아.’
“네.”
“내가 말한 것 어디가 어려웠다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감정 아닙니까?”
“어렵다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공감 가지 않습니다. 아, 그러니까 왜 다른 세상이 필요하죠?”
“네? 한서윤 씨는 돈과 명예가 좋지 않아요? 그런 것들 때문에 나와 불편한 감정을 참으며 매번 미팅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취미 생활 같지는 않은데요.”
“저, 돈 좋아합니다. 남들이 대단한 작가라고 해 주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을 테고요.”
“네. 그렇겠죠.”
혁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다른 세상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 하루도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다른 날들을 필요로 할 만큼 그렇게 의미 없지는 않습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요. 오늘 밤 잠에 들며 내일은 좀 더 괜찮을 날일 거라고 꿈을 꾸긴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수없이 많은 어제들과 오늘을 아무것도 아닌 날들로 여기에 될 만큼 다른 내일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의 다른 세상이 필요하다는 말이라면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의외로 서윤의 말을 들은 혁준의 대답은 간단했다. 너무나도 간단한 답이라 서윤은 정말 일거리 하나 날렸구나 싶었다. 계약서대로라면 최종 작업물을 넘기지 못할 터이니 잔금을 받기는 글렀다.
“그러면 그 어제의 날들이 허무해지지 않은 꿈을 어디 한번 담아 와요. 우리는 최고급 대리석으로 마감한 벽, 이런 걸로 광고하지 않습니다. 빈 공간을 대여해 주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빈 공간에 중점을 담아서 호텔을 설계했어요. 그 빈 공간 안에서 덜 감성적인 사람들이 뭐를 느껴야 하는지 사진 한 장으로 보여 줘요.”
“네?”
“뭐가, 또 네, 입니까?”
“아니 잘릴 줄 알았죠.”
“기대에 못 미친다고 자를 거면 진작 잘랐죠. 안 그러면 뭐 하러 저같이 바쁜 사람이 한서윤 씨를 공부씩이나 해서 이러고 있습니까? 내가 느끼고 있는 매력을 소비자들도 느낄 것 같으니까 이러고 있죠. 뭐, 이왕이면 한방에 알아서 해 주면 완벽하겠지만요.”
“돈도 많으신데 더 실력 있는 작가를 부르면 덜 피곤하시잖아요.”
“나하고 일하는 게 피곤합니까?”
“……아니요.”
서윤이 지나치게 뜸 들였다.
“피곤하군요.”
“아니, 오해이십니다. 아니. 사실 네. 하지만 그렇다고 일하기 싫은 건 아니고요.”
“뭐, 그럼 됐습니다. 저 같은 클라이언트 까면 이 업계에서 평판 안 좋아질 것만 알아만 둬요. 저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건 양날의 검 같은 겁니다. 잘하면 얻는 거 많고, 못하면 손이 베이는 거죠.”
“아. 네.”
‘아 젠장, 내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는 건가!’
“아, 의뢰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공적인 의뢰는 아니고, 사적인 의룁니다. 물론 계약서를 아직 쓴 건 아니니 거절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공적인 의뢰만큼이나 보수는 충분히 드릴 거고요.”
혁준은 다른 세상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혁준은 신이 없는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데카르트나, 니체 같은 사람은 신에게서 인간을 정신적으로 해방시켜 줬을지는 몰라도, 해방 그 후의, 인간이 가진 허무와 알 수 없는 공포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았다.
“사적인 의뢰라고 하시면……?”
“저를 찍어 주겠습니까?”
“아. 네? 아 자서전 내실 생각이세요?”
“아니요. 그냥 개인 소장용입니다. 요즘 나 자신에 대해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내 안의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동안은 틀어막기만 했지, 가만히 들여다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건은 오히려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쉬울 겁니다. 아우라니, 숭고미니 이런 것 필요 없이 그냥 한 인간에 대해서 찍는 것입니다. 굳이 어려운 점이라고 하면 불편한 인간과 같이 있는 시간이 는 것 정도겠네요.”
“왜 갑자기 그런 게 필요한데요? 아, 설마, 이 클립의 주인하고 관련 있는 겁니까?”
서윤이 로즈 골드 색 클립을 가리키며 말했다.
“관련 없다고도 말 못 하겠고 또, 전부라고 할 수도 없겠네요. 일단 도명 씨에 대해 남은 감정이라면 후회입니다.”
“후회요?”
“네, 그의 닫힌 완전함을 사랑하긴 했습니다. 왜 닫혀 있기에 완전한 것들이 있죠. 하지만 사람이란 게 그렇습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지개 너머가 궁금해지는 법이지요. 그때 당시 관계에 딱히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너머가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참았죠. 왜냐하면 무지개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린아이들은 그걸 몰라도 어른들은 알죠. 무지개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굳이 닫혀 있기에 완전했던 것을 깨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래서 도명 씨가 스스로 완전해지기 위해 정해 놓은 규칙들을 지켰습니다. 왜 영화 보면 완전히 끝인 것처럼 보이는 벽이 있고 그 벽은 책장으로 가득 차 있죠. 하지만 그 안에 다음 공간으로 열리는 장치가 있고, 그 장치를 여는 키가 수많은 책들 중 책 한 권일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도명 씨에게 그 책의 제목은 빤하고 상투적이게도 ‘사랑’이었던 겁니다. 빤하고 상투적이었는데 저는 몰랐던 거죠. 언제나 답을 알고 나면, 이걸 왜 몰랐지 하는 일이 많잖아요. 저도 딱 그 기분이었습니다.”
“혁준 씨도 형과 사랑하고 싶었어요?”
