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 내게 왔다.
어제저녁 도명은 도화의 얼굴을 보자마자 새로 들이게 된 피아노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 조율을 마친 상태가 아니기에 좀 더 완벽한 상태에서 보여 주고 싶었다.
도명은 도화에게 바로 피아노를 자랑 못 해도 피아노 때문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미래의 시간 때문에 현재가 들뜨고 즐거웠다. 출근 준비를 마친 도화가 휘파람을 불며 도명의 가게에 내려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도명 씨.”
“네, 좋은 아침입니다.”
“어, 도명 씨 오늘 뭔가, 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분 좋아 보여요. 정확히는 평소보다 조금 들떠 보입니다.”
‘진짜 쓸데없는 데서 촉이 좋네. 하지만 서프라이즈를 망칠 수는 없지.’
“아, 그래 보입니까?”
“네.”
도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도명의 대수롭지 않다는 웃음에 도화 역시 자신의 기분 탓을 하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마 도명이 들뜬 게 아니라 자신이 들뜬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들떠 있기에 상대방의 기분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도화가 오늘 아침 들떠 있을 만한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하지만 요즘 도화는 그냥 아침이 오는 것만으로도 들떴다.
도화가 자기 집처럼 자연스럽게 도명의 냉장고에서 그가 미리 만들어 놓은 오렌지 주스를 꺼내 먹었다. 도명 역시 그런 도화의 행동을 전혀 신경 안 쓰고 하던 일을 했다. 이 모든 풍경이 자연스러웠다.
“그나저나 이 주스는 어느 브랜드에요? 진짜 맛있네.”
도화가 예쁜 디자인의 투명한 유리병에서 라벨을 찾으려고 병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브랜드 이름 말입니까? 홈 메이드입니다.”
도명이 일부러 도화를 놀리려고 말을 애매하게 섞었다.
“아. 홈 메이드. 이름 기억하기 쉽네요.”
도화는 그 말을 또 진짜 브랜드 이름인 줄 알고 머릿속에 홈 메이드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도명은 또 그런 도화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하루라도 백구를 놀려 먹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도명이었다.
“아, 냉장고 안에 닭 가슴살 샐러드 있습니다. 꺼내 먹어요.”
“아 언제나 고마워요.”
“저야말로 언제나 잘 먹어 줘서 고마워요.”
‘세상에, 도명 씨 말 예쁘게 하는 것 좀 봐. 어쩜 저렇게 예쁘게 컸지.’
도화가 앞에 노트북을 놓고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도명의 뒷모습을 코끝이 시큰해진 채 쳐다보았다.
도화는 오늘 왠지 모르게 도명의 가게 안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공간 안에 평소와는 다른 약간의 어수선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어수선함의 정체는 라디오 소리였다.
“갑자기 안 듣던 라디오를 듣네요?”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지도 않으면서 허전한 공간을 소리로 채우기 위해 TV를 틀어 놓곤 한다.
하지만 도명은 공간 안에 식물들의 잎새가 바람에 쓸리는 소리만으로도 공간을 가득 차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TV는 물론 지금 듣고 있는 라디오처럼 잔잔한 톤의 라디오조차 듣지 않았다.
자동으로 틀면 나오는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지 않아도 도명은 그만의 정보 공급처가 있었다. 정보를 빨리 처리해야 하면 인터넷 검색 창을 이용하거나 회사 자료실 네트워크에서 얻었고, 평소에 조금씩 차곡차곡 쌓아 둬야 하는 지식은 반드시 종이 위에서 느리게 얻었다.
도명은 마치 손끝에 눈과 뇌가 있는 것처럼 종이의 극도로 미세한 돌기들을 손끝으로 느껴야 정보가 몸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아, 일하는 중입니다.”
“일하는 중이요? 라디오를 듣는 게요?”
“네,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드라마 내용도 자문해 주고 장소도 지원해 줬거든요. 드라마 엔딩 크레디트에 우리 회사 로고 넣어 주는 조건으로요. ‘정원이 내게 왔다.’라는 로맨스 드라마인데 요즘 반응이 괜찮은 모양이에요.”
“그게 라디오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도화가 닭 가슴살 샐러드를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리고 먹으며 물었다.
