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경위 보고서
콘크리트 같던 도화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제대로 된 집밥을 먹고 설거지라는 귀찮은 일거리가 생겼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사람이 생겼다.
“도명 씨, 여기 보고서요.”
도화가 도명에게 보고서를 넘겨 준 후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도명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보고서를 넘겼다. 도화가 넘긴 보고서 안에는 도화에 대한 정보가 체계적으로 적혀 있었다. 일단 도화 자신의 기본 정보와 신체 사이즈, 시력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도명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건강하네요.”
“네. 건강한 편입니다. 건강을 과신하지 않고 건강검진도 자주 받고요.”
도명이 잘했다는 듯이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장은 그냥 형식적인 서론이고 그다음 장이 본론입니다.”
“그렇군요.”
도명이 도화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주면서 눈으로 보고서 내용을 훑었다. 보고서에는 도화의 평균적인 하루에 대해서 시간대별로 적혀 있었다.
일어나는 시간. 집을 나서는 시간, 몇 시에 몇 번 버스를 타서 회사 사무실에 도착하는지. 업무 시간. 업무 시간 중 휴식 시간. 평균적으로 퇴근을 하는 시간대.
집에 돌아오는 길, 교통편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화가 회사 근처에서 사용하는 상점들도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편의점. 베이커리, 카페, DVD점. 정도였다.
상점들에는 가는 주기와 빈도도 기재해 놓았다.
“퇴근 시간에 변수가 생긴다면 이런 곳에 들르는 겁니다.”
“의외로 카페도 들르네요.”
“네. 머리가 무거울 때 카페인을 섭취하러 갑니다. 생각할 게 좀 있으면 먹고 가고 보통 테이크아웃 해서 갑니다. 먹고 갈 때는 거기 적힌 대로 대체로 30분은 안 넘기는 편입니다.”
도명은 도화의 보고서가 마음에 들었다. 누가 도명의 집 안에서 이 파일을 발견한다면 도명을 굉장히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스파이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한 사람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긴 파일이라니.
사실 도명이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이런 정보였다. 이런 불법적인 것처럼 보이고 변태적인 정보 말이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정리까지 완벽하게 해서 주다니. 그것도 본인이 자처해서 말이다.
솔직히 도명은 도화가 보고서를 잘 쓴다는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도명이 봐 온 도화는 언제나 얌전히 잘 있다가도 우당탕탕거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거기다가 도화가 지저분한 편은 아니었지만 정리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고서를 써 온 것을 보니, 정보의 완벽한 정리는 물론이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에 대해서 활자의 차이로 구분을 해 놓은 것, 보고서의 흐름 등이 친절하고 명확했다. 도화가 써 놓은 보고서 종이를 쓰다듬는 도명의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백구한테 이런 면이 있다니. 너무 섹시하잖아.’
“거기서 변수라면 회식입니다.”
도화의 새로운 섹시함을 발견한 도명의 머릿속을 비집고 도화가 말했다.
“회사 회식은 주기가 어떻게 되나요?”
“사장님 마음입니다. 그래서 보고서에 적기가 난감했습니다.”
“사장님 마음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사회적인 약속이란 게 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나 회식 갈 때 기타 약속 있을 때만 저한테 문자 꼭 주세요.”
“네.”
도화의 대답이 완벽하게 딱 떨어졌다. 도명이 보고서의 뒤 페이지를 넘겼다. 도화가 거친 학교들, 그리고 성적표가 기재되어 있었다.
“아. 도화 씨 그거 압니까?”
도명이 너무 신기하고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 같은 고등학교 나왔어요.”
“아, 진짜요?”
도화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네. 같은 고등학교 나왔네요.”
“근데 왜 만난 적이 없죠?”
“도화 씨하고 제 나이 차 때문에 한 끝 차이로 빗겨 나갔겠죠.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같은 시간대에 놓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 고등학교 후배님을 다 보네요.”
도명이 도화가 쓴 보고서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고작 고등학교 이름이 적인 활자인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고서의 다음 페이지는 도화가 살면서 경험해 본 것들에 대해서 정리한 것이었다. 유년 시절에는 꽤 이것저것 해 보았다.
“도화 씨 피아노 칠 줄 압니까?”
도명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네. 체계적인 건 아니고 몇 곡 칠 줄 압니다.”
“저랑 똑같네요. 저도 체계적인 건 아닙니다. 그 당시 꼭 흉내 내고 싶었던 게 있어서.”
도명의 얼굴에 머쓱해하는 표정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그런 얼굴을 지웠다.
“도화 씨 다재다능했네요. 축구에, 높은 수학 성적에. 피아노까지.”
“아. 지금 남은 건 수학 정도밖에 안 남았습니다. 솔직히 이제는 그것마저 지겹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 주로 도화가 살면서 많이 한 것은 회사 다니기와 공포영화 DVD를 보고 정보를 수집한 것 정도였다. 그나마 그쪽 보고서를 반 정도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최근에 도명과 한 것들이었다.
“이 뒤편은 짧네요.”
“네…….”
도화가 기죽은 듯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채우면 되죠. 물론 도화 씨가 채우고 싶다면 말입니다.”
“채우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하고 싶은 거, 아니 정확히는 보고 싶은 거 생겼습니다. 우리, 주말에 피아노 사러 갑시다.”
“피아노 비싸요. 그리고 분명 도명 씨 성격에 아무 피아노나 안 살 것 같은데요.”
“비싸겠죠. 음 비상용 통장 하나 깨면 되지 않을까요?”
“잠깐만요. 비상용 통장은 그러라고 있는 통장이 아니잖아요.”
“생계용 통장은 아니잖아요.”
도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도화는 저 위기감 없는 표정에 경악을 했다.
‘잠깐, 이 남자 살림꾼인 줄 알았더니 소비 왕이었어. 이렇게 충동적으로 몇백을 지르는 게 어디 있어. 아니 잠깐 이 남자 취향상 몇백이 아닐 수 있어. 천 찍는 거 금방이라고.’
“도화 씨 통장 터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내 남자 통장이니까 그렇죠! 누가 보면 리코더 사러 가는 사람 같네요. 원래 이렇게 돈을 막 써요?”
“잠깐 도화 씨 그 눈초리 뭡니까? 저 돈 막 함부로 쓰는 사람은 아니에요.”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아.”
도명은 그제야 자신이 이 짧은 순간에 무슨 결정을 내린 건지 깨달았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백구가 뜻밖의 면에서 섹시한 탓이었다.
도명은 자신이 순식간에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자각은 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피아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도명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뭐든지 가능한 상상 속에서조차 실력 좋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들기듯 모든 음률이 매끄러운 건 아니었다. 건반 위 손가락은 조금만 스쳐도 쑥스러워했고 조금씩 엇박자를 냈지만 이내 호흡을 맞추고 나면 기분 좋은 웃음이 번질 것이다.
순간 완벽히 들어맞았던 호흡은 이내 미끄러져 내려가겠지만 잠깐의 완벽함만으로도 기분은 충만하고 간지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도화의 말대로 피아노를 사는 건 역시 큰일이었다. 도명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다는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통장 하나 깨면 될 것 같은데. 도명이 도화의 눈치를 살피듯 도화를 슥 쳐다봤다.
“우리 건물주께서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순간적인 기분 때문에 피아노를 사는 건 과소비예요.”
거의 모든 순간, 도명에게 약한 도화이지만 지금만큼은 도명에게 단호했다.
“이제 우리 자기가, 내 통장 관리도 하는 겁니까?”
“이럴 때 자기니, 뭐니 하는 거 너무 치사해요.”
도화가 새빨개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제는 애칭을 쓰는 것도 제한이 걸리는군요.”
“도명 씨.”
“도화 씨가 자기야, 라고 제대로 해 주는 걸로 이 대화 마무리 지읍시다.”
“아, 그러니까, 그걸 하면 이번 주말에 피아노는 안 사는 거죠? 그렇게 합의를 보는 거죠?”
도화가 야무지게 쐐기를 박으려고 했고 도명은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도명이 도화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자기가 돈을 아꼈으면 좋겠습니다.”
“달랑 두 글자인데 말도 더듬고, 뒤에 듣기 싫은 말도 붙고 영 꽝이네요.”
“자기가!”
도화가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딱 주고 말했다.
“여기, 해병대 아니에요. 제가 하는 거 못 들었어요? 나직하게, 혹은 달콤하게. 자기라는 말에 어울리는 뉘앙스 모릅니까?”
도명이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까칠하게 말했다.
“어려워요.”
도화가 좀 봐달라는 듯이 머리를 도명의 품 안에 밀어 넣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도명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연습은 하고 있는 거 맞습니까? 전혀 안 늘었어요.”
도명은 표정은 이미 달콤하게 녹아내리고 있으면서도 괜히 성대에 힘을 주고 찬바람을 불어 넣었다.
“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명 씨 얼굴 보면 손가락이 막 오그라든다고요.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잘도 그런 말을 합니까?”
“저에 대한 도화 씨 사랑이 저보다 메마른가 보죠.”
도명은 안 그런 줄 알면서도 괜히 이런 말을 했다. 도화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허둥지둥대고, 애쓰는 모습이 좋았다. 이게 습관이 되면 도화가 피곤함을 느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단맛을 봐 버린 혀는 중독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는 도명 씨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도명 씨가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 행동 어떤 게 그렇게 도명 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피아노 못 사게 해서 그래요? 그런 것 때문이라면…… 으, 으아. 피아노는 그래도 안 돼요!”
‘아, 이렇게 간절한 와중에도 피아노는 못 사게 하네.’
“도명 씨, 어쨌든 이건 성격 문제에요. 저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좀 무뚝뚝한 편이에요. 진짜예요. 진짜 성격 탓이에요.”
도화가 도명의 손을 잡아끌어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허둥지둥 대며 꼼지락거리는 와중에 은근슬쩍 손바닥을 더듬는 손이 끈적거렸다.
‘요망한 백구. 은근슬쩍 몸으로 해결하려는 것 봐라.’
도명이 기분 좋게 간질거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도명은 도화가 도명의 기분을 살피기 위해 얼굴을 들어 올리자 이내 표정을 굳혔다. 도화가 자신의 입술을 도명의 입술에 붙였다 뗐다.
달달한 향기를 희미하게 남긴 채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그 뭉글거리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도명은 점점 화난 척 연기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인내심 없는 자는 적어도 세 개를 얻을 걸 하나만 얻게 된다는 그의 신념 하에 특유의 염세주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무뚝뚝한 편이긴, 방금 내 품에서 머리 비비적댄 건 뭔데? 그건 분명 치명적이라고. 아 입이 무뚝뚝하단 소리인가. 몸은 이렇게 애교가 넘치는데. 모르나? 본인이 온몸으로 애교를 떨어대고 있단 걸.’
“도명 씨.”
“알아요. 도화 씨가 절 좋아하는 걸.”
“정말요?”
“네.”
도명은 말로는 ‘네.’라고 해 놓고 여전히 표정은 시큰둥하게 지었다. 그것이 도화의 몸을 더욱 달아오르게 했다.
“자, 제대로 따라 해 봐요. 자기야.”
도명이 특유의 섹시한 목소리로 ‘자기야.’라고 했다. 그리고는 도화가 자신과 시선도 못 피하게 두 손으로 도화의 뺨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 그렇게 도명 씨처럼 섹시하게요?”
도화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되물었다.
“네. 똑같이.”
“으아아아.”
“아니, 아니. 이상한 소리 내지 말고요.”
“꼭 그렇게 목소리에 야한 바람 소리 내야 해요?”
“바람 소리요?”
도명은 도화의 질문에 자신이 목소리에 바람 소리를 섞나 싶어 갸우뚱 했다.
“그 마치, 공기 반 소리 반 같은 그 느낌 있잖아요.”
“아. 뭐. 공기 반이든 뭐든 해 봐요. 제발 좀. 이제는 제가 무릎 꿇고 빌게 생겼습니다. 자꾸 저 섹시하지 않게 만들래요?”
“자기야.”
“감기 걸렸어요? 독감입니까?”
도명은 처음에는 도화를 놀리려고 시작한 건데 이쯤 되니 오기가 목 끝까지 치밀기 시작했다. 도명의 집착 어린 표정에 도화는 이제는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깜짝 놀라서 확 튀어나와 버린 말 한마디에 자신이 이렇게 고문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도화가 필사적으로 눈을 옆으로 굴리며 고개를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집념이 생긴 도명이 그의 뺨을 두 손바닥 사이에 결박시켜 놓고 단호하고 구속력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 씨 날 봐요. 어디를 보고 있는 겁니까? 감히 도망갈 생각 말아요.”
“연습해올게요. 정말 열심히 연습할 테니까 놔 주세요.”
“혼자 연습해 봤자 소용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죠. 여기 선생님 있을 때 한 번이라도 제대로 교정받읍시다.”
“으아아. 선생님,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요?”
“네? 네?”
“뭘 잘못했느냐고요.”
“아. 그게. 그냥.”
“단지 불편한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 하는 거 잘못된 겁니다.”
“네, 잘못했습니다.”
“자꾸 빠져나갈 생각만 하지 말고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집중해 봐요.”
도명이 제발 좀 집중하라는 듯이 도화의 뺨을 두 손바닥으로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살짝 얼얼한 기분에 도화는 온몸을 움찔거렸다. 새삼 이 남자가 성격이 나쁜 남자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기야. 자, 해 봐요.”
‘그냥 도명 씨는 목소리 톤 자체가 야한 거 아니야? 아니 어떻게 저렇게 대충 말하는 것 같은데 섹시하고 난리야.’
도화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울먹거렸다. 섹시한 도명이 너무 좋고 밀려오는 압박감에도 심장이 조여 왔다.
“쉬- 어렵지 않아요. 겁먹지 말아요.”
‘저 이거 좋은 목소리로 다시 태어나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화 씨, 이런저런 딴생각 말고 집중하라고 했죠. 사람이 왜 그렇게 산만해요.”
‘그러는 댁은 사람이 왜 그렇게 집요해요.’
“자기야.”
“아. 네 좀 낫네요. 목소리 너무 떠는 것 고쳐서 다시 해 봅시다. 염소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야.”
“아직도 목소리 심하게 떨려요. 그리고 그 이상한 공기 반 소리 반에 그만 집착하고 그냥 담백하게 해 봐요. 싸구려 포르노 배우 흉내 내듯 그게 뭐예요.”
“흐아.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시범 보여 줘요.”
“자기야.”
“으아, 자기야.”
도화는 도명의 눈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자기야, 라는 말을 들으니 심장이 마구잡이로 맞는 느낌이었다.
‘아 젠장, 이제 채찍으로 안 때리니 분위기로 사람 때리네. 뭘 어떻게든 사람 패는 사람이야.’
“또, 이상한 추임새 넣는다.”
“자기야.”
“흠.”
도명이 분명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만족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봐 줘요.”
“다음에 또 연습합시다. 자기야.”
“통과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도화는 도명이 얼굴을 놓아 주자마자 힘이 쫙 빠져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연타로 덮쳐오는 심장마비로 호흡이 거칠었다. 과장을 넣어서 말하자면 생사의 갈림길을 사파리 투어하고 온 느낌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통과 아니에요. 봐 준 겁니다.”
‘지, 집에 가고 싶어. 여기 너무 위험해.’
“아, 도화 씨 보고서 더 있어야 하지 않나요?”
“아. 네. 여기요.”
도화가 서윤과 통화한 내역을 정리한 보고서였다. 이번 보고서 역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완벽하지 않다고 하실까 봐, 좀 군더더기가 많아도 정말 자잘한 문자까지 다 정리했어요.”
“잘했습니다.”
도명이 도화가 정리한 문자 내역을 찬찬히 읽었다. 질투라는 색안경을 쓰고도 도화와 서윤의 문자 내역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정확히는 서윤을 향한 도화의 마음 부분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윤의 도화를 향한 마음을 생각하면 서윤이 불쌍해질 정도였다. 절친한 친구, 그리고 고민 상담가가 서윤의 위치였다. 도명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도명이 다만 의아하게 생각한 건 서윤이 생각보다 도화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없었다. 서윤이 도화가 도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화와의 첫 만남에서 알아 버렸다는 걸 그가 알 리가 없었다.
“정말 누락한 내용이 단 하나도 없습니까?”
“네.”
도명이 도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화의 표정은 어떤 근심 걱정도 없어 보였다. 그저 투명한 눈동자가 도명이 왜 저러나 싶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만 하고 있었다. 굳이 도화를 떠보지 않아도 지나치게 자잘한 내용까지 담은 보고서를 보며 도명은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 저 혹시 궁금해하실까 봐 제 주변 사람들 전화번호도 첨삭했습니다. 다음 페이지 넘겨 보세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보고서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시키지 않는 것도 정리하고 아주 기특해 죽겠다. 보고서에는 친구 목록에 진영과, 서윤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가족 목록은 아예 없었다.
갑자기 도명은 도화의 가족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대략 알고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세히 알고 싶었다. 정확히는 가족에 대해서 도화가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질문조차 조심스러워지는 문제였다.
도명이 관자놀이를 엄지로 문질렀다.
“아, 나머지는 그러니까. 회사 동료들 전화번호입니다.”
“그렇군요. 이중 특별히 친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음, 없습니다.”
도명이 예상한 대답이 나왔다. 결국 이 장에서 유용한 정보는 진영이 전화번호 하나라는 소리였다. 보통 이러면 안쓰러워해야 하는데 도명은 오히려 그의 좁은 인간관계가 만족스러웠다.
도화의 인생에서 도명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많은 느낌이었다. 도명은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은 확실히 성격이 안 좋은 편이 확실했다.
“아. 그나마 친한, 아니.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쨌든 그나마 가까운 사람은 여기 윤정 씨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로 가까운데요?”
“네? 아, 흠. 그러니까 아주 조금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정도요?”
“윤정 씨는 좀 편합니까?”
“이 여자가 좀 끈질기거든요.”
“끈질겨요?”
“네. 제 콘셉트 있잖아요.”
“차가운 은둔자 콘셉트 말이죠.”
도명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보통 무안해서 말 거는 거를 그만두거든요. 그런데 이 여자는 뭐랄까, 흠. 끈질기게 살가워요. 근데 솔직히 싫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벽치고는 있는데 벽에 실금이 간 상태입니다.”
“도화 씨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아니에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손을 휘저어 댔다.
“뭐, 좋아한다 해도, 도화 씨는 동성애자니까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 설마 양성애자는 아니죠?”
“아니에요!”
“알았어요.”
“그나저나 이 보고서는 대체 왜 쓰라고 한 건지. 아…….”
도화는 도명과 대화를 하다가 혼자 깨달음을 얻고 턱짐을 지었다. 지금까지 대화의 흐름을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도화가 도명을 향해 손을 완강하게 흔들면서 말했다.
“도명 씨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절대로요. 뭐, 세상 만물이 저랑 엮이려고 난리 난 것도 아니고. 제가 괜히 도명 씨 만나기 전까지 모태 솔로였겠어요?”
“도화 씨가 서윤에게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건 알겠어요.”
“그리고 서윤 씨도 저에게 아무 생각 없어요.”
자신의 생각을 콘크리트 안에 심어 둔 사람처럼 구는 도화를 보니 도명은 가슴이 절로 답답해져 왔다. 하지만 도화 본인이 저렇게까지 믿고 있는데 본인이 굳이 도화의 콘크리트 같은 믿음을 깰 필요가 있나 싶었다.
도화는 설상가상으로 볼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채 도명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설마 도명 씨 질투했습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요?”
“…….”
도명이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올려놓은 채 인상을 썼다. 뭔가 바보에게 바보라고 놀림당하는 기분이었다.
“도명 씨 질투 정말 많네요. 아무리 그래도 과하네요. 하하. 서윤 씨와 절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계셨다니.”
“도화 씨가 서윤이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알겠어요.”
“솔직히 요즘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진영이보다 서윤 씨가 더 절친한 친구 같아요. 괜히 진영이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저 자신도 인정하긴 싫지만요. 하지만 마음이 그런걸요. 진영이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도명은 도화의 말에 다음에 내뱉을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보고서에 적혀 있는 사실상 진짜 지인이 달랑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를 멀리하라니. 하지만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고 하고 싶은 말을 안 꺼낼 도명이 아니었다.
“저, 도화 씨. 저는 이 연락처에서 서윤이 번호를 지웠으면 합니다. 물론 숫자에 대한 도화 씨의 기억력으로는 이미 전화번호를 외웠겠지만, 상징적으로 그래 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요.”
도명의 질투에 묘하게 신나 있던 도화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도화 씨, 마음은 아는데 제가 불쾌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아니, 그게 도명 씨 마음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제가 설명 드리고 있는 건데요.”
“언제나 제가 우선순위 아닙니까?”
이번에는 안달 난 도화를 놀리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제가 우선순위 아닙니까?”
도명이 도화의 말허리를 날카롭게 끊고 말했다. 도화 역시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솔직히 전에는 도명이 어느 정도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에 장난이 아닌데, 장난처럼 받아치다가 혹시나 도명에게 미움받을 게 두려워서 진지하게 대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이게 장난이라는 일말의 느낌도 안 드는 상황이 되자 뱀 앞의 개구리가 되었다.
“당연히 도명 씨가 가장 먼저죠. 하지만.”
“왜 하지만이 붙어요.”
“단지 도명 씨 기분 때문에 이런 중요한 일을 결정 내리긴 싫어요.”
“단지? 중요한 일?”
도명이 도화가 한 말을 곱씹어가며 입꼬리 끝을 꼬아가며 비죽거렸다. 도화 역시 점점 그런 도명의 태도에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도명 씨가 제 일 순위라고 제가 가진 다른 것들의 의미까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어디 한번 말해 봐요. 서윤이는 도화 씨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입니까?”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단지 도명 씨의 기분 때문에 갑자기 연락을 끊을 정도로 무가치하지 않다는 건 확실해요. 서윤 씨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도명은 자신의 입으로도 자주 ‘서윤이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걸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도명은 언제나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려고 노력했다. 이 말을 반대로 말하면 도명에게 서윤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대수로운 일이라는 뜻이었다. 오래전부터 도명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서윤이 좋은 사람이라는 점에 질투하고 있었다.
도명은 자신의 단점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걸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단점이 별것이 아니게 될 정도로 그가 원래 잘하는 것을 발전시켜 사람들이 그 부분만 넋을 놓고 보게 만들었다. 서윤과 재능의 종류가 조금 달랐으니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
도명의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은 다른 사람은 따라올 엄두를 못 낼 정도의 세밀함과 완벽한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도명은 같이 일하거나 지내기 피곤한 성격이지만 내심 그래도 그와 같이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도명은 서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수롭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수롭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 사랑 앞에서 그런 것들은 그의 깊은 콤플렉스의 하얗고 앙상한 뼈대가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제 기분이 도화 씨에게 단지라는 말이 계속 붙을 만큼 하찮아요?”
“하찮지 않아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분이 왜 그러세요.”
“모르겠네요. 아니면 제 질투를 즐깁니까? 지금 그럴 분위기 아니에요.”
“방금 전까지는 분명 즐거웠는데 도명 씨하고 말이 안 통하는 순간 확실히 즐겁지는 않네요.”
도화가 피곤하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도명은 도화의 그런 작은 손동작 하나에도 자신이 졸지에 골칫덩어리가 된 것을 느꼈다. 도명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좁혀졌다.
“나는 도명 씨가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내가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면 도화 씨하고 안 이러고 있죠.”
“그 말 무슨 뜻이에요?”
도명의 말에 도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지나간 도명의 말에 귀 끝이 쫑긋 세워지고 머릿속은 바빠졌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극히 감정적이기 때문에 도화 씨와 연인이 된 겁니다.”
도명의 말 뉘앙스가 묘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의적인 표현은 그 순간의 기분 쪽으로 기우는 법이었다.
“저랑 사귀는 게 도명 씨에게 손해라는 뜻입니까?”
“도화 씨 표현 조심해요.”
“그럼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데요?”
“제 삶의 방식이 180도 뒤집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다는 표현은 더 쉽습니까?”
“손해라는 뜻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래요.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죠. 이 말은 정확히 해석해야 할 텐데요.”
“도명 씨는 낯선 거 싫어하잖아요. 언제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것들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을 좋아하지.”
“네, 그런 편이긴 하죠.”
“그런 편이긴 하다니요?”
도화가 도명의 말에 상처받은 얼굴로 되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자신이 입 밖으로까지 꺼낸 이야기인데 상처받아 버렸다.
“도화 씨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사탕발림 소리를 원해요? 그럴 걸 그랬나요?”
“저는 진실을 원해요. 그냥, 진실을 원하긴 했는데 순간 껄끄러워서 나온 반응이에요. 순간 소화가 안 돼서요.”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달콤한 소리 할 거면 제가 모르게 하든가요. 이제 달콤한 소리가 하얀 거짓말을 한 거라는 소리로 들리잖아요.”
‘백구야, 넌, 은근히 날카로워서 너 모르게 뭔가를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란다. 심지어 사람들은 다 뻔하다고 공언해 온 나조차도 말이지.’
“좋아요. 이건 달콤한 소리가 아니에요. 그냥, 느끼는 것 그대로지.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요. 그래요. 처음 해외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내가 쓰던 익숙한 언어, 관습이 어떤 기호로 해석될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래도 이국적인 풍경은 매 순간 나를 즐겁게 해요. 사소하게 먹는 아이스크림 하나도 특별하죠. 하지만 조금이라도 무언가 뜻대로 안 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고요. 저는 지금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기분입니다. 기분 좋은 여행이 삐걱거리고 있어요.”
도명이 시큰해지는 콧등을 손가락으로 감싸며 말했다.
대화가 샛길로 너무 돌아갔다. 서윤과 연락을 끊으라는 것에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두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로 들끓었다. 도화 역시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애초에 제가 정해놓은 SM 규칙들을 임의로 바꿀 때마다 전 조금씩 감정적이었어요. 젠장, 내가 경고했잖아요. 저처럼 성격 나쁜 사람이 감정적이게 되면 어떻게 될지.”
“그래서 난 도명 씨가 이유 없이 기분 나쁠 때마다 내가 가진 것들을 포기해야 해요? 만약 내가 포기 안 하면 도명 씨는 날 미워할 거예요?”
도화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화는 정말 진지하게 포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도명과 이렇게 싸울 바에야 포기하는 게 조금 더 행복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도명이 도화의 인생에서 일 순위인 건 사실이니까.
“도화 씨가 자꾸 이유가 없다고 하는데 이유 있어요. 제가 도화 씨 앞에서 감정적인 건 맞지만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
“서윤 씨는 저한테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 있다면 도명 씨가 소개팅해 준 날 저에게 전화번호를 줬겠죠.”
“서윤이 마음 있었어요.”
“도명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긴요! 서윤이가 본인 입으로 도화 씨와 잘해 보고 싶다고 저한테 이야기했으니까요!”
결국 도명이 너무 답답한 나머지 소리를 내질렀다. 도화가 서윤에게 갑자기 이상야릇한 기분이 안 들게 이 말은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대화는 계속 빙빙 돌고 그 빙빙 도는 바퀴 수가 많아질수록 그들의 감정도 꼬일 것 같았다.
“…….”
도화는 도명이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여서 놀라기도 했고 그의 말에도 놀라서 입만 멍청하게 벌리고 있었다.
“그것보다 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안 그래요?”
도명이 도화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도화의 얼굴 가죽을 뚫어 버릴 듯 날카롭고 비렸다. 서윤이 본인에게 마음이 있다는데도 계속 연락할 거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정말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도화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해 보였다. 도화는 정말 상상도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물론 서윤이 도화에게 친절하고 살갑긴 했지만 서윤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도명의 말이 맞는다면 서윤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한 건 데이트 신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의 대화에는 내내 도명에 대한 이야기가 껴 있었고 결국 도명보다 먼저 서윤에게 도명에 대한 마음을 들켰었다.
도화는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정말 서윤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동안 그에게 본의 아니게 얼마나 많은 실연의 날들을 준 건지 셀 수도 없었다.
도화는 차라리 그게 아닐 거라고 믿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도화는 도명에게 이해 안 가는 지점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도명에게 더 이상 서윤의 마음에 대해서 물어보면 안 그래도 예민한 남자가 괜한 생각을 덧붙일까 봐 입술을 열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떻게 알았다는 건지 자세히 들어 보고 싶은데요.”
“네, 도명 씨의 말처럼 서윤 씨와 연락 안 할게요. 저 그런데, 서윤 씨 제가 도명 씨와 사귀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않나요?”
“알고 있어요. 제가 사귄다고 말했으니까요.”
“아, 저.”
“서윤이가 아는 형 남자 뺏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그래요. 기분 문제입니다. 나는 도화 씨 때문에 친한 동생을 질투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도화 씨가 제 질투심을 즐긴다면, 단언하건대 우리가 해 왔던 어떤 SM 플레이보다 지독한 플레이가 될 겁니다.”
“네. 저, 도명 씨, 이건 제가 서윤 씨한테 마지막까지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부리는 욕심일 수도 있단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서윤 씨한테 지금껏 힘들 때마다 연락해놓고 도명 씨와 잘 되자마자 마치 필요 없는 소모품 정리하듯 갑자기 연락을 끊는 건 좀 그래요.”
“도화 씨.”
“끝까지 들어 주세요. 오늘 마지막 통화를 하려고요. 적어도 갑자기 연락을 안 하는 이유가 서윤 씨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걸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도록. 서윤 씨는 너무 좋은 사람이잖아요.”
도화의 ‘좋은 사람 서윤’이라는 말에 도명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서윤이가 도화 씨와 그런 통화를 하는 것을 반길 것 같습니까? 그 통화가 서윤에게 정말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요? 차인 건 차인 거죠.”
“즐겁지는 않겠죠. 그래서 제가 굳이 말 꺼내는 것도 목이 괜히 껄끄럽고. 하지만, 이제 사람들을 예전 방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아요. 도망가는 것 말이에요. 그게 설혹 다시는 못 볼 사람이라도 제가 말없이 도망가는 걸로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아요.”
“그럼 통화 내용 정리해서 보고해요.”
“그럼 서윤 씨에게 실례잖아요.”
“지금 내 손에 있는 건 뭐고요.”
도명이 지금까지 서윤과의 연락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를 흔들며 말했다.
“그건 정말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정리한 거고요.”
“그 마지막 통화는 별거입니까?”
도명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말했다. 도명의 마음에 다시 의심이 얼룩덜룩 피어나기 시작했다.
“네. 별거죠.”
“도화 씨.”
“그게 제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거는 마지막으로 거는 통화라도 그건 별거예요. 사랑만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감정은 아니니까요.”
도화가 도명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그의 허벅지에 뉘었다. 도화가 눈을 감고 도명의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내가 도명 씨의 말을 안 들어서 화났어요?”
“…….”
도명은 딱히 대답을 안 했다. 그의 침묵이 화났다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도화가 낑낑대며 도명의 손가락을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도화 씨 은근히 뭐든 몸으로 해결하려는 나쁜 버릇이 있네요.”
“내가 미워요?”
“안 미워요.”
“그런데 왜 그렇게 차가워요?”
“내 마음에 차갑게 식은 겁니다. 제가 아주 치졸해져서 저의 감정적인 상태가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의 여유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멋진 척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마음이 너무 빡빡해서 멋진 척조차 할 수가 없군요.”
“도명 씨는 이렇게 앉아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멋있어요.”
“입에 가짜 사탕을 물었군요.”
“이렇게 생긴 사람은 세상 살기 얼마나 편한데요. 멋진 척 안 해도 그냥 멋지다고요.”
도화가 도명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도명이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도화 씨 하지만 역시 내 말을 안 듣는 건 기분 나빠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당황했다. 대화가 잘 풀린 줄 알았다. 당황한 도화의 얼굴 위로 도명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쁜 버릇일수록 더욱 깊게 배어드는 법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난 도화 씨의 돔이었어요. 돔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 벌을 주고 싶습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음.”
“그사이 대답하는 방법을 잊었네요. 저한테 복종하는 게 도화 씨에게는 나쁜 버릇이 아닌 모양입니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제가 벌을 받으면 도명 씨 기분이 풀리나요?”
“네.”
“그러면 벌을 받겠습니다.”
도화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바지 내리고 엎드린 채로 엉덩이 들어요. 엉덩이를 아주 예쁜 색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요. 아 그 전에 회초리는 도화 씨가 골라 오겠어요?”
도명이 도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눈꼬리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어떤 걸로요?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도화 씨의 사랑을 표현하기 좋은 놈으로요.”
“아, 아, 네.”
도화가 허둥지둥 대며 도명의 욕실로 갔다. 그리고 각종 SM 용품을 모아 둔 캐비닛을 열었다.
캐비닛 한쪽 부분에 각종 회초리가 나무 상자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도화가 회초리들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기분이 복잡 오묘했다. 애초에 도명과 사귀기로 하면서 정상적인 관계를 꿈꾸지는 않았다.
처음 시작부터 그들은 무언가 엇갈려 있었으니까.
서윤과의 관계를 정리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리하는 방법을 도화가 정하겠다는데 혼나는 상황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도화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다고 느꼈다.
목덜미가 홧홧하고 동시에 뒤가 서늘했다.
도화가 만지고 있는 회초리의 표면도 재질이 나무이든, 플라스틱이든, 금속이든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건 감정의 온도이다. 감정의 덫에 사로잡혔다는 사늘한 공포가 느껴졌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손끝의 싸늘한 온도와는 다르게 앞섬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등골이 오싹오싹하고 발끝이 저릿했다. 더 이상 부조리함은 생각나지 않았다.
도명이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고 마지막으로 뜨거워진 엉덩이를 쓰다듬는 그의 손바닥만 생각났다.
상황은 부조리하고 감정은 절대적이었다. 도화는 괜히 바닥이 견고한지 확인하기 위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 연애가 도화의 발밑을 잡고 밑바닥으로 자빠뜨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위험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도화는 너무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도명에게 혼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나의 수수께끼를 받은 느낌이었다. 사랑을 표현하기 좋은 회초리라니.
아마도 도화가 그에게 얼마나 헌신할 수 있는지 증명하라는 것 같았다. 그를 위해 현실 세계를 조정하는 데 한계가 있으면 밤의 세계라도 완벽히 납작 엎드리라는 것 같았다.
자주 하는 생각이지만 성격 나쁜 남자를 사랑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니 도명의 감정적이지 않으면 도화와 사귀지 않았을 거라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도명과 만난 후 도화의 세상은 무채색에서 점점 더 다양한 색으로 물들고 삶은 감각적으로 변했다.
도명이 도화의 식사를 챙겨 주면서 제공하는 건 영양만이 아니었다. 도화는 인스턴트 음식만 먹고도 언제나 건강검진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까. 도명이 제공하는 건 미각과 몸속 깊숙한 즐거움들이었다.
몸이 아니라 영혼에 영양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만나 행복해진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도화의 세상 역시 안전한 건 아니었다. 그의 삶도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무난한 보통의 삶이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도 이성도 동성도 아닌 중간으로 저울의 눈금을 맞춰놓고 감시했을 정도로 그는 일반적인 삶에 대해서 지나치게 검열했다.
그런 도화가 원래 생긴 대로 동성애를 하고 취향의 끝단에 서 있는 SM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준이 가장 중요한 성격이 유별난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도화는 아까 도명이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완전히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상태. 그리고 지극히 감정적인 상태에서 내린 결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인데 아까는 그 말들이 왜 그렇게 서운하고 날이 서 있었을까?
마치, 도명이 도화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입에 단 소리만 했어도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거면서.
도화는 가장 견고하고 두꺼운 회초리를 골랐다. 두껍다고 무조건 아픈 건 아니지만 왠지 얇은 건 사랑의 두께 역시 얇아 보였다. 도화가 무릎을 꿇은 채 도명의 손바닥 위에 회초리를 올려놨다.
도명이 회초리를 받아 들어 자신의 손바닥에 회초리를 한두 번 휘둘러 보았다. 살짝 휘둘러 봐도 손바닥이 제법 얼얼했다. 도명이 정말 이걸로 괜찮겠냐는 듯이 도화를 쳐다보았다.
“도화 씨, 바지 내리고 엉덩이 들어 올려요.”
도명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회초리로 도화의 등줄기를 눌렀다.
“나한테 박히고 싶은 만큼 높이 올려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순종적으로 굴며 허리를 치켜세웠다.
***
도화는 얼얼해진 엉덩이를 비비며 방으로 올라왔다. 도화가 두려워한 만큼 도명의 벌은 가혹하지 않았다. 회초리로 10대를 내리친 후 열이 오른 엉덩이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자기야 사랑해.’라고 속삭이며 등 뒤에서 목덜미를 깨물었다.
도화는 열에 달아오른 얼굴로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이렇게 도명이 준 자극들로 달아오른 상태에서 서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뭔가 죄악처럼 느껴졌다.
도화는 도명이 준 자극들을 잊기 위해서 제자리에서 뛰었다가 앉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내 자신이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얼굴을 비볐다.
“아, 바보 같아.”
도명에게 그렇게 호기롭게 이야기했는데 이내 도망가고 싶었다. 굳이 관계를 마무리 지어야 하나. 생각해 보면 굳이 서윤이 먼저 연락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자신만 너무 일방적으로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나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서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도명의 말이 더 어이없기도 했다.
도화가 고민 끝에 서윤에게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드는 찰나 도명이 전화를 걸었다. 도화는 너무 깜짝 놀라 부엉이 눈을 하고 전화를 노려보았다. 타이밍이 참 공교로웠다.
[아 참, 도화 씨 그나저나 세 번째 보고서는 작성을 안 했습니까?]
[아, 그, 제가 야한 상상 했던 거요? 그거, 제가 앉아 있던 의자 옆에 내려놓고 왔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직접 전해 주기 좀 민망해서요.]
[아. 찾았네요. 그리고 무슨 보고서가 이렇게 묵직합니까?]
[그냥…… 원래 그렇게까지 구체적이지는 않았는데 쓰다 보니,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진짜 못 말리겠네. 아 그나저나 서윤이하고 통화는 했어요? 뭐래요? 왜 굳이 연락까지 끊어야 하냐고 고집부리지는 않던가요? 제가 성격 이상하다고 오히려 도화 씨를 설득하든가. 그 녀석 은근히 말발 좋은데.]
[아직 못 했어요.]
[왜요? 올라간 지 시간 꽤 됐잖아요.]
[그냥 이것저것 하다가요.]
[빨리 해요.]
[아. 네.]
[그리고 챙겨 준 연고 아침에 한 번 더 발라요.]
[아뇨,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은데요.]
[꼭 발라요. 꽤 감정 실어서 때렸는데 내일까지 여파 있을 겁니다. 원래 그런 건 정작 당일 날에는 잘 몰라요.]
[감정 실어서 때렸어요?! 제가 막 미워서요? 아까 제가 미운 게 아니라 도명 씨 자신이 싫다면서요.]
[복잡해요.]
[복잡해요? 뭐가 복잡한데요?]
[나도 밉고 도화 씨도 밉고, 또 도화 씨 엉덩이도 너무 예쁘고. 맞을 때마다 고환까지 파르르 떨리는 것도 귀엽고요. 때린 건 엉덩이인데 왜 유두까지 빨갛게 서고 난리입니까?]
[으아! 거기까지요. 대체 무슨 음담패설을 하는 거예요. 수위, 수위 지켜요.]
[도화 씨가 내 건데 수위를 왜 지킵니까?]
[그만, 그만요. 도명 씨 생각으로 꽉 차서 서윤 씨에게 뭐라 할지 모르겠어요. 아, 겨우 생각 정리했는데! 막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거든요.]
[작전 성공했네.]
[네?! 이게 무슨, 자기야?!]
[도화 씨는 여전히 저한테 욕하고 싶을 때 자기야가 아주 훌륭하게 나오는군요.]
도화가 도명에게 이것저것 따지려는데 도명이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
‘이 남자가 진짜!!!’
그날 밤 도화는 결국 서윤에게 전화를 못 했다. 도화는 다음날 퇴근 후 회사 근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한 후 공원에서 통화를 했다. 그 카페가 은근히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 확률이 높아서 느긋하게 앉아 통화할 수가 없었다.
도화는 오늘 공원에서 좋은 곳을 발견했다. 주변에 적당한 크기의 연못이 있고 구석에 노란색 벤치가 있었다. 왠지 연못이 도화가 가진 비밀을 물속으로 가라앉혀 줄 것만 같았다.
