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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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도도.

도명과 도화는 퇴근 후 따로 방이 있는 일식집에 들어왔다. 정갈하고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도명 씨는 오픈 키친에 바 자리를 선호할 것 같긴 한데.”

도화가 자신이 짠 데이트 코스가 적절한지 도명에게 확인하기 위해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네. 그런 편이죠.”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을 좋아할 것 같아서요.”

“네, 맞아요.”

도명이 도화를 기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도화 씨는 그런 걸 안 좋아하나 봅니다.”

“아니요. 저도 그런 거 좋아해요.”

“그런데요?”

도명이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전 여기 셰프하고 데이트하러 온 건 아니라서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웃었다.

“네. 그렇죠.”

“아 코스 요리 시켰어요. 사실 둘이 대화하는데 요리가 중간마다 들어와서 흐름이 끊기는 건 싫지만, 도명 씨는 다양한 음식을 조금씩 먹는 걸 좋아할 것 같아서요. 많이 먹는 편,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음식을 싫어하지는 않고.”

도화가 도명의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도명이 도화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다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혼자 열심히 머리 굴린 소리가 다 들리네요.”

도화는 도명이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 같아 기뻤다.

“그냥 이미지만 보고 고르지도 않고 리뷰도 꼼꼼히 봤어요. 맛이야 봐야 알겠지만요. 소비자가 적은 게 아니라 광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리뷰의 뒤 페이지까지 다 읽었다니까요.”

“우리 자기가 원래 이렇게 꼼꼼했었나?”

도명은 도화가 원하는 대로 칭찬을 해 주었다.

“일할 때 빼고는 원래 이런 건 운에 맡기는 편이긴 한데 제가 계획한 자, 자, 자기와의 첫 번째 데이트니까요.”

도화는 어젯밤 연습한 자기라는 말을 겨우 했다. 목소리가 자꾸 목구멍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혈액이 얼굴에 다 몰리는 기분이었다.

“도화 씨, 어젯밤 정말 바빴겠네요. 보고서에, 예약에, 호칭 연습까지 다 하고 말입니다.”

“네, 어제 아주 바빴죠.”

도화가 괜히 물수건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히 닦으며 말했다.

“그런데 호칭 부분은 더 연습해야겠네요.”

“아, 네. 뭐.”

도화가 시킨 코스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간단한 샐러드로 나온 애피타이저부터 정성스러웠다.

그리고 뒤이어 물오른 제철 재료로 만든 국물 요리와 각종 특수 부위로 가득 채운 회 한 접시였다. 도명은 방 예약에 나온 코스의 수준을 보니까 음식값이 꽤 나올 것 같았다.

“참고로, 이미 결제했어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말했다. 도명은 무리할 필요 없다고 하려다가 좋은 분위기를 돈 이야기로 흐리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을 생각한다고 한 말이 오히려 불편한 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도명은 자기는 비싼 것만 먹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저 잘 먹을게요,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도화가 매번 무리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가 기획한 첫 데이트니까 지금은 그러려니 하는데, 매번 이런 식으면 직장인 월급에 대부분이 식대로 나갈 것이다. 이 한 끼로 15만 원 이상은 썼을 게 분명했다.

도화가 음식을 맛보는 도명의 얼굴을 골똘히 쳐다봤다. 그 잘 먹는 사람이 자신의 입안에 음식을 집어넣는 것을 까먹었다. 도명이 참치 뱃살을 입안에 집어넣다가 말고 웃으며 말했다.

“참고로 저는 반응이 도화 씨처럼 좋은 편이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그냥 말없이 음미하는 편이라고요.”

“아, 네? 아니 저는.”

“지금 제 반응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잖아요.”

“아니요. 그러니까, 그냥 맛없을까 봐요.”

“자기가 사 주는 건데 맛없을 리가.”

“진짜 괜찮아요?”

“그럼요. 이제 도화 씨도 제대로 먹으면 모든 게 완벽하겠네요. 누가 보면 내 얼굴이 음식인 줄 알겠어요. 얼굴도 너무 보면 닳습니다.”

“아. 네 잘 먹을게요.”

“꼭이요.”

“네. 꼭이요.”

“착하네요.”

그제야 도화는 자신의 앞에 놓인 초밥을 음미했다. 그의 미간이 기분 좋은 맛을 음미하듯 깊게 접혔다.

서로의 집이 위아래층이라서 좋은 건 서로 누구의 집으로 데려다주니 뭐니 실랑이를 안 벌여도 된다는 거였다. 그런데도 막 연애를 시작하는 이들은 이 가벼운 헤어짐이 아쉬웠다.

“아 저 그럼 보고서 마저 정리하러 올라갈게요.”

도화가 엉거주춤하며 돌아서려는데 도명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보고서 기한 하루 늦춥시다.”

“네? 아 저 어제 거의 다 끝내놨는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네? 뭐가 중요한…….”

“내 방에서 자고 가요.”

“아.”

도화의 입술에서 앓아대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응이 왜 그래요? 싫어요?”

“아니요. 안 싫어요. 절대. 그저, 놀라서요.”

“아니, 놀랄 게 뭐가 있는데요.”

도명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말을 들으니 정말 놀라게 뭐가 있나 했다. 하지만 마음이 이미 놀란 건 놀란 거였다.

“아니, 그게, 파자마 입고 서로 머리 땋아 주면서 놀자고 자고 가라는 건 아니잖아요.”

도화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도명의 손을 잡아끌고 자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껴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겨우 2일 된 연인들치고 진도가 너무 빨라서요?”

도명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도화를 놀렸다. 그러다가 어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위해 그 전에 배운 거나 배워야 할 것들을 빠르게 훑어보듯이 도화의 손을 잡았다. 깍지를 낀 손바닥이 뜨겁고 끈적거렸다. 

도화는 손이 맞닿자 다른 피부들도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 이제 손잡는 건 했고.”

도명의 얼굴이 도화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대충 봐도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명의 입술이 도화의 입술을 살짝 덮었다. 도화가 얼떨떨한 얼굴로 머리를 뒤로 살짝 뺐다.

“그러지, 말아요. 다른 진도도 빨리 뽑게.”

“도명 씨가 놀리는 것처럼 2일 된 연인의 진도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럼요?”

“도명 씨가 지나치게 달아서 문제죠. 자꾸 머릿속을 마비시키지 말아요.”

도명의 눈동자에 흥분과 긴장으로 떠는 도화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미 해 본 것들인데 왜 매번 떨리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지금 이 말이 자기야보다 더 수위가 센 거는 알고 있습니까?”

“네? 저, 전….”

“아, 그래요. 모르겠죠. 순진한 표정으로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게 도화 씨 장기니까.”

도명의 손이 도화의 뒤통수를 감싸고 입술을 먹어 들어갔다. 도화는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집 앞이고 시간도 늦어서 사람이라고는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골목에서 키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키스가 주는 흥분과 떨림과는 다른 당혹감이 그를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도명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도명의 혀가 뇌에 투여되는 마취제인 것처럼, 도화는 도명이 하자는 대로 입술을 열고 혀를 얽어 들어갔다. 도화는 점점 고조되는 흥분감에 자신도 모르게 도명의 허리를 감싸고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단단한 도명의 허리가 도화를 더욱 흥분시켰다. 도화는 더 진한 스킨십이 필요했다.

그때 도명이 도화에게서 떨어졌다. 도화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할게요. 자고 가요.”

“네. 저, 그런데요.”

“여기서 그런데요, 라는 말이 나올 상황은 아닌데요.”

도명이 아쉬운 듯 살짝 벌어진 도화의 입술을 엄지로 훔치며 말했다.

“그래도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니까, 저만 자고 가라는 말을 그, 섹스하자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기 싫어서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동의어는 아니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서는 절대적으로 동의어가 맞죠. 아니 왜 빤한 걸 물어보는 거예요.”

“아니, 연애가 처음이라서요!”

도명의 바보 취급에 도화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처음인 사람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한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저도 처음이지만, 빤한 건 빤한 거죠. 아, 진짜 못 살겠네.”

“그동안 혼자 기대하고 실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요.”

“도화 씨가 상상력이 좋은 편이긴 하죠.”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실망 대부분을 도명 씨가 시켰는데요.”

도화가 괜히 아스팔트 바닥을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대체 야한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도명 씨는 정말…… 못됐다고요.”

도화는 그동안 서러웠던 것들이 생각나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명이 도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한테 서운한 게 많았어요? 달아오르게 하고 그때마다 만족 못 시켜 준 일로? 나쁜 뜻인 아니고 도화 씨가 너무 귀여운 탓인데요.”

“아니, 그것도 조금 있지만, 그것보다 저만 항상 애달파 하고, 무해한 척하려고 애쓰고. 암튼 그런 게 있어요.”

도화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정리가 돼서 나오지 않자 더 속상했다. 

