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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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여러 가지 맛 눈물

도명이 라디오 부스에서 나올 때 시간은 오후 한 시였다. 도명이 관계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도화였다.

[도명 씨, 있잖아요.]

도화가 보낸 문자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대화하다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알맹이 없는 것을 굳이 문자로 보내나 싶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네, 도화 씨. 점심 잘 먹었습니까?]

[어제저녁 도명 씨하고 먹다 남은 불고기를 도시락으로 싸다가 먹었죠.]

[착하네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그게 왜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한테는 중요합니다.]

[아. 네. 저 그나저나 도명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물어봐요.]

[도명 씨 마음의 정원이 되는 사람은 몇 명이에요?]

‘라디오 청취하고 있었네? 굳이 왜?’

[라디오 들었습니까?]

[아. 네.]

[그걸 굳이 왜 들어요? 친구가 드라마 작가로 있으니까 평소에도 듣습니까?]

[아니요. 진영이 라디오 주로 점심 식사 때 나오잖아요. 저는 밥을 조용히 먹는 편이라서요. 그런데 오늘은 도명 씨가 나온다잖아요.]

[제가 나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제저녁 밤늦게 충동적으로 정한 건데. 진영 씨가 알려 줬습니까?]

[아, 진영이는 아니고요.]

‘역시 개복치라 연락도 못 해 봤네. 진영 씨가 무슨 일 있다고 연락할 사람이었으면 내가 여기 나타나기 전에 진작 했을 거고. 어쩌면 둘 다 이렇게 빤하지?’

[도명 씨가 직접 나오지는 않아도 도명 씨가 작성한 대본이 나오는 거니까 저한테는 도명 씨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안 나간다고 했던 도명 씨가 직접 나와서 놀랐어요. 매일 듣는 목소리인데 뭔가, 전파를 통해서 들으니까 기분 되게 이상했어요.]

[기분이 어떻게 이상했는데요?]

[네?]

[아니 기분이 어떻게 이상했냐고요. 우리 회사, 편집부 신입 표현력 좀 테스트해 봅시다.]

[제가 도명 씨 회사 신입이에요?]

[네. 사장 애인 믿고 출근 안 해도 사장이 내심 제일 예뻐하는 신입입니다. 어쨌든 기분이 어떻게 이상했어요?]

[몰라요.]

[뭘 몰라요. 다 알면서.]

도명이 스튜디오 벽 한쪽 구석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빙긋 웃으면서 문자를 했다. 누가 봐도 영락없이 연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도명의 앞을 진영이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도명의 눈이 핸드폰 화면이 콕 박혀 있었다. 하지만 눈이 얼굴에만 달려 있는 건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려는 진영에게 발을 뻗어 그의 행동을 정지시켰다.

건방지다면 건방진 태도였다. 진영이 알고 있던 도명은 언제나 부드럽고 신사적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없이 다리를 뻗어 가는 길을 제지하는 그의 행동에 당황했다.

진영이 멀뚱하게 도명의 정강이를 쳐다보았다. 도명의 구두코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진영이가 고개를 돌려 다리의 주인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명 역시 진영의 시선을 느끼며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진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진영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상대방이 웃으니 같이 기계적으로 웃었다. 도명이 말없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진영이 다시 멀뚱하게 도명을 쳐다보았다.

“같이 식사해요. 시간 괜찮죠?”

질문이지만 묘한 강압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아. 뭐.”

“PD님이 식사 시간이라던데요. 괜찮죠?”

도명이 진영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자 맹한 진영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명이 다정하게 웃으며 옆에 앉아서 기다리라는 듯이 다시 한번 옆자리를 가리켰다.

진영은 두 다리를 모으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 지인하고 대화 조금만 더 하고 출발할게요.”

도명이 진영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도화에게서 답장이 왔다.

[도명 씨 목소리 엄청 섹시했어요.]

[그게 다입니까?]

도명이 아쉽다는 듯이 문자 했다. 도화라면 적어도 여러 문장으로 말해 줄 것 같았다. 도명은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오는 도화의 재잘거림을 좋아했다.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도화의 말들이 좋았다. 그냥 많을수록 좋았다.

진영은 대체 이 남자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표정이 이렇게 신났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남의 대화를 엿보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시선을 애써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의식이 하는 노력은 무의식이 시키는 은밀한 명령을 이길 수 없었다. 진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눈동자가 도명의 핸드폰 화면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도명이 관자놀이에 눈이 달린 사람처럼 진영의 눈동자가 굴러가기 시작하자마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적인 문자인데요.”

“아, 죄송합니다.”

“그렇죠? 조심해 줘요.”

“아. 네.”

[그냥 내내 섹시하다고만 생각 들었어요.]

그사이 도화에게 문자가 왔다.

[또, 야한 생각만 하고 산다.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겠네요. 하루 종일 나랑 잘 생각만 하는 덩치 산만 한 백구가 있는데 무섭지 않겠어요? 이게 백구야, 호랑이야?]

[아닌데요. 저 하루 종일 건전한 생각만 하고 사는데요. 있잖아요, 도명 씨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도명 씨 마음의 정원이 되는 사람은 몇 명이냐고요.]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직접적으로 묻지그래. 라디오 마지막 대사 자신에게 한 말이냐고. 소심한 게 귀여워 죽겠네.’

[음, 한 15명, 아니 28명, 65명인가?]

[아. 그렇군요.]

‘지금 시무룩해 있지? 꼬리 엄청 신나게 흔들다가 귀 접혀 있잖아.’

[도명 씨는 신경 쓰는 사람이 참 많구나. 65개국어 새로 배우려면 힘들겠어요.]

‘이거 비꼬는 건가? 아니지. 백구 성격에 비꼴 리가. 시무룩해 하면서 최대한 좋게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겠지.’

[뭘 65개국어나 배울 필요가 있어요?]

[도명 씨 마음의 정원인 사람이 65명이나 된다면서요.]

[제가 새로 배울 외국어는 단 한 개밖에 없어요.]

[네?]

‘지금 다시 기대하고 있지? 아, 더 놀리고 싶은데 진영 씨를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하네.’

도명이 아쉬운 표정으로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제가 배울 외국어는 백구 어 하나밖에 없고요, 사실 제 마음속 정원도 딱 한 개예요. 당연히 라디오 마지막 멘트는 도화 씨 거지 누구겠어요.]

딱히 도화에게서 그다음 문자는 오지 않았다. 아마, 너무 낯간지러워서 그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진영 씨, 밥 먹으러 갑시다.”

진영과 도명은 작지만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에 왔다. 고급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메뉴판을 보니 진영의 표정이 더 복잡해졌다.

가격이 한 끼 식사로 때우기에는 너무 셌고 메뉴 안 요리 이름도 하나같이 낯설었다. 영어로 된 요리 이름 아래 한글로 설명을 친절하게 해놨지만 여전히 뭐를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자신이 왜 도명과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는 메뉴판 가지고 고민할 게 없어요. 여기 셰프가 매일 오늘의 요리라고 하는 메뉴가 있거든요.”

도명이 메뉴판 위에 클립과 함께 꽃은 작은 메모지 같은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레이 색 종이 위에 펜으로 직접 적은 요리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통 그날 들어온 재료 중 가장 맛을 낼 자신 있는 걸 여기에 적어요. 오늘은 가리비가 좋은 게 들어온 모양이네요. 혹시 가리비 못 먹어요?”

“아니요.”

“그럼 저와 셰프를 믿고 그걸 먹어 볼래요?”

“아. 네.”

진영의 눈이 하단에 적힌 가격표로 또르르 굴러갔다. 진영은 최근 결혼하면서 용돈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진영이 모은 돈과 부모님이 보탠 돈으로 일단 전세로 아담한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세다 보니 다른 신혼부부들이 그러듯이 내 집 마련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 덕에 진영은 조금 빡빡한 용돈을 받고 있었다.

평소 하루 점심 식사 가격은 7천 원이었다. 두 부부가 식탁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계산기를 돌리니 4천 원에서 5천 원이어야 했지만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지나치게 희생하지 말자고 7천 원으로 정한 것이다. 물론 신용카드가 따로 있지만 웬만하면 안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진영의 눈앞에 있는 숫자는 삼만 오천 원이었다. 진영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굴렸다. 오늘 삼만 오천 원을 씀으로써 며칠을 아껴야 하나? 약 4일이다. 이걸 먹고 나면 4일은 식비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새삼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화려하고 높은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건물주라는 사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집은 이미 마련했으니 지금 당장 허리띠를 바짝 조이고 살 일은 없는 것이다.

“저 여기 초대받고 온 거예요. 단골이라고 그냥 식사하러 오라고 하더군요.”

“아 카페에서 도장 찍어 주고 한 10개 모으면 아메리카노 한 잔 그냥 주듯이요?”

“네, 그런 셈이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도명은 나가면서 카드로 계산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진영은 도명의 하얀 거짓말 덕분에 맘 편히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평소 이런 데 자주 오나 봐요.”

“주로 집밥을 먹는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외식도 꽤 좋아하죠. 제가 세상 모든 요리를 할 줄 아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역시 재능 있고 이것만 하는 사람들의 실력을 맛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안 그래요?”

“아, 이런 데는 특별한 날 제 아내하고 데이트할 때 빼곤, 안 와 봐서요. 특히 그냥 남자 지인하고는 도명 씨가 처음이네요.”

“저는, 그 누구와도 오는 편입니다. 굳이 데이트 상대가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그냥 나한테 근사한 요리를 먹여 주고 싶으면 동행인은 아무래도 상관없죠. 심지어 동행인이 없이도 근사한 곳에서 식사 잘해요.”

“아, 대단하시네요. 저는 절대 혼자 밥을 못 먹거든요.”

“저는 제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아. 네.”