“지금 듣는 라디오는 세상의 이야기이거든요.”
“아!!”
도화가 이어지는 도명의 말을 끓고 흥분한 채 손가락을 흔들어 댔다.
“나 이거 알아요! 매우 잘 알아요.”
“아 라디오는 좀 듣나 봐요.”
“아니요. 진영이가 여기서 일하잖아요. 라디오 작가로.”
‘세상의 이야기’라는 라디오에서는 영화, 책, 드라마 등 말 그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방송했다. 최근에는 웹툰 시장이 커지면서 웹툰 속 이야기도 다루고 있었다.
“진영 씨가요?”
“네.”
“아. 신기하네요.”
“어쨌든 그래서 라디오하고 도명 씨 일이 무슨 상관인데요?”
“다음 화가 ‘정원이 내게 왔다.’ 편입니다. 라디오코너 중에 이야기 속 특정 분야에 전문가를 불러서 질문하고 그 사람이 답해 주는 코너가 있다나 봐요. 근데 제가 드라마 자문해 주던 사람이잖습니까. 또, 저번에 도화 씨가 가 본 우리 회사 옥상 정원 말이에요.”
“네! 네!”
“거기가 그 드라마에 나왔거든요. 거기 말고도 우리 회사에서 작업한 다른 정원 몇 개도 나오고. 아무래도 제가 묘하게 다 껴 있다 보니까 섭외가 들어오더군요.”
“세상에 그러면 도명 씨, 진영이가 하는 라디오에 나와요?”
“아니요.”
“왜요?”
“귀찮아서요.”
“네?”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뭐 어쨌든 회사 홍보에 도움이 되니까,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요. 그쪽에서 미리 질문 보내 주면 서문으로 답변은 주겠다고 했죠. 어제저녁 다 작업해 놓긴 했는데, 밤에 침대에 누워서 생각해 보니까 프로그램 성격 무시하고 일단 너무 정보 중심으로만 글을 작성했나 싶더군요.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맞게 답변 좀 고치려고요. 언어란 게 같은 정보도 어떻게 처리하냐에 따라서 듣는 사람의 감성이 달라지는 건데 말이에요. 그러려면 일단 라디오가 어떤 분위기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지난 화들을 듣고 있었죠. 이렇게 나름 신경 써 주고 있는데 직접 나오실 생각은 정말 없냐는 말이나 보내고 아 솔직히 좀 짜증 나네요.”
“아 그렇구나. 그런데 진영이가 웬일로 도명 씨한테 아무 연락이 없네요. 라디오 작가면 어느 정도는 섭외에도 관여할 텐데요. 회사 이름도 BISCUIT FOREST이고 섭외하려는 사람은 유도명이니까 바로 아는 사람이다 싶었을 텐데. 그놈 오지랖에 자기가 직접 섭외하겠다고 할 게 빤하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진영이라면…….”
도화가 신나서 우다다 말하다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 날 이후로 도화는 진영과 연락을 못 했다. 내심 진영 쪽에서 먼저 연락을 줄 거라는 기대도 했었다.
언제나 뒤로 살짝 빠지며 진영의 마음을 재 보는 쪽은 도화였고 진영은 언제나 성큼성큼 다가와 도화를 확 잡아당기는 쪽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심 비겁하게도 그런 기대를 했다. 정말 끝인 모양인가 싶어서 도화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도화의 표정을 도명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잔소리가 목 끝에서 터져 나오려다가 겨우 들어갔다. 도명과 눈이 마주치자 도화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활짝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웃음으로 가장한다고 한들 괜찮지 않은 마음은 드러나는 법이었다.
도화가 출근하고 도명은 도화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차며 혼잣말을 했다.
“하여간 개복치라니까.”
***
‘세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스튜디오에서는 한창 방송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송 4시간 전, PD가 와서 쌍화차를 마시며 피로를 달래는 진영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김 작가, 진작 BISCUIT FOREST 유 대표 안다고 하지!”
“네?”
“와 그렇게 애걸복걸해도 방송은 안 한다, 안 한다 하더니, 진영 씨가 거기서 일하는 줄 알았으면 모두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던데.”
“유 대표요?”