벤치 뒤에는 도화의 키만 한 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풍경처럼 부딪치며 소곤대고 있었다. 소란스러우면서 동시에 조용한 공간이었다.
도화는 일단 서윤에게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서윤 씨, 지금 통화 가능해요?]
도화가 커피를 3분의 1쯤 마셨을 때 통화 가능하다는 서윤의 문자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성격 유들유들해 보이는 서윤의 목소리가 퍼졌다.
“도화 씨, 잘 지냈어요?”
“아. 네. 저야 뭐.”
도화는 괜히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꺼내기 불편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애매한데요?”
“아. 그게, 솔직히 지금 마음이 불편한 상태라.”
‘앞으로 할 이야기 때문에 슬프고 서운하기도 하고요.’
도화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삼켰다. 서윤에게 이상한 여운과 여지를 남기는 뉘앙스였다. 그런 말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무책임하게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전화번호를 분류해 놓아야 할 만큼 전화번호부가 두둑한 도명은 도화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간만에 목록을 한 줄 추가하게 된 게 도화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생각이나 해 줄까? 어젯밤부터 그런 생각이 도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명 씨는 내 핸드폰 안에 자신의 전화번호만 달랑 있어도 정말 괜찮을까? 물론 얇디얇은 내 인간관계를 알고 사귀긴 했어도 문서로 정리된 걸 보면 또 느낌이 다를 텐데.’
도화는 내심 보고서를 쓰면서도 도명이 그의 인간관계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말을 꺼낼 것 같아서 걱정했었다. 이왕이면 애인이 인간관계에 문제가 없는 편이 더 좋으니까 말이다. 물론 도화의 그런 걱정은 도명의 집착 어린 성격을 가볍게 생각해서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네?”
“아, 그러니까, 서윤 씨는 지금 뭐 하세요?”
역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아, 김장 준비요.”
“네? 지금요? 지금이 김장철인가요? 저는 그런 거 잘 몰라서.”
“아니죠. 김치가 너무 빨리 떨어져서 가족들하고 김장 또 하는 거예요. 김장철은 아니죠.”
“아, 서윤 씨도 김치 담글 줄 아는구나.”
“물론 메인은 엄마죠. 그래도 우리 집 김치 맛의 반은 제 실력입니다.”
서윤이 너스레를 떨었다. 도화가 살포시 웃었다.
“아, 도화 씨,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집에 김치 있어요? 이번에 굴까지 넣어서 시원할 텐데. 형이 음식 솜씨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한식에 대한 깊이는 우리 엄마보다 떨어지죠. 그 형은 외국 파스타나 말아 먹을 줄 알지.”
“있어요! 있어요!”
‘내가 지금 이 와중에 서윤 씨한테 김치까지 얻어먹게 생겼어?’
“어,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도화 씨 거짓말 하고 있는 거잖아요.”
‘맞다, 서윤 씨 눈치 좋지.’
도화가 계속 말이 없자, 서윤이 대답을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하는 김에 좀 싸 주는 건데 뭘 그렇게 부담스러워해요?”
“아, 그게 서윤 씨.”
“진짜 무슨 일 있나 보네.”
서윤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진심으로 걱정스러워는 말투에 도화는 더욱 괴로워졌다. 이런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악의가 없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도명 씨는 정말 나빴어요. 아니 내가 더 나빴나.”
“왜요? 형이 또 싫은 걸 강요해요?”
“도명 씨는 원래 그냥 나쁘고요.”
“그렇긴 하죠.”
“저, 도명 씨한테 들었어요. 그, 그, 그, 그.”
도화는 결국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떨어뜨리고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수화기 너머로 도화가 보고 있는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한 서윤의 목소리가 퍼졌다.
“제가 도화 씨 좋아하는 거요?”
서윤이 말을 내뱉고 목소리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네.”
“도화 씨 대답 아니까, 힘들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요.”
“아, 네.”
“저, 그러니까, 그동안 고마웠어요. 저는 정말 서윤 씨가 너무 좋은 사람인 걸 알고 있고…….”
“제가 연애 상대로 안 보이는 건 도화 씨 잘못이 아니에요. 물론 제 잘못도 아니고요. 그냥 인연이란 게 그런 거예요.”
서윤이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리는 도화를 위로했다.
“네.”
“이제 연락하기 불편해졌어요?”
서윤의 말에 도화는 할 말이 너무 많아졌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도명 씨가 시켰다고 할까? 아니, 따지고 보면 도명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하고 있는 거니까 결국은 내 선택이라고 할까? 사실 나는 괜찮은데 서윤 씨가 안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아니 일단 서윤 씨가 괜찮다고 하면, 연락 문제로 나 도명 씨, 서윤 씨 이렇게 삼파전이 되는 거 아니야?’
이 수많은 선택지 중 도화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분명 서윤에게 할 말들을 정리하고 통화를 한 건데도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마무리 지으려고요? 좋아요. 그런데 어쩌다 마주치면 너무 어색하게 피하지는 맙시다. 그러면 안 그러다가도 이상한 기분 들잖아요.”
“네.”
“그래도 이런 이야기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것 같으니까 불편하고 예민할 수도 있는 질문 하나 할게요. 만약 도화 씨가 형을 먼저 안 만나고 저를 먼저 만났으면 도화 씨는 저와 사랑에 빠졌을까요?”
서윤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쉬웠다.
“네.”
“의외로 대답 쉽게 하네요. 아니면, 배려에요?”
“아뇨. 사실 그대로예요. 이미 도명 씨를 좋아하고 있어서 서윤 씨의 자리가 없어서 그런 마음이 단 한 번도 안 들었어요. 하지만 빈자리가 있었다면 분명 사랑하게 됐을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요?”
“좋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 인연이 참 얄궂네요.”
서윤이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도화 역시 그저 말없이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형하고 감정적으로 괜찮아요? 아, 사심 없이 하는 질문이니까. 말 그대로.”
“도명 씨가 솔직히 허둥지둥대네요.”
“와 천하의 유도명이 허둥지둥이라니. 실연은 했어도 제가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네요.”
서윤의 웃음에 도화도 웃었다.
“도명 씨도 허둥지둥대고. 저도 그다지 완벽하지 않아요. 그래도, 괜찮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안일한 건지는 몰라도.”
“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요.”
“네.”
“남들이 뭐라 하건 도화 씨가 형에게 져 주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요. 세상의 기준이야 어떻건 행복해지는 게 중요한 거니까. 다만, 도화 씨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러지 말아요. 그건 도화 씨를 위해서기도 하고 형을 형 자신으로부터 지키는 방법이기도 해요. 형의 오랜 지인이자 도화 씨를 좋아했던 사람의 이야기니까 오지랖 좀 이해해 줘요. 저, 내 사랑이 바라던 대로 안 끝났다고 다른 사람들의 사랑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언제나 고마워요. 지금 이 순간도. 너무 고마워서, 고맙다는 말도 민망하네요.”
“고맙긴요.”
“아, 맞다. 서윤 씨 만화책…….”
“형을 통해 전해 줘요.”
“아. 네.”
“그리고 형을 통해 김치도 받아 가요.”
“아니 진짜 그럴 필요까지는.”
“도화 씨가 김치를 받아 가든 안 받아 가든 전 다른 종류로 속상하니까, 제가 만들어 준 김장 맛보고 그 후로 후회하며 질질 짜 봐요. 그렇게 완벽한 김치를 만드는 남자를 놓치다니, 하며.”
서윤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바닥까지 긁어서 먹을게요.”
“네. 잘 지내요. 도화 씨.”
“잘 지내요. 서윤 씨.”
그렇게 도화와 서윤의 통화가 끝났다. 도화는 한동안 녹청색의 연못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서윤을 연인으로 생각한 적은 없어도 그를 이런 식으로 잃어버린 것이 속상했다.
나쁜 감정으로 어그러진 것도 아니고, 좋은 감정과 좋은 감정이 만나서 어그러진 거라서 더 속상했다.
서윤의 말처럼 인연이란 얄궂었다. 연못 안의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자 비가 오는 것처럼 연못 표면이 물결쳤다. 파동과 파동이 만나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한참을 연못만 쳐다보던 도화가 도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도명 씨, 저는 커피 마시다가 갈게요.]
[약 30분 늦겠군요.]
[네.]
[알았어요.]
***
서윤은 도화와의 통화를 끝냈다. 오래전부터 마음 정리를 해온 상대였다. 무려 호기롭던 데이트 첫날부터 마음 정리를 했으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친구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단 도화가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의 마음대로 반응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걸 꽤 잘해왔다고 생각했다.
“통화가 길었네. 일이니?”
“아니, 그냥, 친구랑 통화했지 뭐.”
서윤의 엄마, 성정이 베란다에서 거실로 돌아온 서윤을 향해 말했다. 서윤은 별다른 대답 없이 넉살 좋게 웃으며 무채를 썰기 시작했다. 서윤의 등 뒤에서는 갓 담은 김치와 먹을 돼지고기가 익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에 김치를 싸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안에 침샘이 고였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을 생각한 순간, 도화의 입안에도 이것들을 넣어 줄 생각을 했다. 반사적인 생각의 흐름이었다.
서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윤이 무채를 썰고 있는 도마에 그의 눈물이 비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한서윤, 너 왜 울어?!”
같이 김장을 하던 그의 누나, 서아가 놀라서 물었다.
“어, 나 울어?”
“그래. 바보가 자기가 우는 것도 몰라.”
“양파가 매운가 보지.”
“네가 썰고 있는 건 무거든!”
서윤이 소매로 젖어 있는 자신의 눈가를 북북 닦았다.
“나 실연당했어.”
“뭐? 아까 통화가 그런 통화였어? 내내 실실 웃고 있기에 그냥 친한 지인하고 통화하는 줄 알았네.”
“그러다가 심각해졌다. 왔다 갔다 했지.”
일 전화냐고 묻던 성정이 말했다.
“나 마음 정리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나 도화 씨 진짜 좋아했나 봐. 그냥 깊은 호감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김치 통 하나 더 챙겨서 간만에 우리 아들이 또 연애 하나 싶었는데.”
“엄마도 마음에 들어 했을 거야.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거든.”
“그런데, 왜 이번엔 실패했어? 너 남자 잘 꾀잖아!”
서아가 서윤의 등짝을 두들겨 치며 말했다.
“도명 형이 낚아챘어. 진짜 웃긴 게 먼지 알아? 도명 형이 소개시켜 준 사람이다.”
“아. 도명이 애인 생겼어? 방금 널 찬 사람하고 사귀는 거야?”
“응, 진짜 어이가 없어.”
서아와 성정의 시선이 묘했다. 서아가 인상을 쓰더니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서 성정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뭐야? 방금 두 사람?”
금방이라도 도명이 걔 참 이상한 애라고 양쪽에서 신나게 욕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돈거래를 하자 서윤은 이게 뭔가 싶었다.
“아니, 그게 우리 내기했거든, 도명이처럼 페로몬 넘치는 애가 애인 안 만드는 이유가 너 때문 아니냐고.”
“그게 무슨 개 소리야?!”
서윤은 소름이 돋아 올라 팔을 연신 문질거렸다.
“누나가 저렇게 감이 안 좋다. 아, 그래도 내심 나도 도명이하고 네가 잘 되기를 바랐었는데. 오래 알고 지냈고 티격태격해도 잘 어울려 다녔잖아. 하지만 감이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했지.”
“막장도 이런 막장이 어디 있어? 엄마랑 누나가 그런 내기를 왜 해?”
서윤은 너무 분해서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남자 성격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얼굴은 거기서 거기가 아냐.”
“그래. 맞아.”
두 사람은 서윤의 분노와 배신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좋은 남자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낚시 TV 보며 말없이 마늘을 다지고 다니던 서윤의 아빠가 성정의 말에 발끈해서 말했다.
“성격이 왜 거기서 거기야? 내가 얼마나 여보만 알고 사는데! 내가 얼마나 지고 사는데!”
“맞아. 아빠가 얼마나 성격 좋은데.”
서윤이 아빠의 편을 들었다.
“네가 결혼을 안 해서 모르지. 이게 사람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냐. 하루 종일 붙어살다 보면 사람과 사람은 그냥 안 맞을 때가 있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잘 안 맞음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건 잘생긴 얼굴과 섹시함이다!”
엄마가 배추를 한 번에 쫙 쪼개며 외쳤다.
“아냐. 엄마가 몰라서 그래. 성격 유난히 안 좋은 사람 있어. 엄마가 성격 좋은 사람하고 살아서 모르는 거지.”
서윤이 도명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명이는 그냥 잘생긴 게 아니잖아. 압도적으로 잘생겼지. 남자는 얼굴 뜯어 먹고 살아야 하는 거야! 걔는 70 먹어도 동네 유명한 멋쟁이 할아버지가 될 거다.”
“그래, 서윤이 너는 잘생겼어. 음. 그냥저냥 잘생겼어. 하지만 압도적이진 않아.”
누나와 엄마가 서윤을 둘러싸고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나 설마, 도명 형한테 얼굴과 섹시함에서 진 걸까?”
“……서윤아, 꼭 항상 연애를 하고 살 필요는 없어. 누나를 봐, 5년 넘게 연애를 안 해도 아무 생각 없잖아. 연애는 삶의 필수가 아니야.”
서아의 말에 고행하듯 마늘이 액체가 될 때까지 다지고 있던 아빠가 쓸쓸하게 창밖을 보며 말했다.
“여보, 내 유전자는 쟤들이 마지막인가 보오. 한 명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한 명은 여자가 남자를 안 좋아하네. 그렇다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 세포가 말라 비틀어져선. 어쨌든 서윤아, 남자는 성격이다.”
***
도명은 오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도명이 수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늘 그는 실수하지 않으면서 일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집중력을 최대치로 올려야 했다.
그냥 일이 많으면 늦게까지 일하고 마는 그였지만 오늘, 그는 중간에 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나 처리해야 했다.
[도명 씨, 저는 커피 마시다가 갈게요.]
[약 30분 늦겠군요.]
[네.]
[알았어요.]
도명은 찬물을 천천히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도화가 써 준 보고서가 생각났다. 생각할 거리가 있으면 회사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온다고 했던 것 말이다.
‘도화 씨가 오늘 생각이 복잡하네. 서윤이 일 때문이겠지. 왜 나 하나로 만족을 못 하지? 왜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고민하는 건지. 솔직히 섭섭한데. 백구 마음이 여전히 충성스러운지 확인받고 싶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른스러운 척을 해야겠지. 오늘만큼은 서윤이보다 성격 좋은 남자여야 해.’
도명은 자신이 예상한 시간보다 30분 여유가 생긴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차를 몰고 나갔다.
도화가 도명의 가게에 도착했을 땐 테이블 위에 우유와 함께 당근 케이크가 올라가 있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도화 씨.”
도명이 도화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당근 케이크네요.”
“네.”
“저 지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무슨 이상한 기분이요? 가령, 역시 집에 들어와서 다행이야, 같은 기분이요?”
“네? 아뇨. 아니, 물론 도명 씨가 이렇게 신경 써 주니 기쁘고 고맙습니다. 그냥. 이 당근 케이크, 용도가 뭐죠? 등장하는 타이밍이 뭔가 공교로워서요.”
“용도요? 무슨 용도가 있겠어요? 그냥 도화 씨가 포근한 기분이었으면 하는 거죠.”
“아. 그렇군요.”
도명이 도화에게 어서 앉으라는 듯이 의자를 빼 주었다. 과한 도명의 친절에 도화는 괜히 온몸이 굳어졌다. 뭔가 뒤가 오싹해졌다.
도명이 도화의 손에 민트색 포크를 들려 주었다. 도화가 오물거리며 당근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도화가 행복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정말 맛있어요. 화려하진 않지만 뭔가, 가정적이에요.”
“그렇군요.”
‘백구 너한테는 나뿐이란 걸 알겠어? 응? 응?’
도명이 도화를 향해 봄날 햇살처럼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가늘어진 눈 틈 사이에서 퍼져 나오는 눈빛은 지나치게 따가웠다.
“아 맞다. 도명 씨, 그 러브레터, 아니 보고서는 잘 쓰고 있어요?”
“…….”
“그 반응, 설마 잊었어요?”
“그럴 리가요. 잘 되어가죠. 도화 씨, 저 직업상 글 쓰는 사람이에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하지만 러브레터 쓰는 건은 개요를 짠 이후로 전혀 진전이 없었다.
“너무 기대돼요. 도명 씨.”
“기대하세요.”
***
도명이 화원의 예약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회사에서 온 메일을 체크 하고 있을 때 익숙한 인영이 도명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영이었다. 도명이 노트북을 덮고 가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진영이 넉살 좋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도명 씨.”
“안녕하세요.”
진영을 대하는 도명의 태도가 사뭇 거리감이 있었다. 도명은 이제 진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진영은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애인의 유일한 절친이었다. 거기다가 도화가 자신과의 관계를 그에게 말했을지 안 말했을지가 불분명했다.
아주 높은 확률로 도화는 자신에게 남자 애인, 그것도 아랫집에 사는 남자와 사귀게 됐다는 말을 못 했을 것이다. 도명은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진 과제에 일단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었다.
“아,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도화를 기다려도 될까요?”
“아, 그나저나 도화 씨하고 연락은 했어요?”
도명이 즉답은 피하고 말을 돌렸다.
“도화야 평일에는 지금으로부터 한, 20분 후면 이 앞을 지나가겠죠. 뭐. 생각보다 차가 안 밀려서 빨리 도착했는데, 남은 시간이 또 카페에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라서요. 하하. 또 마냥 서 있기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요.”
‘오래된 친구인 건 알지만 그래도 약속 좀 잡아라.’
“도화 씨 요즘은 회식도 나가잖아요.”
“아. 그러네요. 그런데 제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회식 날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걸린다면 정말 재수 없는 편이죠.”
“그렇긴 한데, 진영 씨가 헛걸음할 수도 있잖아요.”
‘친구끼리라도 이건 예의 문제 아닌가. 이제 도화 씨 시간은 당신만의 소유가 아니라고. 반반도 아니고, 메인 코스는 다 나지. 그나저나 묘하게 짜증 나네. 마치 도화 씨 시간 모두를 자기와 보내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진영은 도명이 평소와 달리 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자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뭔가 또 자신만 타인에게 깊은 친근감을 느낀 건 아닌가 싶었다.
“아. 일하고 계셨구나.”
“네.”
도명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메일 확인이야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안에만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중요한 건 이 애인의 친구이자, 자기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수문장처럼 현관문 앞에 떡 하고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럼 이 앞 벤치에 앉아 있어도 될까요?”
진영이 가게 앞 벤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애인의 친구면 잘해 줘야겠지? 그런데 이렇게 가게 앞에 세워 놓기도 몰인정해 보이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수상해 보이나. 평소에는 들어와도 상관없다고 해 놓고. 그런데 진짜 어디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거야?’
“도명 씨?”
“아, 그나저나 도화 씨하고는 무슨 일로?”
‘설마 저녁 약속은 아니지? 저녁은 당연히 나와 먹는 거지. 오늘 같이 샌드위치 만들어 보기로 했는데.’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아 맞다. 도화가 제 결혼식 때 축가 불러 준 거 알아요?”
“아니요. 그나저나 인사가 늦었네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아, 도화가 말 안 했어요? 전보다는 도화하고 도명 씨하고 나름 친해진 것 같던데.”
‘아 진영 씨 뭔가 묘한데. 뭔가 물으라고 미끼 흔들고 있는 느낌 드는 건 착각인가.’
“말 안 했죠.”
도명이 진영의 질문에 깔끔하게 답했다. 괜히 찔리는 마음에 말을 길게 하면 쓸데없는 정보를 흘리게 되어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날, 도화답지 않게 하고 왔기에 도명 씨가 도와준 줄 알았죠.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도화 씨답지 않다는 건 무슨 말이죠?”
“아 몰라요? 도화, 꾸민다고 작정하면 옷차림이 재앙이 되잖아요.”
‘그래!! 그렇고말고.’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격한 공감을 표현할 뻔했다. 도명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적당한 온도의 반응을 보여 줬다.
“그런 편 같더군요.”
“그래서 제가 너무 불안한 마음에 도화 옷 따로 준비했잖아요. 저보다야 아니겠지만 도화가 제 결혼식에 힘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 턱시도는 생각도 안 나고 도화 옷 어떻게 할지를 걱정했다니까요. 웃기죠?”
“네.”
“그런데 도화가 너무 완벽하게 하고 온 거예요. 그거 도명 씨 솜씨죠? 묘하게 도명 씨 느낌 나더라니까요. 그리고 도화는 정장 입을 줄 몰라요. 물론 사는 것까지 포함해서요. 백화점에서 비싼 돈 주고 이상한 거 골라 오는 게 특기잖아요.”
도명은 자동으로 어깨가 끄덕여지는 것을 막기 위해 턱짐을 지으며 표정을 굳혔다.
“네, 도와달라 하더군요. 말하기는 좀 어려워했지만요.”
“아, 도화 성격에 그렇겠군요. 그래도 처음 아슬아슬한 시작과는 달리 좋은 이웃이 된 것 같네요. 제가 계속 도명 씨 좋은 사람 같다고 했거든요. 그래도 도화가 전혀 안 듣는 것 같아서 이웃사촌끼리 데면데면하거나, 매일 인상 굳히고 있을까 봐 걱정했어요.”
‘시작 이상으로 아슬아슬하고 끈적끈적한 관계가 되긴 했지.’
“뭐, 매일 보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다행이다. 도명 씨라도 오픈 마인드에 성격이 좋아서.”
‘뭔가 기분 나쁜데. 내가 취조했으면 했지 취조당하는 기분은 정말 별로야.’
“그나저나 진영 씨는 아무리 그냥 이웃이라도 절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랑 엮여도 괜찮은가 봐요?”
도명이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며 손가락을 팔꿈치 부근에서 까닥거렸다.
“아. 설마. 도화에게 그런 마음이 들어요?”
“연애 감정 말입니까?”
도명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되물었다.
“네. 연애 감정이요.”
“흠.”
도명이 자신의 턱 아래를 쓰다듬으며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도명이 대놓고 진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질문을 하고 판단을 내리는 쪽은 자신 쪽이라는 표정이었다. 도명을 쳐다보는 진영의 표정이 조마조마해 보였다.
“진영 씨는 저번에 제가 동성애자인 걸 알고 비교적 쿨했던 것 같은데, 역시 자기 주변 사람 이야기가 되면 태도가 바뀌죠. 걱정 말아요. 심한 동성애 혐오부터, 가벼운 수준까지 다 겪어 보았으니까요.”
도명이 이미 진영을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내려 보며 말했다. 도명이 너도 그냥 그런 사람들 중 하나구나, 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 차별하는 사람 아니란 말입니다.”
진영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대부분 그렇게들 이야기하긴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 하지만 진짜 이해하는지 보려면 경험만이 답이지요. 제가 도화 씨를 꾀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약속과는 달리 도화 씨한테 이 가벼운 입술을 열 건가요? 네가 새로 사귄 이웃사촌이 너를 보고 이상한 마음이 들 수도 있는 동성애자라고요? 이렇게 속삭일 건가요? 도망가라고. 역시 네가 말했던 것처럼 싸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도명이 진영을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오며 말했다. 진영이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도명의 태도에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테라스 바깥으로 발이 빠져나가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진영의 몸이 뒤로 심하게 기울어지려는 찰나 도명이 진영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진영의 손을 꽉 쥐지는 않았다. 진영이 악수하듯이 손을 꽉 잡아야 도명이 무게 중심을 잃은 그를 완전히 구해 줄 수 있을 터였다.
당황한 진영의 손이 땀으로 얼룩졌다. 도명이 입꼬리를 쓱 올리며 진영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팔뚝에 힘을 주어 그를 끌어올렸다.
“느낌 어때요?”
도명이 얽힌 손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 네?”
“당신을 보고 야한 생각을 할지도 모를 동성애자의 손을 이렇게 제대로 잡은 느낌은 어떻습니까?”
“아, 그게. 음. 뭘 느껴야 하나요?”
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진영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답을 찾고자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느낄 필요는 없죠. 말 그대로 아무것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러니까 방금 시험 같은 거였습니까? 제가 사실은 동성애 혐오가 있는지에 대한.”
“뭐 비슷합니다.”
“통과한 거고요?”
“글쎄요. 어떤 관계든 언제나 시험에 드니까요.”
“시험이라면 좀 애매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도명 씨는 저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건 확실히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냥 악수 같은 속 얽힘에 이상한 기분을 느낄 이유는 없는 거죠.”
“혐오가 왜 혐오인 줄 압니까? 있지도 않은 일로 공포를 만들어 내죠.”
도명이 관자놀이를 집게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제가 사심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들의 뇌 주름 속이 중요하지.”
“아 저 그래서, 도화는 도명 씨에게?”
“좋은 이웃사촌이자 성실한 세입자죠. 돈 계산이 확실해서 편합니다.”
“아. 네.”
“들어와요. 역시 도화 씨 친구를 밖에 세워두려니까 오히려 신경 쓰이네요.”
“아, 역시 도명 씨는 좋은 사람이네요. 사실 신경 안 써도 되잖아요.”
“네. 사실 신경 안 써도 되죠.”
도명이 진영에게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도명의 가게에 작은 증기 기관차에서 날 법한 소리가 나고 원두 냄새가 수증기가 되어 퍼졌다.
“도화 씨와 저녁 먹으려고요?”
“아. 네. 겸사겸사.”
“저녁이 진짜 목적이 아니라는 소리군요.”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중간에 말이 옆길로 샜는데, 도화가 제 결혼식에서 축가 불렀거든요. 그거 찍은 영상 보여 주려고 왔죠. 그 외에 결혼식 날 있었던 다른 영상도 있고요.”
“그게 목적이면 그냥 이메일로 보내도 되잖아요.”
“이런 건 같이 봐야 맛이죠. 혼자 감성에 빠진 표정을 놀리면서요. 아, 도명 씨 볼래요?”
“……볼 수 있습니까?”
도명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도화가 노래를 부르다니!
“도명 씨 노트북을 써도 되면요.”
도명이 자신의 노트북을 진영의 앞에 놔 줬다. 진영이 USB 포트에 USB를 꽂았다.
“참고로 도화, 노래 잘 불러요. 학창시절에 도화 몸에 예체능 신이 내려왔다고 친구들끼리 반 농담으로 말하곤 했거든요. 축구로는 그쪽으로 장학금을 받을 만큼 특별히 잘했어요. 물론 축구뿐 아니라 모든 체육 과목에서 다 우수했어요. 항상 최고는 아니었어도 무조건 평균 이상이었죠.”
“그렇군요.”
“네. 체육만 잘하면 예체능 신이 내려왔다고 안 했겠죠. 노래도 잘 부르고 피아노도 치고. 털털하기 짝이 없는 애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섬세하게 건반들을 눌러 댈 때면 여자애들이 소위 말하는 반전 매력이라고 많이 떠들어댔죠. 참고로 본인은 그런 거 하나도 몰라요. 음악에 심취해 있느라. 사실 도화 같은 애가 은근히 인기가 좋아요. 외모도 성격도 털털해서 다가가기 안 부담스럽고 또, 알면 알수록 좋은 점들이 많으니까요. 뭐 고등학교 이후 이상한 싸늘한 표정을 하고 다녀서 그렇지, 좋은 애라고요. 그런데 요즘엔 그 뚱한 표정도 많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네. 생각보다 까칠하기만 한 건 아니더군요. 그나저나 예체능이라고 하면, 그림도 잘 그립니까?”
도명은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인 도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솔직히 그림은 좀 애매했어요. 손재주가 안 좋은 건 아닌데, 뭐랄까, 아 설명을 못 하겠네. 어쨌든 너무 특색이 있었어요. 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똑같이 따라 그리는 데는 영 재능이 없었다는 게 맞겠네요.”
“도화 씨 피아노, 잘 칩니까?”
“그쪽으로 진로를 빠질 만큼은 아니고, 음 취미 생활 하기 좋을 정도는요.”
“뭐 충분하네요.”
도명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영이 도화가 축가를 부르는 동영상 파일을 찾아 재생했다. 조금은 어수선한 결혼식 전경이 나오고 행복해 보이는 신랑 신부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결혼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결혼식 장면만 보면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나중에 애인 생기고 관계가 진지하다고 생각되면, 요즘 스몰 웨딩도 많이 하는데, 어때요? 이 집 마침 마당도 있는데 두 사람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달콤한 케이크를 같이 자르는 거죠. 버진 로드가 짧긴 하겠지만 꽃길도 만들면 정말 낭만적일 것 같지 않아요? 그냥 정말 친한 사람들 불러서 테이블 위에서 밥 먹고, 밤새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저희는 양가 어른들 때문에 결혼식장 빌리고 형식 따지긴 했지만요. 아무래도 젊은 애들이 어른들 무시한다고 할까 봐 칭찬받을 것도 욕먹을 것도 없는 틀에 박힌 결혼식을 기획하게 되더라고요. 뭐 어쨌든 결혼식을 하는 건 두 사람의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족 행사니까요.”
“글쎄요. 이렇게 떠들썩하게 우리 사랑하고 있다고 유난 떠는 것 자체가 어색하네요.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취향도 아니고요.”
도명이 기다리던 도화가 무대에 등장했다. 스탠드 마이크 앞에 우물쭈물하며 서는 모습이 귀여웠다. 긴장되는지 서서 손을 폈다 쥐었다 하는 모습도 보였다. 무대에 서는 사람이 무대 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긴장해서 노래나 제대로 부를지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도명은 자기 결혼식은 아니니 도화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노래를 망치는 모습도 꽤 귀여울 거라고 생각했다.
전주가 흐르고 도화가 마이크를 조정했다. 전주가 흘러나오는데 여전히 도화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박치는 아닌지 제때 맞춰서 도화가 입술을 열었다. 노래를 불러야 하자 눈을 꼭 감고 아랫입술을 파르르 떠는 게 귀여웠다.
마치 마이크 봉을 동아줄처럼 잡고 있었다. 마치 그걸 놓으면 무대 밑으로 푹 꺼질 사람 같았다.
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시작과는 달리 노래가 흘러갈수록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다. 관객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제스처 같은 것 없었지만 그의 노래 자체가 관객들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도화의 목소리가 잔잔하면서도 짙었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넋 놓고 도화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새삼 그에게 다시 반하는 순간이었다. 도명은 표정 관리하는 것조차 잊고 얼굴이 빨갛게 익은 채 영상 속 도화를 음미했다.
‘아, 이 사람을 어떻게 하지? 그냥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귀엽다가도 섹시하고, 또 이렇게 달달하기까지 하면 어쩌라는 거지?’
“잘 부르죠? 완전 반전 매력이죠?”
진영이 도화를 낳고 키운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진영이 도명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명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도명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도명이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진영이 도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 아. 음.”
“그런 거 아닙니다.”
도명의 포커페이스가 실금이 여기저기 간 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웠다. 도화의 친구에게 변명의 여지도 없이 마음을 정면으로 들켜 버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빨갛게 익었다.
도명은 어서 이 상황을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그렇게 애쓰다가 이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도화를 짝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음을 숨기는 건 도명답지 않았다. 애초에 도명이라면 진영에게 도화와 사귀는 상황에 대해서 어떠한 숨김도 없이 당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진영이 그 사실을 알고 도명을 징그럽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는 상관없었다. 진영이 도명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람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 전에 마음에 있었다 하더라도 마음에 안 담아 두는 것이 지금까지 도명의 마음이 가진 메커니즘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영에게 진실을 바로 이야기 못 하는 건 순전히 도화의 마음 때문이었다. 도화에게 미움받기 싫었다. 도화의 마음속 우선순위가 도명이라 해도 그에게 미움받을 수는 있었다. 행복한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불만의 씨앗을 굳이 심을 필요는 없었다.
도명은 이왕이면 도화가 자신을 만나서 좋은 일들만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서윤을 정리하라고 한 건 도명 자신이 참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참을 수 있는 지점이었다면 도화에게 미움받을 건수를 안 만들려고 혼자 마음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최근에 실점을 하나 한 것 같은데 연달아 실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명은 그래서 더 간절했다.
도명이 지금까지 쌓아온 감으로는 진영은 도화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의 오지랖이 짜증 나는 면이 조금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는 도화가 동성애자라고 등을 돌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화가 그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전에 도명이 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면 도화 스스로가 내리는 결정이어야 했다.
도명이 땀으로 젖은 이마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아, 도명 씨. 저는 그러니까.”
“진영 씨, 쓸데없는 오지랖은 부리지 말아요.”
도명이 진영을 향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제가 오지랖이 넓은 편이긴 하지만, 이런 일에는 함부로 끼어들어야 하지 않아야 한단 건 알아요.”
진영이 손가락을 어지럽게 얽으며 말했다. 그 역시 도명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입술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속이 타들어 가는 모양이었다.
“어, 진영아. 웬일이야?”
타이밍 좋게 도화가 한 손 가득 짐을 들고 도명의 가게에 들어서며 말했다. 사실 오늘 도화에게는 미션 하나가 주어졌다. 도명 없이 마트에 가서 좋은 샌드위치 재료를 골라오는 미션이었다.
도명이 문자로 꼼꼼하게 샌드위치에 어울리는 햄, 신선한 양상추 고르는 법 등을 적어 보내 줬었다.
“아. 그게 너 기다리다가.”
“날 왜 기다려?”
도화가 진영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자신이 놓친 건 없나 싶어 핸드폰을 뒤지다가 이내 그가 말없이 온 적이 많았다는 것을 상기하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네 축가 영상 전해 주려 왔지.”
“창피하게 뭘 그런 걸 굳이 가지고 오고 그래. 흑역사야, 흑역사.”
“아냐. 너 잘 나왔단 말이야.”
“잘 나왔다 하더라도 창피해.”
“온 김에…… 음.”
도화는 반사적으로 온 김에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려다가 도명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둘이서 도란도란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는데 갑자기 진영이를 끼우면 도명이 싫어할 것 같았다. 도명의 얼굴을 살펴보니 벌써부터 불편한 기색이 보였다.
“장 봐 온 거야?”
“아. 음.”
진영이 너구리처럼 도화가 장 봐 온 것들을 기웃거렸다.
“1인 가구 장치고 거창한 거 아냐?”
“아, 그게 오늘 저녁도 먹고, 내일 아침도 먹고, 또, 도명 씨하고 먹으려고 했지. 그러니까, 별 건 아니고 도명 씨가 요즘 요리 가르쳐 줘서. 또, 둘 다 혼자 밥 먹는 1인 가구고. 겸사겸사. 요즘 이웃사촌들끼리 각박하다고 하는데 나라도 사회문제를 의식하고 살기로 했어. 어쨌든 가끔. 매일은 아니고 가끔 이렇게 같이 저녁 식사 하는 정도의 이웃사촌이랄까. 그렇죠? 이웃사촌 씨?”
‘아. 자기야,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많아요.’
도명은 그냥 말없이 도화를 향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이 바보를 어떻게 하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도명은 도화가 노래 부르는 모습에 포커페이스가 무너졌고 남은 건 구원투수가 아닌 거짓말에 서툰 바보 백구였다.
“아 둘이 저녁 식사 약속 잡았는데, 내가 눈치 없이 온 거구나.”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뉘앙스가 엄청 이상해지겠네.’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뭔가 이상하잖아! 도화야, 생각하자. 생각.’
“저녁 식사야 사람이 많을수록 분위기가 좋지 않겠어요?”
도명이 진영을 향해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먹고 가. 제발 먹고 가 줘. 아직 도명 씨랑 얼굴 마주 보기 조금 어색한데 네가 끼면 더 화기애애하겠다! 네가 날 살린 거야.”
‘백구야, 설정이 과하다. 네 가짜 로즈 골드 색 팬티만큼 설정이 과해요.’
도명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고통스러워했다.
진영은 손님이라는 이유로 저녁 당번에서 제외되었다. 도명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읽고 있으라고 잡지나 그림책을 주었다. 하지만 도명의 가게에 있는 책들은 진영의 취향이 아니었다.
봐도 뭘 느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무언가 감정적인 것을 느껴야만 한다고 설득하는 것 같아 흥미가 떨어졌다. 그에게 예술은 어려웠다. 진영은 도명이 이런 것들을 사 모으고 펼쳐 보면서 뭘 느끼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담은 책들도 있었지만 두께가 꽤 되어서 시작하기 겁났다. 재밌어도 곤란했고 재미없어도 곤란했다. 진영은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명이 만든다는 잡지도 펼쳐 보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식물의 사진과 이야기, 원예에 대한 고급 정보, 공간별 정원 만드는 요령, 혹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정원들, 혹은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록 같은 것 등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동안 딱히 식물에 관심이 없었지만 묘하게 재미있었다. 스쳐 지나간 생각이지만 허브를 한번 키워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주방에서 들려오는 각종 달콤한 소리와 절친한 친구와 함께 서 있는 잘생긴 게이의 뒷모습만큼 그의 신경을 집중시키는 건 없었다. 도명이 어떤 책을 쥐여 줘도 집중 못 할 것이 뻔했다.
도명과 도화는 재료들을 손보며 장 본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명 쪽이 재료를 이리저리 살피며 꽤 깐깐하게 굴었고 도화는 그가 말한 것을 수제자라도 되는 양 열심히 적었다.
잠깐 지켜본 장면이지만 도화가 도명에게 꽉 잡혀 사는 느낌이 들었다. 도화가 도명에게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말이다.
도화는 뒤통수가 따가워서 뒤를 돌아보았다. 진영이 턱짐을 지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영의 시선이 어딘가 묘했다. 도화는 진영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무섭기까지 했다.
“도화 씨 찬장에서 노란 접시 좀 꺼내 와요. 진득한 치즈 색 말고 레몬 색으로요.”
“치즈. 레몬.”
도화가 도명의 말을 중얼거리며 노란 접시들이 있는 찬장 문을 바로 열었다. 어떤 색 접시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저녁 동맹을 맺은 지 꽤 됐고 자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이다.
가끔 오는 사람이 남의 집 살림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꿰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저 도명 씨, 이거요? 아, 이게 레몬인가?”
도화가 접시 두 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도명을 불렀다. 사실 도화가 접시 색 두 개를 추린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도명은 노란색 접시 종류만 5개를 가지고 있었다. 노란색 접시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다양한 스타일과 색의 식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 그거 구분 안 가요?”
도명이 이 쉬운 걸 왜 모르나 싶었다. 그래서 오히려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는지 난감해서 미간 사이를 긁적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진영 역시 뭐가 레몬 색 접시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노란색은 그냥 다 노란색이다.
“오른쪽이요.”
“아. 이게 레몬 색…….”
도화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접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레몬 색 말고 치즈 색 접시를 쓰면 어떻게 돼요?”
“조금 안 어울리겠죠. 레몬 색 접시가 완벽해요. 음료수로 레모네이드 만들 거예요. 투명한 유리컵에 레모네이드를 담고 그 접시 바로 옆에 놓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샌드위치 속 재료는 신선한 새싹 채소가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완전히 자란 채소 말고 새싹이라고요. 색이 덜 드세고 싱그러운 초록색이죠. 그러니까 색이 좀 더 진한 치즈 색 접시는 조금 안 어울리죠.”
“아…… 매번 이런 거 생각하며 테이블 세팅해요?”
‘나 그냥 먹었는데?! 그냥 맛있는 냄새가 나면 입안에 넣었다고! 어떤 노랑인지가 이렇게 중요했다니!’
도화가 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이 바보 같은 도화의 표정이 귀여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저 도화가 기특하거나 귀여우면 쓰다듬었다. 도화는 눈을 감고 도명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다가 이곳에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영이 그답지 않게 너무 조용해서 잠시 잊었다.
도화는 이 순간을 들키고 난 후 겁먹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진영에게 들킬까 봐 반사적으로 돌아가는 목에 힘을 주었다. 빨간 경고음이 들리듯 머릿속이 왱왱댔다.
한발 늦었지만 이제라도 왜 다 큰 남자 머리를 징그럽게 만지냐며 도명에게 화를 내 볼까 했다. 하지만 도명에게 그런 식의 화를 낼 자신은 없었다. 타이밍도 이미 늦었다.
도명 역시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하던 일을 했다.
“도화 씨, 소스 만드는 거 알려 줄게요. 올리브유 좀 가져올래요?”
