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vs S
도명은 도화를 출근시키고 오전 업무를 마무리했다.
도명이 커피를 내린 후 간단한 빵 한 조각, 아몬드 초콜릿 3조각으로 일단 허기를 달랬다. 머리를 많이 쓰면 꼭 이렇게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찾아왔다.
쉽게 배고파지는 그에게 다이어트는 평생의 숙제였다. 이쯤 되면 도화의 체질이 부러워졌다. 그는 아무리 먹여도 보기 좋을 정도로만 살이 붙었다. 살이 기본적으로 잘 안 찌는 체질이었다.
운동하던 사람이 운동 쉬면 오히려 살이 더 쉽게 불어난다고 하던데, 도화는 안 그런 모양이었다. 도화가 도명이 너무 잘 먹여서 살이 쪘다고 투덜댔지만 귀여운 수준이었다.
도명은 주방에 서서 점심 식사를 위해 재료들을 꺼내고 밑 작업을 시작했다. 도명의 도마 위에 윤기 도는 주홍빛의 연어 살이 올려졌다. 연어가 꽤 두툼했다.
도명은 능숙한 솜씨로 연어를 다듬었다. 미리 주문해서 잘 보관한 연어는 오늘 아침에도 요긴하게 썼다. 오늘 도화에게 먹인 샌드위치 속 재료가 연어였다. 도화가 연어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도명은 도희가 온다고 하니,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좋아했던 음식을 생각해냈다. 그게 바로 연어였다. 도희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생선은 잘 못 먹어도 연어만은 잘 먹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는 연어 요리가 지금처럼 흔하지는 않았다. 요즘은 연어 자체가 유행이 되어 연어 자체를 사는 것도,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많이 쉬워졌다. 오히려 너무 흔해져서 예전만큼 감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도명이 브로콜리와 감자로 만든 수프를 끓이고 노르웨이식 연어 요리를 준비했다. 토치에 살짝 익힌 토마토와 구운 가지, 갖가지 허브가 들어간 샐러드도 준비했다.
허브는 도명의 가게 뒷마당에서 갓 따온 거였다. 마트에서 사 온 질 좋은 오렌지도 믹서에 간 후 달게 잘 졸여진 과일 청을 조금 넣고 시원한 탄산수와 섞었다.
그리고 그만의 비밀 허브도 다져서 넣었다. 마트에서 사 온 오렌지 주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싱그러운 맛이 나면서 기분 좋을 정도로 약간 달았다.
식탁에는 노란색 체크무늬 식탁보를 깔았다. 무늬가 대담할 정도로 크고 햇빛에 닿으면 밝게 빛나는 노란색이었다.
중간에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잠깐 업무 통화를 하고 테이블 세팅을 마저 했다. 화원에는 따로 방향제를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화원을 가득 메운 식물들이 내는 미묘하고 자연스러운 향기가 이미 음식 냄새와 섞여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식사 준비를 하는 도명의 얼굴은 뭔가 못마땅해 보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로즈골드 색 커트러리를 청량하게 빛나는 은색으로 바꿨다. 이게 도명이 가진 것들 중 가장 예쁜 커트러리는 아닐지라도 이번 식사에는 이게 어울렸다.
도명은 눈을 감고 공간의 향을 맡아 보았다. 뭔가 완벽하지 않았다. 도원의 화원은 꽃다발은 취급하지 않으므로 테이블 위의 색과 향을 다채롭게 채울 꽃 같은 건 없었다.
도명은 테이블 한가운데 작은 로즈메리 화분을 두어 개 올려놓았다. 로즈메리가 식재료로도 쓰이는 허브인 만큼 음식의 냄새와 섞여도 어울리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았다. 더불어 싱그러운 초록색도 보기 좋았다.
식탁을 꾸미는 일을 거의 끝낸 도명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창밖을 보았다. 햇빛이 좋은 날이었다.
솔직히 이제 가족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굴었지만 가족과의 식사를 준비하는 기분이 이상했다. 더군다나 도희하고는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학창시절에는 여느 남매들과는 달리 매일 붙어 다녔었다.
도명이 집으로부터 애매한 독립을 한 후에는 보는 날들이 조금씩 뜸해지더니 20대 중반부터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일단 표면적인 이유로는 부모님이 도명이 도희를 만나는 것을 내심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남다른 성향의 도명이 곧게 잘 자란 도희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도명이 내심 그녀를 오랫동안 질투해서였다. 도명은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도명은 도희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보인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완벽한 오빠를 연기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도명은 완벽한 오빠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겉모습만 멀쩡하지 변태에다가 줄곧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받는 그녀를 질투하는 속 좁은 오빠였다. 그러니 연기가 아니면 그녀를 솔직하게 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도희와의 관계를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도명이 도희가 예쁘다며 데려온 도도를 산책시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한 것이다.
