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
도화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운 후에도 쾌락의 여운이 살갗 아래에서 감돌았다.
그의 애널은 쾌락을 기억하고 잔뜩 흐물흐물 해져선 혼자 개폐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깊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명과의 플레이에서 충분한 쾌락을 느꼈음에도 도화는 포르노가 보고 싶었다.
도화는 결국 책상 위의 노트북에 앉아서 포르노를 뒤졌다. 온갖 자극적인 제목들이 그의 눈동자 안에 담겼다. 하지만 도화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도화는 그렇게 한 시간을 소비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 단순히 자극적인 내용으로는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도화가 원하는 것은 평범하면서 조금 더 깊숙한 것이었다. 결국 도화가 새벽에 본 것은 수위가 높은 멜로 영화였다.
영화가 중반부에 도달하자 도화가 원하는 야한 장면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도화는 명치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다운로드한 것이라 그가 원하는 야한 장면만 볼 수 있었겠지만 단순히 야한 장면 하나만 보면 그가 궁금해하는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도화는 어떤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순간들로 시간을 충분히 켜켜이 쌓아야 함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화가 문득 노트북 하단의 시계를 보니 10시쯤 되었다. 도화가 영화에 몰입하는 순간 도명에게서 문자가 왔다.
[도화 씨, 땀도 많이 흘렸는데 배 안 고픕니까?]
[조금요.]
도화는 영화에 몰입하느라 깊게 생각 안 하고 지금 상태 그대로 서술해서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야식 올려 주겠습니다. 좋습니까?]
[네.]
도화는 영화에 집중해서 보느라 대충 답했다. 드디어 도화가 기다린 야한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화는 책상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으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때 도명이 계단 판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바닥 아래에서 울리는 발소리에 순간 깜짝 놀랐다. 도화는 그제야 도명에게 온 문자를 곱씹었다.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내심 이렇게 빨리 올라올 줄은 미처 몰랐다.
시간상으로 보면 이미 다 만들어 놓고 문자를 보낸 것 같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도화는 급하게 영화를 정지시키고 영화 화면을 밑으로 내렸다.
도명이 나초와 그 나초에 얹어 먹을 각종 소스를 가져왔다. 도명은 한 손으로 접시를 든 채로 도화가 있는 방문을 두들겼다. 방문은 이미 반쯤 열려 있었지만 도명은 일단 예의상 문을 두들겼다.
“아, 네!”
도화가 어정쩡한 자세로 섰다. 도화는 괜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었습니까?”
“아, 그냥. 영화 보고 있었습니다.”
“아 또, 공포영화군요.”
도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그냥. 영화요.”
“공포영화가 아닙니까?”
“네.”
도화의 대답에 도명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공포영화가 아닌 영화도 봅니까?”
“네. 아, 그런데 야식까지 챙겨 주실 필요는 없는데요.”
“사실, 야식은 핑계죠.”
“네?”
“도화 씨, 플레이가 만족스럽지 않았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겁니다.”
“아, 아니요. 만족했는데요. 제가… 바닥에 정액…… 아. 네. 뭔 이야기인 줄 아시잖아요.”
도화는 자신이 바닥에 흥건하게 싸놓은 정액을 청소하는 도명을 상상하니 얼굴에 열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아, 네 무슨 이야기인 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화 씨 표정이 묘해서요.”
“아니, 정말 만족했는데요.”
도화가 방어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하여간, 사람이 착해선 싫은 소리를 못 하네요. 의도하지 않게 제가 취조하는 분위기인 것 같으니까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아, 마침 영화 보고 있었다니까 같이 보면서 먹으면 되겠네요.”
도명이 들고 있던 접시를 일단 도화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무슨 영화입니까? 다운로드한 거면 제 프로젝터로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도명은 말을 하면서 도화의 노트북을 훑어보았다.
“앗 도명 씨, 굳이 같이 안 봐도.”
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명이 도화가 밑에 내린 동영상을 화면에 띄우고 재생했다. 두 남자가 뜨겁게 사랑하는 퀴어 영화가 도화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도명이 만드는 차가운 절제와 뜨거운 유혹 사이를 오가는 섹스 분위기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였다. 오직 무분별한 뜨거움만이 가득한 섹스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거 포르노 아니에요. 그냥 멜로 영화인 줄 알았어요. 그것도 아주 건전한.”
도화의 변명에 도명은 차라리 포르노를 보지 그랬냐고 말하고 싶었다. 사람이 갖는 섹스 판타지는 무궁무진하기도 하고 없던 판타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니 도화가 그와의 플레이 이후 포르노를 보고 있는 건 도명에게 차라리 큰 충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할 것이다.
“다운로드한 파일 이름 자체에 19금이라는 제목이 들어갔는데 무슨 그냥 멜로 영화인 줄 알았었어요.”
도명은 도화의 변명에 대화를 집중시키기로 했다. 차라리 이편이 도명의 마음이 편했다. 도화는 도명의 말에 너무나도 정직한 파일 이름에 한탄을 했다.
“아, 영화 같이 볼 거예요?”
도화가 괜히 귀 옆을 긁으며 물었다. 도명은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포르노면 같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도화가 보고 있던 것이 포르노 중에서도 SM이면 도화의 은밀한 포르노 시간은 어느새 별안간 과외 분위기를 풍길 것이다. 그리고 도화의 머릿속에는 현직, 가장 지명도 높은 프로 마스터 강의라는 글씨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궁서체로.
“사실 그다지 당기지는 않는데요.”
두 사람이 어색한 대화를 겨우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영화 속 두 남자는 서로를 물고 빨며 너무 좋아서 참지 못하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그럼 도명 씨가 들고 온 이건 어떻게 하죠? 힘들게 만들어 오셨는데 혼자만 먹기도 미안하고. 아 음, 다른 영화 볼까요? 도명 씨 취향인 걸로.”
도화가 급하게 상영되는 영화를 끌려고 했다. 방 안을 울려대는 이 습한 소리를 어서 없애고 싶은 조바심에 도화는 괜히 익숙한 마우스를 움직이는 일이 삐걱거림을 느꼈다. 도화가 젖은 손바닥을 트레이닝복 바지에 닦았다.
“저는 원래 야식은 안 하니까 도화 씨만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영화는 당장 생각나는 영화가 없네요.”
“아 저 이건 정말 아무런 의도 없는 순수한 질문인데요.”
‘그렇게 운을 띄우는 것치고 의도 없는 경우 거의 못 봤는데.’
“네, 일단 물어보세요.”
“도명 씨는 그냥 평범한 섹스는 지금까지 안 해 봤어요?”
“안 해 봤을 리가요.”
도명이 살짝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도명이 도화에게 질문했다.
“도명 씨가 예전에 첫 경험 이야기해 주셨잖아요. 왠지 그때부터 SM 느낌이 나는 것을 해서요.”
“완벽하게 이쪽만 했을 리가요.”
“아, 그렇구나.”
도화는 도명의 대답을 곱씹으며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도명이 다른 누군가와 이런 섹스를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다시 안 좋아졌다. 도화는 분명하지 않은 대상에게 강한 질투를 느꼈다.
“아, 저 도명 씨, 첫사랑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요. 그 첫사랑하고 한 거예요?”
“첫사랑 같은 거 없는데요.”
도명이 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도명 씨 나이가 있는데 어떻게 첫사랑이 없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도화는 묘하게 착잡한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더욱 장난스럽게 도명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어떻게 사람 경험이 다 비슷비슷합니까?”
도명의 얼굴에 불편함이 가득했다. 도명은 정말 지금까지 좋아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다 도화와 같은 반응이니 자신이 정말 저주 걸린 양철 허수아비가 된 느낌이었다.
“아까 그냥 섹스도 해 봤다고 했잖아요.”
“저는 도화 씨의 논리 구조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되네요. 어째서 SM이 아닌 섹스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가 같은 섹스로 귀결되는 거죠?”
“아. 이상한 연결인가요?”
“언제나 참인 명제는 결코 아니죠.”
“저, 도명 씨의 보통 섹스는 어때요?”
“어떻긴요. 그냥 섹스죠.”
도명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다 도명이 불안감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이런 섹스를 원합니까?”
“네?”
갑자기 훅 들어오는 도명의 질문에 도화가 놀랐다. 도화는 겨우 말랐던 손바닥의 땀이 다시 흥건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 음. 도명 씨는 어떤 섹스든 맞춰 줄 수 있어요? 도명 씨는 언제나 파트너가 원하는 것을 맞춰 준다고 말했잖아요.”
도화가 도명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이번에는 도명이 도화의 질문에 목이 졸림을 느끼고 있었다. 도명은 자신이 당하는 것 빼고는 온갖 성 경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주도해 왔었다.
“저는 온갖 섹스에 대해서 알고 있고 경험도 해 봤습니다.”
“아 그러면…….”
“할 수는 있어요. 다만.”
“다만요?”
“다만 더 유능한 쪽은 역시 SM 쪽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도명의 대답에 이번에는 도화가 말을 아꼈다.
‘난 섹스에 대해서 당신만큼 잘 알고 있지는 않지만 섹스에서 중요한 게 유능함이니 뭐니, 그런 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도화는 마음속 말을 하지 못 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전전시키다가는 그에게 지금 당장 고백할 것 같았다.
“도화 씨. 뭐 더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아, 아니요. 전혀요.”
“그렇군요.”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도화 씨, 연애가 하고 싶으면 말해 주세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이번에는 도명이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결국 이 정적을 참지 못한 쪽은 도명이었다.
도명은 이 정적 끝에 도화에게 이 엉망으로 꼬인 관계의 해체에 대해서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도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답지 않게 도망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아, 네 늦긴 늦었죠.”
“적당히 보고 일찍 자요.”
“네.”
“대답 잘하고 착하네요.”
결국 도명이 가져온 야식은 그 누구도 먹지 못하고 도화의 책상 위에서 차갑게 굳고 있었다.
***
도명은 자신의 지하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도화가 다운받은 영화를 다운받았다.
도화의 컴퓨터에서 제목을 기억해두고 그도 구한 것이다. 도명도 영화를 차근차근 보기 시작했다.
두 남자의 아슬아슬한 감정선이 돋보이는 초반을 지나 중후반에 문제의 그 야한 장면이 나왔다. 도명은 그 장면을 무려 5번 연속 봤다. 배우가 짓고 있는 표정, 몸짓, 잠자리에서의 테크닉 같은 것을 유심히 보았다.
흉내 내는 것쯤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섹스에서는 테크닉이랄 것은 거의 없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도명이 하고 있는 섹스에서 질서를 제외하면 되는 일이었다.
도명은 못 할 건 없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그 장면을 틀었다. 그 한 번의 재생으로 앞의 다섯 번의 재생으로 내린 결론이 뒤집혔다.
이 섹스는 앞의 이야기들을 겪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섹스였다. 이 안의 몸짓을 아무리 분석한 들 어설프게라도 흉내 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도명은 좌절감에 머릿속이 멍했다. 도명이 애써 외면했던 진실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백구가 사랑을 하고 싶다.’
도명은 불현듯 전에 혁준과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때는 마른안주에 와인을 마시며 웃으며 떠들던 이야기였다.
‘도명 씨는 이 모든 연극이 유치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플레이가 끝나고 난 후, 혁준의 몸에는 온갖 빨간 자국이 선명했다. 아직 몸의 통증이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혁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잘 모르겠으니까 질문하는 거죠.’
혁준은 포르노 배우처럼 아무것도 안 담긴 욕조 안에 발가벗은 채 누워 있었다. 혁준은 약간 취기가 올라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 안 하겠어요?’
도명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도명이 와인으로 목을 적시는 혁준의 잔을 빼앗아 그의 머리 위로 쏟아부으며 말했다.
‘혁준 씨는 어때요? 이 모든 짓이 유치해요?’
‘네. 유치해요.’
‘아, 맞다 혁준 씨. 이 와인 얼마짜리라고요?’
‘한 병에 200만 원이요.’
혁준의 말을 끝으로 도명이 입꼬리를 씩 울렸다. 그리고는 사치스럽게 혁준의 몸 위로 와인 병을 들고 그냥 물인 것처럼 뿌려댔다.
‘와, 기분 최고네. 이 와인 만든 사람은 자기 작품이 이런 취급 받고 있는 것을 알까요?’
도명이 와인 병 주둥이에 흘러내리는 와인을 혀로 할짝거리며 말했다.
‘입금된 돈을 보는 순간 만족스러울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혁준 씨는 유치하다면서 왜 이러고 놀아요?’
‘원래 유치하게 구는 것이 솔직한 거고, 솔직해지는 건 언제나 짜릿하잖아요. 도명 씨의 이유는요?’
‘저도 혁준 씨의 이유와 같습니다.’
‘이게 연극이라고 해도 뭐랄까, 그냥 흉내는 아니잖아요. 결국은 연극이니 뭐니 떠들어도 진심이 없으면 삼류 연극이 되는 거죠. 차라리 초등학생 연극을 보면 귀엽기라도 하지, 어른들이 어설프게 만든 삼류 연극은 정말 봐 줄 게 없습니다. 안 그래요?’
‘그래요.’
‘제 전 애인들은 원숭이같이 흉내를 내더군요. 음, 말 그대로 원숭이 같았어요. 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순간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러면 나쁜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게 참.’
‘이미 튀어나와 버린 생각은 주워 담을 수 없죠. 마음에는 도덕이니 뭐니 하는 게 없으니까. 이미 참을 수 없어서 튀어나와 버린 마음에 마음을 너무 쓰지 말아요.’
도명이 와인에 흠뻑 젖은 혁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결국은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아주 없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미뤄왔던 감정을 꺼내서 쓰는 건 아닐까요? 연극은 연극인데 연극을 하고 있는 동안은 확실히 현실이죠. 현실 안에 현실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렇군요.’
‘도명 씨, 나를 밟아서 나의 본질을 보여 줘요. 나는 밟으면 바스러질 화려한 등껍질을 가진 딱정벌레예요. 이 화려함에 속지 말아요. 모든 수식어를 빼면 난 한마디로 벌레 새끼죠. 그러니 나를 마음껏 밟아요. 당신의 그 오만함으로.’
‘와 진짜,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촌스러운 옛날 연극 같네요.’
도명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혁준이 술의 흥을 빌려서 만든 유쾌한 말투로 ‘원래 유치한 맛이라니까요!’라고 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같은 대화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도명은 도화와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삼류 연극을 하느니 완벽한 모습으로 기억을 마무리 짓도록 하는 게 좋은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도명은 무의미한 몸짓을 반복했다. 손가락은 다시 영화 속 섹스장면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명의 머릿속에서 영화 속 남자의 얼굴이 도화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도화가 도명을 향해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러자 도명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내 단순히 설레는 마음 이상의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음이 너무 아픈 나머지 누군가 심장을 실제로 쥐어짜고 놓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도명이 떨리는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겨우 잡았다. 고통을 느끼는 도명의 입술 사이에서 거친 호흡이 퍼졌다. 도명의 이마가 책상 상판에 닿았다. 그리고는 애써 느리게 호흡하려고 노력했다.
참으로 기이했다. 사랑의 감정과 동시에 너무나도 깊은 상실감에 온몸이 현실적으로 아파 왔다.