“저, 그나저나 말해 봐요. 대체 언제부터 도화 씨가 동성애자인 걸 알았어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오는 도명의 질문에 진영이 당황했다. 그러다 이내 도명에게 반격했다.

“그래서 도명 씨는 언제 내 친구랑 사귀게 됐는데요?”

“사귄 지는 얼마 안 됐고 미묘한 감정이 오간 건 꽤 됐죠.”

“그날 싸운 거죠?”

“싸웠죠. 진영 씨 가고 도화 씨랑 저도 2차전 했어요.”

“저한테 커밍아웃하는 문제 때문에 싸운 거죠? 도명 씨는 이미 이상한 뉘앙스를 많이 풍겼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커밍아웃해 버리라고 했을 거고, 도화는 그럴 수 없다고 했겠죠. 그런 의견 차 때문에 싸운 거죠?”

“진영 씨, 추측 참 잘 하네요. 도화 씨는 추상적인 감만 좋지, 구체적인 추측은 정말 이상하게 하거든요.”

“저, 도명 씨,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사람으로 보이나요?”

“제가 진영 씨에 대해서 어떻게 알겠어요.”

“아 그렇겠죠. 그런데 제가 도화가 동성애자인 걸 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일단 결정적인 건 도화 씨한테 화내는 진영 씨 표정이었어요. 저는 그날 표정 관리를 못 했고, 도화 씨 거짓말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못하잖아요.”

“네. 끔찍할 정도죠. 저를 속아 넘겼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얼마나 가당치 않은지 압니까?”

“왜 모르겠어요. 근데 전 그거 귀엽던데요.”

확실히 오래된 친구의 남자 애인에게서 듣는 저런 말은 진영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도화가 귀엽다니! 그 키는 더럽게 크고, 말 살갑게 하는 법이 없는 그 녀석이 귀엽다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도명의 말에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느끼는 진영 역시, 평소 도화와 좋은 감정일 때는 내심 귀엽다고 생각했다. 물론 도명이 느끼는 것보다는 덜 달달한 형태로 말이다.

“아, 그날 도화 거짓말이 귀여웠다고요?”

“아. 같이 거짓말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귀엽지는 않네요. 아. 음. 네 끔찍했죠.”

‘진짜 입에 뭔가 물리고 싶었지.’

두 사람은 이야기하느라 음식이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느끼지 못했다. 두 남자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음식이 주는 풍부한 냄새에 감정과 언어가 부드럽게 이어져갔다.

“어쨌든 당연히 진영 씨는 우리 둘 사이의 미묘함을 알았을 거고, 그렇게 화를 내고 갔다면 둘 중 하나 아니겠어요? 도화 씨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소름 돋거나 도화 씨가 자꾸 하는 거짓말에 화가 난 거죠. 그런데 같은 안 좋은 표정에도 사람의 얼굴 근육은 다른 방법으로 움직여요. 적어도 혐오의 표정은 아니었죠. 진영 씨 표정엔 뭐랄까 서운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안 좋은 표정은 안 좋은 표정이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았거든요. 정확히 사람의 기분이나 마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카페 창가에 앉아서 길을 가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세요. 아마 첫날은 그냥 다 똑같이 무표정한 사람들 얼굴만 보이겠죠. 하지만 관찰의 시간을 늘리면 사람들이 짓는 표정이 얼마나 많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관찰하는 시간이 길수록 더 많은 표정을 구분 지을 수 있을 거예요. 이 짓을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해 온 사람이면 혐오와 섭섭함 정도는 구분하지 않겠어요?”

“와, 도화, 큰일이네요. 그냥 거짓말 못 하는 애가 이런 도명 씨를 만나서…….”

진영은 차마 다음 말을 마저 이어가지 못했다.

이쯤 되니 도화가 한참 아랫집 주인 남자가 소름 돋는다고 말했을 때는 솔직히 얘 또 안 좋은 쪽으로만 사람 판단한다고 생각했는데, 도화가 느낀 감정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속마음이 어떤 사람이든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사람은 껄끄럽기 마련이었다.

누군가 나에 대해 잘 안다는 건 어떤 순간에는 기쁨이 될 것이지만 지나치게 잘 아는 것은 강제로 옷이 발가벗겨진 채 그 사람 앞에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그 시선이 내게 따로 어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는 어떤 권력 앞에 선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의 깊이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바뀐다. 내 살갗을 누르는 다정한 압력이 어느 순간 토독 하고 내 하얀 살의 표면을 찢고 그 속을 비집고 들어 올 수도 있다. 안쪽에 있는 붉은 살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만져진 적 없기에 조금의 마찰에도 소스라치게 만든다.

도명은 진영의 말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듯이 웃었다. 도명이 유일하게 빤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도화고 도명이 유일하게 지고도 2배로 돌려주지 않는 사람 역시 도화였다.

그리고 무해한 얼굴로 서서히 도명의 심장을 쥐고 흔들며 그의 머리 위에 앉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도화가 수시로 도명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을 지표 삼아 오판해서는 안 된다.

간악함을 이기는 것은 더 간악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간악하지 않음이었다. 도명은 손에 들고 있던 예리한 쇠붙이를 내려놓고 도화라는 정원 안에 완벽한 포로로 갇혀 있었다.

자발적으로 그 정원 안에 있고 싶은 감정이 그를 붙잡아 두었다. 도명을 가둘 창을 일렬로 세워 놓을 것 같은 높은 울타리는 필요 없었다.

그리고 예리하게 길들였을 쇠붙이는 정원 어딘가에서 분실됐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또 정원은 너무 울창해서 그걸 찾는 일은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그 표정만으로 제가 도화가 동성애자인 걸 안다는 것을 알았나요?”

“제가 동성애자이고 또 도화 씨가 저와 친밀하게 지내는 걸 이상하게 숨긴다 해도 바로 내 친구도 동성애자라고 생각을 연결하기 쉽지는 않지 않나요? 그게 오랜 시간을 공들이지 않으면 바로 받아들여지는 감정도 아니고, 또, 이성애가 기본값인 이 사회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향성은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니 전부터 진영 씨가 절 대하는 태도도 묘하더군요. 진영 씨가 나한테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에요. 가령 내가 동성애자인 걸 도화 씨한테 말 안 했듯이 도화 씨 역시 동성애자인 걸 말 안 했다든지요. 두 사람 모두에게 비밀일 터니 차마 말을 못 했겠죠.”

“저는 도화가 평생 사랑도 못 하고 혼자 그렇게 사는 게 싫었어요. 입이 정말 근질거렸죠. 아랫집 남자도 너와 같은 동성애자래. 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심 떠보기도 했는데요.”

‘야 근데 같은 남자가 봐도 주인집 남자 진짜 잘생겼더라. 막 TV에 나오는 사람 같아. 스타일도 세련되어 보이고. 직업이 디자이너나 패션 쪽이라고 해도 믿겠어.’

‘게이세요? 사내새끼 잘생긴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사내새끼한테 그렇게 섬세하고 좋은 냄새 나는 거 난 오히려 소름 돋던데.’

‘뭘 그렇게 까대냐. 잘생긴 건 잘생긴 거지.’

‘네 취향이냐? 10년 넘은 친구 말 같은 건 귓등으로만 들을 정도로 그쪽에 그렇게 꽂혔으면 사귀든가요. 나는 당신의 커밍아웃을 지지까지는 안 해도 비난은 안 할게. 수정 씨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남자친구가 딴 여자, 아니 남자한테 눈길을 준다고.’

‘그런 생각 안 들어? 전혀?’

‘남자를 상대로 그런 생각 들고 할 게 어디 있어? 잘생겼든 그렇지 않든 사내새끼는 사내새끼지.’

“방어가 지나치게 심하더라고요. 도화의 지나친 NO는 보통.”

“YES죠.”

“네.”

“도화 씨한테 먼저 연락 주면 안 돼요? 솔직히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비밀을 어디까지 말할지에 대한 건 그 사람의 결정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어요. 네가 서운해하는 건 잘못된 거다. 근데 역시 서운한 기분이 계속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고 그날은 굳이 도명 씨와 싸워가면서까지 나한테 이래야 하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을 달래도 서운해요. 아니면 도명 씨가 살짝 귀띔해 주면 안 돼요? 지금 방법은 제가 도화에게 윽박질러서 말하는 것밖에 없지 않나요? 계속 도화 어이없는 거짓말들 들어 줄 인내심 없어요.”

“귀띔은 이미 했죠. 그러다 싸웠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지금 진영 씨와 이런 말 하고 있는 것도 알면 대체 왜 그러냐고 그럴 것 같은데요. 저 이미 낙인찍혔어요. 본인과는 달리 커밍아웃이 취미고 레저인 사람이라 자기 인간관계까지 제 세상에서 했던 것처럼 막 터뜨리고 다닌다고요.”

“그럼, 몰라요. 저도. 지금 둘이 이런 이야기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차라리 윽박지르지 그래요? 그동안 서운했던 것 담아 몰아붙여 봐요.”

“네?”

“도화 씨 생각보다 윽박지르는 거 잘 견딥니다.”

“네?”

“단, 퇴로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럼 오히려 역효과죠.”

“네?”

“아, 그리고 이런 설계는 강약의 타이밍도 중요하고요. 아주 미묘하죠.”

“아니 도명 씨,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

도화는 오늘 하루 종일 도명의 라디오 목소리가 귓가에서 붕붕 떠다녔다. 뭔가 직접 그의 성대를 타고 오는 목소리는 목소리대로 달콤하고 전파를 타고 온 목소리는 목소리대로 낭만적이었다.

하루 종일 퇴근 시간만 기다린 것 같았다.