도화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거의 전달이 안 됐다고 생각했지만 도명은 도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자기 마음조차 몰라서 정체되어 있는 동안 도화는 혼자 속이 썩어 간 것이다. 도명은 이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몰라 그저 도화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부딪칠 뿐이었다.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요.”

“제가 뭐로 속상한 건지 알기는 알아요?”

도화는 이 좋은 분위기에서 왜 자꾸 투정 섞인 말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 그에게 뭔가를 보상받고 싶었다. 도화는 그의 앞에서 완벽하게 무해하고 싶은데 손안에 뭔가를 쥐고 있고 좋은 걸 알아 버린 사람은 완벽하게 무해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알아요.”

두 사람은 집을 코앞에 두고 골목에 계속 서 있기 이상해서 도명의 지하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명은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꺼냈다.

“내 마음도 어려운데, 도화 씨 마음을 정확히는 모르죠. 하지만.”

이어지는 도명의 말을 도화가 끊었다. 도화는 도명의 말이 답답했다. 어떤 부분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그게 되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내 마음이 뭐가 어려워요. 남의 마음이 어렵지. 내 마음이야 빤하죠. 빤하긴 한데 마음대로 안 돼서 문제지만. 맘대로 안 된다는 뜻이라면 그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도화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도화의 표정을 보자 도명은 이 논쟁이 결코 쉽게 접점을 만날 수 없음을 예감했다.

“그거 생각보다 어려워요, 그나저나 그 옷 불편하죠?”

도명이 길게 이어질 논쟁을 끊기 위해 일단은 침대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이 논쟁에 불을 붙이면 침대에서의 대화가 아니라 탁상 위에서의 대화로 뜨거워질 게 분명했다.

“네 조금. 아, 도명 씨 남는 홈웨어 있어요?”

도명의 대화 돌리기가 성공한 모양이었다.

도화는 계단을 올라가기만 하면 집이고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면 되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귀찮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낭만의 문제였다. 

애인의 집에서 그의 냄새가 밴 옷을 입고 있는 것 자체가 도화에겐 색다르고 기분 좋은 경험일 거라고 상상했다.

두 사람이 도명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도화를 입힐 적당한 옷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와, 어떻게 집에 편해 보이는 옷이 이렇게 없어요?”

“도화 씨 사이즈에 맞는 게 없는 거죠.”

“에이, 누가 보면 도명 씨 하고 제가 체격 차이 엄청 많이 나는 줄 알겠어요. 어떻게 집에 프리사이즈 옷이 없어요?”

“프리사이즈는 핏이 안 좋잖아요. 프리사이즈는 옷에 정성 들이기 싫어서 막 만든 옷이라고요.”

“홈웨어에 핏이 왜 중요한데요. 홈웨어의 중요한 포인트는 편함인데요. 프리사이즈는 대중을 위한 너그러운 옷이라고요. 가격 면에서나 사이즈 면에서나 말이에요.”

겨우 하나의 논쟁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논쟁의 불씨가 다시 붙었다.

“도화 씨말대로 대중을 위한 거지 나를 위한 옷은 아니잖아요. 어느 순간에도 핏을 포기하면 안 되죠. 그리고 제 홈웨어가 그렇게 불편한 편도 아니고요.”

“집에 혼자 있는 순간에도 말이에요?”

“내 모습을 내가 보잖아요.”

“음…… 네?”

“아니. 그 말이 그렇게 이상해요? 남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저부터 절 사랑해야죠.”

“…….”

도화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외모에 철저한 사람이 자신이 그동안 무릎 늘어난 바지 입고 집 앞은 물론 가까운 동네 가게들을 들락날락하는 걸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머릿속이 왱왱댔다.

그동안 이 부분에 있어서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그의 철학을 자세히 들어 보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저, 도명 씨, 그, 그럼 제가 그동안 지나치게 편하고 하고 다니는 걸 보면서 솔직히 무슨 생각 했어요?”

도화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그냥 아무 생각 없었는데요. 뭐, 집 앞이니까.”

“거짓말.”

“네?”

“솔직히 말해 봐요. 진짜 화 안 낼 테니까. 막 욕했죠?”

“스타일에 신경 쓰는 편은 아니라고는 생각했죠. 근데 그게 욕은 아니잖아요. 제가 유난히 신경 쓰는 편이니까 남들도 안 그렇다고 비난하진 않아요. 오히려 남들의 무심함이 저를 더 돋보이게 만들기도 하니까.”

“제가 도명 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패션 같은 것에 신경 안 쓴 건 사실이지만 확실히 의기소침해지기는 하네요. 앞으로는 잘할게요.”

“뭘 잘해요?”

“도명 씨처럼 집 앞에서도 완벽하게, 아니 집 안에서도 완벽하게 있으려고요.”

“갑자기요?”

“네.”

“아 솔직히 도화 씨 꾸민다고 할 때 더 끔찍해지던데요. 평소에는 음, 그냥저냥.”

도명이 소개팅 날 도화의 패션을 기억하며 말했다.

“평소에는 그냥저냥 후줄근하다고요?”

“평소에는 그냥저냥-”

“그냥저냥 뭐요!”

“그냥저냥 귀여워요. 꼭 제 입으로 닭살 돋는 말을 하게 해야겠어요?”

“소, 속아 줄게요. 도명 씨의 그 말.”

“빈말은 딱히 아니에요. 저는 적당히 타이트한 게 어울리고 도화 씨는 도화 씨에게 어울리는 게 있다고요. 그나저나 진짜 꾸민다고 공작새처럼 집 앞 돌아다니지 말고요. 도화 씨는 잠깐 집 앞을 지나간 거지만 저는 하루 종일 정신 사납습니다. 저걸 어쩌지, 하며 생각도 많아지고.”

도명이 도화의 어깨를 두 손으로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그 표정이 조금은 살벌하고 근엄하기까지 해서 도화는 말없이 고개를 연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 마음에 드는 옷이 없으면 잠깐 올라가서 도화 씨 옷으로 입고 올래요?”

“아, 네…….”

대답을 하는 도화의 어깨가 시무룩한 모양새로 내려갔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요, 방금 잔뜩 실망했잖아요.”

“아니에요.”

“또, 나중에 내가 도화 씨가 혼자 기대하게 하고 실망시켰다고 뭐라 하지 말고요.”

“저는 그냥, 나름의 작은 환상이 있었거든요.”

“이번엔 대체 무슨 환상입니까?”

‘우리 백구가 이런저런 환상이 많네.’

“아니, 그냥 애인 집에서 그 사람의 냄새가 밴 옷을 입고 있는 거요. 도명 씨는 또 도명 씨만의 냄새가 나니까.”

도명은 이러다가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렇게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오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명은 어떻게든 도화의 낭만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 짧은 순간 머리를 굴렸다.

도명의 집에 있는 유일한 프리사이즈 옷은 백구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밖에 없었다. 도명은 극심한 고민을 했다. 옷장 아래쪽 상자 안에는 온갖 백구 상품이 있었다.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도화에게 공개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발로 슬그머니 백구 그림이 그려진 물품이 있는 상자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동시에 도화에게 백구 티셔츠를 입힐 생각을 하니 나쁘지 않았다. 도명이 엄지로 미간을 쓰다듬다가 결심을 한 듯 도화를 향해 말했다.

“바지는 꼭 입어야 합니까? 티셔츠라면 있습니다. 프리사이즈로.”

“아 바지는. 그러니까.”

이미 도명에게 온몸 구석구석을 보인 상태지만 괜히 민망했다. 연애란 걸 하니 새삼 익숙한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다.

도명에게 고백한 날 이 집에서 잘 때는 두 사람 다 무아지경에 빠져 민망함을 못 느꼈는데 이렇게 조금의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다른 의미로 이상해졌다.

“사각팬티 입잖아요. 그거 편할 텐데. 반바지 같고 말입니다.”

“오늘은 삼각이에요.”

“왜요?”

“그러니까. 으아아. 말 못 해요!”

“같은 남자끼리 못 할 말이 뭐가 있어요?”

“도명 씨는 그냥 같은 남자가 아니잖아요!”

“아니 대체 또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러는 거예요? 양파입니까? 무슨 도화 씨 생각은 계속 까도 뭔가가 나오는 겁니까?”

도명이 도화를 압박하며 도화를 향해 걸어왔다. 폭이 넓지 않은 드레스 룸에서 도명이 도화를 향해 세, 네 걸음 다가오자 도화의 등이 금방 옷장에 닿았다. 도화의 몸이 반쯤 도명의 옷 속에 푹 잠겼다.

도명에게 압박받는 가운데 깨끗하게 세탁된 옷 냄새가 황홀했다. 세탁세제 냄새와 함께 도명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도명의 손이 도화의 어깨를 눌렀다.

“도화 씨 이미지는 끝났어요. 이미 망한 이미지 관리를 왜 이제 와서 합니까?”