결국 도명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심장을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끝에 도명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도명이 눈을 감고 있는 지하실 문지방 밑으로 개의 발이 문 밑을 바쁘게 긁어댔다. 도도였다. 도도가 낑낑대며 안타까움이 잔뜩 담긴 음성을 내었다. 그러다 이내 답답한지 도명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제 말 들려요?! 당장 병원 가셔야 합니다. 제발 정신병원 좀 내원하세요! 제가 댁에 전화를 몇 번을 한 줄 아십니까?”
***
다음 날 아침 도명이 눈을 떴다. 시계는 새벽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가 아닌 맨바닥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가장 아픈 건 베개 없이 잔 목 부분이었다.
도명은 끙끙대며 스트레칭을 한 후 평상시처럼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보다만 영화는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채로 정지되어 있었다.
도명은 영화 창을 끄고 일상으로 돌아와 화원을 돌봤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되자 일찍 일어난 도화가 그의 가게 앞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도화 씨 잘 잤어요?”
“네! 도명 씨는요?”
“잘 잤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네?”
“딱 포즈가 저한테 긴하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요.”
“아 정말 귀신같이 아시네요.”
도화가 속마음을 들키자 민망해하며 도명에게 청첩장 하나를 내밀었다. 도명이 도화에게서 청첩장을 받아서 열어 보니 익숙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진영 씨의 결혼식 날짜 잡혔네요.”
“네. 저 도명 씨, 좀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뜸 들이지 말고 일단 말해 봐요.”
“저, 결혼식 갈 때 입을 정장 하나 같이 사 주겠어요? 이번에는 좀 비싸도 상관없는데.”
“그게 왜 어려운 부탁입니까?”
“네. 아. 그냥이요.”
도화는 이상하게도 도명에게 옷 골라달라는 부탁을 할 때마다 타이밍이 안 좋아서 도명에게 퇴짜를 받았었다. 그 기억이 도화의 뇌리에 남은 모양이었다.
“저, 진영이 친구 많은 거 알고 있죠?”
“네. 그런데요?”
“유치한 말인 건 알고 있는데 제가 진영이 친구 중에서 최고로 괜찮아 보일 정도로 괜찮은 걸로 골라 주세요. 제가 진영이 베스트 프렌드로 보이게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저, 그런데 얼마 각오해야 할까요?”
“당근 케이크 사서 주세요. 아 당근 케이크 사 올 주소 적어 줄게요.”
“네?”
도명이 핸드폰으로 자신의 단골 가게 리스트에서 주소를 찾아 도화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반드시 당근 케이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근 케이크랑 제 정장 가격이랑 무슨 상관인 건지 전 도무지 모르겠어요.”
“도화 씨 매일 입고 다니는 품이 넓은 그 정장 고쳐 줄게요.”
“네? 그걸로 되겠어요?”
“네. 그걸로 됩니다. 원래 정장은 그 사람 몸을 가장 잘 아는 옷이 좋은 옷인 겁니다.”
***
도명은 아침부터 화원 일을 정리한 후 본사에 왔다. 도명은 사무실에 앉자마자 화원 앞으로 온 우편물들을 통째로 들고 온 것을 확인했다.
도명은 우편물들을 대략적으로 훑어보다가 병원 로고가 인쇄된 것을 심각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명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도명은 심호흡을 한 후 우편물을 뜯어보았다. 도명이 며칠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장에 대한 건강 검진을 했던 결과가 나왔다. 도명은 건강 검진 결과를 꼼꼼히 읽었다. 깨알 같이 적힌 글씨들이 내린 결론은 당신의 심장은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도명은 건강검진 결과를 다시 곱게 접어 덮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건강하다니 다행이긴 한데 자신이 영화를 보다가 쓰러진 일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날 그가 느낀 통증은 이상하리만치 극심하고 현실적이었다.
도명의 사무실 방문을 직원인 혜원이 두들겼다. 도명은 잠시 몰두해 있던 개인적인 고민은 접어두고 혜원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혜원은 회사 건물 안 화원에 대한 보고서를 들고 왔다.
도명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사무실 안 간이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도명이 갓 내린 커피를 혜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신을 일깨우는 향긋한 커피 향기가 기분 좋게 사무실 안에 퍼졌다.
그녀는 이번 일에 꽤나 열정적이었다. 내심 도명의 화원보다 더 인기가 좋은 화원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던 모양이었다. 시범적으로 운영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그녀가 만족할 만한 호응도는 나오지 않았다.
도명의 화원에 쏟아졌던 반응에 비해서 미적지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객관적으로는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표인 도명이 혜원에게 이 정도면 순조롭다고 위로 섞인 말을 하고 혜원은 부족하다며 열변을 토했다.
“제가 오죽하면 이런 치사한 생각까지 했겠어요.”
혜원은 순간 감정에 휩쓸려 대표인 도명에게 속마음 깊숙한 것까지 얼핏 내비치고 말았다. 혜원은 말을 내뱉고 큰 눈의 눈동자를 도명에게로 조심스럽게 굴렀다.
후반부로 갈수록 열정 과다로 감정적이기까지 한 혜원의 보고를 받고 있던 도명은 침착했다. 그녀에게 짜증도 내지 않고 눈꼬리를 살짝 부드럽게 휘고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위로 올린 다정한 표정이었다.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봐요.”
“아니 그냥 스쳐 지나간 별 의미 없는 생각이라서.”
“아. 네. 그렇다면 말 안 해도 되고요.”
“제가 대표님한테 보고가 아니라 고민 상담을 했네요.”
혜원이 뒤늦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네. 보고가 아니라 하소연이긴 했죠.”
도명이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도명의 눈길이 혜원이 길게 하소연하는 동안 깨끗하게 비워진 커피잔에 머물렀다.
“혜원 씨가 너무 조바심만 안 내면 이번 기획은 나쁘지 않아요. 아 커피 리필 해 줄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할 말을 지나치게 충분히 한 것 같아서요.”
“본인 이야기만 하면 다입니까?”
“네? 아. 물론 아니죠. 대표님이 하실 조언이 있다면 당연히 들어야죠.”
“아, 일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요. 혜원 씨 감정 섞인 하소연 듣느라 날아간 제시간도 보상해 줘야죠. 아, 갑자기 이야기를 완전히 끝내기에는 궁금한데 아까 하다 만 이야기는 뭔데요? 별 의미 없다는 생각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중요한 이야기 할 거 아니니까 별 의미 없다는 이야기 좀 해 봐요.”
“아 대표님 화원 반응이 그렇게 반응이 좋았던 건 대표님 얼굴 영향도 컸을 거라고…… 정말 잠깐 지나간 생각이었어요!”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물론 칭찬이죠. 대표님 하실 말씀이란 게 뭔데요?”
“제가 물어볼 건 별건 아닙니다. 보통 사람이 어느 정도의 정신적 충격을 받아야 쓰러집니까?”
“네? 갑자기 그렇게 앞뒤 맥락 없이 물어보시면…….”
“그러니까 사람이 갑자기 심장 통증 때문에 쓰러졌어요. 눈앞이 흐려지더니 일어나 보니 다음 날 아침인 겁니다.”
“그거 설마 대표님 이야기는 아니죠? 어서 아니라고 말해요.”
“제 이야기라면 많이 심각한 겁니까?”
쓰러진 당사자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혜원은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떴다.
“대표님 쓰러졌어요?!”
“목소리 낮춰요. 오늘 사람이 참 감정적이네요.”
“지금 큰 소리 안 나오게 생겼어요?! 네, 네 알았어요. 진정할게요. 당장 병원 가셔야죠.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는 게 어디 보통 일이에요?”
“병원은 이미 다녀왔습니다. 온갖 장비로 몸 이곳저곳을 헤집었다니까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네요. 이야기가 많이 돌아가네요.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인 이유로 갑자기 쓰러지려면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아야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이뤄왔던 모든 것을 갑자기 한꺼번에 잃었거나 할 때 아닐까요? 아니 저한테 물어볼 게 아니라 대표님이 쓰러지기 전에 뭐 하고 있었냐가 더 중요한 거 아니에요? 그때 뭐하고 계셨는데요?”
“영화 보고 있었죠.”
“엄청 무서운 공포영화라도 혼자 보고 있었어요? 최근 갑자기 일절 안 보시던 공포영화를 보시더니.”
도명은 혜원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얼핏 생각하기에도 사람이 어떻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상상한 것만으로 정신적 고통에 쓰러질 수 있는 건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얼핏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혜원에게 설명하자니 도명은 갑자기 골치가 아파 왔다.
“네. 그런 걸 보고 있었죠.”
“그런 거 정말 못 보시는구나. 인상은 무서운 애들 앞에서도 이러쿵저러쿵 따지실 것 같이 생기셔가지고서. 무서운 영화라고 해도 쓰러지기까지 하신 건 역시, 대표님 상태가 걱정스러운데요.”
“다른 사람한테는 소문내지 말아 주세요. 겁쟁이라고 놀림당합니다.”
“네 비밀로 해 드릴게요.”
그렇게 혜원이 나가고 난 후, 도명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정말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나, 생각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심어진 정신의 이상한 스위치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강한 거부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어릴 때의 기억이 그의 온몸을 엄습했다. 기분 나쁜 감각에 도명은 몸서리를 쳤다.
도명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와 정신과에 내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도명의 어머니는 잊을 만하면 그의 손을 끌고 정신병원에 끌고 갔다.
정신과 상담실 문을 하나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도명이 있었다. 어머니는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 중이었고 도명은 상담실 밖 복도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도명에게 병원 홀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두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정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 거라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 없었다.
강화 도어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정신과 의사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음 때문에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신경 쓰였다.
웅얼거리는 그 소리가 송곳이 되어 도명의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잘 들리지 않는 말소리는 상상력이라는 옷을 입고 더욱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한 번의 내원 후 주기적인 내원이 없었던 걸로 보아 정신과 의사는 어머니의 마음속 불안의 모양에 맞는 대답을 해 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정신과 의사의 말을 완벽하게 믿지도 않는지 2~3년 주기로 도명과 정신과를 다녔다. 어린 도명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가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도명은 자신 스스로 정신과에 갈 마음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도명은 고민 끝에 그 날의 쓰러짐을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기로 했다.
일단 그가 전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종이 서류는 그럴듯한 양식에 이성적으로 보이는 수치들로 가득 찼으니 믿기에 마음이 편했다. 물론 이것이 지금 당장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 위한 임시방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도명은 불쾌한 기억을 더듬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지나고 도명은 내심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했음을 알았다. 백구 그림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물건이 배송 완료됐다는 메시지였다. 도명은 택배 도착 알림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이내 조그만 불안감에 휩싸였다. 전에 자신의 택배를 몰래 뜯어 본 전적이 있는 도화가 자신이 화원에 없는 틈을 타 택배를 또 뜯어 볼까 봐 불안했다.
굳이 도화에게 비밀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것들을 도화가 보는 것이 창피했다. 도명은 일단 지나치게 귀여운 이 물건들이 돔인 자신의 이미지와 안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명은 택배 소식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안도를 했다. 도명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택배가 도명이 지금 있는 회사에 온 모양이었다. 도명은 분명 배송장소로 화원 주소를 불렀었다.
하지만 물건 제작을 도명이 자주 거래하는 협력 업체에다가 맡겼는데 업체의 직원이 습관적으로 항상 물건을 보내던 도명의 출판사로 보낸 모양이었다.
도명은 대표실에서 나와서 자신의 개인 택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나섰을 때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백구 그림이 그려진 물건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도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남의 택배를 왜 뜯어 보고 있습니까?”
집에 있는 도화를 피했더니 이번에는 직원들이 자신의 택배를 파헤치고 있는 현실에 도명이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웃고 있었다.
“아, 이거 대표님 택배였어요?!”
“죄송해요. 저흰 오늘 오기로 한 기념품 샘플들인 줄 알고요. 어쩐지 내용물이 이상하더라. 너는 왜 운송장도 확인 안 하고 가져왔어!”
그의 질타에 직급 낮은 직원의 표정이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바쁘다고 택배 온 거 빨리 뜯어서 확인하라고 재촉해서 가져와서 일단 뜯어 본 건데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만 돌아가는 것 같아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이 자꾸 구겨지는 미간을 애써 피며 사람들 손에 하나둘 들려 있는 백구들을 뺏었다. 도명은 사람들의 손에서 백구를 구출하는 와중에도 물건이 잘 나왔는지 매의 눈으로 쳐다봤다.
나중에 자세히 체크해 봐야겠지만 전체적으로 대충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백구 쿠션, 백구 포스터, 백구 텀블러. 백구 에스프레소 잔. 백구 자수 셔츠, 종류도 이것저것 많았다.
“아 그런데 이게 다 뭐예요?”
직원의 질문에 물건을 빠르게 스캔하며 정리하던 도명의 등이 빳빳하게 굳었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도명에게 달라붙었다.
“뭐긴요. 주문 제작해 봤습니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제 것도 주문해 주시면 안 돼요? 저 강아지 엄청 좋아하거든요.”
“너무 귀엽네요.”
묵직한 인상의 남자가 백구 쿠션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이 애써 웃으며 남의 남자 품 안에 있는 백구를 다시 상자에 담았다. 도명은 자신의 백구가 다른 사람들의 손때를 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명은 점점 표정관리가 힘들어졌다.
“제가 그림 파일을 분실해서 또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네? 말도 안 돼요. 대표님같이 철저한 분이 파일을 분실할 리가 없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실수를 안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 우리 협력 업체인데, 파일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요? 전화해 보세요. 대표님. 제가 할까요?”
“아니요. 자기 문제는 자기가 처리해야죠.”
도명은 대표실로 돌아가서 협력 업체 하드에서 자신이 전송한 백구 파일을 지우라고 전화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표님, 귀여운 구석이 있으셨네요. 언제나 쿨하고 무게감 있는 스타일만 하고 다녀서 이런 귀여운 아이템 좋아하시는지 상상도 못 했어요.”
부드럽지만 언제나 카리스마 있던 자신들의 대표님을 쳐다보는 직원들의 볼이 하나같이 봉긋해졌다. 유 대표의 귀엽고 은밀한 취미 생활을 발견한 것 같아 직원들은 묘하게 다들 기분이 좋았다. 그런 직원들의 시선에 도명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그때 도명의 개인적인 택배와 헷갈리게 했던 문제의 택배가 도착했다. 도명은 어서 자신의 백구 아이템들을 들고 자신만의 사무실로 사라지고 싶었으나 직원이 도명을 불렀다.
“저, 대표님, 마침 오셨을 때 이번 잡지사 7주년 기념 사은품 체크하고 가세요. 대표님 이런 거에 안목 좋으시잖아요. 아무리 무료로 주는 사은품이라도 우리 잡지 이미지가 있는데 어설픈 것을 주면 안 되죠.”
도명은 사람들이 또 자신의 백구 상자를 건드릴까 봐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7주년 기념 사은품을 체크하기로 했다.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보랏빛이 연상되는 향기가 사무실 전체에 퍼졌다.
라벤더 티백이 상자 안에 가득 채워 있었다.
“대표님 허브차에 조예가 깊으시잖아요.”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허브차를 우려냈다. 도명이 멍한 표정으로 홀리듯 직원들이 건네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잔을 입술 가까이에 대자 라벤더 향이 도명의 콧속을 통해 뇌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하얀 잔에 보라색 투명한 물이 우러나왔다. 도명이 잔을 쥐고 라벤더 차를 마시자 혀를 통해 세포 깊숙이 라벤더가 스며들었다.