‘유…… 대표. 내가 아는 사장님이 어디 한둘이야. 사거리 골목 치킨집 유 사장, 조기 축구회 회장님도 유 씨고. 전파상 하시는 분도 유 대표고. 유 대표, BISCUIT FOREST…… 유 대표. 아!’
진영의 머릿속에 도화가 살고 있는 집 아래 가게에 있는 조그만 간판이 생각났다. 워낙, 간판 기능을 할 생각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소담하게 있는 탓에 기억을 바로 소환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기억에 안 남은 모양이었다.
진영의 감성에서는 간판은 역시 무조건 크고 색깔도 새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리도록 파래야 했다.
“유도명 씨요?”
“아. 그래. 유도명 대표.”
“아. 그분.”
“왜 인맥 부자가 인맥 가지고 겸손 떨어서 모두를 뺑뺑이 돌리게 만들어.”
“아. 온대요?”
“지금이라도 괜찮으냐고 해서 올 수 있으면 무조건 오시는 게 좋다고 했지. 4시간 전이면 뭐, 그쪽도 대본 미리 받았겠다, 준비 괜찮지?”
“아. 네.”
진영이 얼빠진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도명이 라디오 스튜디오에 등장했다. 도명의 손에는 쿠키 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도명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다가 진영을 발견하자 먹잇감을 발견한 맹금류처럼 눈동자를 또르르 돌렸다.
“아, 진영 씨?”
도명이 진영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도명 씨?”
‘당신이 거기서 왜 나와.’
“……아. 도명 씨, 반갑습니다.”
“반가운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섭섭한데요.”
도명이 진영을 향해 입꼬리를 쭉 올리며 말했다.
“아니요. 반갑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어딜 가도, 어떤 상황에서도 넉살 좋은 진영이 웬일로 어색한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도명은 그런 진영의 표정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김 작가님,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그럼요.”
목소리가 좋은 라디오 진행자가 ‘정원이 내게 왔다.’의 이야기에 대해 소개했다.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은 이야기 소개였다. 짧지만 많은 이야기가 A4용지 반 정도에 가득 들어 있었다.
솔직히 도명은 진영에게서 이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다. 진영은 조금은 촌스럽고 또, 무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의 세심한 감성을 보존하면서도, 이야기를 이렇게 맛깔나게 압축하는 작업으로 그가 먹고산다는 게 의외라고 생각했다. 감각의 끝이 뭉뚝하기에 그렇게 얼굴이 두꺼워 보이는 표정을 잘 짓는 줄 알았다.
드라마 주연 남배우가 패널로 등장해서 드라마를 찍을 당시의 분위기, 일화 등을 떠들어 댔다.
요즘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급부상하는 신인이었다. 얼굴은 호감형이었으나 연예인치고는 화려한 얼굴은 아니었다.
무명 시절을 적당히 지내고 주로 주인공 친구 역할 같은 주변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일상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번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드라마 속 연우는 조금 까칠하면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며 하루를 꽉 채우는 사람, 화려한 맛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말투 역시 뭘 하든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잘 아는 것에 대해서 떠들 때조차도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묵묵히 참는 것을 아주 잘해서 화가 날 때도 목소리가 함부로 올라가는 법도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기분에서도, 말투는 항상 무덤덤했지만 감각은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남자, 그리고 조금 두툼한 손에는 항상 흙냄새가 묻어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드라마 흥행을 걱정하는 제작진들을 일일이 설득해 가며 이 유명하지 않은 배우를 쓰자고 했다. 그리고 드라마는 예상외의 성과를 냈다.
드라마 속 남자, 어쩐 일인지 화려한 맛이 없는 연우라는 캐릭터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
관심사라고는 오직 정원을 가꾸는 것밖에 없는 이 남자가 여자 주인공인 ‘정원’에게 마음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빼앗기는 과정은 시청자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정원이 내게 왔다’는 이중적인 의미죠. 여자 주인공인 정원에게는 휴식의 공간인 정원이 왔다는 의미고 남자 주인공에게는 여자 주인공인 정원이 자신에게 왔다는 의미기도 하고요.”
진행자가 말했다.
