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 달달한 밤.
도화가 엉엉 울면서 두 사람의 집을 잇는 그 문을 닫았다. 도명이 쫓아 와서 자신은 사랑을 안 하는 주의라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냐며, 역시 답은 나는 도화 씨를 사랑할 수 없다고 그 잘난 얼굴로 쏘아붙일 것 같았다.
도화는 적어도 오늘 밤만이라도 도명의 그런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너무 단내 나는 밤이었다. 하루만이라도 그런 하루이고 싶었다.
딱히 자물쇠를 사놓은 건 없어서 부적을 쓰는 사람처럼 도명이 질색하는 공포영화 DVD를 가득 담은 상자를 문 위에 올려놨다. 그 문을 짓누르고 있는 게 공포영화 DVD라는 걸 알리듯 도명이 봤던 그 DVD를 문 앞에 청테이프로 붙여 놨다.
‘이 나쁜 놈아, 오지 마!’
그리고 그것도 불안해서 집 앞 현관문에도 공포영화 DVD를 붙였다. 그리고 계속 쏟아지는 눈물을 어떻게든 멈춰 보려고 노트북 볼륨을 최대치로 높여놓고 공포영화 DVD를 보기 시작했다.
***
도명은 백구가 활개 치고 가고 난 후 그의 기준에서는 폭탄이 맞은 것 같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흥분한 상태로 들어오면서 서로 부딪치며 물고 빨고 엉겨 붙은 곳마다 그가 정해둔 질서에서 벗어난 물건들이 보였다.
침대 위는 또 어떠한가. 완벽하게 세탁된 이불보는 땀과, 정액뿐만 아니라 녹은 초콜릿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걸 다시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도명은 뇌 속에 폭탄이 터진 것처럼 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아까 도화가 고백했을 때는 심장에 심어진 뇌관이 터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용기 내서 고백한 도화에게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성대가 고장 난 사람처럼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심장은 쿵 내려앉았고 혈관은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팽창했다. 하다못해 ‘저도요.’라는 말이 안 나오다니. 다 차려 놓은 진수성찬에 숟가락 하나 못 내려놔서 아무것도 못 먹은 꼴이었다.
이제 와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화가 도명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처음부터 도화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고, 섹스 파트너가 된 후에도 섹스 파트너 이상의 관계를 꿈꾸는 것 같은 행동을 연달아 해서 도명을 당황스럽게 했다.
그렇게 해서 도명이 도화에게 두 번이나 경고를 줬다. 무려 두 번이나.
그 후에 도화가 먼저 도명과의 관계에 선을 그었지만, 그것도 잘 생각해 보면, 이게 싫으면 당신이 그어 놓은 선 좀 걷어가라는 투쟁에 가까웠다. 그리고 최근에는 계속 진짜로 몸을 섞자고 그 숫기 없는 사람이 조르는데 이걸 어떻게 몰랐을까.
‘그러니, 자신이 고백할까 봐 도망갔지. 내가 두 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어떤 강심장이 세 번이나 고백해. 그것도 고백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인데.’
도명은 도화가 고백 중 미안하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사랑하게 돼서 미안하다니. 자신이 도화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답안지를 까놓고 보니 도명 자신도 황당했다. 도화가 도명을 아직도 좋아할 확률은 아주 높았고 거기다가 상대는 표정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도화였다. 잘 모르는 사람 속도 들여다보는 도명이 그걸 모르다니. 이게 바로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는 의미인 건가.
통상적으로 쓰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어쨌든 도명은 도화의 고백을 전혀 예상 못 했다. 얼마나 우스운가. 그렇게 애틋해하며 열정적으로 몸을 섞었는데 도화가 고백할 것을 예상 못 하다니.
도명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영화가 상영되지 않은 하얀 빈 벽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엉망이 된 집 안처럼 그의 세계가 180도로 뒤집힌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도화가 고백했을 때는 몸이 고장 나서 아무것도 못 했다.
도화가 울며 이 집을 뛰쳐나갔다. 덩치에 안 맞게 겁 많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 이 사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짐을 싸고 2차 가출을 감행할지도 몰랐다.
도명은 도화에게 자신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지만 조바심이 더 셌다.
하지만 고백을 듣기만 해도 공황 상태에 빠지는데 어떻게 고백하지? 상상만으로 다시 도명의 머릿속에 심해진 뇌관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언가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도명이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행거 하단에 있는 감청색 가죽 상자를 꺼냈다. 도명이 상자의 뚜껑을 열자 안에는 백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여러 용품들이 있었다.
도명은 수많은 용품 가운데 백구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꺼냈다. 도명은 살면서 이런 귀여운 일러스트가 있는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렸을 때도 그랬다.
도명의 어머니는 도명에게 언제나 꼬마 신사 같은 옷을 입혔다. 어린이가 입고 활동하기 좋은 편한 옷차림이었지만 아기자기한 장식이 없는 니트라든지, 티셔츠 위에는 베스트, 면바지 같은 것 등을 입혔다.
도명이 이번에 백구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까지 만든 건 입어 볼 일은 없겠지만 그냥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끔씩 이 비밀이라면 비밀인 이 상자를 열면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도명은 결연한 표정으로 백구 티셔츠를 입었다.
보는 것보다 역시 걸치니, 마음이 더 크게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이 티셔츠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서 그 위에 검은색 드레스 셔츠를 걸쳤다.
도명은 주로 군더더기 없는 라인의 하얀색 셔츠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의 그림이 비칠까 봐 검은색 셔츠를 입었다. 차이니즈 칼라로 색과 원단도 빳빳하고 스타일도 군더더기가 없어서 몸에 잘 맞는 셔츠였다.
도명이 고개를 돌리니 드레스 룸 안에 있는 전신 거울이 보였다. 도명은 머리를 매만지고 셔츠에 맞춰서 바지도 골랐다. 최대한 잘생겨 보여야 하는데, 최근 마음고생을 한 것 때문에 얼굴이 많이 상한 것이 거슬렸다.
잠자리 중에 도화가 내뱉은 엉망진창이라는 말도 계속 생각났다. 도명은 파랗게 변한 눈 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게 저승사자야. 사람이야.’
도명이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자신의 상태를 과장해서 보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평소의 상태와는 달랐다. 도명은 잘 안 쓰는 BB크림을 꺼내 들었다.
웬만하면 정성 들여 가꾼 좋은 피부 결에 선크림만 바르는 편인데 완벽하게 보이고 싶은 날에만 가끔 바르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잡티 하나 없는 도자기 피부를 만들 때 썼는데 회사에 중요한 미팅이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 바르는 것이었다.
도명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두껍게 BB크림을 발랐다.
더 챙길 게 있나, 도명이 드레스 룸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백구 그림이 그려진 물건 중에 금속으로 만든 열쇠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서 있는 백구 모양대로 금속판을 절단해서 만든 열쇠고리였다.
도명은 손가락에 고리를 걸고 손바닥에 백구 펜던트를 찍듯이 쥐었다. 손바닥에 백구의 실루엣이 살아 있는 감각으로 느껴지니 다시 한번 심신의 안정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도명은 심장이 심하게 떨릴 때마다 이 펜던트를 손바닥에 강하게 찍어 누를 것이다.
도명은 비장한 표정으로 도화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실 앞에 섰다. 도명은 어차피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자신의 바보짓에 스스로 한심해서 졸도하든, 고백하다가 졸도하든 결과는 같다고 생각했다.
도명은 계단실 끝에 웬 겨울 이불이 놓여 있어, 그 이불을 발로 밀었다. 이상한 것은 계절을 모르고 툭 튀어나온 겨울 솜이불만은 아니었다. 계단의 날카로운 발판의 모서리마다 스펀지가 볼썽사납게 덧대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미관상 매우 좋지 않았다.
‘뭐야 이게?’
도명이 계단의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머리 위에서 어떤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명은 어둠 속에서 아찔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계단 난간을 잡은 도명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도명과 도화가 도명의 집에서 본 ‘지하실’이라는 영화 DVD 뒷면이었다.
앞면은 지하실이라는 타이포그래피와 음침해 보이는 지하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고 뒷면은 지하실 속에 사는 검은 존재들의 눈들이 박혀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겪었던 트라우마들이 도명의 온몸을 엄습했다.
하지만 공포를 크게 앓은 만큼, 극복하는 것도 제대로 했다. 다시 이 DVD를 보니, 머리카락이 쭈뼛 서기는 했지만 처음 며칠 동안 겪은 공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도명이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도화에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이까짓 공포영화 DVD.
도명이 살짝 흩트려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도명이 팔을 뻗어 머리 위로 나 있는 문을 들어 올렸다. 문 위에 묵직한 것이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하하, 도화 씨. 해 보자는 거죠. 아, 역시,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이런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았겠어. 그것도 위험하게 계단실에서. 오해지만 어쨌든 자신을 찬 대가로 날 죽이겠다는 거지. 이거.’
도명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뒤에 이어져 있는 계단들의 아득함이 보였다. 도명은 괜히 멀쩡한 뒷덜미를 쓸어 넘겼다. 그러다가 계단실에 올라오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철에 맞지 않는 겨울 이불과 발판 모서리에 덕지덕지 붙여진 스펀지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 정말 자상도 해라. 내가 놀라 자빠질까 봐, 그사이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으셨어요? 이쪽 케빈은 자상하네. 이런 거 할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은 왜 단 한 번도 안 했을까. 진짜 이상한 데서 행동력 하나는 알아줘야 해.’
나 홀로 집에 살고 있고 방금 실연당해서 슬픈 도화가 울며 DVD를 문에 붙인 후의 조치였다. 혹시 도명이 놀라서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칠까 봐 안전장치를 만드는 모습은 더 가관이었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올까 봐 입을 틀어막으며 이불을 갖다 놓고 계단 판마다 스펀지 붙였다.
도명은 다른 쪽으로 잠입을 시도하기로 했다. 2층으로 직접 올라가는 것이다. 내일 아침, 어차피 마주치게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상대는 동네 백구다. 도명은 가게 옆 골목에 있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녘 최대한 단장을 하고 계단을 오르는 도명의 뒷모습이 수상해 보였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싸늘한 새벽 공기를 타고 음산한 소리가 도명의 고막에 스며들었다. 분명 날카로운 성인 남성의 비명 소리였다.
도명은 잠시 굳어져 있다가 이게 실제 사람의 비명 소리가 아니라 영화 속 소리임을 알았다. 비명 소리의 배경음으로 영화 특유의 BGM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도명은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웃었다.
‘아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거지.’
도명은 긴장된 표정으로 현관문 앞에 섰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현관문에 공포영화 DVD가 붙어 있었다. 도명은 투명 박스 테이프로 붙인 그 공포영화 DVD를 잡아 뜯었다.
“하하, 도화 씨, 어디 한번 해 봅시다. 열 받아서, 고백하고 말지.”
도명이 현관문을 쾅쾅 두들겼지만 안에서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너무 크게 틀어놓은 DVD 소리 때문에 정말 못 듣는 건지 반응이 없었다. 도명은 도화의 집 안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도화의 침실에는 높이 80센티 위치에 환기를 위한 창문이 나 있었다. 창문 앞에는 도화가 컴퓨터를 하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도화는 영화를 보면 언제나 그 책상에서 영화를 보았다.
도명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도화의 침실 쪽으로 돌아갔다. 도명의 유추대로 음산한 DVD 소리가 도화의 침실 쪽으로 갈수록 선명하게 들렸다.
도화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공포영화를 보고 있었다. 사운드가 자극적이고 뻔한 레퍼토리의 공포영화였다. 도화의 책상 위에는 공포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실연의 아픔에 눈물을 질질 짜내고 있었는지 눈물로 젖은 짠 내 나는 휴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영화 속 살인마가 주인공이 숨어 있는 곳을 간 보며 쇠파이프로 이런저런 물건들을 두들기고 있었다. 영화 속 살인마의 사늘한 휘파람 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퍼졌다.