집안에서 도명과 도도의 관계가 제일 친밀하고 견고했기에 도명의 충격과 아픔이 제일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가족들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도명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가 커졌고, 도희는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도도가 결국은 차가운 길 위에서 죽게 되자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도명은 그 일로 도희가 내심 도명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희가 아무리 도도를 예뻐했다고 한들 그렇다고 그 일로 오빠를 영원히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떠한 가시적인 원망이나 갈등도 없이 시간이 자연스럽게 지나면 녹아 사라질 원망이었다. 시간도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도는 그녀에게 가족이었지만 어쨌든 진짜 가족은 도명이었으니까.
어쨌든 겨우 버티고 있던 동생과는 관계는 도도의 죽음으로 맥이 뚝 끊겼다. 사실 도명 쪽이 견딜 수가 없었다. 도도가 없는 집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견디기에는 도명은 너무 섬세했고 지독하게 무너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여동생이 이곳에 온다. 기쁜 걸까? 단순히 마냥 기쁜 것치고는 모든 생체 반응이 무덤덤했다.
설레는 기분을 느끼기에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지나치게 분주했다. 그러다가 도명은 그냥 식사 한 끼 하고, 그녀가 하는 말을 적당히 듣고 받아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들, 사회적으로 도명의 머리 위에 앉은 사람들, 공통된 관심사가 없을 확률이 높은 사람들, 나와 성격이 안 맞는 사람들, 도명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이어서 그 호의를 실망시키면 적의로 바뀔 수 있는 사람들, 그가 홀려야만 할 사람들, 이 모두가 도명이 함께 식사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색한 동생과의 식사는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라고 특별할 건 없어. 어차피 다른 타인들과 같이 가족도 나와 안 맞을 수도 있는 거야.’
도명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피아노를 실은 용달차가 왔다. 도명이 그렇게 기다리던 피아노가 오자 내내 묘하게 심각했던 도명의 얼굴이 밝아졌다.
도명은 환하게 웃으며 가게 문을 열었다. 힘 좋아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차에서 내렸고 도명이 지시한 위치에 피아노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일단 피아노는 화원의 깊숙한 곳에 놓았다. 고민을 했지만 도화와 같이 쓸 피아노이니까 자신의 지하방보다는 중간층인 화원이 좋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화원은 식물의 식생별로 유리 온실이 있었는데 이 유리 온실과 울창하게 자란 식물들 때문에 묘하게 방음이 잘 돼서 어설픈 솜씨로 퉁탕거려도 괜찮을 듯했다. 내일은 솜씨 좋은 피아노 조율사를 부를 것이다.
피아노를 놓고 나니 대충 어지러운 상황이 하나 끝난 느낌이었다. 그리고 도명이 기다리던 도희가 왔다.
“오빠!”
도희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밝고 살가웠다. 다 큰 남매가 부둥켜안으며 인사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쩐 일인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간극에서도 몸의 친밀함은 완전히 무뎌지지 않았다. 도명은 도희의 등을 말없이 토닥거렸다.
“여기 오빠 가게야?”
“응.”
“여기 큰이모 살 때랑 분위기 완전 다르다. 예전에는 완전 낡고 촌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이었잖아. 갑자기 외국 분위기 나. 말도 안 돼. 오빠가 직접 꾸민 거야?”
“내가 다 한 건 아니고. 공간 디자이너랑 같이. 디자이너 많이 괴롭혔지.”
“오빠는 예전부터 이국적인 거 좋아하긴 했어.”
“예전부터?”
“응, 예전부터. 이국적인 풍경이 담긴 엽서도 모았잖아. 난 부모님이 오빠가 해외에서 산다고 하기에, 아, 결국 떠났구나, 엽서 속 풍경으로 정말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오빠 외국에 가서 사업한다고 했을 때,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 그냥 올 게 왔다고 생각했어.”
이런 말을 하는 도희의 표정이 미묘했다. 언제나 구김살 없는 그녀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내가 언제든 떠날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하네. 어쨌든 비행기는 일 때문에 많이 타긴 했지.”
“응, 오빠는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보였어. 아니, 정확히는 떠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사람 같아 보였어.”