“정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엄청난 여자죠.”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동운이 맞장구를 쳤다. 마치 자기 여자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죠. 정원은 한마디로 붉은 황소 같은 여자입니다. 정적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말이에요. 사람들은 이 여자를 마녀라고 부르죠. 드세고, 목소리가 크고 말이 빨라, 그녀의 아래에 있는 남자들은 언제나 드넓은 회색 사무실을 뛰어다니기 일쑤죠. 옷차림도 묘하게 특이해요.”
“네, 장군의 상투처럼 높이 묶은 긴 머리, 그리고 언제나 조금 무심하게 구겨진 흰 셔츠, 회색 정장 바지, 그리고 검은 가죽 신발. 화장은 선크림을 바르는 게 전부죠.”
“그리고 언제나 대충 슥슥 바르고 오는 새빨간 립스틱이 인상적이죠. 동운 씨한테 촬영장에서는 이런 지침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스타일리스트가 정원의 립스틱을 절대 공들여 바르지 말 것. 그리고 언제나 새빨갈 것.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살짝 촌스러울 정도로 빨간색이어야 할 것. 뭐, 이런 것들이죠.”
“네. 그래서 처음에는 분장 실수니 뭐니 하는 말이 많이 나왔었죠. 다들 여배우 메이크업에 너무 무심한 것 아니냐고요. 무심한 게 아니라, 다른 의미로 신경을 많이 쓴 겁니다.”
“아까 제가 정원 씨를 드세다고 표현했잖아요. 정원 씨는 정말 그런 여자입니까?”
“처음에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도 그렇게 생각되게 그녀에 대해서 말하는 주체들을 그녀의 부하 직원들의 입을 빌렸죠. 하지만 그건 여자 상사를 대하는 사무실 안의 관점이고요. 이건 같은 성격을 두고 하는 표현의 문제이고, 또 관점의 차이인데 정원은 진취적이고, 솔직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돌려 말하는 법이 없죠. 그녀는 그걸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애매하게 말해서 업무를 헷갈리는 일 없이요.”
“정원과 연우는 정말 다른 사람입니다. 연우는 말이 더디고 감각이 예민한 남자고, 정원은 말이 예리하고 감각이 무뎌진 여자죠. 이건 꼭 집어야 하는데 정확히는 회사 밖 정원이라는 캐릭터가요. 그렇죠? 연우 씨?”
진행자가 연우 역할을 맡은 배우를 향해 일부러 연우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연우여야 청취자들이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가 워낙 전쟁터 같으니까요. 유리천장을 혼자 힘으로 깨고 올라갔을 여자인 정원에게는 더욱 치열했을 겁니다. 거기서 모든 감각과 정신을 다 소진하고 오는 거죠. 정원은 퇴근 후면, 오히려 모든 감각이 무덤덤해지는 여자죠. 정말 극도로 둔해집니다.”
“연우 씨는 정원 씨의 어떤 면을 그렇게 사랑하게 됐죠? 설마 그저 이름이 정원이기 때문은 아니겠죠?”
“일단 처음엔 정원이 사람치곤 주변 풍경들처럼 조용해서 호감이었죠. 거의 뭐 풍경의 일부였죠.”
“방전된 정원의 모습을 본 거죠.”
“네, 연우는 정원을 방문하는 일부 사람들의 지나친 시끄러움을 혐오하잖아요. 저렇게 조용한 사람도 있구나.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그런 감정이었습니다. 식물같이 고요하고 청아한 사람. 그게 정원이었죠.”
“그런데 사실 정원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정확히는 정원이 가진 많은 면들 중에서 한 면이었죠. 정원의 또 다른 면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목소리가 큰 여자죠.”
“네. 그래서 연우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 아주 재밌죠. 사람을 대하는 연우의 무덤덤함이 산산조각 나는 그 순간 말이에요.”
“처음엔 호감이었다가, 오히려 환상이 깨지면 더 사랑에 빠지기 힘들지 않을까요? 로맨스 드라마의 공식대로라면 오히려 반대로 처음엔 비호감이었다가 나중에 호감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게요. 어떻게 연우가 정원에게 참을 수 없는 마음을 느끼게 된 걸까요?”
“네, 여기서 끊는다는 건 직접 보라는 뜻이겠죠.”