도화는 그 장면에서 어느새 실연의 아픔을 잠시 잇고 귀를 토끼처럼 쫑긋거렸다.
어디서 주인공이 들키는지 알고는 있지만 도화는 숨어 있는 주인공의 심정을 담아 긴장했다.
살인마가 주인공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괜히 쇠파이프로 주인공이 숨어 있는 상자 더미들을 두들겼다. 주인공이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흔적이 남은 것이다.
주인공이 떨리는 입을 틀어막고 웅크리고 있었다. 주인공이 턱을 덜덜 떨며 상자들 사이를 기었다. 도화는 보고 또 본 DVD이기에 살인마가 쇠파이프로 상자를 두들기는 박자에 맞춰서 입을 맞추었다.
“탁, 탁. 탁탁.”
그때 도화의 귓등에서 그가 모르는 퉁퉁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도화가 다시 영화 속 장면에 집중했다. 살인범이 주인공의 머리 위로 희번덕거리는 눈을 하고 등장했다.
도화는 이미 알고 있는 장면이지만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때 도화의 귓등에 다시 퉁퉁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도화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의자 뒤를 돌아보았다. 도화는 노트북 속 소리가 아니라 등 뒤의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등 뒤에 소리에 집중하기를 약 20초가 지났다. 도화의 귀를 거슬리게 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도화는 너무 울어서 마카롱처럼 변한 눈을 천천히 끔뻑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간만에 튼 DVD라서 디테일 정도는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도화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아니었다.
도화가 좋아하는 DVD들은 지금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영화 속 주인공이 겨우 위기에서 벗어나 다른 폐가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하하, 여기도 안전하지는 않지. 안 돼. 안 돼. 아직 숨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도화가 숨을 고르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했다.
도명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을 땐 역시나 도화가 혼자 노트북이 올라간 책상 앞에 쭈그려 앉아서 공포영화를 보고 있었다.
도명이 창문 옆에 바짝 섰다.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면 희미하게 마카롱 눈을 한 도화의 얼굴이 보였다.
‘하하, 케빈 이 녀석. 안심하고 있는 꼴이 안일하기 짝이 없군.’
도명이 창문 하나를 두고 서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도화는 다시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살인범을 피해 폐가에 들어간 주인공 머리 위에는 거미줄이 쳐진 낡은 창문이 있었다.
주인공의 미래를 알고 있는 도화가 책상 모서리를 쥐며 주인공의 운명의 기록관처럼 속삭였다.
“여기서!”
주인공의 머리 위로 살인범 특유의 날카롭고 을씨년스러운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공의 턱이 벌벌 떨리고 눈동자를 위로 올렸을 땐 살인범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살인범이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손바닥으로 창문을 두들겼다.
그때 도화의 창문 역시 누군가 두들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손바닥이 튀어나와 그의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으악!!!”
‘아, 젠장, 공포영화를 너무 오래 봤나 봐. 현실과 환상이 섞인 거야 뭐야.’
도화는 이곳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누군가 이 창문을 두드린 적은 없었다. 이사 초기에는 좀 그랬지만 도화가 이웃들에게도 쌀쌀맞게 구니까 누구도 도화의 집 창문을 두드린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현관문도 있는데 굳이 그가 살고 있는 집을 빙 돌아 창문을 두드리는 건 부자연스러웠다.
도화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로 놀라 뒤로 쫙 미끄러졌다. 도화의 동공이 거세게 떨렸다.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이 창문에 달라붙었다. 도명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을 준비하는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비장했다. 지나치게 비장한 얼굴이 어둠이 묻히니 그 잘생긴 얼굴도 섬뜩해 보였다.
“도, 도명 씨?”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도화가 말을 더듬었다. 도명이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듯이 재차 창문을 두들겼다.
“으아! 그만 두들겨요! 그거, 그거 무섭다고요. 여기 오면서 뭐 못 봤어요?”
도화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도화의 말에 도명은 조금은 울분에 찬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도명은 도화에게 따지러 온 것이 아니라서 온화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도명은 자신이 다음에 취하는 행동을 도화가 봐 줘야 하는데 눈을 감고 보지 않자 더욱 거세게 창문을 두들겼다.
결국 도명의 재촉에 도화가 눈을 뜨고 손바닥으로 막고 있던 귀마저 열고 얼떨떨한 얼굴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도화가 조금 진정한 것 같아서 다시 비장한 표정으로 엄지와 검지 끝을 교차해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도명은 도화가 자신이 손가락으로 만든 표시를 도화가 본 건지, 궁금해서 어둠 속에서 눈을 치켜떴다.
“으아아아아아!”
도화가 창문에 달라붙은 손가락 하트를 응시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도명은 더 이상 손가락 하트를 내밀었다간 심장에 무리가 가서 신속하게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도명은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내 마지막 기력을 다한 사람처럼 침대에 털썩 누웠다.
‘봤나, 제대로 봤겠지?? 그게 내 최선이었다고. 입 밖으로 사랑한다는 말까진 무리였어. 어두워서 손가락 모양 잘 못 본 거 아냐? 아, 모양 안 나도 구식이지만 팔로 하트를 만들었어야 하나. 최대한 크게 해서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일 수 있게.’
도명은 그렇게 누워서 도화가 자신의 손가락 하트를 봤나 못 봤나를 재단했다. 도화의 시선이 분명 자신의 손가락 하트를 본 것은 같은데 도화가 내지른 비명 소리가 긴가민가하게 만들었다.
도명은 혼자 재단하는 것이 답답해서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아니, 고백을 했는데 이렇다저렇다 말이 없어?!’
***
도명이 가고 난 후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진 건 도명뿐이 아니었다.
‘아, 분명 봤어. 도명 씨가 나한테 하트를 날렸다고! 그거 분명 하트야. 도명 씨도. 설마 날……?’
도화는 방바닥을 구르면서 주먹으로 방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도명 씨가 날……! 으아아아아아!”
도화가 아까 내질렀던 이상한 비명을 내뱉었다. 월드컵에서 골 넣었을 때 내지르는 함성과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보고 놀라서 짓는 공포의 비명과도 같았다. 아니 두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이상한 소리였다.
도화의 얼굴이 꽃이 날릴 것처럼 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인생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 감히 꿈도 꾸기 조심스러웠던 일이 도화에게 일어난 것이다.
도화는 잠을 자기 위해 이빨을 닦는데 자꾸 거울에 도명이 손가락으로 만든 하트가 둥둥 떠다녔다.
도화는 잇몸에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거칠게 칫솔질을 하며 부끄러움이 주는 간지러움을 상쇄시키려고 했다. 도화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눈은 퉁퉁 부어서 마카롱 같았고 잇몸에선 피가 나고 있었다. 그래도 도화는 뭐가 좋은지 실실거렸다.
칫솔질을 끝내고 도화가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럼 지금부터 도명 씨랑 나랑 1일이야?!’
도화가 이불을 돌돌 말아 죽부인처럼 만든 다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발로 이불 뭉치 끝을 퉁퉁 찼다. 그러다가 이내 도명과 연인이 되면 지금까지와 뭐가 달라지는지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같이 밥 먹고, 영화 보고, 쇼핑하고, 섹스하고, 아침저녁으로 안부 인사를 했다. 연인이 됐다고 추가되는 이벤트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계산하고 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호칭이 달라지나?!’
그래, 이제 연인이 되었으니 같이 자면서 파트너니 뭐니 하면서 이해관계가 맞는 사업자 같은 딱딱한 호칭은 끝났다.
‘그러면 이제 도명 씨를 뭐라고 부르지? 보통, 연인끼리 애칭으로 부르던데. 아, 도명 씨는 그냥 도명 씨인데. 그나마 세퍼드? 아, 도명 씨가 무슨 개도 아니고. 이건 애칭이 아니라 상대방 화 돋우는 거라고.’
도화는 그것 외에는 도명을 특징짓는 걸로는 SM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애칭으로 SM 용어를 쓰긴 싫었다. 겨우 SM 파트너니 뭐니 해서 벗어났는데 고작 애칭이 SM 관련 용어라니.
‘보통 연인 이름을 귀엽게 줄여 부르던데. 도명을 한 글자로 줄이면 그럴듯한 게. 앞글자에 뒷글자 자음을 붙여서 지으면 되겠지. 그러면 도오… 돔…… 아 젠장!’
도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평범한 게 적절한 게 아닌가 싶었다. 가령 자기, 같은 것 말이다.
‘자기야.’
도화는 도명에게 자기, 라고 부른다는 생각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건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화는 계속 다른 걸 생각했다.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건 역시 평범한 애칭, 이라는 구호 아래 자기였다. 도화는 결국 도명을 연인답게 부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근데 호칭 빼면 우리가 연인이 돼서 달라진 게 뭐지?’
도화는 다시 아까 처음 생각 그대로 돌아와서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결국 자기, 밖에 없잖아. 근데 그건 절대 못 하겠다.’
다음 날 아침, 도화는 도명의 얼굴을 볼 생각만 해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새삼 온갖 변태 짓을 하고 전에는 뜨거운 밤을 보냈으면서 얼굴 하나도 못 봐서 이 모양이니. 출근을 하기 위해 정장을 입고, 거울을 보니 눈은 여전히 덜 가라앉아서 작은 마카롱이 되었다.
도화는 익숙한 현관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열었다. 도화의 머리 위로 아침 햇살이 퍼졌다. 도화가 게걸음을 하고 도명의 가게 앞 상황을 봤다. 도명이 아침부터 환기를 하기 위해 가게 현관문을 열어 놓은 것이 보였다.
‘아 일어났네. 도명 씨.’
도화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 이게 뭐라고 그 익숙한 얼굴 보는 게 떨리는 건데.’
도화가 조심스럽게 도명의 가게 안을 훔쳐보았다. 가게 안에서는 분명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가게의 주인은 안 보였다. 도화가 의아해하며 뒤를 돌자 도명이 로즈메리 화분을 든 채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도명의 얼굴을 본 도화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씨발 깜짝이야! 자기야!”
도화가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도 호칭 문제로 고민해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놀란 상태로 도명을 보자 자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도화는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도화의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도화는 지금 이 순간 또 도망가고 싶었다. 세상에 아침에 도명을 보자마자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아침 식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자기야, 라는 말에는 어떠한 반응도 안 하고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도명의 반응에 도화는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도명이 듣고도 모른 척해 주는 건지, 아니면 도화가 워낙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말해서 못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천만다행이었다. 이왕이면 후자면 더 완벽하겠지만.
“아, 네. 맛있는 소리하고 냄새가 나네요.”
“어제 워낙 늦게 자서, 식사 메뉴가 단출합니다. 따뜻한 감자 스프와 구운 베이컨, 그리고 바게트입니다. 도화 씨가 한식을 더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한식은 손이 많이 가서요.”
“아니요. 저 뭐든 잘 먹습니다. 요즘 아침은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거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아침부터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안 되죠.”
“영광이네요. 순순히 식사를 해 주고.”
도명의 말에 뼈가 있었다. 도화가 눈치를 보며 도명의 얼굴을 보니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는 게 기분 나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도명이 하얀색 식기에 준비한 아침 식사 메뉴를 담았다. 도화는 도명의 얼굴 끝자락만 쳐다봐도 어젯밤의 폭풍 같은 일들이 생각나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릎만 쳐다보았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도명을 도와주고는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눈이 마주칠 게 분명했다.
도명이 도화의 앞에 음식들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말했다.
“퇴근하고 나면 계단실에 어질러 놓은 거 치웁시다. 겨울 이불이니 이상한 스펀지니. 제가 치우려다가 어제의 후폭풍은 그것뿐만이 아니라 좀 버겁네요.”
“아, 네. 아 그래야죠. 죄송합니다.”