“그렇구나.”
도명은 도희의 말에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지만 내심 그녀의 말에 놀랐다. 완벽한 오빠 역할을 잘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전에 보니,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도 그리 놀라워하지도 않은 걸 보면, 정말 여러모로 연기에 실패한 것 같았다. 그 당시 멍청한 남자애들 몇 속였다고, 그렇지 않은 그녀까지 속였다고 속단한 게 분명했다.
접시에 메인 요리를 담는 도명의 손이 살짝 떨렸다. 도명은 요리를 담다 말고 주방 상판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도명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자신이 더 오랫동안 잘못 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못 느꼈지만 갑자기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여기저기서 엉킨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디서부터 엉켜 버린 걸까?’
도명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미리 배치해놓은 테이블 위에 요리들을 올려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도 올려놨다.
“우와, 무슨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 같아.”
“맛도 고급 레스토랑 맛이었으면 좋겠다.”
도희는 맛보는 것보다 테이블 위의 아름다운 음식을 찍는 것이 더 중요한지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있었다. 도희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은 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걸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보고 있던 도명이 도희가 찍은 사진을 뺏어서 보더니 혀를 찼다.
“구도가 이게 뭐야?”
가게 안에는 햇빛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커다란 창들이 있었고 햇빛이 잘 드는 테이블 위에 올라간 음식은 웬만하면 잘 찍혔다.
하지만 식물을 가지고 변태적일 정도로 감각적인 잡지를 만드는 도명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도명은 접시들을 이리저리 조금씩 옮기더니 도희의 핸드폰을 뺏어 다시 찍었다. 그리고는 도희에게 넘겨줬다.
“무슨 사진을 이렇게 잡지 컷으로 찍고 그래.”
“오빠, 잡지 만드는 사람이야. 포토그래퍼만큼은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은 해야지.”
“화원 하는 게 아니고?”
“화원도 하고, 원예잡지도 만들고. 정확히는 보태니컬 잡지를 만들어. 보태니컬이라고 하면 잘 못 알아듣는 사람이 많아서 일단 원예잡지라고 하지. 우리나라에서 보태니컬 시장이 아직 충분히 크지는 않긴 한데, 점점 확장되어가는 추세고, 또 기존 시장은 우리가 꽤 안정적으로 꽉 쥐고 있어.”
“여기서 잡지 만들어?”
도희가 화원의 풍경을 눈으로 쭉 훑으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잡지를 만드는 사무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여긴 화원 겸 내 개인 사무실. 잡지 만드는 본사는 따로 있어. 좀 있으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 가구하고 일부 구조만 조금만 바꾼 후 그 안에 전문 가드닝 팀을 들일 거야. 그 안에 식물 표본하고 세밀화로 가득 채워 놓은 작은 도서관도 만들 거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생식물에 대해서 아직 연구도 막 시작됐고 세밀화 시장도 작긴 한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먼저 빨리 장악해놔야지.”
“멋지다. 진짜 해외에서 일하는 것 이상으로 멋있어.”
“그만 비행기 태우고 먹자.”
도희는 도명이 만든 음식들을 맛보고 너무 맛있다고 발을 동동거렸다. 도명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작게 미소 지었다.
도화는 말없이 와구 먹다가 맛있다고 한 번 크게 표현하는 편이고 동생은 하나 먹을 때마다 반응을 자잘하게 많이 해 주는 편이었다. 맛이 어떻고, 냄새는 어떻고, 식감은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도화가 한번 말을 하면 잘 하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하루에 더 많은 단어를 끄집어내서 말하는 그녀는 왜 맛있는지 구체적으로 오목조목 잘 말했다. 어쨌든 양쪽 다 음식을 해 주는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도희와의 식사는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도명이 대화를 이끌어가지 않아도, 도희가 알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대는 편이었다. 천하의 유도명이 이 별거 아닌 걸로 뭘 그렇게 긴장했는지 자신이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근사한 식사와 별것 아니지만 적당히 즐거운 화제들로 채워진 대화 중에 도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솔직히 궁금한 거 말해도 돼?”
도명을 쳐다보는 도희의 표정이 조심스러웠다. 도희의 포크가 접시의 매끄러운 표면을 미약한 힘으로 긁었다.
“말해.”
“나 사실 도도 그렇게 떠나보내고, 오빠 원망했었다.”
“알아.”
도명이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매일 귀찮다고 정작 도도 돌보는 걸 오빠한테 떠넘기고서 말이야.”
“응.”