“네?! 제 이미지가 왜 끝나요. 도명 씨 앞에서 제가 이미지 관리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도화 씨는 이미 걸핏하면 야한 상상을 하고 연애에 대한 온갖 환상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요. 이 머릿속에 티 팬티 입은 무지개색 유니콘이 뛰놀고 있다 해도 안 놀라요. 그저 도화 씨답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긴요.”

“아니 정말 별거는 아니고 저도 애인이 있는 남자인데 속옷에 신경 쓰기 시작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좀 더 섹시한 걸로. 다들 사각은 안 섹시하다고 하니까! 그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요. 나도 섹시하고 싶었다고요!”

도명의 시선이 도화의 가랑이 사이로 갔다. 도명의 손이 도화의 바지 버클로 향했다. 금속이 해제되는 소리가 도화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아니 잠깐만요?!”

“왜요? 섹시한 거 보여 줄 사람이 저 아니었어요? 설마 딴 남자입니까?”

“당연히 도명 씨죠! 제가 속옷 보여 줄 사람이 도명 씨 말고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왜 못 보여 줍니까?”

“아. 네 알았어요.”

도화가 결국 반항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두 손을 올렸다. 도명의 시선 끝에 도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도화의 말대로 그는 삼각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의 반쯤 흥분한 페니스를 담은 굴곡이 아찔했다. 하지만 도화의 속옷을 보는 도명의 표정이 애매했다.

“아, 저 도화 씨?”

도명은 도화의 이름을 괜히 부르고는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두 손으로 하관을 가렸다. 하지만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런 속옷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백화점에서… 점원이 이런 게 섹시하다고….”

“이게요? 그나저나 또 백화점 물건입니까? 도화 씨 백화점 가지 말아요.”

“반들반들해서 섹시할 거라고 하던데요.”

도명의 시선 끝에는 황금색, 정확히는 구리색으로 번쩍이는 팬티가 있었다.

“안 섹시해요?”

도화의 불안 섞인 질문에 도명은 그저 웃었다. 도명이 핸드폰을 가져와 플래시를 터뜨리며 도화의 속옷 사진을 찍었다.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도화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만요. 뭘 찍은 거예요?!”

“아니, 귀여워서요. 이런 건 영구 박제해야 하는 겁니다.”

“귀여운 거 말고, 섹시하고 싶어서 입은 건데요?”

“안 섹시해요! 마치 그 부분만 뭐랄까, 그래요. 공원 동상 같다고요.”

“네?!”

도명의 말을 듣고 나서야 도화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도화가 자신의 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뺏으려 들었다. 도명과 도화가 실랑이를 벌였다.

맘먹고 몸싸움을 하려 드는 도화의 태도에 도명이 안 되겠다 싶은지 도명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안 돼요.”

“네?”

“도화 씨, 이러면 나빠요.”

“아니 지금 그 말이 저한테 통한다고 생각하세요?”

“도화 씨, 안 돼요. 착하죠?”

연이은 도명의 말에 도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말이 뭐라고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도화는 도명의 핸드폰도 빼앗지도 못하고 속옷도 성공하지 못하자 금방 시무룩해졌다.

“……도명 씨가 제가 좋아하는 용이나 호랑이 무늬는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포기하고 고른 로즈골드 색이란 말이에요. 도명 씨가 까마귀처럼 환장하는…….”

“도화 씨, 이건 로즈 골드 색이 아니에요. 로즈 골드 색이라 쳐도 그 뭐랄까, 황금 페니스와 엉덩이는 뭔가 아니라고요.”

도명은 그래도 뒤이어서 터져 나오려는 이 말을 참았다.

‘꾸미려고 하지 말란 말이에요.’

“네. 그렇군요.”

도명이 잔뜩 축 처진 도화의 볼을 뭉개며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도화 씨한테 홈웨어로 제 티셔츠하고 제 속옷 줄게요.”

도명이 ‘도화 씨, 제 속옷 말이에요.’라는 말을 뒤이어서 다시 한번 더 속삭였다.

“제가 무슨, 도명 씨 속옷 받고 마냥 환장하는 변태인 줄 아세요?”

“아, 싫습니까?”

도명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말을 취소할 사람처럼 말했다.

“아니요. 싫다는 건 아니지만. 막 아주 좋다는 뜻도 아니에요.”

도화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은 도화를 더 놀리고 싶었지만 이쯤 놀리는 게 선을 지키는 것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도명이 도화에게 백구 티셔츠와 자신의 브리프를 건네주었다. 갈아입고 나오라고 하고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콘돔이라든지 러브젤 같은 걸 챙기고 있었다. 드레스 룸 문이 열리고 도화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왔다.

도화의 모습을 보자마자 도명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턱짐을 지는 척하며 얼굴을 반쯤 가렸다. 백구가 백구 티셔츠를 입다니! 이건 귀여움이 귀여움을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상의의 귀여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체의 야함이라니.

도화가 어색한 기분에 팔을 들어 올려 뒷머리를 쓸어 넘길 때마다 셔츠 한쪽이 들어 올려지면서 도명의 검은색 브리프가 보였다. 도명처럼 조화가 중요한 남자한테 이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뒤흔들어 놨다.

“이리 와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화는 자신을 부르는 도명의 목소리에서 애정을 느꼈다. 도화가 무언가를 잘해서 받는 칭찬의 목소리와는 뉘앙스가 달랐다.

아주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같지도 않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도화는 자신이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다. 이 기쁨과 충만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도화가 도명에게 다가왔다. 중심부를 꽉 조이는 느낌과는 다른 휑한 다리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 이상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에 도화가 지금 도명의 속옷을 빌려 입고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도명은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고 도화는 서 있었다. 도명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도화의 중심부에 머물렀다. 도화는 도명의 입김이 닿는 느낌이 드는 것만으로도 한 번에 크게 달아오를까 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맹랑하게도 도명의 무릎 위에 마주 보고 앉은 후에 그의 목을 두 팔로 꽉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도화는 그를 만질 때마다 일종의 허락이 필요했다. 도명을 만지는 건 먼저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만족시켜 줄 때 오는 보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화는 어떠한 고통도 참지 않았고 어떤 어려운 명령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멀뚱히 서 있었다. 습관적으로 상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욕구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욕구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사그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도화의 상상은 계속되었다.

도화는 지금, 이 순간 도명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의 몸 냄새를 진득하게 맡고 싶었다. 도명만이 알고 있는 특수한 조합의 허브 향 사이에서 그의 살 냄새를 찾는 건 짜릿한 수색이었다.

도명이 멀뚱히 서 있는 도화의 허리를 감고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도화 씨는 지금 날 만지고 싶잖아요.”

“아, 얼마큼 만져도 되나요? 그러니까.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명령을 내려 주세요.”

도화가 도명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명은 도화의 순종이 좋긴 한데 한편으로는 난감해졌다.

“아, 일단 씻고 올까요?”

도화의 질문에도 도명을 말없이 그의 뺨을 손바닥 안에 가득 담고 쓰다듬었다.

“오늘은 대본 없이 가고 싶은데요.”

“아. 네. 그런데 저, 대본이 없으면, 음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저번에는 나랑 어떻게 잤어요? 기차 타고 도망가고 돌아온 날 말입니다.”

“그냥, 그때는…….”

“하고 싶은 걸 했죠. 그러니까, 지금 도화 씨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죠.”

도명의 말에 도화의 두 눈이 반짝였다.

“저 도명 씨를 허락 없이 만져도 돼요?”

“플레이할 거 아니면 언제나 만져도 돼요. 기분이 부드러워지는 부분은 물론이고 기분이 뜨거워지는 은밀한 부분까지요. 나는 자기 것이니까.”

도화는 도명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 도명 씨, 정말 제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요?”

“네. 몇 번을 말하게 합니까? 전처럼 질문 많다고 혼낼 수도 없고 나, 참.”

도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화의 엉덩이를 당장이라도 후려갈길 것처럼 도화의 엉덩이를 끈덕지게 주물럭거렸다.

“저, 저 사실은…….”

도화가 도명에게 엄청난 비밀을 말할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도명은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구겼다. 도명의 구겨진 미간에 도화는 어서 하려던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화낼 거라는 생각에 쉽게 안 열리는 입술을 열었다. 도화의 성대가 떨렸다.

“저, 사실은 엄청 사나워요!”

“네?”

도명은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나오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화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당장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응은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것과 웃음을 터뜨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화의 진지한 표정에 도명은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심각한 척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미처 가리지 못한 손가락 위로 실룩거리는 광대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화의 눈빛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네.”

도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화가 도명의 어깨를 밀치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도명의 등이 침대 시트에 닿았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오토바이에 치이는 느낌이었다. 도화는 도명의 조여진 넥타이를 풀고 셔츠 깃을 잡았다.

“아, 셔츠 단추 또 뜯지 말아요.”