“올리브유 어디 있는데요? 난 전혀 모르겠네요. 하하 제가 도명 씨 주방에 뭐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진영의 시선을 의식한 도화가 또 어설픈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
‘백구 네가 갑자기 그걸 왜 몰라. 거짓말 좀 개연성 있게 해야지. 방금 전까지 여기저기서 다 잘 찾아놓고.’
“도화 씨 서 있는 곳 오른쪽에요.”
“여기요?”
“네. 바로 발밑이요.”
“아 여기 있네요. 하하, 제가 도명 씨랑 이런 시간 자주 안 가지잖아요.”
‘이제 와서 이상한 설정 그만 잡아. 입마개를 지금 당장 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도명은 자신의 지하실에 있는 SM용 입마개를 도화에게 물리는 것을 상상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아. 저 도화 씨, 바질 좀 가져오겠어요?”
“바질은 장 안 봐왔는데요. 아 냉장고에 있나요? 제가 도명 씨네 집에 바질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죠.
‘그만…… 그만…… 그만!’
“도화 씨 바질은 저희 집 뒤쪽 마당에 있어요. 그리고 당연히 어디 있는지 모를 테니까 제가 같이 가서 알려드릴게요.”
도명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겨우 올린 채 말했다.
도화를 뒷마당에 끌고 온 도명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반면 도화는 바질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아 바질, 이게 바질인가?”
도화가 로즈메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둘은 비슷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헷갈리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도명의 신경이 바짝바짝 섰다.
“아뇨. 그 옆에 있는 게 바질입니다. 아니, 바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샌드위치에 바질은 꼭 넣을 필요 없어요. 여기로 자연스럽게 끌고 나오려고 만든 핑계에요. 도화 씨, 자꾸 이상한 수습 하지 말아요. 거짓말을 못하면 차라리 말을 아끼든가요.”
“어, 저 꽤 자연스럽지 않았어요?”
“대체 어느 면이 자연스러웠다는 겁니까?”
도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모두 다요. 도명 씨 쪽에서 말해 봐요. 어느 면이 부자연스러웠는데요?”
“모두 다요.”
도명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명은 ‘이미 다 망해 버린 것 같은데 우리 사귄다고 말해 버려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다 못해 찰랑거렸다. 도명은 더 이상 이 바보 짓거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어색했어요? 아, 어떻게 하지?”
도화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내 부아가 치민 얼굴로 도명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도명 씨가 왜 머리를 쓰다듬어선!! 사내새끼들끼린 그런 거 잘 안 한단 말예요. 하더라도 정말 친해야 한다고요. 도명 씨가 그러니까 완전 절친한 친구 같잖아요. 우린 아직 어색한 이웃사촌 콘셉트이었다고요.”
‘절친한 친구 분위기도 딱히 분위기도 아니었지. 친구 사이와 애인 사이를 간 보는 절친한 친구라면 모를까.’
“네. 제 실수는 인정합니다.”
“도명 씨 아직 늦지 않았어요.”
‘늦었어요. 촉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거짓말은 왜 그렇게 못해. 지금 상황은 왜 파악 못 하는 건데? 나는 또 도화 씨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환장하겠네.’
“도화 씨,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안 돼요? 진영 씨한테 커밍아웃하는 것에 대해서?”
“네?!”
도화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는 듯이 도명을 향해 목소리를 내질렀다.
“제가 커밍아웃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진영 씨 괜찮은 사람입니다. 물론 한동안은 어색해할 수도 있어요. 예전과는 완전히 같다고는 말 못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겪고 나면 더 단단해지는 게 이런 관계입니다.”
“전 못해요.”
“도화 씨.”
“도명 씨가 좀 더 우리 사이를 숨기려고 노력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이건 노력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들켰다고. 당장 사귀는 사이라고 확신을 못 해도 둘 사이에 이웃 이상의 기류가 흐른다는 건 어떻게 모르냐.’
“도명 씨, 사실대로 말해 봐요. 노력할 생각이 없는 거잖아요. 도명 씨는 언제나 저를 커밍아웃 하나 못 하는 바보라고만 생각하잖아요.”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요. 안 그러면 아까 같은 바보 같은 연극 안 했죠.”
“바보 같은…….”
도화가 도명의 말에 상처받은 듯 그의 말을 곱씹었다.
“네. 바보 같은 연극이요. 그것도 유치원 수준의 연극 말입니다.”
“왜 지금 제 마음을 이해 못 해요? 진영이는 나한테 남은 유일한 친구라고요.”
“친구인데,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서윤이가 더 절친한 친구 같다고 느낄 정도로 진영 씨 앞에서 일상적인 언어조차 검열하지 않았어요? 동성애자처럼 보일까 봐 내내 충치 걸린 환자처럼 앓아대기만 했죠. 저는 그런 관계를 그냥 아는 사람 정도로 분류하지 친구라고 분류하지도 않아요.”
도화는 도명의 말이 너무나 신랄해서 마음이 아팠다.
“겁 많고 멍청해서 미안하네요.”
“비꼬지 말아요. 나는 뭐 좋은 줄 알아요? 도화 씨가 날 떳떳하게 애인이라고 말 못 할 때 기분 말입니다.”
“이게 그런 문제가 아니란 걸 알잖아요.”
“그런 문제에요. 계속 저기서 이상한 연극 하면서 제가 어떤 비참함을 느끼는지 알아요?”
“동성애자라면 어느 정도는 다들 그러고 살잖아요. 결국 난 또 도명 씨 기분 때문에 친구 하나를 더 정리하고요? 그것도 마지막 친구를요?”
“왜 끝이 항상 정리되는 걸로 끝나는 건데요? 커밍아웃이 진영 씨한테 사귀자고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도화 씨가 남자를 좋아한다. 이게 있는 그대로 나다. 이런 거 아니에요? 뭐가 그렇게 해 보지도 못하고 이 작은 머리에 나쁜 생각만 가득하냐고요. 도화 씨 그거 나쁜 습관이에요.”
“만약, 진영이가 내가 원래 생겨 먹은 걸 이해 못 하면 난 이제 남은 건 도명 씨 하나뿐이잖아요.”
“그게, 큰 문제입니까?”
“네?”
“도화 씨에게 저 하나뿐인 게 그렇게 절망적인 거냐고요.”
도명이 상처받은 얼굴로 도화를 응시하며 말했다.
“왜 항상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끝나는데요.”
“나는 도화 씨와 잠만 자는 상대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애인이고 만약 진영 씨가 끝내 도화 씨를 이해 못 해서 오랜 관계가 끝난다 해도 적어도 제가 그 슬픔을 들어 주고 위로해 줄 사람이에요. 도화 씨의 기쁨과 슬픔, 고독 같은 걸 함께 보낼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왜 충분하지가 않아요. 제가 도화 씨 친구이자 가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도명 씨가 절 어떻게 이해할 건데요? 제 감정을 이해해야 위로를 해 주든 뭐든 하죠. 도명 씨가 저에게 해 줄 건 앞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충고들뿐이라고요.”
“왜 제가 이해 못 할 거라 생각합니까? 왜 도화 씨 아픔에 공감 못 할 거라 생각하냔 말입니다.”
도명은 예상치도 못한 지점에서 도화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도도의 목줄을 놓던 그 날 밤, 도명은 도화에게 깊은 위안을 받았다. 그래서 도명은 자신도 도화에게 그런 존재가 돼 주겠다고 생각했다.
도화는 도명에게 안전한 사람이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상대에게,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더 깊게 반하게 된 사람한테 상처를 받아 버렸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부여잡고 지옥 아래까지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도명 씨는 많은 사람을 가졌잖아요. 한두 사람쯤 떠나보내도 아무 느낌 안 들겠죠. 난 안 그래요! 이 말을 몇 번이나 설명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도명 씨가 친구라고 분류도 안 해 놓을 그런 관계에 목을 매는 거고요. 그 간절함을 모르니까 충분히 진영이한테 변명을 하려고 노력을 안 하죠! 제가 거짓말을 더 자연스럽게 하면 그냥 이웃사촌끼리 친하다 정도로 끝날 수도 있어요. 다만 제가 도명 씨 욕을 하도 해서 이제 와서 친해졌다 하기 민망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요. 이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고 생각 못 하잖아요. 친한 친구도 동성애자고 그 아랫집 남자도 동성애자고.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겠어요?”
“노력했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노력해도 안 되는 지점인데 무슨 노력을 하라고 합니까? 도화 씨가 지금 하고 있는 건 현실도피에요. 노력이 아니라! 도화 씨와 이렇게 되기 전에 진영 씨는 이미 제가 동성애자인 걸 알아요.”
“어떻게요?”
도화는 자신이 도명에게서 들은 것이 현실인가를 의심해야만 했다.
“이건 그냥. 제가 도화 씨가 성격 나쁜 이웃사촌이고 또 의심할 여지 없이 이성애자인 걸로 알았을 때입니다. 왜 그랬는지 몰라요. 진영 씨가 그냥 웃기다 싶을 정도로 너무 살갑게 굴고, 그냥 재밌어 보여서 커밍아웃했어요.”
“그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커밍아웃하는 이유에요?! 재밌어 보여서? 상대방이 살갑게 굴어서? 도명 씨 뇌 구조는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도화의 세계에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커밍아웃 이유였다.
“그때는 진영 씨가 저한테 별사람이 아니었다고요. 그리고 제가 도화 씨랑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도화의 머릿속이 빙빙 돌다 못해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지금 진영의 시선으로 보기엔 내 친구가 동성애자인 게 확실한 남자와 샌드위치를 만들며 묘한 페로몬을 뿜어대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하고 잘 지낸다고 제가 동성애자라고 못 박지는 않겠죠?”
“도화 씨 그만 해요. 적어도 진영 씨는 제가 도화 씨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바꿀 수는 없습니다.”
“왜요?”
“하아, 그래요. 미안해요. 바보같이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버려서. 그냥 진영 씨가 보여 줘서 도화 씨가 축가 부르는 영상을 봤는데 저도 모르게 표정관리가 안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일 진영이한테는 남자끼리 엉겨 붙지 말라며 무뚝뚝하게 굴어놓고 그다지 안 친하다는 이웃의 손길에는 좋아했고요. 저는 원래 바보 같다 치지만 도명 씨까지 왜 바보처럼 굴었어요?”
‘백구 너한테 반한 게 그렇게 나한테 화낼 일이야?’
도명은 도화의 질타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누르고 도화를 향해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도화 씨, 너무 겁먹지 말아요. 진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혼자 말하기 겁나면 내가 커밍아웃할 때 옆에 있어 줄게요.”
“…….”
도명의 말에 도화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난 못 해요.”
도화가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도화 씨, 도와줄게요.”
도명이 도화의 손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못 해요.”
도화의 시선이 도명의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도명은 이렇게 도화의 눈 안에 담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도화의 눈동자 안에 도명은 없었다. 서글픈 마음이 도명의 마음 안에 차올랐다.
“그래요. 왜냐하면 난 도화 씨에게 어떠한 위안도 못 되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감정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의 분위기가 냉랭했다. 도명은 도화에게 상처받은 상태였고 도화는 도명의 기분 같은 걸 느끼지 못할 만큼 겁에 질린 상태였다. 진영이가 두 사람 사이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아, 바질은?”
“아. 바질…….”
도화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화야, 둘이 그사이 싸웠어? 어쩐지 바질 하나 가져오는데 너무 오래 걸리더라. 아, 무슨 일이에요? 도명 씨? 아니 바질 따러 갔다가 무슨 일이에요?”
진영이 두 사람 사이에서 겁먹은 표정으로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자기까지 표정을 굳히면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진영이 어떤 말을 해도 두 사람은 샌드위치 만드는 기계처럼 샌드위치만 만들었다. 진영은 지금 이 순간 그냥 국밥이나 말아먹고 싶었다. 내장 속을 뜨끈한 국물로 채우고 나면 마음도 괜찮아질 것 같았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사실 진영의 기분도 점점 복잡했다. 진영의 기분 역시 점점 아래로 쳐지기 시작했다. 진영의 마음속 ‘기쁨’ 역시 분노와 서글픔을 억누르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괜찮은 척했다.
결국 도화에 대한 진영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도화가 기분 이렇게 안 좋을 때 웬만하면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나 도화 너한테 섭섭해. 내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섭섭해져. 그런데 오늘은 진짜 못 참겠다.”
“어? 어? 내가 뭘.”
“넌 내가 뭐가 섭섭한지도 모르지?”
“…….”
“평생 몰라라. 나쁜 새끼야.”
진영은 그렇게만 말하고 의자에 걸어 둔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진영이 나가 버리고 난 후 주방은 더 분위기가 차갑고 무겁게 변했다.
“……도명 씨 저 말 무슨 뜻인 것 같아요?”
“도화 씨 마음도 이해 못 하는데 제가 진영 씨 마음까지 어떻게 압니까?”
“지금 이 와중에 비꼬기에요?”
다 완성한 샌드위치 빵 위에 도명의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당사자인 도명 역시 빵 위에 무심하게 툭 떨어진 눈물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 이러다가 도화 씨한테 눈물 많다고 평생 놀림 받겠네. 내 돔 인생도 끝났어. 어쩌다 걸핏하면 울어 버리는 거야.’
도명이 더 이상 눈물을 안 흘리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도명 씨……?”
“내가 왜 아픔을 모릅니까?”
“네. 네?”
“도화 씨는 내가 아직도 사이코패스 뭐 이런 걸로 보여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도명 씨. 저 지금 그렇지 않아도 머리 터질 것 같은데 도명 씨까지 왜 그래요? 저 좀 살려 줘요. 나도 울고 싶단 말이에요.”
도화가 도명의 팔을 부여잡았다.
“…….”
도명은 말이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의 칵테일의 중심부에 서 있는 도화가 주저앉아 버렸다. 결국 도화가 하는 건 짜게 된 샌드위치와 도명을 두고 위층으로 도망가 버리는 일이었다.
나쁜 버릇의 흔적은 결코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앞으로 나아갔다고 자만한 순간 인생은 다시 후퇴했다. 도화는 자신이 도명을 울려 버린 일에 너무 놀랐다.
도화는 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를 행복하게 만들 것만 생각했었다. 그를 슬프게 만드는 일 같은 건 상상조차 못 했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우는 도명의 눈물 한 방울에 그의 세상에 커다란 싱크 홀이 생겨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뭔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서 있어야 하는 건 도화에게 너무 큰 무게감이었다.
***
도화가 자신을 버리고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는데 도명이 주방에 혼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도명은 집으로 내려온 후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게 울 정도의 일이었나 싶었다. 그렇다고 도명이 느낀 감정이 별일이 아닌 건 아니었지만 자신치고는 지나치게 실망했고 또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명이 그동안 항상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 특유의 염세주의적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타인인 도화에게 지나치게 기대했고 또,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 같았다.
좋아하니, 생각하는 것까진 완벽하게 안 같더라도 모든 일에 감정은 같아서 언제나 등가교환 될 수 있을 거라고 무의식중에 단정 지어 버린 것 같았다.
곱씹어 보니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기대해 버리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명은 도화에 대한 실망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우울해졌다.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세워진 후에 남은 건 무기력감이었다. 도명은 배고픔도 잊은 채 침대에 누웠다.
도명은 자신의 실망감이 미처 정리도 되기도 전에 다음날 도화에게 어떻게 이미지 회복을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모든 수가 어린애 장난질같이 조악하게 느껴졌다.
도명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는 있지만 소화되지도 않은 감정 때문에 잠이 들 리가 없었다. 그때 그에게 문자가 왔다. 도명은 핸드폰을 확인할 기운조차 없었다.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는 그 문자가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 버렸다. 회사에서 온 것이든 그의 수많은 지인들 중 한 명이라도 지금의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닐 터였다.
방 안에 불은 켜져 있었지만 무겁게 내리눌러진 눈꺼풀의 검은 장막으로 인해 그는 세상은 온통 새까맣다.
도명이 15분간 감정을 삭이고 있다가 눈을 떴다. 그러다가 의식이 의미 없이 떠돌 수 있을 것을 찾아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마자 새 문자가 왔고 확인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떴다. 도명은 무심한 표정으로 문자를 열었다.
그러자 별다른 텍스트는 없고 사진 한 장만 떴다. 문자를 보낸 상대는 도화였다. 사진 속에는 그들이 만들다 만 샌드위치가 완성되어 있었고 도화가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자른 후 모양을 좀 다듬어 하트 모양으로 만든 것이 샌드위치 빵 위에 올라가 있었다.
도명은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고작 하트 모양 방울토마토로 이 모든 걸 수습하겠다는 도화가 미우면서 동시에 마음이 녹기도 했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2층으로 서둘러 올라가는 도화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행이면서도 그 뒷모습이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야속했다. 기억은 감정을 불러낸다.
[뭐 하자는 겁니까?]
도명이 문자를 보냈다. 도화에게 시비를 거는 게 아니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였다. 도명의 기분이 복잡한 탓인지 이 사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도화는 답이 없었다.
[도화 씨.]
도명은 핸드폰을 뒤집고 다시 누웠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5분을 셌다. 다시 울려야 할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도명은 기분이 겨우 진정되려는 찰나 도화가 보낸 사진 한 장에 오장 육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달콤하기만 해서 뜨거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통스럽기만 해서 뜨거운 것도 아니었다. 이건 정말 무슨 매운맛인지 모르겠다.
도명은 결국 열이 뻗쳐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쯤 되니 나잇값이라든지 연장자로서 여유라든지 멋있는 돔의 이미지 같은 건 날려 버리고 도화를 닦달하고 윽박질러서라도 서운한 감정을 다 토해 버리리라고 생각했다.
도명은 도화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평소 자신의 신념도 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도화의 세상에 맞춰 봤다. 그래도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정말 이판사판이었다.
도명은 도화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두 집이 이어진 계단실 문을 열자 웅크린 커다란 등짝이 하나 보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도화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도화 씨.”
“…….”
“제가 물었잖아요. 뭐 하자는 건지. 문자를 보내 놓고 핸드폰은 어디다 박아 둔 겁니까?”
도명은 질문하자마자 도화의 발밑에 핸드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제 문자를 확인해 보긴 했습니까?”
“…….”
“씨발, 대답을 안 할 거면 여기 왜 있어요.”
“확인했어요.”
도명의 욕지거리에 도화가 놀라서 황급히 대답했다.
“그래서 뭐하자는 건데요?”
“모르겠어요.”
“뭐, 방울토마토로 샌드위치 데코를 했다, 그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뜻입니까?”
“무서워서요. 무서워서 보냈어요. 도명 씨를 잃을까 봐 무서워서 보냈어요.”
‘나도 무서웠어요. 도화 씨가 날 혼자 두고 이 층으로 올라가 버릴 때.’
도명은 말없이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도화의 손에는 소중한 것인 듯 혼자 완성하게 된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샌드위치를 쥐고 있는 도화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도명은 맥이 탁 풀렸다.
플레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사람에게 더 강하게 다그쳐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도명이 도화의 옆에 앉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멀쩡한 바닥도 있고, 소파도 있는데 굳이 지저분한 계단실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앉았다. 이유는 단지 그곳에 도화가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논리는 집어치우자고요. 괜찮은 척, 좋은 사람은 척하는 것도 집어치우고. 또 뭘 치워야 하나.”
도명인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런 거 다 집어치워도 우리 여전히 사귀는 거예요? 도명 씨가 여전히, 내 자기예요?”
“와. 개인 줄 알고 데려왔더니 여우 새끼였네. 이럴 때 자기라고 하라는 걸 내가 가르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집어치울 거 또 하나 있네. 아부도 집어치워요. 본질도 흐리고, 또.”
‘본질도 흐리고, 또, 아무래도 그냥 섹스만 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이니까’
“아무튼 집어치워요.”
“도명 씨 왜 울었어요?”
“하!”
도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으로 바람 소리를 냈다. 도명이 어이가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일단 자신은 아까 충분히 말한 것 같은데 왜 울었냐고 물어본 것, 그리고 자신의 치부를 아무렇지 않게 후벼 파는 것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놀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왜 매번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요. 진짜 그런데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에요? 약한 지점부터 찌르고 대화를 하자는 건 내 목에 목줄을 채우고 제가 도화 씨한테 질질 끌려가는 모습 보겠다는 것 같은데.”
“저, 그렇게까지 계산하며 대화 못 해요.”
“타고난 거면 더 짜증 나네요.”
“미안해요.”
도화가 두 개로 나눠서 포장한 샌드위치 중 하나를 도명에게 건네려다가 다시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왜 울었, 하, 됐네요. 애초에 강요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고. 나만 매번 우스워지지.”
도명은 왜 내가 위안이 안 되는지에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강요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서 더 속상했다.
차라리 도화의 참을 수 없는 악습관이라든지 단순한 복종의 감정이라면 길들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제가 어떻게 도명 씨를 상처 입혔는지 이해 안 가서 그래요.”
결국 도화가 양손에 샌드위치를 든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도화가 갑자기 너무 서럽게 울어서 도명이 당혹스러워질 정도였다.
“난 내가 도명 씨를 울릴 줄 몰랐단 말이에요!”
도화가 엉엉 울며 소리치듯 말했다.
“도화 씨 진정해요. 전에도 울렸으면서.”
“제가요?”
“저녁 식사하기로 해 놓고 기차 타고 도망갔잖아요.”
“아, 맞다. 그럼 제가 두 번째로 울린 거예요?!”
“계속 강조하지 말아요. 내가 울보 같으니까. 다시 한번 더 그러면 회초리 듭니다.”
“때려요. 저 도명 씨 때문에 바른 자세로 잘 맞아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울었는지 똑바로 말해달란 말이에요, 다시는 울리고 싶지 않아요.”
“본인이 지금 이렇게 심하게 울면서 그런 질문 하면 어쩌자는 건데요.”
결국 도명이 손수건을 꺼내서 줄줄 쏟아지는 도화의 눈물을 급하게 닦아냈다. 도화가 울자 도명의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세상에 천하의 유도명이 섭이 운다고 등에 식은땀이라니.
“내 눈물 따위는 집어치우고 도명 씨 왜 울었냐고요!”
“왜 섭섭한지는 아까 말했잖아요.”
“……아. 미안해요. 하나도 생각 안 나요. 여기 앉아서 도명 씨를 부르고 싶은데 일단 만나서 대화하려면 생각을 정리해야겠는데 도명 씨가 왜 울었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부르지 못했어요. 그것만 생각했는데도! 근데 나한테 이야기했다고요?”
“아, 진짜 짜증 나네. 아까 날 1%라도 신경 쓰긴 했어요? 온통 진영 씨 생각뿐이었습니까?”
“……전, 그냥. 패닉 상태였다고요. 그리고 도명 씨 마지막 말도 이해가 안 가고요. 제가 언제 또, 도명 씨한테 사이코패스 같다고 했어요?”
“그냥 난 도화 씨가 힘들 때 위안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도화 씨는 제가 이해 못 할 거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잖아요. 그럼 난 도화 씨에게 뭡니까?”
“하지만 도명 씨는 어서 진영이에게 커밍아웃하라고 윽박지른 것밖에 없잖아요!”
“윽박질러요? 하, 내가 도화 씨를 살살 달래가며 얼마나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뭐, 윽박질러요? 도화 씨 내가 한 말들은 단 한 자라도 기억하긴 합니까? 내 진심은 지금 어떤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은 겁니까?”
“계속 힘이 돼 주겠다고 한 건 알아요. 하지만 어쨌든 내가 느낀 감정은, 저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자꾸 도명 씨가 번지 점프대 위에서 툭툭 미는 느낌이었다고요. 저는 오늘 집으로 오면서 도명 씨랑 샌드위치 만들며 즐겁고 한가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생각만 하고 왔는데 문 열자마자 번지 점프대 위에 서 있었다고요. 난 도명 씨한테 번지 점프대에서 내려올 방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리는데 도명 씨는 피할 생각만 하지 말고 빨리 뛰라고 악마처럼 속삭이는 교관처럼 굴었고요. 그런데 위로니 뭐니, 하는 말이 귀에 들릴 리가 없잖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명은 도화의 핸드폰으로 그가 보낸 방울토마토 하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건 뭔데요? 계속 궁금하게 만드네.”
“뭐겠어요. 어쨌든 사랑한다는 뜻이죠.”
“저도 어쨌든 도화 씨를 사랑해요.”
“…….”
“…….”
“이렇게 퉁 쳐도 되는 걸까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또르르 굴리며 말했다.
“이렇게 퉁 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데요?”
도명은 도화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있었지만 일단 자신과 같은 생각인지 확인했다.
“뭐랄까, 수술로 치면 봉합하기 전에 몸 안에 소독 거즈가 남아 있는 걸 보긴 봤는데 급하니까 그냥 꿰매는 느낌이요. 도명 씨한테 가죽 벨트로 엉덩이 맞을 때가 편한 것 같기도 해요. 그냥 아픈 걸 참고 나면 도명 씨가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것만 기다리면 됐는데.”
“저도 도화 씨 엉덩이만 때릴 때가 편했어요. 그땐 도화 씨 우는 얼굴을 봐도 흥분되기만 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방금 운 걸 보고 흥분되지는 않죠. 그런 걸 보면 제가 진성 사디스트는 아닌가 보네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런 줄 알았는데. 어쨌든 그것도 나한테 왜 울었냐고 악착같이 따지면서 우는데 발기되다가도 식겠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샌드위치를 똑같이 한 입 베어 물고 입을 오물오물거렸다.
“진영 씨에게 커밍아웃이니 뭐니, 난 신경 끌게요. 도화 씨가 가져온 대본 대로 연기할 테니까. 그나저나 하, 도화 씨 대본, 진짜 몰입하기 힘든 것만 알아둬요. 오글거리고 개연성 없고 암튼 문제가 많아요. 어쨌든 난 도화 씨 편입니다. 그럼, 위안 비슷한 거라도 되는 겁니까? 꼰대 같은 충고 말고 무조건 도화 씨 장단에 맞추는 거 말입니다.”
“뛰라고 등 뒤에서 속삭이는 교관보다는 음, 위안일 것 같긴 하네요. 그나저나, 내 대본이 왜요?”
“내가 월세 대신 엉덩이 까라고 하는 거라든지, 마감을 못 지킨다고 스톱워치 들고 다니며 신입 엉덩이 까는 그런 대본들 말입니다.”
“아. 보고서 읽었어요?”
도화가 민망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읽으라고 도화 씨가 쓴 건데 읽어야죠. 하여간 그런 플레이 엄청 좋아하네요.”
“저…….”
“안 해 줘요.”
도명이 딱 잘라 말했다. 도화는 보고서를 쓰면서 내심 도명이 자신의 상상을 반영해 줄 생각으로 보고서를 쓰라고 했을 거라고 상상하고 기대했었다. 입으로는 아닐 거라고, 괜한 기대 하지 말자면서, 사실은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S는 M의 환상을 채워 주는 역할이라고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도화가 실망감으로 얼룩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기, 성 노예는 아니잖아요.”
“네?! 서, 성 노예요?! 아니 표현이 너무 무섭잖아요.”
“그런 이상한 상황극 연기를 하라는 것만큼 강한 착취가 어디 있어요? 내 인격과 인권이 무너지는 기분인데요. 내가 싸구려 포르노 배우입니까?”
“그, 그게 그렇게 심해요?”
“작가님, 대본 구려요.”
도명이 도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쿡 찍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도, 도 도명 씨는 울보잖아요!”
자신의 작품이 지독한 평가를 받자 도화가 분해하며 말했다.
“도화 씨는 지금 눈이 또 마카롱이 됐어요. 내가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면 도화 씨는 방금 백 방울쯤은 흘렸다고요.”
“방금 표현, 유치한 거 알아요? 무슨 초등학생 백 배, 천 배 배틀이냐고요.”
“도화 씨 본인 우는 얼굴을 많이 까먹은 것 같네요. 내가 최근 다른 의미로 덜 울려서 그런가.”
도명이 싱긋 웃으며 도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갑자기 세게 움켜잡았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카락 사이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의 손가락 움직임의 뉘앙스가 다분히 성적이었다. 도명이 도화의 뒷목을 잡고 집 안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세웠다.
“본인이 펑펑 우는 얼굴이 얼마나 못생겼을지 상상이 갑니까?”
“……못생겼…… 도명 씨 우는 얼굴도 못, 못, 못, 아 젠장.”
도화는 도명이 주방에 서서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렸을 때의, 그 영화같이 우아한 장면이 생각나 버렸다. 도명이 우는 바람에 놀란 와중에도 그 얼굴이 너무 분위기가 있어서 넋을 놓고 봤었다.
“상상이 안 가면, 다시 보면 되죠.”
도명이 허리에 걸린 가죽 벨트를 풀렸다. 그리고는 도화의 목에 채웠다. 가죽 벨트가 목에 조여지는 느낌이 싸늘했다. 도명이 손가락 끝으로 뜨거워진 도화의 목줄기를 진득하게 훑었다.
도명은 손가락 끝으로 도화의 혈관이 팔딱팔딱 뛰는 것을 느끼며 하체를 도화의 엉덩이 쪽에 진득하게 비볐다.
“한 번에 꿰뚫어 줄 테니까. 목 놓아 울어 봐요.”
도명이 도화의 바지를 내리고 자신의 바지도 내렸다.
“앗. 저, 우리 방금 싸우고 이러는 건 전개가 조금.”
“싫어요?”
“아. 음…… 울려 주세요.”
“자기야.”
도명이 도화의 귓바퀴를 이를 세워 물며 바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명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도화의 날개 뼈가 부르르 떨렸다.
“도화 씨도 해 봐요. 울려 줘요. 자기야.”
“울려 줘요. 자기야.”
도화가 목소리를 바르르 떨며 말했다. 도화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로 도명의 귀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안 들려요.”
“울려 줘요. 자기야.”
도명이 도화의 허리를 감고 손가락을 도화의 배꼽에 얹고 지분거렸다. 아랫배가 애무 당하자 도화의 페니스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도화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도명의 손목을 잡았다.
도명이 도화의 목줄을 짧게 잡았다. 그리고 페니스를 도화의 구멍에 푹 찔러 넣었다. 마치 벌주듯 한 번에 강하고 깊게 찔려오는 그 느낌에 도화의 입이 벌어졌다.
단단한 도명의 귀두가 도화의 안쪽을 끈덕지게 찌르며 밀어 넣어졌다. 도화의 엉겨 붙는 빨간 내벽이 귀두를 물고 늘어질수록 도명은 어금니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앞으로 치대며 비벼댔다.
“흐악!”
도화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반쯤 주저앉았다. 하지만 도명이 팔뚝에 힘을 주고 목줄을 세게 쥐었다. 겨우 멈추었던 도화의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
“아주 목 놓아 울게 만들 테니까. 기대해요.”
도명의 굵은 페니스가 빠르게 빠져나갔다가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살과 살이 충돌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오늘은 도명의 매질이 없었지만 몸으로 매질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화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도명은 그를 몰아세웠다.
구멍 안쪽이 마찰열로 시큰하다고 느껴졌다.
“앗흐아아앗.”
도명이 주는 자극에 도화의 구멍이 벌름거렸다. 도명은 도화의 구멍이 잠시라도 느슨하게 풀리는 꼴은 못 보겠다는 듯이 가차 없이 성기를 박아 넣었다. 도화의 구멍 안이 뜨겁게 헤집어졌다.
“하. 젠장. 내가 도화 씨에게. 읏, 음 줄 수 있는 위로는 이런 식밖에 없어요. 하, 숨이 차도록 몰아붙이는 읏. 거 말입니다. 흥분과 고통으로 과열시키는 거죠. 하아. 그래서 그것 외에 다른 건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도명이 말을 내뱉기 위해 잇새로 뜨거운 습기를 뱉었다. 도화의 살갗이 도명이 내뱉는 뜨거운 습기 때문에 화끈거렸다.
“하앗. 하앗.”
도화는 눈을 감고 구멍 안에 가득 찬 도명의 페니스를 느꼈다. 아랫배가 뜨거워지고 바짝 선 페니스는 천박하게 흔들렸다. 도화는 도명의 전신 거울에 미끌미끌한 체액을 뿌려대며 흐느꼈다.
“몰아붙이고, 하아. 하아, 내가 만든 테스트를 잘 견디면, 하아. 대견하다며 상을 주는 겁니다.”
도명이 곧 사정을 할 듯 도화를 결박하듯 끌어안았다. 뒤에서 억세게 안아오는 도명의 팔 때문에 곤두선 도화의 가슴 근육이 더욱 팽팽해졌다. 도명이 꼬리뼈를 부르르 떨며 혀로 도화의 목덜미를 핥아댔다.
“내가 지금 당장 자신 있게 줄 수 있는 위안은 이런 겁니다. 포근하기는커녕, 하아, 원초적이고 야만적이죠. 그래도 날 사랑해요? 네?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어서.”
도명이 그의 페니스를 꽉 문 채 바짝 조여진 도화의 엉덩이를 손바닥을 밀착시키며 쓸어 올렸다.
“앗. 도명 씨, 사랑해요.”
도화가 밀려오는 흥분감에 발가락 끝을 경련하듯 움찔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도명은 도화의 입술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화의 구멍 안에 정액을 터뜨렸다. 도화의 안쪽은 도명의 페니스와 그의 정액으로 꽉꽉 들어찼다.
도명은 도화의 안에 정액을 터뜨리자마자 다시 흥분하기 위해 도화의 승모근을 늑대처럼 물어뜯었다. 도화의 살 냄새가 이 사이에서 진하게 퍼지자 도명이 부풀어서 흐물거리는 도화의 구멍 안에서 페니스의 크기를 다시 키웠다.
“흐아아아아… 흡. 흑. 아. 아……!”
도화의 엉덩이 사이로 도명의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도명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 뚝 흘리는 도화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사악하게 올리며 말했다.
“말해 봐요. 울보는 누구죠?”
도화가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팔뚝으로 쓱쓱 닦으며 말했다.
“저예요.”
그제야 도명은 만족한 듯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목줄을 풀어 줬다. 도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명이 우는 얼굴이 못생겼다고 한 것이 생각 난 것이다.
“얼굴을 왜 가려요?”
“우는 얼굴 못생겼다면서요.”
“손 치워요. 도화 씨 박히면서 우는 얼굴은 너무 예뻐요. 그 얼굴 보며 사정을 몇 번이나 했는지 압니까? 다른 우는 얼굴이 못생겼다는 뜻이었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섹스할 때 빼고는 웃었으면 좋겠다고요. 섹스할 때는 울리고 싶고 평소에는 웃게 하고 싶어요. 아, 예외 상황으로 내가 너무 좋아서 우는 건 좋고요.”
***
도명은 저녁으로 바게트를 간단한 수프에 찍어 먹고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찬장에서 손가락만 한 수제 초콜릿 하나를 꺼내 먹었다. 두 개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책상에 앉아서 도화에게 쓸 러브레터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도화에게서 잔업이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가 없는 저녁이 벌써부터 쓸쓸했지만 그래서 더욱 러브레터를 쓰기 좋은 저녁이었다.
한편 도화는 오늘 껄끄러운 상대와 식사를 하게 됐다. 하준이었다. 두 사람은 하준이 만들어 놓은 잔업 때문에 같이 저녁 식사를 해야만 했다.
언제나 잔 생각이 많은 하준이 퇴근 시간 직전, 내일 아침까지 보낼 중요한 파일 하나를 실수로 덮어씌우기 해서 난리가 났다. 사장은 그가 이번 건을 혼자 마무리 지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그를 도와 잔업을 할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도화는 주변의 분위기 같은 건 신경 안 쓰고 기계적으로 칼퇴근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사장이 가장 믿는 건 도화였다. 도화는 졸지에 잘못 없이 야근이란 걸 하게 된 것이다.
하준과 도화가 저녁으로 먹고 있는 것은 식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컵라면과 삼각 김밥이었다. 물론 전에는 그게 도화의 흔한 저녁 메뉴 중 하나긴 했다.
하지만 도명과 엮인 후 제대로 된 식사가 뭔지 알게 된 도화는 그것이 식사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뭐든 제대로 먹으려면 같이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터이고 테이블의 형태는 서로 마주 봐야 했다.
거기다가 제대로 된 식사는 먹는 시간뿐만 아니라 음식이 나오는 것까지 많이 걸렸다. 마땅히 할 것도 없이 불편한 상대와 텅 빈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삼각 김밥과 컵라면은 바로 음식을 손에 쥘 수 있고 딱히 마주 볼 필요도 없이 창밖만을 불 수 있는 최선의 식사 메뉴였다.
도화와 하준은 각자 음식을 골라 편의점 바 테이블에 섰다. 조금은 멍한 눈으로 어둠이 살짝 내려앉은 편의점 창밖만 쳐다보며 입만 오물거렸다.
“죄송합니다. 이 대리님.”
“네.”
도화가 짧게 답했다. 자기는 괜찮다느니 뭐니, 형식적인 말이라도 덧붙이면 대화가 탁구 경기처럼 왔다 갔다 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도화의 기대와는 달리 하준은 도화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원스럽게 라면 면발을 입안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도화와는 달리, 하준은 면을 이로 뚝 끊었다. 그리고 힐끗 도화를 쳐다보았다.
하준은 도화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서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그의 큰 키와 딱히 근육을 만들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골격부터 다부진 몸, 그리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무뚝뚝한 얼굴이 무서웠다.
하준은 도화가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서 강한 남자다움과 어떤 부당함을 느꼈다.
그의 군대 선임이 딱 도화 같았다. 무뚝뚝하고 타고난 몸이 좋았다. 그리고 언제나 하준을 사고만 치는 작은 생쥐 같다고 말하며 뒷목을 억세게 부여잡고 냉소를 지었었다.
하준의 군대 선임은 그를 세워 놓고 대놓고 큰소리로 폭언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남자로서 자존심을 군 복무 기간 내내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하준은 그 후 그의 선임과 비슷한 인상의 남자만 보면 기가 죽고 지나치게 의식했다. 그냥 그 존재만으로 커다랗고 투명한 손바닥이 그의 뒷목을 내리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회사 내에서 도화는 언제나 깔끔한 일 처리를 해서 사장이 좋아했다. 하준을 쳐다보는 사장의 표정과 도화를 쳐다보는 사장의 표정 자체가 다르다고 느꼈다.
사장이 하준을 쳐다볼 때면 일단 혀를 찰 준비부터 할 것 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회사에서 잘릴 것 같은 기분으로 출근하곤 했다. 그래서 더욱 위축되고 주변을 지나치게 신경 쓴 나머지 하지 않을 실수까지 하곤 했다.
하준은 심지어 꿈속에서 사장의 신뢰를 받는 도화가 사장과 자신을 험담하는 꿈까지 꿨다.
하준은 그 전에는 도화와 일 외에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요즘 도화가 일하는 기계가 아닌 사람 같은 표정을 들키곤 하니까 사적이고 예민한 말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대리님, 저 싫어하죠?”
갑자기 터져 나온 하준의 말에 도화가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회사 사람들과 마음의 거리를 두고 살았던 탓에 도화는 싫어하는 마음 같은 것도 없었다. 지극히 간단한 관계였다.
돈을 벌기 위해 같이 일을 하고 집에 가는 길에 불가피하게 느꼈던 감정까지 리셋시키는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건 하준 씨 아닙니까? 나 참, 내가 뭐 한 것도 없이 말입니다.”
도화는 새삼 하준이 사장에게 도화도 회식에 참가해야 한다고 말한 사건이 생각났다. 딱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 후 성가셔진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일하면서 하준에게 딱히 감정을 실은 적은 없었다.
“……항상 저를 무시하시잖아요.”
“그거, 하준 씨 자격지심 아닙니까?”
“자격지심이요?”
하준이 도화의 단어 선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곱씹었다.
“아닙니까? 내가 딱히 하준 씨한테 뭐라 한 적 있습니까? 저는 그냥 회사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하준 씨는 가만히 박혀 있는 돌을 상대로 혼자 이런저런 감정에 빠진 겁니다. 그렇게 머릿속에 쓸데없는 잔 생각이 많으니 그런 실수나 하는 거 아닙니까?”
“딱히 뭐라 안 하시지만 그 특유의 싸늘한 눈초리로 저를 내려다보잖아요.”
“제가 하준 씨한테만 거리 두지는 않잖아요. 다들 뒷이야기 한두 번씩은 꼭 했을 텐데요. 그리고 내려다보는 건 단순히 제가 키가 커서고요. 걱정 말아요. 평균 신장 이상이니 하준 씨뿐만 아니라 내려다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신장 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자격지심이라는 겁니다. 전 하준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이런저런 생각 하며 나쁜 감정 키우지 말아요. 그거 빠르게 퍼지는 독이니까.”