어떤 기억이 순식간에 도명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거실의 하얀 벽.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붉은 노을의 색깔. 조용한 집 안에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
어머니가 우려낸 라벤더 차의 향. 자꾸 떠오르는 라벤더 티백을 누르던 은색 티스푼. 그리고 이내 신경질적으로 변한 티스푼이 잔 아래를 긁는 소리.
‘도명아, 이리 앉아 보렴. 엄마랑 이야기하자.’
도명은 라벤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그 짧은 순간 아주 많은 것들이 기억나 버렸다. 라벤더 차는 아주 희귀한 차는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온갖 허브차를 즐겨 마시던 도명이 왜 이제야 라벤더 차 향기에 이 모든 기억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도명은 자신의 심장병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이 났다.
***
도화는 도명이 알려 준 케이크 가게에 도착했다. 외관은 초콜릿색이었고 그 안쪽 가게 풍경은 눈이 덮인 것처럼 온통 하얀색이었다. 벽도 바닥도 하얀색이었고 작은 조명조차도 하얀색이었다.
의자나 식기 작업대 정도만 중간 회색 톤이었다. 이 케이크 가게 안쪽에서 색이 존재한다면 오직 케이크뿐이었다.
평소에 이렇게 화사하고 꿈같은 공간은 여자들만의 공간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도화는 어색한 걸음으로 가게 안에 들어왔다.
도화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인지 가게 안에는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자가 있다면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과 함께였다.
물론 도화 외에도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남자도 몇몇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화는 괜히 자신의 수더분하고 까칠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손바닥이 고양이 혀에 핥아진 것처럼 까슬까슬했다.
이 가게는 도명의 단골집이라고 했다. 도화는 도명이 이런 공간에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것을 상상했다. 상상해 보니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도명은 자신만의 아우라가 세서 공간의 성격이나 스타일이 어떻든 그가 드나드는 공간이라면 그냥 그게 그에게 맞는 공간이 되었다. 언제나 기준은 그의 주변이 만드는 게 아니라 도명의 마음이 만드는 것 같았다.
도화는 그런 도명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도화는 순간 기분이 복잡해졌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성격에 반했으면서도 난공불락의 성 같은 면에 좌절감을 맛보았다.
도화의 손바닥이 차갑고 단단한 쇼 케이스 유리면에 착 달라붙었다.
도화가 멍한 눈으로 화려한 케이크들을 훑었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 있어요?”
깔끔한 인상의 여자직원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도화를 향해 다가왔다. 눈치 빠른 그녀는 도화의 표정에서 여기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도화는 직원의 적절한 관심이 내심 반가웠다.
“당근 케이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긴 건지 몰라서. 케이크 아래에 적힌 이름표를 아무리 봐도 낯선 이름들이라 금방 못 찾겠네요. 아무리 찾아도 당근 케이크라고 적힌 것은 없어 보이는데.”
도화가 잔뜩 민망해하면서도 당근 케이크를 찾기 위해 눈을 최대한 가늘게 떴다.
“여기에 당근 케이크는 없어요.”
“네?”
도화는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분명히 도명이 여기서 당근 케이크를 사 오라고 했는데 말이다.
“아, 품절 됐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원래 없는 메뉴입니다. 손님.”
“아. 분명 도명 씨가. 아 그러니까 아시려나 모르겠는데 일단은 여기 단골인데 분명 여기서 당근 케이크 사 갔다고. 아 없다면 괜찮습니다.”
도화는 그렇지 않아도 어색한 케이크 가게가 더욱 어색해졌다. 도화의 발이 이 지나치게 달콤한 공간에서 급히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도명 씨요? 여기 단골 맞는데요. 그 지나치게 잘생긴 손님이요.”
“네, 도명이라는 이름에 잘생겼다면 우리가 같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맞네요. 거기다가 완벽한 슈트를 입고 있다면 확실하죠.”
“네! 언제나 완벽한 옷차림!”
“네, 그 사람이 맞네요.”
도화가 맞장구를 치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직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의 눈빛을 본 순간 도화는 생각했다.
그녀가 도명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칠칠치 못하게 여기저기 페로몬을 질질 흘리고 다니고 있네. 그 인간. 자기는 아무에게도 주지도 못할 마음, 남의 마음은 왜 그렇게 홀리고 다니는 거야. 진짜 얄미워 죽겠네.’
“아 어쨌든 당근 케이크는 여기서 안 파는 거네요. 그럼 도명 씨가 저번에 사 갔다던 당근 케이크는요?”
“원래 메뉴에는 없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만들어 놓은 거예요. 퇴근 후의 저를 위한 저만의 케이크에요. 저번에 워낙 특별한 걸 찾으시기에 그냥 그걸 포장해 드렸죠. 여기 있는 건 그분이 다 드셔 본 거고 그중에서도 못 고르신 걸 보면, 이 진열대에 있는 걸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요.”
“오늘도 만들어 놓으셨어요?”
“그럼요. 제가 하루에 케이크를 얼마나 많이 만드는데요. 케이크 하나 정도는 저만을 위해서 만들고 싶다고요.”
그녀의 말에 도화는 난감해졌다. 도명에게서 새 정장을 얻으려면 이 당근 케이크 미션을 성공해야 하는데 예상외의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소심한 도화의 발걸음이 다시 밖을 향하려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 당근 케이크 구매 시도를 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아. 그렇구나. 저, 저는 음 도명 씨처럼 잘생기지는 않아서 그 케이크 못 주시겠죠……?”
도화는 말을 꺼내자마자 이미 그녀에게 거절을 당한 사람처럼 기가 잔뜩 죽어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아래로 축축 쳐졌다.
“네, 손님은 제 케이크를 내 줄 만큼 잘생기지는 않았네요.”
“역시 그렇죠.”
도화는 직설적인 그녀의 말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여기 다른 케이크가 이렇게나 많은데 다른 건 필요 없으세요?”
“네, 도명 씨가 그 당근 케이크가 꼭 먹고 싶다고 하네요.”
“도명 씨가 먹고 싶은 거라면 기다리세요. 포장해 줄게요.”
그녀가 케이크를 정성을 다해서 포장했다. 그러면서 도화에게 자연스럽게 도명에 대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다시 찾으시는 거 보면 그때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에 보내는 데 성공하셨나 보다.”
“네?”
“특별한 케이크 찾으시는데 표정이 완전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니까요.”
“도명 씨가 사랑에 빠져요? 그럴 리가 없어요.”
도화는 말 뒤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너무 그의 단골 가게 직원에게 그의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느낌이었다.
“본인은 표정 관리한다고 하시는데 왜, 사랑에 빠져서 놓칠까 봐 초조해하면서도 붕 뜬 표정이었다니까요. 도명 씨 입으로도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고요. 진짜 궁금하긴 하네요. 그렇게 잘생긴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 그 대단한 사람 말이에요.”
“도명 씨는 직업상 중요한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이런저런 손님 접대도 많고요. 언제나 손님 접대에 좋은 차와 달콤한 디저트는 필수로 내오는 편이죠.”
도화의 말에 그녀가 뭘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어댔다.
“제가 이 장사를 얼마나 많이 해 봤는데요. 케이크를 고르는 표정만 봐도 뭘 위한 케이크인지 한눈에 보인다고요.”
그녀가 포장을 끝낸 케이크를 도화에게 건네주었다. 케이크 가격은 그 가게 케이크의 평균 가격에 맞춰 줬다. 도화는 그녀가 부른 케이크에 만 원을 보태어 건넸다.
생각보다 어려웠던 당근 케이크 미션을 끝낸 도화의 무릎 위에 케이크 상자가 가지런히 올라가 있었다. 도화는 무릎 위의 케이크를 노려보았다. 도화는 괜히 이 케이크가 미웠다. 그녀가 한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도화는 울컥한 마음에 버스 안에서 케이크 상자를 열고 케이크 한 조각을 꺼내서 입안에 와구 집어넣었다. 다양한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맛이었다.
포슬포슬한 케이크 시트에서 달콤함과 고소함이 섞여 나왔다. 케이크가 달콤함으로 도화를 약 올리고 고소함으로 그를 위로하는 느낌이었다.
“거기 뒷좌석 손님! 여기서 케이크 꺼내 먹지 말아요. 며칠을 굶은 거야 뭐야.”
버스 기사가 도화를 향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
도명의 지하실에 도착한 도화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도명에게 당근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아직도 도화의 표정에 심술이 묻어 나와 있었다. 포장의 마감이 다소 거칠었다.
도명은 이 당근 케이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명이 피식 웃었다. 도명은 도화가 중간에 참지 못하고 케이크에 손을 댈 거라고 생각하며 도화에게 당근 케이크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다.
도명은 이렇게 예상한 대로 움직여 주는 도화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도명은 모른 척 케이크 상자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살짝 놀라는 척을 하며 도화를 향해 손짓했다.
도화가 눈을 질끈 감으며 도명에게 바짝 붙었다. 도명이 도화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집고 늘렸다.
“왜 케이크가 반밖에 없죠?”
“잘못한 건 홀린 쪽이 아니에요. 홀리게 만든 쪽이지.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만든 사람을 혼내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도명이 도화의 입술을 더욱 세게 늘리며 말했다.
“전 잘못한 게 없다고요. 전. 피해자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어차피 도명 씨는 살찐다고 언제나 음식을 다 먹지도 않잖아요. 이게 도명 씨 적정량이에요.”
“아 그래요? 케이크가 반쪽밖에 없으니 도화 씨 슈트도 반만 고쳐 줘도 뭐라 하지 말아요.”
“정말 그럴 겁니까?”
도화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계속 진심이라고 말하며 도화에게 장난을 쳤다. 도화는 초조해하며 혼자라도 새 슈트를 사야 하나를 고민했다.
도명이 구석에서 검색을 하는 도화를 발견하고 농담이라고 했지만 도화는 마음속에 불안이 조금 남아 있어 도명의 진심을 알기 위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도명이 도화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차갑고 얇은 줄자가 도화의 몸 이곳저곳을 감쌌다. 도명이 도화의 몸 치수를 재고 나면 종이에다가 꼼꼼하게 수치를 적었다.
“이 와중에 발기하지 말아요.”
도명이 도화의 허벅지를 감싼 줄자를 세게 조여 오며 말했다. 도화가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저 그런데 도명 씨, 우리 플레이 회수가 처음보다 뜸한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도명은 자신은 모르겠다는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도명은 도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최근에 몸무게를 재 보니까 저 살쪘더라고요.”
“네, 조금 찌긴 했네요.”
“도명 씨 탓이에요.”
“책임지라는 뜻입니까?”
“책임까진 질 필요는 없지만 미워하지 말아요. 제가 전보다 살찐 건 도명 씨 탓이니까.”
“네? 제가 도화 씨를 왜 미워합니까?”
“요즘엔 안 예뻐하잖아요.”
“예뻐해 주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그걸 하는 것도, 예뻐해 준다고 표현하던데요. 그. 플레이하는 거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플레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도화가 예뻐 보인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도명이 돔으로서 카리스마를 잃었다고 실망을 할까, 아니면, 처음 SM을 배울 때 졸랐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아 준다고 기뻐할까. 도명은 도화의 마음이 지금은 어디쯤 와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 든 적 없어요? 계절이 바뀌는 건 하루하루 미묘한 변화로 이루어지지만 어쨌든 우리는 계절이 바뀌는 걸 언제나 느끼잖아요. 마음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많아요. 그리고 전 나아가 다른 생각도 했어요.”
“무슨 생각이요?”
“지구상 어느 곳이든 우리나라처럼 4계절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은 우리나라도 4계절이 아니라 계절이 두 개인 것 같지만. 어쨌든. 어떤 사람은 마음에 다른 계절이 없기도 해서 계절 바뀌는 걸 사색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해 봤어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다른 계절이 있어요.”
“그래요?”
도화가 도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반문했다. 도명을 쳐다보는 도화의 표정은 나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네. 그래요.”
“그 사람 마음에도 계절이 있다고 못 느끼는 건 제가 둔해서인 건가요?”
“글쎄요. 사람의 마음속 1년이라는 주기는 모두가 비슷하지 않아서인 것일 수도 있지요. 어떤 사람은 1년이 365일이 아니라 3650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 변화의 시점을 같이 겪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아. 이 사람은 마음에 계절이 없구나, 하고.”
***
도화가 도명이 맞춰 준 슈트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영의 결혼식에 갈 준비를 했다.
도명의 말처럼 도화의 낡고 촌스러운 슈트는 그의 몸에 맞게 고쳐 준 것만으로도 세련된 고급 슈트처럼 보였다.
도화가 입고 다니던 슈트의 원단과 색은 좋았는데 도화의 몸을 고려하지 않아서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도명은 가게 앞에서 그런 도화의 옷매무새를 마지막까지 고쳐 주었다.
“저 오늘 어때요?”
“뭐, 봐 줄 만하네요.”
도명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저 도명 씨 같아요?”
“네?”
“도명 씨처럼 멋지냐고요.”
“저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지만 반은 따라왔을지도.”
“반이면 대충 잘생겨 보이겠네요.”
“제가 그 정도입니까?”
“네. 그 정도입니다.”
도화가 오늘따라 유독 근사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계속 얄밉게 구는 도명의 외모를 칭찬했다. 덕분에 도명의 기분도 좋아졌다.
도명은 도화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네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라지는 도화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도명의 표정은 어쩐 일인지 쓸쓸해 보였다. 도명이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네, 어머니, 약속 시각은 안 잊으셨죠? 거기 허브차 정말 맛있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나와 주세요.”
도명은 전화를 끊고 차 키를 집어 들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도명의 손끝이 떨렸다. 도명은 핸들에 한참을 머리를 박고 나서야 목적지로 향했다. 도명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경직되어 있었다.
***
서윤은 최근 바빴다. 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프리랜서라서 조금 과하게 일을 잡은 탓에 최근 개인 시간이 거의 없었다. 서윤은 오늘 하루 시간이 비자 미뤄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서윤이 도화의 사진을 정리하고 인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서윤은 도화의 표정들을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그러다 서윤은 한 사진 앞에서 고민을 했다. 도명의 가게 앞에서 찍은 거라 가게 안에 있던 도명의 얼굴이 저 멀리 찍혀 있었다.
“아 이 사진 정말 잘 나왔는데, 크게 현상하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런데 여기 왜 먼지가 껴 있는 거야.”
서윤이 도명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서윤은 도명을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지울까를 생각하며 화면 크기를 키웠다. 사진을 확대해 보니 도명의 시선이 도화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도화를 쳐다보는 도명의 표정을 보며 서윤은 그대로 굳어졌다.
“사랑에 빠진 거네. 이 인간. 아오 씨발!!”
서윤은 도명이 소유욕을 드러내던 순간들을 많이 봐왔다. 하지만 이번엔 단순 소유욕이 아니었음을 사진 속 도명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마음 하나 모르고 소개팅 자리를 만드나. 나 지금 두 바보 사이에 낀 거냐고!”
***
도명은 어머니와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푸른 호수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도명은 잘 관리된 손가락 표면을 긁으며 멍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암청색 강가의 물결이 잠잠해 보였다. 이 카페는 제공되는 차의 높은 품질과 보기 좋은 경치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었다. 위치가 외진 곳에 있는 탓이 컸다. 그래서 그런지 테이블은 적당히 차 있었다.