도명이 질색하며 말했다. 어디에 박혀 있을지 모르는 작은 단추들을 찾아서 정사의 흔적들 사이를 헤매는 것은 물론이고 힘들게 찾은 단추를 다는 작업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셔츠 말고 니트 종류를 더 많이 사놔야 하나. 아, 니트는 늘어날까 봐 스트레스 받으려나? 니트는 예민한 옷이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흥분을 잠시 멈추고 낑낑대며 단추를 풀었다. 그의 몸을 당장 여기저기 훑고 싶은데 단추를 푸는 작업은 도화의 흥분 상태에 비해서 너무 많은 섬세함을 필요로 했다.

도화는 결국 도명의 셔츠를 반쯤 풀다 말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도화가 도명의 귓불을 깨물고 늘이며 낑낑댔다.

도명은 그런 도화는 곁눈질로 볼 뿐이었다.

“뭘 그렇게 앓아대요?”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도화의 귓가에서 말했다.

“단추가 싫어요.”

도화가 단추를 두 개를 남기고 인내심이 폭발하기 직전인 듯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잡아 뜯어서 해결하지 말아요.”

도명이 자꾸 이러면 혼나야 한다는 듯이 도화의 콧등을 이로 살짝 깨물며 말했다.

“나 사납다고 했잖아요!”

도화가 억울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성미에 맞지 않는 걸 하려니 성질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도명의 경고에 커다란 덩치를 둥글게 만 채 마지막 단추를 꼼지락거리며 풀고 있었다.

‘아이고, 잘도 사납다. 무슨 늑대가 내 집 개처럼 말을 이렇게 잘 듣는데?’

결국 도명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웃긴 와중에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허파에 바람이 제대로 든 미친 사람 같았다.

도명은 도화의 얼굴을 끌어당겨 뭉뚝하지만 진하게 입술 표면을 뭉갰다. 입술 사이에 혀를 집어넣고 날카롭게 세워 그의 점막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화려한 혀 놀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어울리는 스킨십을 주고 싶었다.

도명과 도화의 두 눈이 마주쳤다. 도화가 달아오른 얼굴로 도명의 하체에 자신의 하체를 비볐다.

도명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속옷을 입은 도화의 페니스 표면을 긁었다. 벌써부터 도화의 페니스 표면이 뜨거웠다. 도명이 장난치듯이 손가락 끝으로 도화의 달아오른 페니스를 꾹 눌렀다. 벌써부터 제법 단단한 것이 기특했다.

“하아. 도명 씨.”

도화가 젖은 혀로 도명의 뺨을 핥아대다가 입가로 조심스럽게 혀를 옮겼다. 도명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혀를 내밀어 도화의 혀를 툭툭 건드렸다. 젖은 두 혀가 두 사람의 빨간 입술 사이에서 장난스럽게 술래잡기를 했다.

“저, 오늘 보기 안 좋아요?”

“그럴 리가요.”

도명이 도화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런데 왜 더 안 만져 줘요? 또, 저를 약 올리는 거예요?”

도화가 도명의 페니스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댔다. 도화의 손바닥이 뜨거운 열기에 축축해 있었다. 도명이 낮게 신음을 흘려보냈다. 이런 뭉뚝한 손놀림에도 등줄기가 오싹해지고 기분이 높게 치솟았다.

‘우리 백구가 언제 이렇게 컸지?’

“대답해 줘요. 약 올리는 거예요? 아니면, 그 황금…… 팬티 때문에 식었어요? 그, 동상 거시기 같은 그게 자꾸 생각나서?”

도화가 초조한 손끝으로 도명의 아랫배를 긁으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도화 씨, 지금 케이크 같아요.”

“네?”

“너무 맛있어 보여서 어떻게 먹을지 조심스러운 기분 알아요? 포크로 최대한 작게 나눌 수 있을 만큼 나눠 가면서 먹는 기분 말입니다. 나 참, 섹스를 하면서 조심스러운 기분이라니.”

도명은 자신의 기분에 어이없어했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골을 간질였다. 

그러자 도화가 눈을 감고 그 예민한 감각을 느꼈다. 그 간질간질한 기분에 엉덩이가 들썩이고 입술에서는 더운 숨이 퍼졌다.

“하아. 앗, 저는 제가 알던 도명 씨답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읏. 음. 도명 씨가 저만큼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봐요.”

“도화 씨만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도화 씨를 부드럽게 만지는 게 지루할까 봐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니 말해 봐요. 지루해요?”

도화의 엉덩이골을 만지던 도명의 손이 도화의 목 뒤부터 등줄기를 차례차례 훑었다.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면서 동시에 미묘한 흥분을 주는 울림이 있었다.

“오늘 도화 씨를 집으로 부른 건 그저 도화 씨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암청색 밤이 싫었어요.”

“혼자 잠드는 게 싫었어요? 공포영화가 무서워서 제 방으로 온 날처럼?”

도명의 심기는 건드리는 도화의 말에 도명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넘어가기는 여러 가지로 얄미운지 도명이 손으로 도화의 엉덩이를 짝 소리 나게 휘갈겼다. 밤공기를 타고 날카로운 소리가 짝 울려 퍼졌다.

“으앗.”

“지금 이 감각이 그리워서 제 심기를 건드리는 겁니까?”

“아, 아뇨. 순수한 질문이었는데요.”

도화는 정말 억울했다. 도명을 놀릴 생각은 정말 조금도 없었다.

“순수한 질문이 참 까슬까슬하네요.”

“저를 곰 인형처럼 안고 자고 싶으셨다면, 음, 그냥 안 하고 이대로 자도 돼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도화는 여기서 끝난다면 정말 아쉽긴 하겠지만 도명이 원하는 것이 그런 방향이라면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도화는 도명이 좋다면 좋은 거니까.

“곰 인형은 무슨.”

도명의 손이 다시 도화의 엉덩이를 휘갈겼다. 도명은 자꾸 도화가 자신을 은근슬쩍 놀려대는 것 같았다.

“앗, 저, 저는 정말, 그냥 말한 건데요.”

“무슨 곰 인형 가랑이 사이에 이런 단단한 게 박혀 있습니까? 동심 파괴하지 말아요.”

도명이 도화의 흥분한 페니스 끄트머리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무슨 곰 인형이 엉덩이 좀 때렸다고 이렇게 질질 쌀 준비를 합니까? 흥분돼서 그냥 안고 잘 수 있는 곰 인형이 아니잖아요.”

도명은 더 혼나야겠다는 듯이 도화의 엉덩이를 연달아 세 번 때렸다. 그러자 도화의 엉덩이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앗, 도명 씨, 잘못했어요.”

“도화 씨는 진짜 분위기 깨는 데 재주가 좋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양 볼기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도화는 봐달라는 듯이 도명을 와락 끌어안고 버텼다. 애교 섞인 몸짓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질질 쌀 것처럼 곧추선 도화의 페니스가 도명의 뱃가죽을 긁어댔다.

도명이 자신에게 엉겨 붙은 도화의 팬티를 벗겼다. 팬티가 도화의 허벅지에 팽팽한 해먹처럼 걸쳐졌다. 도화가 거친 호흡을 퍼뜨리며 걸치고 있던 티셔츠마저 벗으려고 팔을 들었다.

“아, 잠깐. 티셔츠 벗지 말아요.”

“네?”

“그대로.”

“하지만.”

도화는 티셔츠를 벗어야 도명이 자신의 젖꼭지를 물고 빨고 해 줄 것 같은데 난감했다. 도명은 도화의 티셔츠를 벗기는 대신 말아 올렸다.

“앗, 저 벗으면.”

“다 벗는 것보다 덜 벗는 게 더 야해요.”

도명이 도화의 젖꼭지를 입술로 애무하며 속삭였다. 도화는 여전히 티셔츠가 거슬리지만 원하는 대로 젖꼭지를 애무 당하니 티셔츠를 벗는 것을 그만두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까슬까슬한 도명의 혀 감촉이 좋았다. 도화는 도명의 허리를 매만지며 그의 애무를 받았다.

“앗. 아.”

도화는 도명이 자신의 젖꼭지를 물고 강하게 빨자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꾸 가슴은 앞으로 나오고 허리가 앞뒤로 달싹였다.

“앞은 충분히 젖었고 뒤는 어때요?”

도화가 대답하기 부끄럽다는 듯이 도명의 품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목덜미와 쇄골에서 느껴지는 도화의 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하아, 젖었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몰라요.”

“모르면 본인 손가락 넣어 보든지.”

“도명 씨 손가락 넣어 주면 안 돼요?”

“오늘 도화 씨 어리광이 심하네요.”

도화가 봐달라는 듯이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진득하게 비벼댔다.

“하긴, 오늘 아니면 내가 도화 씨 어리광을 언제 받아 주겠어요. 안 그래요?”

도명이 도화가 예뻐 죽겠다는 듯이 볼에 뽀뽀를 하고 귓바퀴를 물고 늘어졌다.

“앞으로는 안 받아 줄 겁니까?”