도화가 어수선한 손길로 수저를 잡고 도명이 앉기도 전에 목마른 사람이 냉수 마시듯 감자 스프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입맛에는 맞나요?”
“아네, 도명 씨가 해 주는 음식은 언제나 완벽하죠.”
“그런데, 식사 초대는 왜 매번 그렇게 튕기고, 파토 내고 그러는 겁니까?”
“아, 네? 아, 그 이유는 제가 어젯밤……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앞으로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합의를 봤잖아요?”
언제나 직설적인 도명답지 않게 돌려 말했다.
“합의 아, 네. 어제 제가 도명 씨가 보낸 그, 통상적인 표시를 제대로 해석했다면 말이죠.”
도화의 대답에 도명은 답답한지 감자 스프 안에 담근 숟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제대로 본 거죠?”
도명이 이번에는 초조한 듯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도화 역시 차마 말로는 못하겠는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고 다시 스프 그릇만 쳐다보았다.
“어두웠고 또 손가락 두 개는 작으니까 제대로 봤는지 걱정했습니다. 사람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답도 없고요.”
“아, 네? 제가 굳이 답을 할 필요가 있나요? 그러니까, 도명 씨에 대한 제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했고 또, 도명 씨가 그 마음에 대해서 답을 준 것 같아서. 그러니까. 결론은.”
도화가 눈을 끔뻑이며 도명의 목 아래를 응시했다.
아직 도명의 얼굴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원래 뭐든 결론 내리고 깔끔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기를 좋아하는 도명이 이런 일을 매듭짓는 법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도명이 그런 일을 해 주지 않아서 도화는 별안간 불안해졌다.
“결론은, 우리에게 이제 새로운 규칙이 필요해진 거죠. 또 많은 대화도 필요한 것 같고요.”
도화는 도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답답했다. 뭔가 빙빙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 새로운 규칙이요?”
“가령, 저를 오래전부터 괴롭히는 식사문제부터 매듭지읍시다. 계속 식사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문제의 본질은 좀 더 많은 것들에 영향을 끼치잖아요.”
‘아, 뭐가 이렇게 말이 어려워. 뭔가 학술 세미나 온 것 같다.’
도화는 답답한 마음에 숟가락 끝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일단 도명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 역시, 바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떨리니까.
“이제 제가 도화 씨에게 식사는 어떻게 할 건지, 집에는 언제 들어올 건지 물어봐도 되는 사람이 되는 거죠?”
“아, 네 물론이죠.”
“식사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도화 씨 일상에 대해서 제가 알고,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쳐도 되냐고 묻는 겁니다.”
“아, 네 뭐든 보고하겠습니다.”
도명이 자신의 하루 일과에 대해서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릴 것 같은 도화의 반응에 입꼬리를 살포시 올렸다. 자신도 말을 참 딱딱하게 하지만 도화의 반응 역시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어서 묘하게 웃긴 상황이었다.
“뭘 보고할 건데요?”
“네?”
“아니, 마치 제 부하 직원처럼 각 잡아서 말하니까, 뭘 어디까지 보고할 건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아, 음. 그러니까 어디까지 보고해야 하는데요?”
“글쎄요. 그나저나 도화 씨 서류 작성 잘합니까?”
“네. 그런 편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좋게 평가하긴 좀 그렇지만 회사 사장님이, 잘 쓰는 편이라고 하니까 자기평가를 후하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도화 씨.”
“아. 네.”
도명이 턱짐을 지며 지나치게 얼어붙은 도화를 감상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나쁜 성미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상대방이 얼어붙으면 긴장을 풀어 줘야 인지상정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일반적인 사람의 태도인데 도명은 그런 도화를 더욱 놀려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 잘난 보고서 좀 어디 한번 받아 봅시다.”
“네.”
“그나저나 저도 회사 사장인 건 알죠? 보고서 많이 받아 봤어요. 만족시킬 수 있어요?”
도명이 눈꼬리를 요사스럽게 휘며 말했다.
“아, 저 그런데요. 도명 씨.”
도화가 오븐에 데워서 겉이 바삭한 바게트를 감자 스프에 찍어 먹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그러니까, 사귀는 거죠? 그러니까, 섹스 파트너하고는 다른 거죠? 이상하게 도명 씨하고 대화할수록 점점 헷갈려서요. 오히려 어젯밤이 더 강한 확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네. 그런 겁니다.”
도명이 떨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전 도명 씨가 절대로 제 고백을 안 받아 줄 것 같아서. 그러니까 갑자기 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알고 싶어요. 오랫동안 지켜온 신념 같은데.”
“저처럼 아는 척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한테 저도 모르는 걸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네? 어떻게 자기 마음도 몰라요?”
“다그치지 말아요. 저도 여러모로 속상하니까.”
“저, 주말에 도명 씨랑 식사했을 때 제가 고백했어도 받아 주셨을까요?”
“도화 씨가 억울해할 만한 이야기 하나 할까요? 저도 도화 씨한테 고백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화 씨가 자꾸 여기저기로 튕겨 나가는데 환장하겠더군요.”
“네?”
도화는 도명의 말에 놀랐다. 아무래도 자신이 길가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아 뇌진탕에 걸리고 코마 상태에서 아주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화 씨가 고백을 가로챈 겁니다.”
“아. 그렇구나. 아 저 언제부터?”
“제 입에서 낯간지러운 말이 나오길 바라는 것 같군요.”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사람 유혹하고, 그러는 거.”
“그런 거 잘해서 저한테, 그런 마음이 들은 겁니까? 달콤한 말을 잘해서?”
도명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달콤한 말은커녕 일반 연인들끼리 하는 말도 잘 못 하겠는데, 도화가 그렇게 말하니 목 언저리 뜨끈해졌다.
처음 이곳에서 도화를 섹스 파트너로 유혹할 때의 유려함과 여유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를 보면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말로만 치면 사실, 도명 씨가 말을 예쁘게 하는 편은 아니라서.”
“아, 그렇습니까?”
도명이 한쪽 눈썹을 움찔거리며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도화를 쳐다보는 눈빛은 다정했다.
“도명 씨도 보고서…… 써 줘요.”
“무슨 보고서요?”
“그러니까, 제가 언제부터 좋았는지, 그러니까 마음의 경위서 같은 거요.”
“하?”
도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도명의 반응에 도화가 움찔거렸지만 자꾸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사실, 그다지 믿음이 안 가서요.”
“무슨 믿음이요?”
“그러니까, 절대로 사랑은 하지 않는다는 도명 씨의 오랜 신념이 깨진 것도 이해 안 가는데, 상대는 또, 저같이 음 그러니까.”
“도화 씨가 뭘요?”
“저같이 뭉툭한……?”
“도화 씨 길잖아요.”
“아, 뭉툭한, 아니, 그러니까 이건 신장을 표현한 게 아니라, 이미지랄까. 흐릿한? 어쨌든 저같이 화려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도명 씨가 신념을 바꾼 게 이해도 안 가는데, 도명 씨 같이 뭐든 분명한 사람이 자기 마음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고 그래서, 음 한마디로 얼떨떨하고 또, 불안해요.”
“왜요? 제가 도화 씨한테 사기라도 치는 것 같습니까? 도화 씨한테 사기 쳐서 제가 얻는 게 뭔데요?”
“모르죠.”
“대답 한번 간편하네요. 도화 씨한테 보고서 받으려다가 더 어려운 서류 작업 하게 생겼네요. 서로 보고서 없던 걸로, 칠까요? 도화 씨한테 보고서 쓰라는 건 정말 장난이었는데요. 도화 씨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 놀리고 싶었습니다. 그냥 오늘 저녁은 같은 먹을 수 있는지 문자나 주고받자는 거였습니다.”
“저는 보고서 잘 쓴다니까요.”
도화가 고집을 부렸다. 도명은 아주 곤란해졌다. 그래도 완벽주의자답지 않은 어설픈 고백이었지만 어쨌든 고백을 하고 난 후 그의 마음에 걸린 저주가 약해진 것 같았다.
직접적인 표현은 못 하지만 어쨌든 같이 아침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마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연애를 하는 남들과는 역시 달랐다.
연애를 방금 시작했는데 도화를 향한 떨림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손에 쥔 것이 너무 욕심이 나 그것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금방이라도 떨어뜨릴까 봐 불안했다.
또 도명에게 있어서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첫 연애였다. 도화가 처음인 것처럼 도명 역시 처음이었다. 겪어 보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 예상할 수 없었다.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불안했다. 또, 도화 앞에서 도명은 언제나 완벽하고 유능했었다. 그런데 별안간 헤매는 도명을 도화가 어떻게 볼까, 두려웠다.
도명도 앞으로 도화와 하는 것이 뭐든 처음인데, 말이 보고서지 도화에게 정식으로 러브레터를 써야 하는 미션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다. 도명의 첫 러브레터다.
도명은 잡지사를 운영하면서 본인도 글을 쓰고 많은 글들을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이번 미션은 정말 만만치 않다는 것을 그의 몸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 도명의 목 뒤가 서늘했다.
“저는 도명 씨가 말한 보고서 매일, 매일 쓸 수 있어요. 진짜입니다.”
말이 없는 도명을 향해 도화가 힘주어 말했다. 도명의 표정이 더욱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진짜인 건 알아요. 도화 씨, 저도 도화 씨가 처음이에요. 그건 알고 있어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심장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저도 도명 씨가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쪽으로도. 전 거의 모든 면에서 도명 씨가 처음이라고요.”
도화가 조금은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요. 그건 진작 알고 있다고요. 꼭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야 속이 시원합니까? 나도 서툴다고요. 진짜 수치스러워 죽겠네.”
도명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도화는 지금까지 도명이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귀여워 보였다.
세상에, 오만한 그가 귀여워 보이다니. 도화는 충동적으로 도명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입맞춤에서 고소한 감자 스프 맛이 났다. 도화에게 뽀뽀를 받은 도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앗 미안해요. 그냥 순간 너무 귀여워서.”
“하? 귀여워요? 난 당신 돔입니다.”
“저기 그런데, 우리 섹스 파트너 끝인 거 아니에요? 아 둘 다인 거예요?”
“섹스 파트너는 아니죠. 그런데 전 아직도 도화 씨를 괴롭히는 게 좋습니다. 지금도 이 버릇없는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다고요. 알아요?”
“아 정말요……?”
이번에는 도화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도명이 도화를 향해 손목시계를 보여 줬다. 도화가 평소에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여유 잡아서 나온 건데 도명과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도화는 마지막 남은 바게트 한 조각까지 입안에 넣으며 일어섰다.
“아침 고마워요. 저 갈게요. 아, 음 저녁에 봐요.”
도화가 가게 문을 열려는 찰나 도명이 도화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네, 저녁에 봅시다. 그때 지금 못한 이야기들 정리하고요. 정확히 저녁 몇 시에 볼지 보고 합시다. 검토하고 답 줄게요.”
“아, 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진짜 보고서 올리지 말고 문자나 보내요.”
“아.”
도화는 정말 정식으로 도명에게 서류 작업을 할 생각이었는지 얼빠진 표정으로 멈칫했다.
“어쨌든, 저녁에 봅시다. 자, 기, 야.”
도명이 도화를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아아아. 역시 들었어요?! 사람 진짜 못됐네요. 못 들은 척해 줄 거면 끝까지 해 주지.”
“차 조심하고, 자기야.”
“그만, 그만요!”
“아. 저기 근데, 도화 씨.”
도명이 가게 밖을 나서는 도화의 목을 응시하며 말했다. 사실 아까 자신의 가게를 기웃거리는 도화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하려던 이야기였는데, 그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자기라고 하는 바람에 머릿속에 쏙 들어갔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색하고 달짝지근하다 못해 끈적이는 분위기 때문에 말을 못 했다. 그 순간에 도화의 목 뒤에 남은 진한 키스 마크와 도명이 박아 넣은 잇자국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아침부터 테이블 위에 도화를 눕히고 한바탕할 것 같았다.