도화가 라면 국물을 들이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 하며 나쁜 감정 키우지 말라는 건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그 후 진영에게 연락을 안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속 망상과 함께 두려움도 커지고 있었다.
“자료 복구해야 하니까 빨리 들어갑시다.”
“이 대리님은 왜 사람들을 무시합니까?”
“무시가 아니라 무서워하는 겁니다.”
“네?”
“하아, 하준 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퇴근 좀 합시다. 전 절대 야근 체질은 아니니까요.”
***
도명은 러브레터를 쓰다가 결국 펜을 놓아 버렸다. 가게 안에서 러브레터 쓰는 것은 아무래도 안이 너무 넓어서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사실 문제는 공간 탓이 아니었지만, 도명은 가게 불을 끄고 지하실 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작업용 바 테이블에 앉아서 거의 완성한 문장을 다듬었다.
러브레터 마감까지 2일이 남았다. 내일이면 적당한 색의 리본을 달고 향수를 뿌린 후 도화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도명은 다시 지금까지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나쁘지 않은 정도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도명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음, 나쁘지는 않네요.’
차라리 호불호가 확 갈리는 걸 참지, 그저 그런 상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상태로 치면 0, 이었다. 도명은 지금까지 백지를 작성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명은 상대방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하는 건 만든 적이 거의 없었다.
문장 구성은 깔끔했으며 말하고자 하는 것도 조목조목 잘 정리되어 있었다. 심심하다 싶으면 적당히 인문학적 지식을 발휘해서 아름다운 미사여구도 섞었다.
도명은 뭐가 문제일까를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원재료가 그저 그러니 다듬는다고 좋아질 건 없어 보였다.
도명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제를 깨달았다. 도화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게 문제였다.
도명의 마음 안에는 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구석도 있었고, 강하지 않아서 우아하지 않은 점도 많았다. 고결하고 우아하기 위해서는 그 밑바닥에 결연한 강함이 뿌리처럼 깔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곱씹어 볼수록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견고해지지 못해서 물렁물렁하고 출렁거리기까지 한 밑바닥을 드러내는 건 수치스러웠다.
결국 멋있지 않은 부분들을 빼고 나니 도명이 쓴 러브레터에는 진심만 골라 빠진 채 대가들이 적어놓은 멋들어진 문장들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조악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도명이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글이었다. 알맹이는 없고 내가 얼마나 아는 것이 많은지 잘난 척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었다. 주로 도명의 회사에서 신입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였다.
그들은 이런 식의 글을 써놓고 대표가 어서 그의 식견에 감탄하기를 바라며 기대에 찬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자신이 딱 그 수준이라니. 도명은 수치심에 손바닥에 축축해졌다. 도명은 자신이 밤마다 정성 들여 쓴 글을 찢었다. 찢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맥이 탁 빠졌다. 이런 어려운 과제를 내 주고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도화가 너무 얄미웠다.
도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문제점을 알게 됐지만 그 처방전이 마음이 안 들었다. 그놈의 돔 근성은 쉽사리 버려지지 않았다. 솔직히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도명의 돔 근성은 즐거움이자 그의 이상향이었다. 그런데 러브레터를 쓸수록 그의 이상향이 어수룩함을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깨달았다. 진심을 담았다가는 러브레터가 아니라 반성문을 제출하게 생겼다. 그러니 환부 도려내듯 그의 진심만 골라잡아 문장을 도려낼 수밖에.
문제점을 알고도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을 때만큼 가슴 답답해지는 건 없었다.
이럴 때 도도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요즘 꿈속에서 도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요즘 그런 종류의 꿈을 안 꾸는 것은 아니었다. 도명은 밤마다 도도의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그곳의 풍경은 언제나 변한 것이 없었다.
창밖에는 언제나 노을이 지고 있고, 가구며, 벽이며, 심지어 도명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커다랗고 촌스러운 토네이도 사진마저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그곳에 도도도 없고 알게 모르게 상담실 안을 날아다니던 하얀 나비도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도명은 언제나 도도의 상담실에 혼자 남아 고독을 어금니 사이에 집어넣고 잘게 부셨다. 그러고도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 때면 도도의 떨어진 털들을 유리병에 담아 모았다.
반려동물은 계절은 안 가리고 털들을 뿜어낸다. 계절을 가린다면 유난히 털들을 많이 뿜어내는 기간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도도의 털마저도 날이 갈수록 찾기 어려워졌다.
도도의 흔적을 담은 유리병 안이 가득 찰수록 공간은 더욱 적막해지고, 방을 구성하는 콘크리트라든지 돌, 나무 같은 질량은 덧없어졌다.
어차피 꿈속이라서 질량이랄 것도 없었지만 도도가 이곳에 있었을 때는 방 안을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질량을 세심하게 느꼈었다. 안락의자 등받이의 포근함.
나무로 만든 의자 팔걸이의 견고하면서 따뜻한 질감. 문고리를 잡을 때 느껴지는 금속의 뼛속까지 차가운 느낌 같은 것들 말이다.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뇌의 해석이다. 도명처럼 예민하고 세심한 남자는 꿈속에서조차 질감, 노을이 지는 창 밖의 온도까지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감각이 연기가 되어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 텅 비어 있다는 감각이 우세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도명은 이곳에 도도 없이 혼자 남겨지는 것이 도도의 두 번째 처방전임을 알았다. 도도의 목줄을 놓은 그 순간은 정말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내심 그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 가슴에 멍울이 지도록 울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거울을 경계로 두 개의 방을 만든다. 거울 건너편 방에서는 도명이 도도가 다음 처방전을 들고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도도가 없는 그 상담실이 고독했고, 그 모든 것이 익숙해질 것 같으면 어느새 낯선 얼굴로 다가왔다. 거울 건너편에서 도도를 기다리는 또 다른 도명 때문이었다.
러브레터, 마감 이틀 전, 결국 도명은 처음 제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이 허무하고 화나는 감각이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도명은 다시 시작할 엄두를 못 내고 그렇지 않아도 깨끗한 방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더욱 가지런히 놓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리고 더 이상 청소할 것이 없어졌을 때 다시. 빈 편지지가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 하기 싫다.’
도명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팔짱을 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싫은 감정이 올라오니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즐거운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도화를 상상했다.
도명의 머릿속에서 도화가 백구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하체에는 달랑 브리프 한 장만 입고 있었는데 그 브리프는 도명의 것이었다. 도화가 짧아서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화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 사뿐한 눈처럼 내려앉았다. 그 관리 안 하는 투박한 손가락이 그런 요망한 몸짓으로 건반 위에 내려앉을 수 있다는 건 삶의 즐거운 반전 중 하나일 것이다. 도화가 떨리는 듯 손가락 끝을 파르르 떨었다.
도화의 눈동자가 도명의 시선을 의식한 듯 흘깃 그를 보았다. 도화의 눈동자가 강가 표면의 물비늘처럼 반짝거리며 우수에 젖었다. 도화는 도명과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듯 급하게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뜨거워진 도화의 눈빛이 건반 끝에 고였다. 도화의 손가락이 움직여 만드는 달콤한 음률이 도명의 고막에 꿀처럼 고였다.
상상을 마친 도명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역시 피아노가 집 안에 있어야 했다! 도명은 핸드폰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하다가 이내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아, 도화 씨가 사지 말라고 했는데.’
도명이 괴로운 듯 얼굴을 쓸어 넘겼다. 하지만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도명이 어떻게 피아노를 구해야 도화가 괜찮다고 할지를 고민했다. 문제는 가격이니까 적당히 싼 피아노를 사야 하나.
하지만 도명의 집 안에는 싸구려 물건이 없었다. 모두 가격이 비싼 물건인 건 아니지만 가치가 없는 물건은 없었다. 그저 그런 물건이 집 안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사양이었다.
특히 피아노같이 정교한 물건을 적당히 싼 가격에 사다니. 역시 가격 때문에 가치를 타협하는 건 말도 안 됐다.
도명은 고민을 하다가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 도명의 어머니가 어린 도명을 옆에 앉히고 피아노를 같이 치던 것이 생각났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그녀의 집에서 가져온 피아노였다.
오래되었지만 잘 만들어진 그 피아노는 음색도 맑았고 디자인도 클래식했다. 신식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오래도록 가치 있을 디자인이었다.
도명이 어릴 때는 거실 한구석에 그 피아노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피아노는 창고에 처박히게 되었다. 어린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거실은 더 많은 물건들로 가득 차게 됐고, 두 아이를 키우게 된 어머니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여유가 없어졌다.
아이들이 제법 자란 후에도 한 번 창고에 들어간 피아노는 평생 유배되듯이 거실로 나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었고 그 시간 속에서 피아노는 잊혔다.
도명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도명아, 잘 지냈니? 네가 그러고 간 후 엄마는 네 생각을 많이 했단다.”
“네. 잘 지내요.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어머니, 설마 그 피아노 버렸어요?”
“응?”
“어머니가 시집올 때 외가에서 가져온 그 피아노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버리니? 외할머니가 준 건데.”
“그 피아노 아직 집 창고에 있죠?”
“그렇지.”
“어머니, 절 사랑하세요?”
“난 널 언제나 사랑한단다.”
‘거짓말. 아무리 가족이라도 언제나 완벽히 사랑할 수는 없잖아요. 물론 사랑도 했겠지만 미워한 시간도 사랑한 시간만큼 만만치 않았잖아요.’
“그럼, 그거 저 주세요.”
“뭐? 아니, 나야. 이제 안 치니까 문제는 없는데.”
“그럼 됐네요. 지금 집으로 갈게요.”
“뭐? 아니. 지금?”
“네. 아직도 제법 쓸 만한지 확인하려고요.”
“아니, 근데 지금은.”
수화기 너머로 곤란해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도명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피아노가 아직까지 쓸 만한지 밤새 상상하기 싫었다. 생각 난 김에 지금 당장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지금 가요. 말 그대로 피아노만 보러 가는 거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저. 저기. 도명아!”
도명은 전화를 끊고 외투를 챙겨 입었다. 도명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왔다. 도명이 차 키를 집어 든 후 차 키 고리를 집게손가락에 걸고 돌렸다.
도명이 차에 타고 시동을 걸기 전 도화에게 문자를 보냈다. 도화가 야근을 끝낸 후 집에 도착했을 때 도명이 없는 걸 보고 궁금해할 것 같아서였다.
[도화 씨 저 중요한 일 좀 처리하고 올 테니까, 돌아왔을 때 저 없어도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
***
하준과 같이 그가 친 사고를 수습하고 있던 도화가 도명에게서 문자가 오자 미간을 구겼다. 당장 확인하고 싶은데 일하는 중에는 웬만하면 개인적인 문자 확인 같은 건 안 하는 주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 집에 있을 시간이라고! 이번은 예외야. 예외라고. 궁금해서 더 집중을 못 하겠어.’
“하준 씨 잠시만요.”
[도화 씨 저 중요한 일 좀 처리하고 올 테니까, 돌아왔을 때 저 없어도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
도화는 도명의 중요한 일이라는 말에 더 궁금해졌다.
[도명 씨도 이 시간에 회사일 하러 가요?]
[저는 이 시간에도 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회사 일은 아니에요.]
[아 그럼요? 아, 개인적인 일이면 너무 캐물으면 안 되나요?]
[전 도화 씨 개인적인 일도 캐물을 건데 제가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따질 거잖아요. 본가에 갑니다.]
[아 본가에요? 도명 씨도 식구들하고 잘 안 만나잖아요. 나쁜 일은 아니죠?]
[걱정 말아요. 좋은 일로 가는 거니까. 아주 설레는 일입니다.]
[아, 화해했어요? 가족 모임 가는 거예요?]
[화해는 일단은 싸운 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족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요.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만약 도화 씨가 궁금하면 말해 줄게요. 전 이제 운전하니까. 바로 연락 못 줍니다.]
[네. 운전 조심하세요.]
[도화 씨는 집에 올 때 차 조심하고요.]
[네. 차 조심할게요. 신호등 건널 때 손도 들고요.]
[착하네요.]
[그럼요, 착해요.]
[쭉 착하기만 했으면 좋겠네요.]
[저도 도명 씨가 쭉 다정하기만 했으면 좋겠네요.]
[침대 위에서도요?]
운전해야 해서 답을 바로 못 준다는 도명은 아직 출발도 못 한 채 도화와 문자 삼매경이었다.
[아, 그건 그날 콘셉트에 따라 달라요.]
[아 그래요? 이번 달 월세 입금 안 해 보든가요. 우리 한번 돈 때문에 야한 의미로 갈 데까지 가 봅시다.]
도화는 편의점에서 밥 먹고 잊어버릴까 봐 월세를 바로 입금한 걸 후회했다.
[이미 입금했어요.]
[저런, 침대에서 다정하게 안아 줄 수밖에 없겠네요.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이마에다가 잘 자라고 뽀뽀도 해 주고 말입니다.]
도명은 단순히 볼일 보러 나간다고 하려고 문자를 보낸 거였고 도화는 업무 중이니 최대한 간단하게 대화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 사소한 이유로 문자를 보내도 이렇게 말이 길어졌다.
도화가 일하다가 갑자기 혼자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얼굴을 붉히며 문자를 하니까, 하준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화가 얼굴을 순식간에 굳히고 미간을 찌푸리며 하준을 향해 말했다.
“일 안 하고 뭐 합니까?”
“아. 그게, 이 대리님이 확인해 주셔야 다음 작업을 할 수 있어서요. 그런데, 애인하고 문자 중이신데 방해하면 화내실 것 같아서요.”
“그런 이유로 화내지는 않아요. 일이 우선이죠.”
“저, 이 대리님 애인, 어떤 타입입니까?”
“하준 씨, 지금 일하는 중이잖아요.”
“다들 궁금해해요. 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감정 없고 얼음 같은 이 대리님을 허구한 날 울리는지 말입니다.”
도화는 민망함에 주먹을 꽉 쥐고 괜히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운 거 아니라고 해 봤자 아침이 돼도 퉁퉁 부은 눈이 펑펑 울었다고 말해 주니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도화는 정말 회사 사람들이 개인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서로 말 많은 게 질색이었다.
그들은 도화 일만 가지고 관심이 많은 게 아니라 서로의 개인사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오랫동안 업데이트 안 되다가 최근에 업데이트가 조금씩 되고 있는 도화의 개인사는 최고로 뜨거운 화젯거리였지만.
“귀여운 타입이에요? 아니면 청순해요? 아니면 치명적인 타입이에요?”
‘아주 치명적이지. 치명적일 정도로 잘생기고, 야하고, 성격 나쁜 와중에 다정할 땐 엄청 다정하고.’
“하준 씨 일 이야기만 합시다. 하준 씨 두고 가기 전에 말입니다.”
***
도명이 부모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정년을 바로 코앞에 둔 점잖은 두 부부가 살고 있다고 하기엔 현관문 앞에 서자마자 묘하게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도명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난감해하는 얼굴로 그의 어머니가 나왔다. 도명이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씩 웃었다. 도명의 살가운 표정에도 어머니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운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전화를 안 받니?”
“운전 중이었잖아요. 운전 중 통화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 그러시네요. 가족 모임 있나 봐요.”
현관문이 열리자 작게 들리던 목소리들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목소리의 한 가운데 도희가 있었다. 이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애교 많고 성격 밝은 도희가 만든 게 분명했다.
도명은 그동안 그들이 자신만 빼놓고 얼마나 많이 가족 놀이를 했는지에 대해서 상상했다. 자신이 빠지니 오히려 완벽해진 것 같아서 심술이 두드러기처럼 일어났다.
“아, 응. 도희하고 도희 신랑이 왔지.”
어머니가 괜히 자신의 팔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제 알았으면 눈치껏 가 줬으면 좋겠다는 태도였다.
“저는 창고에서 피아노 상태만 보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까 전화로 말했잖아요.”
도명이 문 사이에 발을 슬쩍 껴 넣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도명을 문전박대까진 할 수는 없는지 현관문에서 뒤로 물러났다. 도명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아, 저 거짓말 잘하는 거 아시죠? 적당히 분위기 맞추면서 말입니다.”
도명의 말에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졌다. 도희 부부에게는 외국 가서 사업하고 있는 걸로 돼 있는 도명이었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대해서 도명이 알아서 에둘러 댈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도명은 또 그런 걸 능숙하게 잘하곤 했으니까 묘한 믿음도 갔다.
“그런데, 잘하는 것도 물릴 때가 있어요.”
도명이 현관 앞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안 좋은 예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도명이 볼 일이 있는 창고는 식구들이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는 거실을 지나쳐야 했다. 어머니가 도명이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도명은 이미 성큼성큼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
“어? 오빠! 웬일이야!”
도희가 도명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란 후에 반갑다는 듯이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형님. 워낙 잘 나가시는 분이라 이제야 얼굴을 제대로 보네요. 저번에 결혼식장에 오셨을 때 제대로 못 봐서 아쉬웠습니다.”
곰 같은 인상의 도희 남편이 도명을 향해 살가운 척하려고 애쓰며 인사를 했다. 도명은 그를 탐색하듯 쳐다보며 그가 내미는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미 결혼을 하긴 했지만 어떤 놈이 내 귀한 여동생을 데리고 갔는지 쳐다보는 전형적인 오빠의 표정이었다.
“오늘 우리 온다고 해서 왔구나. 오빠가 이렇게 다정하다니까. 오빠가 여기 오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비싼 비행기 푯값에 시차 적응도 해야 했을 텐데.”
“비행기는 무슨, 그냥 차 타고 왔지.”
“아니 한국 들어올 때 말이야.”
“쭉 한국이었어. 해외 출장 직원들한테 맡긴 지가 언젠데.”
“아니, 회사 자체가 캐나다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오빠도 거기서 살잖아.”
도희의 말에 도명이 푸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거짓말이 들킬까 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부모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도명은 도희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캐나다는 무슨.”
“응?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었어?”
“잘 생각해 봐. 왜 그랬겠어. 그나저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다른 볼일 때문에 온 거거든.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어요.”
도명이 도희의 남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명이 적당히 인사치레를 한 후 발걸음을 창고로 옮겼다. 도명의 부모님은 아파트는 너무 빡빡해서 살기 싫다며 자식들이 다 크면 전원주택으로 이사 갈 거라고 말하시곤 했지만 이제는 관리가 편한 이곳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아파트의 평면은 뻔했다. 모든 공간이 용도별로 잘게 분할되어 있었다. 창고라고 해 봤자 거실 옆에 딸린 방을 창고로 쓰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들과 도명 사이에는 오직 벽 하나뿐이었다.
그 탓에 느닷없는 도명의 등장과 그가 던진 의미심장한 진실 한 덩어리가 만든 파동의 여파가 가족들 사이를 훑고 지나간 것이 도명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도명의 눈길은 오직 피아노만 집요하게 찾고 있었다.
도명이 창고의 가장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발견했다. 피아노 위에 온갖 잡동사니를 담은 상자들이 쌓여 있어서 한 번에 찾기 힘들었다. 도명은 상자들을 내려놓고 피아노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도명의 기억 속보다 훨씬 작았다. 소담한 크기에 견고한 나무 몸체를 가진 피아노였다.
도명은 피아노 건반을 두들겨 보았다. 아직 소리가 맑고 건반을 내리누를 때 느낌도 좋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몸체의 갈라짐이나 뒤틀림도 없어 보였다.
도명은 피아노 안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양모와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해머. 황동 소재의 아그라프. 곧고 세밀한 밀도를 가진 나무로 만들어진 향판 등이 만족스러웠다. 조율은 사람을 불러서 다시 해 봐야겠지만 명품은 역시 오래되어도 명품이었다.
다만 피아노가 훌륭한 것에 비해서 관리가 엉망이라는 것이 도명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단번에 식별할 수 있는 비싼 로고가 있어야만 명품인 걸 알아보는 것에 탄식이 나왔다. 도명은 피아노 건반을 훑으며 혼잣말을 했다.
“집에 가자.”
도명은 오랫동안 피아노를 안 쳐서 긴장된 표정으로 먼지가 내려앉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려앉은 건반이 차가웠다. 도명은 악보를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머리는 너무 오랫동안 안 쓴 정보에 대해서는 이미 폐기 처분을 한 모양이었다. 도명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일단 손가락을 움직여 연주를 시작하기나 해 보자고 생각했다.
머리는 잊은 걸 손가락은 기억했다. 예전에 수백 번을 쳐 본 ‘last carnival’이었다. 도명이 중 3이 끝나가는 무렵, 친구들과 영화관에서 본 영화 속 악당이 치던 음악이었다.
도명이 먼지가 내려앉은 건반을 두들길 때마다 희뿌연 먼지가 부유했다. 지금 도명이 앉은 곳은 예전에 그가 쓰던 방이었다.
20살이 되자마자 감정상의 이유로 독립하게 된 도명의 방엔 그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 쓰지만 버리자니 좀 그렇거나, 밖에 내놓기엔 지저분한 것, 계절이 돌아오면 꺼내는 물건들 같은 것이 가득 쌓여 있었다.
하지만 도명은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째서인지 섭섭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래된 이불의 먼지를 터는 느낌이었다.
도명이 더듬더듬 연주를 하는데, 도희가 와서 도명의 고막을 거칠게 두들겼다.
“왜 우리와 멀어진 거야? 엄마, 아빠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말 안 해 주잖아. 오빠라도 말해 봐.”
도명은 분위기 타는 데 방해되니 도희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
“별거 아니야. 도희야.”
어머니가 와서 도명을 추궁하는 도희를 뜯어말렸다.
“왜 우리하고 거리를 뒀냐고!”
도희의 기분이 격양되어 있었다. 도희의 표정엔 배신감이 지독하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껏 너 혼자서 화목한 가족 놀이하며 가족의 모든 걸 독점했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 건데?’
도명은 도희가 왜 그렇게까지 화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격앙된 도희의 기분에 점잖은 어머니의 기분도 격양되어 갔다.
“도명이 넌, 이 난리를 만들어 놓고 그놈의 피아노가 문제니!”
어머니의 말에 도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뗐다. 도저히 이 분위기에서 오래된 기억까지 더듬어 가며 연주할 수는 없었다. 도명의 흥도 깨져 버렸고 고막도 얼얼했다.
“네. 피아노가 문제죠. 지금 저에게 이 피아노가 제일 중요해요.”
“이게 왜 중요한데?”
공사장 잔해처럼 흩어지려는 인내심을 애써 모으는 어머니의 잘 다듬어진 손톱 끝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전에 제가 사랑에 빠졌다고 했죠. 결국 그 사람과 잘 됐어요.”
“오빠 애인 생겼어?”
“그래.”
도명이 도희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 내 사람을 자랑하고 싶다는 심정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리워져 얼굴이 반짝거렸다.
“어머니, 들어 보세요. 도화 씨와 전 아주 다른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랑에 빠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똑같은 점이 거의 없다 보니까, 아쉽기도 해요. 어떤 면에서는 완벽하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도화 씨와 저의 비슷한 점을 발견했어요. 둘 다 피아노를 쳐요. 아마 실력도 비슷비슷할 거예요. 좋아하는 곡 한, 두 곡만 능숙하게 치는 정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이 순간 이 피아노가 제일 중요해요. 절 사랑한다고 했죠? 이거 저 주세요. 여기 있는 것보다 더 사랑받을 거예요.”
“어떤 여자냐?”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집 안 분위기에 참다못한 아버지도 태풍의 눈인 도명을 향해 질문했다. 도명은 지금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우스웠다. 저 희망찬 얼굴이라니.
고작 일그러진 거짓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서 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서 내뱉은 말이 저런 우스꽝스러운 말이라니. 모든 것이 블랙 코미디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집 안에서 자신의 동성애에 대해서 한 번도 내뱉지 않은 도명이었기에, 이렇게 모두가 있는 와중에 당당하게 연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성향을 고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기 자식을 이렇게 모를까.
“아버지. 저 유도명이에요. 제가 사랑에 빠진다면 남자겠죠. 그런 웃긴 질문이 어디 있어요.”
도명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도명의 말에 집 안에 싸늘한 정적이 휩싸였다. 도희의 배우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이 집안의 가족이 된 남자는 도명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도명의 부모님은 그에게 민망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저런 놈하고 왜 계속 연락하며 지냈던 거야! 이러니 이런 망신을 당하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힐난했다.
“자식인데 그럼 아주 연을 끊어요?! 도명이가 당신의 트로피일 때는 밖에서 아주 입에 달고 살더니! 뜻대로 안 된다고 이제 내 자식이 아니에요? 당신은 언제나 편리해서 좋겠어요! 평생을 그래왔으니 얼마나 편했겠어.”
“설마 오빠 쫓겨난 거야? 그래서 국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해외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된 거냐고! 나한테 가족들이 숨기고 있는 게 이거였어?”
“도희야, 너도 알아서 좋을 게 없었잖아. 아빠는 가족의 힘든 비밀로부터 널 지켜 준 거야. 이것 봐. 굳이 몰라도 될 걸 알아서 너도 지금 힘들어하고 있잖니. 네 남편한테도 네가 얼마나 곤란해졌어.”
아버지가 경악하는 도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도희는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쳤다. 도희는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손을 부산스럽게 흔들어댔다.
“가족들 중 오빠랑 가장 많이 시간 보낸 사람은 나였어요. 오빠가 특별하단 걸 왜 모르겠어요. 내가 지금 힘든 건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이. 집! 이 집이 날 힘들게 한단 말이야.”
“도희야. 그게 무슨 소리야.”
“소름 돋잖아! 조금이라도 이상적이지 않으면 안 보이는 구석으로 치워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이 집안이 숨 막힌단 말이야. 오빠도 그래.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한테까지 말 안 하고 고작 그런 이유로 우리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나 혼자 이 집에서 어떻게 하라고. 난 오빠한테 내 속마음 다 말했었는데. 오빠마저 나한테 이러면 어떡해.”
도희가 도명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내가 너한테 말하면 내가 두 분에게 더 미움받잖아.”
“그게 이유였어?”
“그래. 적어도 그때 당시엔 그랬지.”
“그때 당시엔? 지금은?”
“날 미워하든 말든.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그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피아노야. 어머니, 조금이라도 날 사랑하면 이 피아노를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으로 보내 줘요. 내일 사람 보낼게요. 그냥 그 사람들 들어오게 문만 열어 주시면 돼요. 어려운 건 하나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도명아. 너 이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잖니?”
어머니가 도명을 향해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뻔뻔한 게 아니라. 솔직한 거죠. 이 집안에서 처음으로 말입니다.”
그녀의 애원에도 도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가 이러고도 계속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아버지가 도명을 향해 낮은 어조로 말했다. 그가 누군가에게 경고할 때의 목소리가 도명이 누군가에게 경고할 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애석하게도 이럴 때 가족은 가족이라고 느꼈다.
“이게 나예요. 어디 사랑할 수 있으면 사랑해 봐요.”
자기 볼 일을 다 본 도명이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다. 치고 있던 곡을 끝까지 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지만 굳이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 하나 싶었다. 도명은 그저 아쉬운 입맛만 다셨다.
도명이 매제의 옆을 스쳤다. 그리고 여전히 긴장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나한테 가족 흉내 낼 필요 없습니다. 흉내 낸들 나는 다 아니까.”
도명이 그렇게 말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사라졌다. 가족들한테서 좋은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명이 가고 난 후 아니나 다를까. 집 안에는 고성이 오갔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가족의 그림은 어느새 서로 동물 소리를 내며 꽥꽥대고 있었다.
도명은 간만에 진짜 악당이 된 것 같았다. 처음 SM을 했을 때 느꼈던 그 해방감이 그의 온몸을 휘돌았다. 도명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머릿속에 울리는 피아노곡을 입으로 내었다.
도명은 차에 탄 후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크게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자꾸 얼빠진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났다. 너무 통쾌하고 웃겨서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
저녁 10시경, 도화가 이빨을 닦고 있을 때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가 칫솔을 입에 문 채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자기야.”
“아. 도명 씨구나.”
도화는 입안에 든 치약 거품을 급하게 개수대에 뱉고 입을 헹궜다. 급하게 하는 바람에 도화의 입가에는 치약 거품이 묻어 있었다. 도화는 입안에 치약 맛이 너무 진하게 나서 찝찝했다. 하지만 도명이 밖에서 자기야, 라고 달콤하게 부르는데 오래 기다리게 하기 싫었다.
도화가 현관문을 열자 도명이 배시시 웃으며 그를 안았다. 도화의 입가에 묻은 치약 거품이 도명의 셔츠에 묻었다. 하지만 도명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이러면 반칙인데. 너무 위험하잖아.’
도화는 입가에 치약 거품을 묻힌 채 녹아내리는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일이 잘 해결되었나 봐요.”
“뭐, 기다려 봐야겠지만 기대되네요.”
“도명 씨 기분 좋아 보여요.”
“네.”
“좋은 일이 잔뜩 있었나 보네요.”
“엄연히 말하면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집에 왔으니까, 기분이 좋은 겁니다.”
“여긴 도명 씨 집이 아닌, 아. 네 도명 씨 집이네요. 저는 빌린 거고.”
“이 건물이 제 건물이 아니더라도 여기가 내 집이에요.”
도명이 도화가 눈치가 없다는 듯이 그의 뺨을 잡고 늘리며 속삭였다. 도화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 사이 도명이 사뿐한 걸음으로 그의 집 거실 겸 주방에 들어섰다.
“도화 씨 춤 잘 춰요?”
“아니요.”
“저런. 그래도 춤춰요.”
도명이 핸드폰으로 아까 피아노로 치던 곡을 켠 후 도화의 두 손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아, 진짜 추게요? 저 진짜 못 춰요.”
“저도 춤 못 춥니다. 그냥 술 취했다 생각하고 해 봐요.”
“도명 씨는 다른 의미로 진짜 술 취한 것 같네요. 음.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중요한 일이란 게 뭐였는데요?”
도화가 도명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그때 도명이 도화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고 핸드폰으로 조악하게 올리는 음성에 맞춰서 발을 폴짝거렸다.
“아, 진짜 춤추는 거예요? 이 달밤에?”
“네!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둘만 있는데.”
“그건 그렇죠.”
도화 역시 조심스럽게 발꿈치를 올리며 도명을 따라 하나둘 발걸음을 옮기며 박자를 맞췄다. 두 사람은 가볍게 춤을 추면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눴다.
“저를 봐서 기분 좋은 것치고도 유난히 좋은데요? 진짜 무슨 일인데요?”
“흠, 도화 씨는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저는 오늘 진짜 악마적인 이유로 기분이 좋은 거라서요. 도화 씨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혼날 것 같은데요?”
“제가 이제 와서 도명 씨 성격 나쁘다고 실망할 레벨로 보여요? 아. 그나저나 진짜 이상하다. 다 큰 남자 둘이서 부둥켜안고 이러는 거요.”
도화는 어느새 도명에게 안겨 박자에 맞춰서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투덜거렸다.
“나랑 춤추는 게 싫습니까?”
“아니요. 그건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그만 투덜대요. 일부러 발 밟기 전에.”
“어쨌든 악마적인 이유로 기분 좋은 게 뭔데요?”
“춤추면서 말하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까 일단은 비유적으로 말할게요. 나만 일부러 빼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매년 그래왔던 것 같아요. 초대장이 안 오니까 얼마나 괜찮은 축제이고,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따금 그 축제는 어떨까 하고 상상하는 거죠. 무려 10년이 넘게 말입니다. 하나 확실한 건 언제나 그걸 망치고 싶었다는 거죠. 나만 쏙 빼 버렸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미움받아 버려서 영원히 그 축제에 못 갈까 봐 난 그 축제에 관심 없는 척했어요. 그런데 오늘 비로소 그 축제를 망쳐 버렸어요. 아주 제대로 말이에요.”
도명이 가볍게 춤추다가 도화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송곳니까지 드러날 정도로 입꼬리를 쭉 올렸다.
“그래서 기분 좋아요. 날 혼낼 겁니까?”
“아니요. 도명 씨 빼고 노는 사람들이 잘못했어요. 잘했어요.”
도화가 도명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정말요?”
도명이 자신의 엉덩이를 잔망스럽게 두들기다가 은근슬쩍 쓰다듬는 엉큼한 백구의 손을 입 앞으로 가져가며 환하게 웃었다.
“네.”
“돌아갈 집이 있으니까 다 터뜨리고 왔습니다. 남자를 사랑하고 성격 나쁜 게 바로 유도명이니까, 이래도 사랑하든지 말든지 알아서들 하라고요. 도화 씨는 날 사랑해요?”
“그만 물어요. 다 알면서.”
도화가 쑥스러운 듯 볼을 붉히며 말했다.
“물고기 나오는 애니메이션 알아요? 시간이 아주 조금만 지나도 기억을 다 잃어버리는 물고기 캐릭터가 있어요. 사랑에 관해서 제가 그 물고기 같다고 생각하고 다뤄 줘요. 날 사랑해요?”
“네! 네!”
***
도화는 월차를 쓰고도 습관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났다. 도화는 집 앞에 나온 것치고는 제법 멀쑥하게 차려입고 도명의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도명은 아침부터 전화통화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명은 전화통화를 하다가 가게 유리를 사이로 도화와 얼굴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미간을 살짝 구기며 업무 통화에 열중했다.
도명의 잡지 주 고객층이 아무래도 한정적이다 보니까, 최근에는 북미나 유럽의 영어권 나라로 고객층을 확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밑 작업을 준비하는데 평소보다 여러모로 바빴다.
회의 끝에 고객층을 확장한다고 지나치게 대중적인 이미지로 가다간 기존의 콘크리트 고객들에게 실망감을 주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미 여러 번의 해외 포럼에서 신중하게 가능성을 확인했고 시장조사도 끝낸 후였다. 그래서 잡지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 줄 팀이 필요했다.
오늘은 새 직원들을 뽑아야 했다. 단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영문판의 퀄리티를 떨어뜨릴 수 없기에 미묘하고 복잡한 언어의 맛을 아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도명은 급한 업무 통화가 끝난 후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빨리 처리해야겠다는 듯이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피아노를 언제 이쪽으로 옮길지에 대해서 의논했다.
“네. 내일이요, 음. 내일은 저도 집에 있으니까 좋아요. 네. 네.”
도명은 통화에 집중하면서도 도화에게 먹일 모닝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아. 네 조금 시끄럽죠. 커피 내리느라.”
도명은 여전히 전화기를 부여잡고 도화가 좋아하는 비율로 커피에 설탕을 넣고 간단한 빵을 오븐에 데우고 계란 프라이를 했다.
도화는 바빠 보이는데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지만 도명은 눈짓으로 단호하게 테이블에 앉으라고 했다. 도명은 간단한 통화가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통화 내용이 길어졌다.
“뭘 그렇게 애쓰세요. 어머니가 애쓰더라도 그분 고집은 평생 못 꺾어요. 호적에서 저를 파든, 어차피 상관은 없어요. 아버지도 참 순진하시네요. 제가 유산 못 받을까 봐 무서워서 아버지 고집대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성향이라는 게 제가 원해도 바뀌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유산을 도희 앞으로 다 옮기시든지 말든지요. 그나저나 두 분이 유산이니 뭐니 이야기하기엔 아직 너무 정정한 거 아니에요? 아버지도 참, 순진한 것과 동시에 절박하신가 보네. 벌써부터 유산 카드 들고나오시고. 나이가 들면 오히려 그렇게 되나? 그나저나 아버지하고 저하고 조만간 누가 더 재산이 많은지 재 보기나 했으면 좋겠네요. 저한테나 나중에 부양이니 뭐니 하며 거한 용돈이나 바라지 말라 그러세요. 호적에서 빠져나가면 점점 홀가분해지는 건 이쪽이니까. 아니, 현실적으로 그렇잖아요. 먼저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야기 한 건 제 쪽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감정에 호소하기엔 우리 가족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진득한 편은 아니잖아요. 저 바빠요. 한 시간 반 후에 화원에 클라이언트 오니까 끊어요. 나중에 이야기해요. 그나저나 나중에 이야기 제대로 할수록 설득당하거나 포기할 건 어머니 쪽인 건 알고 있죠? 어머니도 참, 많이 배운 분이 왜 평생 아버지 비서 역할을 자처하고 사시나 모르겠네요. 네? 도희, 여기로 온대요? 언제요? 설마 오늘요? 안 돼요. 저 오전에 클라이언트 미팅 끝나고 나면 본사 가서 하루 종일 처박혀 있어야 해요. 원래 일도 쌓여 있는데 최근에 확장하기로 한 신설부서 직원 면접까지 껴 있다고요, 직접 통화할게요. 도희 전화번호나 찍어 줘요. 빨리요.”
도명은 어머니가 보내 준 도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야, 아. 그래. 오늘 안 돼. 뭐 사장은 한가한 줄 알아? 너는 흠.”
도명은 스케줄 표를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주는 다 바쁘네. 남는 건 저녁 시간밖에 없는데. 저녁 시간은 죄다 선약 있어.”
도명이 말한 선약이라는 건 도화와의 저녁 식사였다.
“내가 널 피하긴. 네가 무서운 구석이 있어야 피하지. 내일 1시에 오든지. 굳이 이번 주 안에 볼 거면 같이 잠깐 점심 식사나 하자. 그런데 많이는 이야기는 못 나눠. 일해야 해서. 응. 너는 갑자기 왜 울어? 아 환장하겠네.”
도화는 도명이 통화할 동안 그가 챙겨 준 것들을 다 먹고 눈치 보며 싱크대에 빈 접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접시를 뽀득뽀득 닦은 후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도희와 통화 중인 도명이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어딜 가냐는 듯이 도화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도명 씨가 너무 바빠 보여서요.”
“아까부터 할 말 있어 보이던데요?”
“네? 아. 별건 아닌데요.”
“저 여유시간 30분은 있는데.”
여유시간이 있다는 남자치고는 수화기 너머로 도희가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여유시간은 무슨, 도화는 어서 우는 동생이나 달래 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정말 별말 아니에요. 그냥.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하루고, 그런 하루에 대한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죠.”
“아, 그렇군요. 출근 잘 해요. 도화 씨.”
도명이 도화의 이마에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에서는 도희가 오빠가 불쌍하다며 울고 있었다.
“아. 참, 그리고.”
“차 조심이요.”
“네. 착하네요.”
도화는 자취방으로 올라오자마자 침대에 풀썩 누웠다.
“출근은 무슨요. 나 오늘 휴일이란 말이에요.”
도화는 월차를 좋지 못한 날로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도명은 바빠도 너무 바빠 보였다. 평소 도명이 자기 스케줄을 자기가 직접 조율할 수 있는 위치라서 묘하게 한가해 보이는 면이 있긴 했지만, 오늘 그가 유난히 많이 바쁘긴 했다.
거기다가 유난히 바쁜 날에 도명의 가족들까지 그와 대화하기를 원해서, 피아노 배송에 관한 걸로 전화를 걸었다가 전화기가 뜨거워지도록 전화통을 부여잡게 된 것이다.
도화는 어젯밤 같이 침대에 누워서 도명의 가족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도화의 배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그런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도화는 화가 나서 쪽지 하나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고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가족들마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직접 느끼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도화에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은 언제나 둘 중 하나였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살거나, 아니면 가족들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거나. 그래서 사랑할 수 있으면 어디 사랑해 보든지, 라는 도명의 슬로건은 어떠한 정치 슬로건보다도 그의 가슴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역시 모든 투쟁에는 완벽한 승리는 없는지 오늘 그의 수화기가 난리 난 걸 보면 후폭풍은 역시 감수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한숨과 여동생의 울음에도 흔들림 없는 도명의 표정을 보니 그는 자신과 달리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는 도명의 어머니의 한숨과 여동생의 울음이 수화기 너머로 퍼지는 와중에도 도명의 눈이 자신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그게 도명의 본능적인 관심사였고 또 위안이었다.
아침에 자연스럽게 내리쬐는 햇빛 같이 여지없이 보게 되는 도화의 얼굴, 그게 그의 배짱의 근거였다.
‘당신들이 설사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나만 보는 녀석이 있어. 그러니까 멋대로들 굴어 봐. 나 역시 멋대로 굴 테니까.’
도화는 그저 도명이 가족들과 이렇게 심각한 와중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신경 쓰게 할까 봐 가지런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그가 만들어 준 간단한 아침을 착하게 먹고 있었다. 시선을 오직 빵과 윤기 도는 계란, 간단한 버터와. 잼에 두면서 말이다.