도화가 젖은 눈동자로 도명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날 어떤 섹스를 하고 싶은지에 따라서 다르겠죠. 오늘은 버릇 나빠지는 것 신경 안 쓰고 마냥 귀여워해 주는 날이고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엉덩이 사이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도화의 모르겠다는 말은 준비가 됐다는 뜻이었는지 도명의 손가락이 들어오기 무섭게 그의 뒷구멍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쫀득하고 열기를 품은 살덩어리가 도명의 손가락에 착 달라붙었다. 도명은 도화의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자꾸 도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찍었다.

“도화 씨, 손 뻗어서 저기 콘돔 좀 가져와요.”

도화는 도명의 말대로 침대 옆 서랍 위에 잔뜩 올라간 콘돔을 집었다. 도명이 콘돔의 포장을 뜯었다.

“딸기 향으로 골랐네요. 딸기 좋아합니까?”

“네.”

“고무 냄새와 오일 냄새를 참을 수 있을 만큼 말입니까?”

“네.”

“착하네요.”

도명이 도화의 입술에 콘돔을 물렸다. 도화의 입술 사이에 말려 들어간 고무가 막처럼 물렸다.

“입으로 씌워요.”

도명이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명의 말투나 행동을 보아선 여유가 있는 것 같은데 도명의 페니스는 터질 듯이 커져 있었다. 

도화는 도명의 말대로 입으로 콘돔을 씌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 정확히 조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도명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도화의 목젖 끝에 얇은 고무 막이 씌워진 도명의 뜨거운 페니스가 느껴졌다.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단단함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도화는 콘돔이 씌워져서 번들거리는 도명의 페니스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런 것에 꿰뚫릴 뒤를 생각하니 배 속이 뜨거워지고 울렁거렸다.

“엉덩이 천천히 내려 봐요.”

도명이 자신의 귀두를 도화의 뒷구멍에 맞춘 후 속삭였다. 도화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도명의 말대로 내장이 밀려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참으며 엉덩이를 내렸다.

한 번에 페니스를 삼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도명이 애무를 오래 해 준 덕분에 안쪽이 찌르듯이 아려 올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읏. 음.”

“하아. 안이 엄청 조이네요.”

도명이 잘한다는 듯이 자신의 배 위에 올려진 채 굽어진 도화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도화는 도명의 손길을 느끼자 그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내밀하게 맞물린 도명의 페니스와 도화의 안쪽 살덩어리처럼 그들의 손가락 사이도 조금의 틈도 없이 꽉 맞물렸다.

“후, 잘 하고 있어요. 읏. 음. 네, 그래요. 조금만 더요.”

도화의 엉덩이가 도명의 골반에 닿았다. 도명의 음모까지 느껴질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 도화는 천천히 숨을 쉬며 긴장된 온몸을 이완시키려고 노력했다.

“어때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고개를 가로저어댔다. 도명이 느끼기에도 도화의 뒷구멍이 그의 페니스를 지나치게 꽉 물고 있었다.

“스스로 해 보겠어요? 아니면 내가 힘으로 뚫어 줄까요?”

도명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스스로 해 볼게요.”

도명이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도화의 허리를 잡았다. 도화의 허리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백구가 그려진 티셔츠는 어느새 도화의 땀으로 젖어 있었다. 도명은 손가락으로 도화의 배꼽 주위에 원을 그렸다. 그러자 미세한 자극에 도화가 뒷구멍에 힘을 더욱 주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면에서 여유 있는 섹스가 나쁘지는 않았다. 모든 작은 자극들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성 경험이 많은 도명 역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는 언제나 상대방을 압도해야 했다. 미세한 애무는 단지 극적인 감각을 더욱 극적이게 느껴지게 해 주는 미세한 전조에 불과했다. 목적이 아닌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한 것이 되는 감각이었다.

“읏. 하아. 천천히 해도 돼요?”

도화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은 허락의 뜻으로 도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바르르 떨리는 도화의 손이 침대 시트 위로 갔다. 도화는 침대 시트가 어그러지도록 꽉 쥐고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화가 움직일 때마다 주인이 다른 살덩어리가 마찰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도명은 오일을 손바닥 위에 잔뜩 짰다. 도명의 손가락 사이에서 점도 높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도명은 번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도화의 구멍 주위에서 원을 그리다가 빡빡한 틈 사이에 손가락을 걸쳤다. 그렇지 않아도 팽팽한 도화의 구멍 주위가 더욱 팽팽해졌다.

“잠깐 빼 봐요. 편하게 해 줄 테니까.”

하지만 도화가 고집을 부렸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명은 못 말린다는 듯이 도화의 팽팽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주물렀다.

도화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상체를 손으로 계속 쓰다듬었다.

예민한 젖꼭지에 도명의 손이 스칠 때마다 도화가 더욱 세게 도명의 페니스를 물고 늘어졌다.

“읏. 아. 앗. 아. 아.”

도화가 허리가 움직이는 반경이 아직 작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제법 허리를 쓸 줄 아는 모양새였다. 도명이 기특하다는 듯이 도화의 페니스를 쓰다듬었다.

도명이 도화가 자신의 목을 두르도록 팔을 잡아끌었다. 허리가 완전히 내려가지 않도록 지지하고 있던 두 팔이 사라지자 도화의 안쪽에 도명의 페니스가 더욱 깊숙이 박혔다.

달콤한 통증이 진해질수록 도화가 도명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도명도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화의 엉덩이가 사이가 더욱 너저분해졌다.

도명은 도화를 더욱 강렬하게 원했다. 분명히 착 달라붙은 체온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안을 더욱 거세게 헤집고 싶었다. 

어느새 도화의 등을 침대 헤드에 닿았고 도명이 허리를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침대 헤드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읏. 앗!! 읏. 음!!! 하아. 앗. 도명 씨.”

“하아. 하아. 하. 다리, 좀 더 벌려요.”

도명이 도화의 무릎을 잡고 양옆으로 벌렸다. 도화의 다리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어느새 M자 모양이 되었다.

“읏. 으핫. 읏. 읍.”

도화는 안쪽이 흐물흐물하고 질척거린다고 느낄 정도로 그의 페니스를 받아들였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결국 도명은 오늘도 도화를 울리고 말았다. 도화는 도명을 끌어안은 채로 목 놓아 울었다.

세 번의 섹스가 끝나고 도화는 넋을 놓고 도명의 집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온몸이 늘어졌다. 열정적으로 체력을 많이 쓴 탓도 있었지만 행복한 나른함에 몸이 늘어지는 면도 컸다.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기 싫은 느낌이었다.

도화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도명과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명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화는 오늘 도명이 어리광을 다 받아 주었으니 마지막으로 말이라도 해 볼까, 고민했다.

도명이 고민하는 도화의 손목을 잡았다.

“자고 가요.”

“네.”

도화는 불 꺼진 방 안에서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아까 왜 울었어요? 엄청 울던데요?”

도명이 도화의 등 뒤에서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화는 나른한 정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너무 울어댔다.

“알면서…… 괜히 묻지 말아요.”

“모르겠는데요.”

“아니까 물어보는 것 같은데요.”

도화가 볼멘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아니까, 듣고 싶은 거라고요. 도화 씨 목소리로 확인받고 싶습니다.”

도명이 채근하듯 도화의 어깨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도명이 도화를 무는 것이 제법 셌다.

“조, 좋아서, 그, 그래요. 너무 좋아서 울었어요.”

도화는 밤새 도명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 결국 시인하고 말았다. 겨우 식었던 도화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울어도 너무 울었다. 도화는 자존심이 상해서 이대로 대화를 끝낼 수 없었다.

“뭐, 도명 씨는 살면서 안 울어요? 아 젠장. 안 울 것 같긴 하네요.”

“제가 우는 거 보고 싶어요? 그러면 도화 씨 마음이 덜 억울하겠어요?”

도명의 말투는 여상스러웠지만 어딘가 깊게 가라앉은 구석이 있었다.

“네. 사실 도명 씨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왜요?”

“네?”

“왜 제가 우는 게 보고 싶은 거죠?”

도명의 직접적인 질문에 도화는 당황했다. 이렇게 이유까지 자세히 물어볼 줄은 몰랐다.

“솔직히요?”

“네. 당연히 단 하나의 거짓말도 없이요. 설마 저를 상대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 그렇게 거창한 이유는 없는데요. 단지.”

도화의 입술이 열리다가 말았다.

“단지?”

“그냥, 도명 씨가 얄미워서요.”

도화는 아무래도 자신이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명의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로움이 얄미웠다.

도화뿐만 아니라 도명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라면 그와 잘 지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을 해 봤을 것이다.

“도화 씨 나를 좋아하긴 합니까?”

도명이 일부러 표정을 심각한 척 굳히고 도화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진지한 도명의 반응에 도화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도명 씨 그게 아니라. 그. 그.”

도화는 어서 변명해야 하는데 달리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세상 혼자 잘나게 사는 모습 보면 진짜 얄미운걸!

도명은 당황한 도화의 반응이 재밌어서 그를 더욱 몰아붙였다.

“도화 씨의 저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 아니었네요.”