또, 그 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뒷전으로 밀려난 이야기였다.
“저, 가야 해요. 도명 씨, 또 자기니 뭐니 하며 놀릴 거면 그만두고요. 그건 실수였어요.”
도화가 금방이라도 부끄러움에 팡 하고 터질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도화 씨 목 뒤 말입니다.”
“네.”
“아침에 거울 안 봤습니까?”
“거울은 왜요?”
“제가 해 놓은 거라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목 뒤가 아주 야하네요.”
“네? 그러니까, 칭찬이죠? 아, 음 고마워요. 도명 씨도 음, 야하네요.”
“아니요, 칭찬이라면 칭찬 맞긴 한데, 그대로 출근하면 저야 상관없지만 도화 씨 성격에 사회생활은 다 망했다고 할 것 같은데요?”
“네?”
그제야 도화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목 뒤를 보았다. 목 뒤가 옅은 파란색으로 얼룩덜룩했다. 도화는 자신의 목 뒤를 보자 도명이 자신의 목덜미를 물면서 페니스를 밀어붙였던 그 감각이 생각나 몸이 달아오르고 척추가 오싹해졌다.
“집에 스카프 없습니까?”
“아, 없는데요.”
“따라와요. 지각 안 하게 최대한 빨리 골라 줄 테니까요.”
도화가 우물쭈물하다가 도명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요즘같이 더운 날에 목에 뭔가를 두른다는 것 자체가 거추장스러웠지만 달리 선택은 없을 것 같았다. 두 남자가 도명의 드레스 룸 안에 들어섰다. 언제 봐도 잘 관리된 남성복 매장 같았다.
“도화 씨 여유시간 두고 출근하는 편이죠? 정확히 얼마 정도 여유시간을 주죠?”
“15분에서 20분 정도요. 그러니까 매일 같은 출근길이긴 한데 변수가 조금씩은 있으니까요.”
“지금 약 5분 지났네요.”
도명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 네.”
도화의 얼굴에 초조함이 조금 묻어나왔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초조한 얼굴을 보고 피식 웃더니 자신의 스카프 하나를 도화의 목에 매 주었다. 도화가 입고 있는 하얀 셔츠와 회색 바지에 적당히 포인트를 주는 스카프였다.
“이제 올라가요.”
“아. 네.”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늦게 출발하는 거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평소와는 다르게 서두르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그래 봤자 정각에 도착하거나. 음, 5분 정도 늦겠죠.”
도화가 도명의 늦는다는 말에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5분 늦으면 뭐 큰일 나요?”
“큰일이죠! 도명 씨가 우리 회사 사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도명 씨도 직원들이 늦으면 싫잖아요.”
두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면서 옥신각신했다.
“우리 회사는 출근 시간 정확히 없어요.”
“네? 도명 씨 성격에요?”
“왜요? 도화 씨가 말하는 제 성격이라는 건 1분이라도 늦으면 제가 직원들 엉덩이에 매질할 성격이라는 겁니까?”
“아, 부정할 수 없네요.”
‘그리고, 세상에 너무 야한 회사잖아. 잠깐만 나 지금 무슨 상상하는 거야. 뭐가 야해?! 뭐가 야하냐고.’
“중간 미팅시간하고 마감 시간만 지키면 몇 시에 와서 몇 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그래서 다들 마감 시간은 잘 지킵니까?”
“네, 몇몇 변수가 아주 가끔 일어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정말로요?”
“왜냐하면 못 지키는 사람은 우리 회사에서 지금 안 남아 있으니까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도명이 굳은 도화의 표정에 입꼬리를 씩 올렸다.
“만약에 도화 씨가 제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와서 마감 시간을 상습적으로 못 지키면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렇게 귀여운 신입을 어떻게 자릅니까?”
“와,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마워요.”
“그래도 회사는 돌아가야 하니까, 우리 자기는 제 무릎 위에서 따로 교육해 줘야죠.”
“무릎 위, 자기, 아, 가, 갈게요. 너무 늦었네요.”
도화가 도명이 매 준 스카프를 하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도화의 등 뒤에서 차 조심하라는 도명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동네 어귀를 전속력으로 뛰었다. 평소보다 10분 늦게 출발했지만, 그 이유로 뛰는 건 아니었다.
도명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페니스 때문이었다.
도화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숨을 헐떡였다. 아침부터 발기한 페니스는 열정적인 달리기 때문인지 다행히 평소처럼 다소곳해 있었다. 도화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다행히 버스 안 공기는 차가웠다. 승객들이 불만을 터뜨릴까 봐 에어컨을 최대한 빵빵하게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음담패설하고 난리야! 무릎 위에서 뭘 어떤 걸 교육할 건데! 응? 막 무릎 위에서, 뭐, 뭘.’
도화는 버스 안에서 도명의 회사에 신입으로 출근하는 상상을 했다. 끝내주게 잘생긴 회사 대표님이 심지어 같은 동성애자라니!
도화는 서윤에게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저기 있잖아요. 서윤 씨, 집에 이런 만화책도 있어요? 그러니까 회사 안에서 대표하고 신입이, 서로 좋아하는 그런 만화책이요.]
서윤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답장이 바로 없었다.
***
도명의 화원에 서윤이 와 있었다. 서윤이 도명을 뱁새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형, 요즘 미팅 시각이 참 공교롭다. 갑자기 미팅 시각이 도화 씨가 회사에 있을 때네. 우연일까?”
“우연은 무슨. 고의지.”
도명이 서윤을 향해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서윤이 상자를 열어 보니, 로즈골드 색의 낡은 클립이 하나 들어가 있었다.
“이게 뭐야?”
“가져.”
“클립을?”
서윤이 도명을 향해 클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거 나한테는 매우 특별한 클립이야.”
“아, 클립이?”
서윤은 도명의 진지한 표정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낡은 클립이란 말이다.
“내가 BISCUIT FOREST를 만들기로 했을 때 처음 작성한 기획안을 묶어 두었던 그 클립이거든. 지금도 중요한 미팅 있을 때, 쓰는 일종의 행운의 클립이야. 가지기 싫으면 말고.”
도명이 이 클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서윤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음, 이 작은 게 형한테는 엄청, 의미 있다는 뜻이네.”
“그래. 나한테는.”
도명이 자신이 준 물건의 가치를 공감하지 못하는 서윤에게서 다시 클립을 뺏어 들려고 했다. 서윤이 잽싸게 클립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근데 이거 나한테 준다고 한 거지? 왜? 형한테는 엄청 특별한 건데.”
생각을 해 보니, 저번에 도명이 서윤의 집에서 도화를 찾으러 왔을 때 한 대화가 생각났다.
‘왜 아끼는데?’
‘뭐?’
‘왜 아끼는 거냐고. 형은 형이 가진 클립 하나도 다 아끼잖아. 거기에 이유도 정확히 있고.’
‘그냥. 도화 씨는 내 취향이야.’
‘겨우 그 정도야?’
‘그냥 취향인 것 이상이긴 하지.’
‘취향 이상인 것이 뭔데?’
‘도화 씨는 언제나 가지고 싶었던 유형의 사람인데 두려워서 못 가지던 유형의 사람이었어. 그런데 이번에 용기 내서 가진 거지.’
‘도화 씨는 어떤 유형인데?’
‘그냥 나와 정반대의 사람. 사람들은 다 똑같아. 다 나와 비슷한 욕망을 가졌어. 물론 성분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 어쨌든 사람들은 다 나와 완전히 다른 척을 하지. 그들은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해서 타협했을 뿐이야. 난 수단이 많아서 가지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그런데 다들 날 비난하는데 열들을 올리지. 하지만 도화 씨는 정말 나와 달라. 정말 희귀한 걸 내 집 앞에서 만났어. 그런 행운이 내게 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내가 아끼는 것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많지만, 이번엔 정말 아끼는 거야. 그런데 네가 그것만 콕 집어서 가져가려 하고. 내가 어떻게 널 안 얄미워해. 진짜 개인적인 감정으로 갑 노릇 하고 싶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거든. 겨우 참고 있으니까 정도껏 해라. 진짜. 나 진짜 아끼는 행운의 클립 있으니까 차라리 그걸 가져가.’
“진짜 행운의 클립이 있었단 말이야?! 이게 그 클립이고?”
서윤은 자신이 비유적으로 ‘클립 하나도 아끼잖아.’라고 했는데 정말 클립 하나도 아끼는구나, 싶었다.
“그래, 그 클립이야.”
“그러니까, 이걸 왜 나 주느냐고.”
“도화 씨하고 나 사귀어. 그러니까 그거 받고, 도화 씨는 평생 그냥 아는 지인 정도, 아니 그냥 알았던 사람 해라.”
서윤은 도명과 도화의 마음을 알았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위자료가 고작 클립이라니. 솔직히 딱히 탐나지는 않았다. 행운의 클립이라고는 하나, 그건 도명의 인생 스토리에서나 의미 있는 행운이었다.
물론 이 클립이 물고 있던 기획서로 만들어진 회사와 주기적으로 계약함으로써 안정적인 프리랜서의 삶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어쨌든 서윤의 이야기를 담은 클립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윤은 가방 속에 클립을 왕관 보관하듯 담고 있는 작은 상자와 함께 집어넣었다. 도명의 인생 클립이라도 가져가야 억울함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서윤이 레모네이드 안의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순간 도명의 얼굴이 보기 싫었다. 분명히 의기양양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친한 형이라고는 하지만 의기양양한 얼굴을 본 순간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서윤이 시선을 돌렸을 때 도화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저기 있잖아요. 서윤 씨, 집에 이런 만화책도 있어요? 그러니까 회사 안에서 대표하고 신입이, 서로 좋아하는 그런 만화책이요.]
서윤이 그런 만화책 있다고 답장을 하려는데 그의 머리 위로 도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 소중한 클립까지 줬는데 내 백구하고 문자를 하고 있네.”
도명이 서윤의 머리를 꽉 쥐었다.
“아니, 내가 먼저 한 거 아냐.”
“그 말이 다른 의미로 나를 더 화나게 할 거라고는 생각이 안 드나 봐?”
“아니, 그럼 문자가 오는데 씹어?”
도명이 서윤의 손에서 그의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도화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이런 게 있어?”
“있지. 방금 있다고 대답하려던 찰나였어.”
“별것이 다 있다. 제발 좀 도화 씨한테 이상한 물 좀 그만 들일래? 이미 공포영화 DVD만으로도 나는 매우 괴롭거든.”
“왜 남의 취미 생활 가지고 비난이야? 취향으로 따지면 형이 남들한테 뭐라 할 처지는 아니거든.”
“와, 도화 씨하고 똑같은 소리 하니까, 그것도 열 받네.”
서윤이 도명에게 납치당한 핸드폰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도화에게 그런 거 있다고 말했다. 서윤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던 도화가 바로 답장했다.
[앗, 정말요? 저, 혹시 음, 공 쪽이 좀 오만하고 완강하면서 하하, 좀, 변태적인가요?]
서윤이 도화에게 온 문자를 읽고 자신도 모르게 도명을 쳐다보았다.
[가령 도명 형 같은 공 말이에요?]
빠르게 오던 답장이 더 오지 않았다. 도명과 서윤은 도화가 이미 대답을 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서윤이 도명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화 씨한테 이상한 물 들인 건 형인 것 같은데? 오피스 뭐? 그런 플레이도 해?”
“안 해.”
“도화 씨처럼 순진한 사람이 이런 건 어디서 주워들었대? 출처는 실컷 놀고 다닌 형 아니면 어디 있어? 이런 거로 딴 사람하고 이야기도 못 할 텐데.”
“아니야. 진짜 안 해. 그냥 말장난한 거야.”
“무슨 말장난이길래. 이쪽 환상이 이렇게 구체적인 건데?”