“아직까지도 안 보시는 분 있다면, 방금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정주행해 주세요. 그리고 그다음 주부턴 본방 사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우 씨, 아니 우리 종운 씨가 바빠진 스케줄 와중에 라디오에 출연한 이유 아시겠죠? 다음 코너는 ‘정원이 내게 왔다.’의 자문을 맡으신 분이죠. ‘BISCUIT FOREST’의 유도명 대표님에게 드라마 속 환상적인 정원들에 대한 이야기 들어 보겠습니다. 참고로 드라마 속 연우, 현실판이시죠. 물론 연우하고 똑같은 성격이라는 뜻은 아니고, 연우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 또 다른 연우이죠. 정원을 기획하시고, 또 가꾸는 분입니다. 잡지사도 운영하고 있네요. 너무 바쁜 분이라 모시기 진짜 힘들었습니다.”
“요즘은 라디오, 보이는 라디오로 많이 듣죠?”
“네. 오늘은 동운 씨가 나와서 더 그럴 겁니다.”
동운은 진행자의 말에 일단 형식적으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동운의 표정이 조금 난감해 보였다.
“왜요?”
“여러분 기대하세요. 드라마 자문해 주신 분, 너무 잘생겼거든요. 얼굴로 배우 기죽이는 분이니까, 긴장되네요.”
“이렇게 드라마 시청률뿐만 아니라 보이는 라디오 청취율까지 신경 써 주시나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띄워 주는데 나타나기 민망해할 만도 한데 도명은 아무렇지 않게 라디오 부스 안에 앉았다. 도명은 자신이 잘생긴 줄 잘 알았기 때문에 부끄러워 할 것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도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드라마 속 그 화제의 정원, 연우가 정원에게 고백한 그 정원이 여기 도명 씨의 잡지사 옥상 정원이라면서요. 다들 그 정원 어디냐고 찾는데, 여러분 사유지라 못 들어갑니다. 아니면 BISCUIT FOREST에 입사하면 되겠죠. 입사하면 잘생긴 대표님 얼굴도 매일 보고 환상적인 정원도 거닐 수 있겠네요.”
“제 직원들이 정말 저랑 일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벌써 귀가 간지러운 것 같은데요.”
도명이 여유롭게 웃으며 진행자의 말을 받아쳤다. 그 후로도 도명은 처음 생방송을 하는 사람 같지 않게 정해진 대본상의 질문들에 답을 했다.
진영이 작성한 대본이 있으니 아무리 생방송이라도 방송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도명은 평소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다 보니, 진행자가 대본 외에 만들어 놓은 약간의 돌발 상황도 여유롭게 받아쳤다.
“저, 그런데 진짜 생방송 처음이세요?”
“네.”
“어떻게 하나도 안 떠시네요.”
“나름 긴장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계시거나 아니면 완벽한 포커페이스이신 거네요. 저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대본에도 없는 건데 괜찮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저도 나름 집 안에 식물들이 있는 풍경을 선망하거든요. 그래서 누구나 다 키우고 쉽다는 다육식물에 도전했습니다. 종류도 다양하고 너무 올망졸망 귀엽더라고요. 그거 매일 보는 게 낙이었는데 개도 키울 수 있다는 다육식물을 제가 다 죽여 버렸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그렇게 뭉뚱그려서 질문하시면 제가 원인을 정확히 짚을 수는 없죠. 다만, 다육식물을 죽여 버렸다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과하게 습한 환경이 많습니다.”
“물을 너무 많이 줬다는 건가요?”
“네, 그 녀석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과하게 마음을 주신 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오히려 다육식물을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은 상황이라면 적당히 신경이 무심한 분들이 죽이지 않고 잘 키우죠. 다육식물들은 생각 이상으로 척박한 환경에 강인하거든요. 사람들은 보통 식물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할 때 목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는 걸로 표현합니다. 언제나 걱정하는 거죠. 목이 마를까 봐. 많이 주는 것보다 부족한 것을 더 많이 경계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뿌리가 썩죠. 뿌리가 썩으면 물이 부족한 경우보다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키우셨는지 자세히 말해 주시겠어요? 정확한 진단 내려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일단은 듣고 보니 저도 그랬던 것 같네요. 근데 과하게 물을 주는 기준을 잡는 게 어렵네요. 그냥 며칠에 한 번 주면 된다고 정해 주면 되는데, 그게 또 절대적인 건 아닌가 보더라고요.”