“저는 정말 도명 씨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사람의 우는 얼굴이 고작 제가 얄밉다는 이유로 보고 싶다고요?”

도명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도화의 얼굴에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명이 품 안에 도화의 머리를 끌어당기고는 쓰다듬다가 입을 맞추었다.

도화는 금방이라도 진심으로 화낼 것 같은 도명이 갑자기 부드럽게 굴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도명의 반응을 보면 분명 놀린 것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자신을 놀린 그에게 투정을 부리기에는 혹시나 미움받을 거라는 공포가 더 세서 도명을 꽉 끌어안고 얼굴만 비비적댔다.

“저는 정말 진심이에요. 제발 이상한 오해 하지 말아요.”

“알았습니다. 도화 씨, 장난친 거예요.”

“그저 도명 씨는 혼자 다른 사람의 기분에 휩쓸리지 않는 게 가끔, 아주 가끔 얄미워질 뿐입니다. 적어도 내 기분이 도명 씨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도화 씨 기분은 저에게 중요한 문제에요. 그걸 왜 모릅니까?”

도명이 도화의 등줄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명의 목소리에 약간의 억울한 기분이 묻어 나왔다. 도명은 그동안 도화를 사랑하게 되면서 생긴 감정 기복들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자신의 규칙이 만들어 준 냉소적이면서 평화로웠던 감정의 시간을 보낸 사람에겐 그것은 감정의 핵폭탄을 맞은 것과 다름없었다.

“도명 씨는 언제나 모든 걸 안다는 표정이니까요. 슬픔 같은 건 모르는 그 표정 말입니다.”

도화는 이렇게 말하고 난 후에야 자신이 기차를 타고 온 날, 앙상해진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도화는 말없이 도명의 뺨을 쓰다듬었다.

“도명 씨 최근에 운 적 있어요?”

“최근에 말입니까? 도화 씨가 뭘 알고 싶어 하는 걸까요?”

도명이 도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냥 질문 그대로요.”

“그냥 질문 그대로긴. 도화 씨 때문에 울어 본 적 없냐고 물어보는 거잖아요.”

도화는 도명의 이런 점이 힘들었다. 언제나 이렇게 숨기고 싶은 본심을 꿰뚫어 보니까 이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완전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그것도 궁금하긴 하죠.”

“그것도가 아니라. 그게 핵심이죠. 안 그래요?”

“네. 맞아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놀리고 대답 좀 해 주세요. 도명 씨는 정말 사람 민망하게 하는데 뭐 있네요.”

“도화 씨가 사라진 그 날 밤 도화 씨 꿈을 꾸며 울긴 했죠.”

도명이 민망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잘못했어요.”

“기쁜 거 아닙니까? 제가 도화 씨 때문에 운 것 말입니다.”

“아. 음 복잡한 기분이네요.”

“복잡해요?”

“네. 도명 씨에게 제가 아무 의미 없다는 것도 싫은데, 또 도명 씨가 마음고생 한 것도 싫어요. 그런데 그게 또 제 잘못이라서.”

“나한테 잘해 줘야 해요.”

“네. 당연하죠.”

“싸구려 음식 말고 영양가 좋은 밥 잘 먹고. 차 조심하고, 또 언제나 집으로 돌아와요. 마치 관성처럼. 내가 불안하지 않도록 오랫동안 도화 씨가 한 것처럼 이왕이면 같은 시간대에 말입니다.”

“그게, 제가 도명 씨에게 잘해 주는 겁니까?”

도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도화가 도명에게 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저 도명이 자신에게 또 다른 달콤한 말을 속삭인 것 같았다. 존재만으로도 도명에게 잘해 주는 거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네. 그게 잘해 주는 겁니다.”

“저도 도명 씨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은데. 방금 건, 그냥 너무 쉬워서요. 마치 저한테 숨 쉬며 살아 있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네요.”

“쉽다니 다행이고 또, 기쁘네요. 사실, 그렇지 않아도 도화 씨에게 부탁할 게 있습니다.”

“네. 뭐든지요.”

“요즘 꿈을 꿉니다. 너무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라서 이제는 끝내고 싶어요. 혹은 그 꿈의 다른 챕터로 넘어가고 싶다든지.”

“나쁜 꿈이에요?”

“복잡하네요.”

어둠 속에서 도명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왜 복잡한데요?”

“꿈속에 나오는 존재는 제가 사랑했던…….”

“아, 설마. 도명 씨 첫사랑입니까? 도명 씨가 34살이 되는 지금까지 정말 사랑을 안 해 봤을 거라는 생각 안 했어요.”

“네?! 아니요. 아니요. 아니, 사랑은 사랑인데 도화 씨가 지금 상상하는 그런 사랑은 절대 아닙니다.”

‘내 첫사랑은 백구 너고. 자존심 상하네.’

도명은 도화가 표현한 34살이 되는 지금까지 사랑을 안 해 봤다는 말이 묘하게 수치스러웠다. 그 전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아니 무감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럼요?”

“아, 그러니까 개입니다. 제가 사랑했던 개. 이름은 도도고요.”

“이름이 도도에요?”

“네. 여동생 이름은 도희고 저는 도명이고, 키웠던 개 이름은 도도고요.”

“와, 이름도 맞추고 소중했던 개였네요. 요즘 키우는 개를 반려동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개념이었나 봐요. 이름은 도명 씨가 지은 거예요?”

“아니요. 여동생이요. 동생이 데려온 개예요. 동물 보호소에서 안락사 직전에 입양해왔죠. 보호소에 친구들하고 봉사 활동 갔다가 계속 눈에 밟히는지 갑자기 개를 키우겠다고 온 집 안을 뒤집어 놨죠. 집에서 개 키우는 걸 반기는 식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식구들이 동물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보는 것만 좋아했죠. TV 속에서 귀염 떠는 걸 보는 걸 더 즐기는 편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어머니가 깔끔했거든요. 털 있는 동물은 필연적으로 온 집 안에 털도 떨어트릴 거고 또 동물 특유의 냄새도 날 거고요.”

도명은 말을 이어나가다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다만 도화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쓰다듬고만 있었다.

“도명 씨가 깔끔하고 정리 좋아하는 건 어머니를 닮았나 보네요.”

“…….”

도명은 도화의 질문에 바로 답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어머니가 아니었어요. 아버지였지. 왜 그런 미묘한 분위기 있잖아요. 아버지가 말없이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 필연적으로 산만하고 지저분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향해 제재를 가하는 건 어머니였죠. 언제나 교육은 어머니의 몫이었죠. 또 집 안을 언제나 완벽한 모습으로 유지시키는 것 또한 어머니의 몫이었고요.”

“어머니가 사실은 깔끔한 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가방.”

“가방이요?”

“네. 어머니는 언제나 완벽하고 우아했죠. 하지만 본인의 가방 안은 두서없이 뒤섞인 물건들이 많았고 구겨진 영수증도 구석에 박혀 있었죠. 심지어. 가방 바닥에 고여 있는 먼지 하며,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죠.”

“가방 하나로 알 수가 있어요? 다른 건 완벽한데 가방 안은 그렇지 않다는 이유만으로요?”

“왜냐하면 저는 그런 건 절대 못 참거든요. 무질서함은 물론이고 먼지라니. 진짜로 그런 사람은 남이 보든 안 보든 내 공간이 그런 걸 못 참아요.”

도명은 아버지의 책상 위와 눈에 안 보이는 서랍 안을 상기했다. 작은 물건 하나조차 언제나 같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책상 위하며 서랍 안은 물건들이 어떻게 분류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서가 있었다.

“그런 집에서 용케도 개를 키우게 됐네요.”

“거기에는 복잡한 이유들이 섞여 있었어요. 아버지는 도희를 아꼈어요. 전형적인 딸 바보였었죠. 엄한 척하셨지만 도희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해 주고 싶어 했어요. 도희가 도도를 키우고 싶다면 키우게 해 줘야 하는 거죠.”

“도명 씨가 키우고 싶다고 했으면 안 됐을까요?”

“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도명 씨도 자식이고…….”

“도희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갑고 애교가 많은 식구였어요. 어머니는 완벽했지만 애교가 있는 여성은 절대 아니었죠. 또 저는 언제나 웃고 있고 살가운 척했지만 아버지가 좋아할 방식은 아니었죠. 그저 밖에서 체면 세워 주기 좋은 아들이긴 했습니다. 행동거지 하며, 학업 성적 하며. 하지만 집안에서 마음을 녹여 주는 존재는 언제나 도희였죠.”

“아 뭐랄까. 도명 씨 아버지는 욕심이 많은 편 같아요. 집안 식구들이 완벽하길 바라면서 또 살가운 것까지 바라시고. 도명 씨가 많이 섭섭했겠어요. 도명 씨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텐데.”

도화는 다른 사람의 부모를 욕하는 것 같아서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도명의 아버지가 얄밉고 원망스러웠다.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인데 말이다.