“아, 진짜, 도화 씨 뭔 말을 못 하겠네. 머릿속이 어떻게 굴러갈지 갈피를 못 잡겠어.”
도명은 이 야한 백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
도화는 평소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집 앞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간 덕분에 지각할 걱정은 없었다. 도화는 회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15층에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가 도화가 서 있는 1층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옆 상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요즘 부쩍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일이 자주 있는 도화였다. 도화는 이게 다 거울 왕자한테 옮겨간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도화는 자신의 얼굴을 살피다가 자신의 눈이 아직도 부어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많은 회사 사람들이 자신의 눈을 가지고 이런저런 말을 할 게 분명했다.
도화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10분 여유가 있었다. 도화는 고민하다가 회사 건물이 있는 1층에 있는 액세서리 매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하나 구매했다.
“아이고, 이게 웬 멋쟁이야.”
도화가 딱 정각에 맞춰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부장이 도화를 향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제야 도화는 실내에서 부은 눈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선글라스임을 깨달았다.
도화의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오늘 도화는 한껏 멋을 부린 것처럼 보였다. 평소 안 하던 멋스러운 스카프에 선글라스까지. 도화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딱 한 시간만 쓰고 있겠습니다.”
“그거 쓰고 어두워서 컴퓨터 화면이 제대로 보이시겠어요?”
도화의 등 뒤로 엄청난 압박이 느껴졌다. 도화는 한숨을 쉬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퉁퉁 부은 도화의 눈이 보였다.
“이 대리님 무슨 일이에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막는데 이만큼 좋은 건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 봤자 질문만 꼬리표처럼 달라붙을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적당히 쌀쌀맞은 목소리로 개인적인 일이라고 관계에 선을 긋는 것만큼 효과적인 건 없었다.
“울었어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이 대리 진짜 무슨 일 있었어? 5년 동안 이런 적은 처음이네.”
도화는 컴퓨터를 부팅하자마자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징글맞은 회사 사람들은 끈질기게 눌어붙었다.
“누가 보면 애인한테 차인 줄 알겠어.”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을 안 보여야 하는데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애인이 생긴 사람한테, 그것도 애인이 생긴 지 반나절도 안 지난 사람한테 차였다니.
악담도 그런 악담이 없었다. 도화는 결국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차이긴요.”
“아, 이 대리 철벽 무너진 것 보니까, 차였나 보네.”
사무실 안에는 어느새 도화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찼다. 도화는 참으려고 애썼다. 더 끔찍한 건 이들의 동정으로 가득한 관심이 지금, 이 순간을 넘긴다고 끝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인 게 아니라 애인이 생긴 겁니다. 누가 차여요.”
“이 대리 애인 생겼어?! 아니, 근데 왜 울었어?”
“세상에, 감동해서 울었나 봐요. 이 대리님.”
“아니에요.”
“아니긴요.”
회사 사람들이 웃음을 참으려고 볼이 봉긋해졌다.
“진짜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차였어요? 아 차였구나…….”
‘왜 다시 이런 전개야.’
“그게 아니라, 고백했는데 차인 줄 알고 운 겁니다. 하지만, 상대방도 좋다고 했으니 결국 차인 건 아니죠.”
지금 이 순간 눈치 없이 비적비적 새어 나오는 웃음이 잔망스러웠다. 자꾸 봉긋 솟아오르는 볼을 어쩌질 못하겠다.
“아니, 근데 왜 차인 줄 안 거야? 상대방이 대답을 번복했어?”
‘이 인간들아,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해 봐라.’
도화는 사장님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문 아닌 고문을 당했다.
***
도명은 서윤이 가고 난 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휘파람을 불며 지하실 계단을 내려왔다. 도명은 캐비닛에서 어떤 작은 상자 하나를 열고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 도명이 서윤에게 줬던 상자와 비슷하게 생긴 상자였다. 도명이 상자를 열자 작은 상자 안에서는 낡은 로즈 골드 색 클립이 나왔다. 도명은 그것을 소중한 듯 손끝으로 훑었다.
“한서윤, 내가 너한테는 단 하나도 안 뺏기지.”
도명은 새 클립을 일부러 묘한 뒤틀림을 만들고 예리한 끝을 뭉뚝하게 가는 등, 일부러 낡은 물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그 가짜 행운의 클립을 서윤에게 넘긴 것이다.
도명은 자신의 소중한 행운의 클립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하다가 도화에게 문자를 보냈다.
[도화 씨, 보고서 쓸 일이 생겼어요.
1. 한서윤에게 얼마나 자주 어떤 일로 연락하는지, 정리해서 보고해요.
2. 오늘 아침, 저를 상대로 한 야한 생각, 있는 그대로 정리하세요.]
***
도화의 앞에 잘 구워진 소고기 등심과 채소가 담긴 접시가 놓였다. 군침이 돌게 하는 맛있는 냄새에 도화가 벌써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도명이 와인 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아 도명 씨, 그만 일하고 앉아요.”
“먹고 싶으면 먼저 먹고 있어요.”
도명이 도화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같이 먹는 게 의미가 있죠.”
도화가 군침을 삼키며 무릎 위에 주먹 쥔 손을 가지런히 얹으며 말했다.
너무나도 행복한 인생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집 앞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나고 레몬 빛 실내 안에서는 끝내주는 뒤태의 남자가 주방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자신의 애인이었다.
도화의 주머니 안 핸드폰에는 두 사람의 저녁 식사 약속이 적힌 문자가 있었다.
도화는 아직도 지금, 이 순간이 얼떨떨했다.
도명이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앉았으니 어서 스테이크를 맛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도화가 도명이 건네는 달콤하고 다정한 시선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억누르며 고기를 썰었다. 그리고는 잘 익은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가 해 주는 건데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이중적인 의미로. 도명이 맛없는 음식을 만들 리가 없었고 또, 그가 좋아하는 도명이 만들어 주는 건데 맛이 없을 리가.
도명은 도화에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과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보면 누가 봐도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은 음식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도 맛있다는 표현은 직접 말로 들어야 맛이었다.
“어때? 자기야.”
“맛있…… 아, 그만 놀리라니까요.”
정말 저 얼굴로 턱짐을 진 채 저런 달콤한 말을 하는 건 여러모로 반칙이었다. 도화의 모든 땀구멍이 순식간에 열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확실히 놀리려던 거였는데 이미 입에 붙어 버렸다고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도명 씨는 진짜 대단해요. 어떻게,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말할 수 있어요?”
“오히려 도화 씨가 너무한 거 아닌가?”
“네?”
“이쯤 되니 섭섭한 건 제 쪽인데요. 도화 씨는 자기라는 말을 욕설과 함께 쓰지 않으면 못 쓰는 모양이죠?”
“아, 그건.”
“이쪽이야말로 섭섭하군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쐐기를 박았다. 도화는 갑자기 머릿속에 팽팽 도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밤에 너무 도명 씨와 저의 바뀐 관계에 대해서 고찰하다가.”
“고찰하다가?”
“우리는 이미 할 거를 다 했잖아요.”
“물론 그 할 거는, 야한 부분에서겠죠? 저는 아직 다 보여 주지 않았긴 한데 뭐, 평균의 기준에서 그렇다면 그렇다고 칩시다.”
“아, 네.”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도화 씨말대로 우리는 온갖 변태 짓을 했어요. 근데 손잡는 건 안 했어요.”
“진짜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우리.”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 바람 빠진 웃음이 이상하게도 달콤했다.
“우리가 이상한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아. 맞다. 잡긴 잡았는데.”
“언제요?”
“그걸 손잡은 걸로 칠 수 있나……?”
“그, 그거 하러 가기 전에, 집 앞 골목에서 괜히 마음 급해져서 손잡고 뛰었잖아요.”
“아.”
“네.”
“근데, 애매하긴 하네요.”
“어쨌든 그렇고 그런 사이끼리 할 건 다 했다고요. 음, 야한 것뿐 아니라 영화 보고, 쇼핑하고, 밥 먹고, 그런 거요.”
“그래서요?”
도화는 도명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고 느꼈다. 오만해서 뭐든 시시하고 빤하다고 이야기하는 그가 자신의 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도화는 그의 집중,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음. 바뀐 게 있다면 호칭 정도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정 내린 호칭이 제멋대로 자기야, 입니까?”
“네? 아니요.”
도화가 정색했다.
“네, 아니죠. 씨발, 자기야, 아닙니까?”
“아, 도명 씨!”
“네네, 알았어요. 그만 놀릴게요. 아니 솔직히 도화 씨는 놀리는 보람이 있다니까요. 계속 말해 봐요. 온순하게 들어 줄 테니까요.”
‘당신이 잘도 온순하게 있겠어요. 지금도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데. 그런데 왜 날 놀리는 얼굴에서도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거야. 내 눈이 잘못된 걸까? 도명 씨 얼굴이 잘못된 걸까?’
“도화 씨 또 혼자 무슨 생각 해요? 말해 보라니까요.”
“아 네. 그러니까 호칭이라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건 맞는데, 결국은 적당한 걸 못 찾겠더라고요. 결국 평범하게, 그, 자기, 밖에 안 남는데, 음 그건 오글거려서 못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갑자기 입 밖으로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지만, 도화 씨, 전 이미 입에 붙어 버렸는데요?”
“절 놀리다가 말이죠.”
도화가 도명을 얄미워 죽겠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과정이 중요합니까? 결과가 중요하지.”
“아, 그러니까 계속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도화 씨도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호칭 문제 말이에요.”
“아…….”
도명의 요구에 도화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누군 처음부터 잘하나.”
“도명 씨는 처음부터 잘하던데요.”
“점점 제가 도화 씨한테 그 호칭을 구걸하는 모양새네요. 꼭 사람을 이렇게 구차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합니까?”
도명이 언짢은 표정으로 지었다. 그러자 도화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마치 면접시험장에서 부적절한 대답을 내놓은 사람 같았다.
“네? 아, 그.”
“제가 원하는 답을 알잖아요.”
“연습해 볼게요.”
“네. 지금 당장 연습시키고 싶지만 도화 씨가 체할 것 같으니까, 내일부터 연습해 보도록 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뭘요.”
“아 저, 그나저나 보고서는 회사에서 쓰기는 좀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쓰려고 했는데 도명 씨가 밥 먹으라고 하고. 도명 씨는 제가 저녁 식사 거절하는 걸 싫어해서. 이래저래 애매했어요.”
“설마, 제가 도화 씨가 회사에서 그런 보고서를 작성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저녁 식사가 물론 우선하죠. 보고서 때문에 지금 이 테이블에 저 혼자 앉아 있다면 저 정말 짜증 났을 겁니다.”
“아, 그리고 갑자기 보고서가 추가돼서요. 2개나.”
“지금, 저한테 불평하는 겁니까?”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이 와인 잔에 레드와인을 따라 주고 건배하자는 듯이 잔을 흔들었다. 도화와 도명이 와인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고기즙이 배어 나오는 두툼한 고기를 써는 소리가 들렸다.
“저, 그런데 제가 왜 서윤 씨와의 문자를 정리해야 하는 건지, 잘 몰라서요.”
“쓰기 싫다고 돌려서 말하는 겁니까?”
“아니요. 보고서는 뭐든 목적을 정확히 알아야 잘 쓸 수가 있잖아요.”
“일리가 있군요.”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도명은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까를 고민하며 접시 위에 나이프를 찍은 후 반 바퀴 돌렸다.
“서윤이는 좋은 사람입니다.”
“네, 서윤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확실히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질투가 내장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옴을 느꼈다. 도명이 고기를 작게 자르고는 입안에 집어넣으며 도화를 노려보았다.
“일단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쪽 보고서는 오히려 쉬우니까. 그냥 말 그대로 연락한 내용을 정리해서 주면 됩니다. 가령 날짜별로 정리하면 간단하겠네요. 어쨌든 포인트는 누락 없이 말입니다.”