평소 칼퇴근 장인이지만, 그렇다고 퇴근 자체를 이렇게 목매어 기다린 적은 없었다. 그 전에는 집에 가서 할 건 이미 본 공포영화를 보고 씻고 자는 것뿐이었기에 그가 칼퇴근을 하는 건 그저 하루의 일과를 거쳐 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

도화는 요즘 부쩍 다른 사람들처럼 퇴근에 목매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그 기분이 유독 강렬했다. 어서 집으로 달려가서 도명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도화는 최근, 자신의 불성실함을 사장이 눈치챌까 봐 내심 걱정했다.

[도화 씨, 오는 길에 초밥 좀 포장해서 올래요? 오늘 내가 너무 바빠서 저녁 식사 준비는 물론 저녁 먹는 시간도 아끼고 싶은 날입니다.]

도화는 같이 먹을 초밥을 사와 달라는 도명의 문자에 퇴근길에 초밥집에 들렀다. 이렇게 매일 먹는 메뉴에 대해서 고민하는 하루 또한 즐거웠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나날들이라는 것을 메뉴 고민으로 느꼈다.

도명은 도화에게 직접 음식을 해 주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렇게 들어오는 길에 뭐 사 오라고 하는 건, 간단한 재료 정도였다. 외식을 한다면 언제나 주방장의 솜씨가 좋고 음식이 정갈하게 나오는 집에서 식사를 했다. 왠지 포장 음식과 도명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명이 언제나 한가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날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미각, 시각, 촉각, 청각 등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은 비워두는 도명이었다. 그런 그가 밥 먹을 시간조차 아끼고 싶다니.

그 와중에 사료 먹듯이 정말 대충 먹을 수는 없는지 메뉴는 초밥으로 골라 놓은 게 그답다면 그다웠다.

도화는 초밥을 기다리면서 지나치게 기분 좋던 기분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진영이가 생각 난 것이다. 오늘 도명은 진영을 봤을 것이다.

자신이 도명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니, 신경 안 썼을까? 그걸 바란 것은 사실이지만 내심 그가 눈치껏 진영의 기분을 떠보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도명은 자신과는 달리 좀 더 티 안 내면서 능숙하게 상대방에게서 정보를 캘 텐데. 신경 쓰지 말라 해놓고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변덕이었다.

그래도 세상이 끝난 기분이 안 드는 건 오늘 하루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도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명만으로도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대체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울한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생겼다.

그가 인생의 전부인 것 이상의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없어도 괜찮아, 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다른 의미로 완전한 것이었다.

‘나에게도 도명 씨는 정원이에요.’

도화가 그렇게 일식집 바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긴 사이 포장된 초밥이 나왔다. 어차피 도명은 많이도 안 먹을 거니 참치 뱃살 같은 귀한 부위들로 샀다.

도화 자신의 것은 계란, 문어, 유부 같은 것이 섞인 조금은 평범한 초밥들이었다. 도화는 그래도 15조각 이상은 먹어야 배가 부를 테니까 평범한 것들로 채워야 수지타산에 맞았다.

그래도 도명의 것을 사는데 너무 아낌없이 사서 그런지 돈은 좀 나왔다. 그래도 도화의 식생활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치고는 식대가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다.

대부분 마법의 상자처럼 온갖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재료들이 나오는 도명의 냉장고 덕분이었다. 그래서 도화는 오히려 이렇게 자기 돈을 쓰는 일이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뭔가, 그에게만 받는다는 느낌이 덜 들었다.

도화가 초밥을 포장해 오고 도명의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는 도명의 가게 안 불이 꺼져 있었다. 정문을 잡고 흔들어 보니 역시나 잠겨 있었다.

“도명 씨, 어디 있어요?”

[집이요. 계단 문은 열어 놨으니 내려와요.]

수화기 너머로 도명이 타자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넣고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아. 네.”

도화는 새삼 도명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설렜다. 도화가 까치발을 들고 도명에게 다가왔다. 도명은 정말 바쁜지 도화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노트북 화면에 고정했다.

도화와 도명은 매일 보는 사이긴 했지만 아침에도 인사하고, 저녁에도 인사했다. 그리고 한 건물 안에 있어도 헤어진다고 또 인사했다. 이렇게 인사가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먼저 먹을래요?”

도명이 도화가 온 줄는 알고 있는 건지 시선을 여전히 노트북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도화는 자신이 왔는데 시선조차 안 주는 도명에게 좀 섭섭했다.

오늘은 유난히 도명이 보고 싶은 날이었다. 그러기에 더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도화는 그런 섭섭한 기분을 그가 오늘 유난히 바쁜 날이라는 것을 되새기며 달랬다.

“아 도명 씨는요?”

“마감, 2시간 남았습니다. 제가 마감에 늦으면 직원들한테 어떻게 마감 시간을 지키라고 하겠어요? 얼굴에 철판 까는 거 아닌 이상.”

“아. 그래도. 밥은 먹고.”

도화가 도명이 일하고 있는 좌식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내가 밥이 중요한 게 아닌데.”

도명이 접시 위에 올라간 호두와, 아몬드를 입안에 넣고 씹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먹여 주고, 도명 씨는 계속 일하면 안 돼요?”

“도화 씨, 2시간만 가만히 있읍시다.”

냉정하게 뚝 떨어지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초밥이 든 종이 백만 쥐었다 피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그의 성질을 건드리고 그가 조금이라도 짜증을 내면 도화의 기분이 많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도명이 평소에도 말을 예쁘게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이상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잔뜩 부푼 상태로 그를 만나러 왔기에 조금의 그의 짜증에도 기분이 많이 안 좋을 것 같았다.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푼 만큼 기분이 바닥으로 툭 떨어질 게 분명했다. 마치 바이킹을 타거나 번지점프 하듯이 말이다.

도화가 조금은 시무룩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발소리조차 안 내려고 발꿈치를 들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도명이 말했다.

“어디 가요?”

“네? 아, 저는, 도명 씨가 많이 바쁜 것 같아서요.”

“가라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그, 그럼요?”

“방치 플레이 알죠? 혹은 가구 플레이라든지.”

“아. 네.”

“그것 좀 합시다.”

“네?”

“이리 와요.”

도명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도화가 얌전히 옆자리에 앉자 도명이 말했다.

“이제 자신이 무릎 담요라고 생각합시다. 도화 씨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 무릎 담요요?”

“네. 지금 제가 도화 씨한테 길게 설명할 여유 없다는 거 알죠?”

이쯤 되면 도화 역시 그냥 자신을 보내고 일 끝내고 보는 건 어떠냐는 말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일단 그가 원하는 일이니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도명의 눈길이 도화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늘 아침 이후로는 처음 마주친 눈이었다. 그의 눈이 어서 내 무릎 담요가 되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도화는 일단 무릎 담요의 기분을 느끼려고 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명의 무릎 위에 누웠다. 무릎 담요는 무릎 위에 있으니까. 그리고 담요는 어떻지? 보들보들하고, 또, 따뜻하다. 일단, 보들보들은 모르겠고 체온이란 게 있으니 따뜻하긴 할 것 같았다.

‘또 담요는 딱딱하지는 않으니까 몸의 긴장을 풀어야 하나?’

도화는 도명의 무릎 위에 누워서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무릎 담요는 표정을 어떻게 짓지? 음, 적어도 화나 있거나 엄격하진 않을 거야. 표정도 부드럽게 풀어야 하나?’

도화는 도명의 일하느라 몰입된 표정을 보니 표정이 저절로 헤벌쭉 늘어졌다. 찌푸려진 미간에서 섹시함이 느껴졌다. 잘생긴 남자와 연애하는 건 어떤 면에서는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가 가만히만 있어도 연애 기분이 드니,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이거 SM 플레이치고는 너무 보들보들한 거 아냐? 이런 플레이는 또 처음이었다.

도명의 무릎 담요가 되는 건 30분이 지나자 고비가 찾아왔다. 그리고 고비가 지나자 잠이 왔다. 그가 타자를 두들기는 소리가 묘하게 비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잠이 왔다. 무릎 담요는 너무 잠이 왔다.

도명은 마지막 파일을 메일을 보내고 자신의 무릎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화 씨?”

백구가 배를 드러내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 와중에 몸을 둘러싸는 담요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얼굴을 도명의 배꼽 부분에 박고 팔로 도명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도화가 숨을 쉴 때마다 도명의 배에 그의 따뜻한 숨결이 부드럽게 퍼졌다. 도명이 그런 도화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담요가 푹 퍼졌네.”

도명이 담요의 털을 매만지듯이 도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테이블 옆에는 도화가 사 온 초밥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도화가 잠든 모습이 귀여웠지만 밥은 먹여야겠다.

도명은 귀여우면 오히려 손으로 탁 치거나 꼬집어야 직성이 풀렸다. 고약한 성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참을 수 있는 종류의 충동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종류의 욕구를 참을 수가 있었으면 SM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명이 도화의 이마를 딱 소리 나게 쳤다. 도화가 깜짝 놀라서 반쯤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이마가 보기 좋은 색으로 빨갛게 익었지만, 너무 놀라서 아픔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플레이하다가 잠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 담요니까, 움직이는 것보다 잠드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말대꾸 꼬박꼬박 하는 거 보니까 엉덩이 좀 때려야겠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쳤다. 도화는 그의 손길에 귀 끝까지 열에 달아올랐다.

“일은 끝났어요?”

“네.”

“오늘 정말 바빴나 보네요.”

“저조차도 예상치 못한 스케줄을 하나를 소화하고 보니, 이렇게 됐네요. 배고프죠? 식사합시다.”

“아. 네. 아 큰 상자는 제 거고요, 작은 상자는 도명 씨 겁니다.”

“잘 먹을게요. 도화 씨.”

초밥 상자를 열어 보니 초밥 개수의 차이도 있고 초밥의 종류 차이도 있었다. 도화의 생각이 초밥 상자들이 열리자마자 한눈에 보였다. 도명은 자신의 초밥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초밥을 도화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아, 그거 도명 씨 건데요.”