도명은 어머니가 마실 차를 미리 시켰다. 도명은 잘 말린 라벤더가 담긴 티백을 괜히 휘저어 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하게 우려 나오는 보라색 물을 도명이 응시했다. 그 보랏빛 물을 응시하니 침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마시면 가장 맛있을 때인데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았다. 도명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초조해진 도명의 시선이 카페 문에 고정되었다. 도명이 인내심의 한계가 왔을 때 도명의 어머니가 등장했다. 그제야 도명이 살포시 웃었다.
도명이 어머니를 향해 손짓했다. 어머니는 도명을 발견하자 웃어 보였다. 뭔가 미묘한 웃음이었다. 도명을 향해 웃고는 있지만 입꼬리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어색함과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도명은 어머니의 웃음에서 그 모든 것을 읽었지만 표정관리에는 본인이 더 일가견이 있다는 듯이 완벽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맞았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내고말고.”
그녀가 도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성스럽고 우아함이 몸에 밴 그녀가 잘 정리된 옆머리를 괜히 귀 옆으로 쓸어 넘겼다.
다 자란 아들과 오래간만에 단둘이 가지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인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화젯거리를 찾는 그녀의 시선에 도명이 이미 시킨 두 잔의 허브차가 보였다.
“미리 시켰어요.”
“그렇구나.”
“요즘도 이 차 자주 드세요?”
“가끔.”
“제가 어머니와 거리를 둔 후부터 줄어든 거예요?”
“어?”
“어머니가 이 차를 갑자기 마시기 시작한 게 아마 제 일기장 발견했을 때부터인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도명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녀의 습관이 생긴 시기를 짚어내자 그녀의 표정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라벤더 차 효능이 지친 마음을 달래 주는 데 좋잖아요.”
도명이 아무 의미 없이 차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상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니?”
“그냥, 사는 이야기 하려고 나온 거죠. 보통 모자들이 하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아들은 무심하고 어머니 쪽이 다 자란 자식들이 사느라 바빠서 안 만나 준다고 불만이던데. 우리는 오히려 어머니 쪽이 바쁜 것 같아요.”
“정년 퇴임 앞두고 있는 사람이 뭐가 바쁘겠니. 앞으로 자주 대화하면 되는 거지. 나도 내심 네 전화 받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다행이요?”
“연락을 자주 안 했지만 언제나 마음 쓰고 있었단다. 하지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그게 괜히 어렵더구나. 그런데 언제나 네가 먼저 용기를 내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단다. 이건 진심이야.”
“저 아버지하고는 단 한 번도 직접 안 부딪친 건 알고 계시죠?”
“그렇지.”
대답을 하는 그녀의 표정이 떨떠름해 보였다.
“어머니는 살면서 저를 많이 괴롭혔어요.”
“내가?”
“왜요? 꼭 때리고 소리쳐야 사람에게 상처 입히는 줄 아세요? 그래도 아버지보단 어머니가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저를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심 안심하고 있겠죠. 그 고상한 세계가 안전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저 어머니한테 이 모든 일을 떠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편리했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전 내심 어머니한테 괴롭힘당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한 건 제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기보다는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해서 나간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심 어머니한테 괴롭힘당하는 거 좋아했다니까요. 제 섭이 들으면 황당해할 소리겠네요. 아 아세요? 섭이니 돔이니. 저도 모르게 너무 이쪽 세계 용어를 써댔나.”
“알아. 무슨 말인지.”
그녀의 말에 도명은 내심 놀라워했다. 역시 그녀는 도명과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도명의 세상에 대해서 언제나 신경을 쓰고 살았던 것이다.
“그건 안 할 수는 없는 거야? 안 그러면 견딜 수 없는 거니?”
“흠, 글쎄요. 적어도 어머니 기분을 위해서 그만둘 수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네 대답이 조금은 덜 완강해졌구나.”
“아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물론 남자죠.”
“그러니?”
“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어머니가 보면 정말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천성이 너무 순하고 착한 사람인데 은근히 사고는 또 얼마나 치는지. 그런데 그 사고 칠 때마다 이제는 화가 난다기보다 귀엽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어쨌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안전한 사람이에요.”
“그렇구나. 그 사람은 널 어떻게 생각하니?”
“거만한 말이겠지만 유혹한다면 넘어오겠죠. 넘어오고 나서는 제가 그렇게 안정적인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겠지만, 도화 씨는 마음 약하고 착하니까. 제 불안정마저도 이해해 줄 겁니다. 그게 사랑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정심에라도 저를 떠나지는 못할 겁니다. 저는 그런 그의 성향을 이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거고요. 이미 마음을 줘 버렸으니까, 제가 그를 유혹할 능력이 된다면 제 손으로는 절대 못 놓겠죠. 전 언제나 집착이 심했잖아요. 작은 물건 하나에도 집착하는데 하물며 첫사랑은 어떻겠어요.”
“도명아.”
“걱정 마세요. 지금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우려와는 다른 문제가 더 크니까요. 어머니 그날 기억하세요?”
도명이 본격적으로 어머니와 나누고 싶었던 화제로 진입했다. 화제를 돌리는 그의 손가락이 끝이 찻잔을 꾹 눌렀다. 도명은 손가락을 너무 오랫동안 찻잔 표면에 대고 있는 탓에 손가락 끝에 경미한 화상이 입는 줄도 몰랐다.
“무슨 날?”
“그날도 어머니는 식탁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저에게 한 말이 있어요. 너는 네가 앞으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모든 것을 망칠 거라고 하셨죠.”
“……내가?”
그녀는 도명이 한 말을 전혀 기억 못 하는 것 같았다. 도명이 예상 못 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될 말을 한 사람이 기억 못 하는 건 은근히 흔한 일이니까.
“기억 안 나세요?”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런 말을 했겠니.”
“제가 중2 때였나. 거실의 하얀 벽은 노을로 인해 빛바랜 색이었죠. 그날 하늘이 유난히 오렌지 색이었어요. 어머니와 저, 단둘이 남은 집 안은 너무 조용해서 시계 초침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부쩍 자주 마시게 된 라벤더 차를 우렸죠.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어머니는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저를 식탁에 앉혔죠. 어머니는 자꾸 수면 위로 떠오르려는 라벤더 티백을 은색 티스푼으로 누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티백은 자꾸 수면 위로 떠올랐죠.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어머니는 티스푼으로 찻잔 아래를 끼긱 소리 나게 긁었어요.”
도명이 티스푼을 쥐고 잔 밑을 긁어댔다. 그 날카롭고 이질적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은근히 도명과 그의 어머니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가 히스테릭한 도명의 손을 잡았다.
“너 뭐하는 거니? 지금 나하고 뭐하자는 거야.”
그녀가 주변의 시선을 신경을 쓰며 말했다. 티스푼을 쥐고 있는 도명의 호흡이 조금 거칠었다.
“그를 사랑하고 싶은데 어머니가 한 말이 자꾸 생각나서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이렇게 절박한데 어머니는 그날이 기억 안 나세요?”
도명이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가면이 떨어져 나갔다.
“흘러가는 말이었을 거야. 네가 이렇게 예민한 게 사람 얼마나 피 말리게 하는 줄 아니?!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수많은 날 중에 하나였을 그날의 색. 소리, 상황을 그렇게 자세히 나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내가 기억 안 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녀의 호흡 또한 도명의 호흡처럼 빨라졌다.
“최근 쓰러졌어요. 심장이 너무 아파서 쓰러지고 나니 다음 날 아침이더군요.”
“세상에! 도명아 너 괜찮니?”
그녀는 도명의 말에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아들이 쓰러졌다는 말에 그녀의 우아한 손끝이 난잡하게 떨렸다.
“내원 결과 신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니까 정신적인 문제겠죠. 어머니가 흘러가는 소리로 한 말에 저는 쓰러졌는데 어머니는 기억도 안 나세요?”
도명의 날 선 힐난에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그녀의 콧속에 라벤더 향기가 깊숙이 배어 들어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저 수면 아래에 있는 기억의 쓰레기장 속에서 나뒹굴고 있던 기억 일부가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 잠깐 기억나는 것 같구나. 그래. 이런 의미였어.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사람들 마음을 이용하는 데 익숙해진다면 진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 그를 상처 입힐 거라는 의미였어. 너는 네가 앞으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모든 것을 망칠 거라는 건 그런 의미였어. 그러니까 조언 같은 거였어. 나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였지. 네가 사람들을 대하는 건 확실히 이상하고 소름 돋는 면이 있었으니까. 너는 지금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잖니! 엄마가 네가 얼마나 걱정됐겠어! 앞으로 안 그러면 돼! 도명아.”
도명은 이 와중에도 사과 대신 그에 대한 은근한 비난과 훈수를 두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걱정돼서 한 말이었다고요? 정말 그게 전부였나요? 전 그날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의 어머니 얼굴 근육들을 다 기억하는데요.”
도명은 그 저주의 말을 하면서 지었던 어머니의 표정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도명을 향한 순수한 적의가 눈 안에 담겨 있었다. 그 당시에 그녀는 도명의 일로 오랜 신경 쇠약에 시달려 있었고 아무리 자식이라도 순간 자신의 아들이 미웠다.
그날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도명의 존재가 싫었고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도명이 짓고 있던 가식적인 표정이 그런 마음을 더욱 자극시켰다.
그리고 자신에게조차 가면을 쓰고 있는 아들이 소름 돋았다. 도명에 대한 미움과 적의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 순간 그녀는 도명에게 저주를 걸고 있었다.
“네, 그래요. 어머니 말이 옳았죠.”
“그래. 이제부터라도, 도명아.”
“도도를 만났고 제가 도도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준 후 제가 도도를 죽였잖아요. 어머니 말이 옳았어요.”
도명의 말을 끝으로 그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도명아. 그건 우연이야. 사건의 순서가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이야. 너는 언제나 이성적인 아이잖니. 이건 너다운 사고방식이 아니야.”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산책 중 도도가 목줄에 조이는 것이 싫었을 뿐이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도도가 목줄로 답답해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줄을 느슨하게 붙잡고 있었을 뿐이에요.”
도명의 뺨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랬구나. 도명아, 다시 말하지만 네가 지금 생각하는 건 이성적인 생각이 아냐.”
“네. 알고 있습니다. 이성적인 논리 도출은 아니죠.”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어머니, 사람의 마음에는 이성이 없어요. 논리나 이성으로 스위치가 작동하지 않죠. 마음이란 건 그래요. 저도 그 점이 싫고 경멸스러운데 그렇다고요.”
도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명은 카페 건물 뒤쪽에 주차해 놓은 차 안에 앉았다. 도저히 지금 심리 상태에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근사하고 완벽한 정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흘렀다.
이렇게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머니의 말처럼 자신이 극도로 예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마음의 연약함이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도명이 차 안에서 눈물을 펑펑 쏟고 있을 때 문자가 하나 왔다.
[엄마가 미안해.]
도명은 그 짧은 문자 하나에 마음에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어서 묻고 싶었다.
‘어머니가 정확히 뭘 잘못했는데요? 그걸 정말 알고 하는 사과예요?’
***
도화는 진영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렀다. 도화는 노래를 꽤 잘 부르는 편이었다. 보통은 노래 꽤나 부른다는 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기교를 섞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수더분해 보이는 외모처럼 기교를 섞지 않았다. 음정과 박자는 정확히 맞추면서 너무 경직되지 않게 하고 싶은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듯이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도화의 손동작이 수줍은 마음에 뻣뻣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을 보면 그가 노래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화의 시선이 오랫동안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진영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의 친구가 앞으로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꿈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도화는 달콤한 노래 가사에 취해 그 역시 노래 부르는 동안만이라도 아무 장벽 없이 사랑을 하는 것을 상상했다. 도화의 노랫소리는 나른하면서 묘하게 달콤했다.
진영이 결혼식의 모든 장면을 캠코더로 찍고 있는 친구에게 도화를 좀 더 제대로 찍어달라고 손짓했다.
결혼식의 모든 식순이 끝나고 진영은 여기저기에서 하루 종일 바빴다. 도화는 진영에게 인사하려다 말았다. 오늘만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마저 진영의 정신을 쏙 빼놓고 싶지 않았다. 도화의 손 위에 식권이 들려 있었다.
도화는 난감한 표정으로 식권을 쳐다보았다. 잠시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가 이성애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지고 도명과 함께 진영의 결혼식에 오는 것을 상상했다.
상상은 더욱 달콤해져 도화와 도명은 연인 사이였다. 세속적인 생각이지만 도명처럼 잘난 남자를 애인이라고 데리고 다니는 건 꽤나 어깨가 으쓱해질 일이었다.
모두가 저런 남자를 독점하게 된 도화의 숨겨진 매력이나 능력에 대해서 은연중에 떠들 것이다.
상상은 한계가 없는 법이니 동성결혼이 합법화가 되어서 사람들이 저마다 도명과 도화를 번갈아 보며 다음엔 너희들이 결혼할 차례라고 은근한 압박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차를 타고 가면서 사람들이 준 은근한 압박에 갑자기 묘한 공기를 풍기며 서로를 흘긋 쳐다본다. 서로의 마음을 재가면서 말이다.
도화는 고작 흔한 결혼식장 식권 한 장으로 참 많은 상상을 했다. 그리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가질 수 있는 현실을 상상하는데 도화는 이 지구의 또 다른 평행 세계를 여는 문이라도 열어야 할 판이었다.
도화가 서 있는 땅에서 동성애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리가 없고 동성결혼이 합법화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동성결혼을 합법화시키면 이 땅에 지옥문이라도 열리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결혼식에 혼자 온 사람은 많이 없었다. 도화는 혼밥 내공이 꽤 있는 사람이었지만 결혼식 뷔페에서 혼밥할 정도의 내공은 없는 모양이었다. 도화가 좋은 장소에 차고 가려고 10년 전에 사 놓은 비싼 시계를 쳐다보았다.
유행이 지나서 그 당시에는 그가 큰마음 먹고 산 시계는 그저 그런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유행을 안 탈 정도로 제대로 비싼 물건도 아니어서 어중간했다.
내심, 도명에게 시계를 빌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 주니 그런대로 됐다고 생각했다.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좋은 날이니 대충 식사를 할 수는 없으니 밖에서 외식을 할 생각이었다.
도화는 장소를 옮기기 전에 예식장 화장실에 들렀다. 도화가 소변을 보고 비누로 뽀득뽀득 손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너무 노골적인 나머지 도화도 그 남자를 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맞지? 이도화.”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남자를 향해 도화가 일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상대방은 자신을 아는 것 같은데 도화는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도화의 뇌가 일단 반가운 척하는 표정이라도 지으라고 닦달하고 있었다.
“아, 강성우…….”
그의 이름을 말하는 도화의 얼굴이 표정관리를 할 여유가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와. 새끼. 얼굴은 그대로인데 하고 다니는 건 엄청 변했네. 아까 축가 부를 때부터 맞나 안 맞나 했는데. 이렇게 잘 꾸미고 다니지는 않았잖아. 언제나 교복 아니면 운동복, 편한 티셔츠 정도였지.”
성우가 도화를 위아래로 내려다보며 묘하게 깐죽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너도…… 많이 변했네.”