“와, 무슨 정부 기관에서 절 검열하는 것 같네요.”
“제가 정부 기관이라고 하면 확실히 좋은 정부 쪽은 아니겠죠. 애초에 좋은 정부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쁩니까? 솔직히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네요.”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기분이 이상하네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상한데요?”
“도명 씨말대로 기분 나빠해도 이상할 상황은 아닌데, 그냥 정리해서 그것도, 예쁘게 프린트해서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게 도명 씨가 기쁘다면 말입니다. 그냥 그게 마음이 편하네요.”
“제가 도화 씨의 행복한 시간을 인질 삼아 항의할 의지마저 꺾고 있는 건가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아, 몰랐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거죠.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완벽하거든요. 도명 씨처럼 잘생긴 남자가 저를 위해서 스테이크를 구워 주고 와인 잔에 와인도 채워 주고. 누가 이걸 망치고 싶어 하겠어요.”
“도화 씨가 불쾌하다면 억지로 할 필요 없어요. 싫다고 거절해도 도화 씨를 위한 저녁을 만드는 시간이 의미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저 그런데, 원래 애인…끼리는.”
도화는 아직도 애인이라는 말이 주는 말이 너무 떨리고 어색했다.
“네. 애인.”
도화가 말을 모호하게 흐리자 도명이 방점을 찍어 가며 말했다. 하지만 도명 역시 ‘애인’이라는 말이 떨림이 너무 커 언제나 자신만만한 도명답지 않게 도화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러니까 사귀는 사이끼리는 이런 건가요?”
“모르죠. 저도 처음이라니까요.”
“음, 도명 씨말대로 서윤 씨와 연락한 걸 시간대별로 정리해서 주면 이 보고서의 목적에 관해서 설명은 해 주실 건가요?”
“네.”
“그럼 됐어요.”
“길을 잘못 들이고 있네요.”
“네?”
“그러니까 애인 말을 너무 잘 듣는다고요. 부당한 요구조차 말이에요. 저도 애인을 만드는 건 처음이지만 솔직히 이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느낌은 오잖아요. 둘 다. 안 그래요?”
“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정상적이지는 않았으니까요.”
도화가 구운 브로콜리를 스테이크 소스에 찍어 먹으며 말했다. 도명은 도화를 자신의 집에서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 웃음이 터졌다. 도화가 도명이 일종의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해서 도명의 집에 몰래 잠입한 그 날 말이다.
그때는 진짜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있나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기억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 멍청한 표정 하며 우스꽝스러운 복장 등 웃긴 지점이 많았다.
그때 경찰에 신고한다고 도화의 사진을 찍었었는데 신고는 그만두었을지라도 도명의 성격상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만일을 대비해 백업을 해 놓았다.
도명은 오늘 저녁 그 사진을 찾아보리라고 생각했다. 멍청한 표정으로 캐비닛 안에 구겨진 채 온갖 성인용품에 둘러싸인 사진은 지금 생각해 보면 걸작이었다.
“저는 원래, 도명 씨 말 잘 들었는데. 착한 아이처럼.”
“도화 씨가 대부분 착한 아이였던 건 맞는데 가끔, 핀트가 심하게 나가서 마냥 착한 아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는데요. 만약 지금 도화 씨가 흔히 말하는 밀고 당기는 걸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만둬요. 도화 씨는 본능적으로 그런 걸 잘해요.”
도명이 고개를 가로로 흔들며 말했다.
“저 그런데, 결국 우리는 사귀고는 있지만 돔과 섭의 관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걸까요?”
“음, 어떤 면에서는 더욱 지독한 돔과 섭의 관계가 된 거죠. 제가 맨 처음에 도화 씨한테 한 경고 기억 안 나요?”
‘내가 당신이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 겁니다. 당신은,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모든 것을 제게 의지하려 들 겁니다. 사디스트와 몸뿐만 아니라 사랑을 나눈다는 건 그런 의미에요. 멀쩡했던 두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일이죠.’
“기억나요.”
“정말요? 아주 정확히 기억나야 할 텐데.”
“도명 씨 말의 포인트가 뭔지는 알 정도로는 기억해요.”
“두렵지 않아요?”
“도명 씨는 두려워요?”
“대답을 피하네요.”
“도명 씨도 대답을 피하는 건가요?”
“이것 봐, 마냥 착한 아이치고는 이렇게 도발적이라니까.”
도명이 도화의 턱밑을 강아지 턱 긁어 주듯 긁어 주며 말했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아니, 정확히는 그런 것보다는 도명 씨를 잃는 것이 더 두려워요.”
“도화 씨.”
“네.”
“저도 그래요.”
두 사람은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도명은 괜히 물을 마시고 도화는 괜히 다 먹은 접시만 긁어댔다.
도명은 그것을 도화가 음식이 부족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 자신의 그릇에 남아 있는 스테이크 조각을 도화의 접시에 옮겼다. 고기 몇 조각을 가지고 두 사람이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이 실랑이조차 즐거웠다.
언제나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남은 건 뒷정리 시간이었다. 도명이 설거지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섰고 도화도 옆에 섰다.
“안 도와줘도 되는데요. 제가 만들어 준 음료수나 먹어요.”
“아니요. 식사 준비 도와준 것도 없이 얻어먹기만 한 것도 미안한데 뒷정리까지 혼자 하게 하는 건 더 미안하죠.”
“그 표현 좀 거슬리는데요.”
“네?”
“얻어먹는다는 표현이요.”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요?”
“글쎄요. 그냥 고맙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아. 네.”
“고마워요. 그리고 설거지는 같이하고 싶어요. 도명 씨가 저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은 것처럼 저도 뭔가를 해 주고 싶다고요. 사실 식사 준비는 도명 씨가 했으니 설거지는 제가 혼자 다 하고 싶지만 못 미더워하실까 봐요.”
“뭐, 확실히 제가 그런 성격이긴 하죠. 하지만 이번엔 그 이유는 아니에요.”
“아니면요?”
“좀 더 붙어 있고 싶다는 명분이랄까?”
도명의 말에 도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몸을 조그만 기울이면 어깨와 어깨가 닿을 것 같은 그 거리가 설렜다.
“지금 귀여운 표정 짓고 있어서 놀려 주고 싶거든요. 뭐랄까 조금만 툭 하고 만져도 공포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 정도일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해, 해 보시든가요.”
도화의 도발에 도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요?”
“아니, 저 정말 자신 있긴 한데.”
“자신 있는 사람이 말만 많네요. 거참.”
“금욕한다고 음란함이 어디 가는 건 아니죠. 십 년 치 이상의 음란함이 한꺼번에 터진 사람은 참, 대단하네요.”
도명이 젖은 손으로 도화의 콧방울을 꽉 쥐고 흔들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에게 놀림 받아도 좋으니까 그가 조금 더 과감한 접촉을 해 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도화는 열에 달아오른 얼굴이 식지 않는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니까, 왜 말만.”
“도화 씨가 제가 아끼는 그릇들을 들고 있잖아요. 지금도 깨뜨릴까 봐 불안해 죽겠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손에서 접시 하나를 뺏으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죄송하긴요. 아직 깨뜨리지도 않았는데요. 어디까지나 아직은.”
도화는 더 이상 야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화제를 다른 거로 돌려야 했다. 최근 그는 도명에게 야한 것을 하자고 충분히 졸랐다. 밀고 당기는 문제라기보다는 도화도 자존심이 있었다.
“아, 저는 말씀하신 보고서 내일모레까지 가능한데요.”
“네. 좋군요.”
“저, 그런데 도명 씨는요?”
“저요?”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그러니까 도명 씨의 마음 경위 보고서요.”
“아.”
“그 반응은 뭔데요?”
“아니요. 설마 잊었겠습니까?”
“그래서 도명 씨는 언제 주실 건데요?”
“저는 일주일 정도요.”
“네? 일주일이나요?”
도화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도명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 반응은 대체 뭐냐는 듯이 도화를 쳐다보았다.
“제가 빡빡한 보스 쪽인 줄 알았는데 빡빡한 건 이쪽이었네요.”
“아니, 제 예상보다 오래 걸려서요.”
“그 보고서가 일주일 정도도 못 기다릴 정도로 가치가 없지는 않잖아요?”
“아니, 그냥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가서요.”
“와, 진짜 제 예전 보스 같은 말 하네요.”
“도명 씨한테도 보스가 있었어요?”
“뭐 저는 사회에 나오는 순간부터 대표 직함 달고 나온 줄 아십니까? 저의 20대는 그 누구보다 착취당했다고요.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그 열정에 저를 시즌 세일 했습니다. 도화 씨는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솔직히 상상은 안 되네요. 어쨌든 제가 걱정하는 건, 도명 씨의 완벽주의에요. 전 진짜 가볍게 이야기한 건데, 도명 씨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최종 보고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허술해도 괜찮다고요. 그리고 계속 보고서라고 하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어쨌든 진짜 일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고요.”
“도화 씨 누군가한테 그런 보고서 받아 본 적 있어요? 아, 그래요. 표현을 정확히 하죠. 그래요. 후, 러브레터 말입니다.”
“네? 아뇨. 그럴 리가요. 누가 저같이 쌀쌀맞은 아웃사이더한테 그런 정성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어요. 아 고등학교 때 여자애들한테 한두 번 받은 적은 있긴 한데 도명 씨가 우린 게이니까 그런 건 계산에 넣으면 안 된다면서요.”
“잠깐만요. 도화 씨가 쌀쌀맞은 아웃사이더라고요?”
도명은 도화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반응했다.
“네, 도명 씨가 밖에서 살랑거리는 햇살인 것처럼 군다면, 저는 그게 콘셉트라고요.”
“쌀쌀맞은 아웃사이더. 그게 콘셉트라고요?”
도명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반문했다.
“네. 도명 씨는 비웃고 있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저를 보호하는 데 효과적이었다고요. 사실 제가 도명 씨 집에만 무단 침입만 안 했으면 도명 씨도 저같이 쌀쌀맞은 사람은 그냥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았을 거예요.”
“생각해 보니, 첫인상이 그다지 사귀고 싶은 이웃사촌은 아니긴 했죠.”
“네?!”
도화가 도명의 말에 기분 나빠했다. 조금 전까지 그게 콘셉트라고 했으면서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간사했다.
“왜요? 도화 씨가 저에게 붙인 첫인상 이름표보다 좋잖아요. 뭐였더라. 연쇄 살인마, 그쪽 계열이었던 같은데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그 부분에서는 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어쨌든 제 말은 그 보고서가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알았어요. 선생님. 완벽할 필요 없다는 그 말에 빨간 줄 이미 그었다고요.”
“그럼 언제 주실 수 있어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일주일이요.”
“네? 아까랑 다를 바가 없잖아요.”
“도화 씨의 말이 무슨 말인 줄은 알았어요. 하지만 내 이야기도 들어 봐요. 이야기가 중간에 샜지만 제 말의 포인트는 이겁니다. 이 보고서가 도화 씨에게도 저에게도 처음이라는 거예요. 일주일은 금방 갑니다. 그것도 우리처럼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말이죠.”
“네. 무슨 말인 줄 알았어요.”
두 남자가 대화하는 사이 싱크대에는 식기는 물론 물방울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 저는 올라가서 도명 씨한테 줄 보고서 쓰려고요.”
“아, 네 그래요. 저 역시 보고서 써야겠네요.”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한 후 서로를 향해 뒤돌아서면서 동시에 외쳤다.
‘아, 그래도 침대에서 뒹굴자고 말이나 해 볼 걸!’
“아 맞다.”
도화가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멈칫하며 말했다. 도명과 도화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흘렸다.
“아, 저, 도명 씨.”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봐요.”
“혹시, 일식 좋아해요?”
“일식이요? 네, 그런 편입니다.”