“네. 저도 규칙으로 적힌 그 책장 너머로 넘어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어리석게도 도명 씨의 책장의 키를 누군가 뽑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무지개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더군요. 어른이 된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말한 것들 중 어리석지 않은 것들 또한 섞여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죠.”
“도명 형이 사람에게 최면을 잘 걸긴 걸죠. 자신은 사랑을 안 한다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최면을 걸어 놨는데 대표님이 속은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왜 이도화라는 사람은 그 최면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제가 중간에 경고도 했습니다. 그에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요. 물론 제가 도화 씨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닙니다. 그 전까지는 정말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저는 쓸데없는 으름장을 놓은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억울하세요?”
“네?”
“많이 억울한 표정이라서요.”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이죠.”
“저는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걸 싫어합니다. 유치하든 뭐든, 내 감정은 감정이니까, 주변이나 나를 잡아먹을 정도가 아니라면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사실 저도 도명 형이 건 최면에 어쩌다 말려든 피해자 중 하나거든요. 같이 하찮은 복수 하나 할래요?”
“어떻게 말입니까?”
혁준이 그렇게 묻자 서윤이 씩 웃으며 도명의 행운의 클립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변기에 흘려보내는 동영상을 찍어 도명 형에게 보내는 겁니다.”
“도명 씨 물건을요? 물론 도명 씨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윤 씨에게 권리를 양도한 거니, 어떻게 하든 서윤 씨 마음이긴 합니다. 하지만, 도명 씨 은근히 그런 거에 많이 예민합니다. 미신을 안 믿을 것 같이 생겨서는 이상하게 물건에는 어떤 집념을 집어넣더군요.”
“네, 그러니까 형이 괴로워하라고 하는 거죠.”
“도명 씨에게 그래도 되는 겁니까? 도명 씨, 이런 취급 당한 경우 거의 없었을 텐데요.”
“제가 그래서 도명 형의 몇 안 되는 천적입니다.”
“도명 씨가 그쪽 갑 아닙니까?”
“형을 뭐로 보고요. 형이 얼마나 이, 성, 적인데요. 개인사로 사업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요.”
“도명 씨 아주 난리 날 텐데.”
혁준이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그래도 아주 하지 말자는 소리가 안 나오는 걸 보면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혁준은 도명과 관계를 정리하는 날, 애써 어른스러운 척했는데 이제 와서 유치한 복수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하고 싶었다. 혁준은 끙끙대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결심한 듯 손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합시다.”
“네!”
두 남자는 도명의 작은 클립을 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변기 앞에 섰다.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로 역할을 분담했다.
클립을 변기에 넣고 수몰시키는 자와 동영상을 찍어 도명에게 보내는 자로 역할이 나뉘었다. 결국 서윤이 변기에 클립을 버리는 역할이었고 혁준은 도명에게 영상통화를 했다.
“아, 네 혁준 씨, 무슨 일입니까?”
“네. 도명 씨, 사실 저는 그날 도명 씨에게 못다 한 말이 있었습니다.”
비장한 표정의 혁준의 뒤로 서윤이 얄미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서윤이 혁준의 뒤통수를 향해 ‘반말! 반말!’이라고 속삭였다.
“사랑하지 말랬잖아. 이 개새끼야.”
“혁준 씨? 아, 네 미안합니다.”
도명이 이걸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영상 속 장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이건, 형이,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기만한 벌이야.”
서윤이 눈을 반짝이며 도명의 클립을 흔들어 보였다. 그 클립을 보는 순간 도명은 어떤 표정을 지을 줄 몰라 하다가 일단 사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뭐하자는 거야. 한서윤.”
“그래, 나 한서윤이다. 한이 서려서 한서윤이다!”
“서윤아, 진정 좀 해 봐. 그걸 왜 들고 있어.”
“난 이걸 변기에 내릴 거야. 형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이 클립 말이야.”
“안 돼.”
“형이 구걸해도 소용없어.”
“서윤아.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야.”
“형, 나는 자비가 없어.”
서윤이 클립을 변기에 집어넣고 물 내리는 레버를 내렸다. 그리고 악당처럼 웃었다. 고급 호텔 대표의 개인 화장실답게 수압도 좋았다. 도명의 클립이 변기로 시원스럽게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명이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듯이 눈을 가렸다.
그렇게 서윤과 혁준이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 변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서윤과 혁준은 급하게 영상통화를 껐다.
그리고 작은 클립 하나조차 삼키지 못한 변기가 토를 하듯 울컥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변기가 역류해 바닥에 흥건해졌고 결국 도명의 클립은 물이 흥건한 화장실 바닥에 둥둥 떠다녔다. 서윤과 혁준은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작은 클립을 쳐다보았다.
***
혁준과의 갑작스러운 영상통화를 마친 도명이 표정 연기를 마치고 다시 싱긋 웃으며 도화에게 줄 오므라이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도명 씨, 무슨 일이에요? 아까 표정이 심각하던데.”
“네? 별일 아닙니다. 장난꾸러기들한테 전화가 와서요.”
“심각한 장난이었어요?”
“아니요. 심각하긴요.”
도명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도명 씨 표정이 심각했는데요.”
“도화 씨가 보기에도 그렇습니까?”
“네.”
“그렇다면 아직 연기 실력이 녹슬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연기요?”
“네, 그들하고 재밌게 장단 맞추며 논 거죠. 도화 씨, 소중한 물건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나에게 주는 게 아니에요. 역시나 그 아무나가 남의 소중했던 걸 아무렇게나 다루잖아요. 이것 하나만 알아도 당하고 사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겁니다.”
도명이 도화의 입가에 묻은 오므라이스 소스를 손으로 닦아 주며 다정하게 눈꼬리를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