“도도 그렇게 되고 오빠 대학 입학하자마자, 독립했잖아. 서울에 집 있고 서울에 있는 대학 붙은 사람이 말이야. 그래서 오빠가 다 질려 버린 건 아닌 거 싶었어.”
“뭐에?”
“말 그대로 다. 오빠한테만 엄격한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또, 도도 그렇게 된 걸로 오빠 원망하는 나한테도 질려 버린 건 아닌가 싶었어.”
“너 나한테 도도 일로 화낸 적 없잖아.”
“화낸 적은 없지. 오빠도 힘들어했으니까. 하지만 내심 원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거든. 다른 무심한 사람이라면 내가 표현한 적 없으니까 몰랐겠지. 하지만 오빠는 무심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잖아. 오빠라면 당연히 느꼈을 거야.”
“그래. 알았어.”
“그래서 오빠하고 점점 멀어지는 거 느꼈을 때 나 한동안 죄책감 들었었어. 내가 오빠를 도도 일로 원망해서 쫓아낸 건 아닐까 해서. 오빠는 섬세하고 부드럽고 연약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이유들 중 하나였지. 그것도 조그만.”
“나 엄청 웃기게도 오빠한테 미안해하면서도 동시에 화도 났어. 내 어리광 다 받아 줄 땐 언제고 갑자기 못 해 먹겠다고 나하고 말도 없이 거리 둔 것도 그렇고, 또 우리 집 분위기 알면서 나 혼자 내버려 둔 기분이었어. 오빠한테 배신당한 기분이었어.”
도희의 말에 도명이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다가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도 솔직히 말하자. 네가 힘들 게 뭐가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지. 웃는 인형이 아니거든.”
“안 웃으면 되잖아. 편해서 웃어놓고 왜?”
“오빠는 완벽한 아들 안 하면 됐잖아. 왜 힘들게 그러고 살았는데? 오빠가 그랬던 이유랑 같아.”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 대화를 끝으로 한동안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나는 완벽한 아들이면서 동시에 웃는 인형이기도 했어. 웃음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지. 너는 완벽할 필요가 없었잖아. 내가 오래간만에 대화하는 동생 앞에서 지금 기분 나쁘게 말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어. 근데 이렇게 마음 까집은 김에 말에 쓸데없는 장식 빼고 이야기하자.”
“오빠, 나 지금 뭐 하는지는 알고 있어?”
“미안. 모르겠다.”
“학원 강사 하고 있어. 지금은 나름 만족하고 있긴 해. 학생들도 잘 따르고. 하지만 난 원래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목표였어. 그런데 시험이 너무 어렵더라.”
“왜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지루하고 틀에 박히고, 솔직히 이로운지도 잘 모르겠다.”
도명이 부모님을 상기하며 말했다.
“가진 재능이 다 고만고만해서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어. 그래도 공부는 그럭저럭 한 것 같은데 임용고시 문턱은 못 넘었어. 공부도 다른 재능들처럼 고만고만했나 봐. 오빠는 내 말 전혀 이해 못 하겠지만, 난 여자애니 아빠가 나한테 아무 기대 없는 게 더 상처였어. 넌 적당히 성실하게 살다가 지금처럼 집안의 기쁨 역할을 하면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고 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나름 노력했거든. 집안의 기쁨 역할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왜 그냥 나 자체로 폼 나는 일들 많잖아. 근데 난 오빠처럼 특별하지를 못했어. 내가 아까 꿈이 없다고 표현했지만 솔직히 선생님은 정말 되고 싶었어. 왠지 아빠보다 좋은 선생님이 될 자신이 있었어. 적어도, 여학생들한테 그리고 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학생들한테 아빠보다 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요즘 나보다 어린 여자애들이 얼마나 당찬지 알아? 좋은 선생님들도 많지만 아빠 같은 선생님들도 많을 거 아니야. 본인이 이제 낡을 줄 모르고 정석인 줄 아는 사람들 말이야. 그리고 엄마보다 더 멋진 여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우아하고 멋진 분이지만 솔직히 집 안에서는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았어. 아무튼 결과적으로 뭐든 안 되니까 내가 할 건 그나마 잘하는 집안의 기쁨 역할이었지. 뭐. 오빠 말대로 편해서 웃은 거 아냐. 가진 게 그것뿐이었어.”
“난 여러모로 너무 특별한 게 많아서 부모님이 싫어했어.”
“그것도 그래! 두 분 다 어느 시대에 사시는 거야? 동성애가 뭐 어때서.”