도명이 기대한 말은 아니었다. 도화 역시 이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물론 일식집을 예약할 생각이 있었던 건 맞지만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특별한 사이가 된 후 별것이 아닌 일이 별것이 되어 버렸다.
“내일 제가 일식집 예약해놓을게요.”
“데이트 신청입니까?”
“네? 아, 네. 그, 그럼요.”
“기대할게요.”
‘아, 일식집이 문제가 아닌데!!’
‘하하,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
도명은 씻고 침대에 누웠다. 일단은 도화의 말처럼 러브레터에 대해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글을 쓰는 건 도명의 특기였다. 그가 만드는 잡지의 일정 분량은 그의 몫이었다.
침대에 눕기 전 글의 개요를 짰다. 짜놓은 개요대로 글을 쓰는 건 다음 날로 미뤄 두었다. 그리고 도명은 잠이 들었다.
도명이 눈을 떠 보니 도도의 상담실이었다. 고풍스러운 오래된 북유럽풍 복도. 약간 어두침침한 조도. 복도 끝 창문에서는 여전히 붉은 노을이 타고 있었다. 도명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문지방 앞에서 버텼다.
“안 들어오고 뭐 해요?”
와인 색 정장을 입은 도도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물었다.
“예약한 적이 없어서요.”
“여기는 그렇게 빡빡한 곳이 아니에요. 예약이니 뭐니, 이런 귀찮은 건 빼자고요. 손님이 도명 씨뿐이라서 그런 거 안 해도 돼요.”
“선생님, 저는 고백도 무사히 마치고 도화 씨와 제법 연인다운 대화도 잘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상담은 필요 없습니다.”
도명이 여전히 문지방 앞에 서서 버티며 말했다. 도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도명 씨는 아직 제 처방 하나 제대로 못 해냈습니다. 그런데도 상담이 필요 없나요?”
“아, 그거 말입니까? 선생님의 목에 목줄을 매고 산책을 하다가 목줄을 놔 버리는 것 말입니까? 그리고 선생님은 차에 치이고요?”
“저기, 일단 이 거리에서는 대화하기 불편하니까 일단 이 편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겠어요?”
“아니요.”
도명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도도는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이봐요, 여기 이 의자에 놓은 백구 쿠션과 백구 발바닥 모양 마시멜로가 녹고 있는 코코아를 봐요.”
“하하.”
도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어린애 같은 거로 자신을 꼬여낼 생각을 하다니 우스웠다.
“이 코코아는 아무리 마셔도 살이 안 찐다고요. 무려 마시멜로까지 들어갔는데 말입니다. 살찌는 걱정 없이 단 음식을 먹어 본 적이 대체 언제였어요?”
“어이가 없군요.”
도도의 두 번째 유혹에도 어이가 없다는 도명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도명이 눈꺼풀을 한 번 닫고 떴을 때 상담실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발에는 보슬보슬한 백구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손은 코코아가 담긴 컵을 쥐고 있었다.
도명은 낮게 한숨을 쉬다가 달콤한 색깔의 코코아 안에 천천히 잠겨 가는 하얀 백구 발바닥을 보았다. 세상에 이 보드라워 보이는 초콜릿색 젤리가 달콤하고 걸쭉한 것에 잠기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급격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만족 못 시켰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전 정말 잘하고 있다고요. 응급실에 안 실려 가고 고백도 해내고, 자기라는 애칭도 능숙하게 쓴다고요.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정말요?”
“네.”
도명이 도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이게요?”
도도가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흔들어가며 말했다.
“그게 뭐가 문제인데요?”
도명의 말에 이번에는 도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도명이 도도를 쏘아봤다.
“이건 도명 씨답지 않죠. 고작 손가락 장난질로 고백을 때우는 게 정말 도명 씨다운 거였나요? 뭐랄까, 도명 씨는 좀 더 잘 해낼 줄 알았죠.”
“아 말이 심하시네요. 손가락 장난질이요? 전 진심이었다고요.”
“아, 제가 말이 심했나요?”
“네.”
“도명 씨 기준으로 말한 건데요. 완벽하게 도명 씨 기준이죠. 제 기준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능숙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해두죠.”
“사람은 누구나 처음이란 게 있는 겁니다. 언제나 능숙하고 유려하게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이죠.”
“도명 씨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잘생긴 얼굴? 아 물론 통계적으로 잘생긴 사람들이 연봉을 많이 받긴 하죠. 하지만, 그건 부가적인 거고, 도명 씨는 연기에 재능이 있거든요. 아주 훌륭한 배우예요. 얼마나 훌륭한 배우냐면 말이죠, 연기하는 본인조차 자신이 만든 그 연출에 도취될 정도로 연출을 잘해요. 본인이 처음인 것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잊어버리죠. 당신은 언제나 처음인 순간부터 최고였다고요. 잘 생각해 봐요. 도명 씨가 처음인 그 모든 순간을요. 자신의 가장 영향력 있는 클라이언트를 침대에서 벗기고 놀 생각을 할 때, 왕년에 잘 나가던 출판 쪽도 기울어져 가는 이 마당에 잡지사를 세웠죠. 그것도 이북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니라 인쇄에 더 집중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콘텐츠는, 양로원 책장에나 꼽힐 것 같은 원예였죠. 이 모든 게 섹시할 수 있다고 투자자들을 설득할 때 도명 씨는 20대 후반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자신을 스토킹했던 그놈을 플라스틱 자로 벌줄 때는 어때요?”
도도가 책장에서 도명의 기억들로 채워진 책을 꺼내왔다. 책장 중간마다 끼워 놓은 북마크를 떼려고 했다. 도도는 그가 걸음마 하던 시절까지 다 들먹일 모양이었다.
도명이 그만하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이번엔 달라요.”
“뭐가 다른데요?”
“그러니까…… 이번 건은 순수하다고요.”
“순수요?”
도도가 도명을 향해 반문하며 웃음을 참았다.
“이봐요, 뭐가 그렇게 웃겨요?”
도명의 정색에 도도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점잖은 말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순수의 정의에 대해서 말해 봐요. 아 물론 제가 사전적 의미를 묻는 건 아니겠죠?”
“이해관계를 안 따진다. 조건 없이 무언가를 한다.”
“그래요. 도명 씨의 정의에 따르면 이번에도 다른 게 없잖아요?”
“내가 도화 씨를 좋아해서 얻는 이익은 대체 뭔데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오히려 제가 오랫동안 쌓아 올린 견고한 규칙들이 뒤죽박죽되었다고요. 알아요? 도화 씨를 얻기 위해 오히려 쥐고 있던 걸 내려놨죠.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쥐고 있던 편리한 것들을 말입니다.”
“아, 맞다. 요즘 러브레터 건으로 골치가 아프죠? 자기 마음의 경위서라니. 도명 씨는 그쪽으로 영 유능하지 않잖아요. 그냥 있었던 대로 쓰라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도화 씨 같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나 참 도화 씨한테나 쉽지.”
“불리해질 것 같으니까 말을 돌리네요. 제 반론이나 집중하시죠.”
도명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도명 씨가 도화 씨한테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을 알려드릴 건데 정말 안 궁금해요? 러브레터의 좋은 시작점이 될 텐데요.”
“……좋아요. 그럼 그 이야기 하고, 방금 이야기로 바로 돌아오기로 약속해요.”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도도가 책을 하나 꺼내 노란색 포스트잇으로 표시한 페이지를 펼쳐 보여 줬다.
‘도명 씨, 제가 도명 씨에 대해서 오해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제가 남들과 다른 것처럼 도명 씨가 저와 다를 뿐이라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이해합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저는 도명 씨가 베푼 호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도명 씨와 친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유를 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정확한 이유나 들어봅시다.’
‘진영이 말입니다. 남자애치고 덩치가 작아서 전학 간 곳에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아이들이 전시하듯 그를 교실 한가운데 세워 놓고 뺨을 후려치고 배를 주먹으로 치며 시시덕거렸습니다.’
‘제가 하는 건 그런 종류의 폭력과 다르긴 합니다만 일단은 계속 들어 보죠. 사실 제 첫 경험이 저에게도 딱히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로 매질을 했으니까요.’
‘네, 압니다. 정확히 이해는 못 하고 있지만 얼핏 어딘가 다르다는 것도. 그러니까 저는 그 아이들과 도명 씨가 같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저는 전학 간 이유도 좋지 못했고 또 그 당시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진영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못 참겠더군요. 그래서 진영을 세워 놓고 때리는 그놈에게 달려들어 주먹의 살가죽과 뼈가 얼얼해지도록 때렸습니다. 제 주먹 몇 대에 나가떨어지는 별것도 아닌 놈이 그렇게 매일 진영을 세워 놓고 같잖은 힘을 과시했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 주먹 꽤나 쓴다는 놈이더군요.’
‘아, 그래서 진영 씨가 주먹으로는 제가 도화 씨를 못 이긴다고 했던 거군요.’
‘사실 그때 기분이 좋았어야 했던 거 아닙니까? 폭력을 쓰고 있긴 한데 동급생을 구하는 일이었고 또, 상대는 질이 나빴습니다. 그리고 그 또래 남자아이들은 유난히 폭력에 열광하죠. 폭력을 우상시했고 저를 비난하기는커녕 마치 경기 보듯이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도화 씨는 기분이 안 좋았습니까?’
‘네, 조금도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때려눕힌 놈이 잘 나갔던 일진이었던지라 그때부터 매일 주먹질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주변이 저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습니다. 즐겁지도 않은 일을 매일 하려니까 고통스러웠습니다. 또래의 추켜세움도 솔직히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냥 맞았습니다. 때리는 것보다 확실히 마음이 편하더군요. 도명 씨 저는 그런 이유로 도명 씨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명 씨가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폭력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폭력의 본질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이거나 도명 씨를 비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도명 씨처럼 잘 전달하는 편은 아니라서…….’
“도명 씨는 그날 발견한 겁니다. 마음껏 사랑해도 안전할 상대를요. 당신에게 상처 줄 수 없는 그런 상대 말이에요. 이런 것도 일종의 이해관계죠? 안 그래요?”
“그래서 내가 도화 씨한테 느끼는 사랑은 가짜라는 겁니까?”
“아니요. 완벽하게 순수하지 않다는 게 가짜는 아니잖아요. 문제는 사랑의 구성요소가 아니에요. 사랑의 구성요소는 일종의 내구성 문제니까. 도명 씨 같은 경우 내구성이 나쁜 편도 아니죠. 포인트는 도명 씨가 두려움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물론 누구나 두려움을 완벽하게 이겨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도명 씨가 그동안 두려움을 컨트롤 해 온 방법으로는 통제가 안 될 겁니다. 마음을 도명 씨가 정한 양만큼 못 준 그 순간부터,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요. 유능한 배우인 당신이 대본을 못 읽는 까막눈이 된 거죠. 도명 씨는 이 문제에 있어서 완벽하게 무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번 건 순수함이니 처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도명 씨의 이 숙련된 손이 이제 아기 손이라고요. 어릴 때는 쥐는 것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면 너무 세게 움켜쥐고 흔들다가 물건을 망가뜨려 버리기도 하죠. 도화 씨가 난데없이 저녁 식사 때 나타나지 않고 기차를 타 버린 그 날 밤, 도명 씨는 도화 씨가 차에 치이는 꿈을 꿨습니다. 아주 불행한 사고였어요. 갑자기 차가 골목에서 튀어나오고 도화 씨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고, 이번에도 도명 씨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죠. 도화 씨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충분히 고통스러워하는 도명 씨에게 너 때문에 죽었다고 했고 도명 씨는.”
“아니, 이건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야, 라고 했죠. 어머니의 저주는 논리적이지도 이성 적이도 않아. 난 이게 틀린 불안감이라는 걸 알아.”