“도화 씨도 넣어 주면 되죠.”

“왜 굳이 각자 손이 있는데…….”

“내가 먹여 주는 게 그렇게 싫습니까? 제가 다정할 때 받아먹어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거 아니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서로 먹여 주면 되겠네요.”

“도명 씨는 진짜 은근히 실속을 못 챙기네요.”

도화가 자신의 입술 앞에 놓인 초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뭘요?”

“으아, 도명 씨 건…….”

도화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평소에 눈치 빠른 남자가 지금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눈치가 없는 건 도화 씨 쪽이에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잠시 갸우뚱하다가 그제야 도명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럼 딱 세 개만 먹어요. 됐습니까?”

“네.”

도화의 입안에 초밥이 들어갔고 그의 혀 위에서 주도로 살이 녹아내렸다. 역시 비싼 게 맛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이왕 돈 쓰는 거 양쪽 다 특수부위로 살 걸 했다. 괜히 가성비 신경 쓰다가 도명이 쓸데없는 것으로 신경 쓰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식사가 끝나고 도명이 보여 줄 게 있다고 해서 다시 화원으로 올라왔다.

“눈 감아요.”

“네? 아. 네.”

도명이 눈을 감으라고 해서 눈을 감긴 감았는데 눈을 감고 걸으니 무서웠다. 그래서 자꾸 발끝에 조금이라도 뭔가 걸리는 것 같으면 본능적으로 눈꺼풀 사이를 열었다. 그럴 때마다 도화의 가늘게 떠진 눈꺼풀 사이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명의 얼굴이 보였다.

결국 도명이 넥타이로 도화의 눈 앞을 가렸다. 눈을 떠도 보이는 짙은 감청색의 밤 앞에서 도화가 의지할 건 마주 잡은 도명의 손밖에 없었다. 화원의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목을 스쳐 지나간 잎사귀 감촉이 싸늘했다. 도화는 오싹오싹한 기분에 날갯죽지가 움찔거릴 때마다 도명의 팔에 매달렸다.

“나와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네? 아, 물론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주춤거려요? 섭섭하게.”

“아 혹시, 발에 뭔가 걸릴까 봐요.”

도화가 앞에 뭔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에 발을 앞으로 내밀며 바닥을 비벼댔다. 도명이 한쪽 눈썹을 쓱 올리며 그런 도화의 발을 슥 밟았다.

“악! 뭔가, 뭔가 있어요! 악의가! 뭔가 악의가 느껴져요!”

“내 발입니다.”

“왜 사람 발을 밟고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얄미워서요. 좀, 한 치 앞이 안 보여도 나와 가는 길이면 좀 낭만적으로 생각할 순 없어요? 이거 공포 특집 아니에요.”

“하지만 도명 씨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도명 씨는 제가 이렇게 끌고 가면 안심하고 따라올 수 있어요?”

“제가 도화 씨를 어떻게 믿고요?”

도명이 뻔뻔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것 봐요! 본인도 그러면서.”

“난 꼼꼼하고, 도화 씨는 털털하고 또 충동적이잖아요. 그냥 내 몸은 내가 챙길게요. 도화 씨 발에 뭐 걸려서 크게 넘어질까 봐 이미 바닥은 점검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면 눈앞에 보일 것에 설레하는 마음으로 갑시다.”

“아, 혹시, 신상 X자 형틀 설치했어요?”

“아. 제가 그런 거 도화 씨 몰래 설치하면 설레요?”

“아니요. 아니, 음, 모르겠어요. 설레나?”

“참고할게요.”

“네? 아 네? 참고하지 마세요. 모르겠다니까요.”

“뭘 자꾸 모릅니까?”

그렇게 도화와 도명이 작은 실랑이를 하며 도명이 피아노를 놓은 온실에 도착했다. 피아노 위에는 조명이 하나 올라가 있었다. 도명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도화의 눈을 가린 안대를 풀어 줬다.

눈부신 조명에 도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눈을 떴고 그의 눈앞에 작은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도명은 아이처럼 활짝 웃고 있었고 도화는 순간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와-, 피아노다.”

도화가 조금은 기계적인 말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피아노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이 인간이 기어코 통장을 털어 피아노를 샀구나, 라는 것이었다.

일단 새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적당히 중고로 샀나? 아니다. 피아노가 뭔가 예사롭지 않은 거 보니 그냥 중고가 아니라 비싼 앤티크인 게 분명했다.

‘여기서 결국 통장을 깼다고 뭐라 하면 분위기가 깨지나? 이왕 어차피 산 거 그의 기분이라도 좋게 만들어야 하나?’

“도화 씨 걱정 말아요. 이 피아노 마련하는데 용달비밖에 안 들었으니까요.”

“정말요? 어떻게요?”

“어머니가 쓰던 피아노에요.”

“아.”

“도화 씨가 돈 쓰지 말라고 해서 어머니 것을 뺏어왔어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자랑스럽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도화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화는 당혹감에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아, 음, 잘했어요.”

도화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죠?”

도명이 피아노 의자를 빼며 도화에게 어서 앉으라고 의자를 가리켰다.

“한번 연주해 봐요.”

“지금요? 지금 저녁이잖아요.”

“여기 방음 꽤 잘 돼요. 음, 여기서 우리가 락만 안 하면 주변 이웃들에게 피해를 입힐 일은 없습니다. 그러라고 여기에 놓은 건데요.”

“아, 저 도명 씨.”

도화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 오래간만에 연주하는 거니까 그거 감안하고 들을게요. 저도 저번에 오래간만에 하는 건데 역시 몸으로 익힌 기억은 오래가더라고요. 자전거 배운 감각을 잊지 못하듯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기 시작하면 이내 기억날 겁니다.”

“아. 도명 씨, 전 못 해요. 적어도 지금 당장, 아니 당분간은 못 해요.”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그런걸요. 우리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잖아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명 씨 앞에서 못 해요. 새로 다른 곡을 배우기 전까지는 절대로요.”

도화가 피아노 건반 위에 이마를 박으면서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기대에 차 있었던 만큼 예상치 못한 실망도 큰 도명은 표정관리가 안 됐다. 도명이 잔뜩 굳은 얼굴로 하고 도화에게 말했다.

“하하, 도화 씨, 설마 피아노 건에 대해서 저한테 사기를 친 건 아니죠?”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도화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명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명은 그 눈을 보자 우리 백구가 나한테 그런 사악한 사기를 쳤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도명 자신도 러브레터 하나 주는 데 뜸을 그렇게 많이 들인 것처럼 도화 역시 완벽함을 위해 뜸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난리를 친 도명 역시 사건 하나를 온전히 겪고 나서야 완벽함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박자를 맞추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웠다. 도명이 완벽함을 원했을 땐 안 그러다가 이번에는 도화가 완벽함을 원하다니. 어차피 눈에 콩깍지가 씐 상태에서는 모든 게 완벽할 터인데.

“그럼 아무거나 쳐 봐요. 젓가락 행진곡이라도 쳐 봐요.”

도명이 뭘 그렇게 긴장하냐는 듯이 피식 웃으며 도화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는 도화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일단 손가락 풀 겸 젓가락 행진곡부터 쳐 봅시다.”

“젓가락 행진곡이요?”

“네. 둘이서 치기 재밌으면서 또, 쉽잖아요.”

“그게 뭔데요?”

“……네?”

‘아니, 피아노를 쳐 봤다는 사람이 그걸 몰라? 정말 우리 백구가 나한테 사기 친 거야? 이 착해빠지고 멍청해 보이는 얼굴로?’

도명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러브레터 건으로 완벽하게 당한 일이 생각나 점점 백구의 얼굴이 사악하게 보였다.

“도화 씨 정말 피아노 쳐 봤어요?”

“아, 그거. 이제야 생각났어요.”

도화가 입과 손가락으로 박자를 흉내 내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명의 표정은 의심으로 눈 밑이 싸늘하게 그늘져 있었다.

“네. 맞아요. 해 볼까요?”

“……그거 배우기 엄청 쉽다던데, 알려 주실래요?”

“…….”

도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답이 없었다.

“……왜요? 알려 주기 싫어요?”

도화가 도명의 눈치를 보며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물었다.

“아니, 알려 주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도화 씨…… 화 안 낼게요. 정말 피아노 쳐 봤어요?”

‘도명 씨 이미 얼굴로 화내고 있잖아요. 아니 이 남자는 왜 이렇게 피아노에 목매는 거야! 왜 저렇게 세상 무너진 표정이냐고.’

도명의 표정에 도화의 얼굴과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건 모르는데요. 저번에 말한 것처럼 두세 곡 정도는 칠 줄 알아요. 그중에 젓가락 행진곡은 없어요. 그건 보통 둘이 치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 두세 곡 좀 쳐 보세요. 더듬더듬 쳐도 되니까.”

“그건 도명 씨 앞에서 할 수 없다니까요.”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명의 환상은 이미 질펀하게 녹아내려 바닥에 줄줄 흐르고 있었다. 도명이 이마를 짚고 말이 없었다.

심각한 분위기에 도화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건반 위에 일단 손을 올렸다. 도화는 피아노 건반을 누를 결심을 했다. 하지만 결국 누를 수 없었다.

***

도화는 피아노를 배우기로 결심한 오래된 기억 속에 있었다.

강성우, 도화의 첫사랑. 그놈의 지나가는 한 마디에 6개월 내내 낯선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았었다. 그건 생각보다 기나긴 노력이 필요한 여정이었다. 도화는 그 전까지는 피아노라는 걸 구경도 못 해 봤으니까.

집에서는 도화가 어릴 때 당연하다는 듯이 태권도 학원 같은 것을 보냈지, 피아노 학원 같은 건 보내지 않았다.