첫사랑 성우를 쳐다보는 도화의 표정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에게 고백했던 건 그의 인생의 방향성을 크게 바꿀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그 당사자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만나고 보니 너무 별거 없는 것이었다.
남자는 첫사랑을 영원히 아련하게 생각한다고 하던데, 나이가 들어서 관리가 안 된 그를 보자 뒤바뀐 그의 인생에 대한 억울함마저 들었다. 도화는 자신이 이렇게 세속적인 기분을 가지게 된 건 다 잘난 도명 탓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진영이 결혼식에 온 거야? 진영이하고 별로 친한 적 없었잖아.”
그에게 질문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와 예상치 못하게 진영의 결혼식에서 만난 건 결코 도화에게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다. 진영이가 그와 접전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 결혼식에 오지 않거나 돈 봉투만 건네주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 짧은 순간 도화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들었다. 도화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진영이와 그가 계속 교류하고 있었다면 성우가 진영이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을까? 도화의 뒷목이 빳빳해지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딱히 친한 건 아닌데, 진영이가 우리 고등학교 동문회장이잖아. 내가 축구부 대표로 왔지. 내가 주장이었으니까.”
‘중간에 전학 간 얘가 어떻게 동문회장까지 꽤 찼냐. 아오! 이 마당발.’
“그나저나 제수씨 미인이더라.”
“수정 씨 미인이지.”
도화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날의 고백이 사실은 별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기라도 한 것일까?
“아, 나, 오늘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만나서, 음…….”
도화는 차마 ‘만나서 반가웠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너 진영이 보고는 발기 안 했냐?”
성우가 질 낮은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도화는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왜? 친구한테 그런 상상 하는 게 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도화가 성우를 향해 정색했다.
“아, 고쳤어?”
도화는 성우의 말을 어디서부터 고쳐 줘야 할지 몰라 머릿속은 하얗고 입술은 부르르 떨렸다.
“말해 봐. 축가 부르는데 표정이 아련하던데 눈물의 축가야? 뭐야?”
“그런 거 아니야.”
“진영이처럼 자라다 만 것처럼 작은 애도 그런 미인하고 결혼하는데 너는 야, 허우대가 이렇게 멀쩡하잖아. 너 은근 여자들한테 인기 좋다. 일단 키 크고 몸 좋으면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고. 한 번에 사로잡진 못해도 조금만 정성 들여도 넘어오는 사람 많을걸. 아깝지 않아? 학교 다닐 때도 너 짝사랑 하는 여자애들 은근 많았어. 네가 눈치 없이 헤헤거리고 돌아다녀서 그렇지.”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뭐가 이상한 소리야? 내가 그래도 한때 네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이런 조언도 해 주는 거야. 정신과 한 번 가 보지그래? 이왕이면 여자하고 어울리는 게 네 인생도 사람 사는 것 같지.”
“내 인생이 뭐 어떤데?”
“너 같은 변태가 어디 흔해? 결혼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연애는 해 봤냐?”
“해 봤어.”
도화는 도명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거짓말하는 것에 서툴렀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개인적인 일로 말을 아예 안 섞으려 했던 것이다.
한때는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성우가 도화의 서툰 거짓말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거짓말. 너 거짓말 하면 티 나는 거 여전하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도 제대로 못 해 보는데 무슨 제대로 사는 거야. 남들 다 해 보는 것도 못 해 보면서.”
“이성애자들도 이 나이 때까지 제대로 연애 못 해 본 사람 많아. 이상한 일반화 시키지 마.”
“당당한 척하지 마. 너도 네 성향이 부끄러우니까 나한테 고백하자마자 그렇게 도망갔지.”
성우는 도화의 성향을 비난할 때는 말을 제대로 내뱉다가 도화가 자신에게 고백한 사실은 도화를 끌어당겨 귓속말로 속삭였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의 세계에서는 도화에게 고백받은 일이 큰 치욕인 모양이었다. 성우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도화에게서 떨어졌다. 성우가 도화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너 자신을 그만 속이고 이제라도 정신과 한번 들러 봐.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예쁜 사랑 해 보고.”
도화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도화의 주먹이 성우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성우가 화장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
서윤은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서윤은 겉으로는 지인들과 즐겁게 술은 마시고 있었지만 속마음 깊숙한 곳까지 즐겁지는 않았다. 도명과 도화가 서로 같은 마음인 이상 그가 낄 자리는 없었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실연하고 어이가 없었다.
서윤의 마음속에는 도명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혀 있었다. 도명은 평소에 자신은 사람들의 마음은 다 빤하다며 온갖 잘난 척을 해대더니 정작 자기 마음을 모르다니.
서윤은 지금까지 도명과 알고 지내면서 내심 도명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겪어 봐야 그의 마음속 풍경이 더 풍요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자연스러운 사람의 마음속이 아닌가 하면서.
하지만 그 상대가 하필이면 도화고 그런 도화와 서윤을 도명이 만나게 했다는 게 문제였다. 그것도 처음부터 진지한 연애 가능성이 있는 상대로서.
도명은 당연히 밉고 바보 같은 도화도 미울 만도 한데 도화는 이상하게 조금도 밉지 않았다. 그가 눈치 없어서 그를 괴롭히는 건 조금도 밉지 않았다.
서윤이 술잔을 벌컥벌컥 비웠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과 마주치자 웃어 보였다.
‘아, 웃음이 쓰다!’
서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도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윤이 시계를 보았다. 저녁 9시경이었다.
“네. 도화 씨. 어쩐 일이에요?”
서윤이 지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화와 통화를 하기 위해 잠시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저, 서윤 씨…….”
도화가 망설임과 머쓱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말 너무, 너무 죄송하데요.”
“보증 서달라는 것만 아니면 다 되니까 말해 봐요.”
“저랑 그냥 통화만 해 주면 안 되나요? 너무 외롭고 무서운데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요. 정말 인생 잘못 살았나 봐요.”
“왜 안 되겠어요. 그리고 지금 전화할 사람이 여기 있는데 인생을 뭐가 잘못 살아요. 전화 받고 있는 사람이 다 섭섭해지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서.”
“그런 거에 알고 지낸 기간이 뭐가 중요해요. 전 도명 형이랑 거의 10년간 알고 지낸 사인데도 도화 씨가 더 친근감 들어요. 이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그렇게 말해 주셔서 죄송하고 또, 고마워요.”
도화는 오늘 첫사랑을 만나고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말했다. 서윤은 도화보다 더욱 격하게 화를 냈다. 서윤은 오늘 도화가 겪은 일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화가 났다.
“제가요! 너무 화가 나서요. 그러면 정말 안 되는데! 한 대 쳤어요. 제가 사람을 때렸다고요. 서윤 씨.”
“그런 사람은 맞아도 돼요! 왜 겨우 한 대 쳤어요. 그런 건 한 대가 아니라 연사 날려야 해요. 주먹이 벌새 날갯짓처럼 보일 정도로.”
“저는 사람을 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너무 힘이 세서. 아무리 화나도 말로 해야 하는데.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제대로 반박도 못 해서 저도 모르게 나간 게 주먹이었어요.”
“그게 무슨, 내 안의 힘이 너무도 강해서 나도 두려워, 같은 소리예요.”
서윤이 아직 도화에게 안 맞아 봐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서윤 씨, 진짜 도명 씨보다 제 편이에요?”
“그럼요! 그럼요! 그럼요!”
“저도 왜 제 마음의 지도가 그쪽을 가리키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와중에 도명 씨가 너무 원망스러워요. 그 자식이 너는 동성애자라서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 봤을 거라고 하는데 별안간 도명 씨가 생각나는 거예요. 도명 씨가 생각나고 사랑도 못 하는 그 남자가 너무 미워요. 도명 씨가 저에게 너무 잘해 주니까 만만한 사람한테 제가 화풀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화의 말에 서윤은 전화기를 귀에서 뗀 후 낮게 탄식했다. 서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도화 씨, 형한테 왜 전화를 안 했어요? 그 인간, 복수 은밀하고 위대하게 잘하는데.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적어도 도화 씨 나쁜 일 있을 때 전화할 정도의 유대감은 있는 거 아니에요? SM 쪽은 정서적 유대는 전혀 없는 거예요?”
“도명 씨한테 이야기하다가 별안간 도명 씨를 막 원망할 것 같고. 그 원망하는 이유를 설명 못 하잖아요. 저 아직 덜 세련됐단 말이에요. 아직 고백하기엔 덜 멋지단 말이에요.”
“형이 미우면 형한테 일단 선빵 날린 후 격하게 좋아한다, 새끼야. 라고 하며 확 고백해 버리든지요.”
“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아 죄송해요. 순간 저도 흥분해서.”
서윤은 도명도 그쪽을 좋아하고 있으니 확 고백해 버리라는 말을 하려다 목 끝으로 삼켰다.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해 주는 순간 완벽하게 중계자가 되어서 그 커플 사이에 낄 것 같았다. 그리고 억울한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이 껴서 이어 주는 게 무슨 의미인가도 싶었다.
“서윤 씨, 제 이야기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도 이렇게 말하니 기분이 개운해진 것 같아요.”
“하하하.”
서윤이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서윤은 도화와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서윤은 도명에 대한 분노를 곱씹었다.
아니 어떻게 된 사람이 도화 씨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이야기도 못 하게 만든단 말인가. 너무 외롭고 무섭다는 도화의 목소리가 서윤의 머릿속을 윙윙 울려댔다. 그 순간 도명은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대체 뭘 하는 사람이야!’
서윤이 갑자기 맥주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야, 너 왜 그래.”
“안 되겠어. 열 받아서 안 되겠다고!!”
“뭐? 아니 뭘.”
“미안, 나 어디 좀 갈게. 열 받아서 안 되겠어!”
“아니 뭘! 야! 한서윤!!”
***
도화는 서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도화가 집으로 들어와서 뽀득뽀득 씻고 편한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누군가 도명의 가게 앞에서 술에 취한 채 고성방가를 하고 있었다.
“아니, 대체 누가!”
도화는 그 몰상식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거라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는 사람이었다.
서윤이 닫힌 도명의 가게 문을 쾅쾅 두들기며 도명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도명 형 나와. 내가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잠잘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참고로 나 안 취했어!”
그가 이 난리를 치는데 도명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도명이 화가 난 표정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도명이 예의와 상식을 밥 먹어 먹은 서윤에게 최대한 점잖게 한소리 하려는 찰나 서윤이 마음의 한을 담아 외쳤다.
“야 이 고자야!!”
서윤의 입 밖에 나온 말에 도명과 도화 둘 다 놀랐다.
“내가 고자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도명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형은 고자야!!”
서윤이 주먹으로 땅을 치며 흐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형은 고자라고!!”
‘이 연애 고자야……!’
***
도도가 또 도명의 꿈에 등장했다. 도명이 도도와 마지막 산책을 하던 날이 그에게 다시 찾아왔다. 도명에게 도도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고 산책한다고 잔소리하던 도희의 말소리가 들렸다. 도희의 말을 들은 어머니가 도희에게 핀잔을 했다.
“도도가 불쌍하다며 집으로 데려온 건 넌데 도도를 돌보는 일은 어째서 다 오빠에게 떠넘기는 거야.”
어머니가 결국은 약속 장소로 나가는 도희의 등짝의 휘갈겼다. 도희가 아픈 등을 부여잡으며 오빠, 도명에게 SOS 요청을 했다. 도희는 언제나 불리할 때마다 오빠에게 SOS 요청을 하곤 했다. 도명은 알았다는 듯이 도희를 향해 살포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도도가 오빠만 좋아하는걸! 잠도 같이 자고! 내가 아무리 오빠 침실에서 도도를 몰래 가져가도 다음 날 아침이면 오빠 침대로 돌아와 있단 말이야. 도도도 오빠랑 산책 나가는 걸 더 좋아할걸.”
“오빠 이제 고3인데, 네가 오빠 신경 쓸 일 덜어 주지는 못할망정 일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하니?”
“엄마들은 어째서 무조건 책상에만 앉아 있는다고 공부가 잘 되는 줄 알아.”
도희가 오빠를 믿고 어머니한테 실컷 대들었다.
“오빠 잘 부탁해! 아 그런데 진짜, 목줄! 제대로 잡아! 공원으로 가는 사거리, 은근히 차 막 다니더라고. 나도 사고 날 뻔했다니까!”
“알았어. 친구들하고 잘 놀다 와.”
도명이 도희를 향해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도명은 꿈속에서 도화와 처음 공포영화를 본 그 영화관에서 그날의 아침 풍경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에 비친 그날의 아침 풍경에 도명이 영화관 좌석에 앉아 공포로 눅눅해진 얼굴을 쓸어 넘겼다.
그날 유난히 도희가 사고의 위험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갔음에도 사고는 났고 도희가 이야기한 그 장소에서 정확히 사고가 났기에 그렇지 않아도 도명을 불길하게 생각했던 어머니가 은연중에 도명이 일부러 그랬을 거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맘때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 전날 밤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살인범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작은 동물을 상대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시사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보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정말 별거 없었는데 이 모든 게 묘하게 이어지니 정말 끔찍한 오해와 낙인이 도명의 이마에 찍혀 있었다. 어머니도 정말 그럴 거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만들어진 스위치는 회로가 연결된 기계장치가 그러하듯 계속 작동했다.
도명은 영화관에 앉아 자책하고 있었다. 그래, 그 날 도희가 그렇게 강조했는데 왜 그녀의 말을 무시했는지, 짙은 후회가 밀려왔다.
고통스러워하는 도명의 손 위에 누군가 목줄을 올려놓았다. 도명이 옆을 봐도 도명의 손 위에 목줄을 내려놓은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도명이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도도가 산책가자고 조를 때 짓는 표정을 하고 도명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싫어. 안 가.”
도도가 도명의 발밑에서 낑낑대며 졸라댔다.
“나는 다시는 너와 산책을 가지 않아.”
“하여간 의사 말 안 듣지.”
도도가 지치고 짜증 난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명이 놀라서 사람 말을 하는 도도를 내려다보고는 잠깐 눈을 깜빡이는 순간 장면이 전환되어 있었다. 도도와 도명은 사고가 났던 그 사거리의 보도블록 위에 서 있었다.
“넌, 여기서 죽어. 알아?”
“죽어가 아니라 이미 죽었지.”
도명이 도도의 목줄을 지나치게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아.”
도도는 도명이 아무리 힘을 줘도 앞으로 나갔다. 소형견인 도도가 도명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내가 줄곧 여기 서 있었으니까.”
“뭐?”
도도가 사고 난 지점에 우뚝 서서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사고 난 그날로부터 약 15년간을 여기에 줄곧 서 있었어. 가장 고통스러운 이 지점에서 그것도 혼자 말이야. 너는 잊었겠지만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줄곧 이 지점에 서 있었어. 나를 치고 간 그 차 기억나? 색은 어떤 색이었지?”
“흔한 은색 차. 오랫동안 세차를 안 했는지 먼지가 많이 꼈지.”
도명이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그래 그 차가 올 거야. 도명아, 목줄을 놔.”
“싫어.”
“책장을 넘겨야 다음 이야기를 만나지.”
“싫어. 너, 나한테 왜 그래?”
도명이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이렇게 버티면 난 더 오랫동안 여기 서 있어야 해. 그래도 좀 낫네. 줄곧 혼자 서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같이 서 있어 줄게.”