‘나도 도명 씨처럼 할 수 있을까? 가족들에게나 진영이에게?’
도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그에게는 무리였다. 그가 못 하는 일이니까 동경하는 것이다.
사실 도화는 오늘 아침, 도명에게 크게 할 말이 두 가지 있었다. 도명에게 한 말처럼 별거 아니라면 별 것 아닌 말이자, 오늘 하루를 기준으로는 별일인 일이었다.
첫 번째 할 말은 ‘나 오늘 월차에요. 하루 종일 도명 씨 옆에 착하게 앉아 있을 수 있어요.’이었다. 오늘 도명 역시 휴일은 아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도명과 뭔가를 같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든지, 가게 안에 있는 안락의자에서 잠을 자든지, 아니면 그를 위해 커피를 내려 주든지 할 생각이었다. 그저 그냥 같이 있는 공기가 중요했다. 둘이 같이 뭔가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데 오늘은 도명이 오전에는 클라이언트와 시간을 보내고, 그 일이 끝나면 본사로 간다니!
두 번째 할 말은 ‘내가 의뢰한 그 러브레터는 오늘 줄 수 있죠?’였다. 하지만 바쁜 도명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한가로워 보이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도명에게 과제 하나를 남겨 주는 것 같았다.
왠지 철저한 그로서는 어제저녁 러브레터를 다 완성해 놨을 것 같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자신마저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것 아닌가.
도화는 기대한 두 가지 일이 다 좌절되자 침대에서 한 바퀴 굴렀다.
‘오래간만에 집에서 하루 종일 공포영화나 볼까?’
도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도명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출근 시간이 좀 늦네요?]
도화는 도명의 문자에 월차라는 사실을 알리려다가 멈칫했다. 도명이 출근 잘 하라는 말에 대충 얼버무린 것이 생각났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의 신경을 덜어 주고 싶어서 그의 말에 급하게 장단을 맞춰 준 것이 화근이었다.
이제라도 아까 너무 정신없어 보여서 말 못 했는데 오늘 쉬는 날이라고 말할까를 고민했다. 도화는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만, 모처럼 쉬는 날에 햇볕을 쐬고 오자고 생각했다.
괜히 월차라면 도명이 그렇지 않아도 바쁜 날인데 도화가 혼자 뭐 하고 있을지 궁금해할 것 같았고, 또 어느 정도는 같이 시간을 보내 줘야 하나 조금이라도 신경 쓸 것 같았다.
[지금 나가요.]
도화는 대충 정장을 입고 어깨 한쪽에 가방을 메고 나왔다. 도명은 화원에 예약 방문할 클라이언트에게 넘길 서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화는 바쁜 도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가게 앞을 지나쳤다.
오늘은 회사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오늘은 분위기 좋은 명소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산책을 하고 분위기 좋고 음식이 괜찮은 가게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 같은 음료를 마신 후 집으로 돌아와 질펀하게 잠을 잘 생각이었다.
도화는 광화문에 가서 볕이 좋은 고궁의 후원을 걸었다. 그리고 분위기 좋은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가판대에서 로즈 골드 색 넥타이핀 두 개를 사고 향이 좋은 수제 비누를 샀다.
도명이 쓰는 화장품 냄새와 비슷해서였다. 아마 들어간 성분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다. 비누도 고민하다가 넥타이핀과 같이 두 개를 샀다. 그리고 혼자 1인 화로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은 후 음식 사진을 찍었다. 주변이 온통 친구들, 혹은. 연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도화는 계속 도명이 생각났다. 도화는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 가게에 들렀다. 도명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달콤한 색상을 가진 음식들을 먹은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조각 케이크를 하나 사고 모과차를 하나 시켰다. 혼자 정장을 입고 예쁜 케이크에 작은 포크를 찔러 넣으려는 찰나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좀 전까지 흐물흐물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화는 얼굴을 순식간에 굳히며 전화를 받았다.
그의 말투에서 사무적인 느낌이 뚝뚝 묻어 나왔다. 그의 극단적인 표정 변화에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흘깃 쳐다볼 정도였다.
도화는 관련 자료가 어디 있는지 말한 후 다시 흐물흐물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젤리같이 매끄러운 케이크 표면에 얇은 은색 포크를 찔러 넣었다. 은색 포크가 케이크에 폭신하게 잠겨 들어갔다. 도화는 케이크를 작게 자른 후 입안에 집어넣었다.
‘맛있다! 생크림은 적당히 달고 빵은 촉촉하고 폭신하다! 거기다가 이 케이크 시트 사이사이를 채운 이 무화과 잼, 너무 환상적이잖아!’
도화는 발끝에 힘을 주고 발이 자동으로 동동거려지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너무 케이크 한 조각에 좋아하는 것 같아 이마를 짚으며 점잖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도화에게 문자가 왔다.
[이 대리님 쉬시는데 죄송했어요.]
[아. 네.]
도화는 문자를 보내며 표정을 굳히다가 다시 케이크를 지그시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 너무 맛있어서 자꾸 도명 씨가 생각나. 도명 씨 이런 거 엄청 좋아하는데. 이런 거 잘 아니까 이렇게 케이크를 잘 만드는 집이라면 도명 씨도 알고 있지 않을까? 모른다면 먹여 주고 싶다. 바쁜 날에는 머리에 당 채운다고 이런 거 꼭 집어 먹던데.’
[도명 씨, 지금 본사예요?]
도명은 바쁜지 20분 만에 답이 왔다. 도화가 케이크는 이미 다 먹어 치우고 남은 음료를 빨아 먹고 있을 때였다.
[네.]
[혹시 신사동의 madame gateau, 알아요?]
[케이크 가게요?]
[아, 아는 가게구나.]
[모르는 가게인데요. 다만 불어로 케이크라고 적혀 있네요.]
[아.]
[거긴 왜요? 퇴근길에 들러서 거기서 케이크 사 올까요? 주소 더 자세히 찍어 줘 봐요. 그런데 집에 도착하면 전 밤 10시일 것 같은데요.]
[아뇨. 아뇨. 도명 씨 케이크 먹고 싶지 않아요?]
[있으면 먹겠죠.]
[계속 본사에 있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저녁,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지 말고 제대로 챙겨 먹는지 사진 전송해요.]
[네.]
‘이왕 이렇게 비밀 월차가 만들어진 거, 깜짝 케이크 배달이나 해 주고 집에 가자.’
도화가 도명의 잡지사를 검색하고 홈페이지에서 본사 주소를 얻었다. 그리고 가는 교통편을 검색했다. 방금 먹은 조각 케이크는 아예 케이크 통째로 사서 포장했다. 도화가 가게에 나섰을 때 시간은 2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도화가 도명의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는 살짝 외곽으로 빠져서 약 80평의 대지 위에 3층짜리 하얀색 건물이 소담하게 올라가 있었다.
‘우와. 건물주의 또 다른 건물이다.’
건물 입구에는 간소하게 ‘BISCUIT FOREST’라고 작은 명패가 적혀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도명의 화원 같은 느낌이 드는 작은 구내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그 안에는 온갖 신기한 모양새의 낯선 식물들이 가득 차 있었고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가 상상한 회사 이미지처럼 따로 안내 데스크가 있고 거기에 앉아 있는 안내 데스크 직원 같은 건 없었다.
도화는 사실 건물 입구에서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케이크만 전달할 생각이었다. 결국 도화는 도명을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도명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도명이 도화의 전화는 안 받고 메시지만 떴다.
[자기야, 급한 거 아니면 세 시간 후에 연락 주겠습니다.]
“아…….”
‘급하다면 급한 거고 아니면 아닌 건데. 아 엄청 애매하네. 아까 말하고 왔어야 했어!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서프라이즈가 뭐냐! 케이크 맛에 뇌까지 녹아서 판단력도 흐려진 게 분명해.’
도화는 일단 케이크 상자를 들고 카페테리아에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문자라도 보낼까.
[별 건 아니고 케이크 받으러 내려와요. 바쁜 데 방해하는 건가요?]
도화는 결국 소심하게 문자를 작성했다가 지웠다.
도화가 멍하니 카페테리아 의자에 앉아 있은 지 20분. 딱히 할 일이 없는 하루지만 목적도 없이 멍하니 3시간을 기다리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아, 집에 갈까……? 어차피 저녁 늦게라도 볼 텐데. 아쉽긴 하네. 도명 씨 일하다가 당 떨어지면 먹이려고 사 온 건데.’
도화가 다시 집에 가기 위해 건물을 나서기 전에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옆 벽 의자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도화는 사람들을 흘깃 본 후 화장실에 들어갔다. 도화가 소변을 보고 손을 뽀득뽀득 씻었다.
도화가 케이크 상자를 소중하게 안은 채 복도에 나오는데 청바지에 얇은 니트를 입은 여자가 서류를 들고 사람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그러다 도화의 얼굴을 골똘히 보더니 그가 외부인임을 알아차렸다.
“아,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나저나, 진짜 시간 아슬아슬하게 오셨네요.”
“저, 저요?”
“네.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앉아요.”
도화는 얼떨결에 정장을 입은 사람들 대열에 앉았다. 그러다가 조금 후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나 싶어 여자를 향해 손을 들었다.
“저는 여기 대표님을 만나려고 온 건데요.”
“제일 늦은 분이 성격은 제일 급하네요. 여기 앉아 계시면 곧 만나실 수 있으니까 순서 지켜요.”
“아. 여기 이 사람들이 다 대표님 만나러 온 사람들이에요?”
“네.”
도화가 신기하다는 듯이 줄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바쁘니 연락이 안 됐구나 싶었다.
도화는 그녀의 대답에 다시 든 손을 내리고 앉아 있었다. 계속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화가 다시 손을 들고 물었다.
“저 그런데, 저는 개인적인 일로 대표님 보려는 건데요.”
“개인적인 일 무슨 일이요? 대표님하고 연락하셨어요? 대표님 스케줄에는 없는데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저는 그냥 이걸 전달해 드리려고요.”
도화가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표정이 싸늘하게 굳더니 얼굴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가 매력적인 회사인 건 알아요. 그런데 그런 부정한 걸로 우리와 함께할 수는 없어요.”
“아 이거, 그냥 케이크 상자인데요. 그, 돈 들어간 이상한 케이크 상자 아닙니다.”
도화가 주섬주섬 케이크 상자 안을 보여 주며 말했다.
“아 그러네요. 대표님 단 거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어쨌든 그쪽이 간절한 건 알겠으니까 기회를 얻고 싶으면 잔머리 굴리지 말고 정식으로 당신의 능력을 보여 줘요. 우리는 그런 기회를 충분히, 그리고 공정하게 줄 겁니다.”
도화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도화가 부정하게 그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기회를 낚아챌 사람처럼 보였다.
“아. 나는 진짜 대표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러 온 손님입니다. 뭔가 이렇게 공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규칙을 지켜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도화는 정말 도명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란 걸 증명해야 했다. 도화는 도명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안 받았다. 도화는 맥이 빠져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도화는 앉아 있을수록 뭔가 이상한 늪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본의 아니게 면접 대열에 앉아 있다는 걸 확신했다. 문제는 그 확신이 너무 늦게 왔다는 것이었다. 도화가 안 되겠다 생각에 일어서려는 찰나 여자가 도화를 불러 세웠다.
“들어가요. 당신 차례에요.”
“아니요. 난 오늘은 괜찮습니다. 나중에 따로 만날게요. 나중에 따로!”
“정정당당한 방법이 아니면, 기회를 얻지 못하네요. 당신이 자꾸 수상하게 굴면 여기 면접자들을 통해 우리 회사 평판이 안 좋아지니까 당장 들어가요. 무슨 대표님이 개인적인 인맥으로 사람 뽑는 사람 같잖아요. 아니면 달콤한 케이크 하나로 넘어가는 사람이거나! 우리 회사는 그런 식으로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라고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들이 다시 도화를 향했다. 표정들이 ‘저 사람이 또!’라고 외치고 있었다.
“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케이크는 그냥 케이크에요! 취업 청탁이 아니라고요!”
도화의 등이 회의실 같은 곳으로 떠밀어졌다. 그리고 도화의 눈앞에 도명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도명의 옆에는 면접관 세 명이 앉아 있었다.
도명은 자신의 눈앞에 난데없이 도화가 보이자 얼굴을 갸우뚱거렸다. 도화가 어색한 표정으로 일단 자리에 앉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 전…….”
“세상에, 도화 씨 진짜 우리 회사 신입으로 들어오려고요?”
도명이 당황한 듯 얼굴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도명의 머릿속에는 도화가 쓴 마감을 못 지키는 신입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에 대한 포르노 대본이 펼쳐져 있었다.
“대표님 아는 사람입니까?”
“네.”
도명은 저 사람이 내 애인이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고 짧게 대답했다. 도화가 분명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도화 씨 다니는 회사는 어떻게 하고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겁니까?”
“아. 월차요.”
“도화 씨 회사는 당일 날 갑자기 월차를 쓰는 게 가능합니까?”
“아니요. 전에 미리 신청했죠.”
“아. 정말. 도화 씨는 이런 일에는 항상 진취적이네요.”
도명이 못 말린다는 말투로 말했다.
“네? 이런 일? 무슨 일이요?”
도명은 갑자기 깊은 반성을 했다. 키스하는 법조차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대체 무슨 눈을 뜨게 해 준 건지 몰랐다.
‘아. 섹스 중독인가.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 못 하는 건 심한 중독 증상 중 하나인데.’
“도화 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네? 네?”
도화는 도명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깊은 모욕감이 들었다. 도화는 이 깊은 모욕감의 정체를 깨닫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저하고 미리 상의했어야 하지 않나요? 갑자기 이렇게 툭 튀어나오면 제가 많이 곤란하죠. 그나저나 우리 회사 서류전형은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도명이 옆에 있는 회사 창립 당시 원년 멤버이자 면접관들을 훑어보았다. 면접관들은 도명의 시선에 서류를 한 번 더 훑어본 후 말했다.
“아. 이 분 경력이 화려한데요. 충분히 서류전형에 통과할 만합니다.”
“네? 네? 제가요?”
“네. 본인 경력에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도화 씨, 줄곧 세무사에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그럼 낮에는 세무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번역 일을 한 겁니까? 그것도 이런 까다로운 책들을요? 언어에 대한 감각이 좋으시네요. 저도 ‘감각의 정원’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영문판도 호평이더군요.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네. 그렇죠. 정확하면서 미묘한 언어의 뉘앙스를 놓치지 않는 세밀한 번역을 원합니다.”
‘우리 백구가 차분히 앉혀만 놓으면 은근히 말을 조리 있게 잘하긴 하지. 그 보고서도 내용이 천박해서 그렇지 며칠 만에 쓴 것치곤 엄청난 양의 글을 쓰고 또 나름 괜찮긴 했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읽었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백구가 숫자도 잘 다루고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영어도 잘해? 세상에 뭐 이렇게 재능을 잔뜩 묻혀서 태어난 사람이 다 있어?’
도명은 백구가 자랑스러워서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하하. 제가요?”
‘여기 어디 몰래카메라 숨겨놨나?’
도화가 조심스럽게 눈을 여기저기로 돌리며 어느 한구석에 반짝이고 있을 카메라 빛을 찾았다.
하지만 카메라 같은 건 없었다. 도화는 자신이 여기 왜 앉아 있고 어느새 이런 질문 속에 휘말렸나를 고찰했다. 그러다가 문득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저 케이크를 전달하러 왔을 뿐인데!’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해 주시죠.”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게 된 이유요?”
도화가 면접과의 질문을 똑같이 따라 말한 후 깊은 상념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도화의 표정에서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도화는 정말 이 질문에 대해서 할 말도 많았고 본인에게 던질 질문도 많았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을까? 면접관들은 표정부터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도화의 얼굴에 빠져들었다.
“참, 인생은 미묘한 선택들로 인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여기 앉아서 곱씹어 보니, 정말 사소한 선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소한 선택들을 하게 만든 감각들이 있었죠. 이야기가 조금 길어져도 상관없습니까? 그리고 또 바로 질문들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지루한 수수께끼들로 이루어져도 상관없습니까?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사소한 선택들로 인해 제가 여기 앉아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모든 선택들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해야 면접관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순서이니 시간은 많습니다. 대표님 일정은 괜찮습니까?”
“일정이 문제가 아니라, 아 네.”
도명은 긴장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도화를 응시했다. 저 미친 백구가 어디까지 나아가나 어디 한번 보자는 오기가 넘치고 있었다.
“대표님과 전 위아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대표님의 화원 위에 살고 있습니다. 대표님은 오늘 아침부터 바빴어요. 회사 일로도 개인사로든. 뭐랄까, 제가 조금이라도 바늘구멍 같은 틈을 만들고 끼어든다면 팡 하고 터질 사람처럼 보였죠. 제가 오늘 대표님에게 할 말은 정말 사소한 말이었어요. 저 오늘 월차예요. 이 말이었죠. 하지만 대표님은 여느 날과 같이 제가 회사로 출근할 거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대표님의 반응에 장단을 맞춰 줬을 뿐입니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오늘 대표님은.”
“바늘구멍 같은 틈으로도 터질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죠. 도화 씨는 대표님의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을 제재하는 것조차 아까 말한 바늘구멍을 만드는 일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네. 그 아주 사소한 결정이 이야기의 시작을 열었죠. 그 후로도 전 대표님의 오해를 풀 기회가 많았어요. 굳이 대표님에게 오늘 회사에 나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밖에 나갈 필요는 없었죠. 하지만 곱씹어 보니, 제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고작 창밖에 보이는 좋은 햇살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외출이나 하자고 생각했죠. 날씨가 조금이라도 안 좋았다면 오늘 월차라는 이야기를 했겠죠. 그리고 그 외출이 또 다른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무슨 사건이죠?”
어느새 면접장의 분위기는 밤에 문학작품을 번역하며 밤을 지새우는 특별한 회계사가 오늘 무슨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를 쫓는 독자들이 되어 있었다.
“오늘 외출은 환하면서 동시에 조금 외로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외출이었습니다. 좋은 것들을 구경하고 먹고, 평범한 휴일을 보냈죠. 그리고 계획대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을 만나고 말았죠.”
도화가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청중들을 향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유난히 맛있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저는 이 특별한 녀석을 오늘 하루 빡빡하게 지낼 대표님에게 전달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너무 특별해서 이왕이면 대표님 머리 위로 갑작스럽게 떨어진 행복 같은 이미지를 주고 싶었어요. 그 기분에 취해서 바보 같은 선택을 또 하고 맙니다. 연락 없이 이 회사에 오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점점 도화의 이야기가 윤곽이 잡힐수록 면접관들이 바란 결말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그들이 상상하지 못한 반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도화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저는 이 케이크를 대표님께 전달하는 일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일임을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여기서도 여러 번의 잘못된 선택을 하죠. 대표님과 연락이 되는 순간이 내게 얼마 없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연락이 되는 그 순간에 케이크를 받으러 오라는 이야기를 못 했습니다. 아침과 같은 이유였죠. 대표님이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아침에 했던 실수를 계속 반복하는 동안 어리석게도 저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한 겁니다. 3시간 후에 연락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애매하게 기다리지 말고 바로 그냥 집에 가거나 그 순간 케이크를 받으러 오라고 했어야 했던 겁니다. 아니면 화장실에 들르자고 생각하지 말든가요. 그리고 전 화장실 앞에서 면접자들과 섞여 이 앞 의자에 앉아 있게 된 겁니다. 여러 질문들의 함정에 빠진 채 말이죠.”
“아. 그러니까 무슨 함정이요?”
“대표님을 만날 수 있다는 애매한 언어의 표현이요.”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에 대표님께 케이크 전달해 주려 왔다고요! 취업 청탁도 아니고, 그냥 맛있게 먹으라고요! 나는 취업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도화가 울분에 찬 채 말했다. 도화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쌌다. 면접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 왜, 진작 그렇게 이야기 안 하시고.”
“언어는 상황에 종속됩니다. 제가 아무리 말해도 여기 면접하러 온 사람이라고 판단된 이상, 내가 아무리 말해도!”
“아니. 그냥 지금처럼, 면접하러 온 게 아니라고 말하면 되잖아요.”
“밖에서 계속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고요. 이건 제 추측인데 아마 면접하러 온 사람이 오늘 한 명 결석했을 겁니다. 아까, 대표님이 절 자꾸 도화라고 부르는데, 다들 앞에 있는 그 이력서 이름은 확인하셨나요? 오늘 면접에 빠진 사람 이름조차 도화라는 이름이면 정말 하늘이 날 미워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도화의 말에 면접관들은 급하게 자신의 앞에 놓은 이력서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력서에는 어이없게도 여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이름은 윤소화였다. 다들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큰 차이를 모두가 한꺼번에 놓쳤는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그건 상대방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도 없는 마지막 이력서였고 모두들 긴 면접에 지쳐서 한숨 돌리려는 찰나 일정한 소란과 함께 도화가 떠밀려 들어온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단체로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던 게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면접장에는 정적이 흘렸고 도화는 도명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와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았다.
“저는 정말 도명 씨에게 조금도 방해되고 싶지 않았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해요.”
도화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그때 도명이 참고 있던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모두가 얼빠진 얼굴로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웃고 있는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자신 역시도 이 멍청한 면접관들과 같이 자신의 앞에 놓은 이력서에 적힌 몇 글자를 놓쳤다. 빤히 보이는 A4용지의 맨 위에 적힌 정보들은 훅 넘기고 그저 도화가 번역작업을 했다는 문학 작품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영어까지 잘한다는 그가 너무 섹시했고, 아주 잠깐 그가 이 회사에 다니는 상상을 했다.
이성으로는 그래도 같이 일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하면서도 면접관들이 다 좋다고 하면 자신도 마지못해, 이성적인 척을 하며 그를 이곳에 취업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안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를 더욱 긴밀하게 자신에게 종속시킬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한 생각을 했다. 도화에게 싸구려 포르노를 썼다고 뭐라 해놓고 여기서 도화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한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정말 어이없는 일투성이였다. 그러니 허파에 바람이 들 수밖에.
“아니 단체로 바보가 된 것이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그걸 못 봐?”
도명이 웃음기가 촉촉하게 배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애써 표정 굳히지 마세요. 나도 못 봤는데 설마 뭐라 하겠습니까? 사람은 잊을 만하면 멍청하다니까.”
도명이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도화 씨, 케이크 잘 먹을게요. 많이 못 먹는 거 알면서 무슨 케이크를 통째로 샀어요. 조각으로 한두 조각이나 사지. 도화 씨의 오늘 하루를 듣느라 수고한 여기 이분들하고 다 같이 먹으면 섭섭합니까?”
“아, 아니요. 다들 맛있게 드세요.”
“오늘 하루 종일 한가하고 딱히 할 거 없으면 여기서 기다리다가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요. 회사가 외진 곳에 있어서 차도 없는 사람이 오는 데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조금 외지긴 하더군요. 근데 전 정말 괜찮아요. 전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요.”
“조금은 무슨요. 땅값이 싼 맛에 산 건데요. 미희 씨 여기 내 손님 좀 대표실에 얌전히 데려다 놔요. 아. 코코아 좀 쥐여 주고요. 부탁할게요.”
“아. 네.”
도화를 이 면접장에 밀어 넣은 여자가 얼굴이 빨개진 채 도화에게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전, 면접 합격자에 대해서 의논하고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네.”
“얌전히 있어요.”
“네.”
“아 심심하면 문자로 컴퓨터 패스워드 보내 줄 테니까 인터넷을 하든지, 음 영화 다운받든지요.”
“전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요.”
“신경이 쓰입니다. 도화 씨가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고요. 그리고 저 안 터져요.”
“네?”
“도화 씨 신경 좀 쓴다고 빵하고 안 터진다고요.”
‘그런 걸로 터질 거면 진작 터졌지.’
미희는 도화를 대표실로 안내하는 내내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은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대표님의 개인적인 손님인 줄 몰랐어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대표님이 지금까지 본사에 개인적인 손님을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저야말로 헷갈리게 하필 그 타이밍에 얼쩡거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대표님하고 연락하고 왔어야 했습니다.”
“계속 변명하자면 여기는 대부분 사업차 들리는 사람들이 다예요. 대표님의 가장 가까운 지인으로 아실지 모르겠지만 사진작가 한서윤 씨가 오긴 하는데.”
“한서윤 씨 압니다.”
도화가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지인이기도 했는데.’
“아 대표님 지인이면 건너서 아실 수도 있겠네요. 그분도 대표님을 보러 온다기보다는 보통 일하러 와서요. 그래서 정말 개인적인 일로 대표님 손님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요. 생각해 보면 계속 개인적인 일로 만나러 왔다고 강조하셨는데 저는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이라는 게 은밀히 떳떳하지 못한 일로 만나는 거라고 생각됐어요. 요즘 알잖아요. 기회가 간절한 시대잖아요. 거기다 우리 회사는 꽤 매력적인 직장이라고요. 커리어로도 그렇고 작업 환경으로도 비교적 틀에 박히지 않고요.”
“아. 그렇죠. 그런데 이 회사는 왜 안내 데스크가 없나요?”
“아. 그거요. 대표님이 그냥 오직 손님 안내만을 위해서 멀뚱히 사람 앉혀 놓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셔서요. 유동인구도 많은 대기업도 아니라서, 더 애매하죠. 그래서 안내 데스크 대신 예약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홍보하죠. 보통 방문자의 목적에 따른 담당자가 마중 나와서 안내해 줘요. 회사 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오픈되어 있는 카페테리아 역시 외부 손님들이 오시긴 하는데 대부분 예약하고 오세요. 지금까지는 문제가 딱히 없어서 안내 데스크는 창사 이래 계속 없었어요.”
그들이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기 위해 질문하고 대화하는 사이 도명의 개인 사무실 앞에 왔다. 도명의 방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크지 않았다. 간단한 책상과 대화를 나눌 4인용 소파가 전부였다. 도화는 신기한 듯 도명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간단하죠. 전에는 훨씬 넓었어요. 물건도 많았고요. 대표님이 집이 따로 없으셔서 여기서 사셨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화원하고 집이 생기면서 크기를 대폭 줄였어요. 대표님 생활하셨던 공간은 지금 침대와 안락의자를 놓고 직원들 숙직실로 쓰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아 코코아 타 드릴게요.”
“전 괜찮은데요. 바쁘실 텐데 저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요. 오해해서 죄송하다는 의미로 코코아에 마시멜로우까지 띄워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대표님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실례인 건 알지만 진짜 일과 관계없는 대표님 지인은 처음 봐서 신기해서요.”
“네?”
간단한 질문에 도화의 등이 축축해졌다.
“아. 그냥. 아.”
“질문이 무례했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 네.”
다행히 그녀는 도화에게 코코아를 가져다 주며 다른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
오늘 회사의 대대적인 일 중 하나였던 신설부서 면접이 끝나자 다들 한숨 돌리러 카페테리아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미희 역시 도화에게 코코아를 타 주고 급한 서류 정리를 끝낸 후 면접 팀과 합류했다.
“와. 오늘 미희 씨. 큰 실수 했더라.”
“설마 대표님한테 찍혔을까요? 자기 손님 그렇게 대접했다고요. 어때 보여요? 뒤에서 대표님한테 뭐라 할 사람처럼 보여요?”
“그거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눠 본 미희 씨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음, 저가 보기엔 사람이 그냥 너무 순하네요.”
미희는 도화가 코코아를 두 손으로 정갈하게 받아 들며 꾸벅 인사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표님 지인이라고? 와 대표님하고 어떻게 어울리게 된 거지? 뭐랄까 잠깐 봤지만 대표님하고 분위기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서 대체 어떻게 만나서 친해진 건지, 궁금하네.”
“이웃사촌이라잖아.”
“가까운 곳에 산다고 지인이 되는 건 아니지. 난 솔직히 옆집 사는 사람들 얼굴도 몰라.”
“그건 심했다.”
“이제 슬슬 내기의 종결이 오겠네.”
그의 한 마디에 도명의 회사 사람들이 미묘한 시선을 던졌다.
“애인이야. 그리고 대표님은 대표님 말대로 게이가 맞지.”
“에이. 단정하기는 이르죠. 대표님이 애인이라고 소개하진 않았잖아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맛있는 걸 먹고 바로 대표님 얼굴 떠올렸으면, 그건 사랑이야.”
“그렇다고 사귀는 건 아니죠. 짝사랑일 수도 있죠. 아니면, 그냥 정말 친한 사람이거나.”
“우리가 대표님 지인으로 한서윤 씨만 봤잖아. 대학 때부터 아는 사이고 대표님이랑 똑같이 동성애자잖아. 그런데 느낌이 아까 그 느낌과는 다르다니까. 아 그러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대표님이 그렇게 표정관리 못 하는 거 처음 봤다니까! 놀라다가 녹아내리고, 긴장했다가 기분 좋다가.”
“그래. 한서윤 씨랑 아무 감정 없어 보여서 우리가 대표님이 사내에서 인기 많은 게 귀찮아서 괜히 게이인 척하는 거란 가설이 꽤 신빙성 있게 들렸잖아. 그리고 대표님이 짝사랑을 가만둘 사람이야? 자기가 그런 마음이 아니면 이미 싹을 싹둑 자르고 담배 재 끄듯이 발로 비빌 분이야. 근데 굳이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며 장단 맞추잖아.”
회사 내에서 도명의 커밍아웃은 오랜 수수께끼였다. 그가 오랫동안 애인이 없는 이유가 가장 컸다. 자기가 게이라고는 하는데 남자랑 그렇고 그런 느낌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위장 게이 이론은 파벌을 더욱 넓혔고 강력하게 터를 잡고 있었다.
이 파벌 싸움까지 된 이 내기는 오래되었고 그만큼 제2의 로또라 불릴 만큼 배당금도 커진 상태였다.
“그래도 오랜 내기를 종결시킬 만큼 두 사람이 사귄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그래. 그게 수상하긴 하지. 대표님이 자기 애인을 애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성격은 절대 아니거든. 그런 게 무서웠으면 애초에 커밍아웃도 안 하셨지. 대표님 커밍아웃하고 난 후 상황 어땠어? 괜히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남자 사원들 괜히 혼자 몸 사리고. 대표님은 그걸 한심하게 쳐다보던 시절 있었잖아. 시간 지나고 나니까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어쨌든 시간 지나고 우리 회사 사람들만큼 동성애자가 묘하게 익숙한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 이제 와서 남자랑 사귄다고 말 못 할 분은 절대 아니지.”
두 파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오랜 논쟁 끝에 두 파벌은 시간을 두고 더 지켜보자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
도화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코코아를 다 마시고 난 후 도명의 작업 공간을 구경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도화는 또 도명의 회사 사람들일까 봐 긴장하며 반쯤 일어섰다. 하지만 도명이었다. 도화는 그제야 몸의 긴장감을 풀었다.
도화가 긴장을 풀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리려는 찰나 도명의 구둣발이 도화의 가슴 위에 얹어졌다. 단단한 구두 밑창이 도화의 명치를 꾹 눌렀다. 도명의 싸늘한 눈동자가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도명 씨 일하는 데 방해할 생각은 절대 아니었어요! 으아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그렇게 우리 회사에 취직하고 싶습니까?”
“네? 네? 아니 아까 오해라고 다 설명했잖아요.”
“옷 벗어요. 진짜 면접은 지금부터니까.”
“네? 네? 네? 네?!”
“아니, 목소리 좀 낮추고요. 여기 방음은 좋지만, 완벽하진 않아요.”
“저는 진짜 취직이 목적이 아니라.”
“도화 씨, 저 겨우 감정 잡았으니까, 연기에 좀 협조 좀 합시다.”
“아. 네. 아… 아!”
“네.”
도명은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이 터진 모양이었다. 도명은 웃느라 헝클어진 얼굴 근육을 다시 정돈했다. 도명은 다시 감정을 잡고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취직 생각이 사라졌습니까? 태도 확실히 해요.”
“아. 저는. 그,
“생각 없어요?”
도명이 진짜 궁금한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나하고 여기서 플레이할 생각이 없냐고 직접 묻는 것이었다.
“이, 흐아. 이 회사의 발판이라도 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발판이 옷을 왜 입고 있습니까? 주제넘고 사치스럽게.”
“아. 네.”
도화는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말도 안 되는 장소에서 야한 짓을 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인지, 혹은 기대감인지 알 수 없었다. 도명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물었다.
“그나저나, 몸은 많이 팔아 봤습니까?”
“네?”
“특별한 면접에 고민 없이 옷을 벗고 있잖아요? 바로 넣을 수 있는 구멍인가 해서요.”
도명의 사무적인 말투가 그의 말을 듣는 상대방을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사무적인 말투 속에 교묘하게 도화에 대한 경멸이 섞여 있었다. 도화를 쳐다보는 눈빛 또한 싸늘했다.
이게 이런 거에는 몰입이 힘들다는 남자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인가 싶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도화를 쳐다보는 눈에서 묘하게 꿀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싸구려 물건을 손에 쥔 남자의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묻잖아요. 바로 넣을 수 있을 만큼 구멍이 헐겁냐고요.”
“아. 저. 음.”
얼굴이 빨개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는 도화를 보며 도명은 지루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이것 참. 회사에서 구멍으로밖에 일 못 할 사람이네.”
도명이 천박한 말을 하면서 입꼬리를 히죽거렸다. 도화는 자신이 지금 잡지사가 아니라 양아치 흥신소 사무소에 온 느낌이었다.
“아. 저.”
“말도 제대로 못 하면 몸이라도 빨라야죠. 빨리 벗어요. 어디 살 수나 있는 몸인지나 봅시다.”
‘저, 저 도명 씨 이런 거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무슨 저런 대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데?! 아니 표정은 왜 저렇게 날 하찮게 보는 건데? 플레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러워지려고 하네. 나는 그 와중에 왜 발판이니 뭐니 한 거야. 나 방금 엄청 쉬워 보였나? 그래서 갑자기 나한테 저러는 거야?’
도화는 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다가 도명을 흘깃 쳐다보았다. 속옷까지 벗어야 하나 고민되었다. 도명이 인상을 쓰며 뭘 당연한 것을 물으려 하냐는 듯이 턱을 까딱였다.
“아. 저, 설마 여기서 우리 섹스하는 건가요? 완전 끝까지요?”
“왜요? 나랑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나누게요?”
“저. 근데 여기 도명 씨, 회사잖아요.”
도화가 도명 씨라고 부르자 도명이 구둣발로 도화의 가랑이 사이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도화가 반사적으로 도명의 발목을 잡으려다가 주먹을 허벅지 위에 올린 채 아픔을 참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도명 씨? 조금만 있으면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 그러면 도명 씨 말고.”
“하. 대표님이요. 회사에서 부르는 간단한 호칭도 모릅니까?”
“저 대표님, 진짜. 하는 거예요?”
“네.”
“아.”
도화는 이제야 가출한 줄 알았던 정신이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의 시선이 초조하게 방문을 향했다.
“저 문이라도 잠그는 게.”
“싫어요.”
“아니. 이러면 더 곤란한 건 도명 씨, 아니 대표님이잖아요.”
“면접을 조용히 보면 되잖아요. 아, 엉덩이에 뭘 박으면 좋다고 소리 지르는 취향입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요. 으아. 역시 이건 미친 짓이에요.”
도화가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를 급하게 위로 올리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에요. 이제 이런 면접은 없어요.”
“저, 집에 가서 하는 건 어때요?”
“내가 이도화 씨 애인입니까? 집까지 졸졸 따라가게?”
‘이 사람 진짜 몰입하면 정도가 없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애인이잖아요. 으아. 어쨌든 저는 여기서는 안 돼요.”
“도화 씨가 지금 여길 나가면, 다시 애인이 되는 겁니다. 여기 있으면 나한테 희롱당하는 신입 사원이 되는 거고요.”
“아니 집에서.”
“집은 몰입이 안 돼요.”
도명이 얼굴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보니까 몰입 엄청 잘하네요.”
“장소가 있으니까요.”
“사람이 왜 그렇게 까다로워요.”
“그래요. 여기서 끝냅시다. 재밌다가 말았네.”
“집에서……!”
“end. 영원히.”
“…….”
도화는 단호한 도명의 표정에 절망감에 휩싸였다. 도화는 결국 울먹울먹하며 직접 대표실 문을 잠그고 도명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왜요? 발판 하시게요?”
“…….”
‘아. 젠장. 왜 발판이라고 해서.’
“내가 묻잖아요. 발판 할 거냐고.”
도명이 푹 숙어진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히죽거렸다.
“네.”
“대사 제대로 해야죠. 제대로 따라 해요. 나는 대표님의 발판입니다.”
“아니, 도명 씨.”
“대표님.”
“대표님, 회사의 발판이 되겠다는 거지. 대표님 발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도화가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회사예요.”
“우와. 도명 씨, 아니 대표님 회사 주식회사 아니에요? 요즘 그런 소리 하면 큰일 나요.”
“그래서 내 발판 안 할 겁니까?”
도화는 계속되는 도명의 발판 이야기에 수치스러워 치를 떨었다.
‘그냥 안 하겠다고 하면 되잖아! 왜 뻔히 보이는 수에 조련당하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이놈의 욕구가 그의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포기란 걸 몰랐다. 도화의 욕구가 ‘영원히 안 해 줄 거라잖아.’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도화는 문득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를 생각하다가 앞에 앉아 있는 놈이 그 원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화는 도명이 너무 얄미워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손을 콱 하고 물었다. 하지만 도명이 정말 아플까 봐 잇자국이 살짝 날 정도로만 물었다. 도명이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쯧, 순하다가도 꼭 이런다니까.”
도명이 손가락을 튕겨 강아지를 혼내듯 도화의 코끝을 때렸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입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그 젖어 있고 뜨거운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도화는 자신의 입안을 애무하는 도명의 야릇한 손가락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자, 해 봐요. 나는 대표님의 발판입니다.”
“……나는 대표님의 발판입니다.”
“잘하면서.”
도명이 도화의 젖꼭지 주위를 손가락 끝으로 둥글리다가 꽉 쥐고 흔들면서 속삭였다.
“멍청하고 사납지만, 뭐 길들이는 재미는 있습니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도화는 도명이 이미 살짝 부풀려진 앞섬을 만져 주기를 기대했지만 도명은 바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인지 엉덩이골 사이부터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도명의 손톱이 도화의 애널 주름을 드르륵 긁었다. 도화의 등줄기로 소름이 쫙 돋았다.
“흐아아.”
도명은 도화가 벌써부터 이상한 소리를 내자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앞으로 25분 남았습니다. 25분 뒤에 회의실에 안 나타나는 저를 찾아 직원이 이곳 문을 두들길 겁니다. 한창 하고 있는데 나무문을 두들기는 쿵쿵쿵 소리가 들릴 거고 이도화 씨는 아주 무섭지 않겠어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 이도화 씨를 예뻐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가야 합니다. 상황 이해됐어요?”
도명은 그렇게 이야기한 후 20분 뒤에 타이머가 올리도록 설정을 했다.
“네…….”
“그래요.”
도화는 시간도 별로 없으면서 빨리 안 하고 뭐 하냐는 듯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면접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이도화 씨 구멍 안에 정액을 가득 채워 놓도록, 어디 한번 애써 봐요. 시간 안에 엉덩이 사이로 정액을 뚝뚝 흘려야 면접 통과입니다. 긴장감이 없으면 면접이 아니죠.”
도명이 도화의 두 손을 넥타이로 묶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책상 아래 서랍 안에서 플라스틱 자를 가져와 손바닥 위에서 튕겼다. 싸늘한 소리가 도명의 손바닥 위에서 울렸다.
그리고는 팔이 묶이고 바지를 반쯤 걸친 도화에게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도화가 걸음을 옮기자 도명이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발판이 왜 서 있습니까? 기어요.”
“네?”
‘아, 젠장 발판 소리 왜 해서 저 인간에게 영감을 주고 난리야.’
“기라고요.”
“아. 저.”
“내가 이도화 씨가 기는 법까지 알려 줘야 합니까?”
도명의 요구에 도화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렇게 자괴감이 드는 와중에도 못 하겠다는 소리는 못 하겠다. 도화의 몸은 아까부터 달아올라 있어서 그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냥 도명이 짐승처럼 다가와서 달아오른 엉덩이 사이를 한 번에 꿰뚫어 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도명은 깍지를 낀 채 싸늘하면서 명료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에게 뚫리고 싶지 않습니까?”