아마 태권도 학원을 보낸 것처럼 자연스럽게 피아노 학원도 보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고 또, 발육이 좋다고 의자에 앉아서 섬세한 작업을 하는 것을 싫어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도화는 어렸을 때부터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조그만 숫자를 하루 종일 쳐다보는 것을 좋아했고, 가만히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소곤소곤한 목소리의 라디오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저렇게 세상 얌전해 보이는 아이가 저 시간이 끝나면 갑자기 우당탕탕하는 탓에, 부모님이 헷갈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님이 어린 도화에게 무심했던 것 같았다. 갑자기 발작하듯 뛰어다니는 것이 도화였듯, 가만히 앉아서 대수롭지 않은 것에 즐거움을 느낀 것 또한 도화인데 말이다.

성우는 도화와 키가 똑같아서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그건 어릴 때부터 쭉 그래왔다. 성우의 어머니와 도화의 어머니는 동네 친구였고 자주 만나 공동으로 육아를 했다.

체력 넘치는 사내아이와 하루 종일 놀아 주는 것보다 차라리 친구를 붙여두는 편이 더 편했던 것이다.

둘 다 어렸을 때부터 발육이 좋았다. 하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그래도 눈을 마주치는 기간이 길다는 건 다른 성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마음과 마음이 와 닿는 순간들이 쌓인다는 의미였다.

성우 역시 도화와 다니는 걸 좋아했다. 누구와 놀든 숫기 없는 도화를 꼭 껴서 놀았다. 도화는 낯을 가리는 편이긴 했지만 성우와 함께 있으면 누구든 곧장 어울렸다.

그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언제나 함께하는 단짝 친구였다. 도화가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 역시 성우가 도화를 축구 동아리에 끌고 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같은 시선의 높이에서 까치발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눈에 사랑에 빠져 버렸다. 해마다 맞은 첫눈의 무게로 어깨가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아주 천천히 사랑이 쌓여 갔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도화는 어느 순간부터 성우와 어깨동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자주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었다.

도화는 너무 심장이 떨려서 감히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그의 뜨거운 목덜미를 팔등으로라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우는 어렸을 때 했던 것처럼 도화와 어깨동무를 하고 걸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뭉개는 것을 좋아했다.

“더워.”

도화가 일부러 짧고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어깨에 걸린 성우의 팔을 밀었다. 하지만 성우는 그런 도화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난 안 더워.”

성우의 그 한 마디에 도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도화에게 성우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거부하기 힘든 말이 되었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운동 후 땀 냄새를 풍기며 학교 복도를 걷는데 성우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도화의 목덜미를 잡고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었다. 도화는 보잘것없는 그의 힘에도 그대로 끌려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성우가 이끄는 곳에 고개를 괴어 보니, 음악실의 창틀이었다.

음악실 안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고 긴 생머리의 그녀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도화가 듣기에는 그저 그랬다. 잔잔한 음악이라서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잔잔한 곡의 미묘한 감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탓이었다. 악보에 지나치게 꽂혀 있는 그녀의 눈이 말해 주듯 그녀는 아직 연주에 익숙지 않아서 감정선을 살리기는커녕 악보의 박자를 더듬더듬 뒤쫓느라 바빠 보였다.

하지만 성우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창틀에 아예 매달려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성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 성우의 눈을 쳐다보는 도화의 눈빛이 그의 속눈썹 끝에 고드름처럼 진득하게 매달려 있는데 성우는 그녀를 쳐다보느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좋아?”

“피아노 치는 거 너무 예쁘다.”

그날부터 도화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 커서 배운 탓에 더디긴 했지만 재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성우가 좋아하는 노래 3곡을 엄선해서 특별 훈련을 하듯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빌어먹을 놈, 하필이면 초보에게는 어려운 곡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랑은 위대했고 도화는 그 창가의 여자아이보다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너무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성우가 좋아했던 건 피아노를 치는 모습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건반 위에서 춤추는 희고 긴 손가락,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살랑거리던 주름진 교복 스커트, 길고 고운 머리카락, 연주가 뜻대로 안 되자 더워진 목덜미를 식히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보이던 가녀린 목덜미. 가지런한 눈썹, 아랫입술에 톡 바른 맑은 색의 틴트, 종아리를 감싼 하얀 양말, 그리고 그녀처럼 청아하고 투명했던 커튼, 그 모든 것이었음을.

성우가 넋을 놓고 본 건, 그저 이미지였음을 아주 늦게 깨달았다.

성우의 인생에서 도화의 연주는 크게 의미 없었고, 그날 그가 넋을 놓고 보고 있던 그녀 또한 한낱 이미지에 불과했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지루할 정도로 빤한 가녀리고 청아한 또래의 여고생의 이미지. 그녀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고 또래 친구들과 목젖이 드러나도록 털털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그런 가벼운 환상 반죽들.

굳이 가치의 무게를 따지자면 한낱 이미지로 치환된 그녀가 도화가 피아노 앞에 앉은 시간보다 조금 더 무거웠겠지. 도토리 키 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도화는 영원히 가지지 못할 그 이미지에 그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도화가 6개월 동안 매일 3시간 넘게 연습한 피아노 연주가 가지는 의미는 설탕 가루 하나와 교환 가능할 터였다. 혀끝이 아주 조금 달았으면 됐나?

아니, 그럴 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혀끝에 순식간에 녹을 설탕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재가 된 시간이 도화의 손끝 사이로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

“도화 씨?”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도화를 도명이 불렀다.

“전, 도명 씨한테 뽐내기 위해 거짓말하기 싫어요. 있는 사실을 일부러 말 안 하는 것도 거짓말이잖아요.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연주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도명 씨 앞에서 첫사랑 이야기 꺼내기 싫은데, 자꾸 이렇게 몰아세우니까 할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피아노를 배운 건 강성우 그놈이 좋아하는 곡을 들려주기 위해서였어요. 그렇게 익힌 곡을 내가 지금 좋아하는 도명 씨 앞에서 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그런데 피아노 칠 줄 안다는 건 정말 거짓말 아니에요. 내가 도명 씨처럼 화려한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거짓 포장은 하지 않아요.”

도화의 말을 말없이 듣고 있던 도명이 도화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도명의 표정이 미묘했다.

“무슨 말인 줄 알았어요.”

“저 정말 치기 싫어요. 특히 도명 씨 앞에서는요.”

“그러면 당장 피아노를 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 시름을 혼자 진 것 같았던 도화가 활짝 웃었다. 그런 도화의 표정에 도명 역시 도화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하지만 어딘가 도명의 표정이 시렸다.

“곡 하나 연습하는 데 얼마나 걸려요?”

“음, 그때보단 빨리 배우지 않을까요? 곡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때처럼 열심히 하면 한 달 정도요?”

“한 달 기다릴 수 있어요.”

“네?”

“날 위해서 연습해 와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명령조로 말했다.

“아…….”

“왜요? 날 위해서는 싫어요?”

도화는 여기서 솔직히 힘들다고 하면 도명이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와, 기쁘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나저나 저는 무슨 곡을 좋아하는지 안 물어봐요? 지금 몹시 궁금할 타이밍인데요.”

“뭘 좋아하는데요?”

“월광 소나타.”

“……그 월광 소나타요?”

도화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확히 그중에서 3악장이요. 그게 힘들면 쇼팽 즉흥 환상곡도 좋습니다.”

도명이 힘주어 말했다.

‘그게 뭐지? 더 쉬운 건가?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진짜 더 쉬운 건가?’

하지만 도화는 본능적으로 등줄기가 싸늘한 것이 도명이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제가 미우면 그냥 밑에 내려가서 매 맞을까요? 차라리 손가락을 매우 쳐요.”

“그냥, 도화 씨가 저한테 들려주고 싶은 곡으로 들려 줘요.”

도명이 도화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도화에게 푹 기대자 가까워진 도명의 잘생긴 얼굴에 도화는 이건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싫어요?”

‘그런 표정으로, 그런 묘하게 젖은 목소리로 되묻는 것도 반칙이지! 아 젠장, 또 열정이 콸콸 쏟아진다. 겨울에 수도관이 터져도 이것보다 콸콸 쏟아지진 않을 거야. 또 혼자 죽어라 연습해 놓고 후회할 거면서. 넌 영원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표본이야.’

도명이 도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콕 찍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비볐다. 그리고는 도화를 다시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 얼굴이 빨갛게 익은 도화의 얼굴이 보였다.

“도명 씨는 내 시간의 무게를 알아줄 건가요? 10분의 1이라도 알아 줄 건가요?”

“뭐랍니까?”

“아. 아니면 20분의 1이라도.”

“난 지금 이 순간도 도화 씨의 시간이 가진 무게 아래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10분의 1이에요. 나 매일 매일 도화 씨의 중력 아래 있습니다. 뭐, 물리적으로 도화 씨가 2층에 살고 제가 그 아래층에서 생활하고 있기도 하고.”

쑥스러운 고백에 도명답지 않게 쓸데없는 사족을 붙었다. 마지막에 붙은 쓸데없는 사족 덕분에 완벽하지 않은 문장, 그 허술한 틈 사이를 도화의 마음이 메웠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가득 차서 기울어졌다. 농익은 사랑의 시간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때와 다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그때도 감정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때도 농익은 사랑이었다.

진정으로 농익은 사랑은 상대방의 감정에 따라 내 마음의 본질이 바뀔 리가 없었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은 마음의 상처를 내긴 해도 있었던 마음의 본질을 없던 일로 만들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든 짝사랑이든, 열정적으로 마음을 주는 일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가 없었다.

도화는 예전의 실패한 기억이 현재의 열정에 제동을 걸고 현재의 감정에 검열을 하게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농익어 버린 사랑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재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어린 날의 시간들이, 열정들이 햇빛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반짝이는데 왜 허무해하고 상처를 받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갑자기 편해지고, 또 달콤해졌다.

“월광 소나타 3악장 도전해 볼까요?”