“네, 외부 날씨는 물론, 실내의 원예 식물들 같은 경우, 요즘 집 안의 환경을 조절하는 전자제품들이 많잖아요. 그것도 변수가 되죠.”
“그래서 화원에서는 흙을 만져 보고 건조하면 물을 주라고 하는데, 전 주로 흙이 건조하다고 느꼈거든요. 건조하다는 기준이 저한테 많이 애매하네요.”
“네. 어렵죠. 적당히 마음을 주는 게 어떤 건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도명 씨는 흙만 만져 봐도 아나요?”
“네. 아무래도 경험이 많다 보니까요. 흙의 색깔, 흙의 촉촉함 정도, 흙의 냄새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겠는지를 판단할 수 있죠.”
“그럼 그런 풍부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제 손에서 죽어 나가는 화초들도 많겠네요. 왠지 화초들한테 못 할 짓 같기도 하네요.”
“시행착오는 꼼꼼한 기록으로 줄여나갈 수 있죠. 내가 원하는 것을 투영하기보다 상대방의 반응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겁니다.”
“하지만, 식물들의 반응은 사람과 다르잖아요. 저한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요.”
“네. 그러니까 그들의 언어와 몸짓을 배우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시간이 필요하죠. 왜 사람은 보통 상대방에게 본능적으로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주잖아요. 우리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다육식물들이 심어진 화분의 마른 흙을 보면 물을 안 주고는 못 견디는 거죠. 손끝에 느껴지는 흙의 촉촉함은 사랑할수록 건조하게 느껴지고요.”
“정말 생명을 키우는 건 정성이고 또, 미묘하네요.”
“물론 저는 이게 직업이니까 이 정도까지 하는 거고, 일반들은 전문가들이 닦아놓은 길대로 마음을 줘도 집 안에 작은 숲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사람에 대한 것도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적당히 사랑하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동운이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극도로 발달된 언어가 있고, 또 같은 언어를 쓰면 얼마큼 사랑하는 게 좋은 건지 더 알기 쉽지 않을까요? 적어도 식물과 달리 사람은 싫다. 좋다. 목마르다, 같은 걸 말할 수 있죠.”
진행자가 말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언어란 건 듣는 사람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고, 또 빙산 아래 모습같이 드러나는 점보다 숨겨진 면이 더 많다고 하더라고요. 언어를 통해서 많은 걸 이야기하지만 결국 아무리 솔직하고 말이 많은 사람도 말하지 않는 점이 더 많은 거죠. 언어의 특성과 한계 때문에요. 말 속에 어떤 걸 따로 숨기지 않아도 말은 마음을 다 표현 못 한대요. 결국 사람끼리도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사람의 마음의 형태나 깊이를 재는 건, 어려운 일 아닐까요? 심지어 나 자신의 마음조차 말이에요.”
“네, 동운 씨가 어떤 말을 하는 건지는 알겠네요. 그나저나 그런 면에서 도명 씨는 정말 대단하네요. 같은 문화권 안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도, 심지어 내 마음도 모르겠는데 식물들에게 언제나 온화한 온도의 사랑을 주고 있잖아요.”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도명은 일단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라디오 진행자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목소리까지 좋은 우리 도명 씨와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이제 오늘의 이야기와 헤어지고 내일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하루가 남았네요. 오늘의 전문가가 남기는 오늘의 한마디를 들어 볼까요?”
도명이 대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미 어제 받은 질문이고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저 그것만 읽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제 하고 싶은 말이었고 지금, 이 순간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도명답지 않은 충동적인 기분이었고 선택이었다.
“내 마음의 작은 정원인 그 사람에게 좋은 정원사가 되어 주고 싶습니다. 내 마음과 당신의 마음에는 서툴지만, 정원은 비교적 잘 만듭니다. 숲의 언어와 몸짓을 배웠던 것처럼 오늘부터는 다른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 하루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우연히 들어간 골목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만나는 하루가 되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