‘저 귀신같은 인간!’
도화는 도명이 너무 적절한 순간에 자신의 욕구를 읽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얼굴이 쉽게 읽히는 것도 모르면서.
“손이라도 풀어 주시면.”
“이도화 씨가 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상황입니까? 어떻게든 기어와요. 거리도 짧은데 우는 소리 진짜 듣기 싫네.”
도화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 도화는 자신의 치욕스러운 모습을 스스로가 보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심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바닥에 닿은 뺨이 시렸다.
도명은 이미 잔뜩 흥분한 페니스를 내놓고 있었다. 도명은 이미 도화는 안중에 없고 자신의 페니스를 가지고 놀며 얇은 신음을 내고 있었다. 그런 도명의 태도에 도화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꾸물거리다가는 그가 혼자 욕구를 풀고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어서 흥분한 그를 살결로 느끼고 싶었다. 도명이 아직까지도 머뭇거리는 도화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발판은 바닥을 길 때가 제일 어울리고 보기 좋은 법입니다. 그 와중에 뭘 발판답지 않게 오려고 그래요.”
도명이 핸드폰을 꺼내 도화의 모습을 찍었다. 선명하게 들리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에 도화의 등골이 싸늘했다. 도화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서러움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으앗. 뭘 찍은 거예요.”
“뭘 찍긴요. 면접자 태도에 나름 감동해서 찍었습니다. 불만 있습니까?”
“네! 네!”
“화낼 시간에 빨리 엉덩이나 대요.”
도명이 성가시다는 말투로 말했다. 어느새 도화의 이마가 도명의 구둣발에 닿았다. 도명의 구둣발이 도화의 뒷덜미를 지그시 밟았다.
“앞으로 여기가 이도화 씨 자리입니다.”
“대, 대표님 자리요?”
예상치 못한 도화의 대답에 도명은 헛웃음이 나왔다.
‘발판 야망 봐라.’
“아니, 내 발 밑이요. 아니면, 정확히는 내 무릎 위요.”
도명이 크고 단단하게 발기한 자신의 페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잔뜩 흥분한 도명의 페니스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도명이 싱긋 웃으며 도화의 턱밑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이도화 씨가 어떻게 일하는지 한번 봅시다. 어서 이도화 씨에게 어울리는 자리에 앉아 봐요.”
도화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겨우 피며 조심스럽게 도명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벌써부터 엉덩이에 뜨거운 열기와 함께 흥분이 올라왔다. 도명이 도화의 목덜미를 살짝 문 채 손가락을 도화의 애널 안에 집어넣었다. 뜨거운 살덩어리가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기 무섭게 손가락에 쩍쩍 달라붙었다.
“안이 생각보다 조이네요. 몸 파는 놈이라 헐렁할 줄 알았더니.”
“읏, 하아… 저 몸 안 팔아요.”
“지금 몸 팔고 있잖아요.”
“몸 파는 건 대표님이 처음이에요.”
“설마 처음입니까? 처음치고는 뭔가 맛을 아는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여길 누가 그렇게 만져 댔어요? 잔뜩 길들어져 있는데요.”
“애인이요…….”
“그 애인은 이도화 씨가 몸 파는 걸 알고 있습니까?”
“알 걸요…… 실시간으로…….”
도화의 말에 도명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아주 나쁜 놈이네. 애인이 몸 파는 걸 알고도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나라면 그런 애인은 내 지하실 방에 가두고 때가 되면 잘 먹이고, 나만 쓰다듬어 줄 겁니다.”
“맞아요. 나쁜 놈이에요.”
도화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책상 위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뜨거운 살 표면이 차가운 물질에 닿자 살 것 같았다. 도화가 내뿜는 입김 때문에 유리가 얹어진 책상에 김이 서렸다.
“이도화 씨 안을 만지면 만질수록 드는 생각인데 내 페니스에 꼭 맞을 것 같네요.”
도명이 도화가 좋아하는 지점만 콕콕 치르며 속삭였다. 만지면 환장하는 그곳을 인정사정없이 연달아 긁어 대는 통에 도화의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도화는 너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낼까 봐 팔뚝에 이를 박아 넣었다.
도명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도화의 표정에 잠시 설정을 잊고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진득하게 비벼댔다. 도명은 자신이 실수해 놓고 화풀이는 난데없이 도화에게 했다.
도명의 손바닥이 벌주듯 도화의 허벅지를 때리고 꼬집었다. 도화는 도명의 거친 손길에도 좋아서 발끝을 오므리고 발꿈치를 불 위를 걷는 사람처럼 들어 올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앗. 으음. 읏.”
“말해 봐요. 이도화 씨 뒤는 어떤지.”
“몰라요.”
도화가 뜨거워진 얼굴을 책상 유리면에 비비며 말했다.
“대답 참 성의 없네요. 면접 보는 태도하고는.”
도명이 도화의 애널에서 손가락을 갑자기 빼고는 곧추선 페니스를 도화의 엉덩이 사이에 집어넣고 진득하게 비볐다.
“한꺼번에 집어넣을 테니까 소리 잘 참으세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어댔다. 하지만 도명은 봐 줄 생각이 없는지 단호하게 도화의 골반 부분을 세게 움켜쥐었다.
“흐아. 저. 저.”
“자신 없어요?”
“네. 네. 네. 아 제발요.”
“우리 시간 별로 없어요.”
“흐아. 아, 아.”
도화가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거렸다. 도명이 도화의 입에 휴지를 물렸다.
“제법 잘 풀렸으니까 너무 긴장만 하지 맙시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에 물결이 치도록 두 번 연달아 두들겼다. 그리고는 귀두를 도화의 뻐끔거리는 애널에 맞춘 후 도화의 허리를 붙잡고 강하게 아래로 내렸다.
“흐학.”
한 번에 뒤가 뚫린 도화가 무너지듯 도명의 허벅지 위에 쓰러졌다. 도화는 강렬한 삽입이 끝난 후에도 아직까지도 몸의 놀람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휴지로 틀어먹은 그의 입가에서는 커다랗고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도명은 정신을 못 차리는 도화의 뒷목을 잡고 아직 뿌리 끝까지 들어가지 못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도화가 정신을 못 차리고 팔을 허우적대는 통에 잘 정돈된 도명의 책상 위가 엉망이 되었다. 도명은 엉망이 된 책상을 내려다보며 혀를 차 댔다.
“아주 혼나야겠네.”
도명이 도화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허리를 짧고 강하게 흔들며 앙다문 잇새로 말했다. 도화는 여전히 강렬한 충격에 휩싸여 주먹으로 책상 위를 퉁퉁 두들겼다.
“하아. 하아. 입을 조용히 하면 뭐 하나. 어찌 됐건, 이렇게 요란한데.”
도명이 도화의 손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도명은 도화의 떨리는 손가락을 축축하고 뜨거운 혀로 감쌌다. 그리고는 도화의 손가락을 맛있는 것이라도 되는 양 쪽쪽 빨다가 이를 세워 살짝 물었다.
“하아. 하아. 하아… 읏.”
도명의 허리 움직임에 따라 안이 거칠게 울리는 기분에 도화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도명은 살짝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도화는 울고 난 후면 여지없이 눈가가 마카롱처럼 퉁퉁 부었다.
대표실에 들어간 그의 지인이 딱 봐도 잔뜩 운 상태로 나오면 어떤 해석이든 좋을 게 없었다.
도명은 난감함에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도화는 부드럽게 안아 줘도 뭐가 문제인지 엉엉 울었다.
“지금 좋아서 우는 겁니까?”
“몰라요.”
어느새 도명의 머릿속에는 이런 공식이 완성되어 있었다.
‘몰라요=네.’
“아니, 엉덩이만 이렇게 예뻐해 주면 무조건 우네. 안에 눈물 버튼 있습니까?”
“몰라요.”
‘버튼이 있네. 있어.’
도명은 결국 포기하고 다시 도화를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도명은 도화의 두 팔을 뒤로 보내게 한 후 한쪽 팔로 그의 엇갈린 두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승모근에 얼굴을 묻고 그의 살 냄새를 맡으며 더욱 크게 흥분했다.
도명이 도화를 너무 몰아붙이는 통에 도화의 허벅지에 책상 모서리 자국이 빨갛게 생겼다. 도화의 애널 안을 도명의 단단한 귀두가 진동하듯 두들겨댔다. 도화의 호흡 역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짧게 끊어졌다.
한참 도명이 도화의 뒷구멍이 질척거리도록 페니스를 박고 있을 때 사무실 안에 도명이 맞춰 놓은 타이머가 울렸다. 타이머가 울리자 도화는 쾌락에 녹아내리는 와중에 머릿속에 적색 버튼이 켜졌다.
“앗. 도명 씨 면접 그만… 그만해야 할 것.”
“하아. 조금 있으면 읏. 여기에 정액 먹여 줄 테니까 가만있어요.”
“앗. 흐음. 아니면 지금 바로.”
“하아. 읏. 하아. 하아. 지금 한창 재밌잖아요.”
“으아. 아니요. 이제 재미없어요.”
“지금 질질 흘리고 있잖아요. 아직 더 흘릴 것 같은데요.”
도명이 도화의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귀두를 손으로 세게 뭉개며 말했다. 도명의 손가락 사이에서 도화의 점도 높은 점액이 늘어났다. 도화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겨우 주며 헐떡였다. 이 와중에 환장하게도 타이머는 계속 왱왱대고 있었다.
“도명 씨 제발 그만요. 흐앗. 거기, 으앗 좋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좋다면서 그만두라는 건 어쩌라는 겁니까?”
“그만둬요. 사. 사람 온다면서요.”
“보통 대표실에 그냥 휙 들어오지는 않죠.”
“그래도.”
“문 두들기면 목소리 낮춰요. 지금 소리가 너무 큰 거 아닙니까?”
도명이 허리로 크게 원을 그리다가 페니스를 한 번에 푹 찔러 넣으며 말했다. 도화의 입이 크게 벌려지며 명치 깊은 곳에서 앓아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그렇게 자극해 대는데, 뭘 어떻게 참으라고.’
“흐앗. 앗. 읏. 이럴 거면 타이머를 왜 맞춰놨어요. 무, 무섭단 말이에요.”
도화는 공포에 휩싸여 생각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연달아 하는 것일까. 평생 안 해 줄 거라는 도명의 협박에도 장소가 장소인 만큼 여기서 섹스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뼈아픈 후회가 그의 온몸을 저리게 했다.
도명에게 박히면서도 도화의 시선이 계속 초조하게 문 쪽을 향했다. 언제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들길지 몰라 심장이 요동쳤다. 너무 초조해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진 탓일까. 도화가 느끼기에는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타이머가 울리면 도명을 찾을 거라는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다.
도명의 허리 움직임이 진득해짐과 동시에 느려졌다. 도명의 미간이 거칠게 좁혀지고 그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팽팽해지다가 골반과 함께 떨렸다. 도명이 도화의 뒷덜미를 혀로 핥다가 이를 문 후 도화의 안에다가 파정을 했다.
도화는 축축하고 뜨거워진 안쪽 느낌에 오한이 든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서러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엉덩이에 힘 풀고 제대로 서 봐요. 꽤 많이 쌌으니까 예쁜 모양으로 흐를 겁니다.”
‘이 변태 새끼가.’
도화는 울컥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다리를 살짝 벌리고 섰다. 그러자 안쪽에서부터 기분 나쁜 느낌으로 어떤 덩어리가 울컥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명의 정액이 도화의 허벅지를 타고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도명은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은밀한 부위를 향해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소름이 돋았다.
“이도화 씨 내일부터 여기로 출근해요.”
도명이 자신의 페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능글맞게 이야기했다.
“…….”
“이도화 씨?”
“출근 안 해요. 출근 안 한다고요.”
결국 서러운 게 많은 도화가 참고 있던 감정이 터져 버렸다. 도화가 도명에게 달려들어 그의 귀를 물어뜯었다.
‘변태 새끼 죽어 버려!! 멀쩡한 사람처럼 정장만 입고 있으면 다야!’
환장하겠는 건 도명이 도화의 서러움과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런 도화의 행동에 흥분해서 그의 얼굴을 붙잡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혀와 혀가 어지럽게 얽혔다.
도화는 도명에게 화가 난 상태라 그의 가슴을 두들기며 그를 거칠게 밀치려다가 도명의 혀 놀림에 어느새 녹아서 그와 같이 혀를 얽고 있었다.
‘미워, 밉다고! 내가 싫다고 했잖아. 무섭다고 했는데 자꾸 박고 그래. 근데 키스는 왜 이렇게 잘하냐고. 화 풀리면 안 돼. 화 풀리면…… 아 젠장.’
“저 그런데 사람은 왜 안 와요? 시간 꽤 지나지 않았어요?”
도화가 도명의 어깨를 부여잡고 여전히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도화는 지금이라도 당장 저 문을 누군가 두들길 것 같았다.
“변태 사장으로 낙인찍힐 일 있습니까?”
도명이 여유롭게 웃으며 시계를 보았다.
“음, 앞으로 30분 후가 회의입니다.”
“……아, 씨발, 자기야.”
도명은 사무실에서 섹스를 하느라 엉망이 된 책상 위와 주변을 정리했다. 도화는 옷을 걸치고는 묘한 자괴감에 휩싸인 채 앉아 있었다. 자신이 도대체 집이 아닌 곳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생각했다.
“들키지 않았으면 됐지 뭘 그러고 있어요?”
“들켰으면요?”
“안 들켰잖아요.”
도명이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도명은 주변을 더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었지만 회의 전에 회의 자료를 검토하는 일이 더 급했다.
그래서 일단 눈에 띄는 부분들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회의가 끝난 후에 정리할 생각이었다. 도명은 거칠게 움직이느라 구겨지고 땀 냄새가 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오, 옷은 왜 벗어요?”
“뭘 기대하고 그래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대는 무슨요? 기대는 무슨!”
도화가 양심에 찔려 하면서도 동시에 울컥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도화는 도명의 몸을 뱁새눈을 하고 훔쳐보았다. 본능이 시키는 일이었다.
도명은 도화의 반발 따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어넘기며 사무실 구석에 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캐비닛 안에는 완벽하게 관리된 정장 세트와 구두 같은 것들이 들어가 있었다. 도명은 길이 잘든 셔츠로 갈아입었다. 오늘 입고 온 옷과 완벽하게 똑같은 옷이었다.
“사무실에 왜 그런 게 있어요?”
“왜 있긴요. 이쪽 직업이 철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칼퇴근하는 도화 씨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니, 것도 그런데 원래 그렇게 완벽하게 똑같은 정장 세트가 2개씩 있어요?”
“네.”
“왜, 왜요?”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내 표정이 왜요?”
“무슨 상상을 하기에 그렇게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겁니까?”
“아니, 그냥. 도명 씨가 예전 파트너들을 여기로 불러서 자주 이런 거 했나 싶어서요. 그래서 그런 거 티 안 내려고 굳이 저렇게까지 같은 옷을 구비해 두는 건 아닌가……요?”
도명이 가늘고 검은 넥타이를 다시 정갈하게 조였다. 단단한 색의 넥타이 주변으로 흰 셔츠의 주름이 오밀조밀 생겼다.
“사람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네요. 제가 이런 거 처음이라고 말했잖아요.”
“아니, 너무 천연덕스럽게 잘하시니까…… 처음이 맞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 걸 세간에서는 재능이라고 부르죠.”
도명이 건방지게도 자신의 돔을 의심하는 도화의 이마를 손가락을 세게 튕겼다. 단순 귀여워서 때리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감정이 실렸다. 도화는 빨갛게 된 이마를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앓아대는 소리를 냈다.
“그, 그럼 왜 같은 정장이 두 개나 있는 건데요?”
“똑같이 밤새웠는데 계속 좋은 냄새 나고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게 얼마나 효과적인 이미지 관리인 줄 알아요? 별거 아닌데 괜히 같은 사람이라고 안 느껴지는 겁니다. 우리 요령은 없는데 야망만 있는 발판이 그런 걸 알려나.”
“저, 그런데 앞으로 저를 계속 발판이라고 부를 거예요?”
‘나 그 별명 싫은데!’
도화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귀여운데요.”
“하나도 귀엽지 않습니다. 대체 어느 면이 귀엽다는 겁니까?”
“도화 씨가 저한테 깔리고 싶어서 안달 난 면이 귀엽죠. 아직까지도 SM 초짜 티를 내는 질문을 왜 합니까?”
도명이 자료를 펼쳐 보며 도화에게 그만 방해하라는 듯이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중얼중얼할 말이 많아 보였던 도화가 입술을 꾹 다물고 소파에 앉았다. 도화는 허리를 곧게 펴고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도화가 엉덩이를 조금 뒤척이다가 소파 가죽이 구겨지는 소리가 나자 뒤척이던 행동을 멈췄다.
도명은 눈길을 서류에만 두고 있었지만 도화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굳이 눈으로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리 좀 낸다고 집중력 흐트러지는 저질 집중력 아니니까 그렇게 쥐 죽은 듯이 안 있어도 돼요.”
“아. 네.”
“잡지나 보든가요. 애인이 만든다는 잡지에 통 관심이 없네.”
도명이 넌지시 말했다.
“아. 도명 씨 잡지. 네. 네.”
도화는 도명의 사무실 책장에 있는 잡지들 중 하나를 꺼냈다. 두 사람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 도명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자료들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있어요.”
“네.”
“잡지 취향 아니면 컴퓨터 해요.”
“아니요. 애인이 만드는 잡지인걸요.”
“취향 아닌 거 아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회의 끝나면, 딱 저녁 먹기 좋은 시간이네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저녁만 먹고 가도 되고 음, 안 피곤하면 여기서 놀다가 같이 집으로 가든가요.”
도화는 도명이 사실은 후자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오늘 한 게 뭐가 있다고 피곤하겠어요.”
도화는 피곤했다. 오늘 그의 하루를 되돌아보면 피곤할 만도 했다. 하지만 도명과 한 지붕 아래 있는 느낌을 포기하긴 싫었다. 도명이 일하는데 귀찮아하지만 않는다면 도화도 그게 좋았던 참인데, 도명까지 그걸 원하는 것 같아 피곤해도 없는 체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한 것이 없긴요. 아주 많죠.”
도명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도화는 아까의 창피함이 생각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도명이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뒤돌아서서 도화를 흘깃 보았다.
“왜요? 뭐 빼먹은 거 있어요?”
“네. 아주 중요한 건데 큰일 날 뻔했습니다.”
도명이 미간까지 좁히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도명이 도화에게 터벅터벅 다가와 그의 얼굴을 끌어당긴 후 입을 쪽 맞췄다.
“이걸 까먹을 뻔했네요.”
“아. 네.”
도화는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그와 몸을 긴밀하게 합치고 있었으면서도 가벼운 입맞춤에 얼이 빠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왠지 도명의 입술 감촉이 도화의 입술에 여전히 묻어 있는 것 같았다.
***
도명이 휘파람을 불며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이미 미스터리한 도명의 개인적인 손님에 대한 소문은 직원들에게 빠르게 퍼져 있었다.
오늘은 도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부서가 바빴는데 이 와중에도 부지런히 소문은 틈새 없이 퍼졌다. 회의에 참가하는 직원들의 수많은 눈동자가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도명의 얼굴로 쏠렸다.
“저기, 대표님. 귀에 상처가 생기신 것 같습니다.”
도명은 그에 말에 귓바퀴를 어루만지다가 도화가 그의 귀를 물어뜯은 것이 생각났다.
“상처 생겼습니까? 생각보다 심하게 물렸나 보네.”
도명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말했다.
“네? 물리셨다니요?”
“별거 아닙니다. 개가 순하다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반응이 귀여워서 좀 놀렸더니 순한 녀석이 무네요.”
“네? 별안간 회사에 개가 왜……?”
“이야기하자면 기니까 회의 시작합시다.”
도명의 회의 시작하자는 말에 직원들이 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들 머릿속에서는 회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의문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대표님 애인 있어요? 그거 우리한테 엄청 중요하단 말입니다. 유서 깊은 보물 창고가 열린다고요.’
하지만 도명이 업무 내용을 계속 디테일하게 물어보는 통에 그 질문은 의식 속에서 밀물이 빠지듯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
도화는 도명이 가고 난 후 그가 만든 잡지를 공부하듯 봤다. 역시 예전부터 도명의 잡지를 훑어볼 때부터 그랬지만 일단 드는 생각은 사진이나, 그림이 엄청 보기 좋다는 거였다. 뭔가 느껴지는 감정은 많은데 말로 풀자니 어려웠다.
도화는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식물의 잎이 나선 방향으로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사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치 정교한 시계태엽을 보는 것처럼 정확하고 우아했다.
‘식물의 세계가 이렇게 다양하구나. 그냥 산소 만드는 초록색 판인 줄 알았더니.’
도화는 도명이 어쩌다가 식물에 빠지게 됐는지 생각하곤 했다. 그동안은 막연히 도명이 의외로 평화로운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식물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건 어쩌면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도명이 만든 잡지를 보고 있는데 궁금한 건 역시 도명에 관해서였다. 식물이 궁금한 게 아니라, 정확히는 도명이 사랑에 빠진 대상이 궁금했다.
그가 만든 잡지를 보니, 식물의 세계가 겉으로는 조용한 세계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전투적이고 치열하기 때문에 화려하고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잡지를 보니 묘하게 어울리지 않던 그의 관심사가 그와 매우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치명적인 사람이 치명적인 세계 속에 들어온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도화는 읽고 있던 잡지를 덮은 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후 생각나는 상상은 어이없게도 화려하고 치명적인 야생의 숲에 두 사람이 아담이 되어 발가벗은 채 잠에서 깨는 상상이었다.
빨간색과 진한 초록색으로 만들어진 감각의 정원이었다. 도화는 순간 자신이 무슨 상상을 했나 싶어 혼자 화들짝 놀랐다.
‘아 씨발, 발정 났나 봐!’
도화는 검붉은 가시가 난 식물 줄기 사진을 빠르게 넘겼다. 식물 주제에 치명적이고 난리다. 도화는 도명의 잡지가 지루해서가 아니라 너무 자극적이기에 덮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해 금붕어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주인이 없는 사무실 풍경을 쳐다보았다. 아까 도명을 기다리면서 지겹게 봤던 장면이었다.
도화는 그러다 미세하게 다른 그림을 발견했는데 도명의 책상 밑에 끈적이는 모양새로 달라붙은 하얀 점액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저기서 도명에게 뒤로 박히는 모습이 생각났다.
도화는 자신의 흥분한 귀두가 하얗고 끈적이는 액체를 내뿜으며 책상 밑을 긁어대던 그 감각이 기억났다.
‘으악! 저거 내 그거잖아! 내 DNA가 저기서 왜 버섯처럼 서식하고 있냐고. 아 환장하겠네.’
도화는 급하게 소파 앞 티 테이블에 있는 휴지를 뽑아 책상 밑을 박박 닦았다. 도화는 자신의 정액을 발견한 책상 밑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닦기 시작했다. 도화는 도명의 책상 이곳저곳을 결벽증 걸린 사람처럼 닦으며 자괴감과 함께 묘한 흥분을 느꼈다.
도화는 도명의 책상 밑에 버섯 모양으로 쭈그려 앉으며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자괴감과 함께 열에 오른 몸뚱이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 나는 진정 발판인가. 아, 바닥이 편하다.’
도명의 책상 밑에는 쓰레기통과 함께 도명이 임시로 폐기한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종이는 그냥 안 버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분리수거하는 모양이었다. 도명다웠다. 책상 밑까지 이렇게 깔끔한 모양새라니. 도화를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도화는 책상 밑에 그대로 주저앉아 그가 폐기한 종이들을 훑어보았다.
장기적인 사업 계획서부터, 잡지의 기획 방향, 최근 관심 있는 식물 목록과 생김새를 스케치한 것, 불현듯 생각난 정원 디자인, 새로운 재배 방식, 개인적으로 쇼핑하고 싶은 목록, 집 안의 정리 계획서 2019년 버전, 등과 같은 생각의 흐름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폐기한 아이디어거나 과정의 일부지만 도화는 뭔가 자신이 엄청난 산업 스파이가 된 느낌이었다.
‘아 도명 씨 그림 잘 그리는구나.’
묘한 죄책감과는 별개로 도명의 머릿속을 여행하는 느낌이라 재미있었다. 도명이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종이 위까지 정돈되어 있고 차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지면 위는 의외로 산만했다. 중간에 생각이 멈추면, 구석에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도 보였다.
도화는 예전에 수업시간 중 지루하면 교과서 구석에 낙서하던 것이 생각났다. 도명도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도화는 도명이 내심 귀여워졌다. 도화는 괜히 도명의 손 그림 낙서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거렸다. 작고 단순하게 뭉뚱그려진 그림의 실루엣이 그답지 않았다.
‘도명 씨가 싫어할지도 몰라. 아 그런데, 끊을 수가 없다. 너무 재밌다.’
도화는 도명이 올까 봐 불안해하며 손톱 끝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역시 멈출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도화는 그 보물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소유하고 싶은 것을 발견했다.
바로 도명이 도화에게 러브레터를 써 주기 위해 연구한 흔적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지면들은 도화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배 속까지 끓어오른다고 느껴질 정도의 흥분감과 물욕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이 보물들 중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은 바로 도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동여지도처럼 연결한 종이들이었다. 바로 도화에게 줄 러브레터의 소스들이었다. 일종의 뉴런의 지도 같은 이 정교하고 편집증적인 자료는 구석구석까지 훑어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이러니 러브레터가 오래 걸리지!’
도화는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도명이 회의실에 간 지 약 1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보통 회의를 하면 얼마나 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곧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도화는 그들의 회의가 제발 비효율적인 마라톤 회의이기를 바랐다. 도화는 그 자료들을 주섬주섬 추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떨리는 표정으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래. 버리려고 모아 둔 건데, 신경 쓰겠어? 분류도 제대로 하지 않은 걸 보면, 신경 쓰는 물건이 아냐. 도명 씨가 쓰는 물건을 분류도 안 해놓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상대는 유도명이잖아.’
도화의 머릿속에 계속 착하게 있으라고 말하는 도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악감이 도화의 등허리에 내려앉았지만 욕망이 그의 내장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
도명이 자신의 사무실에 돌아왔다.
“도화 씨, 지루하지 않았어요?”
“지루할 리가요. 잡지가 참 재미있네요.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도화가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잡지를 펼친 채 말했다.
“……도화 씨, 잡지 뒤집혔어요.”
“어, 어떤 그림은 거꾸로 봐야 더 흥미로운 거 아세요? 이 사진은 거꾸로 보니까 더 매력적이네요.”
“그런 면도 있긴 합니다만, 도화 씨는 그래서 거꾸로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나 참, 취향이 아니면 억지로 볼 필요 없다니까요. 무서워서 뭐 한마디를 못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녁 뭐 먹고 싶어요?”
“아, 저는 빨리 먹을 수 있는 거요.”
‘가방 안에 있는 거 들킬까 봐 무섭다고. 빨리 집에 가서 숨겨놔야 안심되겠어.’
“식사를 대충 먹을 만큼 그렇게 제 시간이 촉박하지는 않아요.”
“아. 음. 해장국이요. 후루룩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촉박한 건 제가 아니라 도화 씨 같은데요. 갑자기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어요?”
“아니요. 아닌데요.”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네. 아니 갑자기 왜? 하루 종일 기다리다 지쳤나? 지칠 만도 하지. 그런데 묘하게 섭섭하네.’
“샤브샤브 먹읍시다. 따뜻한 국물이 있으면서 천천히 얼굴 보며 먹을 수 있으니까요.”
도화가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하자 도명이 단호한 표정으로 토를 달지 말라고 고개를 저어댔다.
“식사하러 가기 전에 문서 세단기 좀 쓰고 갑시다. 처리를 제때 안 하면 지나치게 많이 쌓여서 생각날 때 해야 돼요.”
도명이 책상 밑에 놓은 종이들을 꺼내며 말했다. 도화가 도명의 러브레터 재료를 가져온 그 상자였다. 도화의 등줄기가 축축해졌다.
‘아니야. 오히려 다행이지. 완전히 갈아 버리겠다는 거잖아. 오히려 도명 씨가 영원히 모를 수 있어. 본인 스스로 증거를 갈아 버리겠다고 하는 거라고.’
도명은 망설임 없이 문서 세단기 앞에 섰다. 그리고는 필요 없어진 종이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도화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도화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도명이 그냥 무심하게 문서들을 갈고 있는 것 같지만 내용을 빠르게 훑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를 아주 없애 버리기 전에 혹시 언젠가는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도명은 종이 박스 안에 내용들이 사라져 갈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자료가 비었다.
‘업무 자료인가? 아닌데. 쓸데없는 개인적인 자료인가…… 개인적인 자료…… 아. 왜 그것들이 없지?’
싸늘한 기운이 도명의 등줄기를 훑었다. 도명이 고개를 돌렸을 때 백구가 사악하게 웃으며 깍지를 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도화 씨, 내놔요.”
“네?”
“가증스러운 순진한 표정 짓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내놓읍시다.”
단호한 도명의 표정에 도화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명의 얼굴이 심각했다.
“이걸로 러브레터 퉁 치면 되잖아요. 바쁜데 힘들게 완성할 필요.”
“내놔요.”
“도명 씨.”
“내놔요.”
도화는 울먹울먹하며 가방 안에 소중하게 넣어 둔 종이들을 꺼냈다. 하지만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내용도 제대로 못 봤는데 도명은 저 문서 세단기에 자료를 영원히 갈아 버릴 것이다. 도화는 도명의 메모들을 담은 가방을 끌어안고 사무실을 빠르게 튀어나갔다.
“아…… 백구가 또 발작을.”
도명이 사무실을 나왔을 땐 이미 도화의 뒷모습이 작아져 있었다.
‘아, 엄청 빠르네. 하지만 이곳 전체가 내 영역이라는 걸 간과했네.’
“지금 나가는 저 외부인 좀 잡아요.”
도명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직원들이 앉은 사무실 전체를 향해 말했다.
“네? 네? 대표님 지인을요? 왜요?”
“내 사무실에서 중요한 걸 훔쳐 갔습니다. 잡아요.”
“뭐라고요? 산업 스파이다. 잡아!”
“뭐 산업 스파이?! 이게 무슨 일이야.”
“잡아! 잡아!!”
사람들의 시선이 도화의 등줄기에 내리꽂혔다. 100개가 넘는 화살이 등줄기에 비처럼 꽂히는 것 같았다. 도화는 그럴수록 가방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식은땀을 흘리며 사무실 복도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도화가 이곳을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둘 엉겨 붙었다. 하지만 도화는 힘이 세니 사람들을 하나둘 뿌리치기 시작했다.
“도화 씨, 그러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잖아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다친다고?’
도명의 한 마디에 도화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도화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우뚝 섰다. 도명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포획당한 도화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깔린 채 엎어져 있는 도화의 등줄기에 구둣발을 턱 올려놓았다.
“내놔요.”
“하지만 도명 씨.”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합니까?”
“도명 씨가 잘못했잖아요.”
“내가 뭘요?”
“저한테 주기로 한 러브레터 마감 시간을 어긴 건 도명 씨 쪽이잖습니까.”
도화의 입에서 나온 러브레터라는 말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아직 마감 시간 안 지났어요. 앞으로 4시간 남았습니다.”
마감이라는 말에 예민한 도명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4시간 안에 줄 수 있어요?”
“…….”
도명은 당장 처리할 일도 있고, 아직 편지는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는 중이었다. 완성했다면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는 어젯밤 완성해야 했었다.
“그것 봐요! 마감을 어기는 게 어디 있어요! 그래서 전 정당히 그리고 관대하게도 미완성 원고라도 받아 가려는 것뿐이었다고요.”
“저,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한 건 제가 아니라 도화 씨입니다.”
도화는 그제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그 둘이 연인 사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화는 바닥에 엎어진 채 수많은 빨간 눈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도화가 느끼는 그들의 눈빛은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빨간색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상상된 혐오가 도화의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도화 씨?”
도명이 사후 경직된 시체처럼 누워 있는 도화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뭔가 심각한 기류가 흘렀다. 도명의 회사 직원들은 알 수 없는 도화의 반응에 그저 서로의 얼굴을 훑어볼 뿐이었다.
도명이 도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화의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번들거렸다.
“도화 씨 괜찮아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최대한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말했다. 하지만 도명은 도화에게 자신의 말이 안 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번에 서로를 향한 이해의 벽을 두들기다 만 사건이 생각났다. 미해결 사건은 일상을 절대 침투 안 할 것처럼 평온하게 굴다가 이렇게 불현듯 찾아왔다.
도명은 다시 자신이 도화에게 위안이 안 된다는 사실이 씁쓸하고 분했으며, 불안했다. 도명에게 도화는 높이 솟아 있는 아름다운 울타리인데.
새삼 그가 해온 SM 플레이가 장난질처럼 느껴졌다. 하긴, 섭에게 온 정신을 놓아 버린 돔이 무슨 울타리가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괴감과 불안감이 도명에게 찾아왔다.
도명은 얼룩덜룩한 표정으로 도화의 까슬까슬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나갈까요? 우리 나가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요.”
두 번째 도명의 말은 도화에게 솔깃했는지 도화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멍한 시선이 도대체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화는 그저 보호자의 손을 잡듯 도명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도화는 도명에게 매달리듯이 걸었다. 도화를 울렁거리게 만들었던 그 사무실을 벗어나 아직, 도화가 도명의 애인인 걸 모를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복도로 나왔다.
“좋은 샤브샤브 집 알아요.”
도명은 방금 전 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마치 방금 사건은 가위로 싹둑 잘라 편집할 수 있다는 것처럼.
“야채도 신선하고, 해산물도 제철마다 제일 맛좋고 싱싱한 걸로 줍니다.”
“…….”
정신이 나간 채 말 없는 도화를 보며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녁은 무슨, 그냥 집에 데려다줄게요.”
“저 때문에 도명 씨가 밥 굶는 건 싫습니다.”
“굶긴요.”
“저 데려다주고 나면 저녁 먹을 시간 없잖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싫어요. 데려다줘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해요.”
“그럼, 가요. 샤브샤브 먹으러.”
“먹을 정신이 아닌데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어요.”
“더 이상 도명 씨한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도화의 민폐라는 말에 도명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도화 씨 반려예요.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민폐니, 뭐니 하며 선 긋지 말아요. 계속 그딴 식으로 굴면 확 끌어당겨서 억지로 안을 막 헤집어 줄 테니까.”
도명이 도화의 목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확 끌어당긴 후 입술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도명의 이가 도화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개방된 장소에서 하는 것 치곤 키스의 농도가 지나치게 짙었고 또, 동시에 폭력적이었다.
도화가 도명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서류를 들고 그곳을 오가던 한두 명이 자신의 회사 대표가 남자와 끈적이는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 정지화면이 되었다.
“하지 마요. 여기 사람들 많잖아요.”
“날 막으려면 때려 보든가요.”
“내가 도명 씨를 어떻게 때려요.”
“그럼 날 좀 도화 씨 안으로 들여보내 줘요. 아주 시려 죽겠네.”
“무, 무슨 안이요?!”
“지금 도화 씨가 상상하는 그 안은 아닙니다.”
도명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 발정기 백구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제가 뭘 상상했는데요?!”
“표정이 다 말해 주고 있으니까 시치미 떼지 마요. 나 참, 하루 종일 야한 생각만 하고.”
“안 그랬어요. 진짜. 하루 종일은…… 하루 종일은……!”
‘하루 종일 했네. 했어. 도화 씨 나 그거 하려고 사귀는 건 아니지? 이쯤 되면 이런 생각도 들잖아. 도화 씨가 원하는 건 내 몸뿐이야?’
“날 사랑하긴 해요? 다른 목적이 전부는 아니죠?”
“네! 당연한 걸 왜 자꾸 물어요. 그리고 다른 목적 뭐요?”
“아니면 됐어요.”
“아니 뭐가 아니라는 건데요?”
도명이 맹랑하게 자꾸 캐묻는 도화의 콧등을 꼬집고 비틀었다.
“어쨌든, 저번에 도화 씨가 절 사랑한다는 걸 매 순간 까먹는 셈 치라고 알려 줬잖아요. 그리고 왜 대답이 한 번뿐입니까? 저번에는 그 질문에 네, 라고 정확히 두 번 말해 줬잖아요.”
“네! 네!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게 왜 안 중요해요? 저한테는 매 순간 그게 중요해요. 도화 씨는 안 그런 모양이죠?”
“중요해요. 하, 하지만!”
“그런데 왜 지금 날 안 보고 다른 사람만 봐요. 눈은 썩은 동태 눈깔처럼 희뿌옇잖습니까. 초점 어디 갔어요?”
도명이 두 손바닥으로 도화의 뺨을 짝 소리 나게 감싸며 말했다. 이게 뺨을 감싼 건지 갈긴 건진 알 수 없는 강도였다. 도화의 뺨에 도명의 손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살갗이 얼얼해지자 정신이 조금 들어온 느낌이었다. 도화의 손이 도명의 소맷자락을 꽉 쥐었다.
“사람들이 날 변태 새끼라고 생각할 거예요.”
“우리 변태 맞아요.”
깔끔하게 떨어지는 도명의 말에 도화는 달리 다른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뻔뻔한 표정의 도명과는 달리 도화의 표정은 바보처럼 입술만 벌어진 채 할 말을 못 찾고 뻐끔거렸다.
정말 우리가 변태라는 말에 단 한 글자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동안 그와 한 온갖 변태적인 행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지나갔다.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 그렇긴 한데!”
“우리 변태 맞아요.”
도명이 도화의 머리에 말로 쐐기를 박았다. 도화는 결국 입술을 굳게 다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도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굴욕스러워했다.
“아주 많은 의미로 변태죠.”
“그만! 그만 해요. 도명 씨는 너무, 자비 없이 사람을 몰아붙여요. 위로란 걸 해 보긴 했어요?”
도화가 그의 말이 주는 충격에 빨라진 호흡을 최대한 천천히 내뱉으며 말했다.
“그런 재능 안 키워요.”
“왜 안 키우셨을까. 누구나 다 키우는 건데.”
“변태야. 그만 삽질하고 샤브샤브나 먹으러 가자.”
도명이 도화의 손목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도화는 도명이 이끄는 대로 주차장에 가서 얌전히 차 시트에 몸을 눕히고 안전벨트를 매라고 해서 맸다.
도화가 안전벨트를 손으로 꽉 움켜쥐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 씨 나빴어요…….”
“내가 뭘요.”
“어떻게 저한테 그 타이밍에 변태가 맞는다고 할 수 있어요. 제 표정 꽤 절박했을 텐데요. 보통 그럴 땐 위로를…….”
“노력은 했어요.”
“무슨 노력이요?”
“위로 말이에요. 하지만 재능이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도명이 산뜻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표정이 너무 산뜻해서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아.”
“그래서 날 안 사랑합니까?”
“아니요. 아니요!”
‘두 번. 오케이.’
“그럼, 됐네요.”
도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빙긋 웃으며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
도화와 도명이 샤브샤브를 먹는 동안 BISCUIT FOREST에서는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하나 열렸다. 문이 열리자 몇몇 직원들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문 안에 들어섰다.
그 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밥을 먹으러 가거나 분노의 마우스 질을 하고 있었다. 작은 창고 안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단종되어 더 귀해진 옛날 게임기, 혼수로 가져왔다는 은 커트러리 세트. 귀한 식물의 씨. 오랜 내기로 빈티지가 더해진 와인. 진짜 식물을 말려서 만들었다는 표본 집. 허브차 세트.
사무실에서 읽어 주면 수치 사를 유발할 수 있는 정 과장의 자작 소설책. 포장을 뜯지도 않은 브랜드 밥통. 선물로 받은 귀한 사프란 40g. 유년시절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스포츠 만화책 전집. 포르노 하드디스크.
직접 담가서 묵혀놨던 매실주. 해외에서 사 온 그림이 아름다운 엽서 세트. 5만 원짜리 지폐 10장. 헤어진 연인과 맞췄던 금반지. 직접 도안을 떠서 만든 프랑스 자수 10점.