도화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도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심술에 놀아나지 말아요.”

“좋아하는 곡 아니에요?”

“네, 좋아하는 곡이 맞긴 맞아요. 하지만 난 도화 씨가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한테 열정을 바쳤던 이 손등은 맞긴 맞아야겠습니다. 다만 피아노를 칠 수 있을 만큼. 앞으로는 날 위해 춤을 출 손이니까.”

도명이 핏줄이 살짝 불거진 도화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손톱 끝으로 긁었다.

“얇은 회초리는 자국이 수상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고 플라스틱 자로 맞읍시다. 얇은 회초리가 자국이 예쁘긴 한데.”

“저, 많이 혼나야 해요.”

도화가 도명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도화 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 사람을 많이 사랑했습니까?”

“그 시간을 도명 씨 시간으로 새로 새기고 싶어서요.”

“우리 백구, 착하네요.”

도명이 낮게 웃으며 도화의 턱을 쓰다듬었다. 도화가 머리를 도명의 명치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저…… 맞으면서 발기해도 돼요?”

“오늘 착하게 굴었으니, 허락할게요.”

“고맙습니다.”

“뒤에 주인님 붙여요. 그게 더 완벽할 것 같군요.”

“고맙습니다. 주인님.”

도화는 뭔가 오글거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지만 도명이 원하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근본 없는 개처럼 맘껏 싸지르고 여기저기 묻혀도 귀여워해 줄게요.”

도화는 역시나 이런 사랑은 이상하고 또, 위험하고, 또 겉으로는 이성적으로 보이는 그는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어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농익은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

서윤은 작업을 끝내고 혼자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집에 혼자 사는 남자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사람들과 함께여서 즐겁고 혼자 있을 땐 자유로워서 즐거웠다. 실연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니 견딜 만했고 또 이따금 드는 외로움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때 도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

“집이지.”

“그래. 편집부에 전화 걸어 보니 작업한 거 방금 다 넘겼다고 하더라. 집이겠지 했지. 작업 끝냈다고 또 혼자 음악 틀고 춤추고 있겠네.”

“내 쓸데없는 습관까지 파악하지 마. 형. 소름 돋으니까.”

“넌 그냥 알기 쉬워. 나 너희 집에 손님 하나 데려가는데, 괜찮아?”

“무슨 손님?”

“일단 너는 누군지 모르는 손님.”

“음, 나야, 낯가림은 없는데, 어떤 종류의 손님인데?”

“네가 힘들게 손님 대접할 필요는 없고, 네 만화책이 목적인 손님이야.”

“내 BL 만화책?”

“응. 네가 가진 만화책은 그것밖에 없잖아.”

“아트북도 많거든.”

“한 1% 있냐?”

“20%.”

“거짓말, 어쨌든 데리고 가도 돼?”

“응, 뭐. 데려와. 작업도 끝났는데 뭘.”

“그렇다면 지금 문을 열어.”

“응?”

“현관문 열라고.”

서윤은 설마 하는 기분으로 인터폰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도명과 낯선 얼굴이 하나 보였다.

“아, 이 양아치가.”

서윤은 낮게 욕을 하며 문을 열었다. 평소 같았으면 도명에게 한마디 더 했겠지만 옆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어서 일단 사람 좋게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 음, 저는 한서윤이고요, 도명 형의 대학교 후배예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음 도명 씨하고는 복잡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아, 도화 알 거라고 하던데. 도화 친구 진영이라고 합니다.”

서윤은 진영의 자기소개에 얼떨떨했다. 서윤의 사고회로가 도화의 친구가 대체 여기에 왜 있는지 따라가지 못했다. 서윤이 알고 있기로는 도화에게 친한 친구가 딱 한 명 있는데 언제나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그 친구가 알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서윤은 언제나 외로움을 견장처럼 매고 다녔던 도화의 어깨가 생각났다. 그리고 서윤을 만나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너무 좋다고 웃음 짓던 그 얼굴도 생각났다.

서윤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설마 그 친구인가 싶어 등골이 사늘했다. 설마 유도명이 아무리 미쳤다고 한들 도화가 묘하게 엮인 두 남자 사이에 그 절친한 친구를 끼웠을 리가.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는 도화의 친구가 한 명뿐이라는 건 비유적 표현이겠지 했다. 보통 친구라는 단어는 관대하게 쓰이는 단어니까. 아마 도화에게는 친구라는 단어가 아주 신중하게 쓰이는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서윤은 일단 집 안으로 두 사람을 들였고 도명은 최소한의 염치가 있는지 서윤이 좋아하는 닭발집에서 닭발을 포장해 왔다. 그 외에 어묵탕하고 간단한 꼬치 요리도 사 왔다.

서윤은 자신이 좋아하는 집, 국물 닭발을 먹으며 행복했다. 역시, 저녁에는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최고였다. 정작 닭발을 사 온 당사자는 닭발에는 손도 안 대고 은행 꼬치를 깔끔한 표정으로 먹고 있었다.

서윤은 수화로라도 도명에게 ‘이 사람 우리랑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사람이야?’라고 묻고 싶었다. 일단 BL 만화책을 보러 온다고 했으나 BL 만화책을 본다고 꼭 남자 동성애자란 법은 없었다.

이성애자도 취미로 보는 경우도 있으니까.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정 지을 이유는 없다.

“아, 남자가 BL 만화책을 다 보고, 조금 희귀한 경우네요.”

서윤이 진영을 향해 말했다.

“아, 저 살면서 오늘 처음 보는 건데요.”

“하하, 그렇구나.”

‘형, 나한테 뭐든 설명 좀 해 봐.’

서윤이 도명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심적 동요가 큰 서윤과는 달리 도명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아, 도화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에요?”

진영이 서윤에게 물었다.

‘내가 모르는 도화 친구라니. 궁금하잖아.’

서윤은 말없이 그저 도명을 보고 웃었다. 그의 웃음이 점점 인내심 고갈로 경련을 일으켰다.

‘형! 누굴 데려온 거야!’

“서윤이가 제 가게에 자주 오다 보니, 같은 건물 사는 도화 씨하고도 친해졌죠.”

서윤이 계속 진영이 몰래 도명을 째려보자 도명이 대충 말했다.

“하하, 거짓말, 우리 도화는 자주 본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지는 사람 아니에요. 납치라도 해서 의자에 묶어놓고 몇 날 며칠을 억지로 말 시키고 그래야 친해질 수 있다고요. 애초에 피지컬 뛰어난 그놈을 납치하는 것 자체가 힘들지만요.”

진영의 말에 서윤은 그저 어묵 국물을 막걸리 들이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덕에 목구멍이 뜨거웠다.

“도화 씨가 그렇긴 하죠. 하지만 서윤이는 제 후배잖아요, 애인의 친한 지인이니까 너무 데면데면할 수는 없으니까 말 좀 섞다 보니 알게 된 거죠.”

도명의 말에 서윤은 놀랐다.

‘이 사람 알아? 도화 씨 동성애자인 거?’

지금까지 서윤이 말을 참은 건 도화를 위해서였다. 도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서윤이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도명을 노려보았다.

“형, 하하. 설명 똑바로 해야지. 형이 날 도화 씨하고 소개팅시켰잖아. 잘해 보라고.”

진영은 갑자기 튀어나온 놀라운 이야기 전개에 눈동자만 열심히 굴렸다.

“하하, 결국 잘 안 됐잖아.”

도명이 뻔뻔스럽게 다 먹은 작은 꼬치를 버리며 말했다.

“형은 내 짝사랑이 엄청 재밌었나 보다.”

서윤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너 아직도 내 도화 씨 좋아하니?”

도명이 깍지를 낀 채 서윤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음 정리 다 되어가는 중이거든.”

“그래, 잘 마무리해라. 남의 남자잖니.”

“이 양아치야!! 형은 양아치야!”

결국 서윤이 도명의 멱살을 잡았다. 도명의 타이를 잡은 서윤이 손이 한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진영의 표정이 묘했다. 도화를 두고 드잡이를 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의 표정이 좋아 보였다.

진영은 우리 도화가 이렇게 두 남자가 싸우게 할 정도로 사람 복이 넘치니 좋았다. 도화의 경계심 많은 성격 탓에 평생 사랑 한 번 못 해 볼 줄 알았는데 두 수컷이 도화를 두고 저러고 있다니.

그 크고 촌스러운 녀석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들의 마음이 전혀 이해는 안 가지만 뭐 둘 다 도화가 좋다니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었다.

‘도화가 그동안 많은 사건들이 있었네.’

그리고 진영은 생각했다. 도명이 도화를 이 사람에게 소개시켜 주고 결국 자기가 사귀고도 저렇게 무심하게 말을 툭툭 던지는 걸 보면, 서윤의 말처럼 양아치가 맞는 것 같다고.

결국 진영이 중간에 껴서 두 남자를 진정시켰다. 상황이 진화가 되고 나니, 서윤은 흥분한 자신이 모습이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도명의 목에는 서윤의 공격을 받고 살에 빨간 자국이 살짝 남아 있었다. 도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쓸어 넘겼다.

“한서윤.”

“왜?”

서윤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다른 남자 소개시켜 줄까?”

서윤이 활짝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도명을 향해 흔들었다. 도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이 잔뜩 받은 서윤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그래서, 왜 내 BL 만화책이 필요한데?”

‘아, 만화책 그냥 태워 버릴까?’

“정확히는 오래된 친구랑 사귀는 그런 종류의 서사가 필요해.”

“나, 진짜 하나도 맥락이 안 잡혀서 그래. 왜 도화 씨 친구가 그런 만화책이 필요한데? 도화 씨 친구도 혹시?”

진영을 쳐다보는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는 이성애자입니다.”

진영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 손에는 결혼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새 취미를 시작하려고요?”