“아직 시대가 그렇게 많이 바뀌지는 않았단다.”
“두 분은 인생의 대부분이 선생님이었잖아. 두 분은 달라야지.”
“적어도 어머니는 내가 동성애자라서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럼?”
“물론, 내가 동성애자라서 사람들 앞에 아들이라고 세우기 창피해하시는 건 있지만 적어도 그것 때문에 내가 싫지는 않아.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취향이 많이 특이하거든.”
“어떤 취향?”
“여동생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취향은 아니야.”
“뭔데? 난 오빠한테 내 치졸하고 창피한 마음까지 다 말했는데 이 와중에 오빠는 또 숨기기야?”
“나, SM 해. 참고로 대형 기획사 아니다.”
도명은 도화에게 맨 처음 SM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그가 보인 반응을 상기하며 말했다.
“그래서 S야? M이야? 오빠 호구 같은 성격에 분명 M이지?”
“내가 어딜 봐서, M이야?”
“마음 약하고 은근히 호구 같잖아.”
“아니야. S하고 돔이 묘하게 섞여 있지. 내가 무슨. 척 봐도 그쪽이지.”
“아……!”
“그래. 그래서 어머니가 날 보면 소름 돋아 하고 그러는 거야.”
“오빠, 나도야.”
“……응?”
“나도 그 포지션이야.”
도명은 도희가 다시 한번 더 자신이 S임을 알려 줬으면서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디에선가 문맥을 잘못 짚었다고 생각했다.
도명이 알고 있는 도희는 집안에서 사랑을 독점적으로 받다 보니, 조금은 제멋대로인 면이 있었지만 성격이 센 편은 아니었다. 웃음도 사근사근하고 목소리도 언제나 애교 넘쳤다.
“하하. 농담도.”
“왜 농담이라고 생각해?”
도희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며 귀엽게 말했다. 도명은 그런 도희의 표정을 보니 더욱 그가 밤의 여왕님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여동생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진지하게?”
“자꾸 오빠답지 않게 재차 묻고 그래. 바보 같아 보이게.”
도희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눈꼬리를 하고 말했다. 그리고 도명은 그 웃음 속에서 어떤 강렬한 힘을 느꼈다. 그 웃음이 도명 자신과 쏙 닮아 있었다.
‘우리 집안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집안이냐. 이쯤 되면 명문 사디스트 가문 인장이라도 현관문에 걸어놔야 하는 거 아냐.’
“어쩌다?”
“어쩌다? 표현이 왜 그래. 오빠가 그렇게 표현하니까 마치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것 같잖아. 안 그래? 언어가 얼마나 미묘하고 또. 안쪽 깊숙한 생각을 투명하게 비춰 주는데.”
“그래. 왜?”
도명은 아직도 방금 전에 귓구멍을 통해 뇌 속에 비집어 앉은 사실 하나 때문에 얼떨떨했다.
“일단 지금 내 남편 마조히스트야.”
“아, 그래. 축하한다.”
“그런데 이쪽 성향이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한테도 꺼내기 힘들잖아. 특히 다른 의미로 애인한테는 더욱 말이야. 오빠, 최근 연애한다며?”
“그래. 연애하지.”
“그래. 우리 한창 연애할 때는 그이가 나한테 비밀을 만드는 것 같아서 너무 싫었어. 그 미묘한 감정의 틈 때문에 사이가 천천히 멀어지더라. 오빠네 커플은 어때? 비밀이 있어?”
도희는 넌지시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도 오빠가 사디스트인 거 알고 있냐고 묻고 있었다.
“있다가 불의의 사고로 없어졌지. 정확히 오늘 아침에 말이야. 일단 네가 돌려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해서 답하자면 성적 취향에 대한 비밀은 없어.”
도명은 결국 러브레터 부스러기를 지키지 못한 사실을 상기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쯤 되면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날뛰는 도화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갑자기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이 강하게 와 닿았다.
“어머, 축하해.”
도희가 가지런히 모은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부딪치며 호응했다. 도희는 도명에게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다.
“결국 권태기가 오고, 겁에 질린 남편이 나한테 무릎 꿇고 울더라고. 남자들이야 뭐, 부풀려진 자존심을 기본 사양처럼 가지고 있지만 그이는 뭐랄까, 좀 더 과시욕이 심했거든. 내내 그게 엄청 거슬려서 화까지 나려던 참이었는데, 그런 남자가 갑자기 내 앞에서 울며 무릎을 꿇는 거야.”