“제가 속상했을 건 걱정 말아요. 이 관계에는 반전이 있으니까. 언제나 도희에게 사랑받는 아버지이고 싶었지만 도희는 아버지를 싫어했어요.”

도명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입꼬리를 쓱 올렸다.

“언제나 애교 있는 딸이었다면서요.”

“아버지는 모든 악역을 어머니한테 떠넘겼기 때문에 본인이 사랑받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원래 식구들은 부딪치면서 정이 드는 편이고 또 딸은 어머니한테 감정 이입하기 좋으니까요. 도희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그 교묘한 방식을 마음에 안 들어 했어요. 언제나 저한테 아버지는 음흉해서 싫다고 했죠.”

“저, 하지만 언제나 애교 있는 딸이었다면서요.”

도화가 여전히 도명의 말이 이해가 안 가서 아까의 질문을 반복했다.

“현명하게도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아는 거죠. 도희는 그런 식으로 언제나 집 안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어요. 그 증거 중 하나로 결국 도도를 키우게 됐죠. 아버지가 집 안에 개를 들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어머니는 아버지만 아니면 도도를 키우는 걸 원했어요? 도명 씨의 말을 들어 보면 개가 집에 오면 그 뒤치다꺼리는 어머니 몫일 것 같은데요.”

“제가 아까 복잡한 이유가 있다고 했죠. 어머니는 저 때문에 키우고 싶어 했어요.”

“도명 씨 때문에요? 도명 씨도 개를 키우고 싶었어요?”

“절대 아니었죠. 절대.”

“집 안이 지저분해져서요?”

“복잡한 이야기이니까 성급한 질문들은 잠시 미루고 가만히 잘 들어 봐요. 어머니는 그 작은 동물로 제 인간성을 확인받고 싶어 했어요. 제가 개를 대하는 것을 보고 말입니다. 저한테 집 안의 청결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집안에서 제가 해야 하는 역할극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역할 말입니다. 그때 당시 저는 사실 그렇지 않아도 지치고 화가 나 있었어요. 어머니의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 언제나 바르고 성격 좋은 아들 역할, 도희에게는 언제나 아군이 되어 주는 다정한 오빠, 아버지의 트로피 같은 아들.”

“아. 굉장히 비현실적이네요. 도명 씨 그런 완벽한 가족 구성원이 어디 있어요?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이에요.”

“그런가요?”

“네. 그러니까 힘들었죠. 목표가 너무 비현실적이에요.”

“확실히 하나는 실패했죠. 부모님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직까지도 실패했으니까.”

“역할극을 그만두면 오히려 어머니가 안심할지도 몰라요. 물론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제가, 도명 씨에게 할 조언은 아니지만. 어쨌든. 가족끼리 그런 역할극을 한다는 것 자체가 좀, 슬퍼요.”

“역할극은 어쩌다 보니 이미 끝났어요. 역할극이 끝나고 남아 있는 그대로의 저는 동성애자에다가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흥분하는 변태니까.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죠.”

도화는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한다는 듯이 그의 이마와 콧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개가 오고 어땠어요?”

“아까 말했듯이 전, 그때 이미 많이 화가 나 있고 지쳐 있었어요. 새로운 역할극을 추가하기에는 말이에요. 도도가 온 날, 저는 도도를 반기지도 못했어요. 집 안에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순간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 같았죠. 어서 개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안아 들고 돌보라고 개가 짖는 것 같았어요. 그게 네가 이 시험을 통과하는 답안지라고 짖고 있었죠. 제가 그 당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도가 싫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그 출신이 너무 싫었어요. 그 상처받은 출신 말이에요. 개의 특성상 분명 가족 구성원들에게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았죠.”

“도명 씨처럼.”

도명은 도화의 한마디에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네. 저처럼. 나는 누구를 위로하고 역할극을 추가로 떠안기에는 계속 말하지만 지쳐 있었어요. 나는…… 너무나 지쳤다고요.”

“네. 도명 씨는 분명 지쳤을 겁니다.”

“그런데 그 망할 도도가 그 집안에서 가장 무심하게 구는 저를 제일 쫓아다니더군요. 자신을 데려오고 가장 예뻐하는 도희가 불러도 저에게 언제나 달려왔죠. 제가 쏘아보면 완전히 다가오지는 못하고 제 옆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언제나 같은 풍경으로요. 그게 너무 싫다가 어느새 그게 당연한 풍경이 될 정도로 시간을 들여서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도는 도명 씨에게 어떤 존재가 됐어요?”

“집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존재가 되었죠. 유일하게 안전하고 무해하며 복슬복슬한 그런 존재 말이에요.”

“달콤하네요.”

“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제가 도도를 돌봤다고 생각했는데, 도도가 저를 돌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화 씨 그런 도도가 거의 매일 밤 저를 찾아와요. 자신을 놓아달라고요. 그런데 저는 도도를 놓을 수 없습니다. 제 힘으로는 못 놔요. 어쩌면 영원히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화 씨 도움이 필요해요. 제가 잠을 자다가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으면 도화 씨가 제 손을 강제로 펴 주세요. 심지어, 제가 그러지 말아 달라고 울어도 말입니다. 제가 울고 또, 너무 버티려고 힘을 준 나머지 강제로 펴다가 제 손을 부러뜨려야 해도 말이에요.”

***

도명은 오래간만에 편안히 잠들었다. 그것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타인의 체온을 느끼면서 말이다. 도명은 오늘 밤에도 도도가 찾아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저항감 없이 잠에 들 수 있었다.

의식이 점점 암청색 바다 아래에 잠기는 걸 느낄 때마다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이번에는 다시 떠오르려고 팔 다리를 휘젓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다시 밝은 빛이 그의 시야를 덮치면서 오는 그 느낌을 기다렸다. 도명의 의식이 완전히 무의 감각에 도달하고 조금 후 그의 눈꺼풀 안쪽에 밝은 빛이 퍼졌다. 그리고 눈이 떠졌다.

다시 도도가 교통사고를 당한 그 날, 그 장소였다. 도명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도도가 꼬리를 흔들며 산책 중이었다.

도명이 손을 뻗어 도도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도도가 일어서더니 모습을 조금 바꿔 와인 색 정장을 입은 채 도명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완벽한 정장을 입은 정신과 의사, 도도의 목에는 목줄이 달려 있어서 풍경이 묘했다.

“도명 씨, 오늘은, 달라 보이네요.”

“네.”

“정확히는 도명 씨가 특별히 달라 보인다기보다 우리만의 공간에 누가 끼어들어 있군요. 하얗고 또, 도명 씨가 무력할 때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사람 말입니다. 흠, 도명 씨 같은 사람이 자신의 가장 약한 지점을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뭐, 좋은 쪽으로 달라졌다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하지만 역시 반칙이에요.”

“반칙이라도 해내면 되는 거죠. 안 그래요?”

“뭐, 목표에 도달하면 그만인 세상이긴 하죠. 지금까지 도명 씨는 목표를 이루는데 유능한 편이긴 합니다만 그동안 딱히 반칙은 안 썼어요. 그렇다고 완벽히 정석은 아니지만. 뭐 이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어쨌든 도명 씨는 그래서 잘 모를 겁니다. 반칙에는 부작용이 있어요.”

“부작용이요?”

“네. 언제나 시간 차를 두고 덮쳐오곤 하죠. 하지만 반칙을 썼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들을 못 하죠. 보통 사람들은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뭐, 혼동하기는 쉽습니다. 내 잘못 없이 혹은 잘못의 사소한 크기에 비해서 단지 운이 안 좋아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작용이 뭡니까?”

도명은 그 부작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수하겠다는 듯이 얼굴 근육이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주로 반칙을 쓸 때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고 싶거나 불안 혹은 조급함이 원인입니다. 도명 씨의 불안이 뭔지는 알겠습니다. 행복한 순간들 구석구석에 시한폭탄이 놓인 기분일 겁니다. 시한폭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언제 터지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 하나만은 확실한 겁니다. 어딘가 시한폭탄이 있다. 그래요. 조급하겠죠. 하지만 이건 염두에 두어야 해요. 반칙으로 무언가를 얻었다면 정말 얻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도화 씨 도움을 받으면 결국 제가 이것을 통해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까?”

“적어도 전부를 얻은 건 아니죠. 안 그래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얻긴 얻는다는 이야기군요.”

“그래요. 얻긴 얻죠. 적어도 도명 씨가 결정해서 직접 도화 씨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니까. 반칙이긴 한데 질이 나쁜 편은 아니죠. 하지만 제가 염려하는 건.”

“나는 평생 이 목줄을 못 놔요. 그건 알 수 있죠. 나랑 평생 이곳에서 살래요?”

도명이 도도의 목줄을 자신의 쪽으로 힘주어 당겼다.

“하아.”