“아니요. 저는 만화책에 별로 관심 없었어요. 어렸을 때 읽은 것 빼고는 쭉 관심이 없었어요.”

“아. 그렇군요. 아니 근데 왜……?”

서윤은 아무리 질문을 해도 그들의 방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말하자면 길어.”

“형, 길어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좀 말해 줄래?”

“일단 여기 진영 씨는 도화 씨에게 화가 나 있어.”

진영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그게 왜 내 BL 만화책하고…….”

서윤은 혼란스럽다는 듯이 손바닥을 이마에 비볐다.

“저는 도화와 아주 오래된 친구예요. 고등학교 때부터 쭉 친구였죠.”

‘아무리 생각해도 도화 씨가 말한 그 친구잖아! 유도명, 이 미친놈이 누굴 데려온 거야.’

“저는 도화가 언제나 저한테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도화가, 고2 때 갑자기 주변 사람들한테 말도 없이 전학을 가 버렸거든요. 헤어짐의 인사도 없이요. 마치 야반도주하듯이요. 저는 도화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그 이유에 대해서 재촉하고 싶지 않았어요. 도화가 말해 줄 의무도 없고요. 솔직히 친해진 후에는 내심 그게 섭섭하긴 했지만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건 도화가 어떤 비밀 때문에 저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있는 거였어요. 언제나 도화는 어떤 순간에도 저와 한 발짝 물러나서 대화를 했죠. 뭐,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10년 동안 그러는 건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우린 최고로 절친하다고요!”

“……도화 씨가 숨기는 게.”

“네, 전 도화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죠. 솔직히 내내 도화가 묘하다고 생각했어요.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내 여자에게 무심했으니까. 확신은 할 수 없었긴 했죠. 도화는 그날 이후 사람 자체에 무심, 아니 무심한 척을 했거든요. 남자애가 여자한테 관심이 덜 있다고 동성애자인 건 아니기도 하니까.”

“저, 커밍아웃에 신중한 동성애자로서 물어보는 건데요, 또 어떤 게 도화 씨가 동성애를 한다는 걸 알았어요? 나도 조심 좀 하게요.”

서윤이 진영에게 질문했다.

“도화는 혐오란 걸 모르는 애예요. 사람은 누구나 어떤 부분에서는 혐오감정이 조금씩은 있잖아요. 여성, 이민자, 특정 국가 사람, 시끄럽고 통제 안 되는 아이, 노인, 장애인, 동성애 등 말이에요. 그런데 도화는 정말 그런 걸 전혀 모르는 애란 말이에요.”

진영의 말에 도명과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언젠가부터 도화답지 않은 동성애 혐오 발언들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같이 놀다가 TV에서 동성애를 다룬 영화 광고가 나오면, 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데 갑자기 동성애는 이해할 수가 없다느니, 등의 말을 하며 혐오 발언을 하는데, 안 그러던 애가 왜 저러나 했죠. 한참 운동부일 때도 안 하던 남자애들 모여서 하는 여자 어쩌고저쩌고 남자다운 것 어쩌고저쩌고하는 말들도 갑자기 하기 시작하는데, 도화는 같은 운동부원하고도 그런 이야기 안 했거든요. 그것도 더 최악인 것이 무슨 초등학생이 아무 생각 없이 질 나쁜 인터넷 BJ 말 흉내 내듯 말하기에, 얘 저러나 했죠. 이런 일이 너무 여러 번 쌓이다 보니까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더라고요. 그렇다고 표정 보면 정말 싫어서 하는 이야기 같지도 않고, 말 그대로 흉내 내는 느낌 있잖아요. 오히려 그때부터 도화가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아 도화 씨 거짓말 엄청 못해, 제발 좀 거짓말을 잘 못 하면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중간은 갈 텐데.’

서윤과 도명은 동시에 도화 대신 부끄러움에 한숨지었다.

“아, 그렇군요.”

“그래도 동성애랑 확실히 연결 못 지었어요. 음, 도화는 그냥 도화니까요. 그런데 결혼식 전에 동문회에서 청첩장 주다가 그놈을 만났어요. 강성우!”

“그놈이 누군데요?”

“도화의 그 당시, 가장 친한 친구요. 그 새끼, 전부터 묘하게 싫었는데.”

“왜 싫었는데요?”

“사실 저 학교 다니는 내내 도화랑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말 걸려고 하면 자꾸 저와 둘 사이를 막았어요.”

“뭐 그런 놈이 있어요?”

“그때 당시 도화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 한 둘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무슨 매니저처럼 도화랑 어울릴 수 있는 애, 아닌 애를 구분 짓는다고 애들끼리도 은근히 말이 많았거든요. 도화는 놀 사람이 많았으니까, 언제나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주변에서 그런 일 일어나는지도 몰랐겠죠. 중간에 말이 샜는데 어쨌든 동문회에서 제 결혼 이야기하는데 축가는 누가 부르냐고 묻기에, 도화가 부른다고 했거든요. 다들 도화는 어떻게 지내냐고 궁금해하고 그러는데, 강성우 그놈이 따로 와서 왜 하필 축가를 도화가 부르냐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도화는 제 가장 친한 친구고 노래도 잘 부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했죠. 가장 친한 친구라는 제 말에 강성우가 저한테 귓속말로 조심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놈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함축적인 말이었지만 그 한 마디에 도화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퍼즐이 맞춰지더라고요.”

“와. 기분 나쁜 놈이네. 우리가 굳이 남자면 무조건 다 좋아하는 건 아닌데. 무조건 붙어 다녀서 좋아질 거면 도명 형이랑 나랑은 동성혼을 할 수 있는 나라에 가서 커플 티 입고 지금 결혼사진을 거실에 걸고 있을걸요.”

“아. 서윤아, 상상만으로 너무 끔찍하다.”

도명이 핏기가 순식간에 가신 얼굴로 말했다. 매일 밤 거대한 나비의 날갯짓에 끌려가는 악몽을 꿀 것이 분명했다.

“형, 나도 같은 마음이니 너무 기쁘다.”

“그나저나 진영 씨, 그놈 인적 사항 더 자세히 압니까?”

도명이 깍지를 끼며 청부살인업자 같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청부살인업자는 아니더라도 악의를 복리를 쳐서 돌려주는 것에 전문가인 그였다. 서윤은 도명이 정말 복수를 할 걸 알고 있기에 화제를 빨리 돌렸다.

“진영 씨, 그래서요?”

“10년 동안 도화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던 막이 겨우 이거였구나 싶어서 허탈했죠. 그리고 이게 앞으로의 우리 관계에서도 계속 가로막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견디기 힘들어졌어요. 나는 도화를 해칠 사람이 아닌데 그걸 너무 몰라 주니까 섭섭하고 화가 났어요. 그리고 도명 씨가 저를 찾아왔죠. 먼저, 도화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떠냐고요. 근데, 계속 변명할 도화 얼굴을 상상만 해도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이런 기분에서 먼저 손 내밀어 줄 기분도 아니고요. 제가 그러니까 도명 씨가 그렇다면 차라리 도화 씨를 몰아붙이라고 했죠. 그래서 우린 어떤 연극을 계획 중입니다. 도화의 입으로 저한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도록. 난 꼭 그의 자백을 받아내야겠어요.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짜려면 클래식한 이야기 자료들이 필요하죠. 이곳에 자료가 많다고 들었어요.”

“음, 클래식한 자료는 아니고 동성애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씌우지만, 도화 씨를 움직이게 하기엔 그런 적당히 유치한 시나리오가 필요하지. 중요한 건 도화 씨한테 잘 통해야 한다는 거니까.”

도명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 모든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윤은 생각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들아! 도화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이 악마들아.’

서윤의 눈 앞에 애인의 얼굴을 한 악마와, 그 악마에 홀린 멍청한 신자가 방실거리면서 앉아 있었다.

“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도화 씨가 몰라 줘서 많이 속상했겠어요.”

“네!”

“그것도 10년씩이나.”

“네!”

“그 마음의 거리 때문에 외로웠겠네요. 도화 씨를 닦달하면 안 된다고 자기 자신도 많이 몰아붙였을 테고. 바보 같은 도화 씨는 지금 이 순간도, 진영 씨 마음을 하나도 모르겠죠.”

“네!”

서윤이 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진영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자 진영은 마음의 얼음이 녹는 기분이었다.

“진영 씨, 제가, 한 첫 커밍아웃에 대해서 들어 볼래요?”

“네.”

진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부모님한테 중학교 때 처음 했어요.”

“서윤 씨는 용기가 있네요.”

“글쎄요. 저희집은 다 수다쟁이예요. 엄마, 아빠, 누나 다 포함해서요.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가족끼리 모여서 떠드는 게 익숙한 집이었죠. 우리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 말을 잘 들어 주고, 유쾌하시고 또 있는 그대로 우리를 받아 주니까, 사춘기에 접어들어도 대화가 불편하지 않은 그런 집이었어요. 그런 분위기에서도 내 비밀은 말할 수 없었죠. 집에서 엄마랑 TV를 보는데 TV에서 동성애 관련 영화가 나오는 거예요. 마치 TV 틀다가 야한 섹스 장면이라도 나온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졌죠. 두 남자가 애틋하게 얽은 손을 보는 게 부끄러웠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로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내 안의 내가 그런 것을 동경하는 게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엄마가 그걸 한동안 말없이 보더라고요. 복잡한 표정이셨죠. 딱히 재밌어하는 것도 아닌데 리모컨을 꽉 잡고 멍하니 그것만 보셨어요. 뭔가 어머니의 눈빛에서 뭔가 텅 하고 빠져나간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 순간, 나는 모든 게 들켰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죠. 그런데 어머니가 저를 향해 덤덤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엄마는 네가 세상과 싸우는 삶을 원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만약 그게 너 자신과 싸우는 일이라서 세상과 싸울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엄마는 이 집안에서라도 모두가 네 편일 수 있게는 해 줄 수 있단다. 적어도 가족 안에서는 네가 편히 잠들고 지친 마음을 쉬게 해 줄 수는 있단다. 편히 자야 밖에서 너 자신을 위해서 싸워야 할 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너를 지키지. 우리 서윤이가 얼마나 아름답게 특별한데. 그러니까 네가 지키고 싶다고 생각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날 밤 밤새 침대에 누워서 숨죽여 울었어요. 복잡한 울음이었죠. 그리고 그다음 날 내가 특별하다는 걸 말씀드렸죠. 엄마는 하신 말씀을 지키셨어요. 특별하다는 건 언제나 어떤 무게를 끌고 오죠. 가족에게 나 자신이 누구인지 말한 순간, 그건 결국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었어요. 가족 모두가 내가 무게중심이 되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처럼, 내 특별함에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랬죠.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는 엄마가 쉬는 한숨 소리를 들었어요. 지금도 엄마가 왜 한숨을 쉬었는지는 몰라요. 그 이유가 별것 아닌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분명한 건 엄마가 쉬는 한숨에 내 가슴이 별안간 무너졌다는 거예요. 정말 초라하게도 변기에 앉아서 조용한 눈물을 흘렸어요. 그게 내 첫 커밍아웃 이야기에요.”