도도가 도명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 이야기 너머야. 너는 도화 씨의 스노우볼을 비웃었잖아.”
“내가?”
“기억 안 나? 네가 도화 씨에게 잘난 척하며 이렇게 말했잖아. 시간은 보관만 하고 그 속에 갇혀 있지는 말라고. 그게 네가 이 줄을 놔야 하는 이유야.”
도명이 도도의 말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목줄을 차마 놓지는 못했다.
도도에 대한 죄책감과 시간이 이렇게 지났음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아픔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도명이 꿈에서 깼을 때는 꿈을 꾸면서 힘을 준 팔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도명은 현관문 앞에 널브러져서 자고 있는 서윤을 짐짝 치우듯이 발로 옆으로 밀었다. 서윤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깨지는 않았다.
***
도명의 화원 안 주방에서 아침부터 몽둥이질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옛날 빨래터에서 손으로 직접 빨래를 하는 소리가 온 공간에 탕탕 울렸다. 그 소리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도명은 잘 말린 북어포를 방망이로 두들기고 있었다. 방망이를 쥐고 있는 도명의 팔뚝의 근육은 팽팽했고 그의 미간은 거칠게 조여 있었다.
도명은 무슨 살풀이를 하는 표정으로 주방에서 북어포를 가루로 만들 기세였다. 아침부터 북어를 패는 도명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도명은 분노와 심란한 마음을 기체로 뿜어내듯 숨을 내뱉었다.
어제 한밤중에 서윤이 갑자기 술에 취한 채로 나타나 이상한 소리만 반복하며 깽판을 친 것도 어수선한데 도명의 속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드는 꿈까지 꾸었다.
“아 형, 일찍 일어났네.”
서윤이 도명의 눈치를 보며 쓰린 속을 달래듯 가슴 언저리를 문지르며 등장했다.
도명이 위층에서 그렇게 엄청난 소리를 내는데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못 일어날 리가 없었다.
“잠은 잘 잤니?”
도명이 입꼬리를 삭 올리며 서윤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북어를 패던 몽둥이가 쥐여 있었다.
“어젯밤 일은 잘 기억하려나 모르겠구나.”
“음, 형 말투 왜 그래…….”
서윤이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기다려 봐. 북엇국 끊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사람의 모습이 아닐 정도로 술을 먹었으니 속이 쓰리겠지? 안 그래?”
“속이 쓰리긴 한데, 음, 형 요즘 누가 이렇게 직접 북어를 패서 북어 채를 만들어. 마트 가면 잘 다듬어진 북어 채를 파는데.”
“하하. 당연히 알지. 냉장고에 그 마트 북어 채가 있는걸.”
“그런데 왜 아침부터 힘들게 이러고 있어.”
서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명의 몽둥이가 북어를 탕! 소리 나게 내리쳤다. 몽둥이를 내리치는 도명의 시선이 정확히 서윤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내가 그렇다고 사람을 팰 수는 없잖아. 앉아. 금방 만들어 줄 테니까.”
서윤은 최대한 도명의 심기를 안 거슬리게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식탁에 앉았다. 도명이 서윤을 똑바로 쳐다보며 북어를 내리칠 때마다 서윤의 어깨가 움찔거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아, 맞다. 형. 요즘 편의점 북엇국도 잘 나오더라. 아니면 근처에 맛 끝내주는 해장국집 있는데 내가 얼른 가서 사 올까?”
“내가 해 주는 건 싫어?”
“형이 지금 북어 채가 아니라 북어 가루를 만들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직접 해 주는 북엇국이 싫어?”
도명의 살벌한 말들에 서윤이 도명에게 아부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무 맛있겠다. 북어 건더기가 엄청 부드러울 것 같아. 이렇게 바스스한 가루도 많으니 모아서 국물에 다 털어 넣으면 국물이 정말 진하겠는걸.”
“그렇지. 이렇게 정성이 들어가는 데 안 맛있을 리가.”
살벌한 요리 시간이 끝나고 서윤의 앞에 도명이 눈빛을 살벌하게 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북엇국을 내려놓았다. 서윤은 도명에게서 사약 한 사발을 받은 느낌이었다.
“형은 안 먹어?”
“나는 누구처럼 다음날 속이 쓰릴 정도로 술을 마시는 난잡한 생활을 안 해서 말이다.”
“사람 먹는데 그렇게 쳐다보지 마. 형, 나 체할 것 같아.”
“다 먹으면 이야기하자.”
서윤은 도명이 끓여 준 북엇국을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분노의 감정을 잔뜩 담은 북엇국은 역설적이게도 너무 맛있었다.
“형, 한 그릇 더 줘.”
“하하. 배부를 텐데. 그 정도로 처먹었으면 배부를 텐데. 서윤아.”
“배부르다. 방금 욕을 먹어서 갑자기 배가 엄청 부르네.”
“어제. 네가 여기서 부린 행패는 샅샅이 기억하냐?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기억나야 할 거다. 일단 네가 나를 고자라고 하며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서 소리 지른 걸 이야기해 볼까? 너 나랑 자 봤냐. 네 놈이 내가 고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까? 어디 한번 고자한테 뚫려 볼래?”
도명의 살벌한 말에 서윤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말한 건 그 고자가 아니야.”
“그럼 다른 고자가 있냐?”
“형, 연애 고자라고!”
“연애고자? 그건 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형 도화 씨 좋아하잖아. 사랑하잖아!! 어디서 사진작가의 눈을 속이려 들어!”
서윤의 말에 도명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말을 줄줄 내뱉던 도명이 고장 난 듯 멈칫하자 서윤은 이때다 싶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다다 내뱉기 시작했다.
“자기 마음도 모르고 상대방 마음도 모르고, 그게 연애 고자지 뭐야!! 잠깐 내가 어젯밤 술 먹고 여기서 행패 부린 건 미안한데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형한테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나 거든! 나한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게 어디 있어. 막상 뺏길 것 같으니 온갖 참견 하고. 내가 오죽 화가 났으면 안 하던 술주정이 다 생겼겠어. 왜?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 봐! 어디. 난 도화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눈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라고!”
“맞아, 나 도화 씨…… 그래.”
도명이 두 손을 모으고 그 손 위에 이마를 댄 채 중얼거렸다. 서윤은 생각보다 순순히 도명에게 자백을 받자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전에는 그런 거 아니라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언제 고백할 거야? 어서 해 버려. 어느 쪽이든 해 버려. 나의 고통을 끝내 주라고.”
서윤이 울화가 치미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
“무슨 생각?!”
서윤이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눈을 부릅뜨며 도명을 쳐다보았다. 서윤은 답답함에 이 가게를 박차고 나가 미친놈처럼 동네 한 바퀴라도 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뭐가 이렇게 복잡해!! 좋으면 좋다! 이게 뭐가 어려워. 아니, 난 왜 이 와중에 두 사람이 이어지는 걸 중계하고 있냐고! 억울하다. 억울해. 나까지 쌍으로 바보가 됐잖아.”
서윤이 억울함에 도명이 끓어놓은 북엇국이라도 완벽하게 비워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서윤이 도명의 주방에 서서 냄비째로 북엇국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형, 어제 도화 씨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무슨 일?”
서윤의 말에 도명이 놀라서 되물었다. 도화에게 큰일이 생긴 것 같아 심장이 쿵쿵 울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런 표정 지을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고. 어제 도화 씨가 심하게 기분 상할 만한 일이 있었단 말이야. 어제 도화 씨가 나한테 전화했어. 무섭고 외로운데 전화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며. 여기서 포인트는 그 전화 할 사람이 형이 아니라 나라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과 그런 감정 교류도 못 하고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만날 자신만만했잖아. 사람들의 심리는 빤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그놈의 좋아한다는 표현 좀 그만할 순 없어?!”
도명이 어지럼증을 못 이기고 서윤에게 소리를 질렀다. 도명의 격한 반응에 놀라서 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서윤의 눈빛에 도명은 이마를 짚었다.
“아 그래, 너도 내 예민함이 피곤하다고 생각하겠지. 같이 말라죽을 작정이 아니면 누가 내 유별난 신경을 참아 주겠어.”
도명은 도화에게 고백하다 자신이 쓰러진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뉴스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상태가 너무 우스꽝스러운데 다른 사람은 너무 황당한 나머지 웃음 먼저 터져 나올 것이다. 도명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형, 진짜 무슨 문제 있어?”
순식간에 안 좋아진 도명의 안색에 서윤이 놀라며 말했다.
“아무 문제 없어. 그냥 고민 중이야. 어떻게 완벽한 고백을 할지 말이야.”
도명은 이 문제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롭고 외로웠다.
***
도명은 정신과에 다녀왔다. 도명은 화원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정신과 의사의 명함을 던졌다. 도명처럼 무언가를 챙기는 데 꼼꼼한 사람이 물건을 이렇게 내팽개친다는 건 그 물건을 앞으로 볼 일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명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적어도 서윤에게 상담한 것보다는 나았다고 자조했다. 도명이 도화에게 고백하다가 정말 심장 통증으로 쓰러져 놀란 도화가 응급차를 부를 수도 있다고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순간 서윤은 어떤 표정을 지을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서윤이 겉으로는 마냥 밝아 보여도 남의 고민을 가볍게 들어 주는 편이 아님에도 그럴 것이다. 아니면 고백하기엔 너무 떨린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정신과 의사는 이런저런 사람을 많이 겪어 봐서 그런지 도명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티 나게 웃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제법 진지하게 도명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들어 주었고 약도 처방해 주었다. 도명의 불안증을 가라앉혀 주는 약이었다. 요즘 누구나 정신병을 달고 산다고 하지만 정신과 약 봉투를 쳐다보는 도명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도명은 약을 입 가까이에 가져대다가 결국 쓰레기통에 던졌다.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진 정신과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이 그의 마음에 쌓여 있었다.
‘왠지 조만간 그가 나를 떠날 것 같습니다. 저는 빠른 해결책을 원합니다.’
도명의 말에 의사는 그런 조바심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럼 뭐가 날 도와줄 수 있는 건데.”
도명이 복잡한 심경에 목만 계속 축이고 있을 때 도화에게서 문자가 왔다.
[저기요. 도명 씨. 우리 플레이 안 한 지 3주 정도 된 건 알고 있어요?]
도화의 문자가 도명의 복잡한 신경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랬나요?]
도명이 모른 척하며 답문했다.
[네.]
[제가 최근 바빠서 몰랐군요.]
[원래 이게 그런 건가요? 처음에는, 매주 했잖아요.]
[도화 씨가 배울 게 많아서 그랬죠.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저 이제 제법 잘하나요?]
[네.]
‘글쎄.’
도명은 도화에게 보낸 문자의 내용과는 다른 속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요.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그동안 이쪽에 어수룩한 것이랑, 도명 씨가 저하고 삽입 섹스를 안 하는 것이랑 상관있나요?]
[삽입 섹스 했잖아요. 제가 그동안 도화 씨, 구멍에 얼마나 많고 다양한 딜도를 박았는지 알아요?]
[그 삽입 섹스 말고요.]
[그게 삽입 섹스에요.]
[네…….]
“이 늘어지는 말투 뭔데?”
도명이 도화의 문자를 한참을 노려보았다.
***
도화는 도명과 문자 후 침대에 대(大) 자로 누웠다.
“도명 씨 걸로, 박아달라고. 이 말을 왜 눈치 빠른 사람이 알아서 못 알아듣는 건데!! 내가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냐고.”
도화는 다시 도명에게 문자를 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도명 씨 그래서 다음 플레이는 언제인데요?]
[스케줄 조정해 볼게요.]
[이게 그렇게 거창한 일인가요? 저는 언제나 정시 퇴근하고 도명 씨와 저는 위아래 집에 사는데요? 언제부터 우리가 플레이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 돼 버린 건데요.]
도화는 결국 마지막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계속 도명에게 하자고 조르는 게 자신이 너무 발정 난 사람처럼 보였다. 도화는 애써 쓴 장문의 문자를 지우고 네, 라고 고쳐 썼다.
도화는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도명이 플레이를 안 하는 기간이 길어진 이유에 대해서 나열한 이유들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이 와중에 도화는 슬그머니 자신의 옆구리 살을 집었다.
‘이제 더 이상. 날 보고 그런 느낌이 안 오나……?’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별안간 어젯밤 서윤의 외침이 생각났다.
‘형은 고자야!!’
별안간 생각난 말에 도화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은 고자야!!’
하지만 다시 도화의 머릿속에 서윤의 외침이 울렸다.
***
도화는 일을 하다 말고 마우스를 놓았다. 딱히 하고 있는 일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낮은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윤정은 웬만하면 일하다가 한숨을 안 쉬는 도화가 맥이 탁 빠지는 한숨을 쉬자 일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힐끗 쳐다보았다.
도화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윤정의 시선에 괜히 귀를 만지작거렸다. 도화가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일어섰다. 도화의 발걸음이 준비실로 향했다.
도화는 믹스 커피를 뜯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머그잔 안을 티스푼으로 저으면서 진한 갈색 물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원을 그리면서 가운데로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형상을 보며 도화는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딱히 별일이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허했다. 도화는 그 이유가 요즘 도명과 섹스를 못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창 나이인 18살 때부터 지금까지 진한 섹스는 고사하고 가벼운 스킨십도 안 하고 살면서 크게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는데 고작 3주하고도 반이 지났다고 몸도 마음도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했다.
‘발정 났나.’
그러다가 이내 이건 단순히 몸의 욕구가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도명이 자신과 멀어질까 봐 불안한 것이다. 단순히 도명이 요즘 바쁜 건데 혼자 깊은 생각에 빠진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도명은 안 그러다가 부쩍 화원 안에 있는 안락의자에서 낮잠을 자곤 했다.
그 표정이 제법 고단해 보이는 면이 있었지만 바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가 진짜 바빴을 때 어떤 모습인지 봐왔으니까 반론의 여지는 없었다.
그의 완벽을 기하는 성격에 피곤하다는 이유로 바쁜데 낮잠을 잘 리가 없었다. 오히려 입안에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털어 넣으며 자신을 밀어붙이는 게 어울렸다.
‘아니면 요즘 어디 아픈가.’
도화는 이번 추론엔 제법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평소에 날 서 있는 도명의 표정이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았다. 언제나 사늘한 빛으로 빛나면 도명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흐려 있었다.
그렇다고 느긋한 상태도 아닌 것이 그의 신경은 끊어지기 직전의 줄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처럼 히스테릭해 보였다. 도화는 도명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퉁 내려앉았다.
‘내가 지금 아픈 사람을 두고 그거 하자고 졸라댄 거야?’
도화는 도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 동시에 억울하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가 정말 아픈 거라면 요즘 몸이 안 좋다고 하지 왜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나 싶었다.
그리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 안 하는 것 자체가 섭섭하면서 동시에 안쓰러웠다.
‘돔도 신이 아니고 그냥 사람인데 컨디션이 안 좋을 수도 있지. 그걸 그렇게 교묘하게 비밀로 해야 해? 우리가 그 정도도 이야기 못 하는 사이야?!’
도명이 원망스럽다가 걱정스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아니, 결국엔 걱정스럽나? 도화가 오묘하고 무거운 감정의 칵테일을 혼자 들이켜고 있을 때 도명에게서 문자가 왔다.