일본에서 뽑아온 캐릭터 인형. 야구 스타의 사인이 있는 야구공. 300색 전문가용 색연필. 반년 사이 살이 쪄서 못 입게 된 명품 슈트. 도명에게 힘들게 받은 백구 머그컵(제품이 잘못 나와 상처가 조금 나 있다.), 스위스에서 사 온 구제 시계. 핑크 소금 세 병.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접히는 비싼 자전거. 고양이 도자기. 에반게리온 신지 코스튬 옷. 위스키, 올리브유, 도명이 자필로 적어 준 레시피 모음. 자개 목걸이. 이탈리아에서 사 온 가죽 노트. 명품 향수 3개. 라면 5박스. 도시들을 찍은 사진집.
라디오에 사연을 넣어서 탄 오븐. 대형 크리스마스 양말. 아프리카 여행 중 부족에게 얻은 가면. 고양이 수염. 앙고라 니트. 300분의 1 사이즈로 정확히 고증해서 만든 모형 비행기. 타조 알 공예품 5점. 수압이 좋은 마약 샤워기 헤드. 세상에서 하나뿐인 맞춤 향수.
도명의 스킨 조합 비율이 적힌 쪽지. 직접 그려서 만든 연. 오리털 파카. 리본 30개.
도명의 난데없는 커밍아웃 이후 5년 동안 그가 애인이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5년 동안 쌓인 내기는 이런 거대한 목록의 전리품을 만들었다. 내 말이 맞아, 내 말에 내 소중한 -를 걸지. 하며 시작된 이 내기는 귀한 물건들로 창고를 가득 채우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명이 진짜 동성애자란 패에 물품을 거는 사람들 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이 거대한 목록은 오직 8명에게 돌아갔다. 그 8명은 창고에 누워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곧 이 전리품들을 나누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겠지만 일단은 승리에 취해 있었다.
“아니야!! 그 사람이 정말 대표님 애인이라고?! 러브레터는 그냥, 대표님이 글을 잘 쓰시니까 대리로 써달라고 부탁한 걸 수도 있잖아! 그게 왜 대표님이 그 남자랑 사귄다는 증거야?”
타인의 기쁨으로 가득 찬 창고 안에 누군가 들이닥쳐서 소리쳤다. 그리고는 창고 두 번째 칸에 있는 고양이 도자기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뺨에 차가운 도자기 고양이 볼이 아련하게 비벼졌다.
“유리 씨, 저 봤어요. 대표님이…… 그분이랑 격렬하게 키스하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나만 고양이가 없기에, 사 온 애란 말이에요. 고양이가 없는 나한테 이 사랑스러운 도자기 고양이라도 없으면…… 나는!”
“그렇게 키우고 싶으면, 제발 좀 키워요.”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고양이도 외로움 탄다고 했단 말이에요. 집에 매일 혼자 있을 텐데!”
“유리 씨, 하지만 저 녀석을 걸었잖아요. 하아, 제가 고양이 인형을 받았거든요. 털이 복슬복슬하고 포근해요. 그거라도 줄까요?”
“네……!”
왠지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틀 것 같았다.
***
도화는 식사를 끝낸 후 배가 빵빵해진 채 차 시트에 앉아 있었다. 도명은 차에서 내리다 말고 도화를 향해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진짜 안 내려요?”
도명이 차에서 기다리겠다는 도화를 향해 재차 물었다. 도화가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는 여전히 자신이 동성애자인 걸 알고 있는 직원들의 시선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용기는 안 생길 것 같았다.
“나한테 집에 데려다 달라 하든가요. 차 안에서 뭘 기다려요.”
“저 때문에 도명 씨가 더 늦게까지 야근하는 건 싫어요. 아니면, 제가 알아서 가겠다는 걸 보내 주시든가요.”
“정신없는 상태에서 대중교통 타는 건 위험해요.”
“안 그래요.”
“그래요. 아니면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려요.”
“거기도 사람들 왔다 갔다 하던데요.”
“차 안에서 답답해서 한 시간 넘게 어떻게 기다려요.”
“사방이 막혀 있는 여기가 제일 안전해요. 차 유리에 선팅도 잘 되어 있고요.”
도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도화 씨가 힘이 이렇게 센데 누가 도화 씨를 해쳐요. 거기다가 회사 대표 애인인데.”
“여기가 좋아요.”
“아니면, 회사에 옥상 정원 있거든요. 이 시간엔 사람 거의 없으니까 거기서 기다리든가요.”
“저 정말 잘 기다릴 수 있는데요.”
“내 애인이 죄인처럼 이런 데 박혀 있는 게 내가 꼴 보기 싫어서 그래요.”
“……네.”
“이제야 조금, 아주 조금 착하네.”
도명은 도화에게 옥상 정원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 준 후 사무실로 올라갔다. 도명이 나타나자 분주하게 일하고 있던 직원들이 손가락 움직임이 쫙 멈췄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당신을 신경 안 쓴다는 듯이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명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저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까 안 그런 척하지 맙시다. 개인사로 인해 여러분의 업무를 방해 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미안한 와중에 염치없게도 부탁 하나만 합시다. 혹시 회사 안에서 내 애인과 마주치면, 음…… 그래요. 그를 개복치라 생각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 줍시다.”
“개복치요?”
“네. 그러니까 저와 달리 커밍아웃에 공포가 심하니까 무심하게 툭 건드려도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내 애인 놀라게 하면 제가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음 이번에는 저도 감정적이게 될 것 같네요. 우리 개복치 잘 부탁드립니다.”
***
도명의 회사는 회사 건물 전체가 금연 구역이었다. 건물 안은 물론이고 건물 밖도 금연 구역이었다. 한마디로 회사부지 안, 그 어디에도 담배를 피울 곳은 없었다.
하지만 도명이 그렇게 정해 놓은들 회사 안에서 어떻게든 담배를 피우려고 노력하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도명이 이 회사 건물로 자신의 주거까지 해결하던 암흑의 시절을 지나 그가 회사 건물에서 독립을 해 버렸다.
도명도 문 하나만 열면 사무실이 쫙 펼쳐지는 그 환경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건물 설계에 신경을 많이 써서 쾌적함에 중점을 많이 두었지만 심리적으로 집에 누워 있어도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일과 사생활이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는 건 충전이 제대로 되지 않는 핸드폰이 된 기분이었다.
도명이 회사 건물에서 나가고 숙식을 해결하던 곳은 직원들의 사랑방이 되어 버렸다. 명절 같은 날에 친척들의 등쌀에 내려가기 싫은 사람들은 도명이 거실로 쓰던 곳에 옹기종기 모여 온수 매트 위에 애벌레처럼 누워 하루 종일 영화와 TV를 보았다.
그러다 전화가 오면 사무실을 배경으로 영상통화를 했다.
도명의 침실은 낮잠을 자거나 부득이하게 철야를 할 경우 여직원들이 쓰라고 2층 침대 여러 개가 들어섰다. 좀 멀리 떨어진 도명의 작업실에도 남직원들이 쓰라고 2층 침대가 들어섰다.
도명이 쓰던 샤워실은 침실과 연결되어 있어 여직원들이 쓰고 남직원들을 위해 따로 샤워실을 만들었다.
도명이 나가고 흡연하는 사람들이 바란 것은 예전보다 그가 회사 안에서 담배 피운 흔적을 찾는 일이 확률적으로 적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명은 여전히 흡연자들을 찾아내고 고문하는 실력이 줄어들지 않았다.
도명은 건물 구석구석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담배꽁초 사진과 주변 모습을 꼼꼼하게 찍었다.
그리고 버려진 담배꽁초를 비닐 팩 안에 신중하게 집어넣고 들고 와 여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렇게 도명이 의식을 치르듯 그 행위를 반복하는 내내 담배꽁초의 주인은 담배 피우며 푼 스트레스보다 곱절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범인을 못 찾으면 직원들의 DNA를 일괄적으로 걷어 간 후 담배꽁초에 묻은 타액과 대조해 볼 기세였다.
하지만, 도명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들은 이건 그저 범인을 말라 비틀게 하려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직원 중 한 명이 담배꽁초를 버린 이가 회사를 방문한 외부인일 거라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도명의 집요한 의식은 계속되었다. 고통이 지나치면 점점 무뎌진다고 다들 대표의 기행에 그러려니 하던 어느 날 도명이 직원 중 한 명의 책상 위에 막대사탕 1000개를 올려놓고 갔다.
갑자기 엄청난 양의 막대사탕을 받은 이는 얼떨떨해했다. 도명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스트레스는 이걸로 푸세요.”
“네?”
“담배는 몸에 나쁘잖아요.”
“저는 아닙니다.”
그가 오리발을 내밀자 도명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싸늘한 표정의 도명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게 된 그는 떨리는 팔을 겨우 움켜잡으며 모기 같은 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담배 생각 날 때마다 이거 입에 물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게, 줄어들어야 할 텐데.”
도명이 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열심히 먹겠습니다.”
“떨어지면 부담 갖지 말고 말해요.”
“아뇨. 계속 신경 쓰시게 할 순 없죠.”
“말해요. 권유 아닌데요.”
“아. 네. 그래야죠. 그러겠습니다.”
“아, 다른 사람 줘도 되긴 하는데 통계는 정확하게 해서 보고해요. 그럼 수고하세요.”
“네.”
가혹한 막대 사탕 징역을 받은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재수 없게 걸려서 저렇게 집요하게 관리 대상이 될 바에야 담배를 회사에서 피우는 대신 그에게 막대 사탕을 받아 갔다.
시계는 어느새 저녁 9시에 가까워졌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일 시간이었다. 그래도 일을 빨리 끝난 승리자들이 꽤 되는지 사무실 안에는 사람 수가 부쩍 줄었다. 다른 사람들이 퇴근하니 야근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왜 나만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왜 나는 그들처럼 행복하지 않은가. 남자 둘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두 남자는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두 남자가 퇴직할 때까지 막대 사탕 징역을 받은 수영 씨의 자리로 가서 사탕 6개를 챙겼다.
수영 씨는 운이 좋게도 오늘 일을 일찍 끝내고 퇴근을 했다. 그래서 포스트잇에 두 남자가 자신들의 이름과 가져간 막대 사탕 수를 적어서 모니터 위에 붙여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수영 씨가 회사에 오면 엑셀에 막대 사탕의 수요에 대해서 정리할 것이다.
그는 제발 조만간 누군가 호기롭게 회사부지 내에서 담배를 피워서 이 추가 업무를 넘겨 줄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두 남자는 영원히 고양이 도자기를 잃은 슬픔에 빠져 업무 속도가 느려진 유리 씨의 책상을 가볍게 두들겼다.
“일도 잘 안 되는데 좀 쉬어.”
그가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유리도 애연가 중 하나였다. 그것도 고급 시가를 모으고 맛보는 것에 맛에 들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회사 안에서의 금연은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양보다는 질로 승부했기에 얼마나 자주 피울 수 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 자신의 엉덩이 자국이 남은 가죽 소파에 앉아서 아껴뒀던 시가를 피우는 것은 하루의 치유 포인트였다. 유리는 턱짐을 지며 무게감 있게 물었다.
“맛은요?”
“초콜릿에 체리 풍미가 섞인 거야.”
“설마 그 초콜릿 맛이긴 한데 화이트 초콜릿 나부랭이는 아니죠?”
“유리 씨, 나 무시해? 다크 초콜릿이야. 무려 2개나 있지.”
남자가 자랑스럽게 사탕 2개를 흔들어댔다.
“세상에. 그거 별로 없는데, 어떻게 구하셨어요?”
“사탕 통 바닥까지 긁었지.”
남자가 호기롭게 웃었다. 유리가 물건에 만족한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야근의 피로와 고통을 잠시 환기하기 위해 막대 사탕들을 들고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
“왜 대표님은 왜 항상 맛을 믹스로 사 오시죠?”
“서류 올려 봐요. 유리 씨가 좋아하는 맛으로 따로 챙겨 주실지 누가 알아요.”
“대표님 같은 분이 애연가의 그런 보고서를 잘도 예쁘다고 보겠습니다. 이것들이 사탕을 내려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맛까지 잘 골라오라고 요구한다고요.”
“왜. 저번 유리 씨 직급 올려 주면서 대표님이 시가 선물해 줬잖아. 완전 구하기 힘든 걸로. 애연가를 생각보다 안 미워할 수도 있어.”
“그거 받으면서 저 감동 먹으면서 솔직히 동시에 소름 돋았어요.”
“왜요?”
“이것은 미끼라고 생각했죠. 회사 안에서 그 시가 껍질 끝자락만 떨어져도 바로 범인 잡히는 건데.”
“설마.”
“그나저나 수영 씨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고 잡았을까요? 담배도 엄청 흔한 것 피우던데. 그것도 담배라고는 입 근처에도 안 대시는 분이. 수영 씨 CCTV 사각지대 계산해서 피웠다던데. 수영 씨 보안 팀에 친구 하나 있잖아요.”
“수영 씨를 잡은 대표님도 징글징글하지만 수영 씨도 뭘 그렇게까지 해서 피워야 하나 싶다.”
“그런 심리 아니었을까요? 왜 대표님과 세기의 대결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도전적인 마음으로 담배꽁초도 일부러, 안 치운 거고요.”
“아닐걸요. 담배꽁초 몸에 숨겨서 들어오면 냄새 예민한 대표님한테 몸에 냄새 배서 들키고, 저번에 누가 완벽히 은폐한답시고 담배꽁초 수시로 화장실 변기에 버려서 물 넘친 사건으로, 오히려 담배꽁초 처리할 용기가 없었던 걸 수도 있죠.”
“아니, 진짜, 그 많은 직원들 중에 수영 씨를 어떻게 잡은 거예요? 명탐정이야, 뭐에요?”
“학자들을 놀라게 한 한스라는 말이 있었거든. 사람이 내는 어떤 문제도 맞췄어. 드디어 인간과 지능이 비슷한 존재를 찾았다고 했을 정도였지. 시계도 보고, 근대수학 문제도 맞추고, 며칠 전 왔다 간 사람의 얼굴도 기억해서 사진 위에서 정확히 말굽을 두드렸대. 동물학자, 생물학자. 물리학자들이 와서 한스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정답을 알 수 없었어. 슬슬 한스의 지능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 비밀이 드디어 밝혀졌지. 말굽을 두들겨 정답을 맞히는 한스의 비밀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반응을 살필 줄 알았던 거야. 왜냐하면 입회자도 모르는 문제는 한스도 못 맞췄거든. 굽으로 바닥을 두들기면서 입회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거지. 아마, 대표님도 그런 거 아닐까? 그래서 매일 담배꽁초를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 거지.”
“아. 그것도 소름 돋는데요!”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BISCUIT FOREST의 옥상 정원에 왔다. 회사 옥상에 만든 정원일 뿐인데 매년, 아름다운 10대 정원 안에 들어가는 곳이었다.
최근에는 이곳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고 가서 사람들이 저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3년 주기마다 회사에서 주제를 잡고 정원 기획하는 것은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회사 건물이 아무래도 조금 외진 곳에 있다 보니까 옥상으로 올라오니, 낮은 건물인데도 눈앞이 탁 트였다. 넓게 펼쳐진 암청색의 밤하늘 아래 붉은색 들판이 펼쳐졌다.
여우꼬리라는 풀로 가득 채워진 옥상 정원 한가운데에는 방부 목으로 들판을 가로지를 수 있는 살짝 떠 있는 길이 하나 나 있었다. 들판 끝에는 인공적인 맛보다 자연적으로 난 숲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작은 숲이 보였다.
들판을 가로질러 초록색 터널 같은 숲으로 들어가면 둥근 땅 안에 감각 있는 벤치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벤치 주변엔 나무들과 덩굴 식물들이 울창하게 감싸고 있었다.
큰 스케일의 식물과 키 작은 식물들의 조화가 훌륭했다.
세 사람은 익숙한 공간임과 동시에 여전히 황홀한 기분이 들게 하는 작은 숲에 들어와서 막대 사탕을 빨았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건 아쉽지만, 이런 곳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건 공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에는 모두 공감했다.
세 사람이 앉은 곳 맞은편에 누군가 담요를 두르고 작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도화였다. 도명이 담요를 챙겨 주며 심심하니 취향이 아니더라도 읽으라고 단편 시집을 하나를 쥐여 준 것이다. 어차피 도화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20분이 한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뒷좌석에 놓인 시집을 쥐여 주었다.
지인의 출판 기념회에 갔다가 받은 책이었다.
덩굴 식물이 만들어 놓은 커튼 같은 차양과 인공조명으로 모든 곳을 밝힐 수 없는 탓에 건너편 벤치에 앉은 도화의 존재는 미스터리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은연중에 그냥 회사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
도화는 옥상 정원을 보고 두려운 기분을 잠시 잊고 낭만에 젖어 있었던 터였다. 거기다가 도명이 대충 읽으라고 쥐여 준 시집도 공간의 분위기 때문인지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어 보기 좋았다.
책을 읽다가 활자 때문에 조금 피곤해 지면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면 나뭇잎들 사이로 별이 아스라이 반짝였다. 서울 근교에서 이런 밤하늘을 본다는 게 신기했다. 땅값이 비싸다고 무조건 모든 것이 가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낭만에 젖어 있었는데 어딘가 시끄러운 세 명이 도화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폰은 장식이 된 지 오래였다. 노래 가사 때문에 활자를 읽는 데 집중이 잘 안 되었다. 그래서 노래를 끄고 이어폰만 꽂고 있었다.
적당히 소리가 가려지는 게 집중하기 좋았다. 도화는 토끼 굴에 고립된 사람처럼 세 사람의 발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우리 말고 야근하는 사람 또 있나 보네. 불쌍한 사람.”
그가 실루엣만 보이는 도화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도화는 괜히 덩굴 식물을 한 줄기 한 줄기씩 모아 자신의 얼굴 쪽으로 몰아넣었다.
“아직까지 야근하는 사람 누구누구 있지?”
그들의 입에서 동료들의 이름이 하나둘 나왔다.
“우리가 탑 5 안에 들어간 거야? 아 슬프다.”
“탑 5는 아니죠. 마지막으로 대표님.”
“대표님 아직 안 들어가셨어?”
“네.”
“그나저나 대표님도 집에 못 들어갔다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네.”
“그러게. 모처럼 애인도 놀러 왔는데.”
“같이 대표실에 있나. 아까처럼?”
“저녁 식사 이후에는 아무도 들어가는 거 못 봤다는데요.”
“그러게. 그렇게 대표님이 대대적으로 내 애인 놀라게 하지 말라고 공표까지 했는데 마주친 사람이 없네.”
도명의 회사는 내실이 있긴 해도 규모는 중소기업이었다. 얼굴만 스쳐 지나가도 어느 부서의 누구인지는 다 서로 긴밀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 저 덩굴 장막 안의 사람이 동료일 거라고 생각하고 도화가 누워 있는 벤치로 다가와 덩굴 장막을 걷으며 말했다.
“저 대표님 애인 봤어요?”
그리고 덩치는 들소 같으면서 생쥐처럼 겁먹은 도화와 얼굴이 제대로 마주쳤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렸다. 그는 낯선 얼굴에 본능적으로 그가 대표님의 애인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덩굴을 다시 내려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개복치가 여기 있어!’
‘아, 진짜요?’
‘겁먹은 표정 보니까 개복치가 확실해.’
‘아 그런데 마치 기분 나쁜 사람을 봤다는 듯이 인사도 안 하고 뒷걸음질 치면 어떻게 해요!’
‘개복치라잖아! 인사했다 놀라 죽으면 어떻게.’
‘지금 이렇게 대하는 게 더 상처죠! 그냥 자연스럽게 인사했어야 개복치가 마음 아파 안 죽죠.’
‘아니, 나 근데 대표님 외에 동성애자 처음이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데?’
‘그냥 사람 대하듯 하면 되죠! 그런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차별 아니에요? 대표님한테 하듯이.’
유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손을 허공에서 막 휘저으며 말했다.
‘대표님은 개복치가 아니잖아. 무심코 하는 어떤 말이 사람을 죽이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유리 씨는 알아?’
‘그냥 인사 정도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인사했다고 놀라 죽진 않아요. 눈까지 마주쳤는데 갑자기 온 지 얼마 안 된 우리가 우르르 사라지는 건 너무 웃기잖아요. 개복치가 그 정도로 어이없이 죽어요?’
‘응. 그렇게 어이없이 죽는댔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이렇게 못 볼 것 봤다는 듯이 사라지는 게 더 기분 나쁠 것 같아요. 일반 사람 대하듯이! 그리고 호의를 담아서 대하면 되잖아요.’
유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사탕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구하기 힘들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그 사탕을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결심했다는 듯이 사탕을 손에 쥐고 개복치를 향해 갔다. 도화에게 다가가는 유리의 팔목을 그가 잡았다.
‘유리 씨! 이건 너무 위험해.’
‘그러게 눈 마주쳤을 때 자연스럽게 인사했으면 끝날 사건을 왜 키워요!’
유리는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며 한 손은 사탕을 들고 다른 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도화를 향해 천천히 전진했다. 도화가 긴장한 듯 시집을 꽉 쥐고 있으면 전진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도화는 애써 ‘나는 주변 상황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쿨한 남자다.’라고 하며 애써 자신을 세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여자가 자꾸 사탕을 들고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는 도화의 발 끝자락에 사탕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후퇴했다. 그리고 해냈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쓸어 넘기며 동료들을 향해 엄지를 척 올렸다.
‘아 방금 유리 씨 행동…….’
‘방금 유리 씨가 한 건 평소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 밥 줄 때 하던 거잖아.’
‘아! 사람한테 하는 행동이 아니잖아요! 아까 일반 사람 대하듯이 하면 된다고 그래 놓고서.’
‘대표님 애인을 지금 무슨 취급한 거야!’
‘이래야 겁을 안 먹는다고요!’
‘아니, 사람한테 먹이를 왜 그런 식으로 줘. 먹이 아니고, 먹을 거. 어쨌든.’
‘틀렸어! 도망가! 개복치가 더 놀라기 전에 도망가! 우리가 개복치를 해쳤다는 걸 대표님이 알기 전에 도망가자고!’
‘그래요.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면 못 먹거든요.’
‘고양이 아니라고!’
세 사람이 아옹다옹하고 있을 때 일을 다 끝낸 도명이 도화를 데리려 옥상 정원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도명은 세 사람과 마주쳤다. 세 사람은 절망에 휩싸였다.
“아. 대표님도 퇴근 안 하셨네요.”
“네. 하지만 이제 하려고요.”
“아이고 좋으시겠다.”
“네. 다들 늦은 시간까지 수고가 많습니다.”
도명이 주변 상황을 자연스럽게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자신의 직원들이 지나치게 긴장한 것이 한눈에 보였다. 도명은 개복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도화 씨, 이제 집에 가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말했다.
“네.”
도화는 그제야 살았다는 듯이 발밑에 덩그러니 놓인 사탕을 주머니에 빠르게 넣은 후 도명에게 다가왔다. 도명과 도화가 사라진 후 세 사람은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었다. 그리고 개복치의 기분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도화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저 주머니 속 사탕을 손에 쥐고 굴리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도화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아. 아니요. 별거 아닙니다.”
“혹시, 아까 그 세 사람이 도화 씨에게 무슨 실례를 저질렀습니까?”
“……흠.”
도화는 말없이 턱을 긁기만 했다.
“했습니까?”
운전대를 잡은 도명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탕을 준다는 건 어쨌든 좋은 뜻입니까?”
“달콤한 걸 주는 건 보통 호의긴 하죠.”
“……아. 그렇구나.”
“왜요? 아까 정원에서 분위기 이상하던데.”
“사탕은 어쨌든 좋은 뜻이죠?”
“그렇다니까요. 물론 맛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도화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껍질을 조심스럽게 깠다. 그리고 사탕을 다시 말없이 노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혀끝으로 사탕 표면을 핥아봤다. 그리고 사탕을 다시 노려봤다.
“맛이 어떤데요?”
“음, 맛있어요.”
“표정이 애매한데요.”
“아니요. 아니요. 보통 맛으로 맛있어요.”
“애매한 맛이네.”
“보통 맛으로 맛있다는 건 굉장히 좋은 거예요.”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 사탕 어디서 사는지 알아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운전하면서 도화가 들고 있는 사탕을 흘깃 봤다.
“네. 제가 회사 사무실에 대량 구매한 막대 사탕입니다. 그냥 고민할 것도 없이 맛이 다양해서 삽니다.”
“아. 이 맛으로만 구하실 수 있어요? 취향이라서요. 달달하면서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향긋한 과실 맛이 납니다.”
“흠. 구해 볼게요. 보통 믹스만 사 가지고서요. 그나저나 지금 도화 씨 기분 괜찮아요?”
“음, 그냥…… 보통 날이네요.”
“보통 날이긴요. 도화 씨에게 오늘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네.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냥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기분이에요. 사탕이 생긴 것 빼고는요.”
도화가 물고 있던 사탕을 입에서 빼낸 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입안에 넣고 굴렸다.
“그런데 도명 씨 회사에서 엄청. 무섭나 봐요.”
“제가요?”
“네. 전 도명 씨 애인일 뿐인데 사탕을 지나치게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줘서요. 마치, 이집트의 어떤 존재가 된 기분이라서, 차라리 나한테 사탕을 얼굴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
도명과 도화는 집 앞에서 헤어졌다. 내일 아침 어김없이 볼 사이인 걸 알면서도 여전히 헤어짐의 순간은 아쉬웠다. 계단 하나만 통과하면 언제든 만날 사이이지만 철근과 콘크리트의 존재감은 언제나 묵직하게 느껴졌다.
도명에게도 도화에게도 피곤한 하루였기 때문에 두 사람 다 다른 일을 할 것 없이 바로 잠에 들 준비를 했다.
도화는 욕실 거울을 보며 괜히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이마의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도명이 헤어지기 직전 그 잘생긴 얼굴로 다가와 입술을 꾹 찍은 곳이었다.
도화는 폼클렌징을 짜서 거품을 낸 후 얼굴에 문질렀다. 괜히 이마 부분을 소심하게 피하며 씻다가 자신이 바보 같아서 결심한 듯 도명이 뽀뽀해 준 이마까지 뽀득뽀득 씻었다. 내일 그가 또 뽀뽀해 줄 거라고 생각하며 흔적 하나하나에 과도하게 집착을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시각 도명은 이를 닦고 있었다. 그는 치과 브로슈어에 나올 법한 칫솔질로 이를 닦다가 칫솔을 입안에 넣은 채로 멈췄다.
도명은 불현듯 도화가 자신의 러브레터 잔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도화의 커밍아웃 사건에 휘말려, 그가 영원히 폐기하고 싶어 하는 그 종이 뭉치들에 대해서 깜빡했다.
도명의 입안에서 치약 거품이 주룩 쏟아졌다. 깔끔한 그의 턱이 바보같이 치약 거품투성이였다.
도명은 여전히 입안에 칫솔을 문 채 핸드폰을 급하게 찾았다. 도명이 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도화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의미 없이 반복적으로 울리기만 하는 신호 대기음이 야속했다.
도명은 이내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오늘 도명보다 정신이 없었던 사람은 도화였다. 그러니 그도 그 종이 뭉치를 챙길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도명은 신경질적으로 제 자리를 빙빙 돌며 어금니 사이에 있는 칫솔을 껌처럼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마지막으로 문제의 종이 뭉치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 당장 확실히 기억나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도화의 가방 안에 있던 종이뭉치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방은 도화가 얌전히 집에 들고 간 게 기억났다. 도명의 얼굴이 차게 식기 시작했다.
그 문제의 가방이 도화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오는 내내 그의 무릎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었는데 왜 그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도명이 가진 일말의 희망은 아주 정확한 근거를 가진 절망이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도화는 다시 다급하게 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도화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벌써, 자나.’
도명은 자신이 자는 준비가 비교적 오래 걸리는 편이니까 털털한 도화라면 이미 다 씻고 침대에 누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명은 이제야 입안을 아리게 만드는 치약 맛을 느꼈고 입안을 급하게 헹궜다. 입안의 치약 거품을 헹구는 것처럼 적색경보가 뜨는 머릿속도 헹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명은 평정심을 찾으려고 일부러 느리게 입가를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백구라면 일부러 자신의 전화를 안 받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현관문 앞에서 기다린다고 이를 닦다가도 입가에 게거품처럼 치약 거품을 묻히며 버선발로 달려 나오던 도화였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어둠이 한참 전에 내린 시간이었다.
도화는 도명에 관해서는 24시간 내내 환영 모드였다. 그런 그가 일부러 전화를 피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면 자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오늘 도화에게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심리적으로 복잡할 터였다.
잠을 자며 정신과 몸을 모두 충전하라고 모든 생체 신호가 도화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런 그를 깨워 러브레터 찌꺼기에 대해서 자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도명은 자신에게 러브레터 찌꺼기를 뺏기지 않겠다고 그것들을 품에 끌어안은 채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도화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결국 검거되어서 상황이 불리해지자 사납게 입까지 털어댔다.
뼈다귀 앞에선 주인을 몰라보는 백구 같으니라고. 도명이 이를 부득 갈았다. 도화에게 러브레터 찌꺼기에 대해 말하는 순간 야밤의 공성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게 하는 편이 진정으로 이기는 법이었다. 백구가 자고 있다면 굳이 깨우지 않는 편이 좋았다. 도명은 발에 쿠션이 있는 실내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조용히 올랐다.
도화는 보통, 두 집이 이어진 문을 무심하게 두는 편이었다. 일부러 열거나, 닫거나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부터 묘한 신뢰감으로 엮여 있었고 굳이 문을 잠가 놓지 않았다. 적어도 도화 쪽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문을 닫아 놓는 편이라면 사생활이 중요한 도명 쪽이었다. 사귀게 된 후에는 도명 쪽도 무심하게 됐지만.
하지만 이따금씩 예외 상황이라는 게 있었다. 이 계단실 자체를 도화가 창고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날은 계단 문 위에 무심하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올려놓고 잊기도 했다.
그래서 도명이 몇 번 신경질적으로 이 문을 두들긴 적이 있었다. 도명이 도화도 신경 쓰이면 자신처럼 자물쇠를 달아놓으라고 한 게 엊그제 같았다.
도명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위에 무언가가 얹혀 있는지 문은 달칵거리다가 다시 무겁게 닫혔다. 도명의 표정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왠지 힘주어 밀면 밀릴 것 같았다.
문을 잠근 것도 아니고 임시로 상자를 올려놨을 뿐이니. 상자 안 물건도 무거운 물건도 아닌 모양이었다.
도명이 잇새로 소리가 안 새어 나오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고 팔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상자가 밀렸다. 하지만 상자 안 물건이 상자 안에서 한쪽으로 쏠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플라스틱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주 커다란 소리는 아니었지만 적막 속에서는 크다면 큰 소리일 것이다.
도명은 문을 바로 안 열고 주변의 기척을 느끼며 눈동자를 조용히 굴렀다. 다행히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명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도화의 집에 들어섰다. 도화가 자고 있느라 도명의 전화를 안 받은 게 맞는지 도화의 방 안에는 온통 어둠이 깔려 있었다. 도명이 핸드폰 안에 내장된 플래시를 켰다.
문을 누르고 있던 상자의 정체는 공포영화 DVD가 담긴 상자였다. 플라스틱 케이스 사이사이에 붉은색과 음침한 어둠이 깃들어진 인쇄물이 엉겨 붙어 있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결계의 향기가 났다. 도명은 뭔가 목 뒤가 싸늘하다고 느꼈다.
도명이 싸늘한 목 뒤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훑으며 공포영화 DVD를 노려봤다.
DVD는 하나하나의 크기는 작아도 상자 하나를 가득 채우면 제법 무거웠다. 거기다가 도명이 들어온 문은 아래에서 위로 열어야 했으므로 중력의 영향까지 크게 받았다. 만약 도명이 들어오는 게 싫었다면 지금 이 정도 크기의 상자 기준으로 상자 안에 DVD를 가득 채워야 했다.
상자 안에는 DVD가 3분의 1쯤 들어가 있었다. 힘을 쓰면 문을 열 수 있는 무게였다. 들어오지 말라고 올려놓은 상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명은 뭔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어두운 방 안 분위기 때문에 드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도명은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열고 주방 겸 거실을 지나쳐 도화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화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도화가 숨 쉴 때마다 천으로 만들어진 언덕이 작게 부풀어 올랐다가 꺼졌다.
도명은 잠든 도화의 실루엣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이내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오늘 도화가 들고 온 문제의 가방을 찾아야 했다. 도화의 가방은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평소처럼 무심하게 책상 위에 턱 하니 올라가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습관적으로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도화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언제나 이 서류가방을 이 책상 위에 올려두곤 했다. 애초에 도화는 가방이 2개밖에 안 됐다. 그래서 찾기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하나는 일상적으로 매는 가방이고 남은 하나는 특별한 날에 매는 조금 비싼 가방이었다. 조금 비싼 가방은 보통 옷장 구석에 박혀 있었고 가죽 표면에 먼지가 내려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도명은 책상 위에 올라간 낡고 검은 서류가방 안을 뒤졌다. 그런데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명은 뭔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도명이 플래시의 강도를 낮게 잡고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가 찾고 있는 러브레터 찌꺼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도명은 자고 있는 도화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카메라 플래시를 비췄다. 도화가 몸을 뒤척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도명은 카메라 플래시를 거두고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내 러브레터 찌꺼기는 어디로 간 거지?’
그렇게 사건은 미스터리로 빠졌다. 도명은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기댄 채 생각에 빠졌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애초에 지금 도화 씨한테 없나? 하긴, 그 소심한 인간이 언제 뺏길지 모르는데 그 가방으로 물건을 날랐을 리가. 밥 먹은 후 날 기다리면서 물건을 처리했나? 그렇다면 어떻게? 아니야. 상대는 개복치야. 회사 안에다 숨겼을 리 없어. 나 없이 혼자 회사로 돌아와서 그걸 들고 갈 엄두는 내지 못할 거야. 대체 그 종이들이 어디 간 거야? 설마. 사건의 폭풍우 속에 회사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건 아니지? 아. 그건 그거대로 끔찍한데. 미련 가지지 말고 그런 건 진작 파쇄해야 했어. 고작 메모들일 뿐인데 미련 떨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
도화의 방에서 도명의 발소리가 사라진 지 약 15분이 지난 후였다. 도화는 눈을 살며시 떴다. 도화는 무드 등을 켠 후 정적 속에서 5분을 더 기다렸다. 그리고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 입꼬리를 조용히 올렸다.
‘내 보물을 지켰어. 대담하게 그냥 가방으로 옮기기를 잘 했지. Simple is the best.’
도화는 대놓고 무릎 위에 놓인 가방의 존재 때문에 불안할 때면 괜히 도명의 회사 직원이 준 사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불안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는 듯이 말이다.
‘도명 씨의 말이 맞아. 단 거를 준다는 건 호의지. 깊이 생각할 게 뭐가 있겠어.’
도화는 씻고 있다가 갑자기 도명에게서 전화가 오자 기쁜 표정으로 핸드폰 쪽으로 달려가다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화는 본능적으로 도명이 러브레터를 회수 못 한 걸 생각해냈다고 생각했다.
도화는 당장 도명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더 달콤한 걸 쥐기 위해서는 당장의 본능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빈 수레 작전도 훌륭했어. 역시 결계엔 공포영화 DVD이지. 다만 이번엔 방어벽이나 공격이 아니라 나팔수였을 뿐.’
도화는 일부러 꽉 채우지 않은 DVD 상자를 문 위에 올려놨다. 도명이 팔에 힘을 잔뜩 주며 올려야 할 정도로 적당히 무겁게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상자가 한꺼번에 넘어가게 했다. 그래야 상자 안 DVD들이 최대한 요란하게 소리를 낼 터였다.
도화는 침대 틈 사이에 검은 실로 연결한 종이 뭉치를 슥 들어 올렸다. 종이 뭉치 자체는 급한 대로 금속 집게로 뭉쳐 놓은 후 집게 끝에 검은 실을 묶었다. 도화의 손 위에 도명이 그토록 찾았던 종이 뭉치가 있었다.
‘나쁜 사람.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훔치러 야밤을 틈타 쥐새끼처럼 들어와? 하지만 난 당신이 그럴 줄 알았어. 당신이 내 것을 훔치러 들어올 줄 알았다고!’
도화가 종이 표면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으며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눈을 밝혔다. 살갗에 종이가 느껴지자 도화는 심신의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무드 등 아래서 도명의 메모들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도화의 얼굴이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아. 도명 씨 낙서 귀여워. 아, 러브레터를 32장이나 받다니.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새벽 한 시가 되도록 도화는 도명의 메모를 읽느라 눈이 초롱초롱했다.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 박혀 있듯이 행복이 총총 박히는 밤이었다.
도화가 종이 곳곳에 활개를 치고 있는 개 그림과 백구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 의아해하고 있을 때 다시 어둠 속에서 누군가 희미하게 계단 발판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의 귀가 초식동물의 커다란 귀처럼 쫑긋거렸다.
‘또 내 보물을 훔치려 그놈이 돌아왔어! 끈질긴 놈!’
도화는 신속하면서 동시에 조용하게 무드 등을 끄고 종이 뭉치를 침대 틈 사이로 빠르게 낙하시켰다. 도명이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아까보다 꼼꼼하게 도화의 방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화가 잠든 좁고 어두운 침대 틈 사이까지 찾아보는 건 무리였다.
도명이 어둠 속에서 잠든, 아니 잠든 척하는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도명의 입술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지친 얼굴로 도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말없이 잠든 도화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힘주어 꼬집다가 이내 손가락 끝으로 아프지 말라는 듯이 살살 문질렀다.
“나 참, 혼자만 맘 편하게 자면 다입니까? 아주 얄미워 죽겠네.”
도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엄청 순하게 자네. 우리 도화 씨가 순하긴 엄청 순하지.”
‘내 보물을 훔치러 온 도둑놈 어서 가! 남은 부분 다 읽어야 한단 말이야.’
도명이 지친 듯 도화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도화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도명은 그 상태에서 도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의 살 냄새를 맡았다.
도명은 찾고 있던 것을 못 찾아서 느껴지는 불안함과 허전함을 도화의 살 냄새로 채우고 있었다. 이쯤 되니 도화가 중간에 잠에서 깨든 말든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 마음들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거야. 아 진짜 속상하네. 그나저나 백구 냄새 맡으니까 좋네. 아 편안하다.’
도명의 마음은 도화의 침대 밑에서 자기들끼리 소곤소곤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도명은 출근하는 도화를 불러 세웠다. 도화는 도명이 부른다고 본능적으로 꼬리를 쳤다. 묘하게 저기압인 도명과는 달리 도화는 아침부터 아주 기분이 좋았다. 한 화면 안에 한쪽은 해가 쨍쨍하고 한쪽은 폭풍우와 함께 번개가 치고 있었다.
커밍아웃에 공포가 심한 사람이 어제 절대다수의 사람 앞에서 얼떨결에 커밍아웃을 한 사람 같지 않았다. 도화가 도명의 얼굴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도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도화의 이마에 손가락을 세게 튕겼다.
도화의 이마 정 중앙에 빨간 점이 생길 정도로 제대로 때렸다.
도화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그대로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정말 이마에서 느껴지는 고통조차 달콤했다.
“아침부터 웃음이 왜 이렇게 헤픕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기분이 왜 이렇게 좋습니까?”
“도명 씨는 제가 기분이 좋은 게 싫습니까?”
“아니요, 이렇게 기분 좋아하니 귀엽습니다. 아주 마조히스트답게 맞아도 싱글벙글 웃고, 아주 자랑스럽습니다. 됐습니까?”
“네. 됐습니다.”
“그나저나 도화 씨가 훔쳐 간 제 러브레터 부스러기는 어디 있습니까?”
“훔쳐 간 거 아니고 받아 간 겁니다.”
“훔쳐 간 거죠.”
“받아 간 거죠.”
“제 손으로 도화 씨에게 직접 건네준 적 없고, 영원히 폐기 처분될 물건이었습니다.”
“어차피 버릴 것이었으면 도명 씨가 소유권을 포기한 거 아닙니까. 새로운 운명을 찾고 좋은 주인 찾아갔습니다.”
‘우리 백구 목줄 안 맨 지 꽤 됐구나.’
도명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벨트를 만지작거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하하, 우리 스파이가 입을 아주 잘 놀리네요.”
도명이 도화의 입술을 꽉 쥐고 흔들었다. 도화의 입술을 쥔 손에 감정이 제대로 실려 있었다.
“나는 착하고, 순한 사람 좋아합니다.”
“압니다.”