도도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문제지. 아무도 모르죠. 도명 씨의 잔인함은 사실 그 누구보다 마음을 주는 것 때문이란 걸. 당신은 언제나 감정이 넘치는 게 문제였습니다. 당신이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것에 비해서 언제나 돌아오는 건 하찮잖아요. 언제나 도명 씨에 비해 타인들은 멍청하고 이기적이며 무심하기 짝이 없죠. 안 그래요? 그래서 도명 씨는 언제나 목마르고 인정받지를 못하니 화를 내거나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에 한 것처럼 규칙들로 감정을 묶어두며 사는 편이 편할 겁니다. 왜 이제 와서, 묶어뒀던 감정을 풀게 놔둔 거죠? 감정 과잉이 문제라면서요.”

“감정을 묶어두면 행복한 기분도 못 느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도명 씨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던 겁니다. 왜요? 당신은 너무나 특별해서 그런 걸 원하는 않는 줄 알았나요?”

“그래서 도화 씨 도움을 받아서 오늘 당신의 목줄을 놔도, 이번 건은 무효 처리되는 겁니까?”

“아니요. 목줄을 놓은 건 놓은 거니까.”

도도가 두 손을 펴며 말했다.

“그나저나 부작용에 대해 말해 봐요.”

“걱정 말아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지키는 도도니까. 그러니 다음 진료도 준비되어 있어요. 그 부작용에 대한 해결책도 포함해서요.”

도명은 도도의 ‘당신을 언제나 지키는 도도’라는 말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도도는 정말 그랬으니까.

두 존재가 대화하는 사이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도를 친 차가 달려오던 그 사거리였다. 도명의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나갈수록 힘이 들어가는 신체 부위는 목줄을 잡고 있는 손뿐이었다.

도화가 잘해 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도명이 이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지도 몰랐다. 도명은 긴장감을 풀기 위해 도도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진료실에 그 촌스러운 토네이도 사진 좀 치워요. 정말 안 어울리는 거 알아요?”

“아. 그거, 그 사진하고 세트로 구성된 걸 봐야죠. 촌스럽게 작품 보는 법을 모르네요.”

도도의 시선이 길 건너로 집중되어 있었다. 길 건너 화단에 나비가 팔랑거리고 있었다. 도도의 시선에 따라 도명도 시선을 길 건너 화단의 나비에 고정했다.

그리고 그날 기억에서 오랫동안 생략됐던 것이 생각나 버렸다. 그날, 길 건너에서 팔랑거리던 작은 나비 한 마리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도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던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못했다.

16년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깨닫는 느낌은 이상하고 또 오싹했다.

“나는 나비가 좋아요. 그 팔랑팔랑, 살랑살랑하는 느낌이 말입니다. 고양이들은 이 오묘한 움직임을 대체 어떻게 예상하는지 잘만 잡더군요. 제가 나비를 좋아하는 건 잡을 수가 없어서 더 푹 빠지게 되는 그런 고약한 심리도 있죠.”

도도가 주둥이 끝을 올리며 나비를 반짝이는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나는 나비가 싫습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그 특유의 좋은 성격이 싫습니다.”

도명이 서윤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하하. 질투군요.”

“질투라고요?! 하.”

도도는 도명의 반응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여전히 나비만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 마음껏 나비를 쫓고 싶어 했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전 주인하고 살 때는 주인을 놓칠까 봐, 주인이 외국 간다고 저를 상자에 담아 버릴 땐 주인의 점점 희미해지는 냄새를 쫓느라 또 동물 보호소에서는 철창 안에 갇혀 있어서 나비를 못 쫓았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당신이 내 목줄을 쥐고 있을 때 오랫동안 미뤄왔던 걸 하고 싶어 했던 걸 말입니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언제나 미뤄 와서 못 했다고. 이번에는 해도 되지 않을까? 안전한 당신의 품이라면 이번엔 괜찮지 않을까? 안전한 당신은 그걸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도도가 그리 말하고는 도명을 지그시 쳐다봤다.

“지금 그런 생각 하고 있죠? 이건 본인을 위한 변명이다. 도도의 목줄을 놓기 전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 거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꿈속이고 여기 서 있는 도도는 내 머릿속이 만들어낸 존재니까.”

“그래. 지금 네가 지어낸 이야기는 나를 위한 변명이야.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도명은 도도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존댓말을 쓰는 것이 우스워졌다.

“그런 상상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아직 세상 모든 일을 설명하기에는 심리학이니 뭐니 하는 과학은 충분치 않다고.”

“이것도 변명이야. 문에 거는 이중 잠금장치 같은 거지.”

도명의 말에 도도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주둥이 끝을 씩 올렸다.

“도명 씨,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도도는 그렇게 말한 후 도명의 시선 앞에서 사라졌다. 도명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완벽한 개의 모습을 한 도도가 나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꼬리를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도도를 친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차가 들어오고 도명은 아래턱에 힘이 제대로 들어갈 정도로 온몸에 힘을 주었다. 힘을 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어떤 강력한 힘이 도명의 손을 펴는 것이 느껴졌다. 도명이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신의 힘같이 너무나 강력한 힘이었다. 너무나도 강력한 힘 앞에서 도명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도명의 손에서 도도의 목줄이 아스라이 빠져나갔다.

도도의 몸과 자동차의 단단한 금속이 부딪쳤다. 당연히 온몸이 무너져 내려가는 것은 도도 쪽이었다. 도명의 확장된 눈동자 주변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압도적인 슬픔으로 도명의 숨이 턱 막히는 찰나 도도의 몸이 터졌다.

그의 분자 구조 하나하나가 나비가 되어 공간에 퍼졌다.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명의 뺨을 스쳤다.

그리고 도명이 눈을 떴을 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도화의 얼굴이 있었다. 도명의 뺨 위로 도화의 눈물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명은 도화의 눈물 때문에 자신이 도화의 앞에서 창피하게 얼마나 울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뺨 위에 흐르는 눈물 중 몇 퍼센트가 자신의 눈물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저 네 눈물이 내 눈물이고 내 눈물이 네 눈물이었다. 

도명의 손에 도화의 손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 전체가 욱신거렸다. 도화가 완벽하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도화 씨.”

도명이 잠긴 목소리로 도화의 이름을 불렀다.

“도화 씨, 왜 울어요?”

“아니, 그게, 도명 씨가 너무 슬프게 울어서요.”

“저, 많이 울었습니까?”

도명의 질문에 도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도를 보내서 마음이 먹먹한 와중에서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도명은 타인 앞에서 운 적이 없었다.

“도화 씨가 더 우는 것 같은데.”

도명이 도화의 빨개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도명은 자신의 눈물에 이유도 모르면서 이렇게 서럽게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니 깊은 마음의 안식이 오는 것 같았다.

도화가 눈물을 같이 흘려 준다고 마음의 고통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도명은 도도 이후로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도화가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해 주지 않아도 불안은 잦아들고 지금 내 몸을 덮쳐온 고통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도명 씨가 하라고 하니까 도명 씨 손을 펴는데, 그게 도명 씨가 너무 서글퍼 보이고, 또 너무 온몸으로 괴로워해서, 너무너무 하기 싫은 데, 도명 씨가 하라고 했으니까. 부탁한 거니까. 아 젠장, 뭐라고 하는 건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러니까 진정해요.”

도명의 진정하라는 말에도 도화는 계속 서러운 감정을 쏟아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슬펐어요. 시킨 대로 곱아진 도명 씨 손가락을 펴야 하는데 저는 또 그 와중에 눈물이 너무 나와서 눈물도 닦아야 하는데 뭘 먼저 해야 할지 몰라서 막 정신도 없고, 정신도 없는데 또, 너무 슬프고.”

“제가 얄미워서 울었으면 좋겠다면서요.”

“그냥 저 혼자, 잘난 도명 씨를 얄미워하는 게 마음 편한 것 같아요. 도명 씨, 울지 말아요.”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도화의 눈에서는 눈물이 또 또르르 흘러내렸다. 도명이 손가락을 도화의 눈가에 가져다 냈다. 도명의 손가락을 도화의 눈물이 감쌌다. 

도명이 도화의 우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아, 왜 또 울어요.”

“그거야 도화 씨 얼굴이 너무 슬프니까요.”

“제가 도명 씨 얼굴 보고 우는 건데 도명 씨가 저 얼굴 보고 울면 저도 슬퍼지잖아요. 이러다 우리 영원히 울겠어요.”

“도화 씨.”

“네.”

도명이 또 눈물을 흘렸다.

“왜 자꾸 울어요.”

“이 눈물은 의미가 달라요.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울어요?”

“도화 씨, 사랑해요.”

도명은 지금, 이 순간 이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도화가 얼빠진 얼굴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에게 이미 손가락으로 고백을 받았고, 더 이상 이런 거에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화는 지금 너무 놀라서 딸꾹질마저 터져 나왔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 얼굴 보고 좋고 또 안심이 되어서 흘리는 눈물이라고요. 아 젠장, 도화 씨 사랑해요.”

“아, 저도, 사랑해요. 도명 씨를 너무너무…… 사랑해요.”

“도화 씨.”

“아. 네. 네!”

“알아요.”

도명이 편안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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