‘아, 여동생의 이런 종류 연애 얘기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하고는 19금 넘어가는 이야기까지 편하게 이야기했는데, 여동생이라 그런가. 아, 진짜 불편하네.’
하지만 도희는 오래간만에 오빠와 브런치를 하며 수다를 떠는 시간이 너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명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오렌지 주스로 마른 목을 축였다.
“남편이 그러면서 고백하더라. 자기가 숨기고 있는 특별한 취향을 말이야. 막 울며 날 올려다보는데 너무 예쁘더라고. 간만에 그 사람보고 설렜어.”
“그렇구나.”
‘아. 제발, 매제 얼굴 보기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그만.’
“오빠 애인은 어때?”
“내 애인 뭐?”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며 짧고 강하게 답했다.
“아, 그러니까 같이 자냐고. 그러니까 오빠 취향대로.”
도희가 발갛게 된 뺨 위에 부끄럽다는 듯이 두 손바닥을 올리고는 의자 아래 발을 휘저어댔다. 도명은 포크를 꽉 쥔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도명은 왠지 이 분위기가 싫었다.
“뭐. 귀엽지.”
“그렇구나! 원래 오빠 애인도 그쪽이야?”
“아니.”
“아닌데?”
“음, 길들였지.”
“세상에~ 그게 가능하구나. 아니 어떻게?”
도희가 눈을 반짝이며 도명을 쳐다보았다. 결국 도명이 못 참고 아까부터 목 끝에서 빙빙 맴돌고 있는 말을 꺼냈다.
“도희야.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 참고 있는데 말이야. 내가 너랑 음담패설을 어떻게 하니?”
“오빠, 음담패설이라니! 담백한 정보 교환이지.”
도희의 반응에 도명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넘기며 마른세수를 했다.
‘대체 어떤 면이 담백하다는 거냐. 어머니, 사람을 잡을 거면 얘를 잡았어야지, 왜 나만 죽어라 팼나.’
도명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억울함에 턱에 힘을 빡 주었다.
“오빠,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 파트너를 어떻게 휘어잡아.”
‘야, 너 몇 년 차야. 이야기 들어 보면 빨라 봐야 20대 중반 같은데, 나 교복 입고 플레이했거든.’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정말 완벽하게 꽉 쥐어 잡고 있어?”
“당연하지.”
도희가 손을 뻗어 두 손바닥 사이에 도명의 얼굴을 가두었다. 그리고 도명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내 눈 보고 말해 봐. 진짜 파트너 꽉 쥐고 있어?”
“꽉 쥐고 있어.”
도명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답했다.
“정말 완벽하게?”
아까보다 더욱 단호한 눈빛으로 재차 묻는 도희의 질문에 도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구는 똥개라 그 어떤 위대한 돔이 와도 완벽하게 컨트롤 못 해.’
“어, 오빠 방금 눈 흔들렸어.”
“아냐.”
“흔들렸잖아. 아무리 우리가 그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어도 난 오빠를 알아. 다른 사람 속인다고 나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이 바보가. 아 밥 다 먹으면 이제 집에 좀 가라. 식사 한 끼 하는 건데 뭐가 이렇게 피곤하냐.’
“오빠는 분명 예쁘다고 단호하게 못 굴 게 분명해. 바보같이. 그런데 오빠가 무슨 돔이야. 차라리 굴복당하는 게 마음이 편하지.”
‘이 햇병아리가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아 확 네 애완견 데리고 와 보라고 하고 싶네. 아. 근데 그 개가 내 매제잖아. 이상한 오기 생기게 하지 마라. 족보를 피카소보다 더 입체주의에 걸맞게 해체하고 재구성해 줄 테니까.’
결국 도명이 손바닥으로 도희의 이마를 툭 밀었다. 그러자 도희의 입에서 억 소리가 나면서 뒤로 밀려났다.
“자꾸 까분다. 그래서 남자친구 성적 취향 맞춰 주다가 S가 된 거냐?”
‘그래, 차라리 화제를 돌리자.’
“뭐 그런 거지. 무릎 꿇고 우는 모습을 못 잊어서 이상해도 그래, 한 번만 맞춰 주자 하다가 이쪽으로 발 들인 거지. 뭐. 그리고 이 사람 놓치기 싫어서 결혼이라는 족쇄를 걸었지. 서류뿐만 아니라 밤에도 진짜 족쇄를 걸기도 해.”
그 후로도 도명은 도희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면서 피로해진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초콜릿 한 상자를 앉은 자리에서 다 까먹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