‘아, 얄미워 죽겠네. 갑자기 뭐가 이렇게 자신감이 넘쳐. 이 새끼 개복치가 하룻밤 사이에 5m씩이나 자라서 꼬리를 쳐 흔들고 있어. 아, 보기 싫어. 뭔가 얄미워. 이건 혼내야 해.’
“지금 도화 씨 어디가 순합니까? 꼬박꼬박 말대꾸나 하고 말입니다. 안 되겠습니다. 엉덩이 까고 저쪽 온실로 따라와요.”
도명이 말한 온실에는 거대하고 희귀한 선인장들로 가득했다.
“잘못 인정할 때까지, 엉덩이 맞는 겁니다. 지금 도화 씨 출근 시간까지 여유시간 겨우 30분 있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손바닥에 밀착시키고 쥐고 흔들며 말했다.
“네!”
도화가 기분 좋아서 엉덩이를 살살 흔들며 도명의 뒤를 쫓았다.
“누가 보면 제가 도화 씨에게 소풍 가자고 한 줄 알겠습니다.”
‘도화 씨 밤새 마약 했어요? 뭐가 이렇게 지나치게 업 되어 있어.’
“뭐 합니까? 빨리 엉덩이 까요.”
도화가 유리로 된 온실을 신경 쓰여 하다가 식물들로 가득 차 있는 내부를 보고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지 주섬주섬 정장 바지를 벗었다.
“더 이상 못 맞겠으면 ‘저는 도둑질을 한 나쁜 개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참고로 세이프 워드 안 통합니다. 매질을 더 이상 안 당하는 방법은 그 종이 부스러기가 어디 있는지 말하는 것뿐입니다.”
“네.”
도명이 바지에 걸쳐 있는 가죽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손바닥 위에서 가죽 벨트를 튕겼다.
“그리고 제 러브레터 부스러기 위치도 말하세요.”
“…….”
“말할 때까지 출근 못 합니다.”
“……네?”
“농담 아닙니다.”
도명이 소매를 걷으며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도화가 도명의 얼굴을 보았다. 턱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고 팔뚝에 힘줄이 선 게 이 모든 상황이 현실과 플레이 사이를 오가게 될 것임을 예상했다. 이건 확실히 위험했다.
“위치, 말하면 뺏어갈 겁니까?”
“당연하죠. 그러려고 묻는 건데요.”
“그리고 그 녀석을…… 해칠 거고요?”
“화형시킬 겁니다. 아주 확실하게요.”
도화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잘못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그냥 온실이 아니라 거대한 가시로 가득한 고문실임을 깨달았다.
도화는 살며시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를 위로 추슬렀다. 그리고는 눈을 조심스럽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입구 쪽을 향해 굴렀다. 도화가 숨을 깊이 내쉬고 발을 내지려는 찰나 도명에게 고환이 잡혔다. 도화는 예민한 부위가 잡히자 다리 사이를 좁히며 동동거렸다.
도명은 자세를 제대로 잡으라는 듯 도화의 뒷목을 잡고 꾹 눌렀다. 도화의 이마가 화원의 작업대에 부딪혔다. 도명이 식물들의 일지를 기록하는 곳이었다.
작업대 구석에는 세월이 만들어 놓은 자연스러운 누런색이 깃들어 있는 종이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도화가 발버둥을 치자 작업대가 흔들렸고 도명이 정리해놓은 일지들도 흔들렸다.
낯선 장소에 갑자기 놓이게 된 녀석들이 어떻게 길들어지는가에 대한 섬세한 기록들이었다.
이 일지들은 도명의 화원에서 중요한 재산 중 하나였다. 실재하는 식물들 이상으로 중요했다. 세상에서는 기록이 그 기록의 대상보다 더 중요하기도 했다. 흐르는 시간 안에서 숨 쉴 수 있는 것보다 숨 쉴 수 없고 영원한 것이 더 가치가 있기도 했다.
도명은 그것들이 헝클어지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도명이 인상을 쓰며 모종삽의 날카로운 면을 도화의 손목 옆에 찍었다. 도화는 소름이 돋았다.
‘도명 씨……?! 진짜? 내 애인은 나한테 이런 짓 하고 있는 게 현실이야?!’
“교육받는 태도 잊었습니까? 자세는 낮게, 태도는 굳건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도, 도명 씨.”
“다리는 왜 이렇게 조신합니까?”
도명이 X자 모양으로 꼬인 도화의 다리를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하, 하지만 도명 씨가 제 거기를…….”
“아픕니까?”
“네!”
도화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핑 돌아 있었다.
“더 이상 아프기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었습니까?”
분명히 전에 도명이 가르쳐 줬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직 기본이 몸에 완전히 스며들기 전에 도화는 도명과 연애라는 복합적인 문제를 풀었다.
완전히 체화되지 않은 기본기는 그렇게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도명은 기억해 내라는 듯이 도화의 고환을 더욱 세게 쥐어짜듯이 잡았다.
“흐앗!”
“아, 알려 주세요. 제발요.”
“하? 알려 줘요?”
도명이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아니, 이걸 본격적으로 SM을 가르쳐 주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건데 그걸 까먹다니. 가르쳐 주는 입장에서 기운이 쫙 빠지는 일이었다. 그것도 도명처럼 유능한 선생을 둔 도화가 이러니 황당할 만도 했다.
“이건 기본입니다. 지금 당당하게 기본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저한테 뭐, 가르쳐 주세요?”
도명이 고환의 두 덩어리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알큰하게 긁어 대며 말했다. 너무 아파서 다리가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흥분감이 도화의 하체에 지르르 감돌았다.
“한 번만 더 가르쳐 주세요. 흐아.”
“순종하는 겁니다.”
도명이 도화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맞다!”
도명은 천연덕스럽게 외치는 도화가 얄미워 그의 엉덩이를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도화의 입에서 묘하게 앓아대는 소리가 울렸다.
“다리 벌리고 자세 잡아요. 한두 번 해 봅니까? 결국 그동안 도화 씨가 는 것 맷집밖에 없잖아요.”
도명이 빨리 자세 잡으라는 듯이 손바닥으로 다시 한번 도화의 엉덩이를 쳐댔다. 도명의 손바닥 안에서 도화의 엉덩이가 물결쳤다. 도화는 숨을 고르며 하체를 엎드리고 엉덩이를 위로 올렸다.
“괘씸하니까 까치발 들어요. 자세가 너무 편해 보이네요.”
“으아. 도명 씨.”
도명이 다시 도화의 엉덩이 휘갈겼다. 도화가 무릎을 바들바들 떨며 까치발을 들었다. 도명은 왠지 도화가 하이힐을 신고 저러고 있으면 더 야할 거라고 생각했다.
보기 좋은 물건이라면 남자, 여자 물건 가릴 것 없이 사들이는 도명이지만, 여성의 특정 복장 같은 건 없었다. 언제나 도명을 성적으로 흥분되게 하는 건, 세련된 선의 남성용 물건이었다.
하지만 도화가 까치발을 들자 다리에 숨겨진 근육들이 묘하게 불끈 올라오는 것을 보며, 조금은 우스꽝스럽게도 빨간색 스틸레토 힐을 신기고 싶었다.
그러면 도화의 길고 강하게 뻗은 다리가 낯선 신발을 신고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어 댈 걸 상상하니 흥분되었다.
이 섬세하고 길게 뻗은 다리 근육들이 움찔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낸다니! 높은 신발을 신으면 자연스럽게 골반과 허벅지 힘도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면 이 귀엽고 힘 좋은 엉덩이도 바짝 조여질 것이다.
거기다가 반들거리는 빨간 색 가죽이라니! 맞아서 빨갛게 익은 살과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아, 나 진짜 변태 새끼네.’
도명은 자신의 상상에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도 도화의 하체를 감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눈으로 도화의 발 사이즈를 본능적으로 재고 있었다.
아무래도, 발 사이즈는 어느 정도 키에 비례한다고 남자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인 도화의 발에 맞는 빨간 하이힐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문 제작해야 하나……? 도화 씨 3주 후면 생일인데 그때까지 가능하나?’
“앗, 저 도명 씨…….”
하체를 숙인 채로 까치발을 드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도화는 도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종아리와 아킬레스건을 멀뚱히 보고만 있자 초조해졌다. 도명이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힘든 자세를 계속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명은 턱짐을 지고 생각에 잠긴 채 도화의 떨리는 꼬리뼈에서 볼기 사이 깊숙한 곳까지 손가락을 일자로 내렸다. 어제 사무실에서 거칠게 한 섹스의 여파로 도화의 애널이 살짝 부어 있었다. 도명이 딱 좋아하는 상태였다.
너무 맞아서 검푸른 색으로 물든 피부색은 섹슈얼한 감정은 전혀 안 느껴지고 인상만 찌푸려졌다. 도명은 적당히 보기 좋은 붉은 색으로 살짝 부어오른 정도가 보기 좋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 도화의 애널이 딱 그 정도였다.
“신발을 선물해 주면 보통 도망간다던데.”
도명이 혼잣말을 했다.
“네?”
‘빨간 하이힐 발목 부분에 검은 족쇄 디자인을 얹어 볼까? 아니, 아니야. 너무 묵직한 디자인은 흉측하니까 얇고 견고한 족쇄 모양으로. 족쇄에 적당히 반짝이는 게 얹어지면 더 예쁘겠지?’
“신발 사 주게요?”
“네.”
“아. 진짜요?”
도화는 힘든 와중에도 도명이 뭔가를 준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지고 행복해졌다. 도화는 기쁜 기분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서 왠지 모르게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도화는 도명이 신고 다니는 신발처럼 멋스러운 가죽 신발이라든지 신기 편하고 젊어 보이는 캔버스 화를 상상했다. 감각 좋은 도명이 사 주는 거면 뭐든 멋있을 것이다.
도화는 오늘 밤부터 도명이 사 주는 신발이 뭔지 상상하며 잠들 것이다. 도화는 행복한 표정으로 작업대 나무판 위에 뺨을 비비적댔다. 32장의 연애편지를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새 신발까지 받다니. 아. 연애가 너무 달다.
도화가 그렇게 행복에 젖어 있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도명의 매서운 손이 다시 그의 살가죽에 날라 왔다. 도화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졌다.
“그래서 제 러브레터 부스러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분위기 험해지기 전에 좋게 말하고 출근도 여유롭게 합시다.”
“그 녀석들은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도화가 내심 자신의 낭만적인 말에 도명이 감동받을 것을 기대하며 말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도명의 손이 매섭게 날아올 뿐이었다.
“개 소리 하지 말아요.”
‘너무해!’
도화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도명의 반응이 서운했다. 도명은 도화의 시무룩한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까치발을 제대로 안 든다고 그의 발꿈치를 구둣발로 툭툭 쳤다.
“진짜, 제대로 해 보겠다는 겁니까?”
도명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도명 씨 어젯밤 사이, 그 녀석들과 정이 들어 버렸는걸요.”
“소름 돋게 내 마음들이 주인에게서 떨어져 나간 인격체인 것들처럼 말하지 말아요. 어디선가 저들끼리 멋대로 활개 치고 다닐 것 같으니까요. 잠깐…….”
도명은 도화의 어젯밤 사이라는 말에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어젯밤 사이 러브레터에 정이 들었다는 건 어젯밤 도화에게 러브레터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시간이 있어서! 어제 도화는 집에 오자마자 대충 씻고 잠에 든 것이 아니었나?
도명의 등줄기에 싸늘한 감각이 감돌았다. 도명의 뇌리에 공포영화 DVD 상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그건 어떤 간악한 장치였음이 분명했다.
“어제, 그 부스러기들 어떻게 옮긴 겁니까?”
“…….”
도화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도명은 본격적인 고문을 시작하겠다는 듯이 가죽 벨트를 짧게 쥐고 도화의 탱탱한 엉덩이를 향해 휘갈겼다.
“읏!!”
가죽 벨트로 맞는 건 생각보다 강도가 셌다. 이걸 여러 번 맞을 생각을 하니 아찔해졌다. 벌써부터 도화의 보물이 된 러브레터를 배신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그 녀석들과 헤어지는 건 싫었다. 러브레터를 태워 버리겠다고 하는 도명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도화는 낑낑대며 벌써부터 발을 동동 굴렀다.
“자세 제대로 잡아요. 난잡스럽게 굴지 말고.”
“도명 씨, 아파요.”
“아파요?”
도명이 다정한 목소리로 도화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도화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럼 말해요.”
“도명 씨.”
“맞을 만한가 보네.”
도명이 연달아 3대를 더 휘갈겼다. 매를 맞는 도화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경직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인이잖아요. 흐아. 너무 거칠어요. 도명 씨, 사랑해요!”
“아, 물론 저도 도화 씨를 매우, 사랑하긴 합니다. 하지만 제 사랑은 온화하면서 동시에 엄격합니다.”
“마감 기간 어긴 도명 씨 잘못도 있잖아요.”
도명은 도화의 반항에 가죽 벨트를 도화의 엉덩이에 다시 휘갈겼다.
“흐아. 으아아아. 방금, 감정 실렸죠! 감정 실린 것 같은데!”
“어느 집 개가 이렇게 시끄럽게 짖습니까?”
“도명 씨네 개요!”
자기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도명의 집 개로 표현하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으며 표정을 최대한 싸늘하게 굳혔다.
“방금 감정 실어서 때렸잖아요. 내가 맞는 소리 하니까 기분 나빠서 감정 실었잖아요. 돔이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돔은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한다면서요.”
도화가 서러운 목소리로 깨갱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찰열로 뜨거워진 자신의 엉덩이를 서늘한 도명의 정장 바지에 비비적대고 있었다.
“마감을 어긴 건 제가 잘못한 게 맞습니다.”
“그런데 왜 맞고 있는 건 저인데요. 억울해요. 너무 억울해요. 그리고 저 다 알았어요! 도명 씨가 속으로 저를 개 취급했단 걸요. 사람한테! 그리고 이왕이면 골든 리트리버나 셰퍼드 같은 멋진 개도 아니고 동네 백구가 뭡니까. 촌스럽잖아요!”
‘백구 네가 촌스럽긴 하지. 그런 의미로 적절하잖아.’
“그것도 제가 잘못한 게 맞습니다.”
“근데 왜 맞고 있는 사람은 저인데요!”
“제가 그런 잘못들을 했다고 도화 씨가 도둑이 아닌 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별개의 사건으로 논점 흐리지 말아요.”
“나도, 버, 벌 줄 겁니다. 도명 씨가 마감 어긴 벌. 그리고 사람을 동네 백구 취급한 것.”
‘얼씨구.’
“일단 그 부스러기들 좀 돌려받고 이야기합시다. 내 잘못은 도화 씨 도둑질에 비하면 참, 가볍지 않습니까? 부스러기, 어떻게 이동시켰습니까?”
도명이 도화가 말이 없자 그의 엉덩이를 가죽 벨트로 다시 휘갈겼다. 도화는 꼬리뼈를 바르르 떨며 흐느꼈다.
“……제 가방으로요.”
도화의 대답에 도명은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이 도명을 모욕하고 있었다. 도명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그러면 집에 와서 가방 안에 있던 걸 어디로 옮겼습니까?”
“알았어요. 돌려 드릴게요. 하지만 제발 태우지만 말아 주세요.”
“싫습니다.”
“왜요. 그 녀석들을 왜요!”
“자꾸 그 부스러기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세포들 같으니까 그만 그렇게 표현해요.”
“태우지 말아요. 그러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단 말입니다.”
“뭐가 이렇게 감상적입니까? 그래 봤자 낡은 종이인데.”
“도명 씨 마음이잖아요. 그것도 저를 향한.”
“어젯밤에 설마 다 읽어 본 건 아니죠?”
“다 읽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요. 참고로 도명 씨, 손 그림 너무 귀여워요. 아기자기하면서 동시에 삐죽삐죽한 느낌입니다. 작고 성격 나빠 보이는 그림이에요. 그래서 더 귀여운 것 같아요.”
도화가 가죽 벨트로 맞아서 얼얼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비비면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명은 자신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시간을 하루만 더 줘요. 이번엔 마감 시간 지켜서 제대로 된 러브레터를 주겠습니다. 완벽하게 하려고 종이도 30가지 중에서 신중하게 고르고, 종이에 뿌릴 향도, 리본도 골라 놨단 말입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닙니다. 정말 골라 놨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도명 씨는 어차피 마감 시간 못 지켜요.”
“할 수 있어요.”
“못 해요. 그걸 알잖아요. 왜 자꾸 거짓말해요.”
“…….”
“저 다 읽었다니까요.”
도화의 쐐기를 박는 말에 도명이 손에 쥐고 있는 가죽 벨트가 그의 손 안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아, 젠장 이제 돔질 못 해 먹겠네. 이래서 아침부터 백구가 묘하게 의기양양했던 거였어.’
“도명 씨가 완성 못 하니까, 제가 지금 완성해 드릴게요. 저, 그런데…… 자세 풀어도 돼요? 이 자세로는 너무…… 제가 우스꽝스럽잖아요.”
“나는 내가 돔인 것이 좋습니다. 내가 돔이고 도화 씨가 내 섭인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낙 중 하나입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가장 큰 낙 중 하나를 잃을 것 같은데 도화 씨는 뭐가 그렇게 혼자 기분이 좋고 난리입니까. 러브레터 평생 안 줄 겁니다. 이제 행복합니까?”
도명은 마지막 말을 나름 협박이라고 하고 있는데 도화는 전혀 타격을 받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는 저 바보 같은 동네 백구한테 러브레터 부스러기를 지키는 지능에서도 밀리고 협박도 통하지 않는다니.
도명은 자신이 너무 얇디얇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나풀거리는 천 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도화는 주섬주섬 바지를 올리고 도명에게 다가왔다.
“러브레터 내가 완성할래요.”
“완성하든지 말든지요. 전 이제 신경 안 씁니다.”
“도명 씨 화났어요?”
“도화 씨가 밉긴 밉네요. 나는 불행한데 왜 그쪽은 행복합니까?”
“도명 씨가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줬잖아요.”
“네, 도화 씨는 내 마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게 돼서 아주 행복해 보이네요. 목줄을 쥐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목줄을 쥐게 됐으니 아주 엉망이 될 겁니다. 목줄 쥐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거든요. 도화 씨 표정이 딱 그 꼴입니다. 목줄을 다루는 법도 모르면서 그저 새 애완견 산책시킬 생각에 신이 난 어린애 같습니다.”
“도명 씨 저는요, 도명 씨가 설사 목줄을 매고 있어도 목줄을 잡는 것보다 도명 씨 손을 잡는 게 좋아요. 아니면 도명 씨랑 산책하는 개가 되어도 음…… 좋아요. 이왕이면 전자가 더 좋지만요.”
도화가 도명의 손을 끌어당겨 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리고는 도명의 손에 자신의 볼을 비비적댔다. 눈을 감은 도화의 속눈썹 끝자락이 도명의 손바닥에 미세한 전류를 일으켰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이 와중에 솔직히 좋았다. 푼수 같으니라고.
“제가 도명 씨에게 받은 편지를 읊어 볼게요. 내가 도화 씨와 식사를 한 그 날 저녁, 도화 씨는 저를 거부했지만, 난 당신에게서 안전함을 느꼈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도화 씨는 언제나 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겠죠. 내가 어떤 사람이건 당신은 나를 안전하게 사랑해 줄 겁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회적이지 않아도 말입니다. 내 몸 안에는 길들어지지 않는 짐승의 마음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짐승이 송곳니를 박아 넣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하고, 또 다정합니다. 강하면서 다정한 사람은 너무나도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활하게도 나는 당신에게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안전하게 사랑해 줄 걸 알고 있지만 나의 교활함에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너무나도 교활한 남자인 걸 알고 있기에 그 누구보다 사회적인 복장을 하고, 처세를 하고, 또 온화한 미소를 연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 모든 것이 가짜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교활한 짐승이고,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교활한 사랑을 알까 다시 한번 두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진심이 담긴 편지를 쓰지 못합니다. 나는 마음을 주면 내가 가진 모든 섬세함과 지독할 정도로 깊은 감정을 다 내줍니다. 도화 씨는 그 예민한 융털들이 난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겁니다. 그 구덩이는 너무 깊어서 도화 씨가 얼마나 키가 크든, 얼마나 악력이 좋든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서 예민한 융털들은 도화 씨의 모든 것들을 훑어 내릴 겁니다. 어쩌면 그 안에 있는 건 음습하고 축축한 느낌이 들 겁니다. 저의 그런 면은 상대방도, 저도 안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적당히 마음을 주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 지독할 정도로 반복된 연습은 체화되었고 그래서 더 견고했습니다. 그렇게 몸의 법칙이 되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내 모든 규칙들을 깨고 들어왔고, 당신이 내 규칙이 되었습니다. 순수하면서 동시에 간악한 당신은 당신이 내 규칙이 됐다는 걸 안 순간 내 숨통을 쥐고 노는 법을 알게 되겠지요. 도화 씨는 나를 안전하게 사랑해 줄 건 알지만 내 숨통이 달린 문제이기에 이 사실 또한 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도화 씨에게 사랑에 빠진 이유도, 사랑에 빠진 그 후의 이야기들도 모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대체품으로 대가들의 문장들도 찾아봤지만 아무리 좋은 문장도 내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는 내용이 없는 조악한 편지를 내 자존심상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나는 도화 씨에게 어떠한 편지도 못 씁니다. 나는 도화 씨에게 편지를 못 씁니다.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음…… 맞나요?”
“하, 나 참.”
“아. 이상한가요?”
도화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도화 씨 우리 회사 편집부로 출근해야겠네.”
도명을 쳐다보는 도화의 눈이 일렁이더니 그의 얼굴이 도명의 얼굴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도화 씨?”
도명의 눈동자 안에 육식동물처럼 입맛을 쩝쩝 다시는 도화의 입술로 가득 찼다. 도화의 입술이 타액으로 지나치게 번들거렸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도명은 불길한 예감에 뒷걸음질을 쳤다.
“도명 씨.”
“왜요? 거기 가만히 서서 이야기해요.”
도명이 도화의 콧등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도화는 단호한 도명의 손바닥에 콧등이 뭉개지는 줄도 모르고 도명을 향해 얼굴을 계속 밀었다.
도명이 다가오는 도화의 얼굴을 밀며 팔에 힘을 꾹 주었다. 도화는 머리를 가볍게 들이미는 것 같은데 도명은 점점 그를 저지하는 게 힘이 들었다. 관계와, 테크닉, 심리전 같은 걸로 메웠던 힘의 격차가 느껴졌다.
“도명 씨, 내가 싫어요?”
“좋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화 씨는 많이 징그럽네요. 아니 왜 자꾸 쩝쩝댑니까? 내가 도화 씨 음식입니까?”
“…….”
“왜 대답을 안 해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날카롭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도화의 눈동자는 더욱 젖어 들어갔다. 도명이 이런 걸로는 이 잡종을 어쩌지는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강경책을 꺼내 들려는 찰나 도화가 도명을 향해 확 달려들었다.
도명의 등이 작업대에 쿵 부딪혔다. 대형견에게 애정 표현으로 공격당하는 주인이 된 느낌이었다. 난잡하기 짝이 없는 키스였다.
도화는 새벽부터 공들인 도명의 머리카락까지 손으로 마구 헤집으며 도명의 살덩어리를 핥고 빨아들였다. 기교는 없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도화의 축축한 숨이 도명의 귓바퀴 안에 고였다.
“아니, 좀…….”
‘아니 뭐 이런 촌스러운 키스가 다 있어. 그냥 무조건 물고 핥으면 다야? 아…… 얼굴이 온통 백구의 침 범벅이잖아. 그만. 그만!’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쳤다. 겨우 식었던 도화의 엉덩이 열기가 도명의 손길에 다시 빨갛게 익었다. 도명은 결국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비집어 넣었다. 맞닿은 도명의 무릎이 도화의 페니스 열기로 후끈거렸다.
‘아이고, 제대로 흥분했네. 키스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도화 씨, 지금 어디 가서 딱 차이기 좋은 키스 하고 있어요. 나니까 이 와중에 귀여워하는 거라고.’
도명은 이런 촌스러운 키스를 하는 백구를 응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단해진 페니스는 조금만 때려도 통증의 강도가 달랐다. 도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난잡한 키스를 하는 도화의 뒤통수를 세게 쥐어 잡았다.
도화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도명의 손가락 움직임에 그가 흥분한 줄 알고 더욱 키스에 열중했다. 도명은 도화가 방심하는 순간 무릎을 올려 그의 가랑이 사이를 적당한 강도로 올려 때렸다.
도화의 페니스를 타격하는 강도가 세지는 않았지만 그의 페니스가 꽤 단단해진 상태라 가벼운 충격도 아주 예민하게 느낄 것이다.
“윽!”
도화는 가랑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도명이 도화가 헝클어뜨린 머리를 정돈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도명이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도화가 흥분한 페니스를 무릎으로 저격당하자 그의 귀두 끝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정액은 도명의 가슴팍에 튀어 그의 흰 셔츠에 눌어붙었다. 도명이 뚱한 표정으로 정액 범벅이 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백구를 잘못 키웠어. 너무 거대한 변태로 키운 게 분명해. 느끼라고 친 건 아닌데.’
도명이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셔츠에 묻은 정액을 닦았다. 정액을 닦아도 몸에서 도화의 정액 냄새가 났다. 도명은 일부러 도화에게 보란 듯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
“아. 도명 씨 화났어요?”
도화가 안절부절못하며 도명을 향해 물었다. 도명은 하고 싶은 거 실컷 해 놓고 이제 와서 눈치 보는 백구가 아주 가증스러웠다.
“이 셔츠는 다시 못 입습니다.”
“네? 아. 그게 빨면.”
“다시는 안 입을 겁니다.”
도명이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며 말했다. 그리고는 셔츠를 작업대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놨다.
“잘못했어요.”
“하.”
사실 도명은 기껏 차려입은 옷이 엉망이 돼서 짜증이 난 건 사실이지만 도화에게 진심으로 화가 날 리가 없었다. 다만 도화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러브레터를 납치한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키스도 잘 못 하면서 사람 막 헤집고, 말도 안 듣고 똥개처럼 아무 데나 정액 싸고. 혼나는 와중에는 해맑고. 어디서부터 바로잡을지 답도 안 나오네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도화가 무릎을 꿇고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도명은 땀을 흘리는 도화의 정수리가 귀여웠다. 도명이 셔츠를 벗어 반쯤 나체가 된 상태로 작업대에 걸터앉았다.
도명의 머리는 도화가 그의 머리를 잡고 헤집으며 키스를 해서 평소와는 달리 헝클어져 있었고 잘 관리된 상체는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었다. 도화는 혼나는 와중에도 그런 그가 너무 퇴폐적이고 섹시해서 곤란했다.
도명이 도화의 인중에 구둣발을 얹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고압적인 눈빛으로 도화를 내리눌렀다. 도화는 알아서 도명의 구둣발에 입술을 찍었다.
그러다가 입술을 조금씩 올려서 도명의 양말을 내리고 그렇게 드러난 그의 복숭아뼈를 쪽 소리 나게 빨았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도명의 발을 잇자국이 살짝 남을 정도로 음미했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의 이마를 발로 툭 눌렀다.
“벌 받는 와중에도 또 마음대로 만지고. 도화 씨는 정말 구제 불능입니다.”
도명은 도화가 벗긴 신발을 신고 엉덩이를 반쯤 걸쳤던 작업대에서 내려왔다.
“도화 씨 오늘 출근 못 합니다. 러브레터 부스러기도 안 주고, 그 후로도 다 도화 씨 멋대로 했습니다. 인정합니까?”
“도명 씨…… 난 도명 씨가 너무 좋아서…….”
“도화 씨가 제 그 부스러기들을 훔쳐 가고 또 그것들을 마음대로 읽은 후 저를 마음대로 해도 제가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악용한 겁니다.”
“저는 그 정도로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도화 씨, 모든 나쁘지 않은 의도가 상대방에게도 나쁘지 않은 의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는지입니다.”
“도명 씨가 너무 달콤해서 그만.”
‘도명 씨가 너무 달콤한 게 잘못이잖아요.’
도화는 그다음 말은 혼날까 봐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또 자기 잘못은 반성하지 않고 남 탓만 한다고 할 것 같았다.
도명은 도화의 말들에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날 더 칭찬해 줘요. 그 달콤한 입술로 내가 얼마나 참을 수 없이 달콤한지 말해 줘요. 내가 아무리 무서운 얼굴로 협박해도 나를 사랑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해요.’
“도명 씨…… 사랑해요. 난 그냥 도명 씨를 참을 수 없이 사랑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다시는 안 그럴 겁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다시 안 그럴 수 있어요! 도명 씨가 이렇게 섹시한데. 아 일단 분위기가 안 좋으니까 무조건 그러겠다고 할까? 하지만 자신 없는걸. 정말 자신이 없는걸.’
“…….”
도화가 정장 바지가 깊게 주름지도록 움켜쥐며 울먹거렸다.
“하. 정말. 구제 불능이네. 다시는 안 그럴 수 있을 때까지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도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엉망이 된 자신의 옷을 챙기고는 자리를 떴다.
혼자 남겨진 도화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이 동그래진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도화의 눈 안에 담기는 건 문 안으로 사라지는 도명의 차가운 뒷모습이었다.
혼자 남겨진 도화는 벌벌 떨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에서는 회사에다가 어떤 변명을 해야 하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도화는 열심히 변명거리를 생각하다가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전에 정말 이런 일로 회사를 결근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도명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도화는 이런 결정도 저런 결정도 못 내린 채 무릎을 꿇고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화원의 베이지 색 바닥이 도화의 눈물로 짙은 갈색이 되었다.
도화는 머릿속이 너무 뜨겁게 울려 대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겠다고 느꼈을 때 도명이 옷을 깔끔하게 갈아입고 손가락에는 차 키를 걸어놓은 채 등장했다.
“도화 씨 뭐 합니까?”
“저, 저는…….”
“뭐 해요? 회사 지각하겠습니다.”
“네?”
“회사 지각하겠다고요.”
도화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상황에서 도명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자신은 도명의 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지금 엄청 밀릴 시간인데요. 차로 가 봤자.”
“밀리겠죠.”
“그러니까요.”
“그래도 도화 씨가 대중교통 이용하느라 돌아가는 것보다는 확실히 빠릅니다.”
“제가 그동안 돌아가고 있었어요?”
도화는 평생 대중교통만 이용한 사람이었다. 5년 동안 단 하나의 길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나섰다. 믿어 의심치 않은 안정적인 경로가 있었기에 주변에서 조금씩 차를 사기 시작할 때도 차를 살 생각도 안 했다.
도화가 바보 같은 표정을 짓자 도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차로 가면 얼마 안 걸려요. 출근 시간대라 밀린다 치더라도.”
도화는 도명의 웃음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불던 도명이 맞나 싶었다. 도화의 뒷목이 차갑게 식었다. 눈가는 여전히 새빨갛고 뜨거운데, 갑자기 전혀 다른 시간대에 불시착한 기분이었다. 뭔가 속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음, 아슬아슬하긴 하겠지만 잘 하면 늦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명이 내비게이션을 보며 말했다.
“저 도명 씨 제가 너무 잘못한 게 많아서 출근하지 말라면서요.”
“아, 사실은 기뻤습니까? 제가 출근하지 말라고 해서?”
도화는 자신이 마음을 졸인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태연하기 짝이 없는 도명의 말투가 너무 얄미웠다. 도화는 점점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도명 씨 저를 놀린…… 겁니까?”
“반반이요.”
“저 진짜 무서웠다고요.”
도화가 주먹으로 자신의 무릎 위를 찍으며 말했다. 도명이 운전자만 아니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나도 무서웠어요.”
“뭐가요?”
“제가 도화 씨 지각 안 시키려고 서둘러서 옷 갈아입고, 머리도 대충 만지고 나오는 데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걸렸는지 알아요?”
“몰라요. 그때 저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도명 씨는 크게 화난 것 같지, 그 와중에 출근 걱정도 하고, 아주 정신이 없었어요.”
“단 7분 걸렸습니다. 평소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외출 준비 시간입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도화 씨는 7분간 무서웠겠지만 저는 밤새 무서웠습니다. 러브레터 부스러기 위치를 상상하면서요. 그런 거 따지고 보면 성격 나쁜 저치고는 관대한 복수 아닙니까? 전 언제나 받은 것을 적어도 2배로 돌려주거든요. 내가 무려 복수를 파격 할인해 주고 앉아 있네. 지금 내가 너무 호구 같아 보일 정도인데요.”
“아니, 제가 도명 씨한테 혼난 시간도…… 끼워 주세요.”
“그렇다 쳐도 반나절을 이길 수 있겠어요? 거기다가 야간은 택시도 할증 붙습니다.”
도화가 손가락을 어지럽게 얽히며 입술만 움찔거렸다. 하지만 도명의 논리를 완전히 뒤집을 만한 기막힌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도명답지 않게 살짝 삐져나온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줄 뿐이었다.
“그나저나 어제 정확히 언제 잠들었어요? 내가 도화 씨 방 수색하고, 옆에서 새우잠 잘 때도 깨어 있었어요?”
“네…….”
도화의 대답에 도명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진짜, 한 시간을 지각하게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그나저나 도화 씨 연기 많이 늘었네요. 감히 날 속여 먹여요?”
“러브레터가 너무 탐나서요. 그 러브레터가 절 사악하게 만들어요. 막 갑자기 계략도 잘 짜지고 연기도 몰입 잘 되고.”
“그래서 계속 가질 겁니까?”
“……가지겠다고 하면 날 미워할 거예요?”
“나 참.”
“가져도 돼요?”
“마음대로 해요.”
“고맙습니다.”
“이것 봐. 내가 호구지.”
도명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저, 존경하는 호구님…….”
“또 뭘요. 이젠 무서워지려고 하네.”
‘아, 묘한 극존칭에 자연스럽게 대답해 버렸어.’
“제가 도명 씨를 만지는 데 앞으로 허락이 필요한가요? 제가 그건 도저히 약속드릴 자신이 없어서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웃음에 도화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눈치 없이 안 좋은 타이밍에 이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저는 사랑에 대해서 자꾸 잊어버리고 도화 씨는 SM을 아무리 가르쳐도 잊어버리네.”
“네?”
“꼬투리 잡는 거죠. 울리고 싶어서. 자기가 자기 걸 만지는데 제가 왜 화가 납니까?”
“으아. 헷갈려요!”
“나도 가르치고 가르치기 지칩니다.”
“아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제가 키스할 때 도명 씨가 정말 싫어했던 것 같아서.”
‘그걸 이제야 아셨어요?’
“아 그건, 키스를 더럽게 못하더라고요.”
“그렇게 대놓고 바로 당사자 옆에서 이야기하기 있나요.”
“그래도 귀엽긴 했습니다.”
“섹시하지는 않고요?”
“하하.”
도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섹시하고 귀엽고 싶다면 백구 티 입고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든가요. 단 섹시해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요. 도화 씨는 뭘 의식하고 하면 뭐든 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섹시함은 사라지고 귀여움만 남는단 말입니다.’
정말 차로 오니, 평소 40분 걸리는 거리가 15분밖에 안 걸렸다. 거기다가 평소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속도 차이까지 생각하면 도명 말대로 약간 아슬아슬하게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화가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창밖을 보았다. 도화가 평소 버스에서 내려 걷고 있던 길이었다. 새삼 아침 바람에 살랑거리는 가로수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도화가 그렇게 생각보다 편하게 출근을 하고 있을 때 거리에서 아는 얼굴이 보였다. 윤정이었다. 힐을 신고 걷고 있는데 걸음이 조금 이상했다. 절뚝이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그녀가 안쓰러워 보였다. 지각 안 하려고 빨리 걷다가 힐이 망가졌거나 발목을 가볍게 삔 모양이었다.
평소 윤정은 회사의 분위기 메이커로서 회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만 그녀의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하면 아침잠이 많은지 지각하는 버릇이었다. 어제는 사장에게 제대로 욕을 먹었다.
사장이 지켜보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은 터였다. 그 사건이 있었는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또 저 상태인 걸 보니 도화는 혼자 혀를 찼다.
“아이고.”
“왜요?”
“아니. 그게 회사 사람인데, 오늘도 지각할 것 같아서요. 어제 크게 사장한테 깨져서 오늘도 지각하면 심각할 것 같은데.”
“신경 쓰이면 태워요.”
“아, 아뇨. 신경 쓰긴요. 전, 회사에서 차갑고 까칠한 콘셉트라니까요.”
“그놈의 콘셉트.”
차창 밖으로 절뚝거리면서도 지각할까 봐 절박한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도화는 역시 신경 쓰이는지 엄지를 물어뜯었다.
“신경 쓰이면 신경 쓰면 되는 겁니다. 나 참 나보다도 복잡하게 사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도명이 길가에 차를 천천히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부르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도화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도명의 얼굴과 거리의 윤정을 번갈아 보더니 창문을 내리고 윤정을 불렀다.
“아, 이 대리님.”
낯선 검은 차 안에서 도화의 얼굴을 확인한 윤정이 놀랐다. 그녀가 알고 있기론 도화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타요. 내 차는 아니지만요.”
“아. 정말요?”
“안타면 지각 확정입니다. 윤정 씨가 아무리 애써도요.”
“고맙습니다.”
윤정이 차를 타고 도명의 얼굴을 확인하고 황급히 인사를 했다. 도명의 얼굴을 본 윤정의 얼굴이 정신없는 와중에 새빨갛게 익었다. 도화는 아, 이게 도명이 말한 권력이구나 싶었다.
“아, 안녕하세요.”
“네. 바쁜 아침이네요.”
윤정이 앞 좌석에 앉은 도화와 도명을 번갈아 보았다.
“아. 평소. 이 대리님 데려다주셨어요?”
윤정의 질문에 도화가 긴장감에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아니요.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특별한 날이요?”
“네. 아침부터 수도가 터져서 성실한 도화 씨가 처음으로 지각하게 생겼더라고요. 집주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이렇게 모시고 있죠.”
“아. 네. 수도가 폭죽 터지듯이 팡 터졌습니다.”
‘또 쓸데없는 사족 붙인다. 이러니 그냥 평소에 아예 말을 안 하는 거네.’
“아. 그렇구나. 이 대리님 정신없었겠네요.”
“도착했습니다. 정시 출근 건투를 빌겠습니다.”
걸어서 오면 꽤 걸리는 곳이 차로 이동하니 금방이었다. 도명이 차에서 황급히 내리려는 도화의 손에 샌드위치가 담긴 종이봉투를 넘겼다.
“아침이요.”
종이봉투를 건네는 도명의 손을 자세히 보니, 손가락 두 개를 겹쳐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도화는 배시시 웃으며 종이봉투를 서류가방 안에 넣었다.
차에서 내린 도화가 시계를 보았다. 도명이 회사 건물 앞 보드 블록에서 내려 줬지만 사무실 안까지 정시에 도착하려면 좀 뛰어야 했다. 도화가 뛸 준비를 하는데 다리가 부은 윤정이 보였다.
여기까지 해 줬으면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녀를 버리고 가면 전쟁터에서 자신만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도화가 곤란한 듯 머리를 북북 긁었다.
“하아. 윤정 씨만 괜찮다면 업혀요.”
“네?”
“뛰어야 지각 안 합니다.”
“아. 저 그.”
“아 그렇죠. 오지랖이네요.”
도화가 뛸 준비를 하는데 윤정의 손이 오토바이를 타듯 도화의 어깨에 얹혔다.
“부, 부탁드립니다.”
“네.”
그렇게 두 사람은 1초의 오차도 없는 정시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어, 웬일로 두 사람이 같이 와? 이 대리는 평소보다 늦고, 언제나 15분 전에 풍경화처럼 앉아 있던 이 대리는 평소보다 늦고, 윤정 씨는 지각 안 했네.”
“죄송합니다.”
“아니, 어쨌든 정시에 왔으니까 이 대리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이 대리님은 아침부터 출근 준비하는데 수도 터졌대요.”
“아이고, 정신없었겠네. 윤정 씨 걸음이 왜 그래? 발목 삐었어?”
“아. 네.”
“애썼네. 그 와중에 지각 안 하고. 기특하다. 기특해.”
도화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로 오늘 스케줄을 확인하면서 도명이 싸 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
“이 대리 아침도 못 먹었어?”
“네.”
“아. 수도 터졌다고 했지.”
“네.”
도화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지만 그의 입꼬리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거렸다.
<5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