[도화 씨, 오늘 저녁에 이번 주, 주말에 할 플레이에 대해서 이야기합시다.]
도화는 도명의 문자에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도명의 문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도명 씨 요즘 컨디션 괜찮아요?]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정말 괜찮아요?]
도화가 재차 물었다.
[왜 제가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요즘 부쩍, 낮잠도 많이 자고…….]
도화가 딱 떨어지게 말할 수 있는 증상은 이것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냥 느낌이라서 뭐라 설명하기 애매했다.
[그거야, 낮잠을 자는 게 좋다고 해서요. 오히려 일 능률도 높아진다고 하더군요. 왜요? 하기 싫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저, 하고 싶은 거 생각까지 해놨습니다.]
[그렇군요. 저녁, 먹고 들어올 겁니까?]
‘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도화는 문자를 보내려다 말고 문자를 쓰는 것이 답답해졌다. 왠지 이 간단한 질문을 대답하는 일에 대화가 필요해 보였다.
도화는 결국 회사 복도에 나와서 통화를 했다. 간단한 저녁 식사 이야기인데 설사 누가 듣더라도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통화 가능해요?”
“네.”
“저녁,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게 뭐 어려운 문제라고 전화까지 해요. 된다, 안 된다만 답하면 되는데.”
도명의 말에 도화는 괜히 까칠한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러게, 우리는 왜 이런 간단한 것도 어려운 문제가 되어 버렸을까?
“나 참, 저녁 먹기 참 힘드네.”
도화가 말이 없자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도화는 우물쭈물하며 도명의 혼잣말을 듣고만 있었다. 도화가 말이 없자 도명이 연이어 말했다.
“왜요? 이게 데이트 같아요? 제가 규칙을 어겨서 기분 나빠요? 매일 먹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녁 한 끼잖아요.”
도명의 말투에서 도화를 원망하는 것이 느껴졌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아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오면서 미간을 거칠게 구겼다.
“제가 복잡하게 만들었어요? 도명 씨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요.”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도명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도화 자신도 별일 아닌 문제로 왜 이렇게 날이 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뭘요?”
“몰라요. 그냥 그런 것 같아요.”
“나 참, 지금 본인도 모르는 문제로 저한테 그런 말투를 한 거예요?”
도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먼저, 말투 이상하게 한 건 도명 씨예요.”
“저 말투, 은근히 이런 식인 거 몰라요?”
“알아요. 아는데.”
“아는데?”
“그렇다고…… 제가 계속 도명 씨의 말투를 참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말이 없었다.
“알았어요. 제가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처럼 도화 씨에게도 다정하고 괜찮은 사람인 척 가면 쓰면 되는 거죠?”
도명은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지만 어딘가 배배 꼬여 있었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어쩌자는 건데요. 걱정 말아요. 저 그런 거 잘하는 거 알잖아요.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했어요. 그것도 도화 씨, 한창 일할 시간에.”
도명이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도화가 멍한 얼굴로 발신이 끝난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어쩌다 간단한 저녁 식사 대화가 이런 식의 결말을 맺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도화는 퇴근을 한 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도명의 가게 앞에 섰다.
도화는 도명과의 전화 통화가 안 좋게 끝난 이후 도명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화가 기척이 없는 도명의 가게 안에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도명의 이름을 불렀지만 안에선 딱히 반응이 없었다. 도화가 도명을 찾았다. 도명이 안락의자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답지 않게 사람이 왔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도명의 미간이 거칠게 좁혀져 있었다. 도화가 잠든 도명의 머리맡에 웅크리고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도화가 조심스럽게 도명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화는 도명이 깰까 봐 손가락 끝까지 힘을 주어 일정 간격을 유지했다.
“도화 씨.”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도명이 도화를 향해 말했다. 도화가 너무 놀라 순간 숨을 멈추고 멀뚱히 도명을 쳐다보기만 했다. 도명이 또 도화에게 무례하다며 화를 낼 것 같았다. 그것도 두 사람은 지금 작은 말다툼을 한 후였다.
“아까 낮에는 미안했어요. 이번엔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진짜 미안하다는 뜻이에요.”
도명의 입에서 도화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아니, 뭐, 저도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예민하게 군 것 같아 죄송해요.”
“아니요. 말투 조심할게요. 몇 시입니까?”
“7시입니다.”
도화의 말에 도명은 자신이 거의 2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명은 걸핏하면 나타나 자신의 목줄을 놓아달라는 도도 때문에 어젯밤 깊은 잠에 못 들었다.
아까 도화와의 심란한 통화 이후, 기분을 삭이려고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이렇게 잠든 것이다.
이 잠깐의 잠 사이에서도 도도는 도명에게 목줄을 놓아달라고 했고 도명은 내내 도도 옆에 서 있었다.
꿈속에서조차 너무 오랫동안 서 있다는 기분에 좋았던 시절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하니 더욱 도도의 목줄을 놓아 줄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졌었다.
도명이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도명의 시선이 가장 먼저 주방 쪽으로 갔다. 도화와의 통화 직전 꺼내놓은 생선들이 생각나 골치 아파졌다. 도명이 꺼내놓은 생선을 다시 냉장실에 못 넣을 정도로 그의 기분은 아주 엉망이었었다.
화원 안은 밖보다는 시원했지만 실온에 놓은 생선이 상했을까 봐 걱정됐다. 도명이 급하게 싱크대 앞에 섰다. 물에 담가져 있는 생선들이 보였다.
분명 생선 주위에 차가운 얼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얼음은 다 녹아서 물의 온도는 미지근했지만 다행히 생선은 멀쩡했다.
“저녁은요? 아, 묻지 말아요?”
“아니요. 안 먹었어요.”
“어떻게 할래요?”
도명이 도화에게 물었다. 도화가 도명의 등 뒤를 보니 싱크대에는 다듬다 만 생선이 있었다.
“아, 네.”
“뭐가 네, 인데요?”
“저녁 먹어야죠.”
도명이 생선을 손질하고 밑간을 하고 오븐에 집어넣었다.
“생선구이 좋아해요?”
“네.”
도화가 식탁 위에 수저와 젓가락을 놓으며 답했다. 서로 사과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동안 제 말투 참고 있었어요?”
도명이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을 밥그릇에 담으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물었다.
“아뇨. 딱히.”
“정말요?”
도명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불편한 대화 주제에 도화는 괜히 별것도 아닌 걸로 발끈해서 화를 냈다고 생각했다. 요즘 도화가 보고 있는 자신은 밝히고, 속물적이고, 또 도명이 좋아하는 것처럼 순하지가 않은 것 같았다.
“네. 아 물론, 도명 씨 말투가 명령조인 건 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고요. 도명 씨와 전 돔과 섭 관계니까 그것도 나름 그러려니 하고요.”
“플레이할 때만 그럴게요.”
“그러니까 제 앞에서 가면을 쓰겠다는 뜻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까 한 통화에서 그렇게 표현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싫어요. 아까는 그냥, 회사 일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그냥 평소에 거슬리지 않던 게 갑자기 거슬린 것뿐입니다.”
도화가 딱 잘라서 말했다. 도명은 도화의 말에 아까 통화에서 느꼈던 근본적인 불안감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원한 기분도 아니었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고 도명은 도화에게 넌지시 물었다.
“도화 씨, 최근 안 좋은 일 있었어요?”
도화가 도명의 질문에 흰 쌀밥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생선 살을 올려놓고 입안에 집어넣으려다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은 후 도명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네? 제가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문하는 도화의 표정이 마냥 해맑아 보였다.
“아까, 저랑 통화할 때 기분이 안 좋았었다고 했잖아요.”
도명은 서윤에게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다는 양 말했다.
“아, 그냥 회사 일이에요.”
“정말 회사일 뿐이에요?”
“네.”
“요즘 안 좋은 일 있었던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도화 씨가 진영 씨 결혼식 갔다 온 그날 이후인 것 같은데요. 추론의 다른 근거는 없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와, 촉 좋은 건 여전하네.’
“살면서 안 좋은 일 겪는 게 한두 번인가요.”
도화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걸 서윤이한테는 말하고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는데.’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말해 봐요.”
“진영이 결혼식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요. 좋은 날인데. 그리고 그날 도명 씨 덕분에 제 스타일도 완벽했고요.”
도화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도명은 더 이상 도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도명에게 추궁 아닌 추궁을 당한 도화는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봐 식사에만 열중했고 도명 역시 도화의 반응을 밥알 씹듯이 곱씹느라 식사 중에 딱히 대화가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도명이 모히토를 두 잔 만들어왔다. 도명이 모히토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이번 주말에 할 플레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아, 저 집에서 가져올 게 있어서, 그것 좀 가지고 내려올게요.”
“뭔데요?”
“아, 음 보면 알아요.”
도화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갛게 변하며 후다닥 위로 올라갔다.
잠시 혼자 남게 된 도명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번 주말에 플레이를 하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는 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화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섹스 파트너 관계마저 어그러질까 봐 도화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다.
도명은 일단 전에 했던 무난한 플레이를 구상하고 있었다.
일단 도화의 눈을 가리고 방치 플레이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주도하는 플레이를 피할 생각이었다.
도명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도화가 프린터로 출력한 A4용지 여러 장을 가져왔다. A4용지 오른쪽 위쪽에는 단정하게 클립이 끼워져 있었다.
“아, 저 도명 씨, 저는 이야기할 준비가 다 됐습니다.”
“뭡니까, 이 비장함은?”
“그래 보입니까?”
“네.”
“아닌데요.”
도화가 눈을 피하면서 괜히 들고 온 A4용지를 손에 꽉 쥐었다.
“이번 주는.”
도명이 운을 띄우는데 도화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 하고 싶은 거 있습니다.”
도명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명은 일단 말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도명은 도화에게 말하라고는 했지만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저, 그, 강간 플레이 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왜 하필 그거야.’
도화는 뭔가 내켜 하지 않는 도명의 반응에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문을 잠가 놓고 최대한 인기척을 안 내도 안심하라고 했다.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 내내 집에만 있을 거라고 말이다. 덧붙여 도명이 마스터키를 들고 잠긴 문을 따고 들어와서 플레이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근데, 도화 씨, 몰입이 되겠어요?”
“네?”
“강간 플레이의 포인트는 도화 씨의 적극적인 반항입니다. 하지만 도화 씨는 저보다 힘이 세잖아요.”
“연약한 척해 볼게요. 갑자기 힘 탁 풀고.”
“그렇게 해서, 저나 도화 씨나 몰입이 되겠어요?”
“아. 사실. 그래서 제가 B안을 준비했습니다.”
도화가 부끄러워하며 조심스럽게 도명에게 A4용지 한 부를 내밀었다. 도명이 대충 훑어보니 대본이었다.
“아, 제가 SM플레이가 비유적으로 연극 같다고 한 거지, 진짜 연극은 아닌데요.”
“알아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대충 이런 분위기다. 이런 시나리오다. 정도로만 참고하시면 됩니다. 꼭 이 대사 이대로 할 필요는 없고요. 음, 일단 읽어 볼까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자신이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면서도 일단 읽기 시작했다.
“불 다 끄고 없는 척하면 제가 못 찾을 줄 알았어요? 전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찾을 수 있어요.”
“아니요, 아니요! 그렇게 소리 내서 읽으면 글을 쓴 제가 너무 부끄럽잖아요!”
“아, 설마 했는데 직접 지은 겁니까?”
“그게 밤에 할 일이 없어서. 정말 너무 할 일이 없어서요.”
“할 일이 없으면 차라리 공포영화를 보지 그랬어요.”
도명이 자신도 모르게 도화가 쓴 대본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공포영화는 이제 좀 질려서. 아무튼요.”
“아니, 근데 꼭 이 대사대로 안 하더라도 비슷한 내용일 텐데 첫 문장 읽는 순간, 본인이 부끄러워서 못 참으면 플레이는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아 그렇죠. 그, 그러면 번갈아 읽어요.”
“도화 씨, 불 다 끄고 없는 척하면 제가 못 찾을 줄 알았어요? 전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찾을 수 있어요.”
“도명 씨, 제가 밀린 6개월 치 월세는 이번 달 말까지 꼭 낼게요.”
“도화 씨가 무슨 수로요? 실직한 지 오래됐잖아요.”
“취업난이 너무 심각해요. 저는 정말 노력하고 있는데. 진짜예요.”
“노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아 참, 애쓰지 말아요. 제가 도화 씨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온 세무사에 알렸으니까요.”
도명이 이 부분을 읽다가 도화를 흘깃 쳐다보았다.
“제가요?! 제가 흑막이었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이건 상황극이니까…… 마저 해요.”
“도명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전 도명 씨가 좋은 사람인 줄 알고, 제 가장 큰 비밀을 말한 거라고요. 어떻게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그 말을 이런 식으로 이용해요.”
“하하.”
도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도화가 쀼루퉁한 얼굴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다음 대사를 읽었다.
“도화 씨, 당장 밀린 월세 안 내면 짐을 빼야 할 겁니다.”
“보증금에서 일단 빼 쓰시면……!”
“사람이 셈이 흐리군요. 당신 보증금은 이미 바닥 난 지 오래입니다. 도화 씨는 1년간 이곳에서 칩거 생활하고 있었어요.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억은 나요?”
“제가 그렇게나 오랫동안 실직 상태였다고요? 저는 여기서 공포영화만 보고 있었다고요.”
“도화 씨 혹시 쉬고 싶어요?”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음, 모든 직장인들의 꿈이잖아요. 그냥 넘어가요. 좀. 다음 부분 그냥 읽어요.”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아야죠. 도화 씨가 밀린 월세가 180만 원이니 시급 5000원으로 해서 360시간 동안 몸으로 갚읍시다. 저기, 도화 씨, 요즘 최저시급 몰라요?”
“전 시간당 5000원이 좋아요.”
“360시간 동안 발기해 있을 제 생각은 안 합니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제 그 다음은 도명 씨 하고 싶은 대로 저를, 마구, 그냥 왁,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아니, 대체 이 이상한 시나리오는 어디서 영감을 받은 겁니까?”
“그게, 서윤 씨가 빌려준 ‘잔고가 없어’요.”
“최대한 맞춰 볼게요.”
도명이 그답지 않게 자신 없어 하는 말투로 말했다. 이런 이상한 시나리오로 플레이를 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 그리고, 도명 씨 사실은요.”
도화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도화는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땀으로 얼룩진 손가락을 어지럽게 얽혀 들어갔다. 그런 도화의 모습에 도명은 긴장됐다.
이런 이상한 시나리오를 내밀면서도 도화가 이 정도로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도명은 자신의 백구가 어디로 뛰어오를지 몰라 긴장했다.
“도명 씨가 가진 딜도나 그런 것들 말이에요.”
“네. 말해 봐요.”
“그러니까…… 그게 사실, 음, 그게 더 이상 저한테 큰 즐거움이 되지는 못해서요. 그 전까지 만족하다가 항상 그, 마지막에서 조금 아니, 많이 맥이 탁 빠지는 기분입니다.”
“그렇군요.”