진영은 서윤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뭔가 도화의 마음의 무게를 몰라 준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다르다는 것에 대한 무게도 말이다.

“아 저는, 그. 서윤 씨 힘들었겠어요.”

진영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진영 씨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제가 길고양이 밥을 주거든요. 3년째 챙겨 주는 녀석이 있는데 길고양이 인생 기준으로는 꽤 긴 시간이죠. 저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그 녀석이 알아 주질 않아요. 그래서 아직 한 번도 만져 보질 못했죠. 그래서 무섭고 또 섭섭해요. 끝내 내 선한 마음을 몰라 줄까 봐. 그럴 땐 그냥 내가 모르는 그 녀석의 생을 생각해요. 그 녀석의 두려웠을 그 수많은 시간들의 아득한 깊이를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결국 또 사료 챙겨 주고 있더라고요. 신경 안 쓰이면 모를까 진영 씨가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면,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옆에 있어 줘요.”

“네. 그럴 수 있어요. 저 정말 그럴 수 있어요.”

진영이 고개를 진득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도명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고 또 좌절했다. 자신은 백구 어 교재도 없어서 지금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서윤이 유창하게 백구 어를 하고 있었다. 저런 완벽한 백구 어는 처음 봤다. 서윤의 완벽한 백구 어에 진영의 분노와 설움이 눈 녹듯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도명은 자신이 어설픈 새끼 악마고 서윤은 몇 세기를 산 가브리엘쯤 된 기분이었다. 저 나비 새끼가 알고 보니 대천사였다.

어느새 애초의 방문 목적은 무산이 되었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되었다. 어느새 서윤은 과자와 맥주까지 꺼내왔다. 시답지 않는 이야기들로 밤은 무르익었다.

“저 사실은요, 고등학교 때 덩치가 작아서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그때는 별 게 같이 안 노는 이유가 되잖아요. 그리고 도화랑 다녔던 학교가 워낙 이런저런 운동부로 유명한 학교라 그런 쪽으로 묘하게 서열이 잡혀 있었거든요. 같은 급수끼리 끼리끼리 다니는 게 어느 사회를 가도 그렇지만 그 학교는 더 심했죠. 도화는 학교에서 음, 권력의 피라미드로 치면 꼭대기였죠. 근데 도화가 진짜, 멋있었던 게 뭐냐 면요, 꼭대기에 있던 애들은 다들 거들먹거리기 바쁜데 도화는 착하고, 그 누구도 무시 안 하고, 누가 남 괴롭히면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그랬어요. 그런 놈을 누가 싫어해요. 언제나 반짝반짝했던, 도화. 헤헤. 다들 축구부 주장인 강성우는 속 빈 강정이고, 진짜배기가 누군지 알았다니까요. 도화 갑자기 중요한 시합 앞두고 전학 가 버리고, 도화 사라지니까 강성우 어설픈 밑천 드러났죠. 뭐. 진짜 축구부 주장이 누구였는지 모르던 사람도 알게 됐어요. 어쨌든 이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도명 씨 물건 모으는 게 취미라고 했죠? 이런 말 하기 제 밑바닥 보일까 봐 도화한테도 말 못 했는데요, 그 누구한테도 말 못 했죠. 저는 사람 모으는 게 취미에요. 나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서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마음속에 그런 게 있어요. 어렸을 때 또래하고 잘 못 어울린 걸 새 사람들로 채워서 보상받으려는 거죠. 마치 쇼핑하고 나면 물건 진열하며 기분 좋은 것처럼. 이런 걸 일종의 중독이라고 하죠?”

“비슷하네요. 그런데 누구나 중독 없이 어떻게 삽니까? 적당히 그런 걸로 허한 가슴 메우고 사는 거죠. 그 방법이 어떻든 무슨 상관입니까? 당장 내 가슴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데.”

도명이 말했다. 도명의 말처럼 누구나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마음속 구멍을 메워가며 산다.

“하지만 역시 도화만큼 내 마음속 구멍을 채워 주는 사람은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일시적인 마음의 구멍을 채워 주지만 도화는 오랫동안 진득하게 채워 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100명의 지인하고도 도화 하나하고 못 바꾸지. 안 그래요?”

“네.”

저녁 11시가 되고 밤이 깊어지자 갑작스러운 만남도 끝났다. 도명은 술에 조금 취해서 기분이 좋아진 진영을 집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진영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도명을 향해 말했다.

“도명 씨는 정말 완벽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습니다.”

“네. 도화는 정말 행복할 거예요. 이렇게 잘생기고, 스타일 좋고, 거기다가 성격까지 완벽한 남자를 만나고 있잖아요.”

“하하. 성격까지요?”

“네, 오늘 서윤 씨네 가자고 한 건 큰 그림이었죠? 그러니까, 제가 알아서 깨달음을 얻도록 판을 짜신 거죠. 감정이란 게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렇게 큰 판을 짠 거죠.”

도명이 진영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정말 서윤이네 집에 BL 만화책을 보러 간 거니까.

결국 문제 해결은 서윤이 다 했다는 생각에 도명의 웃음이 썼다.

***

새벽 한 시, 도명의 가게 불이 켜져 있자 잠자리에 들려고 했던 도화가 창밖을 보았다. 도화의 코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도화가 홀리듯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땐 도명이 당근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결국 도명은 단골 케이크 가게에서 그녀의 당근 케이크 레시피를 받아 배운 것이다.

“이 시간에 웬 케이크에요?”

“안 자고 있었습니까?”

“자다 깼죠. 이상하게 도명 씨가 들어온 걸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깊이 잠들 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도화 씨를 깨우고 말았네요.”

“아니 근데 새벽 한 시에 케이크를 왜 만들고 있어요?”

“먹고 싶어서요.”

“네? 도명 씨가 이 시간에요?”

“네, 미친 듯이 먹고 싶어서요.”

도명이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당근 케이크를 작게 잘라 먹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와서 먹고 싶으면 먹어요. 방금 만들어서 더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도화는 사양 안 하고 당근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도명은 눈을 감고 한 입 먹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근 케이크 맛을 깊이 음미했다. 마치 당근 케이크의 영혼을 흡수하는 느낌이었다.

“오늘 힘든 하루였어요? 이거 집에 와서 너무 행복해, 라는 뜻이었던가요?”

“네 뭐, 대충 그런 뜻이었죠.”

“이었죠?”

“오늘은 의미가 다릅니다.”

“무슨 의미인데요?”

“배우는 게 느려도 괜찮아. 뭐 그런 뜻입니다.”

도명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명은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좋고 총명한 편이었다. 그래서 살면서 이런 말에 위로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화 씨, 노력은 재능은 이길 수 없는 걸까요?”

“네?”

“있어요. 타고난 재능이 있는 놈. 세상은 넓으니 언제나 나보다 뛰어난 놈은 항상 있죠. 하지만 저는 노력하면 언제나 적당한 성과가 나오는 편이니까 좌절감을 느낄 필요도 샘을 낼 필요도 없었죠.”

“네 그럴 필요는 없죠.”

“근데 그 차이가 압도적이면, 정말 기분이 더럽네요.”

“도명 씨 오늘 어디서 지고 왔어요?”

“네.”

도명이 당근 케이크를 비장한 표정으로 반으로 싹둑 자르며 말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백구 어는 어렵습니다.’

***

다음 날 도화는 집 근처 포장마차로 나오라는 진영의 문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가 만나자고 하니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반가운 기분이 더 컸다.

언제나 그랬듯 진영이 자신을 끌어당겨 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두려운 기분도 기대감 못지않았다.

도화는 헐레벌떡 외투를 걸치고 진영이 말한 포장마차로 나왔다. 진영이 도화가 좋아하는 홍합탕을 시켜놓고 있었다. 도화가 애써 웃으며 진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애써 웃고 있지만 가슴이 심하게 뛰고 식은땀이 났다.

“도화야.”

“응…….”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

“응……?”

“그냥, 많이 힘들었겠다고.”

진영의 한 마디에 도화는 별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그가 따라 준 소주의 맑은 색을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진영이 따라 준 소주잔에 도화의 눈물이 차곡차곡 쌓였다. 비처럼 쏟아지는 도화의 눈물에 진영은 그에게 서운했던 조금의 마음조차 완벽히 녹아내렸다. 이런 애를 자신과 마음이 같지 않다고 왜 미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지게 왜 그래.”

“슬퍼서 우는 거 아냐.”

“그럼 반대야?”

“둘 다야. 아니, 두 가지 감정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단순해.”

“그럼, 무슨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눈물이냐.”

도화가 계속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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