“그런데, 그건 이성적인 생각이었어요. 도명 씨답게도 너무나도 논리적이죠. 도화 씨에게 교통사고가 난다면 물론 도명 씨 탓은 아니죠. 당신이 신도 아니고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보호해 줄 수는 없으니까요. 또, 도화 씨도 어른이니 도명 씨 같은 절대적인 보호자는 필요하지 않고요. 하지만 그 교통사고는 뭐랄까. 일종의 교환되는 암호 같은 겁니다. 아 사진 한 장 준비했는데. 그 꿈에 대해서 본인이 마음대로 삭제해 버린 장면입니다.”
도도가 도명에게 사진을 넘겨 주며 경계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도가 도명을 금방이라도 터질 시한폭탄 쳐다보듯 쳐다봤다. 도도가 넘겨 준 사진 속에는 도화를 친 차 운전석에 도명이 앉아 있었다.
“도명 씨는 도화 씨에게 SM 파트너 간의 관계에서의 법칙을 경고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요, 당신 마음의 법칙에 대해서 경고한 겁니다. 어머니의 저주는 미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논리적이죠. 당신은 상실감을 견디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가지는 데 익숙해져 왔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진짜 사랑에서는 미숙하죠. 그렇다고 마냥 떼를 쓰는 아기치고는 힘과 수단은 어른의 것이라 위험합니다. 네가 앞으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모든 것을 망칠 거라는 말은 사실 저주라기보다는 통계학에 더 가깝습니다.”
도도가 이제는 지치고 질려 버렸다는 듯이 말했다.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정신과 의사가 그의 성미에는 잘 안 맞는 듯했다. 도도가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제 목줄을 놓는다는 그 처방이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그 처방에 아직도 의문이 듭니까? 그동안 상실의 공포 때문에 당신의 예상 밖에서 일어난 삶의 마법 같은 사건들을 놓쳐 버린 걸 모르겠어요? 도화 씨는 당신이 받아들인 첫 번째 마법 같은 사건이라고요. 당신 집이라는 토끼 굴에 자발적으로 떨어진 그 키 크고 덩치 좋은 앨리스의 엉덩이를 때리며 말이에요. 그 엄청난 걸, 그를 영영 잃을까 겁에 질려서 헐레벌떡 일어나 겨우 손가락 두 개를 흔들어 댄 거로 때워놓고 참 잘했다는 도장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요?! 아 솔직히 그 어수룩한 면이 귀엽긴 했지! 도화 씨를 치는 그 차량 주인의 얼굴을 보기 전에는!”
도도는 뒤늦게서야 자신이 흥분한 것을 알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뺨에 난 복슬복슬한 턱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도도의 검은 콩 같은 코에서 짧게 콧김이 터져 나오고 다시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환자 앞에서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차분했다는 듯이 고요해진 눈빛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도도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오만하기 짝이 없던 도명의 표정이 조금은 온건해졌다.
“그래서요? 제 손으로 도화 씨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음번에는 목줄을 놓는 일에 성공했으면 좋겠네요.”
“그걸 성공하면 끝입니까?”
“아니요. 그건 일종의 시작이죠.”
“시작이요?”
도명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자 도도 역시 자기도 지겹다는 얼굴로 그의 반항에 대응했다.
“뭐, 어쨌든 시작이 반이니까요.”
“저, 그 말 별로 안 좋아합니다. 시작하기만 하면 뭐든 이룰 것 같은 착각을 주니까요.”
“압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말에 더 무게감을 실어야 할 겁니다. 시작조차 못 하는 멍청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도명은 도도가 말한 그 시작조차 못 하는 멍청이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아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언제나 말이 거칩니까? 입이 아주 사포 같네요. 한마디로 개 같네요.”
도명이 눈웃음을 살살 치며 말했다. 도도와 도명 간의 신경전이 오갔다.
“제가 좀 거친 플레이를 좋아합니다.”
도도가 깍지를 끼며 도명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내밀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도도가 시계를 보더니 복슬복슬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가볍게 일어나더니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하고 털도 빗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도명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도명을 향해 몸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아, 상담, 끝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제 상담이요.”
“문제 지적만 하고 해결은 안 하고 갑니까?”
“아, 다음에요. 왜냐하면 데이트가 있거든요. 그것도 놓치기 싫은 그런 데이트요.”
“데이트요?”
도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도명의 기억에서는 도도는 중성화 수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랑이 사이에서 흔들리던 복슬거리는 땅콩은 아주 오래전에 동물 병원에서 처리되었다. 도도의 가랑이 사이로 옮겨진 도명의 시선에도 도도는 기죽지 않고 말했다.
“왜요? 물리적인 걸 제거하면 마음이 사라진답니까?”
“물리적 만족을 무시하시네요? 없던 마음의 만족까지 채울 수 있는데.”
“하하, 땅콩이 없다고 환상적인 스킨십과 그 외의 스킬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오히려 임신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고요. 어쨌든 결핍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상대입니다. 하얀 눈이 내린 것 같은 털과 까만 콩 같은 눈과 코를 가진 하얀 백구거든요! 더 치명적인 게 뭔지 알아요? 엉덩이 부분만 털이 더 복슬복슬해요. 그 빵실빵실한 뒷모습에 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꼬리를 보면.”
“아. 치명적이네. 인정.”
“그러니까요. 그런데 조그만 콤플렉스 하나 때문에 그놈을 포기한다고요?”
“그놈이요? 그녀가 아니라?”
“도명 씨가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죠. 사람들만 동성애가 있는 줄 알아요?”
“아니, 모르는 건 아닌데 어색하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그러면 안 되지!”
도도가 억울하다는 듯이 연신 외쳤다. 도명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그러면 안 되지!’라는 말이 지겹다는 듯이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어쨌든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남은 도명 씨의 상담은 아주 열정적인 다른 선생님한테 맡겼어요.”
“목줄 놓는 거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데요? 다른 개 목줄은 놓을 수 있다고요. 물론 쉽지는 않지만 무게감이 완전히 다른 건 사실이죠.”
도명의 말에 도도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도명의 말에 살짝 감동한 것 같았다.
“목줄 놓는 건 아니고, 그냥 다른 번외 치료라고 보면 됩니다.”
“그다지 신뢰 가지는 않는데요.”
도명이 데이트 생각에 신이 난 도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자료는 충분히 넘겼으니까.”
도도의 말에도 도명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데이트 나가는 도도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시간은 그냥 시간을 때운다는 기분으로 앉아 있기로 했다.
이 상담실의 안락의자는 도명의 몸에 맞춘 것처럼 완벽하게 편안하니까 못 할 것도 없었다.
도도가 휘파람을 불며 상담실 밖을 나갔다. 그리고 이내 옆구리에 양장본 책을 잔뜩 들고 있으며 머리는 백구에 몸은 사람인 의사가 들어왔다. 도도와는 확실히 다른 이미지였다.
도도는 입고 있는 정장도 답답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여유 없이 타이트하게 입었다면 백구는 약간 품이 넉넉한 하얀색 니트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등장했다.
“아. 안녕하세요.”
말투도 달랐다. 애써 배운 사람티를 내기 위해 목소리를 깔았지만 입 사이로 나온 샐쭉하게 나온 혀가 그가 도명과의 만남을 긴장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백구가 도도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백구는 상담자인 도명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몸도 도명에게서 살짝 빗겨 앉은 게 상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가 도명과 대면하는 것에 아직 충분히 용기가 없다는 것이 보였다.
“아, 저 도명 씨에 대해서 공부 정말 많이 해왔습니다. 꽤 까다로우신 분이라고 들어서요.”
“짜증 나는 사람이 아니고요?”
도명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게 더 비슷하네요.”
백구가 자신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해왔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 도명에 관한 백과사전 같은 책들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도명에게 칭찬을 해달라는 듯이 ‘저 이거 어제 다 읽었어요.’라고 언질을 줬다.
하지만 도명은 도도를 빤히 쳐다볼 뿐 그가 원하는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이걸 다요?”
“네.”
“그런데, 선생님.”
“아, 네! 네!”
“대답은 한 번만.”
“아. 네.”
“이거 제 자료 아닌데요?”
도명이 탁상 위에 올려 둔 책 중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양장본 책의 주인공의 유도명이 아닌 유다영이었다. 책을 확인한 백구가 당혹스러운지 혀를 길쭉이 내밀고 헥헥거리기 시작했다. 백구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 역시 시간을 때우자.’
그러면서도 도명은 불만을 못 참고 도도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알았고, 도명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당신 후임 아주 엉망이네요.]
오늘만큼은 도명의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도도가 웬일로 바로 문자에 답을 줬다.
[이런 말은 자존심 상하지만 그분이 이곳에서 제일 유능한 분이에요. 이곳에서 가장 잘나가는 분 힘들게 소개해 줬더니, 투덜대기나 하고. 나 참. 감사함을 배웁시다.]
‘아 재수 없는 개새끼.’
도명이 열이 차오르는 것을 누르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 잘못 들고 온 거예요. 어제 읽은 건 확실히 당신 자료가 맞아요. 유도명. 맞아요.”
“아. 네. 알았으니까 긴장 풀어요. 선생님.”
도명이 백구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긴장 풀게요. 고마워요.”
백구가 도명에게 두 팔로 받아 들어야 할 만큼 커다란 유리병을 줬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알사탕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상담실의 가로로 긴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사탕을 비췄다. 투명하고 달콤해 보이는 것이 신비롭고 탐스러워 보였다.
“선물이에요.”
“네?”
“그거 도명 씨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요.”
“아. 고마워요.”
도명이 이걸 언제 다 먹나 하는 표정으로 유리병 안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너무 많은데요?”
“너무 많으면 같이 먹으면 되죠.”
백구가 의심스러운 사탕이 아니라는 듯이 알사탕 하나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반드시 먹어야 합니까?”
“부담 안 주려고 선물이라고 했는데, 이게 제가 준비한 치료입니다. 저 창문에 별이 떠오를 때까지 같이 먹어요. 먹어 봐요.”
도명이 마지못해 유리병 안의 사탕 중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탕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도명의 입안에서 단단한 사탕이 녹았다. 그러자 입안에서 환상적인 단맛이 녹아들었다.
너무 기분 좋은 달달함이라 도명은 다른 사탕을 하나 더 집어 입안에 넣었다. 너무나도 중독적인 단맛이었다. 정말 온종일 먹어도 안 질릴 정도로 단맛도 다 똑같은 단맛이 아니었다.
도명이 또 다른 단맛을 기대하며 또 다른 사탕 하나를 집어서 입안에 넣었는데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신맛이 났다. 기분 좋은 신맛을 넘어서 혀가 얼얼할 정도였다.
“하하. 그런 맛도 있는 법이죠.”
백구 역시 기분 좋지 않은 사탕을 집어서 먹었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도명은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한 색깔을 외었다. 푸른색 사탕이었다.
도명을 자신이 달게 먹었던 색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빨간색 사탕이었는데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이완될 정도로 황홀한 단맛이었다. 도명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빨간색 사탕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아까의 황홀한 단맛은 안 나고 혀를 통째로 불태울 것 같은 고통스러운 맛이었다.
“하하, 재밌죠?”
“이게 재밌어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기분 좋은 놀라움은 확실히 아니네요.”
“그런가요?”
백구가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명이 아무리 애를 써도 사탕의 모양, 크기, 색, 냄새로는 그가 좋아했던 맛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맛을 알리는 일정한 규칙 같은 건 없었다. 규칙을 가지고 술래잡기를 하듯 규칙을 알 것 같으면 규칙이 뒷걸음질 치는 느낌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규칙이라니, 이런 걸 규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을 행복하게 했던 그 맛을 보기 위해 유리병 안에 손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결국에 도명은 화가 치밀었다.
“뭐 이런 사탕이 다 있습니까?”
도명은 사탕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유리병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다행히 유리병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라벨에는 ‘LOVE’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