도명은 도화가 조금 돌려서 말을 했지만 그가 어떤 요구를 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도명 또한 그런 상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도화의 애널에 자신의 페니스를 넣는다는 상상만 해도 온몸이 달아오르고 맥박이 뛰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그동안 다양한 섹스를 해 봐 왔고 그중에는 페니스를 삽입하는 것 이상의 위험한 것도 많이 해 봤다. 페니스를 삽입하는 건 정말 별일 아니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도화가 되니 온몸의 신경이 바짝바짝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지나친 기대감과는 다른 심장의 조임이 느껴졌다.
“저, 도명 씨, 대답이 애매한데 알겠다는 뜻인가요?”
도화가 긴장감과 기대감을 교차하며 물었다.
“아, 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얼떨결에 대답을 해 버렸다.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얼떨결에 대답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사람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서 대화상대를 두고 넋을 놓은 적도 얼마 없었으며, 심리적으로 쫓기는 일 또한 거의 없이 우월한 포식자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주도해갔다.
그러니 얼떨결에 대답할 일은 없었다.
“아. 고마워요.”
도화가 뺨에 몰리는 열을 식히며 작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도화는 더 이상 도명과 마주하고 있다간 얼굴이 익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아, 저, 음, 저 세탁기 돌려야 하는데. 밀린 집안일이 좀 많아서요.”
“네, 그렇군요.”
도화가 도망치듯 후다닥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론 세탁기를 돌린다던 도화는 세탁기를 돌리지 않았다.
***
도화는 잠을 자다가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매만졌다. 그의 손이 잠옷으로 입는 반바지 표면을 어루만지며 원을 그렸다. 감질나게 만드는 접촉은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도화가 자신의 페니스 표면을 힘주어 꾹꾹 눌렀다. 페니스가 그의 열을 조절하는 스위치라도 되는 양 도화의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아, 도명 씨. 하아.”
도화의 손가락이 페니스를 누르고 고환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놓으며 늘렸다.
도화의 머릿속에서는 도명이 단정했던 머리를 흩뜨리며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뿜으며 바르작대는 도화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흐트러진 도명의 머리카락이 도화의 목덜미와 등줄기를 간질였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꾹꾹 눌러댔다. 그의 손가락이 마치 도명의 이빨인 양 말이다. 자신의 고환을 움켜쥐던 도화가 뒤를 더듬었다.
열이 모른 엉덩이 사이가 손가락을 물며 뜨겁게 만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점점 집요하게 뒷구멍을 헤집었다.
“하아… 하아… 하아….”
도화의 머릿속에서 도명이 삽입을 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세게 허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놀란 도화가 침대 시트 위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의 목덜미를 더욱 세게 물며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목덜미와 뒷구멍이 둘 다 시큰해질 정도로 그가 안쪽 여린 살을 헤집었다.
“아, 도명 씨. 너무 세요. 하아. 하아. 아, 천천히. 앗. 진정해요.”
상상과 현실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도화는 육성으로 터져 나온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자신이 혼잣말로 무슨 소리를 해댔나 싶어 민망함이 물려왔다.
수치심에 뇌 기능이 정지하는 것도 잠시, 도화는 다시 상상 속에 매몰됐다. 도명은 여전히 도화의 엉덩이골 사이에 페니스를 박고 사나운 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도명이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매우 집요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상상 속에서 그의 목덜미는 도명의 잇자국으로 가득했다.
도화는 이불 속에서 혼자 다리를 달달 떨었다. 오싹함과 쾌락이 같은 진동으로 그의 몸 안에서 울려댔다.
도화의 손바닥 위에 진득한 정액이 고였다. 도화는 멋쩍은 얼굴로 물티슈로 끈적이는 손바닥을 닦았다. 다 쓴 물티슈는 침대 옆 휴지통에 들어갔다.
휴지통에서 욕정의 냄새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도화는 멍한 표정으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바로 눕는다고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스탠드 조명 불빛에 탁상에 놓인 시계가 어스름하게 보였다. 시계 시침이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말 중이니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조만간 그와 연결될 거라 생각하니 온몸이 간지러웠다.
도명이 자신을 지독하게 원한다는 것을 잘 연기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 넘치는 그에게서 강한 아우라를 느끼며 흥분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여유 넘치는 표정이 싫었다. 싫은 걸 넘어서 이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도화가 최근 도명과 강간 플레이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곱씹었다. 대부분 SM 플레이에서 도화는 안달이 나 있고 도명은 언제나 상황을 주도하며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게 돔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카리스마이긴 했다. 도명은 옷차림뿐만 아니라 그런 쪽에서도 클래식한 면이 있으니까.
도명이 유일하게 도화에게 안달이 날 수 있는 플레이는 강간 플레이 정도 같아 보였다. 딱히 구체적으로 이런 생각으로 최근에 도명에게 강간 플레이를 하자고 조른 건 아니지만 지금 곱씹어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
회사 사람들은 금요일이라고 다들 약속을 잡은 모양이었다. 도화만이 이번 금요일에 약속이 없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게 내심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들 누리는 소소한 행복 하나하나를 다 가지고 싶었다.
“이 대리님은 오늘 약속 없으세요?”
회사에서 유일하게 도화에게 살가운 윤정이 퇴근 준비를 하는 도화에게 말을 걸었다.
“네.”
도화가 사무적인 말투로 답했다. 예전 같았으면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이런 대답에 다시는 예의상으로라도 묻지를 말아야지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도화의 잘생긴 건물주가 도화에게 소개팅을 해 주러 등장한 이후 도화의 감정적인 모습들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가 로봇이 아니라 사람임이 들통났다. 특히 소개팅이 잘됐는지 혼자 준비실에서 엉덩이춤을 춘 걸 본 이후로는 솔직히 이제는 냉정한 척하는 그가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이 대리님 언제나 약속 없는 걸 알면서 그걸 왜 물어.”
윤정과 친한 정은이 그녀의 옆구리를 은근히 찌르며 말했다.
“하지만, 이 대리님 저번에도 약속 없다면서 소개팅 나갔었잖아.”
윤정이 도화가 들을세라 작게 속닥이며 말했다.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사이 도화에게 도명이 문자를 보냈다.
[주말 일정 건으로 오늘 같이 쇼핑 좀 해요.]
두 사람은 문자 보낼 때 최대한 SM 용어를 배제하고 보냈다. 허락도 없이 남이 핸드폰을 보는 무례한 일은 웬만하면 안 일어나지만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니까.
그 다양한 일들에 좋은 일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도명의 주말 일정이라 함은 SM 플레이임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SM 플레이를 위한 쇼핑이라니!’
도화는 너무 기대되어서 볼이 발그레해지고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아니 근데 강간 플레이인데 서프라이즈로 하는 게 더 좋은데. 그래도 도명 씨랑 쇼핑이다. 무슨 엄청난 걸 하려고 쇼핑씩이나 하는 거야~! 젠장 너무 좋잖아.’
[네.]
[이번에는 대답이 시원스러워서 좋습니다. 착하네요. 퇴근 시간이죠?]
[네.]
[도화 씨 일정은 빤해서 좋군요.]
‘나도 좋아요. 도명 씨가!’
[저, 도화 씨 회사 건물 주차장이거든요. 내려와요.]
[네!]
[문자상으로도 대답이 힘차서 좋네요.]
‘나도 좋다니까요! 도명 씨가!’
사장실에서 사장이 나오고 순식간에 도명과의 일정이 생긴 도화와 신나는 금요일 저녁을 보낼 생각에 들뜬 회사 사람들의 표정을 순식간에 싸하게 만든 한마디가 사무실에 퍼졌다.
“오늘 회식합시다.”
사람들의 웃는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사장이 이상한 분위기에 주변을 훑어보긴 했지만 눈치 없이 혼자 신나서 말했다.
“왜 다들, 좋아하잖아. 회식. 회 먹으러 가자고! 그것도 바닷가에서.”
‘아니 그걸 갑자기 당신 혼자 정해. 비위 맞춰 준다고 좋다, 좋다 하니까, 진짜인 줄 아네.’
“저 사장님, 다들 약속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대부분 금요일에는 약속이 잡혀 있죠. 미리 말씀해 주시면 당연히 알아서 스케줄 비워놨을 텐데. 하하.”
그래도 이들 중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이 총대를 멨다.
“아, 그래? 다들?”
“이 대리님은 아까 없다고 하던데.”
하준이 이 대리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졸지에 도화 혼자 도명과의 19금 쇼핑 약속을 제치고 사장과 단둘이 바닷가까지 가게 생겼다. 도화를 쳐다보는 사장의 얼굴에 꽃이 폈다.
“나, 이 대리 좋아하지. 일 잘하잖아.”
“생겼습니다. 방금.”
도화가 자신도 모르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도화도 눈치란 게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다급한 마음에 이야기한 것이다. 도화는 어쨌든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싸늘했다. 마치 사장과 단둘이 회식 가기 싫어서 핑계 대는 사람 같아 보였다.
“이 대리 그렇게 나하고 친해지기 싫어? 우리 5년 넘게 일했는데 그 시간이 별거 아니야?”
징그럽게도 사장이 도화에게 전 남친인 것처럼 굴었다.
“아니, 그게 핑계가 아니라 정말 그래서.”
도화가 도명에게서 온 문자를 빠르게 훑었다. 다른 사람이 이상한 낌새를 느낄 만한 텍스트가 있나 체크하는 것이다. 일당 두 사람의 관계를 유추하게 할 만한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화가 사장에게 문자를 보여 줬다. 그제야 사장은 오해를 푸는 듯했지만 그래도 섭섭한 구석은 남은 모양이었다.
“근데 주말 일정이란 게 뭔데? 그게 뭐기에 쇼핑씩이나 해.”
‘남의 사생활을 왜 물어보고 그러나!’
“캠핑 갑니다.”
“아, 캠핑.”
“네, 같이 가는데 혼자 준비하게 하기 미안해서요.”
“아니, 근데 누군데? 말투가 묘하게 자네 상사 같잖아. 아니면 선생이 학생 다루는 것 같기도 하고.”
‘남의 사적인 문자를 위계에 의한 강압으로 사찰해 놓고 왜, 평가질까지 해.’
“그게 이름 저장된 거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도화가 도명을 저장한 이름은, ‘주님’이었다.
“도화 씨 교회 다녀?”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집 건물주입니다.”
“아…… 가야지. 요새는 건물주가 최고라니까. 아니, 근데 건물주면 건물주지, 일종의 계약관계인 거잖아. 계약관계 일로 사람을 이래라저래라 하면 안 되지. 도화 씨는 회가 먹고 싶을 거란 말이야. 건물주와 캠핑이라니! 말이 캠핑이지 시중들러 가는 거 아냐. 생각만 해도 숨 막히네. 아니 이 사람은 친구가 없어?! 이건 사적인 친분을 가정한 갑질이야, 갑질. 대한민국이 이게 문제야.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몰라요. 안 그래?”
“네. 그게 문제입니다.”
‘당신 말이야 당신!’
겨우 사장에게서 빠져나온 도화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화가 탄 엘리베이터에 윤정과 정은이 급하게 탔다. 그리고는 도화에게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걸어왔다.
“그 건물주죠? 그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네.”
“또 회사에 온 거예요? 어딘데요?”
“그걸 알아서 뭐하게요?”
도화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그거야 그 잘난 얼굴 한 번 더 보게요.”
“이 대리님 방금 우리들 반응에 질투한 거죠?”
정은이 도화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네?”
“남자들 은근 잘생긴 남자한테 질투 많던데.”
“하하.”
도화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그 잘생긴 건물주는 어디서 이 대리님 기다리고 있는데요?”
“왜요, 팬클럽이라도 가입하시게요?”
도화가 자신에게 달라붙은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까칠하게 답했다. 하지만 두 여자는 도화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멀리서만 볼게요, 네?”
“아니, 그건 제가 허락할 일이 아니잖아요. 구경거리가 되는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이라고요.”
도화가 두 사람을 겨우 떼어 놓고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익숙한 검은색 중형차가 보였다. 도화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익숙한 차로 들어왔다.
“도명 씨, 안녕하세요.”
“하루 두 번 꼬박 보는 사이인데 인사 꼬박꼬박 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요. 오늘은 만난 곳이 익숙하지 않은 장소니까요.”
“시간 애매한데 외식하고 들어갈까요? 왜요 또, 토론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에요?”
“아니요. 그건 제가 그날 회사 일로 기분이 안 좋아서 예민하게 군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도화는 이렇게 도명에게 두고두고 되새김질 당할 줄 알았으면 쓸데없는 일로 괜히 발끈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화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뭐 먹고 싶어요? 평소 좋아하는 식당은 많은데 이번엔 예약 안 했어요. 도화 씨한테 퇴짜 맞을까 봐. 예약해놓고 등장하지 않는 무례한 사람이 될 순 없잖아요. 혼자 가기도 모양도 안 좋고.”
“아, 음 사실 아까 낮부터 생각난 게 있긴 한데, 도명 씨가 못 먹을까 봐요. 생긴 것도 그렇고 또 지방이 많아서 몸매 신경 쓰는 도명 씨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괜한 걸로 겁주지 말고 일단 말해 봐요.”
“도명 씨, 곱창 먹을 줄 알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문제는 저는 아는 단골집은 없어요. 도화 씨가 알고 있는 가게 있으면 내비에 찍어요.”
“아, 도명 씨 곱창 먹어요?”
“네.”
“표정은 별로인 것 같은 표정인데요.”
“먹을 줄 아니까 걱정 말아요. 그냥저냥 먹어요.”
“아 그러면 도명 씨 단골집에 갈까요? 알잖아요. 저 뭐든 맛있게 먹는 거.”
“아는데 곱창 먹어요. 낮부터 생각났다면서요. 그러면 먹어야죠.”
“저, 도명 씨가 그다지.”
“저기요. 도화 씨. 그동안 제가 도화 씨랑 식사하면서 음식을 즐긴 줄 아세요?”
“그럼요?”
“도화 씨, 맛있게 먹는 모습을 즐긴 겁니다. 그러니, 제 앞에 놓인 음식이 뭐가 중요해요? 못 먹는 음식만 아니면 되죠.”
도명의 말에 도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도명이 자신에게 고백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설렜다.
“하하, 무슨. 제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도화가 민망함에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네.”
“네?”
“그렇다고요.”
“아 음, 도명 씨가 제 부모도 아니고.”
도명이 대꾸도 없이 도화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어서 목적지나 찍으라는 눈치였다. 목적지로 향하는 중간에 도화가 아까는 차마 쑥스러워서 못했던 말을 겨우 꺼냈다.
“고마워요.”
도화가 이제야 아까 말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읊조리듯이 말했다.
“네? 뭐가요?”
도명이 도화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난 탓이었다.
“그, 제가 먹는 모습 좋다고 한 거요.”
“아.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인사치레까지 합니까.”
“대단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아니 대단한 일이지만, 아 그러니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도 도명 씨가 저를 꽤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돼서 고마워요. 아 물론 도명 씨는 사람 챙기는 습관 일 수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느낀다고요. 친절의 무게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하고 꼭 같지는 않으니까요.”
“소중해요.”
“네?”
“그거 사람 챙기는 습관도 아니고, 도화 씨가 소중한 거 맞아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살짝 놀라자 도명은 불편한지, 기분이 좋은지 모를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샐쭉하게 내밀었다.
도명은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간 심장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가 지금은 도화를 태우고 운전 중이었다.
도명은 갑자기 도화에게 회사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딱히 도화가 일부 이해를 못 하고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화제를 돌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